단편 설교

세렛 시내를 건너 온 자들

정낙원 2011. 4. 24. 02:01

 

 

세렛 시내를 건너 온 사람들 (2:13-25)

 

2:13-15.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2:24-25.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죽음에 쫓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을 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본능적으로 자기 몸을 챙기고 살고자 합니다.

 

그 누구도 죽는다는 소리를 하면 재수 없다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병으로 골골하는 사람에게도 오래 살라고 해야 좋아합니다.

듣는 사람도 그 말이 진심이 아닌 줄 알지만 그렇게 말해주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아무리 나쁜 인간도 죽어서 천당 간다고 해야 좋아하지 지옥간다고 하면 싫어해요.

 

속된 말로 못 생겨도 잘생겼다고 해 주어야 좋아하고!

죽을 병에 걸려도 금방 완쾌한다고 하여야 좋아하고!

늙어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에게도 오래 산다고 해 주어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를 긍정해 주고 칭찬을 해 주어야 좋아라 합니다.

 

옛 말에 개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에게 있어 천국이란 관념의 세계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생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생에 집착하면 자연히 죽음은 싫어지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은 모든 생명을 가진 자들의 공통된 모습이에요.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입장에서 산다는 것만큼 중요하고 귀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이 두려움을 어찌 쫓아낸단 말입니까?

두려움 없는 삶은 없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떨쳐 내는지 상고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힌트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들에게 이 두려움을 쫓아내게 하셨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2:13-15.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2:24-25.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어 오시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광야 길을 행진하는 이스라엘에게 광야 주변에 진치고 살아가는 모압이나, 에돔이나, 암몬 족속들의 지경을 탐내지 말고 싸우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땅을 통과할 때는 종용히 지나고 행여 목마르면 돈을 주고 물도 사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들과 싸우지 말라는 것은 너희들이 살 땅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이라는 땅을 주셨어요.

이스라엘의 땅은 따로 정해져 있으니 남의 땅은 탐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너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반된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의 땅을 탐내지 말고 그들과 싸우지도 말라고 하시다가 세렛 시내를 건너자 이제는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24절을 보면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쉬운 말로 지금까지는 구경만 하다가 이제부터 싸우라는 겁니다.

네 손에 붙였으니 싸워서 빼앗으라고 합니다.

 

비로서 네 손에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네 손에 붙여 주었다는 말은 싸우면 이기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전쟁에 이기듯이 너희는 싸우는 척 흉내만 내면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라면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어떨 때 누워서 떡 먹기입니까?

그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만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으면 전쟁하지 못해요.

 

여기에 믿음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믿음으로 드러나려면 믿을 수 없는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는 상태인데 믿어져야 믿음인 겁니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께선 믿음으로 일을 하실 때에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질 수가 없는 환경 속으로 밀어 넣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으면 뒤로 나가자빠지는 겁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우린 우리 생각에 믿을 수 있어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자기 계산에서 얻어낸 확신이에요.

인간의 이성은 자기 계산으로 확신이 와야 믿는다고 해요.

그러니 인간들이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자기 확신인 겁니다.

 

확신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설명으로 이해시킬 수가 없어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음이 오면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에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달랑 강() 하나 건넜을 뿐이에요.

강을 건너면서 수퍼맨이 된 것도 아니에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그런데 싸우래요.

싸워서 그 땅을 빼앗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과, 건너고 난 후가 무엇이 다른가요?

인간은 변한 것이 없는데 서 있는 장소가 강 이편과 강 저편이라는 장소만 다를 뿐이에요.

한 마디로 영역의 이동만 일어났을 뿐입니다.

 

강 저편에 있을 땐 두려움으로 살았는데,

이제 강 이편으로 왔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본능적인 겁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두려움을 없애 주겠다는 말입니다.

말을 그대로 받으면 강 저편에 있을 땐 죽음이 두려웠는데,

강 이편으로 건너오고 보니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두렵지 않으려면 두려워하는 인간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곤 두렵지 않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 말을 곰곰히 새겨 보면 세렛 시내를 건너오면서 두려움에 떠는 인간은 죽었고,

이제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렛 시내에 무슨 큰 의미가 숨겨져 있음이 느껴지지요.

맞아요.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넜다는 것엔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밀을 오늘 캐 봅시다.

 

일찍이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알려 줍니다.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14.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애굽에서 배워온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애굽에서 배운 하나님은 자기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에요.

온화하고 자상하고 나만 사랑해 주는 따스한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어요.

죄 아래 있는 나를 저주하고 죽이고 빼앗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전쟁을 벌리시는 대상이 나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암튼 애굽에서 자란 이스라엘은 전쟁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 줍니다.

홍해 바다에서 싸우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니 너희는 가만히 구경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운다는 겁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싸워 주신다는 거에요.

너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여호와가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 일이 믿어지기 위해선 반드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인간이란? 자기 손에 잡힌 것을 믿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혀야 잡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싸워도 내가 싸워서 이겨야지 누가 대신 싸워준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아요.

이게 애굽식 사고에요.

 

그러나 천국의 사고는 하나님이 다 해 주시는 것을 믿고 사는 곳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낸 것은 광야에서 애굽식 사고를 빼내고 천국에 사고를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는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어요.

하지만 광야에 나와서는 하늘에서 주는 것을 받아먹고 살았어요.

하늘에서 주는 것을 하루하루 받아먹고 살려면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일에도 모래도 글피도 하나님은 반드시 만나를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이틀 치씩 사흘 치씩 모아두어야 안심이 되어요.

 

모아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안 주면 어떻게 할까라는 의심이 들면 불안해요.

인간은 불안하면 그 불안을 해소하여야 합니다.

그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자기 손에 붙잡고 모아두는 것입니다.

 

마치 여자들이 남편에게 여보 나 돈 좀 주세요!
그러면 남편이 알아서 내일 아침에 줄게!

아니야! 지금 줘!
그리곤 남편의 지갑에 있는 돈을 자기 지갑으로 소유권을 이전시켜 놓아야 안심하고 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 지갑에 있어야 내 돈인 겁니다.

남편의 마음이 아침에 어떻게 변할지 어찌 압니까?

그러니 자다가 말고 기어코 자기 지갑으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이게 애굽식 사고에요.

 

이스라엘의 광야는 이런 애굽식 사고를 죽이는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넌 사건은 민수기 21장을 보면 놋뱀 사건이 있고 난 후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성령이 모세에게 감동을 주어서 성경을 기록할 때 놋뱀 사건 이후에 세렛 시내를 건너는 사건을 배치해 둔 것은 세렛 시내를 건넌 사건은 놋뱀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놋뱀 사건이 뭔가요?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는 자들을 살리려고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원망하였나요?

길도 함한데 애굽의 음식을 안 준다고 원망했어요.

애굽에서 건져냈으면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어야지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이럴 거면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데모하다가 일어난 사건이에요.

 

애굽과 비교하면 광야는 글자 그대로 지옥인 겁니다.

죄인에게 지옥은 죄의 근성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에요.

죄인의 근성대로 사는 것이 죄인에겐 천국이에요.

그러니 자기들 마음대로 살게 해 달라는 거에요.

가나안도 싫으니 제발 괴롭히지 말고 이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런 인간을 가나안에 집어넣어 보아야 거기서도 데모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서 다 보내서 죽게 만든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놋 뱀을 장대에 높이 달게 하여서 누구든지 그 놋 뱀을 쳐다보는 자들은 다 살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 놋 뱀 사건을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되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들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것이 되고 마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놋 뱀 사건은 애굽의 사람들이 모두 죽는 것과 같은 겁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애굽의 인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다 죽고 광야에서 난 2세들이 지금 세렛 시내를 건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114절에선 이 일을 여호와의 전쟁기라고 말하고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행한 전쟁을 일컬어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가 용사가 되셔서 싸우는 전쟁이란 말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이세요.

그럼 구약의 여호와의 전쟁은 예수님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전쟁을 하셨나요?

 

마귀와 전쟁을 하셨지요.

죄와 사망과 싸웠지요.

이걸 흔히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이 싸운 전쟁은 모두가 영적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을 하시면서 너희는 가만히 구경만 하라고 하셨어요.

너희들은 내가 싸워서 이겨 주면 그 혜택만 누리면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도 자기들 힘으로 싸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가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만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모세의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후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의 기간을 38년이라고 말해주고 있지요.

그러니 광야 38년 동안 이스라엘의 적들을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셨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군사가 되어서 싸운 겁니다.

 

광야에서의 38년 동안은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는가 구경 하는게 신앙이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38년 동안 구경만 하고 살았어요.

광야에서 38년 동안 자기 힘으로 싸운 적도 없거니와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지어서 밥을 해 먹은 적도 없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만 먹고 여기까지 왔어요.

우물도 판 적이 없어요.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어요.

광야에서 38년 동안 백수처럼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만 먹고 마시면서 살아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너자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구경만 했지만 이제부터는 싸우라고 합니다.

이젠 직접 군사가 되어서 싸우라고 하세요.

아니 군사 훈련을 한 번도 받은 적도 없는데 어찌 싸운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어디 무기가 있기나 합니까?

없어요.

 

세렛 시내를 건너오자 38년 동안 알아온 하나님이 아니에요.

다른 하나님인 것입니다.

지금까진 앞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던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 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이 어렸을 때는 온갖 것을 다 해 주시다가 대학을 졸업하자 이제부턴 부모가 주는 것으로 먹고 살려고 하지 말고 네 밥벌이 하라는 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안 하고 집안에서 빈둥거리고 놀면 내어 쫓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지금 내가 광야 38년 동안 너희들 뒷 치다꺼리 해 주었으니 이제부턴 너희들이 스스로 개척해 가라는 것입니다.

세렛 시내를 건넘과 동시에 구경꾼에서 군사로 탈바꿈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이는 세렛 시내를 건넜다는 겁니다.

 

너 이제 어른이잖아!

이건 한 마디로 넌 이제 다른 인간이란 말입니다.

이제부턴 싸우는 군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싸울 능력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렛 시내를 건넌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세렛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세렛이란 말은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내란 말은 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렛 시내를 건넜다는 말은 두려움의 강을 건넜다는 말이 됩니다.

두려움의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이제부터 두려움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24절에선 세렛 시내를 건너고 아르논골짜기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아르논이란 말은 급류라고 하는데 이는 급한 물이 흐르는 강이란 뜻입니다.

세렛 시내는 건너고 아르논에 진을 치니까 큰 장마 비가 온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세렛 시내를 건너고 난 후에 큰 장마비를 맞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물세례를 받고 난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물 세례와 같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하였지요.

이는 급류라는 뜻을 가진 아르논 골짜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다른 사람이 되어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그러니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물세례는 아담 안에서 난 자가 죽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예수 안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조상이 바뀐 것입니다.

세렛 시내를 기점으로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에는 아담이 조상이었는데,

아르논 골짜기에 진을 치고는 예수님이 조상이 된 것입니다.

강 저편에서는 아담 안에서 난 육에 속한 옛 사람이었지만,

강 이편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영에 속한 새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강 저편에 속하였느냐!

강 이편에 속하였느냐!

어느 쪽에 서 있느냐!

 

강 저편은 죽음의 동네에고, 강 이편은 생명의 동네란 뜻입니다.

강 저편은 두려움이 있는 곳이고, 강 이편은 두려움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두려움이란? 우리의 조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 있느냐로 일어나요.

아담 안에 있으면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쫓기게 되고, 예수 안에 있으면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세렛 시내를 건넌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이 됩니다.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마귀의 상징인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은 그냥 강 이야기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그 강을 건너 온 것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어떤 계시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으로 풀어지겠지요.

맞아요.

 

그냥 강 하나 건너 온 것이 아니에요.

다른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곧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럼 성도들도 강 저편에 있을 때와 강 이편에 있을 때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렛 시내를 건너 온 것은 마치 홍해바다 이쪽과 저쪽을 연상케 합니다.

 

요단강 이쪽과 저쪽을 말하는 것과 같아요.

홍해바다 저쪽은 애굽 즉 세상 나라이고 홍해바다 이쪽은 가나안 곧 천국이에요.

홍해바다 저쪽은 어둠이며 죽음이고 이쪽은 빛이고 생명이에요.

 

알다시피 홍해바다나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바울은 홍해바다 건너 온 것을 세례라고 하였어요.

세례는 곧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죽음의 바다를 건너온 것입니다.

그럼 세렛 시내가 두려움의 강이라고 하였으니 곧 죽음의 강을 건너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이고 신약은 실상이에요.

그러므로 구약의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신약에선 실상으로 찾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풀어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을 신약에선 영적 의미를 찾아야 해요.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이란 뭔가요?

단연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강을 건넜다는 말입니다.

 

2:13-15.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14.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위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을 한 후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을 하고 난 후 38년 동안 광야 길을 헤매다가 지금 이르게 되었습니다.

 

광야 38년 동안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출애굽 1 세대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럼 지금 세렛 시내를 건너는 자들은 광야에서 난 2 세대들이란 말입니다.

불순종하던 자들이라는 말은 곧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38년 동안 믿음이 없는 자들을 추려내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세렛 시내를 건넌 자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도 죽어야 할 사람이 있고 살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이를 다른 말로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에 사람은 옛 사람을 말하고 건넌 후의 사람은 새 사람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세렛 시내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고 새 사람은 예수 안에 있어요.

이걸 사도 바울 식으로 말하면 아담 안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어요.

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듭난 에요.

 

강 저편에선 예수가 내 바깥에 있었는데,

강 이편에선 예수가 내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어떻게 내 바깥에 있던 예수가 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는가요?

이는 성령의 오심으로 가능해졌어요.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을 신약 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강 저편에 있을 땐 하나님이 바깥에 계셨는데 강을 건너오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세렛 시내란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죄와 사망에 두려워 벌벌 떨고 원수와 싸울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인데 새 사람은 죄와 사망으로 벗어나 이젠 원수들과 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강 저편에는 죽음이 쫓기는 오합지졸이었는데,

강 이편에선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긴 강한 군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세렛 시내를 건너자 말자 이제는 적군을 붙여 주실테니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다른 인간이 되었으니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처럼 죽음에 질질 끌려다니는 그런 인간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제부터 죽음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니 담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싸우라 하지 않았어요.

싸우라 명령하지 않은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싸우라는 말은 힘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신약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망해 봅시다.

신약에 보면 38년 된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 각색 병든 자들이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에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30년도 아니고 40년도 아닌 38년 된 병자를 등장시켰을까요?

이는 구약에서 38년이라는 기간의 어떤 사건을 계시(啓示)사적으로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구약의 사건을 예수님이 하시는 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옛 언약을 새 언약 안에서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의 사건을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에 속한 사건을 예수님 앞에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38년의 사건을 신약에 38년 된 사건으로 배치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이 38년 만에 세렛 시내를 건넌 사건이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받는 사건은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의 세렛 시내를 건넌 사건이 베데스다 못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베데스다 못에 전설(傳說)이 있습니다.

그 못에 가끔 하늘에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누구든지 그 어떤 병에 걸렸든지 간에 그 물이 살아 움직일 때 들어가기만 하면 나음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이 그 못가에 진을 치고 천사가 물을 동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 동안 한 번도 스스로 일어나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그가 베데스다의 못가에 와 있기는 하지만 그 못에 들어가 나음을 얻기란 그림의 떡입니다.

왜냐하면! 설령 천사들이 내려와 그 못에 물을 동하게 한다 하여도 스스로 그 못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38년 돤 병자가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려면 최소한도 자신을 그 못에 넣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독자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고 누군가가 넣어 주여야지만 합니다.

이건 우리 죄인들이 모습입니다.

 

죄인의 한계는 죽음에서 살아날 길을 알려주어도 그 길을 갈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 내 말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우린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죄인에게 영생이란 그림의 떡인 겁니다.

 

38년 된 병자의 병 고침을 구원이라고 합시다.

그럼 38년 된 병자가 구원받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누군가가 외부에서 도와주어야지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38년 된 병자에게는 물의 동함보다 자신을 그 물이 동할 때 그 못에 넣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오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나음을 입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 못가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38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였는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스스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엔 독자적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 된 병자 이야기는 옛 언약 이야기입니다.

옛 언약 하에선 영생의 길을 알아도 그림의 떡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율법을 다 지켜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길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완전하게 지키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100%로 완벽하게 지키면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도 그 앞에선 무기력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38년 된 병자와 같이 물이 동할 때 들어가면 낫는다는 것을 뻔히 눈앞에서 보고도 들어 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몸이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인의 한계에요.

우리 죄인들의 실상에 이러합니다.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죄인은 정답을 알려주어도 그 정답대로 살아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죄인들에게 있어 구원은 그림의 떡이고 38년 된 병자처럼 무기력하게 구경만 할 뿐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의 그림으로 오버랩을 시켜봅시다.

신약의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입은 사건을 구약의 세렛 시내를 건넌 사건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38년 동안 무기력하게 살아왔습니다.

마치 38년 된 병자와 방불한 모습으로 살아왔어요.

출애굽한 후 38년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는 삶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야지 하면서도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왔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온 38년간의 광야 길은 마치 기아에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처럼 파리가 콧등을 간지럽혀도 그 파리를 쫓아낼 힘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38년 동안 광야 길을 무기력하게 걸어온 구약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38년 동안 무기력하게 살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갑자기 힘을 얻어서 강한 용사처럼 일어나 뛸 수가 있었던 것이나!

38년 동안 무기력하게 이방나라를 두려워하던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너고 난 후 갑자기 용사가 되어서 이방인과 싸우게 된 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38년 만에 건넌 세렛 시내는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난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어떻게 세렛 시내가 예수님을 모형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렛 시내가 예수님을 모형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렛 시내를 통과함으로서 무기력하던 자들이 용사로 돌변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큰 능력을 받은 것과 상통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싸울 힘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럼 신약에서 성도가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그 능력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세렛 시내의 의미를 포착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 권력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살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여 살았어요.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자랑하면서 따라다녔지만 막상 자기 앞에 죽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우자 연약한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거동락하였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죄와 사망 권세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참소하면 꼼짝없이 당하고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하늘로부터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합니다.

아까 아르논 강을 급류라고 하였지요.

그러니 이스라엘에 급한 물 속을 지나온 것입니다.

이건 마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함 성령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암튼 제자들에게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난 후 갑자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죽일테면 죽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두려워서 벌벌 떨던 그 제자들이 아닙니다.

유대교 율법주의라는 거대한 마귀의 세력과 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우린 성령이 임하기 전엔 죄와 사망 권세를 두려워하였어요.

육신이 이끄는 대로 무기력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그 뜻대로 살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싸울 힘이 생긴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싸울 능력이 생긴 겁니다.

여기서 죄를 이기고 육신의 소욕을 완전히 물리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대항할 능력이 생긴 거에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 인간의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했습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였어요.

두려움으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도리어 소망이 생긴 겁니다.

성령이 두려움을 몰아낸 것입니다.

 

두려움이 왜? 생깁니까?

이는 죽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살고자 할 때 엄습합니다.

자기가 자기 목숨을 지키고자 하니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나는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된 것입니다.

라는 인간이 사라졌어요.

예수 안에서 에요.

예수 안에선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그러니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가 율법으로 참소하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마귀의 참소를 이겨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능력이 나왔는가요?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모습이 달라진 것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과 건너고 난 후의 모습과 방불합니다.

그러므로 세렛 시내를 건넌 이스라엘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 제자들이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은 갑자가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자 이 놈들이 낮술에 취하였느냐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엔 두려워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은 술에 취한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것뿐인데 이렇게 달라진 겁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에겐 강 건넘이 능력이고, 신약의 성도에겐 성령 받음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렛 시내를 건너고 아르논 골짜기에 진을 친 것은 곧 성령 강림 사건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비유할 수가 있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세렛 시내를 건넌 것은 곧 신약의 오순절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그림이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성도들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셨지요.

 

성령이 임하자 죽었던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어요.

소망 없던 자에게 소망이 생기게 되었어요.

황량한 광야와 같던 마음에 성령이 임하자 마음 구석 구석으로 한 시내가 흘러서 가는 곳마다 열두 과실을 맺는 비옥한 땅으로 변화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성령이 지은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온 세상을 적시고 과실을 맺게 한다고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성도의 마음이 성전이 되었어요.

성령께서 성도의 심령에 에스겔이 보았던 그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 난후 살아났듯이 성도의 심령에 성령이 임하자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심령 속에 생명의 열매들을 주렁 주렁 열리게 하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온유와 절제와 관용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같은 것들이 맺히게 되었어요.

예전에 볼 수 없는 것들이 성도의 삶 속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성령이 성도 안에서 이러한 열매들을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강을 건너온 자들의 삶에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오는 자가 세렛 시내를 건넌 자이고 오순절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이제 성도 안에 성령이 군대장관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기 전에 군대장관이 나타나서 이 가나안 전쟁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직접 하신다고 하셨듯이 지금은 성령(예수님)이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되셔서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싸운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싸워주십니다.

이걸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또는 붙이시매 전쟁이라고도 해요.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24-25.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30-37.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으니라 31.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비로소 시혼과 그 땅을 네게 붙이노니 너는 이제부터그 땅을 얻어서 기업을 삼으라 하시더니 32. 시혼이 그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붙이시매 우리가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모든 백성을 쳤고 34.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 오직 그 육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붙이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에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취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무릇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가기를 금하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들입니다.

 

오늘부터

이제부터

비로서

붙이노니

붙이시매라는 말들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들입니다.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에는 싸움에 졌는데 이제는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우라는 거에요.

지금까지는 여호와께서 싸워주시는 것을 구경만 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적군을 붙여 주실테니 싸우라는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성령이 안에 와 계시니 싸우라는 겁니다.

죄와 싸우라고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육신의 소욕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이기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을 하는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에는 남의 땅이라고 하면서 빼앗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세렛 시내를 건너고 나자 이젠 땅을 빼앗으라고 합니다.

 

이는 세렛 시내 즉 강을 가운데 두고서 땅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오기 전에 땅은 에서의 후손에게 주었다고 하면서 그 땅은 탐내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곤 강은 건너오고 난 후 가나안 땅은 이젠 적극적으로 빼앗으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전쟁을 해서 거기 사는 족속들을 진멸시키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에서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강 저 편 땅은 이 세상을 말해요.

즉 에서처럼 저주받은 육에 속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들은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에요.

그러니 땅에 속한 자들의 땅을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세상 것 탐내지 말라는 겁니다.

 

에서는 저주받은 자들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적용하면 에서는 우리 옛 사람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진멸 당할 대상이에요.

이러면 우리 안에도 두 땅이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우리 안에 천국과 지옥이 혼재되어 있어요.

천국과 지옥이란 영과 육이란 말입니다.

영은 하늘의 것을 지향하고 육은 땅의 것을 지향해요.

 

옛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이에요.

이러한 것들은 탐내면 안 되어요.

새 사람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요.

이건 탐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은 장차 다 불타버릴 것이에요.

우리가 살 땅이 아니에요.

그러니 땅에 속한 것들 즉 육신의 소욕들을 탐내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으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갈 땅은 하늘에 있어요.

땅이라 하지 말고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으로 말합니다.

옛 사람이 지향하는 소욕이 있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지향하는 소욕이 있어요.

육신의 소욕은 땅의 것을 추구하고 성령의 소욕은 하늘의 것을 추구해요.

 

그러니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싸우라는 말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은 전부 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하여도 다 저주받을 쓰레기란 말입니다.

이런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겁니다.

 

이걸 구약에선 땅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나안 땅은 자연히 에서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땅과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은 하늘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강 저편은 저주받은 이 세상을 말하고,

이스라엘이 살아갈 가나안은 축복의 땅 곧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걸 이제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하나님의 원수는 마귀에요.

그런데 그 마귀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들이에요.

마귀가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곧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원수에요.

진멸 대상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에 가나안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맞아요.

우리 안에 가나안 땅이 있에요.

우리 안에 가나안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도 죽음의 강을 건너왔어요.

세례에요.

세례는 곧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우리 안에 천국을 주셨어요.

즉 가나안 땅인 겁니다.

우리 안에 주신 천국은 우리가 싸워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싸움을 하게 하세요.

그러니 지금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서 가나안 전쟁을 치르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軍士)라고 하였어요.

군사란 싸우는 자에요.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옛 사람과 싸우는 자에요.

자기 안에 죄와 싸우는 겁니다.

예전에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이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니 일방적으로 당하지 말고 싸우라는 거에요.

 

이스라엘의 싸움은 모두가 믿음의 싸움에 예표들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우리 안에 옛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한 것입니다.

내 안에 적이 있어요.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옛 사람이 있어요.

이들과 싸워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도 우리 안에서 가나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과 마귀는 우리 몸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치열하게 다퉈요.

우리 몸은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그 속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이기면 죄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고 성령이 이기면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 충만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에요.

그럼 천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천국에 모형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넣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는 자만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가 있어요.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이는 가나안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고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두려움 없이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신약에선 천국이 성도의 심령에 임하였습니다.

그럼 성도의 심령이 곧 가나안이란 말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천국이란? 장소적 개념보다 통치적 개념으로 말하고 있어요.

 

구약의 가나안 땅이 비어있지 않고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듯이 성도의 심령 천국도 비어 있지 않고 옛사람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과 싸워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싸워주세요.

 

신앙생활이란? 자기 안에 있는 옛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옛사람이라는 원주민을 몰아내지 않으면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를 봅시다.

 

2311-13.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12.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13.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고 난 후 유언으로 너희들이 남아 있는 원주민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어 가시와 채찍같이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않고 조금 남겨 두었어요.

 

이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해서 육신의 소욕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듯이 성도 안에도 옛 사람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 옛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괴롭혀요.

바울도 동일하게 말하였어요.

 

31-10.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6.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8.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10.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땅엣 것과 싸우라고 합니다.

거듭나서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필연적으로 육신의 소욕과 싸우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싸움을 하게 하세요.

누구든지 싸워서 이겨야 천국을 맛보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옛 사람이 이끄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사람의 소욕대로 살아선 안 된다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노란? 하나님의 징계를 말해요.

 

124-6.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5.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옛 사람의 소욕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가하시는 것입니다.

왜 징계를 가하시는가 하면 의와, 거룩과, 진리가 훼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옛 사람을 몰아내지 않으면 새사람이 고통을 당해요.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싸움은 역설적이에요.

사도바울은 성도의 삶이란 한마디로 세상과 역설적이라고 하였어요.

 

고전 410-13.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11.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13.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나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나는 비천하되 너희는 존귀하고!

나는 후욕을 당하되 너희를 축복한다고 합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에요.

십자가 정신은 나를 죽이는 겁니다.

 

내가 죽고 남을 살려내는 것이 새 사람이 싸워야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옛 사람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성령이 우리 안에서 싸움을 하게 하세요.

성령이 육신의 소욕과 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없을 때는 죄를 이기지 못했어요.

싸울 수도 없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엔 달라요.

이젠 싸울 힘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렛 시내를 건너자 오늘부터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주민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게 해 줄테니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의 세렛 시내를 건넘은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심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위 말씀을 보면 오늘부터 천하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두려워하게 하리니 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에게 두려워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렛 시내를 건너면 먼저 이스라엘에게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시고 상대적으로는 적들에게는 약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건 강 저편에서의 상태와 완전히 반대가 되는 현상이에요.

 

이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마귀가 큰 소리치고 살았어요.

귀신들이 사람들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자 귀신들이 먼저 알아보고 왜 왔느냐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두려워했어요.

 

이러한 현상이 그대로 성도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 예수님(성령)이 들어오시면 우리 안에 있던 옛 사람이라는 귀신이 난리를 쳐요.

이제부터 성도를 옛 사람의 소욕대로 살아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성령)이 자꾸만 제동을 걸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자 마귀가 비상이 걸렸어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마귀가 마음대로 우리를 갖고 놀았어요.

우리도 마귀가 시키는대로 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자 태클이 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이 제동을 걸기 시작을 한 겁니다.

 

죄를 지어도 예전처럼 그렇지 않아요.

뭔가 찜찜해요.

예전에는 죄를 지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는데 이젠 이상하게 찜찜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죄 짓고 사는 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에요.

 

죄를 인 짓고 산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 대한 거부 반응들이 나타나서 싫어하고 멀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죄를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적당함이 없는 자는 성령이 없는 자에요.

 

바울은 성도 안에 예수의 마음이 심겨졌다고 하였어요.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암탉이 알을 품듯이 품어서 새 사람의 소욕을 부화시키라는 말이에요.

즉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충만케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마음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날마다 정과 욕심을 죽이게 하세요.

 

정과 욕심이란? 자아 숭배 사상이에요.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을 죽이는 겁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좌 택함을 버리고 도리어 말석에 앉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낮아지고자 하는 마음이에요.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고 섬기는 마음이에요.

이 마음이 우리 안에 심겨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악세서리가 아니에요.

십자가 도는 지식이 아니에요.

예수의 살과 피는 그림의 떡이 아니고 실제 양식이에요.

실제 양식이기 때문에 그 양식을 먹은 사람은 실제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요.

 

이게 삶으로 나타날 땐 역설적으로 나타납니다.

살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으뜸 되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 낮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섬김 받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 섬기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나 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에 모습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서 엿볼 수가 있어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비천하고, 후욕을 당하고 희생당하여도 좋다고 해요.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당하는 수욕은 수욕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자식 하나 잘 된다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에요.

오직 자식만 잘 된다면 부모는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랑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부모처럼 우리를 위해 수욕을 당하셨어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모욕과 핍박을 당하셨다구요.

 

바울은 이걸 좀 알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18.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헤아리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어요.

감사가 사라져요.

왜냐하면! 육신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은 본성과 거스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남에게 이겨야 이긴 것이 되는데 하나님은 짐으로 이기라고 하세요.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데 지게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세례요한처럼 나는 쇠하고 예수는 흥하여야 하는데 우린 내가 흥하고 예수는 망하게 하잖아요.

실제로 복음 복음 하면서도 나를 챙기고 있잖아요.

예수를 믿는 나를 사랑하잖아요.

우린 예수를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이 몸뚱이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믿음이 우리 본성과 역행하며 살게 하니 싫은 것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좋은데 도리어 내가 남을 섬기려니 싫은 겁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기분이 좋은데 도리어 낮은 자리에서 종노릇하자니 괴로운 것입니다.

본성을 거스리는 삶이란 싫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품으라는 말은 이미 와 있다는 말이에요.

심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심겨져 있는 것을 죽이지 말란 말입니다.

이걸 상령의 소욕을 거스리지 말라!

또는 성령은 근심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싸움인 것입니다.

결국 내 안에서 십자가 사건들이 늘 재현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그 어떤 환경도 그 어떤 것도 다 이길 수가 있어요.

죽고자 하면 이겨요.

 

안 된다!

못한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기도록 해 놓았어요.

성도는 자존심이라는 세렛 시내를 믿음으로 건넌 자들이기 때문에 다 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 사도들은 그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기며 살았어요.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기며 살았어요.

그들과 우린 성정(性情)이 같아요.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우리나 모두가 동일한 성령을 받았어요.

 

사도들이 받은 성령은 고급한 것이고 우리가 받은 성령은 저급한 것이 아니에요.

2천 년 전 성령이나 지금 성령이나 동일해요.

모두가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보내 주신 부활의 영이세요.

죽음에서 이기게 하는 영이란 말입니다.

그 부활의 영이 우리 가운데 와 계세요.

성령은 지고도 이기게 하는 영이세요.

 

성령은 어느 시대이나 동일해요.

바울 속에 거하시던 그 성령이 지금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십자가 정신으로 살게 하신 성령이라고 한다면 우리도 십자가 정신으로 살게 하세요.

성령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비워 살게 하였다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며 살게 하세요.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이미 수고를 마치고 천국에 가 있는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에게 이기라고 응원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세요.

너희들처럼 죽임당하여야 할 동무들의 숫자가 다 차기까지 기다리자고 합니다.

우리가 바로 죽임당하여 그 숫자에 찰 그의 동무들인 겁니다.

이들이 바로 앞서간 두 증인들이에요.

우리도 저들과 같이 죽임 당하여야 할 두 증인들이에요.

 

성령이 폼으로 와 계시지 않아요.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도우라고 하나님이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임한 성도는 모두가 세렛 시내를 건넌 자들입니다.

이제부터 자존심이 꺾인다고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창피한 것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에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세요.

성도는 남의 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 중요합니다.

 

육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을 하라고 세렛 시내를 건너게 한 것입니다.

육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을 하라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오늘부터!

비로서!

붙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부터 싸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예수님처럼 죽임 당함으로서 이기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실 때 이기는 자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신다고 약속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기느냐 하면 져줌으로서 이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눈물 골짜기를 통행 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흘린 눈물은 새 사람을 키워 가는 거름이고 양분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물 뿌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눈물로 키우듯이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도 눈물로 자라가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가 흘린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4.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닦아 줄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어요.

이는 성도는 반드시 눈물 흘릴 구조 속에 놓여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에요.

내 주변에도 꼭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과 배치해 놓았어요.

이게 가정이고 교회에요.

가정이든 교회이든 원수들을 배치해 두셨어요.

 

성도는 어디서든지 이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원수가 집 안에 있다고 했지요.

그 집안이 바로 내 가정이고 내 교회인 겁니다.

교회 안에 내 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그 원수를 통하여서 내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나도 상대에게 눈물 흘리게 하는 원수이고 상대도 나에게 눈물 흘리게 하는 원수에요.

우린 서로 서로가 한 형제이면서 원수로 있어요.

그래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축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바로 한 성령을 마신 예수 안에 있는 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린 죽을 맛인 겁니다.

이러한 삶을 일컬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스데반이 자기를 죽이는 자를 용서하게 하듯이 하세요.

스데반이 원수를 용서한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에요.

성령이 용서하게 만든 겁니다.

우린 이 싸움을 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어요.

왜냐하면! 이 싸움이 곧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서로 서로가 훈련 파트너에요.

고약한 파트너를 통해서 옛 사람을 죽이는 싸움을 하라고 붙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파트너를 이기려고 하지 말고 져줌으로서 이기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린 성령의 소욕대로 살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린 늘 우리 죄가 발각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어요.

 

현재 우리 안에 와 있는 천국은 눈물 흘리면서 맛보는 천국입니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맛보는 천국이에요.

희희낙락하는 천국이 아니라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천국이란 말입니다.

희희낙락하는 천국은 가짜에요.

 

세렛 시내를 건넜다고 축 환영그러지 않아요.

야곱을 죽이려고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기다리듯이 가나안엔 장대한 거인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원수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도 중무장 한 채로 말이에요.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죽을 자리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마귀에게 죽어서 천국에 오라고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이 싸움을 게을리하지 마세요.

주께서 이 싸움을 하게 하실 겁니다.

그럼 우린 죽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자기 사랑이라는 죄는 여지없이 폭로 당하고 우리는 또 다시 예수를 죽이는 자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린 죄인의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시헤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피 흘리는 전쟁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세요.

그럼 예수님을 만날 성도들도 피 뿌린 옷을 입고 마중을 나가야 합니다.

천국엔 양복 입고 가는 것이 아니고 피 뿌린 옷을 입고 가요.

 

지금 예수님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우리 안에 재림하셨어요.

우리의 군대장관으로 와 계시다니까요.

우리에게 나도 죽었으니 너희도 죽으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인도하세요.

스데반이 스스로 죽음의 자리를 만들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것 하나만 살피고 마칩시다.

이스라엘 속엔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다른 말로 계대(繼代) 결혼법이라고도 해요.

즉 가문의 대()를 이어가게 하는 제도란 말입니다.

계대 결혼법 즉 시형제 결혼법이란 형이 후손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그 형의 가문 즉 유업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문에 유업이란? 언약을 말해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삭이 이어갔고 이삭의 언약을 야곱이 이어갔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이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럼 그 예수님의 동생들이 그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언약을 12 제자들이 이어갔고!

12 제자들의 언약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어갔고!

그 언약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어요.

이 언약이 이어져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 없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들을 일컬어 히브리서 13장에선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라고 합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장자들의 죽음에 동참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가 자기 인생이 차압당하여 삭제 당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어요.

예수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형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두 증인들이에요.

 

형의 유업을 이어가게 하는 자는 자기 분깃이 없어요.

자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형수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아도 그건 형의 자식이지 자기 자식이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형의 자식만 유업을 잇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천국의 유업은 우리의 영원한 맏아들이신 예수님의 가문만 이어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의 계보만 남기겠다는 뜻입니다.

이걸 계대 결혼법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의 언약이 끊어지지 않도록 시형제 결혼법에 따라 예수님처럼 죽임당하는 자리로 떠밀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요.

 

만약 이 길을 거부하면 죽어요.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유다의 아들 오난이 있었어요.

오난은 형수 다말에게 들어가 형의 후손을 이어주어야 했어요.

그런데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고 땅에 설정을 한 겁니다.

땅에 설정 했다 함은 형의 가문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악으로 보고 오난을 죽여 버립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성도가 되어서 예수님의 운명에 연합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부인이 없는 신앙은 가짜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늘 자기 부인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나는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고 그 자리에 예수님만 홀로 남게 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삽니다! 라는 고백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결국 성도는 늘 버려지고 낮아지고 죽임당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삶 속에선 죄를 용서받고 사랑에 빚진 자로서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여기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정에서 교회에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라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겁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장악하여 죽임 당하는 자리로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 인도하실 겁니다.

이게 세렛 시내를 건너온 자들이 풀어갈 숙제에요.

 

모든 성도는 이 길을 가도록 부르심을 입었어요.

우린 우리 인생이 없어요.

예수님의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버림당하는 것만 있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는 예외없이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죽임당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성중에서 호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의인들이 피가 예루살렘 성에서 뿌림을 받습니까?

이는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형이 죽임당한 그 자리로 계속해서 밀어넣는 겁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언약을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가 또 죽입니다.

이들이 바로 두 증인들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동생들인 성도는 계속해서 교회에 예수님의 언약을 이어가게 하려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에 교회는 예수를 죽인 자들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자들이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교회는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들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생겨난 교회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천국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세렛 시내를 건너온 자들을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무기 하나 없이 장대한 거인 족들에게 붙이신 것은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아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모든 제자들이 이 모습으로 보내심을 받았어요.

제자들은 가서 다 죽었어요.

죽은 그 자리에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언약의 후손들은 의인들의 피 뿌림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세렛 시내를 건너온 자들입니다.

우리가 처한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예수님의 형제들을 살려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렛 시내를 건너게 하셔서 우리 안에 두려움을 물리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것들도 다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 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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