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그 남자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아!

정낙원 2013. 1. 19. 00:39

 

그 남자로부터 복(福)을 받은 사람아! (시 1:1-5)

 

부제 : (그 남자에게 사랑을 받은 그대는 행복한 여자이니라!)

 

 

시 1:1-6=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시대 최고의 화두는 힐링입니다.

 

힐링(healing)이란? 치유를 뜻합니다.

무슨 치유입니까?

마음에 치유입니다.

 

왜? 마음에 치유를 받아야 하나요?

너도 나도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안에 열등감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존감이 상실 되면 열등감을 가지게 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열등감은 애정 결핍으로 온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이 느끼는 불행의 근본은 사랑의 부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고자 합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 이야기가 사랑입니다.

이는 그만큼 인간들은 사랑을 결핍의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아이들이 애정 결핍을 느끼면 욕구 불만이 쌓이고 그 욕구 불만을 돌출 행동으로 표현을 해 내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혼자 있다가 엄마가 동생을 낳게 되면 이런 행동이 나타나잖아요.

 

자기가 받아야 할 엄마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고 동생을 해코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생을 해코지함으로서 애정 결핍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그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이 결국 폭력성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성이 자신에게 가해지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살도 폭력이에요.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매사에 불평을 하게 되고 남을 비판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회성으로 나타나면 사람을 해치는 범죄 행위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요즘 연일 매스컴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범죄행위입니다.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마음이 불안하고 쫓긴다는 말입니다.

전부 마음이 상해서 아프다는 겁니다.

 

마음들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 보니까 불안하고 쫓기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쫓기니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던진 화두가 힐링입니다.

이젠 마음에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스컴마다 힐링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왜? 초두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의 그림자 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곧 안에 감추어진 것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묵시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영적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곧 그 시대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습니다.

이걸 사회현상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불안하고 마음 패역하다는 말은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보여주는 그림자에요.

세상이 타락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타락하였다는 반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고 쫓긴다는 것은 교인들의 마음도 쉼을 얻지 못하고 쫓긴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모습이나 세상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요.

지금은 어디가 교회이고 어디가 세상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만큼 가치관의 혼동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모습도 대동소이합니다.

누가 신자이고 누가 불신자인지 분간이 안 가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처럼 교회 안에 교인들의 마음도 강퍅해요.

 

이 시대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도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고 힐링을 받아야 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곧 신앙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 성도들이 열심히 예수를 믿는데도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힐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영적인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 있으면 마음에 쉼을 누립니다.

그래야 마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에서 해방 될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마음이 온화해지고 다정다감해져요.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해요.

부드러워져요.

이는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는 여자는 예쁘다고 하지요.

이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사랑의 속성은 동일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는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은혜가 법에서 해방을 하기 때문입니다.

 

법에서 해방이 되니까 일체의 경쟁이 사라지고 비교도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럼 마음에 여유가 생겨요.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넉넉해지고 넉넉함에서 부드러움과 관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세요.

행복해지잖아요.

그리고 행복하면 관대해져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사도바울이 이 사랑의 힘으로 살았어요.

그러므로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마음에 쉼을 얻고 관대함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사도 바울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그런 여유로움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이는 모두가 자신이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인데 이런 자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용서를 남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에게 넘치도록 부어지니까 그 넘침이 타인들에게 전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를 찬미한다고 합니다.

성도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보여주는 자로서 부르심을 입었어요.

 

시편 1편에 나타난 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마음에 힐링을 받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福)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을 받았는지 깨달아 봅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시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 갑시다.

 

시편은 시(詩)입니다.

시(詩)를 다른 말로 찬송(讚頌)이라고도 합니다.


시편에는 “찬송과 기도” 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뻐 할 때 부르는 찬송과,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 되어 있어요.

  

야고보서 5장을 봅시다.

 

약 5:13절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기도와 찬송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 기도하고!

언제 찬송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기도하라고 합니다.

 

즐거운 자가 있느냐?

찬송하라고 합니다.

 

찬송은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기도는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찬송은 완성된 것에 대한 반응이고,

기도는 결핍에 대한 반응입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면 찬송이 술술 나오고,

마음이 답답하면 탄식과 기도가 나오잖아요.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찬송은 천국에서 하는 것이고,

기도는 지옥(세상)에서 하는 것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내 마음이 천국이면 찬송이 나오고, 내 마음이 지옥이면 기도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어떤 것이고 지옥은 어떤 곳인가요?

천국은 쉼이 있는 곳이고, 지옥은 수고하고 애쓰며 결핍을 느끼는 곳이에요.

마음에 만족함을 느낄 때는 찬송이 나오고, 마음에 결핍을 느끼고 쫓기면 기도가 나와요.

영적 만족을 누리면 찬송이 나오고 영적 결핍을 느끼면 기도가 나와요.

 

성도는 묵시에 속한 자라고 했어요.

묵시에 속한 자로서 역사에 살고 있어요.

묵시는 완성의 세계이고, 역사는 미 완성의 세계에요.

 

그럼 성도는 이미 완성된 자로서 미 완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곳에서 살고 있어요.

묵시적으로는 구원을 받은 자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구원을 받아야 할 자로 살고 있어요.

 

묵시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 살 때는 찬송을 하게 되고, 세상이라는 역사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로 살 때는 기도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면서 찬송과 기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찬송이든 기도이든 누구에게 하는가요?

하나님에게 하지요.

그럼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묶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을 겸하게 살고 있어요.

두 사이에 끼여 있어요.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어요.

찬송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시편 속의 찬송과 기도는 곧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를 찬송이고 우리가 토해 내어야 할 기도란 말입니다.

믿음에 앞선 선배들이 우리 대신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어요.

결국 시편 속에 나타난 믿음에 선진들의 찬송과 절규는 곧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찬송은 즐거운 노래이고, 기도는 슬픔의 노래에요.

찬송도 노래이고 기도도 노래에요.

찬송을 송가(頌歌) 라고 하면, 기도를 애가(哀歌) 라고 해요.

그래서 시편인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이에요.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 창조의 목적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조했다고 하나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요.

우리의 찬송이 아니고 하나님의 찬송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찬송은 내가 기뻐서 부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서 부르는 것이에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토해내는 기쁨이 찬송이에요.

우리가 토해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토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가요?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이 주어질 때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그 아들의 영광을 찬미(讚美)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6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것은 “그 아들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고 하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구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는 것이에요.

이걸 찬미라고 합니다.

 

찬미(讚美)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가 하신 아름다운 일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아름다운 일입니까?예수님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영원토록 기리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 모습이 나옵니다.

천국에 보면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 되신 예수님에게 찬송을 돌려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을 세상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하게 하셨어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고 구원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구원 받은 자들이 교회에 모여서 뭘 하나요?

예수님을 찬송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고 찬송해요.

 

이 일을 하라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성도이고, 이러한 성도들이 모인 곳이 교회에요.

하나님은 천국에서 일어날 일들을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서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장자들의 총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모습이 이 땅에서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누가 가느냐 하면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입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갑니다.

하늘나라 장자가 누구냐?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성도는 다 하늘나라 장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입고 광야로 나온 구약의 이스라엘을 일컬어 이들은 내 아들이고 내 장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입니다.

 

출 4: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장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장자인 예수라는 맏아들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장자란 예수님을 말해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했어요.

성도는 맏아들 속에서 나온 자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나요?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되었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면서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피에 만족”이라고 합니다.

피에 민족이란?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고,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사는 민족이란 말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교회가 됩니다.

 

신약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의 모임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일컬어 하늘나라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봅시다.

 

그럼 교회의 본질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곳이라고 했어요.

즉 예수님의 목숨을 주고 만든 곳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은 삼십에 팔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몸 값은 은 삼십입니다.

이는 그 당시 종의 몸값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양심에 가책을 받고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삼십을 성전에 갖다 바칩니다.

그러자 예수를 죽인 제사장들이 이 돈은 죄인의 몸값으로서 부정한 돈이라 생각하고 성전고에 넣어 둘 수가 없다고 하면서 밭을 하나 삽니다.

 

그 밭 이름을 “아겔다마” 라고 합니다.

해석하면 “피 밭”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밭” 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피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그네들이 묻힐 곳을 하나 마련해 주고 가신 것이 됩니다.

나그네가 누구입니까?베드로는 성도들을 일컬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므로 이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겐 이 세상에 것을 주시지 않아요.

 

성도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자들이에요.

그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는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이고 행인들인 성도들이 묻힐 무덤인 것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이 장사 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 온 자들은 모두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쉴 곳은 오직 한 군데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나그네들이 묻힐 무덤인 교회인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에게서는 광야로 보여 주셨어요.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을 입고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나온 광야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광야란? 애굽에 반대입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광야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광야에 나오니 애굽에서 보지 못하던 만나가 내립니다.

만나는 애굽에 음식과 다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죽여 버립니다.

 

광야는 애굽에 탐욕을 품은 자들이 죽은 곳입니다.

이는 애굽에서 난 자들이 죽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난 자들을 일컬어 신약에서는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럼 신약에서도 구약의 광야와 같은 교회에서 애굽에서 난 자들이 죽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난 자가 죽어야 해요.

아담 안에서 난 자를 일컬어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광야처럼 애굽에서 난 옛 사람이 장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은 땅 사람입니다.

땅 사람은 죄 아래서 났습니다.

죄 아래서 난 자에겐 안식이 없어요.

저주뿐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이에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상으로부터 쫓겨난 자들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안식하는 곳입니다.

세상에 것들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세상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으로부터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빼내고 하늘에 것으로 채웁니다.

하늘에 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것을 받은 성도를 일컬어 하늘에 복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복(福)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福)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은 “아쉬레이 하~이쉬”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복(福)”이란 뜻이고,

“하~ 이쉬”“그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福)이여!”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복(福)이여!” 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있는 복(福)을 받은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복(福)을 가지고 있고 복(福)을 주시는 분” 이란 말입니다.

그럼 복(福)을 가지고 있고, 복(福)을 주시는 그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복(福)이고 복(福)을 주는 그 사람” 입니다.

 

“그 사람” “하~이쉬” 라고 하는데 여기서 “하~”“그” 라는 말이고, “이쉬”“남자” 라는 말입니다.

“하~ 이쉬”를 합성하면 “그 남자”란 말이 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곧 “그 남자”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쉬”는 남자를 말하고, “이솨”는 여자를 말해요.

그럼 “하~ 이쉬” “그 사람” 으로부터 복은 받은 자여!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그 남자로부터 복(福)을 받은 여자여!” 라는 말이 됩니다.

 

그 남자로부터 복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요?

그 남자의 짝인 그 여자에요.

그럼 그 남자와 그 여자를 알아야겠지요.

 

그 남자가 누구인가요?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남자란? 씨를 주는 자를 말합니다.

씨란? 생명을 말해요.

그러니 생명을 주는 자가 남자에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럼 “그 남자”“하늘에 있는 남자”를 말하겠지요.

하늘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그 분을 말하겠지요.

하늘로부터 오신 그 분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그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누구입니까?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자기 생명을 줍니까?

자기 성도에게 줍니다.

그럼 성도가 바로 “그 남자로부터 복을 받은 그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해요.

 

저와 여러분이 “그 여자”에요.

믿어지십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남자라 하고 성도를 여자로 말합니다.

여자는 또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담과 하와에서 아담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하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자기 생명을 주듯이 예수님이 교회에 자기 생명을 주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여자를 찾아서 자기 씨(생명)를 주고자 함이에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예수님 자신을 복(福)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복(福)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 남자(하~이쉬)”로부터 사랑을 받은 “그 여자(하~이솨)는 참으로 복(福)이 있도다!” 라는 뜻이 되겠지요.

 

여기서 “하~이쉬(그 남자)” 그 사람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말을 한다면 “언약을 이루실 그 남자” 란 뜻입니다.

그럼 그 남자인 예수님이 누구에게 언약을 이룹니까?

자기 백성에게 이룹니다.

 

언약이 뭔가요?

구원이에요.

그 남자가 자기 피로 그 여자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준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약속의 후손으로 오신 그 남자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는 복(福) 된 자” 라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우리 성도들의 존재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대단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신분이 어떤 자인지를 좀 알기나 하고 살라는 말이에요.

존재와 신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이렇게 대단한 자들이니까 세상에서 조금 어렵더라도 징징거리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라는 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은 여자들이다!”

“너희는 참으로 복(福)을 받은 자들이다!” 라고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솔로몬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술람미와 같아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사랑을 준 것이에요.

이건 일방적인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에게 사랑을 준 것은 술람미의 어떤 조건을 보고서 준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술람미의 조건으로 인하여 그 사랑이 취소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술람미는 복(福)을 받은 여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福)을 받을 것이다” 가 아니고, “이미 복(福)을 받았어요.”

(福)을 받았기 때문에 복(福)에 속한 것들이 계속하여서 공급이 되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가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솔로몬 자체가 복(福)이에요.

그러니 술람미에게 솔로몬의 사랑이 계속해서 공급이 되는 것입니다.

(福)은 단회적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부어져요.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받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구원론으로 말하면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이루고 있으며,

장차 구원을 이룰 것이라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역사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표현을 역사성으로 말하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구원이 미흡해서 30% 50% 80% 100% 이렇게 점차적으로 나아진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리고 구원이 세 가지라는 말도 또한 아니에요.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묵시에 속한 구원을 역사 속에서 과거에서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계속하여서 지켜 주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신부들에게 주신 구원을 끝까지 지켜낸다는 말이에요.

 

마치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끝까지 사랑해 주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솔로몬이 지켜 내는 것이지 술람미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구원을 받았고!

구원 속에서 살고 있으며!

구원의 완성된 지점으로 가고 있어요.

 

구원은 완료이지 미 완료가 아닙니다.

완성품이지 미 완성품이 아니에요.

묵시 안에서 완료 된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점진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복(福)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씀을 동사(動詞)로 쓰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동사(動詞)란? 복(福)이 단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서 복(福)에 속한 것들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공급해 준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복(福)을 받은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 처럼 늘 푸르고 시절을 좇아서 과실을 맺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福) 속에 있는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즉 구원 속에 있는 영생에 것들을 풍성하게 누린다는 말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뿌리가 가지에게 계속하여서 진액을 공급하여서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합니다.

그 남자의 사랑이 계속하여서 그 여자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 받을 것이에요.

 

이미 받은 사랑이 있고,

지금 받고 있는 사랑이 있으며,

장차 받아야 할 사랑이 있어요.

 

이게 무엇과 같은가 하면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보살피고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복(福)을 받은 자들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자식을 보살피고 있으며, 앞으로도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로부터 계속하여서 모든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것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의 사랑을 성경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사랑으로!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으로!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그 남자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느껴보기 위해서 “그 남자”와 “그 사람” 이라는 노래를 듣고 갑시다.

가사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어서 인용합니다.

두 곡을 함께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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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더 원)

 

http://tvcast.naver.com/v/31277/list/3082 (그 사람)

 

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그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그 사람 따뜻한 입술로 내게

내 심장을 찾아준 사람

그 사랑 지울 수 없는데

그 사랑 잊을 수 없는데

그 사람 내 숨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떠나 가네요

그 사람아 사랑아 아픈 가슴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아

사랑했고 또 사랑해서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아 내 사랑아

내 가슴 너덜 거린데도

그 추억 날을 세워 찔러도

그 사람 흘릴 눈물이

나를 더욱 더 아프게 하네요

그 사람아 사랑아 아픈 가슴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아

눈물 대신 슬픔 대신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 내 사랑아

우리 삶이 다해서

우리 두 눈 감을 때

그때 한번 기억해

그 사람아 사랑아 아픈 가슴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사랑했고 또 사랑해서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그 남자 (더 원)

 

http://tvcast.naver.com/v/18285 (그 남자)

 

한 남자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 남자는 열심히 사랑합니다

매일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라다니며

그 남자는 웃으며 울고 있네요

얼마나 얼마나 더 너를

이렇게 바라만 보며 혼자

이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계속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겠니

조금만 가까이 와 조금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널 사랑하는 난 지금도 옆에 있어

그 남잔 웁니다

 

그 남자는 성격이 (소심합니다)

그래서 웃는 법을 (배웠답니다)

친한 친구에게도

못하는 얘기가 많은 상처투성이

얼마나 얼마나 더 너를

이렇게 바라만 보며 혼자

이 바람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계속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겠니

조금만 가까이 와 조금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널 사랑하는 난 지금도 옆에 있어

그 남잔 웁니다

그 남자가 나라는 걸 아나요

알면서도 이러는 건 아니죠

모를 거야 그댄 바보니까

(조금만 가까이 와 조금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널 사랑하는 난 지금도 옆에 있어

그 남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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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를 보세요.

나를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따뜻한 입술로 죽었던 내 심장을 뛰게 해 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숨 같은 사람입니다.

날 살려 주었다는 말이에요.

그 사람은 나에게 심장을 찾아 준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내 몸 구석 구석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어요.

 

이건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지니까 물결이 여울~ 되어서 온 호숫가 구석 구석에 파장을 일으키듯이 그 사람이 내 모든 세포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뭔지 몰랐는데 그 사람을 통해서 사랑이 뭔지 알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나는 그 사람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떠나갔어요.

떠난 것은 그 사람의 그 사랑을 그리워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입맞춤을 해 놓고서는 떠나가서 술람미로 하여금 그 사랑을 그리워하게 하듯이 말이에요.

 

“그 사람” 이 바로 “그 남자” 입니다.

 

이제 그 남자인 한 남자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 남자는 그림자처럼 늘 붙어 따라 다니고 있어요.

그 남자가 한 발 다가오면 여자는 두 발을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늘 운다고 하잖아요.

 

그 한 남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라는 남자가 다가오면 도망가고 있어요.

그러나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그 사랑을 쟁취해 냅니다.

 

그래서 거지같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거지같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이 아니고 아주 고약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아픈 사랑이란 말입니다.

 

사랑은 아픈 거에요.

그래서 그 남자는 우리를 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해요.

왜? 그런가요?

우리에게 자기가 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웃는 겁니다.

마치 솔로몬 왕이 술람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서 코디를 하고선 흐뭇해하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술람미는 노예이고 촌 여자입니다.

거지같은 여자에요.

매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어요.

 

그런데 솔로몬 왕이 어느 날 그를 찾아가서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주어요.

그리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줍니다.

 

그리고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코디해 줍니다.

술람미는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다 솔로몬 왕이 준 것이에요.

 

우리의 구원이 이러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것으로 전부 코디해 주셨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것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갖가지로 꾸며서 데리고 다니듯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갖가지로 꾸며서 데리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참 예쁘지! 라고 자랑을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꾸며 놓고 자기가 흐뭇해하고 있어요.

이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찬송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가 칭칭 감고 있는 예수님의 의(義)를 보시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야~ 저놈들 내가 준 옷을 잘 입고 있네! 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겁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곧잘 잊어 버려요.

마귀가 잊게 만들어요.

마귀가 미혹해서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자 하게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하고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는 겁니다.

왜? 내 사랑을 그렇게 모르느냐고!

왜? 내가 준 그 사랑을 잊고 있느냐! 고 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람의 복(福)이여!” 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했어요.

그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福)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福)이 뭔가요?

 

의(義)입니다.

죄사함이고!

구원(救援)이고!

영생(永生)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福)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유지가 되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서 복(福)을 따 내는 그런 복(福)은 없어요.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福)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복(福) 받을 짓도 애당초에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복(福)을 잃어버릴 행위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들 내 말 안 들으면 복(福) 취소 할거야! 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남자의 복(福)은 우리 조건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누가 지켜 주나요?

우리에게 복(福)을 주신 그 남자가 지켜 주는 거에요.

그래서 너희는 땡 잡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해요.

이 은혜 안에 있으면 마음이 부요해져요.

넉넉한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 받는 여자처럼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감사하며 살아간단 말입니다.

 

복(福)이라는 말 자체가 은혜에요.

거저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복(福)이라고 합니다.

 

복(福)이란? 말에 뜻이 어디서 내려온다는 말이에요.

어디서 내려옵니까?

하늘에서 내려 와요.

 

하늘로부터 오신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남자는 열심히 자기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복(福)을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남자에게 복(福)을 받은 그 여자는 행복한 여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복 받은 여자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福) 속에는 하늘에 신령(神靈)한 것들이 담겨져 있어요.

땅에서는 하늘에 신령한 것들을 따 낼 수가 없어요.

하늘에 것들은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하면 복(福)을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더러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복(福)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는 이런 복(福)을 받은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福)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 삶 속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복(福)을 받은 자는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이 그렇게 살도록 간섭을 해 가신다는 말이에요.

 

복(福)이라고 하는 “아쉬레이” 라는 말은 “올바르다” “번영하다” 라는 의미의 동사(動詞)에요

이는 “아솨르”에서 유래된 복수 명사로서 “감탄사” 형식으로 사용되었어요.

 

무슨 말인가요?

복(福) 속에는 감탄할 만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선물이 가득 들어 있다는 말이에요.

 

복(福)이라는 택배를 열어보니 그 속에서 선물이 와르르~ 쏟아지는 겁니다.

복(福)은 큰 의미로 두 가지에요.

첫째로는 죄인과 하나님을 올바른 관계로 의롭게 해 주는 “존재론적인 복(福)”과,

둘째로는 의로운 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신분론적인 복(福)”이 있어요.

 

“아쉬레이” 라는 복(福) 속에 있는 두 가지 의미 중에서 먼저 “올바르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의(義)를 말해요.

이건 칭의에 복(福)이에요.

칭의는 넌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의(義) 아래 있는 자라는 존재에 관한 복(福)이에요.

 

“넌 이제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야!” 라고 선포하는 것이에요.

“넌 이제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 라고 선포하는 거에요.

이젠 정죄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번영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로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복(福)이에요.

마치 비행기를 타면 기내에서 제공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권한과 같은 것을 말해요.

다른 말로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에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의(義)라는 복(福)을 받은 성도는 의롭게 된 자로서 살아가는 축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福) 속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해 주는 의(義)도 있고, 의롭게 된 자로서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복(福)”이라고 할 때 “바라크”와 “아솨르” 라는 두 가지 의미로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첫째로 “바라크” 는 언약적인 관계에서 주어지는 복(福)을 말을 할 때 사용을 합니다.

 

이것은 의(義)에 복(福)을 말해요.

“바라크”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사용되었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선포적인 의미의 복(福)이에요.

마치 아브람을 찾아가서 너는 복(福)에 조상이 돼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 복(福)은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복(福)인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칭의에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의(義)를 말합니다.

이 의(義)가 그 어떤 참소로부터 막아 주세요.

 

바울은 이 의(義)를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 의(義)라고 했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義)가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준 것입니다.

 

성도에겐 이 의(義)가 왕노릇을 해요.

그러므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잘려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아솨르” 는 하나님과 화목이 된 자에게 주어지는 복(福)을 말해요.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복(福)으로서 하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주어지는 복(福)이에요.

이걸 신약 식으로 표현을 하면 “성령의 각양 은사”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 속에는 예수의 성품적인 것들이 들어 있어요.

아담 안에 있던 자들에게 예수님의 것을 주셨어요.

아담 안에 있는 것은 모두가 죽이는 것들인데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부터 복(福)을 받은 성도는 죽은 자로 살지 않고 산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이는 자로 살지 않고 살리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산단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 속에는 예수님의 성품적인 것들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되면 사람의 가치관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마음에 변화를 받아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지요.

이건 우리더러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임하면 이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솨르” 속에는 우리 옛 사람인 아담에 성품을 빼내고, 새 사람인 예수의 성품을 심게 되는 것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새로운 피조물인 새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福)이에요.

이 복(福)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어요.

자족 할 줄을 알게 되어요.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미(讚美)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족하게 되면 부정적이던 사람이 긍적적으로 바뀌어요.

남에게 해를 주던 사람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바울이 그러지요.

도적질하던 자들은 도적질 하지 말고 남에게 구제 할 일이 있도록 하라고 하지요.

도적질은 부정적인 것이고, 구제는 긍정적인 것이에요.

도적질은 죽이는 것이고, 구제는 살리는 것이에요.

 

도적질은 내가 배 부르기 위해서 남에 것을 빼앗는 것이고, 구제는 남에 배를 불리기 위해서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에요.

도적질은 땅에 원리이지만 구제는 하늘에 원리에요.

그러니 성도는 받기만 하는 땅 사람에서 주는 하늘에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면 도적질을 안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제하는 삶으로 바뀌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그렇게 행하시겠다는 예수님에 의지에 표현이에요.

우린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도구로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福)을 받은 사람은 아담 안에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던 사람이, 예수 안에서 남을 이해하고 칭찬하는 사람으로 변한단 말입니다.

마음에 힐링(healing)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에요.

 

우린 모두가 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법은 부정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아래서는 부정적으로 살았어요.

 

부정적이란 죽이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우린 율법 아래서 아담의 성품으로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다투면서 살았어요.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어요.

예수님의 생명은 긍적적인 것이에요.

긍정적이란? 살리는 것이란 말이에요.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들이에요.

성령의 열매들은 전부 이타적인 것들이에요.

예수를 믿고 난 후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힐링(healing) 받은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하고 금지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토해내게 하세요.

성령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福)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돌이켜서 긍정적인 일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악인의 꾀를 버리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에요.

이건 전부 남을 해치는 것들이에요.

 

그리고 긍정적인 것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간다는 말이에요.

율법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긍휼을 구하게 되고 그 긍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살리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복(福)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성품적인 복(福)에 대하여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새 언약” 안에 있는 “새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늘에 복(福)을 말해주고 있는 거에요.

 

“옛 언약의 복(福)은 땅에 속한 물질적인 복(福)이지만, 새 언약의 복(福)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福)이에요.”

 

시편 1편의 복은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복(福)이에요.

새 언약에서의 복(福)은 땅에 속한 물질적 가치의 복(福)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복(福)인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복(福)이에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의(義)를 얻으니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화목하니까 평강이 오고!

하나님의 평강이 오니 기쁨(희락)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의(義)에 복(福)을 받고 보니 마음이 행복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자로 감사하며 찬미하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복(福)을 받은 자로서 복(福)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건 지향성을 말해요.

복(福) 받은 사람은 이러한 모습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가 복(福)을 받은 자에요.

 

그 남자로부터 복(福)을 받은 여자는 반드시 그 남자의 사랑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이건 무엇과 같은가 하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행사”를 하는 것과 같아요.

사람 행사를 해서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행사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살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福) 받을 짓을 해서 복(福)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福)을 받았기 때문에 복(福)에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믿음으로 말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동일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달라요.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믿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되지만,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행하는 것이나 은혜 아래서 행하는 것은 다 같아요.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달라요.

율법 아래서 행한 행함 속에는 내 자랑이 담겨져 있지만, 은혜 아래서 행한 행함 속에는 예수님의 자랑이 담겨져 있어요.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신이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심지어 자신이 그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예수를 배도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굳게 지킨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의 은혜이고 죽어도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복(福)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이에요.

 

믿음은 은혜이지 행위가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니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하고, 구제하고, 성도를 섬기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제게 이런 은혜를 주셨나이까! 라고 감사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나 이런 것 했으니까 예쁘지요! 라고 해서는 안 되어요.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곡해해서 은혜 아래 있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회의 모임도 우습게 여기고, 봉사도 안하고, 연보도 안 해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는 율법 아래 있을 때나 은혜 아래 있을 때나 종이에요.

종은 일하는 자이지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리면서 노는 자가 아니에요.

 

율법 아래서는 억지로 하였고, 은혜 아래서는 자발적으로 해요.

이게 달라요.

율법 아래서는 안 하면 죽으니까 싫어도 했지만, 은혜 아래서는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종이에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들이에요.

그리스도의 의(義)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도 증거 하여야 하지만,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도 증거해야 하는 겁니다.

 

옛날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내 자랑거리였는데, 은혜를 입고 보니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에요.

그러니 자랑이 아니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福)을 받고 보니 깨달아 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여도 주여 감사합니다!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가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복(福)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복(福)을 받기 전에는 악인의 꾀를 좇아갔고, 죄인의 길에 섰고, 오만한 자리에 앉았어요.

그런데 복(福)을 받고 보니 이러한 것들이 싫어지더란 말입니다.

이방인들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싫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아주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짓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더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옛날에는 이방인들처럼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던 것이 재미가 있고 좋았었는데 예수 믿고 나서는 싫어지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안 하는 것일 뿐이에요.

예수 믿고 나니까 그냥 싫은 거에요.

그래서 안 하는 겁니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싫어진 거에요.

하지 말라고 해서 안하게 되면 그건 행위에요.

그건 반드시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은 은혜에요.

잘 분별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福) 속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의(義)에 복(福)도 있고!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복(福)도 있는 것입니다.

복(福)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요.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게 하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옛 사람으로서 버릴 것이 있고, 새 사람으로서 채울 것이 있어요.

즉 아담 안에 있던 옛 사람의 죄(罪)에 것들인 악인의 꾀를 좇아가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리에 앉던 일들은 버리고, 예수 안에 있는 새 사람의 의(義)에 것들인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일들을 취하게 된단 말입니다.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 식의 신앙은 버리고, 새 언약 식의 신앙은 취한다는 말이고!

“성품적인 것으로 말하면” 아담의 성품은 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은 취한다는 말입니다.

“가치적으로 말하면” 땅에 것은 버리고, 하늘에 것은 취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우리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능력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성도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졌어요.

그럼 당연히 축복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쉬운 말로 복(福) 받은 사람답게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지향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 남자로부터 복(福)을 받은 자가 아니에요.

가짜에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복(福)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씀 속에는 “이미 받은 복(福)”이 있고, “복(福)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복(福)에 사람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세요.

법에 사람으로 살지 말고, 은혜에 사람으로 살게 하세요.

옛 언약에 속한 것은 버리게 하고, 새 언약에 속한 것은 취하게 하세요.

옛 사람에게 있는 것은 버리게 하고, 새 사람에게 있는 것을 취하게 하십니다.

 

악인의 꾀나, 죄인의 길이나, 오만한 자의 자리는 모두 옛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에요.

이런 것들은 다 법 아래서 행하는 것들이에요.

법 아래서는 생명이 안 나와요.

오로지 죽이는 것들만 나와요.

 

그러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것은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산다는 말이에요.

이런 것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벗어나고자 한단 말이에요.

돌이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돌이킴을 “회개” 라고 해요.

성도는 늘 회개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義)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그 새 언약이 적용되기 때문에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에요.

은혜 받았으니 은혜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고!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福) 받은 사람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지요.

이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누구였고!

지금 어떤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예전엔 자신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었는데 지금은 구원과 축복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관대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팍팍하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강퍅한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사랑 받아 보세요.

부드러워진다니까요!

사랑을 못 받으니 마른 장작같이 그렇게 속아지가 괴팍스러운 겁니다.

은혜가 나를 나긋나긋하게 하고 부들부들하게 하세요.

어허~

참 말이라니까요.

 

구원은 누림이에요.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지요.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지만 사랑만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하지요.

이 말은 예수를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이 신앙이란 말입니다.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두 종류의 가수가 나와요.

어떤 가수는 기계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어떤 가수는 감성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있어요.

노래란? 가사를 풀어내는 것이에요.

 

말이 뭔가요?

뜻을 전달하는 도구에요.

말 속에 뜻을 전달 할 때 말 귀를 알아먹는다고 합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에요.

가사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가사를 감동적으로 풀어내는 가수가 있어요.

어떤 가수는 감정으로 노래하고, 어떤 가수는 기술로 노래해요.

어떤 가수는 가슴으로 노래하고, 어떤 가수는 머리로 노래해요.

 

감정으로 한다 또는 가슴으로 노래한다는 것은 그 노래 속에 그 사람의 혼(魂)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가슴으로 노래하는 것은 자신의 혼(魂)을 그 노래 속에 담아서 부르기 때문에 듣는 이에게 그 감정이 그대로 전이(轉移)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술이나 머리로 노래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음정 박자 하나 틀리지 않고 교과서 식으로 노래를 하지만 그 속에 혼(魂)이 없어요.

그래서 무미건조한 겁니다.

기계적으로 하는 노래는 테크닉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이 잘 하지만 그 속에 가사가 담고 있는 사연이 풀이 되어서 나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노래는 그냥 노래로서 귀는 즐겁게 해 주지만 감동을 주지 못해요.

노래를 잘하는 것과 감동을 주는 것은 달라요.

 

노래 잘하는 것은 기교이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가수와 청중 간의 감정 이입(移入)을 일으키는 생명의 교류이고 활동이에요.

그래서 감동적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녹아지고 미어지고 숙연해지고 눈물이 나는 겁니다.

잔잔한 감동이 여울처럼 우리 온 몸을 감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이와 같아요.

복음을 아는 사람과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달라요.

예수를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과 예수를 경험적으로 사는 사람은 달라요.

말씀을 보는 사람과 말씀을 먹은 사람은 달라요.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에 생겨요.

그럼 예수의 마음으로서 살고자 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억지가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로 힐링(healing) 받은 자들이 모습이에요.

 

예수로 사는 것은 예수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살아낼 수가 없어요.

예수를 경험하고 사는 것을 예수의 증인이라고 해요.

성령이 임하면 객관적인 예수를 주관화 해 주세요.

말로만 듣던 예수를 손으로 만진바 되고 몸으로 느낀바 되어요.

 

성경이라는 글이 내 안에서 예수라는 형상으로 변해요.

말씀이 예수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럼 모든 성경이 예수를 거쳐서 보이게 되어요.

그러면 나는 모든 말씀 뒤에 감추어지고 예수님이 그 말씀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어요.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지키는 주체로 보인단 말입니다.

이러면 모든 말씀이 법이 아니라 은혜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은혜를 받고 난 후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으로 보였던 것과 같아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춤을 추는 것을 보게 되어요.

그럼 나는 그 예수님의 춤사위에 얹혀서 감사하면서 함께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말씀이 무겁지 않고 가벼워져요.

고민케 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케 된단 말입니다.

즉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공로에 감사케 된단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 바깥에 있던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세요.

객관적 예수가 주관적 예수가 되어요.

이럴 때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라” 고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가 자기 안에 들어오자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문자 속에 있던 예수가 살아서 내 안에 들어오면 더 이상 성경은 문자가 아니고 생명이 되어요.

문자 속에서 생명을 보게 된단 말입니다.

이럴 때 성경은 그냥 문자가 아니고 나의 양식이고 꿀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이 몰려오고 뭉클해요.

말씀 듣는 것이 행복하고 마음에 떨림이 일어나고 눈가에 눈물이 고여요.

별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도 심연 깊숙히 뭔가 생명의 꿈틀거림이 일어나요.

귀로만 듣던 예수가 마음으로 느껴져요.

 

하지만 지식으로 하는 설교를 들으면 말은 현란하고 흠 잡을 데가 없는데 감동이 없어요.

이는 자기가 경험된 예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학문적으로 알아진 것을 설교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설교가 자기가 경험된 예수를 간증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학문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를 들으면 뭔가 답답함을 느껴요.

 

설교를 “케리그마” 라고 하는데 이는 경험된 예수를 선포하는 것이에요.

“난 이런 예수를 만났다” 고 증거하는 것이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이 그랬잖아요.

자기들이 만났던 예수를 증거하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지요.

증인이란? 목격자에요.

여기서 목격자라는 것은 경험한 자라는 말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를 경험하게 되어요.

 

그럼 경험된 예수를 증거해요.

사도 요한처럼 내가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가 된 그 예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음이 부요해져요.

실제 예수가 그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음이 넓어지고 넉넉해 져요.

세상이 작아 보여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겁니다.

 

마치 술람미가 솔로몬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마음이 넉넉하고 너그러워지는 것과 같아요.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조롱을 당하였어요.

그럼에도 한 번도 그들과 싸우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신은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다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서 그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겼어요.

이게 그 남자인 왕으로부터 복(福)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넉넉하게 사세요.

“그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았잖아요.

올 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음에 힐링(healing)들이 일어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술람미처럼 좀 나긋나긋 하게 살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을 힐링(healing) 좀 해 주세요. 우리의 마음이 풍선처럼 세상 것으로 꽉 차서 너무도 여유가 없습니다. 터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을 열어서 주님이 계신 위를 보게 하여서 세상 것을 좀 비워서 넉넉해지도록 해 주세요. 바울이 보았던 삼층천을 보게 하시고 요한이 보았던 그 천국을 보게 하여서 세상을 이기기 하옵소서. 그들이 보았던 세계가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셔서 그 믿음으로 그 세계의 풍성함들을 누리게 하옵소서. 마음에 힐링(healing)이 일어나게 하여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꺼꾸러지지 않고 모든 것을 빼앗겨도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