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으리라

정낙원 2013. 7. 25. 10:23

모세의 글을 믿었더면 나를 믿었으리라

 

요 5:39-47=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동문서답(東問西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전혀 다른 답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가 그러합니다.

 

이는 영(靈)과 육(肉)의 차이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靈)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육(肉)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말씀의 진의(眞意)가 왜곡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렇게 왜곡된 것을 바로잡아 주시고자 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재해석을 해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예수님의 대화에는 항상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靈)으로 말씀 하시는데 유대인들은 육(肉)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비록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기록을 하였어도 그 속에는 영감이 있습니다.

이 영감(靈感)이 영(靈)이고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방법론을 탐사(探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을 상고해도 영생을 얻는 비결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야지 다른 것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엄청난 충격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건 유대인들이 성경 해석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성경 해석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거를 빌리자면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해석법이 바로 인간들이 신(神)을 이해하는 법입니다.

인간들은 신(神)을 인간들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인간들 방식으로 섬깁니다.

 

인간들이 신(神)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섬깁니까?

인간들은 내 쪽에서 신(神)에게 접근을 할 수가 있다고 믿고!

인간 쪽에서 정성을 드리면 신(神)이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내 쪽에서 영생을 얻어낼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영생 얻는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주는 것이니 인간의 노력으로 따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유대인들의 사고가 틀렸다는 것을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쪽에서 신(神)에게 정성을 드리면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들이 지극정성으로 신(神)에게 빌면 신도 인간의 정성을 보아서 응답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화복(禍福)을 인간들이 따 낼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순전히 인간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점쟁이들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쳐주잖아요.

그리고 복(福)은 불러들이고 화(禍)는 막아준다고 하면서 굿을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샤머니즘(shamanism)이라고 합니다.

왜? 이러한 샤머니즘이 인간들의 삶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지구상에 샤머니즘(shamanism)과 토테미즘(totemism)이 없는 나라와 민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샤머니즘(shamanism)이란? 영적 존재를 숭배하는 정령 숭배사상이라고 한다면

토테미즘(totemism)이란? 해와 달이나 동식물과 같은 사물을 숭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두가 토속적인 신(神) 섬김입니다.

이러한 신(神) 섬김은 나라와 민족을 떠나서 모두가 대동소이합니다.

모두가 인간이 신(神)에게 정성을 쏟고 신(神)은 인간에게 응답하는 형식의 신앙들입니다.

 

성경은 이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우상숭배가 일어납니다.

이는 모두가 인간들이 우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우상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상성이란? 인간들이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면 신(神)은 인간의 정성에 응답하는 형태의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적 신앙은 인간들이 신(神)을 이용하여서 화(禍)는 막고 복(福)은 불러 오고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보는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곳에서 종종 보는 그림 중에서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러 가면서 산(山) 신령(神靈)에게 막걸리 한 잔에 명태 한 마리 놓고서 제사 지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산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 산에 있는 신(정령)을 달래기 위함입니다.

 

이는 그 산을 다스리는 신(神)에게 막걸리와 명태 안주를 대접하고서는 화(禍)는 면하게 해주고 복(福)을 달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청탁이고 뇌물입니다.

 

바닷가에서 풍어를 기원하면서 용왕제를 지내는 것도 동일합니다.

올 한 해도 무탈하고 고기 많이 잡게 해 달라는 굿을 행함으로서 바다를 다스리는 신(神)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자행되고 있어요.

교인들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열심과 충성으로 복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축복은 열심과 충성으로 따내라고 합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여기에 부응이라고 하듯이 내 한 몸 바쳐서 열심과 충성을 다 할 테니 자식들 잘 되고, 사업 잘 되고, 집안에 우환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 시대 교인들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목사들이 영매(靈媒)가 되어서 무당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매(靈媒)란? 신(神)과 인간을 중간에서 맺어주는 자를 말합니다.

교인들이 목사가 기도해 주면 축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 교인들 눈에는 목사는 영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 우상성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과 싸우듯이 자기 백성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우상성를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대급부를 노리고 있는 것이 죄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러한 우상성으로 종교를 만들었어요.

이러한 우상성이 신과 거래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상성을 죄라고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이런 사고로 하나님을 믿고 있어요.

오늘 본문이 이러한 사고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가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영생을 따내고자 성경을 본다는 말입니다.

 

성경 속에서 영생 얻는 방법론을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어떤 부자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선생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이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라고 합니다.

영생은 너희가 어떤 방법으로 따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에게 거저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 영생을 주겠다고 합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헐~입니다.

멘붕입니다.

자기들은 조상대대로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고자 노력을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영생이 주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유대교 신앙이 행함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도 다 이러한 사고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언약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언약의 후손이란?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하나님 백성이란 말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면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에요.

물론 영생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구원 받은 성도의 모형이므로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생겨난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원리적으로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하나님 백성 됨이라고 생각합시다.

영생이나 하나님 백성 됨이나 동의어(同義語)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백성은 곧 영생 얻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로 말한다면 이미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영생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영생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고자 노력을 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이미 영생을 얻은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왜? 이미 아브라함 언약으로 영생을 얻은 자들이 영생을 얻고자 노력을 할까요?

이는 영생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 시대 교인들에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도 열심히 예수를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목사들이 그 따위로 해서 천국에 가겠느냐 라는 말을 합니다.

게으른 교인들을 닦달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뜯어서 보면 천국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갈 수도 있고 못 갈수도 있다는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는 구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장차 예수님이 세우실 새 언약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생겨난 자들입니다.

이걸 신약으로 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유대인이나 신약의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생겨난 성도들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이 지금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걸 신약으로 말하면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이나 이 시대 교인들이 같다는 말이 됩니다.

하는 짓이 똑 같아요.

 

예수님의 초림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나 이 시대 교인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나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의 다툼이 이 시대 교인들과의 다툼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 많은 목사들이 구원을 이루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 3 시제로 나누어서 교인들에게 공갈을 치잖아요.

구원을 얻었지만 현재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고 합니다.

봐라! 바울도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아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무식한 교인들은 그 소리에 기가 죽어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며 성화하여서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남에 이야기가 어니고 우리들 이야기인 것입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지금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도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유념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성경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수신자가 지금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우리와 하는 이야기로 줌인(Zoom in) 하여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본문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율법 지킴을 옳은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상고하는데 그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성경으로 읽고 있는 그 율법을 모세가 기록을 하였는데 그 모세는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고 한다면 나를 믿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 하는데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이 무슨 망발이란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어요.

율법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모세의 글도 믿지 않았다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들로서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라고 따질 수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믿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지켜왔고 지금도 충실히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에 유대인들은 동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신(神)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고 따랐습니다.

유대교는 구약 성경을 경전(經典)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세 오경을 으뜸으로 취급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여도 예수님은 너희는 모세의 말도 믿지 않는 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정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무슨 근거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 근거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무슨 일이든지 대화가 되려면 상대가 납득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신주단지처럼 지키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은 안 지켰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물론 유대인들이 율법에 특심한 줄을 압니다.

그럼에도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라는 말씀은 곧 모세의 율법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걸 바울에게 적용해 봅니다.

 

바울은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율법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다메섹 사건 이후에 알았어요.

그래서 율법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몽학 선생이란? 길 안내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길잡이란 말입니다.

모세의 글을 쫓아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처럼,,,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하지요.

이는 세례요한이 율법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을 일컬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례요한이 율법이 되어서 예수님 앞으로 사람들은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모세나 세례요한이나 율법으로서 동일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따라가면 예수를 만나듯이 모세를 따라가면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율법이 담고 있는 속 내용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모세의 글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정답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율법의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잘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건 율법의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답은 예수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만났으면 모세의 말을 믿은 것이 되고!

반대로 예수를 못 만났으면 모세의 글을 안 믿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면 예수를 만났으면 율법을 지킨 것이 되고!

예수를 못 만났으면 율법을 안 지킨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자구(字句)대로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자 하나 하나를 지키고 못 지키고 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답이 예수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묻지 않고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도 성경을 믿고 있고, 예수님도 성경을 믿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성경이란 구약 성경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모세 오경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유대인은 서로가 모세를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서로 자기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서로가 모세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유대인들의 주장은 “우리는 모세를 믿는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은 “너희는 모세를 믿지 않았다” 라고 합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하면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믿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니 모세의 글도 믿지 않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도 적용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너희가 바울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면 예수를 믿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과도 같습니다.

바울의 말이나 모세의 말은 동일합니다.

둘 다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라잡이” 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글을 읽어도 예수가 나오고, 바울의 글을 읽어도 예수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고 있는가요?

아니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가요?

 

안타깝게도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우리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늘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옛 말에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유대인들을 향하여 욕을 하면서 우리가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유대인이나 우리나 동일해요.

 

우리가 바로 유대인이에요.

유대인들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듯이!

우리도 열심히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참으로 난감 합니다.

마치 정치인들에게 청탁을 하려고 뇌물을 주었는데 돈을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에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에이~ 이 더러운 도적놈들아!

너희들은 내 것을 도적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아니~ 하나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 것을 도적질 했습니까?

“우리는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성들은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분명히 백성들은 꼬박 꼬박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받았다고 합니다.

배달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영문입니까?

이는 곧 십일조의 의미를 모르고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라는 그릇에다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담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빼 버리고 십일조라는 그릇만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안 받았다고 하고 백성들은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버전으로 해석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언제 예수를 믿었느냐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언제 내 말씀대로 살았느냐고 합니다.

우린 분명히 예수를 믿었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과 예수님 간에 나누는 대화와 같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이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태복음 7장 21-23절의 말씀과 같은 짝이 납니다.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좇아내고 갖가지 교회에 봉사와 충성과 헌금을 하였습니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난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게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니다! 너희는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 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지옥을 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라고 할까요?

이는 속았기 때문입니다.

찰떡 같이 믿었는데 아닌 겁니다.

 

그러니 분해서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몸 바쳐서 사랑 했는데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니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떤 놈이 내 열심과 충성과 사랑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우리의 열심과 충성을 가로채는 이 놈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엉터리로 만드는 그 놈을 찾아내서 능지처참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면서도 어찌하여 나에게 오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 하였으면 영생을 주는 나를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상고하였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문자 그대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말하는 액면 그대로를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살인을 하지 않았고!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하여서 도적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해서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모세의 글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의 이러한 모든 글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 합니다.

아니~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합시다.

언제 모세가 예수에 대하여 증거를 했습니까?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고!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였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대로 살았습니다.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모세의 글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했고!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야! 예수야!

너는 어디서 성경을 배웠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정통적인 해석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틀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경 해석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자대로 라면 유대인들이 말이 맞아요.

예수님이 틀렸어요.

예수님이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유대인이 틀렸고 예수님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손을 들어 주셨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우리도 넘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거울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그럼 우리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우리도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보았듯이 오늘날 성도들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같은 해석을 하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그럼 모세는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 했는가요?

 

어떻게 예수 믿으라고 했나요?

알다시피 모세는 율법 속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오니까 예수를 믿으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럼 오늘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이 무엇을 근거로 모세의 글을 믿었더면 나를 믿었으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 39절을 봅시다.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모세의 글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세의 글인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는 그 “내게” 라는 “나” 는 누구입니까?

 

“나” 란 예수님입니다.

 

그럼 언제 모세가 예수님을 증거했나요?

어떻게 증거 했는가요?

없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인 율법은 보면서도 “예수”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은 지켰는데 그 속에서 예수를 보지 못했어요.

모세는 율법 속에 예수를 담아 놓았는데 유대인은 그 예수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게 비밀이고 육(肉)의 한계입니다.

 

육(肉)이란? 문자입니다.

문자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기호(記號)입니다.

그러니 문자라는 기호를 통해서 그 뜻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글은 안다는 것은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 아이가 엄마의 말을 안 들어서 엄마가 “니 맘대로 해!” 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럼 아이는 엄마의 말을 분석하여야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엄마의 표정과 억양과 감정을 통해서 그 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럼 엄마의 표정과 감정과 “니 맘대로 해!” 라는 억양을 통하여서 전달한 엄마의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니 맘대로 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이건 엄마 말을 들으란 말입니다.

 

아! 내가 엄마 말을 안 들으니까!

엄마가 화가 나서 반어법(反語法)으로 “니 맘대로 해!” 라고 하시는구나!

그럼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이제부터 엄마 말씀 잘 들을게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니 맘대로 해!” 라는 말을 제대로 해석한 것이 됩니다.

엄마 말을 올바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하신 “니 맘대로 해!” 라는 말은 엄마의 마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기호(記號)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그 십자가가 함유하고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말로 십자가 십자가 한다고 해서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기호입니다.

무슨 기호인가 하면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는 기호인 것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기호입니다.

 

모세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을 해하지 말라!

 

이러한 말들은 죄인에게 하는 것은 이러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반어법(反語法)으로 너희는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주시고자 하십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장차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보내시고자 함입니다.

 

모세는 너희는 이런 죄인이라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너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모세의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러면 놀랍게도 율법에 진의(眞意)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됩니다.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문자만 보았지 그 문자라는 기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보면서도 모세가 지목하는 영생을 주는 “그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글 속에 예수를 담아 놓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소경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이 소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너무도 모세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소경이라고 하자 도리어 성질을 냈어요.

 

이러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본인들이 본다고 하는데서야 어찌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안다고 하는 자들에겐 가르쳐 주면 욕을 먹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바울의 글이 모세의 글처럼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유대인들처럼 문자대로 지키고자 하면 예수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덤비면 안 되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내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는 인간이냐를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사보다 긍휼을 배워야한단 말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자기 주제를 알고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바빴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동일합니다.

목숨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하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은 있었지만 장작 그들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들 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만 있었지 자기들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너희는 목숨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반어법(反語法)으로 하나님을 목숨 바쳐서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듣고 목숨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는데 정작 하나님의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사랑을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사랑의 필요를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사랑을 구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긍휼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해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긍휼을 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고자 합니다.

이 예수는 죄에서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자기가 죄에 가두어져 있는 줄을 몰라요.

그럼 죄에서 건져 줄 수가 없어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살아있네” 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윤형빈이와 최효종이가 대부로 나와서 자기 부하에게 무엇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윤형빈이가 부하에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관을 준비해 놓으면 뭘 하느냐!

니가 요단강은 안 건너오는데!

 

윤형빈이가 내가 신 김치도 준비해 놓고, 신 살구도 준비해 놓고, 족발도 준비해 놓으면 뭣 하느냐! 니가 입덧을 안 하는데!

오잉~

물론 말 같지 않은 개그이지만 이걸 우리 신앙에 응용해 보세요.

 

우리 신앙으로 이야기 해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의(義)를 주려고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고 있으니 그 의(義)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의(義)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롬 9:30-10: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은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義)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義)를 주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에 의(義)가 있으니 거절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한 의(義)가 바로 모세의 글을 지킨 것이에요.

 

모세는 너희는 의(義)를 만들 수 없다는 뜻으로 율법을 주었는데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의(義)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와서 의(義)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한 것입니다.

 

이걸 사랑으로 말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 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사랑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은 다 더러운 옷과 같아요!

순수성이 없어요.

다 꼼수를 가진 사랑이에요.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에는 인간들의 욕심이 들어가 있어요.

뭔가 얻고자 하는 꼼수가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마치 자식들이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인간들의 사랑은 죄인들에게나 유익하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더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받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용서도 받고!

구원도 받고!

영생도 받고!

믿음도 받고!

사랑도 받아야 해요.

 

아니지요.

이미 주셨어요.

 

용서도 주셨고!

구원도 주셨고!

영생도 주셨고!

사랑도 주셨어요.

 

그런데 우린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알려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은 땅에 없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에 것을 받아야 하늘에 사람으로 살 수가 있고 하늘로 갈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것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도리어 죽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하고 죽이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없음을 알아야 하는데 믿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바빴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어요.

 

교회마다 강단에서 목사들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닦달을 합니다.

제사를 지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긍휼을 구하라고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목사들이 제사를 지내라고 소리치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이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행하던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자기 몸에 칼로 그어서 피를 내면서 신에게 읍소합니다.

신이시여! 눈이 있으면 보시옵소서!

우리가 이렇게 정성을 쏟는데도 모른 척 하실 겁니까?

우리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응답을 해 주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성이면 감천하는 신앙이에요.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이 꼭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이 새벽기도에서부터 철야기도와 금식하면서 왜? 내 정성을 몰라주느냐고 하는 것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기 몸에 피를 흘리면서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것과 동일해요.

 

제사는 난무한데 긍휼 구함이 없어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가 없어요.

 

다 잘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가 없어요.

용서가 필요 없는 자들이 되었어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스스로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럽니다.

제발 거울 앞에 서서 니 꼬라지를 좀 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어야 해요.

 

모세는 긍휼을 구하라고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제사를 지낸다고 긍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세가 지금 너희들을 고소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유대인을 고소하고 있어요.

 

모세가 소리칩니다.

야! 임마!

제사 지내지 말고 긍휼을 구해!

내가 그러라고 율법을 준 것이야!

 

결국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글을 잘못 보면 유대인 짝이 납니다.

모세의 글이 수건처럼 덮여 있어요.

그 수건을 벗겨야 해요.

 

고린도후서 3장을 봅시다.

 

고후 3:13-18=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 올 때 얼굴에 수건을 쓰고 왔어요.

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가요?

이는 자기 얼굴에 광채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는 광채는 하나님과 만나서 생긴 광채이므로 하나님의 광채에요.

쉬운 말로 모세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가린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이라도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면 모세의 수건이 벗겨진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모세의 글을 예수그리스도로 해석하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예수에게 해석당하라는 말이에요.

 

이를 알려 주고자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모세가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모세가 옛 사람에게 말한 율법을 재 해석을 해 준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곡언법(曲言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인데 죄인들은 그 말씀에 진의를 모르고 사랑하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함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 있다고 하는데서야 어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은 사랑을 주고자 하는데 우리는 있다고 하니 하나님 손이 난감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나를 속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죄가 말씀(율법)의 진의를 가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십계명의 뭡니까?

우리더러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고발하고자 주신 것입니까?

 

우리를 고발하고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틀려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틀려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이 우리의 실존을 알려 주고자 주신 말씀을 왜곡하여서 가르칩니다.

어떻게 왜곡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왜곡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는 사랑치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사랑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닌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틀린 자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십계명을 주었는데 마귀는 말씀을 지켜서 이런 인간이 되라고 한단 말입니다.

 

여기에 미혹당하면 평생 허공에 대고 헛 싸움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시대 대다수의 교인들이 마귀가 가르치는 말씀을 옳은 것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성화주의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실존을 고발당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단이라고 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을 통해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였듯이,

지금도 모든 말씀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주신 것이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누가 그러는가요?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성화주의자들은 유대교인들과 같아요.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 얻을 줄을 상고하였듯이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성경대로 살아서 거룩하고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고자 한 것이나 성화주의자들이 거룩하고 의로워지려는 것이나 그 내용은 동일해요.

 

영생이니 거룩이나 의(義)는 예수님이 공짜로 주는 것들이에요.

우리가 따 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영생 할 수가 없고 거룩해지거나 의로워지지 않아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이방인과의 차별성의 문제에요.

하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지향성(指向性)의 문제이지 말씀을 지켜서 거룩해지거나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룩이나 의로움은 예수 안에 있으면 저절로 되어져요.

하나님은 우리를 독자적으로 거룩하거나 의롭다 하지 않아요.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의롭다 여겨 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가 믿느냐?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믿어요.

 

그럼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가 고발해 주는가요?

말씀이 해요.

우리는 말씀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과 어그러진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긍휼을 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게 되어요.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상한 마음이 일어나고 긍휼을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이 복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고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라는 말씀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으리니” 라는 말씀을 이 시대 우리에게 적용하는 신약의 버전으로 말하면 “바울의 글을 믿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겠거늘” 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자문하여 보세요.

나는 지금 하나님 말씀 앞에서 무얼 보고 있는가요?

 

무엇이 보이는가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가요?

아니면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고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보이는가요?

 

눈은 마음이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안에 보는 것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둠에 다니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빛 가운데서 행하게 됩니다.

 

눈이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靈)이요 육(肉)은 무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말이 영(靈)이고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보는 것이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영(靈)이라고 하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서 거룩과 의와 영생을 보아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귀의 종들은 지금도 성경을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말씀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말씀을 지켜서 거룩하고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것이 보이십니까?

 

부디 말씀 속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밝히 보여 지고 들려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소서! 모세의 글이 예수로 보여 지게 하시고 바울의 글이 예수로 보여 지게 하옵소서! 눈에 비늘이 벗겨져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보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바울처럼 내 눈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는 보이는 것이 없더라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단편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안에 귀신들린 자들  (1) 2014.10.02
삼손의 수수께끼  (0) 2014.08.08
올무가 된 기드온의 에봇  (0) 2013.03.12
그 남자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아!  (1) 2013.01.19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는 소  (0) 201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