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55강. 창세전 언약으로 본 천년왕국 (계 20:1-15)

정낙원 2017. 4. 12. 17:05

55강. 창세전 언약으로 본 천년왕국 (계 20:1-15)

 

계 20:1-15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7.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지막 일을 행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본문을 잘 따라가시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면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몰고 오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천국에 가고,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우린 그동안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곧 바로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사단은 결박을 당하고 일천 년 동안 무저갱에 인봉이 되어서 가두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자들과,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그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천 년이 차면 사단을 잠시 풀어 줘서 성도들과 싸우려 하다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소멸시키고 난 후 영원한 불 못에 집어넣습니다.

즉 재림하신 후 천 년 동안 있다가 그 후에 영원히 갈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천 년을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배워 왔던 것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이 있고.

그 후에 백보좌 심판을 거쳐서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영생으로 나라로 나아가고, 다른 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고서 영벌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 년 후에 사단이 잠시 놓인다는 말은 천년왕국이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천년왕국이 영원한 천국이라고 한다면 천 년 후에 사단이 잠시 놓여서 성도들과 싸움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 왔던 것으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천국에 가서 천 년 동안 살다가 천 년 후에 다시 사단과 전쟁을 하고 다시 천국에서 산다는 뜻인데 이건 아무리 보아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동안 예수님이 재림하면 끝이라고 배워왔을까요?

이는 성경을 창세전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편적으로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창세전 언약이 그려내는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 듣고 난 후에 그동안 그려온 그림과 오늘 들은 창세전 언약적 관점에서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보세요.

어느 그림이 더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명쾌하게 구분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이 그림을 그려 보세요.

 

오늘 그린 그림이 틀렸다 싶으면 옛날 그림을 그대로 소유하시고,

만약에 오늘 그린 그림이 맞고 옛날 그림이 틀렸다 싶으면,

이제부터 오늘 그려진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의 천년왕국관으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오늘 말씀을 다 듣고 나시면 성경 전체 그림이 새롭게 그려지실 것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리고자 하신 그림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공부를 할 것이니까 좀 길더라도 인내하면서 잘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다양한 천년왕국에 대한 학설들

 

천년왕국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해하는 폭이 다르므로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네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네 가지 학설 모두가 자기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들고 있어요.

 

모두가 성경적 근거를 들고 있는데 아전인수식으로 억지 해석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일관성이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것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따를 수가 없어요.

 

저는 어느 학설을 주장하지 않아요.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학설들 속에서도 취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합적인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무(無) 천년주의입니다.

 

무(無)란? 없다는 뜻입니다.

무천년주의이니까, 이는 천년왕국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천년왕국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학설입니다.

 

무천년주의 학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천국왕국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현재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천년왕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천년주의는 영적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므로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신약시대 전체가 천년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것만 있지 않고 육적인 것도 있어요.

구원의 궁극은 몸의 구속까지에요.

영이 누리는 영적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과 육이 누리는 실재 천국도 있어요.

성경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으므로 무천년주의처럼 영 따로 육 따로 구원을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만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영과 육 모두 다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는 영적인 구원을 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육적인 구원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몰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에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실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십니다.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는 영적 천국이지만 재림부터 천년왕국까지는 실재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영육간의 구원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천년설의 오류는 오늘 본문을 보면 그대로 드러납니다.

 

본문 1-6절을 보세요.

 

계 20:1-6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림이 아니고 재림이에요.

그러므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을 신약의 전 기간이라는 식으로의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어서 인봉을 해서 미혹하지 못하게 해 놓고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하잖아요.

 

무천년주의에서는 마귀가 미혹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권세를 깨트렸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미혹한다고 합니다.

마치 목줄을 한 개가 말뚝에 매여서 그 주변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마귀의 활동이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초림 시에는 은혜로운 차원에서 그리 해석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가 다 되어가는 이 시대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어요.

지금은 모든 것이 실재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본문 그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마귀가 제한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활동할 수 없도록 무저갱에 가두어 버려요.

마귀도 하나님의 허락으로 움직이는 놈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무저갱에 가두어 두었는데 나와서 활동을 한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데 천년왕국에서는 사단의 활동이 없어요.

무저갱에 집어넣어서 인봉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년왕국에서 실재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영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 보시면 두 부류의 성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의 영혼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까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둘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서 영접하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모든 성도들이 살아서 예수님과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변화된 몸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죽은 자는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고,

산 자는 변화된 몸으로 살아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크마 주석을 보면 잘 주석해 놓았어요.

그대로 인용합니다.

 

'살아서'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제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육체적인 부활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로서 (1:18; 2:8; 13:14; 마 9:18; 요 11:25; 행 1:3; 9:41; 롬 14:9)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납니다.

영적이 아니고 실재로 살아나요.

왜 살아나느냐 하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봅시다.

 

살전 4:13-18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바울이 주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전하니까,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이 비아냥거리면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일어날 사건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는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오세요.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천국에서 안식하고 있는 성도들을 말해요.

이를 히브리서 12장에서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요한계시록 6장에서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원수를 빨리 갚아 달라고 신원하는 영혼들이라고 합니다.

 

계 6:9-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큰 소리로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입혀주시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이 때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공중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4-5절과 똑같은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천년왕국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주어진 영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무천년주의 학설은 온전한 해석이 될 수가 없고 틀린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왕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림에서 재림까지 모두를 영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영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을 하셨는데도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틀린 것이 되어요.

그러므로 무천년주의 학설은 과거적 해석으로 보면 이해는 할 수 있어도, 현재적 해석으로 보면 틀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후(後) 천년주의 입니다.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이 지나고 난 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도를 전하자 하루에 수천 명씩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차별이 없고,

종이나 상전이 차별이 사라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별이 사라집니다.

신분의 벽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하나님 말씀이 흥왕하여 믿는 무리들이 많이 일어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면서 세상이 점점 더 좋아져서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땅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 당시의 모습이 그러했으니까요.

그래서 성도들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면서 살다가 천 년이 차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성도들을 영원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학설은 초대교회에는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이 환상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후천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죽은 학설이 되고 말았어요.

 

천년왕국이 되려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속에는 원수의 심판과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동시적으로 담겨 있어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하실 때는 항상 죄악이 관영 할 때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암이 깊음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흑암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종말의 모습과 같아요.

 

이것이 노아 시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노아 시대를 일컬어 죄악이 관영한 때라고 합니다.

이건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과 같아요.

이때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심판을 단행하셨어요.

 

예수님의 초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약 교회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구약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 교회를 심판하시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약 교회 속에서 12 제자를 불러내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교회처럼 타락합니다.

이 시대는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세속적 가치로 엄몰이 되어서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부와 사치로 연락하는 땅의 음녀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백성아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고 거기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모든 종교 사상을 다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녀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WCC를 옹호하는 목사들은 교회에서 모든 종교는 그 근본은 같으니까 타 종교를 배타하지 말고 대승적 차원에서 포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종교 통합을 외치고 있어요.

뱀의 말을 강같이 토하여내고 있어요.

쑥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 강도의 굴혈이 된 구약 교회를 멸망시키고 12 제자들을 불러내셨듯이,

종말에도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신약의 타락한 교회인 음녀를 멸망시키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후 천년설은 틀린 학설인 것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이해를 하지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으므로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전(前)천년주의입니다.

 

전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와 반대 학설입니다.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학설이지만,

전천년주의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학설입니다.

 

무천년주의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영적으로 보았지만,

전천년주의는 요한계시록을 장차 역사 속에서 일어날 실제적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도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실제로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인 학설이지만 미흡한 부분이 많아서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전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을 실제적으로 보지만 많은 부분을 온전하게 해석하지 못하니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 년 후에 사단이 풀려나 미혹을 한다는 것과,

곡과 마곡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나,

천년왕국에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나,

백보좌 심판 후에는 어디로 가는지, 등등,, 명쾌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전천년주의에서도 두 가지 학설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기 전천년주의’와,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로 나누어집니다.

 

둘 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야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동일해요.

역사기 전천년주의의 미흡한 부분을 해소하고자 나온 것이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너무도 큰 모순을 낳고 있어요.

비성경적인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럼 세대주의의 잘못된 부분을 살펴봅시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을 두 번으로 봄

 

가장 큰 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구원입니다.

역사기 전천년주의는 예수님의 재림을 단회적으로 보는데,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예수님의 재림을 두 번으로 보고 있어요.

또한 구원도 역사기 전천년주의는 이방인과 유대인 구원을 구분하지 않는데,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에서는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을 구분함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을 나누어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두 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7년 대 환란 전에 예수님이 공중으로 재림을 하여서 이방인 성도들을 휴거시키고 난 후 이 땅에 유대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공중으로 재림을 하시면 이방인 교회들은 공중에서 혼인 잔치를 하고,

이 땅에서는 7년 동안 유대인들의 각 지파 중에서 남은 자들인 12000명씩 인을 치는데 도합 144000명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여서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유대인 말씀과 이방인 말씀이 있다고 함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요한계시록 2-3장까지는 이방인 교회에 주신 말씀이고,

4장 이후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방인 성도들은 2장 3장 아시아의 일곱 교회 시대를 끝으로 공중으로 올라갔다고 보기 때문에 7장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인치는 것을 육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이론으로 본다면 요한계시록 4장 이후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장 이후는 유대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666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라면 이방인 교회는 4장 이전에 이미 다 휴거하고 없어요.

4장 이후는 이방인은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나오는 666표는 받지 말라고 합니다.

4장 이후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면서 왜 이방인들이 난리입니까?

 

한국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요.

그럼 666에 대하여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도 받으면 큰일 나니까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자기모순이에요.

말이 맞지 않아요.

 

성경은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을 구분하지 않아요.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도 두 번으로 말하지도 않아요.

세대주의자들이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하면 성경을 각 세대 별로 나누어서 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인류 역사를 일곱 세대로 구분함

 

세대주의는 인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서 보고 있어요.

 

1 세대를 에덴동산의 ‘무죄시대’ 라고 하고,

2 세대를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노아 시대까지를 ‘양심시대’ 라고 하고,

3 세대를 노아 홍수 후부터 아브라함까지 ‘인간통치시대’ 라고 하고,

4 세대를 아브라함부터 모세 시대까지 ‘언약시대’ 라고 하고,

5 세대를 모세부터 예수님까지 ‘율법시대’ 라고 하고,

6 세대를 예수님 이후부터 7년 환란 전까지를 ‘교회시대’ 라고 하고,

7 세대를 예수님 재림 후 ‘천년왕국시대’ 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시대가 다르니까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방법도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 시대는 양심으로 하고,

언약 시대는 언약으로 하고,

율법 시대는 율법으로 하고,

교회 시대는 믿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다섯째. 천년왕국 연기설을 주장하고 있음

 

세대주의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을 구원해서 천년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천년왕국이 연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 연기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갔는데,

이것이 신약의 이방인 교회 시대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방인의 때’라고 합니다.

이방인 구원이 끝이 나면 유대인 구원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7년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는 7년 환란 전에 공중으로 휴거하고 난 후 유대인들은 7년 환란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죄값을 치르게 하고 회개케 하는 큰 환란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이 일어나는데,

이들이 바로 요한계시록 7장에서 말하는 각 지파에서 인 맞은 144000명이라는 것입니다.

7년 환란 후에 예수님이 지상으로 재림을 하면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들이 함께 천년왕국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학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기 학설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예수님도 두 번 재림하여야 하고, 천년왕국도 연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메시야가 왔는데 유대인들이 못 알아보고 실수로 죽여서 천년왕국이 연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지 않고 문자적으로 보니까 이러한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니까 성경은 통으로 보지 않고 세대마다 토막 토막 잘라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안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에요.

둘이 연합해서 언약을 이루어가요.

옛 언약은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되어요.

그럼에도 세대주의에서는 새 언약 속에 옛 언약이 담겨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을 무우 토막 내듯이 각 세대별로 잘라서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이 따로 있다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각각의 학설의 장단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각각의 학설마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학설에 매이지 마세요.

학설은 버리고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세요.

그러면 성경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가 됩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大河) 드라마

 

피조물은 창조주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아요.

왜냐하면 창조주는 피조물을 통해서 창조주 자신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이 역사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히스토리라고 하지요.

히스토리(Hi story)란? 그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역사에 오셔서 하신 일이 있어요.

그래서 역사를 그 분(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하 드라마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 의하여 연출이 됩니다.

시나리오가 먼저이고 드라마가 나중인 것입니다.

드라마는 철저하게 시나리오에 의하여 그려지게 되어 있어요.

 

드라마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가 시작이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은 끝이 됩니다.

천년왕국은 역사의 끝에 관한 이야기에요.

결론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서론과 본론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진행이 되어 오다가 끝을 내게 되어 있어요.

끝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들의 저주받는 이야기를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 관한 이야기들이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중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입니다.

난해하다 보니까 다양한 학설들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학설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천년왕국이 실재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인가?

이 세상인가?

아니면,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는가?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는 어디인가?

 

천 년이라는 기간도 의문인 것입니다.

실재 천 년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것인가?

궁금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재다.

아니다 영적이다.

묵시 문학적 표현이라는 등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냥 덮어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신 실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소설이나 동화처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듯이,

하나님이 존재하심도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노아 홍수도 사실이고,

애굽의 바로 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도 사실이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산 것도 사실입니다.

 

솔로몬이 가나안 땅에 성전을 지은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도 사실이고,

해방되어 돌아와서 성전을 지은 것도 사실이고,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를 낳은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사실이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서 승천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사단을 잡아서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가두어두는 것도 사실이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도 사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까지는 사실이고,

예수님 재림 후는 영적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영적이면 다 영적이어야 하고,

사실이면 다 사실이어야 합니다.

 

어느 것은 영적이고,

어느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설령 영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실재 이야기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가 안 되면 다 영적이라는 말로 피해 갔어요.

우리의 지혜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암묵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사실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를 영적이라고만 치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이 둔하여서 그렇게 말은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라가면서 인생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경륜이 쌓여가면서 하나님의 일하심도 더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은 바가 될 것입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모든 성경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으로 깨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멸망을 받은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일들은 모두가 사실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고,

바다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케 한 것도 사실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것도 사실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하실 일도 사실이어야 합니다.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일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재림하신 후에 하시는 일도 사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도 당연히 사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다른 것은 다 실제로 이해하면서도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묵시 문학적 표현이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피해 갔습니다.

우리가 이해 되는 것만 사실로 믿고 이해 되지 않는 것은 전부 영적이라고 했어요.

특히 예수님이 재림 후에 주어지는 천년왕국을 동화속 이야기처럼 이해해 왔어요.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럼 천년왕국을 영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실재 이야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실재로 믿지 않고 있어요.

 

이는 사단의 미혹입니다.

이 시대는 마귀가 성경을 인간들의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교훈 집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예수님의 재림 이야기를 동화처럼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종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재로 자칭 한국에서 가장 큰 장자 교단이라고 하는 진보주의 성향의 교단에서는 이 세상 종말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멸망당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도,

아니야, 그건 영적인 이야기라고 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당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데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서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편집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것임

 

먼저 천년왕국의 의미부터 살펴봅시다.

천년왕국이 어떤 성격을 담고 있는지를 보십시다.

 

본문 6절을 봅시다.

 

계 20: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을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들만 합니다.

 

불신자들은 천 년 후 둘째 부활 때 살아나게 되는데 이를 심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심판 후에 둘째 사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는 둘째 사망이 없어요.

신자들은 천년왕국이 끝나면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년왕국은 사망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한다는 것은 왕과 같은 영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이기는 자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지는 곳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일하는 곳이 아니고 안식하는 곳이에요.

창조 7일 중에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이에요.

천지 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창조로 설명하고 있어요.

창조와 구원은 영적 의미로 같아요.

동의어에요.

 

창조 6일은 성도가 엿새 동안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창조의 일곱째 안식일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교회에서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는 자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누림은 미래의 누림을 미리 맛보기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재 누림이 없는 사람은 미래의 누림도 없어요.

성도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순서로 일하심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 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는 순서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리 아심은 과거인 창세전이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인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장차인 천년왕국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화로움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천년왕국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환란을 당한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심의 유업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엿새를 일한 자에게 일곱째 날의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이 미래의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고난 속에서 이루어가지만 미래에는 영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봅니다.

 

살후 1:5-10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은 바울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어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전한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거짓말이라고 조롱을 했어요.

 

이에 바울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오시니까 너희가 예수를 믿다가 조롱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라고 합니다.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환란 당한 너희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아 주시고,

너희로 하여금 환란을 당하게 한 자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어지는 천년왕국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다가 고난당한 자들에게 위로와 보상으로 주어지는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유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사 57:1-2절.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사야는 의인의 죽음을 평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를 침상에서 편히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침상에서 잠 자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잠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잔다고 하면 깨어남이 있겠지요.

언제 깨어납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 깨어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그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수고한 종들에게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뭔가요?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고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나님의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천년왕국 이야기는 소망과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왜 사실로 나타나야 하는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9장을 봅시다.

 

눅 19:11-27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므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일어날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유가 아니라 실재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를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들이 열심히 장사를 합니다.

 

어떤 종은 열 므나를 남기고,

어떤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주인의 말을 경시하고 장사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놀았어요.

 

귀인이 왕위를 받고서 돌아옵니다.

그러자 종들이 그동안 장사하여서 이문을 남긴 것을 내어놓습니다.

어떤 종은 열 므나를 남겼고,

어떤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러자 왕위를 받아온 주인이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라고 하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주인의 명을 어기고 한 므나로 장사하지 않고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 앞에 하나를 내어놓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이 놈은 내 원수로서 내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자라고 하면서 죽이라고 합니다.

 

왜 므나를 수건에 싸둔 것을 주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 원수라고 합니까?

이는 주인이 왕 위를 받아온다는 것을 농담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주인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주인을 보아 왔는데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우리의 왕은 가이사라고 하면서 우리는 저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치워달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종은 주인이 왕위를 받아온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 진보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 하셨다가 장차 재림 하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위를 받으러 가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만왕의 왕이라는 작위를 받고 오실 때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오시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실재적인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자기 종들이 행한대로 갚아주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주고,

어떤 이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르고 악한 종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건 실재로 일어날 사건이에요.

영적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눅 22:28-30절.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시험 중에 함께 한 자들이므로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나라를 맡기신 것과 같이 예수님이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겨서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고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실재로 일어날 이야기에요.

 

장차 주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적이라고 하지 말고 실재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은 실재적인 사건으로 보면서도,

종들이 열 고을을 다스리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실재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보고 있어요.

 

같은 비유에서 어떤 부분은 실재적인 사건으로 보고,

어떤 부분은 영적으로 보는 것은 온당한 해석법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도록 같은 비유를 가지고도 어떤 부분은 실재로 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짜집기식 해석을 해 왔어요.

 

왜 그러느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불가한 것은 모두 상징이나 영적으로 해석해 왔어요.

영적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면피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해요.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므나 비유가 예수님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하여 하신 말씀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은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여서 상징적으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요?

미래에 일어날 일은 우리가 믿지 못하니까 비유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언약은 때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계시를 열어주심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란 열어서 보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마치 논문의 서론과 본론과 결론처럼 점진적이고 심층적으로 진행이 되어 왔어요.

어제 보다 오늘이 더 열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열립니다.

그러므로 어제 모르던 것이 오늘은 알 수가 있어지고 오늘 모르는 것이 내일은 알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그동안 알고 있던 편견을 깨는 것이므로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을 뛰어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고 또한 생소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없이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내어놓습니다.

그만큼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영적으로만 해석해 오던 것을 실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라 생소하여서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서 이건 뭐냐? 라고 고개를 갸우뚱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저는 천년왕국이 실재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제가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인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천년왕국이 왜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실재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듣고 나시면 아마 아멘으로 화답을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난해하여서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해 오던 것들을 모든 성경을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다가 보니까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 견해이니까 동의가 되면 받아들이시고,

동의가 되지 않으면 성경을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구나? 라고 가볍게 흘려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누가 나와 다른 학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 자체를 의심하여서는 안 됩니다.

서로 받은 은혜가 다를 수가 있으므로 견해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의 신앙을 비판하거나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건 우리가 할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주께 맡기시고 내가 안다는 것이 과연 성경이 그러한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판단을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다 판단을 받을 자들이지 내가 누구를 정죄하고 심판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칼을 휘두르진 마시고 칼은 칼집에 잠시 넣어 두시고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통일된 것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모든 성경이 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의 백성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하나의 소리로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은 것은 천년왕국을 해석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해석하기가 어렵고 난해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여러 가지 학설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에 따라서 배운 신학적인 교리가 다르고 서로가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목사님들마다 다양한 학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법

 

요한계시록 해석이 어려운 것은 장차 될 일을 상징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요한계시록의 성격을 봅시다.

요한계시록의 성격을 알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과 22장을 봅시다.

 

계 1:1-3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9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 22:6-7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자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은 예수그리스의 계시다!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고 들었어요.

즉 예수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이라고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못을 박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러 오신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장차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천국을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장차 될 일이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결론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가 사실인 ‘결코 속히 될 일’이라고 마감을 하십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장차 일어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읽고 듣고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각 장 마다 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완성이 되는지를 사도 요한에게 다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은 이 사실을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주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들을 편지로 세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고 귀를 열어서 듣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여 지게 하시고 들려지게 하실 것입니다.

 

장차 될 일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그 때에 맞추어서 점점 더 계시를 명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보지 못한 것을 지금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장차’ 라고 하는 ‘그 때가 맞다’ 라고 한다면 과거에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제는 장차 될 일이라고 하였으니 실재적인 시간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을 상징과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면서부터 장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2000년을 지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장차 될 일’로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장차’ 라는 그 날들이 도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차 될 일’이니까요.

‘장차 될 일’이란? 실재적으로 나타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장차가 되면 사건화 되어서 공개가 될 것입니다.

 

그 장차가 언제이냐?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비유와 상징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먼 시절이었을 때에는 상징을 그 시대에 맞도록 이해하여야 했어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장차인 그 때가 되었음에도 상징이나 영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점진적 계시와 심층적 계시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언약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는 때와 기한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희미하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심층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만큼 이루어졌고,

현재는 현재만큼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는 장차만큼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과거만큼 계시가 열렸고,

현재는 현재만큼 열리고 있으며,

장차는 장차에 맞도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장차라는 그 때와 가까우니까 과거보다는 더 많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봄에 맺은 과실의 형체와 가을에 다 익은 과실의 형체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봄에는 작은 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탐스러운 모습으로 열려 있게 됩니다.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씨앗처럼 주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본 창세전 언약

 

창세기 15장입니다.

 

창 15:13-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언약의 내용은 후손과 땅에 관한 것입니다.

언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성경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그 후손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언약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이방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돌아오기까지 언약을 하신 후 약 5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언약은 한 순간에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4대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언약을 맺고 완성되기까지 매 순간 순간 언약은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서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漸進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진행하면서 더 실체적이고 구체적으로 심층적(深層的)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언약을 펼쳐가는 모습입니다.

 

이걸 시편 기자가 잘 말해주었어요.

 

시편 105 편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 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29.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31. 여호와께서 말씀 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35.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36.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37.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42.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3.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

 

아브라함 언약은 먼저 그 후손들이 정한 때까지 이방의 객이 되는 것입니다.

정한 때가 되어서 구원자를 통해서 빼내심을 입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를 버려짐과 되찾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고 이삭을 주십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는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한 사람을 먼저 이방나라로 보냅니다.

 

그가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차꼬에 채워져 언약을 이루기 위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바로 왕의 꿈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몽하고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고 애굽의 실질적인 주권자인 총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야곱의 식솔들이 사는 가나안에 기근을 보냅니다.

그리고 양식이 있는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야곱의 12 아들들은 요셉의 후광으로 이방나라인 애굽에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한 때가 되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의 종으로 사로잡히게 만드십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이스라엘을 찾아오게 하십니다.

이 기간을 430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광야 40년을 거쳐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서 아브라함 언약이 1차적으로 완성이 됩니다.

약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후 약 400년의 사사시대를 거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하는 왕정 시대가 열리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완성되어 완전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집니다.

약 1000년에 걸쳐서 아브라함 언약이 온전하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잘 보시면 아브라함 언약이 두 차례를 걸쳐서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차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입니다.

2차는 가나안 입성에서 솔로몬 성전이 완성되기까지입니다.

 

창세전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창세전 언약도 두 차례를 거쳐서 완성이 됩니다.

1차는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심을 입고 천년왕국까지입니다.

2차는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이 역사 속에서 조금씩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심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각 시대마다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 어느 사건이든지 창세전 언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인류의 조상인 아담부터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큰 그림으로 보여주셨어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빼냅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하여 범죄하고 맙니다.

이에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아담은 뱀과 함께 에덴동산에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쉬운 말로 다른 행성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하늘이라 하고 지구를 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십니다.

죄인이 살아가는 저주 받은 땅이 바로 이 세상인 지구인 것입니다.

지구를 일컬어 장망성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자(죄인)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은 지구 밖에 있겠지요.

지구 밖에 있는 에덴동산이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여기가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지 못한 일들을 예수님과 그의 신부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너희를 온전하게 구원해 줄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아담에게 있어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데려다주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고 난 후 에덴동산을 감추어 버립니다.

아담이 살아가는 동네에서는 에덴동산은 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보여주셔야지만 해요.

이걸 계시라고 합니다.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아담에게 소망은 여자의 후손이 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아담이 살아가는 동네에서 표상적으로 이루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해야 하는 일이 에덴동산 바깥으로 나와서는 예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주의 땅인 애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구원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반드시 종말을 통하여서 일어나게 됩니다.

 

최초로 일어난 종말은 노아 홍수입니다.

온 세상이 타락할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주어서 심판 때 살아날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그 방주가 심판 속에서 거룩한 산인 아라랏 산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아라랏 산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에덴동산과 같은 곳입니다.

 

노아의 종말은 장차 일어날 종말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비유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비유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종말의 모습이 영적으로는 노아의 때와 예수님의 재림 때와 같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노아 시대 일어난 홍수 심판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일어날 이 세상의 심판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고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노아의 가족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약 1000년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함으로서 이 세상에는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써 두 민족으로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이스라엘과 이방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저희로 나누었습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너희와 저희가 마치 청군 백군처럼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도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에요.

창세전 언약의 실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구약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창세전 언약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 언약이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흘러가면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완성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룬 것도 있고,

현재 이루어가는 것도 있고,

장차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를 점진적이고 심층적 계시라고 합니다.

점진적이라는 말은 진행된다는 뜻이고,

심층적이라는 말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이 구원되는 창세전 언약이 시간의 흐름과 같이 그 실체가 희미하던 것에서 점점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드라마로 비유해서 이해하여 보세요.

예를 들어서 창세전 언약이 30부작 드라마 라고 합시다.

그럼 1회에서 30회까지 각각의 회차마다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가 전개되겠지요.

회차를 거듭할수록 드라마의 내용이 희미하던 것에서 점차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론은 30회에서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결론은 마지막에 나타나지만 1회부터 그 내용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전개가 됩니다.

처음에는 씨눈과 같은 것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사건이라는 싹을 내고 잎을 피우고 줄기를 내고 완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도 역사 속에서 드라마처럼 점진적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조금 보여주고,

신약에서 조금 보여주고,

종말에 가서 온전하게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세워진 초대 교회에서는 장차 될 일을 말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을 온전하게 다 알 수가 없었어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상징으로 알려 주었으니 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미래에 일어날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들은 상징으로 해석을 하였지만 이제는 그 미래가 되었으니 상징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실재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적인 이야기들은 현재진행형으로서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온전하게 알 수 있도록 사건화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00년 전에 살았던 칼빈이 천년왕국을 이해하지 못하여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때는 아직 요한계시록의 계시가 온전히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것이 지혜로움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온전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영적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어요.

그땐 그렇게 해석하여야 해요.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는 시기에는 상징이나 영적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실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내용들도 실재로 역사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므나 비유가 비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시대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이 담고 있는 상징을 상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실재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때를 따라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읽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라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도 실재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 때는 성경을 이해하는 폭도 좁았고 시대를 보는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성경을 보는 안목이 조금씩 깊어지는 것입니다.

시대를 보는 눈도 열려지니까 예전에 상징적으로 보았던 것들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실체로 드러나고 있음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에 맞추어서 조금씩 눈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속의 상징이 실상으로 나타남

 

초대교회 때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 세력인 음녀 바벨론은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 시대를 거쳐 오면서 각종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마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음녀가 로마의 성격을 가진 커다란 종교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바로 로마 카톨릭입니다.

 

이 시대 로마 카톨릭은 큰 음녀 노릇을 하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말하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에요.

로마 카톨릭은 WCC를 앞세워서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서 이 땅에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표적으로 나타나던 것이 이제는 실재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러한 때에 큰 음녀를 예수님 초림 당시의 로마라고 과거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 된 집단이에요.

적그리스도 국가가 되려면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로마 카톨릭이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된 나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종교로는 이미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요.

이제 정치적으로 온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국가가 되는 것만 남았어요.

지금의 국제 정세는 세계 단일정부를 향하여 가고 있어요.

모든 것들이 하나의 국가 되어야지만 살 수가 있어지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종말 프로그램의 때가 다 되어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언약한 정한 때가 다 되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던 때와 같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출애굽을 하였듯이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악이 점점 더 관영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도 극심하게 타락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이나 WCC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적그리스도적인 종교 통합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영적 간음이에요.

그래서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카톨릭이 벌리는 종교 통합 운동에 동참하고 있어요.

이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들이에요.

그런데 이 시대에는 드러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교회가 버젓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교단들이 종교 통합을 외치는 WCC에 동참하고 있어요.

심지어 WCC를 반대하면 이단으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방송에서도 WCC가 정통적인 기독교 단체라고 선동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 방송을 후원하는 물주들이 대부분 대형교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2013년 부산에서 WCC 총회가 이루어졌을 때 반대하시는 분들의 주장이 한국의 대형교회 대부분이 WCC를 찬성한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들이 왜 WCC를 동조하는가 하면 WCC가 인본주의 신앙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운영하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면 인간의 가치를 부추겨 주어야 해요.

그래야 돈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은 인본주의를 가르치는 WCC가 매력적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세상 사람들이 동의하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해요.

예수 이외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기독교의 편협성을 버리고,

모든 종교는 동등하다고 하여야 전도의 확장성이 생겨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서 신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자면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종교보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 주고 종교가 좋은 것입니다.

이걸 카톨릭이나 WCC 사상을 주장하는 인본주의로 세워진 교회들이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로 세워지는 교회에는 세상에 덕망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들은 이들의 이름을 팔아서 호객행위를 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요.

이게 종말의 교회상이에요.

그래서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고 세상의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은 편협성을 담고 있어요.

복음은 모두에게 들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들에게만 들려져요.

그러므로 편협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지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다수의 사람이 기뻐하는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종교 통합의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히 다수를 따르는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수를 원하는 대형 교회들에게는 편협성을 가진 복음보다는 세상에 확장성을 가진 인본주의가 좋은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로 세워지는 조직화 된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시대는 교회 안에는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으며 기독교가 세상의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사도 요한에게 종말의 교회가 음녀가 되었다고 알려주고 있어요.

음녀가 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이 기이히 여기는 것입니다.

 

천사의 증거대로 이 시대 교회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므로 지금은 요한계시록을 초대교회 식으로 음녀는 로마라는 상징적 해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 시대는 천년왕국을 영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땐 상징하는 것들이 역사 속에서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의 예언들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요.

모든 계시가 완성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므로 천년왕국도 영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실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큰 교회에 다니는 권사님이 자기 교회 목사님께서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요한계시록을 강해한다고 하니까 이단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소경 인도자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소경이니까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안 되는 금서(禁書)로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의 말을 듣는 그 사람도 소경이긴 마찬가지에요.

 

주석은 성경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에요.

자기가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라고 자기 생각을 풀어 놓은 것이 주석이에요.

그러므로 주석은 참고는 하시되 절대성은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성경은 비밀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므로 성령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요.

성령이 깨닫게 해주심이 있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신앙 수준에 맞게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어린아이 신앙 때에는 어린아이 신앙만큼 깨닫게 해 주시고,

신앙의 경륜이 어른의 신앙이 되면 어른의 신앙만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어려서는 어린아이 생각을 하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생각을 버리듯이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아 가는 것도 신앙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성경을 이해하는 폭이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봅시다.

 

고전 13:9-12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온전하게 아는 것이 있다고 하지요.

어렸을 때는 부분적으로 알았어요.

그러나 장성한 자가 되면 온전하게 알게 되어요.

예언적인 의미로 보면 초대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알았어요.

그러나 종말의 교회는 장성한 자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계시가 열리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두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온전한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희미하던 것이 1000년 전에는 조금 더 밝혀지고 지금은 더 많이 밝혀졌어요.

그러므로 500년 전에 성경을 해석하던 것과 지금 성경 해석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칼빈도 부분적으로 보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칼빈보다 더 깊고 온전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계시의 흐름의 문제에요.

 

그 시대는 그게 옳았고 지금은 이게 옳아요.

그러므로 과거적 해석에 매이지 말고 현재적 해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더더욱 그러해요.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은 세상의 창조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서라는 말이에요.

즉 이 세상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만물이 창조 되기 전에 어떤 원인이 있었어요.

그 원인을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이 만물을 창조케 한 원인인 것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는 언약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땅과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이야기에요.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창세전이라는 말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이걸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태초’라고 합니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어요.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이러면 태초에 즉 창세전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교제하였다고 합니다.

 

요일 1:1-3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는데,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고서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럼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을 한 사도 요한은 자신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그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이는 육신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함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백성들이 지금 죽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살리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살리느냐?

창세전 언약을 보면 그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사함을 얻게 하여서 살려내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죽으려고 말이에요.

 

태초에 삼위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을 하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이것을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였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말미암아” 라는 말은 어떤 원인을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고 하였으니,

만물이 창조가 된 것은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고,

그가 왜 만물을 만들어야 했는지 살펴봅시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에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피조물 바깥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주가 만물을 왜 만들었을까요?

이는 창조주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그를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만물 속에 왜 오셨을까요?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구원이야기에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 속에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담겨 있어요.

창조와 구원은 동의어에요.

영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천지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풀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속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천지라고 합니다.

천지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역사, 그의 이야기 (Hi story)

 

성경을 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천(天)은 보이지 않는 하늘이고,

지(地)는 보이는 이 세상의 땅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가지고 창세전에 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역사의 주인이에요.

그가 역사를 통해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고자 하는 창세전 언약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성령께서 바울에게 창세전 언약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너무도 기뻐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계획인지 4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것은 죄사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죄사함을 주느냐 하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주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그 나라에서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나요?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낳느냐?

자신의 죽음으로 낳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한 말의 밀로 이 땅에 와서 죽으셨어요.

그리고 수많은 밀 알들을 생산해 내셨습니다.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소를 낳고,

양이 새끼를 낳으면 양을 낳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새끼를 낳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낳은 자식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전에 예정이 되어 있었어요.

이를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호적에 올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을 하시자 천하에 호적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낳아질 것을 세상의 것으로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어요.

녹명이 되었다는 것은 녹명 되지 않은 자들도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창세전에 하나님은 두 부류의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천지로 의역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지를 의인화(擬人化) 하면 하늘 백성과 땅 백성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창조는 단순하게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백성과 땅에 속한 백성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가 서로 섞여서 살아가고 있어요.

겉으로는 누가 하늘에 속한 자이고,

누가 땅에 속한 자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갈라내십니다.

 

초림으로 오셔서는 영적으로 갈라내시고,

재림으로 오셔서는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로 데려가시고 땅에 속한 자는 그대로 땅에 두는 것으로 갈라내세요.

 

이렇게 갈라지는 심판을 창세기에서는 창조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하시고는,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 중에 있다고 말해주고,

3절 이후부터는 갈라내고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땅이 흑암입니다.

흑암은 죄 아래 있는 모습이에요.

흑암 속에 빛이 있어요.

흑암 속에서 빛의 아들들을 빼내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창조인 것입니다.

이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흑암은 죄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흑암에서 나오는 것은 곧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요.

이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 속에서 빛의 아들들을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빛의 아들들이 언약의 후손이에요.

예수님은 언약의 후손만 구원해 내세요.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사망의 세력에 붙잡혀 있어요.

이에 예수님이 오셔서 일생에 사망에 종노릇하던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여기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을 말해요.

아브라함 후손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럼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까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빠지는 것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인 타락과 구원과 영광, 이 모두가 이 세상이라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어요.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일하시고 역사 밖으로 나가십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이 된 창세전 언약이 지금은 요한계시록 후반부까지 와 있어요.

이 시대는 역사가 끝이 나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과거적으로 이미 일어난 사건도 있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도 있고,

장차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으로 말하면 과거 구원과 현재 구원과 미래 구원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대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를 영화롭게 하는 모든 일들이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과거 시제’로 말하고 있고,

지금 “구원을 이루어 간다” 라는 ‘현재 시제’로 말하고 있고,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라” 는 ‘미래 시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구원과, 현재 구원과, 미래 구원 모두가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죄 아래서 종노릇 하던 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어서 하나님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여서 그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천지가 창조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도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사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사실이에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오셨는가요?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는 일을 하시려고 오셨어요.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고 하셨나요?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그의 피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도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걸 실재화 시키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와 계신 성도는 구원을 실재로 여기고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영적 천국과 실재하는 천국

 

두 가지 구원이 있어요.

 

첫째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건져짐을 입는 영적인 것이고,

둘째는,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당하는 육적인 것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영과 육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몸에 구속이라고 하였어요.

 

예수님의 초림은 영의 구원을 위함이고,

예수님의 재림은 영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몸의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게 되면 영과 육이 다 구원을 받게 되는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과 육이 다 구원을 받은 자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영적인 것이 아니고 실재로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 창세기 1장의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까지의 창조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가 세 텀으로 이루어짐

 

7일간의 창조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창세전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7일간의 천지 창조 속에는 천년왕국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 7일간의 천지 창조 속에 천년왕국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십시다.

 

천지 창조가 며칠간 일어났나요?

7일간이지요.

일곱째 날 안식일까지가 창조입니다.

일곱째 날은 모든 일을 다 하신 후에 쉬는 날이지만 7일 창조에 속한 날이에요.

 

7일 창조를 보면 3 텀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텀인 3일은 갈라내는 일을 하셨고,

둘째 텀인 3일을 채우는 일을 하셨고,

셋째 텀인 일곱째 날에는 안식을 하셨습니다.

 

창조의 세 텀은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과 같아요.

 

첫째 텀인 갈라내는 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빼내는 구원을 하시는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둘째 텀인 채우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하늘에 신령한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텀인 모든 일을 다 하시고 쉬신 것은, 장차 재림하면 천년왕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 7일은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을 다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엿새 동안 갈라내고 채우는 일을 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곱째 안식하는 날이 바로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이 이 세상에 속한 날이라고 한다면,

일곱째 날을 상징하는 천년왕국도 이 세상 속에서 주어지는 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엿새가 다 끝나가는 때입니다.

때가 저물었어요.

곧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되었어요.

만물이 이를 각양의 징조로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럼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타락에서 건짐 받아 그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서 구원을 받는 것에서부터 그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까지 이 역사 속에서 모두 다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원형과 모형, 원본과 복사본

 

이 세상은 실상과 모형으로 되어 있어요.

원본과 복사본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이 언약으로 나타날 때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타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역사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역사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럼 보이는 이 역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 말미암았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실상이고, 보이는 이 세상은 모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원본이고, 보이는 이 세상은 복사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의 눈으로만 보여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마치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가면 땅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과 같아요.

 

모세가 성막을 짓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성막은 하늘에 있는 식양을 따라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창세전에 언약하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을 일컬어 하나님의 처소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 원본이고,

땅에 있는 성막은 복사본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만물이 그러해요.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두 바울이 있어요.

삼층천에 올라간 바울은 하늘에 속한 바울이고,

세상에 있는 바울은 땅에 속한 바울입니다.

땅에 속한 바울은 흙으로 났고,

하늘에 속한 바울은 성령으로 났습니다.

흙으로 난 바울이 죽으면, 하늘에 속한 바울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9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죽음을 헌 장막을 버리고 새 장막을 입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쉬운 말로 헌 집 주고 새 집을 받는 것입니다.

땅에서 난 헌 몸을 주고 하늘로서 난 새 몸으로 바꿔 입는 것이니까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을 다녀온 후 빨리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기를 소원하였어요.

천국을 보고 오니까 이 세상을 빨리 떠나고 싶은 겁니다.

너무도 황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몸을 벗고 하늘의 몸을 입기를 탄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의 눈을 열어서 천국을 보게 하여 주었듯이 바울에게도 천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두 몸이 있어요.

흙에서 난 몸이 있고,

하늘로서 난 몸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흙에서 난 것은 흙으로 돌려주고 하늘의 몸을 덧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는 장차의 나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는 복사본이고, 원본인 미래의 나는 하늘에 있어요.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원본인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나라로서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하늘에 있는 보이지 않는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복사본이라고 하였으니까,

이 세상에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예표하는 복사본의 나라가 있어야 하겠지요.

쉬운 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라는 천국을 이 세상에도 예표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예표하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국이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원본의 나라는 피조 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어요.

피조 세계에서는 복사본으로만 유추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유추일 뿐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것은 그 나라에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복사본의 나라인 천년왕국이 끝이 나고 원본의 나라에 가면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원본인 영원한 천국이 아니고 이 세상에 속한 복사본 천국인 천년왕국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창세전 언약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천국도 역사 속의 천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안식일은 두 천국을 예표함

 

안식일도 원본 안식일과 복사본 안식일이 있어요.

복사본 안식일은 역사 속에서 주어진 것이고,

원본 안식일은 역사 바깥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집니다.

 

창조 7일은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날까지가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곱째 날 안식일은 원본이 아니고 복사본이 되는 것입니다.

 

7일 안식일이 있고,

8일 안식일이 있어요.

 

7일 안식일은 역사에 속하였고,

8일 안식일은 역사 밖에 속하였어요.

 

7일 안식일이 천년왕국이고,

8일 안식일은 역사 밖 하나님 나라에요.

 

일곱째 날 안식일은 복사본이고,

여덟째 날 안식일은 원본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천국을 상징해요.

그럼 두 천국이 있음이 되겠지요.

 

일곱째 날에 속한 천국과,

여덟째 날에 속한 천국이 있겠지요.

 

일곱째 날에 속한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주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국인데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 속한 천국은 천년왕국이 끝이 나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창조를 앞서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 원인이 되어서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인은 보이지 않고 창조는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묵시라고 하고, 보이는 것을 역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가 된 피조물은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부터 나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게 하려고 믿음을 주었어요.

믿음이 오면 이 사실이 믿어져요.

그래서 믿음이 오면 보지 못하는 그 세계를 증거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받은 자들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본 것처럼 실상으로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보지 못하였어요.

그러나 믿음으로 천국을 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천국을 보여주는 세상 속에 있는 천국인 것입니다.

창조에 속한 일곱째 날 안식일인 천년왕국이 지나면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안식의 나라인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던 그 나라인 창세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인 천년왕국은 창세전이라는 태초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자 주어진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을 지나서 여덟째 날로

 

예수님은 원래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계셨어요.

그 하나님 나라를 창세전이라고도 하고 또는 태초라고 하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인 것입니다.

태초의 천국에 계시던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나요?

이는 태초에 하신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 있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복사본인 이 역사에서 끝이 나면,

원본의 나라인 역사 바깥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찬미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창조에 속한 일곱째 날 안식일 이후에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여덟째 날 ‘거룩한 대회’로 모이는 ‘큰 안식일’이 있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속에 담아 놓았어요.

 

레 23:33-3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 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칠 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 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민 29:35절. “여덟째 날에는 ‘장엄한 대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이스라엘의 7대 절기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구속사를 말해주고 있어요.

알다시피 7대 절기는 봄 여름 가을 절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세 가지 사역을 봄 여름 가을 절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세 가지 사역이 있어요.

 

선지자는, 백성들이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당하는 사역입니다.

이것은 육체로 오셔서 하시는 과거적 사역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제사를 대신 드려주고 보호하는 사역입니다.

이는 부활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시는 현재적 사역이에요.

 

왕은,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사역입니다.

이것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오셔서 하시는 미래적 사역이에요.

 

예수님의 삼직은 7대 절기 속에도 담겨 있습니다.

 

봄 절기로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로는, 칠칠절과 넉 달 농사가 있고,

가을 절기로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말하고,

여름 절기는, 예수님의 영적 사역을 말하고,

가을 절기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사역을 말합니다.

 

봄 절기는, 과거 사역이고,

여름 절기는, 현재 사역이고,

가을 절기는, 미래 사역입니다.

 

이걸 성막으로 말하면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말할 수 있어요.

 

뜰은, 육체로 오셔서 하신 사역이고,

성소는, 성령으로 오셔서 하는 사역이고,

지성소는,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하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7대 절기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사역 전부를 상징하고 있어요.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무교절은, 예수님의 무덤 속에 계심을 말하고,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오순절은, 성령 강림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을 말하고,

나팔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으로 역사가 끝나는 것일 것 같으면 나팔절 이후에는 절기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팔절 이후에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어요.

속죄일은, 온 민족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고,

초막절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막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절기가 끝이 나면 여덟째 날 거룩한 대회인 큰 안식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7일을 지킵니다.

초막절 7일로 역사 속의 모든 절기는 끝이 납니다.

이는 역사의 끝을 말합니다.

그런데 초막절 7일이 지나고 난 후 여덟째 날이 있어요.

이는 역사 밖을 말해요.

 

여덟째 날을 ‘거룩한 대회’라고 합니다.

대회란? ‘큰 모임’ 또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덟째 날 안식일을 ‘거룩한 대회’ 또는 ‘장엄한 대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막절 이후 여덟째 날 거룩한 대회의 날이 바로 창세전이라는 태초의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1년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기 때문에 1년은 곧 역사 전체를 함축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1년 절기 속에서 초막절 이후 여덟째 날인 거룩한 대회로 나아가는 것은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예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 이후는 절기가 없어요.

다음 해 봄이 오기까지 긴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절기가 없고 다음 해로 넘어간다는 것은 역사 바깥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여덟째 날 안식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거룩한 성회라고 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세상 바깥 하나님 나라에서 사용하는 단어에요.

초막절을 지나서 여덟째 날을 거룩한 성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모임이라는 뜻이에요.

 

초막절까지가 이 역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초막절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초막절에서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세 가지 사역이 다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이후 나팔절 이전까지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나팔절 이후 초막절까지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일어나는 천년왕국이 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을 상징하는 초막절도 이 창조에 속한 것이므로 창조의 수인 7일간을 지내고 나면 창조 바깥의 세계를 상징하는 여덟째 날에 들어가서 거룩한 대회인 큰 안식일에 참예케 됩니다.

 

이 여덟째 날 거룩한 대회인 큰 안식의 나라가 바로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여덟째 날에 참예하는 자들은 역사라는 피조 세계에서 영원이라는 창조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팔 일 할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태어나서 팔 일 만에 받는 할례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자는 7일 창조에 속한 사람이고,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여덟째 날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할례는 세례를 상징합니다.

이 세례는 예수 안에서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여덟째 날 거룩한 성회에 참예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

 

예수님도 이 땅에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이 다 이루고 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나라에서 하실 일을 다 마치고 의의 나라로 돌아가는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하실 자에게 눈물로 통곡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 5: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구원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자리가 어디인가요?

창세전이라는 태초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태초로 돌아가려면 역사에서 해야 하는 일을 다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을 창세전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요 17:4-5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자기 백성들 구원 속에는 예수님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구원도 들어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나면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자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로운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인가요?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그 자리입니다.

우리를 존재케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럼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자리가 어디인가요?

예수그리스도 안입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 준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 속에서 나왔다가 다시 아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완성 지점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나왔으니 예수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으로 돌아가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는 천년왕국에서 어린 양과 혼인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하고 성도를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도는 신랑과 신부가 만나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 예수님과 성도는 신랑 신부라는 한 몸으로 살다가 천년이 차고 나면 태초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천지라는 이 역사 속에서의 모든 일들이 끝이 납니다.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침

 

고전 15:22-24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 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잘 보시면 부활을 순서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첫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살아나는 자들입니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24절에 “그 후에 나중”이라는 말입니다.

 

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 후에 나중에” 모든 것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합니다.

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무엇인가요?

 

멸하는 것은 이 세상입니다.

아버지께 바치는 나라는 천년왕국에서 살던 자기 백성들을 몽땅 데리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마귀가 잠시 무저갱에서 나와 전쟁을 하다가 완전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두루마리 말리듯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완전하게 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년이 차면 공중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년왕국도 사라지고, 유황 불 못인 이 땅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보세요.

새 번역본으로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히 1:10-12절. “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11. 그것들은 없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12.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지으실 때 두루마리처럼 말아 치울 것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용도가 다하면 폐기처분 한다는 뜻입니다.

천지를 만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럼 천지는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이 끝이 나면 천지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천년왕국까지가 창조에 속한 이 세상이므로 천년왕국이 끝이 나면 우리는 영원한 신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아버지 나라로 데리고 가시게 되는 날 창세전 언약은 완전하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덴동산에서 첫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동산에서 에덴으로

 

구원은 탈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역사를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에덴동산에 예표적으로 담아 두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이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성도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표적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을 봅시다.

 

창 2:8-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잘 보세요.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합니다.

10절을 보면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라고 합니다.

이러면 에덴과 동산은 다른 동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재로 에덴과 동산은 구분이 된 동네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흔히 에덴동산을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덴과 동산은 천년왕국과 천국과 같은 것입니다.

동산은 이 땅의 천국인 천년왕국과 같고,

에덴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발원하는 물은 생명수를 말합니다.

그러면 에덴이 생명의 근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그럼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사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나라인 묵시를 말하고,

동산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물이 에덴에서 흐를 때에는 이름이 없는데,

에덴에서 나와 동산으로 흐르면서 이름을 가지고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에덴은 이름이 없는 무명의 세계이고,

동산은 이름이 있는 유명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이 사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이름이 있는 세계는 피조물이 사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구원이란? 유명의 세계인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무명의 세계인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사는 에덴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갓 창조가 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생하는 자가 되면 생명의 근원이 있는 에덴으로 나아가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실패하였어요.

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아담이 범죄하고 쫓겨난 후에는,

하나님이 사는 에덴동산은 위에 있는 무명의 세계가 되고,

쫓겨난 아담이 사는 에덴동산 바깥세상은 아래에 있는 유명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아래 동네인 유명의 세계에 사는 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서 위에 동네인 무명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담도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럼 아담도 예수를 믿어야 해요.

그 예수가 에덴동산에서는 생명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은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진짜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먹지 못한 그 생명과를 예수님이 친히 생명의 떡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에게 먹힘 당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짐승의 구유(밥통)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아담이 먹지 못한 그 생명과에요.

구약의 아담은 먹지 못하였지만 신약의 아담들은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났어요.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먹힘 당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십니다.

어디까지 간섭하시느냐 하면 영원토록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가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났어요.

이젠 땅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하늘로 이끌고 가세요.

아담이 쫓겨난 그곳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의로워져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곳이 이 땅에서는 천년왕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가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지 못한 것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뱀의 미혹으로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완성시켜 주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실낙원을 예수님이 복낙원으로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반드시 피조 된 이 세상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지 못한 것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미혹으로 실패한 천년왕국을 예수님이 오셔서 뱀의 권세를 깨트리고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야 했습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낳아진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뱀의 미혹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어요.

아담의 범죄로 실패한 것을 하나님은 예수를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서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이 회복시킨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회복하여 주신 나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생겨난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아들의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에서 신의 아들로

 

천국이라는 말은 하늘나라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사는 나라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신들이 사는 나라에요.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들이 되어서 말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신입니다.

그럼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자들도 신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성도들을 일컬어 땅에서 난 사람이라 하지 않고 하늘로부터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시나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나아지는가 하면 창조의 방식인 성령으로 낳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신이고,

성령도 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도 신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이 되어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신들이 사는 태초라는 그 신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신의 아들을 낳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이에요.

아버지가 신이면 아들도 신이에요.

예수님이 역사에 오신 것은 신의 아들들을 낳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구원이란? 예수님에 의해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하면 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입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걸 천지 창조로 보여주었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죄와 사망을 상징하는 흑암이 나오는 것입니다.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중이라는 말은 죄를 상징하고 죽음을 상징해요.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가요?

죄와 사망이라는 동네에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운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운행이라는 말은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로 부화를 시키려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낳듯이 죽음에서 살려내는 어떤 일을 하시려고 대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빛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흑암을 죄와 사망이라고 하였으니까 죄와 사망이라는 동네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니까 흑암이 찢어지고 그 속에서 빛의 아들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라고 부르니까,

나사로가 사망 권세를 뚫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속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빛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절의 흑암 속에 갇혀 있는 빛이 바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죄와 사망 가운데 갇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이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면 자기 백성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에서 출애굽하는 것으로 보여주셨고,

신약에서는 세상에서 교회로 나오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5장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온다고 하셨어요.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19-2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서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에게 주어서 살려내라고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와 사망이라는 동네인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냅니다.

이것을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천국 복음으로 소리를 치면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온다고 합니다.

 

세상이라는 무덤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과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이 있어요.

이는 선에 속한 사람과 악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에요.

즉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되지 않은 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이걸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내 양과 다른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함께 섞여 있었어요.

마치 창세기 1장 2절처럼 흑암 속에 빛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흑암 속에 있던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둠 밖으로 나오듯이,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소리를 치면 빛에 속한 자가 어둠을 찢고서 나오게 됩니다.

 

이러면 자연히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가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라는 말은 이들이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에요.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니까 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온 자들에게 아버지의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면 자동적으로 예수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은 악한 자인 사단에게 속한 어둠의 아들로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심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어둠 속에서 빛을 불러내면 그 자체가 심판인 것입니다.

빛은 구원을 받는 것이고,

어둠은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동네를 낮이라 하고 어둠의 동네를 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을 의인화 하면 빛의 아들들입니다.

빛의 아들들이 사는 동네를 낮이라 하고,

어둠의 아들들이 사는 동네를 밤이라고 합니다.

낮이라고 하는 빛의 아들들이 사는 동네를 천국이라고 하고,

밤이라고 하는 어둠의 아들들이 사는 동네를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 속에서 빛의 아들들이 사는 동네와,

어둠의 아들들이 사는 동네가 따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 교회와 세상인 것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불러냄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라고 합니다.

어둠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었기 때문에 불러냄을 입은 자들이 모인 교회가 낮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빛의 아들이라고 하고 낮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밤은 어디인가요?

교회 바깥인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실재적으로 구분이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어둠이라는 이 세상에서 빛의 나라로 빼내시는 것입니다.

그곳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몰고 오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낮이라는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낮이라는 동네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가서 천 년 동안 안식을 하고,

어둠의 아들들인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유황 불 못인 밤이라는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완전히 갈라지는 일이 실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영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실재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서 각자 예비 된 곳에 두십니다.

양이 사는 동네를 천년왕국이라고 하고,

염소가 사는 동네는 무저갱 유황 불 못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가게 되면 이 땅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이 유황 불 못 지옥이에요.

 

베드로가 그럽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합니다.

하루를 천 년과 같다는 베드로의 말을 빌리면 창조 7일은 7천 년과 같은 것입니다.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은 6천 년과 같고,

일곱째 날 안식하신 날도 천 년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도 역사적 사실이니까,

천년왕국도 역사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이 아니고 실재로 말이에요.

그래야 7일 창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7일 창조를 다 하셔야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다 이루심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요.

여덟에 속한 나라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날 태초 라고 하는 신들이 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들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러자면 예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내야 합니다.

그래야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그 나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본래의 그 자리인 하나님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창세전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원한 천국과,

보이는 세계의 시간 속에 천국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보이는 천국인 천년왕국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천국인 천년왕국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영원한 천국의 복사본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를 보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저녁과 아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해와 달이 없는 세계인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면서 몰고 오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해와 달이 쓸데가 없고 어린 양이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해와 달이 쓸데가 없는 창조 바깥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 21:23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피조 바깥의 창조주가 살아가는 세계는 해와 달이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는 피조 세계 바깥에 있는 하나님이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는 나라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빛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천년왕국이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어린 양이 그 등이라고 하면서 해와 달이 쓸데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년왕국을 거쳐서 세상 바깥에 있는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 속에 있는 천년왕국은 역사 바깥의 하늘에 있는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을 영원한 나라라고 하지 않고 숫자가 있는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숫자에 속한 이 세상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는 숫자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영원한 천국이라고 하지 천 년 천국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피조물 바깥에 있는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나라라고 하고, 피조 세계에 속한 하나님 나라는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원은 묵시에 속한 것을 말해요.

천년왕국은 묵시의 세계를 예표하는 것이지, 실재 묵시 세계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하였어요.

천년왕국이 끝나면 숫자가 필요 없는 영원한 묵시의 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

 

종말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끝이란 뜻입니다.

둘째, 새로운 시작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종말을 예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때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시고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속에서 노아에게는 은혜를 주어서 살려내십니다.

모두가 죽어가는 곳에서 노아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가족은 방주를 타고 홍수의 심판을 면하고 은혜의 땅을 상징하는 ‘아라랏’이라는 산에 정착하게 됩니다.

 

“아라랏” 이라는 말은 “창조” “거룩한 땅” 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땅이란?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라랏 산은 영적인 의미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홍수로 잠겼습니다.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는 공중에 있는 하늘나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노아에게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새 감람나무는 죽었던 나무가 새 순을 낸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세상의 나무라는 뜻입니다.

즉 부활의 세계를 말합니다.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의 것을 물고 왔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마 3: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습니다.

성령을 왜 비둘기 같다고 할까요?

이는 성령이 하늘에 평강을 몰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임한 것은 이 예수가 세상에 하늘에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온 천하에 공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5-7절.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친히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그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예수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십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그 분인 것입니다.

 

이 예수가 바로 창세전에 예정이 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가 왔습니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이 하늘의 평화를 몰고 오신 것입니다.

 

방주는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럼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땅은 심판이 없는 평화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노아에게 이 땅은 평화의 땅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심판이 없는 새로운 땅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란? 감람나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감람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럼 아라랏 산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는 곳이란 뜻이 됩니다.

이는 천년왕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가는 곳이 천국왕국이에요.

천년왕국은 정죄함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천년왕국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긍휼의 나라에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긍휼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 노아 홍수로 끝이 났다고 한다면 방주가 안착한 아라랏 산이 바로 천년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 이후 또 다시 인류 역사는 타락의 역사로 진행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 홍수는 장차 임할 세상 종말을 예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장차 임할 세상의 종말을 노아의 홍수와 비교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봅시다.

 

벧후 3:6-7절.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구약에서는 홍수로 심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불로 심판한다고 하십니다.

그럼 노아 홍수는 종말에 임할 세상의 심판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창조의 세계를 뜻하는 높은 산에 안착하였듯이,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성도들이 이끌려 올라가는 공중이 바로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지요.

이게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천년왕국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를 통해서 장차 이루어질 심판과 천년왕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부터 노아 시대까지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여서 일어날 심판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서 맛보기로 잠시 보여주시고 인류 역사는 다시 시작이 됩니다.

창세전에 계획하신 그 때까지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그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는 그 때까지 인류 역사는 진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수치를 드러내는 타락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늘과 감추어 버린 에덴동산

 

천지란? 하늘과 땅입니다.

땅은 보이는 곳이고 하늘은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보이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늘 위에 세상도 만드시고 주관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을 봅시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땅은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하늘은 사라지고 땅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예표하는 하늘은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7일 창조를 땅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온 인류 역사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마치 책의 첫 페이지와 같습니다.

책의 첫 페이지를 보면 책의 전체 내용을 목차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0 페이지에는 서론으로 이런 내용이고,

50 페이지에는 본론으로 이런 내용이고,

100 페이지는 결론으로 이런 내용이라는 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그러해요.

책의 내용을 모두 망라하는 목차와 같아요.

창세기 2장부터는 1장의 목차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창세기 2-3장에서 샘플로 보여주십니다.

1장에서 감추어진 하늘이, 2장에서는 에덴동산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세기 2-3장에서 보여주었던 에덴동산을 역사 속에서 감추어 버립니다.

실제 역사는 창세기 4장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늘도 창조에 속하였고,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도 창조에 속한 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도록 하나님이 감추어 버렸습니다.

하늘과 에덴동산은 죄인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요.

에덴동산은 죄 없는 자만이 볼 수가 있고 갈 수가 있어요.

 

감추어진 에덴동산을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몰고 오십니다.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 땅에서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으로 주시고자 함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늘을 어떻게 감추었는지 살펴봅시다.

 

바울은 삼층천에 다녀왔어요.

삼층천이란? 셋째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하늘이 세 개 라는 뜻이 되겠지요.

 

창세기 1장을 봅시다.

 

창 1:6-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잘 보시면 하늘이 세 개입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궁창을 중심으로 해서 궁창 위와 궁창 아래로 나누십니다.

궁창을 중심으로 두 세계가 나누어집니다.

이건 마치 시내 산 위와 시내 산 아래를 중간에 구름이 나누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궁창 아래를 세상이라고 하고,

궁창 위를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래 위로 나누는 궁창도 하늘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궁창 위라는 하늘과, 궁창이라는 하늘과, 궁창 아래 하늘로 하늘이 세 개가 되겠지요.

 

궁창 아래 있는 하늘은 첫째 하늘이고,

궁창이라는 하늘은 둘째 하늘이고,

궁창 위에 있는 하늘은 셋째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과 같아요.

 

애굽은 첫째 하늘과 같고,

광야는 둘째 하늘과 같고,

가나안은 셋째 하늘과 같아요.

 

애굽에서 보면 광야와 가나안은 같은 곳이에요.

이건 마치 성막과 같아요.

성막은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 있지만 밖에서 보면 둘로 보여요.

 

세 하늘은 성막으로 비유하면 뜰과 성소와 지성소와 같아요.

 

뜰은 첫째 하늘과 같고,

성소는 둘째 하늘과 같고,

지성소는 셋째 하늘과 같아요.

 

그런데 밖에서 보면 뜰과 성소로 구분이 되어요.

성소와 지성소를 하나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천년왕국과 천국과 같아요.

성소는 역사 속의 천국을 상징하는 천년왕국을 상징하고,

지성소는 역사 바깥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셨지요.

이는 예수님 안에서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예수 안이 천년왕국도 되고 천국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비록 역사 속에 있다고 하여도 영원한 천국에 있는 것과 같아요.

 

성막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이 있어요.

성막은 셋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셋이에요.

 

뜰은 첫째 하늘이지만,

성소와 지성소는 둘째 하늘이면서도 셋째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은 다르면서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갖다 온 삼층천이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된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가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지요.

그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계신 하늘에 다녀온 것입니다.

바울이 다녀온 삼층천이 바로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던 그 천국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국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둘째 하늘이면서 셋째 하늘을 예표하는 하늘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았던 삼층천은 영원한 천국은 아니고 영원한 천국을 예표하는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말이 하늘 위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첫째 하늘과 궁창이라는 둘째 하늘 너머에 있는 나라가 바로 셋째 하늘이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양이 빛으로 계신 하늘나라를 첫째 하늘인 궁창 위로 숨겨 버린 것입니다.

첫째 하늘 너머에 있는 궁창이라는 둘째 하늘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은 에덴과 동산과 같아요.

에덴과 동산은 분명히 다르지만 역사에서는 하나에요.

영적으로 보면 동산은 천년왕국과 같고 에덴은 천국과 같아요.

에덴과 동산이 둘이면서 하나이듯이 천국과 천년왕국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 안이 그러해요.

예수 안에 있으면 에덴과 동산을 동시에 품은 것이 되어요.

천년왕국과 천국을 동시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된 나라인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통칭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하늘의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이 있는 곳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이 나라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숨겨 버린 그 하늘나라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하늘나라에 있던 흰 옷 입은 무리들이 함께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럼 땅에 있는 성도들은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그들과 만나서 함께 천 년 동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2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순서상으로 보면 요한계시록 21장은 예수님의 재림 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서 몰고 오시는 그 동안 감추어졌던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한다고 하신 그 나라입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예수님

 

요 14: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하시지요.

갔다가 다시 온다는 것은 재림을 말해요.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살아갈 처소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몰고 오세요.

신부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혼인 모습 속에 담겨 있어요.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 속에는 예수님과 성도의 혼인 모습이 담겨 있어요.

이스라엘은 아들의 신부를 아버지가 정해 놓아요.

때가 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미리 정해 놓은 신부에게 보냅니다.

이 때 결혼 지참금을 주어서 신부를 값 주고 사게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신부들을 생명책에 녹명을 해 놓은 것과 같아요.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있는 신부들에게 보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창세전에 정해 놓은 신부들을 자기 피값으로 삽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와서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럼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때가 되면 신랑이 와서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은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약혼의 단계인데 이는 신랑이 결혼 지참금을 주고서 신부를 사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신랑은 신부를 값을 주고 사 놓고는 곧바로 신랑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2-3년 후에 다시 와서 그 때 신랑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값 주고 사 놓고서는 내가 처소를 예비하면 그 때 다시 와서 내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럼 신부는 임자 있는 몸으로 정절을 지키면서 신랑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한 때에 신랑이 와서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피 값으로 사 놓고는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고서는 하늘나라로 가신 것과 같습니다.

이제 때가 되면 다시 와서 이 땅에 있는 신부들을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하러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소가 예비 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영원히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신부로 받게 되는 구원이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값을 주고 사는 구원을 받았어요.

구원받은 자로 이 땅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장차 신랑의 집으로 영원히 옮겨가는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옮겨갈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하는 처소는 1차적으로는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하나님과 거하는 처소가 마련이 됩니다.

이 처소는 영적인 처소에요.

그러나 실제 처소가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면 몰고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우리를 그곳으로 옮겨주십니다.

이를 예수님의 재림 때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공중을 이끌어 올린다고 하셨습니다.

공중으로 이끌려 가는 그곳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면 이 세상은 불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짐승들이 불로 심판을 당합니다.

이 세상이 유황 불 못이에요.

짐승들이 고통당하는 지옥인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세요.

공중에서는 천 년 동안 어린 양과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땅에서는 천 년 동안 유황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몰고 오십니다.

어린 양이 만왕의 왕이 되어서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도 피조에 속하였어요.

하지만 묵시를 예표하는 땅이에요.

 

천 년이라는 말은 묵시성을 담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 하는 시간을 말해요.

역사에 속한 시간인 것입니다.

 

천 년은 영적으로 보면 묵시적인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보셔야 합니다.

하지만 묵시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실재까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 년이라는 말은 시간이 있는 피조 세계에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피조에 속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피조에 속한 나라이면서 피조 바깥에 있는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중 계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들을 낳는 마리아들

 

천년왕국은 에덴의 회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을 예수님과 그의 신부들이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야 하는데 죄로 인하여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그의 신부들과 혼인해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이 아담이고 우리는 하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자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고 천국에 가는 것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폼으로 심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실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님과 성도가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아요.

첫 아담에서 나온 하와는 뱀에게 미혹 당했지만,

마지막 아담에게서 나온 성도는 뱀에게 미혹당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아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낳는가 하면 창조의 방법으로 낳습니다.

예수님이 잉태하신 방법으로 낳아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낳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듯이 천년왕국에 들어간 성도들도 마리아가 되어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태어난 자들은 예수로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에 뱀의 미혹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이 끝이 나면 뱀을 잠시 풀어서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자들을 시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5장을 봅시다.

 

사 65:17-25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하늘로서 내려오는 땅입니다.

이 땅은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이에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냅니다.

아담을 쫓아내고 문을 걸어 잠급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살게 됩니다.

아담이 쫓겨나서 살아가는 곳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 땅에서 사는 아담이 본래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담이 본래 살던 곳이 어디인가요?

에덴동산입니다.

감추어졌던 그 에덴동산이 예수님의 재림 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세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이 세상으로 쫓겨났잖아요.

이걸 수직적으로 세워서 보세요.

그럼 에덴동산은 하늘에 있고, 이 세상은 아래에 있는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서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서 이 땅을 몰고 오십니다.

여기를 공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들은 모두가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공중이란? 허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땅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서 내려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인 천년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 낳아진 자들을 나무의 수한(壽限)과 같다고 하지요.

이는 죽지 않고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니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자식 낳고 사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천국에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이고 모든 성도는 신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우리를 위한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란 뜻입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아이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낳나요?

이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바울이 삼층천을 보고 와서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과 이 세상은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은 창조의 세계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피조 세계의 머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은 것으로 유추 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는 것이 창조의 방식이니까요.

분명한 것은 천년왕국에서 아이를 낳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리아가 되어서 낳는 것입니다.

‘마리아’ 라는 말은 ‘높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을 낳을 자들은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살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예수로 구원을 받은 마리아는 천년왕국에서 뱀의 권세를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낳아진 자들을 여호와의 복된 자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 65:23절.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이 땅의 남자와 여자의 혼인은 예수님과 그의 신부들이 혼인하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 모두는 신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는 마리아들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마리아를 신부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석들인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들

 

천년왕국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열리는 곳입니다.

이 모습이 아담 속에서 하와를 빼냈다가 다시 한 몸으로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성도는 모두가 아담 안에서 나온 하와처럼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어린 양과 혼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신부를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진 성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린 양과 기거한다는 의미로 볼 수가 있습니다.

성이란 기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23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곳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뭐라고 하나요?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졌어요.

12가지 보석은 예수로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를 상징해요.

그러니까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은 곧 모든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진 성에 누가 들어오는가 하면 어린 양이 들어옵니다.

어린 양이 빛으로 신부들로 지어진 그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건 둘이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보석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해요.

이는 어린 양과 성도가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은 신랑이 되고 12가지 보석인 성도들은 모두가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신랑은 하나인데 신부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어린 양의 피로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랑은 어린 양 하나이고 모든 성도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구약 시대 솔로몬이 천 명의 부인을 둔 것으로 예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건 솔로몬이 여자를 탐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복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치세하던 시대는 천년왕국을 상징하고 있어요.

솔로몬이 일천 명의 궁녀들을 둔 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 명이라는 말은 수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수많은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예수님이 천년왕국에서 모든 성도들은 신부로 맞이하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여성 명사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동등하게 구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담이 피 흘려서 여자를 만들었듯이 예수님이 피 흘려서 성도들을 구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다 예수님 몸에서 나온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 어린 양과 성도를 신랑과 신부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미혹으로 실패한 삶을 예수님이 그의 성도들과 회복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온전하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자들

 

천년왕국에서 낳아지는 자들은 죄 없는 자로 낳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나무의 수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나무의 수한과 같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0절 때문에 오해를 하는데 이건 반어법입니다.

 

사 65:20절.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20절을 보면 그 곳에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하지요.

이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백 세에 죽는 자는 아이겠고 백 세 못 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라는 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죄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죽음이 그들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세요.

 

사 65:23절.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생산한 것은 재난에 걸리지 아니한다고 하지요.

“재난에 걸리지 아니한다”는 말은 “베하라” 라고 하는데 이는 “고통을 당하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며” 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년왕국에서 낳아지는 자녀들은 사망이나 아픈 것이고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태어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의 이야기나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4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년왕국에는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사망도 없고, 애통할 일도 없고, 곡하는 일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눈물 흘릴 일도 없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 태어나는 자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회복을 하시면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 년 후에 하나님이 마귀를 잠깐 풀어서 천년왕국에서 예수님과 그의 신부들이 낳은 자들은 죄와 사망을 이긴 자들이라는 것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게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이 이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세력들을 영원한 불 못에 집어넣습니다.

 

흙에서 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미혹당하여서 실패하였어요.

그러나 천년왕국에서 성령으로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들은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들은 죄 아래서 난 자가 아니라 의 아래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의 아래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이들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자들을 여호와의 복된 자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첫 아담이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백 보좌 심판

 

계 21: 11-15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천 년이 차면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심판이 일어납니다.

이 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뱀의 후손들도 부활하게 됩니다.

이를 둘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둘째 부활은 불신자들의 부활로서 심판의 부활인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백 보좌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 때 두 가지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책들입니다.

 

생명책은 산 자들의 책인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

다른 책은 죽은 자들의 행위들이 적혀 있는 책으로서 뱀의 후손들의 이름이 적힌 사망의 책인 것입니다.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심판 없이 태초 라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서 영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책에 이름이 적힌 뱀의 후손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행위는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행위로 인한 심판이 없어요.

그러나 뱀의 후손들은 그들의 죄를 누가 대신 담당하여 주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영벌의 나라인 창세전에 예비된 지옥으로 들어가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은 둘째 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에 참예하여서 천년왕국에서 살던 자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부활이 있어요.

 

예수님 재림 때 일어나는 부활은 성도들을 위한 부활이고,

천년왕국 후에 일어나는 부활은 불신자들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고,

천년왕국 후에 일어나는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천국이 있듯이, 두 지옥이 있어요.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원본이고 보이는 세계는 복사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본과 복사본 두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원본 천국과 복사본 천국이 있듯이 원본 지옥과 복사본 지옥이 있는 것입니다.

원본은 하늘에 있고, 복사본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역사 속에 있는 복사본 천국은 천년왕국이고,

묵시 속에 원본 천국은 태초의 천국입니다.

역사 속의 복사본 지옥은 이 땅이고,

묵시 속의 원본 지옥은 영원한 불 못이라는 지옥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자기 백성들은 이 땅에서 공중으로 빼내고 나면 이 땅을 심판하는데 그럼 이 땅이 유황 불 못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 후에 백 보좌 심판 후에 들어가는 지옥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영원한 지옥이 있는 것입니다.

 

백 보좌 심판이 끝나면 이 세상은 두루마리 말리듯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이 끝나고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 여호와의 복된 자손들을 시험하던 뱀의 후손들인 곡과 마곡을 완전히 멸망을 시켜 버립니다.

이를 사망과 음부도 영원한 불 못 속에 던져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된 세상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다니엘은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단 7:18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성도들은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그 나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나라는 피조 바깥에 있는 신의 나라인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신의 아들이 되어서 신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는 영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그 날이 문 앞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아는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그러니 근신하고 정신을 차리고 그 날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성도들이 공중에 있는 나라로 이사 가는 날입니다.

헌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이사 가는 날인 것입니다.

슬픈 날이 아니고 기쁜 날인 것입니다.

 

놀랍고 황홀하지요.

설레지 않는가요?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귀하고 황홀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펼치시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장엄한 대하(大河)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흥분이 되어요.

야 아~ 잠시 후면 예수님을 만나겠구나!

이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훌훌 털어버리겠구나!

이러한 성경의 계시가 에수님의 신부들인 성도들에게는 엔돌핀인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너희들 보기에 내가 넘어진 것처럼 보여도 넘어진 것이 아니다!

너희들 보기에 내가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은 가진 자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보고 욕을 해도 나는 너희를 축복할 수가 있고,

너희가 조롱해도 웃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당당함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삼층천을 다녀 오고 나니까 이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해도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조롱으로도 세상 권세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대단한 존재들이에요.

그러니 자긍심을 가지세요.

기죽고 살지 말고 좀 당당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세상의 징조들을 보시고 때를 읽으시길 바랍니다.

 

에서처럼 돈 몇 푼 때문에 믿음을 팔아먹지 말고,

세상 살기 어렵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땅 강아지처럼 땅에 코 박고 살지 말고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세요.

 

 

역사의 때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 참고하고 마칩시다.

이것도 창세전 언약의 역사를 읽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약 1000년 주기로 큰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까지 약 1000년입니다.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약 1000년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약 1000년입니다.

다윗부터 예수님의 초림까지 약 1000년입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딱 1000년은 아니지만 그 중간에 종교 개혁이라는 큰 변혁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만약에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초림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가 약 2000년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2000년 주기로 이루어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초림까지 2000년이고,

예수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 2000년이 됩니다.

이러면 역사 6000년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 6일과 같습니다.

이제 창조 7일인 일곱째 날 안식일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창조 7일 중에서 남은 1일인 1000년이 천년왕국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아담부터 예수님 재림까지가 약 6000년이 되는 것입니다.

6일 창조 후에 7일 안식일이 있었듯이,

6000년 구속사 후 1000년 안식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창조 하루를 1000년으로 본다고 하면,

6일 창조는 6000년이고,

7일 안식일은 천년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을 빌리면 지금이 창조 6일이 끝나가는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엿새 동안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7일 안식일로 나아가는 끝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 하느뇨?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그 날을 소망하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농담으로 들을까봐서 내가 말하는 것은 지어낸 말이 아니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장차 일어날 예수님의 재림 모습을 영광 중에 보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고 실제라고,,,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지금은 말세 지말입니다.

말세 중에서도 끝입니다.

끝 중에서도 끝인 것입니다.

 

“장차 될 일”이 끝이 다다랐습니다.

“속히 될 일”이 속히 이루어지기 직전입니다.

“반드시 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직전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할 때의 징조들을 막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는 천재지변으로 종말이 되었다는 징조를 보이고 있고,

인간들은 사회현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창조 6일째 짐승이 지어지고 난 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나타나듯이,

지금도 수많은 교인들이 짐승처럼 땅의 것을 쫓아가는 이 때에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7000명이 있었듯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을 지켜가는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참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그 동안 감추어졌던 천국의 비밀들이 풀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다고 하던 그 천년왕국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이러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리하여 감추었던 천국의 비밀들이 다 열리기를 바랍니다.

혹시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은 곧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날마다 모여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심장에 콱 박혀서 빠져나오지 않는 못이 되었으면 합니다.

머릿속에 담고만 있지 말고 가슴에 새겨져서 흥분을 일으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어지기를 축원드립니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역사의 종착역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이 기쁨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끝과 도래하는 세상의 시작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증거된 말씀들이 걸림이 되지 말고 잘 깨달아져서 아멘으로 화답이 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눈을 열고 귀를 열어서 만물이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징조로 소리치고 있음이 들려지고 보여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오심을 설렘으로 기다리면서 이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