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강해

28강. 흙으로 돌아가라 (창 3:17-19)

정낙원 2019. 6. 18. 22:08

28강. 흙으로 돌아가라 (창 3:17-19)

 

창 3: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엄중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가볍게 여기고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이 태어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아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났습니다.

아담의 본래 자리는 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 한 줌을 쥐시고 토기를 빗어서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흙 속에 생기가 들어가자 생령이 된 것입니다.

그가 아담입니다.

 

흙의 원래의 뜻은 먼지라는 뜻입니다.

먼지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흙 자체는 죽은 것입니다.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갈 때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흙 속에서 생기가 빠지면 그냥 흙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시 104:29-30절.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습니다.

이는 낯을 숨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담 속에 있던 호흡을 취하셨습니다.

그러자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는 죽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숨이 멎으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호흡을 취하여 가시면 끝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은 자기 계획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시면 살고 하나님이 그만 살라고 하면 그 즉시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이 끊어지면 그 도모가 소멸해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 146:1-5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도모란? 계획이고 꿈이고 일입니다.

이 말은 계획도, 꿈도, 일도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여야지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이 세우는 꿈도 계획도 일도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행사 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주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피조물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머리털 하나라도 검게나 희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창조주의 도움으로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악이고 죄입니다.

 

그럼 인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아무리 계획을 하여도 그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내가 경영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잠 16장.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이건 마치 로봇을 만든 사람이 로봇보다 로봇을 더 잘 아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경영을 해 가실 때 가장 잘 경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원이 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살고자 할 때는 반드시 망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살면 흥왕하였습니다.

그런데 흥왕을 하고 나면 그 흥왕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자 하면 반드시 타락의 길로 가고 패망을 하였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경영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호흡하는 인생을 의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 2: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람의 가치는 호흡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호흡을 스스로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로 숨을 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지 할 분은 인간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생에게 호흡을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풀도 입히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관을 하시고 들의 풀 한 포기도 살게도 하시고 마르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인생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90:3-17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생은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결국에는 그 노에 의하여 소멸되어 가는 풀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노 중에 소멸되어 가는 인생도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찰나 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연수가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수고와 슬픔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홍수로 쓸려 가듯이 흘러 떠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날을 계수하고 살아가는 지혜를 달라고 합니다.

즉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아는 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한낱 풀과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인생에게 있어 지혜로움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차별해서 탕감해 주시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많이 탕감해 주고 누구에게는 적게 탕감해 주시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평등하게 탕감해 주셨습니다.

 

동일한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깨닫는 사람은 적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향유든 옥합을 깨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을 발을 씻겼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를 예수님은 많이 탕감 받은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 마리아의 사건도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구원이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을 씻김으로서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섬겨도 부족하다는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많이 탕감 받은 종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를 섬기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탕감 받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모두가 구원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행하는 것은 종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종으로 섬기니까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두 부류의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열심히 하는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있고,

주인이 있을 때는 하는 척 하다가도 주인이 없으면 게으름을 피우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집을 떠나자 주인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각자 받은 것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말하고,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은혜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주인이 있으면 하는 척 하고 주인이 없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늘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종의 영을 받은 자와 아들의 영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종의 영을 받은 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이고,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은혜 아래 있는 자입니다.

 

종의 영을 받은 자는 주인이 있을 때 하는 척 하고 주인이 눈에 안 보이면 게으름을 피웁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니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 받음에 감사와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종교생활은 남의 눈을 의식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세요.

나는 율법 아래서 종으로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은혜 아래서 아들로 섬기고 있는지 스스로의 신앙을 체크해 보시길 바랍니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죽음 속에는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선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을 하셨는데 우리는 그걸 사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게 우리 눈을 어그러지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통해서 잘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애굽에 있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환경적으로 보면 광야는 살기가 어렵고 애굽이 훨씬 살기 좋은 곳입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좋은 조건으로 본다면 애굽은 천국이고 광야는 지옥인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육적으로 보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빼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빼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원망하고 불평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첫째가 우리의 눈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보니까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지옥이고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소원은 육신의 장막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보니까 죽음이 바로 축복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바울의 사고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 엄청난 축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죽게 하신 것이 복인 것입니다.

아담을 죽인 것은 아담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한가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죽음을 저주라고 생각하고,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살고자 몸에 좋다고 하는 음식들을 챙겨서 먹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챙기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함이고,

운동을 하는 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모든 관심사가 오래 살고자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늦게 맞이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100세 먹은 노인에게도 오래 산다고 하면 좋아 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재수 없어 하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역정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죽음 아래 있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본성들입니다.

죽음을 멀리하고자 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죽음이 쫓아오니까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자는 죽음에 도망치지 않습니다.

영생하는 자에게는 죽음은 없는(죽은 것)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는 자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합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북을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남한으로 탈북하신 분들은 북한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한에 왔음에도 북한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몸은 남한에 와 있어도 그 사람의 정신은 탈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북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남파 공작원들입니다.

공작원들은 북한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남한에서 살지만 북한의 지령을 받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두 권세가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와 생명의 권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사는 자가 있고, 생명의 권세 아래 사는 자가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망의 권세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죽은 자들은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린 모두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권세 아래로 옮겨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 안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예수그리스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입니다.

사망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사망의 권세가 범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사망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죽음에 두려움이 사라지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의 것으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살아도 감사할 일이고 죽어도 감사할 일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죄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죽음이란 본능에 속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본능을 거스리고 싶은 것입니다.

 

죽음에 사로 잡혀 있으니까 본능적으로 죽음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금지하면 꼭 하고 싶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지지 마세요’ 라고 하면 만지고 싶은 욕망이 발동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지지 마세요’ 라는 글을 쓰기 전에는 만지고 싶은 욕망이 없었는데 ‘만지지 마세요’ 라는 글을 보는 순간 만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만지지 마세요’ 라는 글이 인간들 속에 있는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죽음이 그러한 것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너 죽어’ 그리니까 인간들은 ‘난 안 죽을래’ 라고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죄인에게 주어진 속성이므로 도망간다고 해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피하여도 죽음은 계속하여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놈은 눈치도 없이 인간의 원함과 상관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옵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죽음 앞에 인간들은 애곡을 합니다.

이는 죽음을 끝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죽음관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열면 죽음을 복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성경은 죽음을 복이라고 하는가요?

이는 죽음에 쫓기는 인생을 죽음으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서 죽음에 쫓겨 다니는 죄 아래서의 삶을 제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죽음으로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죽음 아래 있는 인생을 졸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인생을 끝내고 다시는 죽음이 없는 영생하는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놓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죽음에서 졸업을 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게 해방을 시키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언약의 후손을 말합니다.

이들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죽음 아래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건져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사망이 그들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해방을 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죄 아래서 난 몸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죽이는 것이지만 실상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죽었는데 살아난 것입니다.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과 부활을 만물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씨앗이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내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한 알의 밀알을 심어서 수많은 밀알을 생산해 내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 너머에 있는 하늘나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얻을 목숨이 있고 버릴 목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버릴 목숨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얻을 목숨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땅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여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목숨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땅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목숨이 끝나는 것을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로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요 17:4-5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문을 통해서 창세전 영생의 나라로 나아간 것입니다.

죽음이 영생으로 나아가는 비밀 문이었던 것입니다.

이걸 좁은 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 문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합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일찍 죽는 것이 저주이지만,

성경적 관점에서는 일찍 죽는 것이 복입니다.

성도는 성경적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보는 세상 관점에서는 저주이지만,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보는 성경적 관점에서는 복인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저주이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저주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죽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 아래 그 어느 인간이 빨리 죽고자 하는 인간이 있느냐 입니다.

인간이라면 다 오래도록 살고 싶어 합니다.

오래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는 죽음은 피하고 싶은 저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가진 몸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영생하는 언약을 품고 있는 몸이기도 합니다.

땅에서 난 겉 사람과 하늘로서 난 속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이라는 몸 안에 씨앗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속사람이라는 씨앗은 겉 사람이아는 몸이 죽어야 싹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속사람은 빨리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몸을 입고 싶어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라고 한다면 성경적인 죽음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적 입장에서 죽음을 접근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죽음을 아담에게 저주로 주셨는가?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죽음을 말하지만 이차적으로는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이 말을 듣지 않아서 집에서 쫓아낸 것과 같습니다.

이 일이 과연 저주일까요?

문자적으로 보면 저주처럼 들립니다.

 

아담 입장에서 보면 저주입니다.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을 아담 입장에서 보면 안 되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일을 왜 하셨는지를 알아야 복인지 저주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저주 하셨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을 안 듣는 자식을 집에서 내어 쫓는 아버지의 심정은 과연 자식을 향한 저주일까요?

자식을 저주할 아버지는 없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속성상 허락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매질을 합니다.

매질 당하는 아이 입장에서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사랑으로 여길 자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매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가 옵니다.

그건 내가 어른이 되어서 부모가 될 때입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면 부모가 나에게 한 그 일을 그대로 자기 자식에게도 대물림으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식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의 매를 대물림 하는가요.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훈육을 통해서 올바르게 자라갑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을 사랑의 징계라고 합니다.

 

히 12:4-13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징계란? 잘못 된 것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참 아들에게만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들만 징계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징계 하는 것은 아들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자식하고 싸우지 남의 자식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남의 자식이야 잘 되든 못 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자식은 잘 되어야 하기 때문에 늘 싸우는 것입니다.

이걸 참 아들에게 하는 징계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싸움 대상은 이스라엘로 나타납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몽둥이로 사용하였습니다.

몽둥이로 사용하고는 다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제국들은 다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은 지금도 여전히 그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서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혹독한 아픔들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남의 자식들은 다 사라져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 할 때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없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부모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린 죽음도 사랑인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아담의 창조 과정을 봅시다.

 

창 2:4-9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그 사람이 생령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십니다.

 

창 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의 동산에 이끌어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다스리고 지키라는 말은 동산을 헤치는 뱀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산에는 영생을 주는 생명과와 죽음을 주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두 과실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곤 선악과를 절대로 먹지 말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담은 빈 그릇과 같습니다.

아담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하는 자가 되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은 자가 됩니다.

 

아담은 죽음이 뭔지 영생이 뭔지를 모릅니다.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동산에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에덴으로 올라와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뱀의 미혹으로 인하여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죽음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자가 되고 난 이후였습니다.

죽은 자가 되고 나니까 영생하는 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가 영생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천사들로 하여금 죽은 아담이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막아 버리십니다.

그것은 선악의 사람으로 영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으려면 선악과를 먹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과를 먹고서 죄 없는 자로서 영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 영생을 하면 그건 저주 중에서도 저주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즉시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아담이 생명나무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을 하려면 먼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는 자가 되어서 생명과를 먹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성령을 보내서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가 먼저 선악의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생명의 사람으로 살아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은 아담이 왜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말리지 아니하였을까요?

위치적으로 보면 에덴은 동산의 위에 있습니다.

에덴은 하늘이고 동산은 땅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서 동산을 적시는 것을 보면 에덴은 동산 위에 있는 동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에덴에서 동산에 있는 아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찰하시고 계셨습니다.

마치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이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여자가 뱀의 미혹에 넘어가는 것이나 여자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어서 먹게 하는 것들을 다 보시면서도 말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수순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죄인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수순이 죄 아래 가두어지고 그 다음에 죄에서 건져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죽음에 먼저 가두어졌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는 자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산에 선악과와 생명과를 두신 것입니다.

뱀도 두신 것입니다.

 

뱀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뱀도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산에 뱀을 두고서 창세전 언약의 수순을 이루고자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뱀에게 아담을 미혹케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미혹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셨고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뱀의 말에 넘어가서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기 전에는 죄인도 의인도 아닙니다.

죄인이 될 수도 있고 의인이 될 수도 있는 자로 존재한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의인으로서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선악과를 먹으면 죄인으로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바램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만 것입니다.

비로소 죄가 형성이 되고 죄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내어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선악과가 두려운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여도 아담은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어 보낸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두려워지지 않거든 들어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죄 문제가 해결이 되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스스로가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을 보내서 아담의 죄를 해결하여서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는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비로소 에덴동산으로 나아가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이를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에게는 죽음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합니다.

간교 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뱀이 아담보다 더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뱀의 지혜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려는 돕는 자는 당연히 뱀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라야 합니다.

 

뱀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는 피조물 중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은 에덴에서 와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는 돕는 자로 맞아들이고 맙니다.

여자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지혜에 있어서는 아담과 같은 수준입니다.

여자의 지혜로는 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여자가 도리어 뱀에게 넘어가서 아담을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돕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죽음이 저주라는 것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죽는다 라는 말은 두려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인간에게는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만 유발 시킬 뿐이라고 유추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뱀은 이러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뱀은 여자에게 접근하여 여자 스스로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도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뱀은 여자에게 선악과가 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거짓 정보를 제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뱀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서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합니다.

 

창 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4-6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이 말하자 여자가 선악과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갑자기 따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고 맙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찾아 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선악과가 두려움을 몰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숨어 버립니다.

 

두려움은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죄가 인간을 죽음 안에 가두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야 하나님과는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가두어지자 더 이상 하나님과 한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서로가 불편한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속성이 다릅니다.

서로를 배척하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이질적이므로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인 아담과 뱀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신 것입니다.

이는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은 또 다른 죽음입니다.

 

죽음이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을 말합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적 죽음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이 된 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리십니다.

이는 아담이 살아가는 땅에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 밖에서 죽은 자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아담은 죽은 자의 조상이 됩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무덤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가지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요 5:25-29절.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서 이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릴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덤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럼 무덤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 세상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무덤이라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빼내심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려면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 아비집이 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은 갈대아 우르 사람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기존 세상으로부터 떠남을 전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을 떠남이 곧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세상으로부터 죽임 당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곳입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나아올 때 비밀의 문인 십자가를 통과해 온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나서 교회로 나아 올 때 아담 안에서 난 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구원은 기존에 살던 세상으로부터 떠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자 죄인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저주의 산물입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은 가혹할 정도로 처참합니다.

땅은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저주를 머금은 땅에서 인간은 종신토록 땀 흘리면서 수고하여야 땅에 소산물을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기껏 땀 흘려 수고하여서 얻은 것이라야 고작해서 저주의 기운을 머금은 땅이 뱉어낸 소산물일 뿐입니다.

인간은 저주를 머금은 땅이 뱉어낸 소산물을 먹고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저주의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먹기 때문입니다.

 

땅에 붙어서 사는 한 저주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의 소산물로 연명하는 선악의 생명이 죽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죽음이 일평생 죽음으로부터 쫓기는 저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는 것은 정해진 법칙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히 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은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럼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죽고 난 후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심판인가요?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심판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생으로 나아갈지 영벌로 나아갈지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서 영생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열법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죽음 이후의 인간들에게는 2 라운드의 세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의 인생은 1 라운드이고,

죽고 나서 심판을 받고 영생으로 가는지 영벌로 가는지 각자 갈라져서 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2 라운드가 되는 것입니다.

 

계 20:11-15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사도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심판을 보았습니다.

이 때는 천년왕국이 끝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시점입니다.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가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을 가지시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 책인 것입니다.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바로 천국으로 가고,

행위 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각각의 행위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고,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천년왕국의 끝에 일어나는 백 보좌 심판은 예수를 믿었느냐, 예수를 안 믿었느냐 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자는 영생으로 가고, 예수를 믿지 않은 자는 영벌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고,

예수를 안 믿는 자들은 행위 책에 기록이 된 자들입니다.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이 세상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와 녹명되지 않은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와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죽어서 심판을 당할 때 생명책에 녹명되었기 때문에 영생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도 죽고,

예수 밖에 있는 자도 죽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죽음과 예수 밖에 있는 자의 죽음은 다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천국으로 가는 영생의 죽음이므로 축복의 죽음이지만,

예수 밖에 있는 자의 죽음은 지옥으로 가는 영벌의 죽음이므로 저주의 죽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낼 때 가죽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가죽 옷은 죄인의 수치를 가려주는 옷입니다.

이는 구원의 옷인 것입니다.

 

이는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죽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가죽 옷으로 아담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하여 희생당한 제물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예수그리스도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지만 아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범죄한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둘째는, 자기 백성들은 어린 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 속에는 두 인간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인간과 저주 받을 인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의 두 아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구원을 받았고 가인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벨은 어린 양에게 속하였고,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습니다.

 

아벨은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를 대표하고 있고,

가인은 녹명 되지 않은 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의 계통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가인의 계통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계통과 가인의 계통은 죽음이 다른 것입니다.

가인의 계통에게는 죽음은 열벌로 나아가는 저주의 죽음이지만,

아벨의 계통에게는 죽음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죽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수고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일평생 땀 흘려 수고하고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인간의 인생사는 수고와 슬픔의 인생사인 것입니다.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 90:3-12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 10.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39:4-5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모세는 인생을 한마디로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수고와 슬픔의 연장선인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수고와 슬픔을 많이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래 산다는 것은 결코 복 일 수가 없습니다.

오래 살수록 수고와 슬픔을 많이 겪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일찍 죽는 것이 복이고 일찍 죽는 것 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욥 3:9-13절.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찌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 하였음이로구나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 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 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13. 그렇지 아니 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욥 10:18-19절.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 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

 

욥은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복이고,

일찍 죽는 것보다 안 태어 난 것이 더 복되다 고 하였습니다.

이미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수고와 슬픔을 적게 겪는 것이므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에게나 이해되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 죽으면 2 라운드 인생은 천국에서 안식하는 것임을 아는 자들에게나 일찍 죽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소멸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안식(잠)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사나 죽으나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 127: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 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잠은 일차적으로 하루 하루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성도의 죽음을 말합니다.

성도의 죽음을 잠으로 말하는 것은 깨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부활을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요 11:11-17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신대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가 죽은 것은 나사로를 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쉼으로 보지 않고 슬퍼하였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잔다고 하였지만 제자들은 죽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니까 나사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는 줄 알고 참 안 되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마르다와 무리들을 위해 울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성도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죽으면 내가 나사로처럼 깨울 테니까 안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따르다가 죽는다 해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하여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후 5:1-9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죽음을 하늘의 몸을 덧입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게 되는 것이니까 죽음을 서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은 일찍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전할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살아도 복이고 죽어도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음을 주신 것은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더 없이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쉬라는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은 병들어도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병으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환자를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을 더 오래도록 유지하게 하는 고문행위인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린 환자를 살리는 것은 마치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 하려는 사람을 붙잡고 몇 달만 더 군대에 남아 있다가 제대를 하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군대에서 제대하는 사람을 붙잡고 제대하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수고와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기쁜 소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 하셨을 때 시므온이라는 늙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반차에 따라서 제사장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결례에 따라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왔습니다.

 

눅 2:25-31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일찍이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죽을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예수님을 안고서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이제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께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젠 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이런 고백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 복이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토해 낼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였고,

스데반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빨리 가고 싶다는 말을 누가 객기라고 하겠으며,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말과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말한 것이 쇼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앙이란? 관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복음이 현실 속에서 삶으로 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소망하라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망 없는 자들처럼 죽음 앞에서 울고불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은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죽음은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에게 하신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을 시므온의 고백처럼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라고 토하여 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귀에 소망의 소리로 들려지고 복된 소리로 들려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주여!

종은 어느 때에 평안히 놓아 주시렵니까?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