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50강. 새 언약의 중보자

정낙원 2010. 1. 24. 01:11

50강. 새 언약의 중보자 (히 9:11-15)

 

9:11-15.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성소와 지성소를 하늘과 땅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성소는 인간의 영역이고,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을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고 특히 지성소엔 대 제사장만이 들어가게 한 것은 하늘나라는 아무나 출입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했어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무나 만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오직 창조에 속하지 않은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럼 성도가 천국에 가는 것은 성도 독자적으로 갈 수가 없고 오직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앞세우고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왔다고 했지요.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고 하였어요.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께로 돌아가면 주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는 주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가는 것이지 우리 독자적인 몸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날 수가 있는가요?

우리는 왜 안 되는가요?

 

성경은 왜 안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말이에요.

그 기간이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았어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의 면전(面前)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왜 하나님은 아담을 쫓아냈습니까?

우리들 상식으로는 말을 안 들으면 몇 대 쥐어박고 용서해서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정사정없이 쫓아내 버립니다.

왜 이처럼 냉정하게 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것은 부모가 자식을 낳은 것과 같아요.

그렇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인간들 상식으로는 자식이 말 안 들었다고 집에서 쫓아내는 부모는 없잖아요.

화가 나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용서하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정머리 없이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사랑이 없어서인가요?

그렇진 않지요.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말 안 듣는 자식을 집에서 쫓아낸 것은 사랑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우리들 상식은 잘못해도 용서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 마땅한 겁니다.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이 우리보다 인정머리가 없어서 그런 건가 살펴보아야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어요.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모두가 사랑이 되는지 알아보아야지요.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기에 죄인을 집에서 좇아내야만 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사랑이라고 하였으니까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좇아낸 것도 사랑이고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사랑인 것입니다.

매를 때려도 사랑이에요.

매를 때릴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동일한 죄인데도 어떨 땐 죄로 규정하고 어떨 땐 죄로 여기지 않아요.

우린 변한 게 없는데 어느 땐 저주 아래 있었고 어느 땐 축복 아래 있어요.

저주와 축복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들은 다 같아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다 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용서받은 민족이고 이방인은 아니에요.

왜 이스라엘은 용서받고 이방인은 용서받지 못합니까?

 

이는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제물이 있고 이방인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죽어주신 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대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셨어요.

그래서 성막을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합니다.

성경을 펴 보니 하나님의 속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이 어떤 것인 줄 몰라요.

안다고 하여도 죄가 주는 정보로 알 뿐이에요.

죄가 주는 정보의 거룩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과 달라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죄인으로 전락했어요.

선악과 속에는 두 가지 법이 함께 공존합니다.

하나는 선(善)이고 하나는 악(惡)이에요.

이 둘은 서로 상극(相剋)이에요.

그런데 하나에요.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도 있어요.

악이 죽으면 선도 죽고 선이 죽으면 악도 죽어요.

우리 안에는 미워하는 마음도 있고 사랑하는 마음도 있어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살고 있어요.

이상한 괴물이에요.

 

맞아요.

인간은 괴물입니다.

상극인 두 법을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낮에는 천사로 살다가 밤이면 악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떨 땐 인정머리가 철철 넘치는데 어쩔 땐 아주 비정해요.

완전히 다른 두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언제 어떻게 돌변 할지 몰라요.

어제는 천사 같다가도 오늘은 악마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해요.

어느 게 진짜인지 도무지 감(感)을 잡을 수가 없어요.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자기 유익에 따라 천의 얼굴로 변하니 알 수가 없지요.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품 안에 있는 아내라도 믿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이기주의에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려요.

 

사람을 믿으면 안 되어요.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아내도 남편도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믿지 마세요.

믿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고 사세요.

 

성경은 믿지 말라고 했어요.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할거야! 라는 기대를 하지 말란 말입니다.

믿는 순간 실망해요.

 

그 어느 인간도 남을 사랑하지 않아요.

다 자기만을 사랑해요.

인간들이 사랑한다는 그 말은 당신은 나를 위해 희생하세요!

그런 뜻이에요.

흔히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다고 하지면 그렇지 않아요.

 

자식이 속을 썩여 보세요.

나를 힘들게 하면 그 누구라도 원수에요.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내게 잘 할 때 자식이지 날 힘들게 하면 자식이 아니라 원수에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이럴진대 하물며 남이야 말해 뭣하겠어요?

 

요즈음 사회학적으로 유행하는 말이 “사이코패스” 라는 말입니다.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에요.

사이코패스란? 이중인격자란 말입니다.

지난번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는 강oo 사건 때부터 심심찮게 매스컴에 흘러나온 이야기에요.

겉으론 그렇게 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가 있느냐! 라고 사람들이 엄청 충격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들은 사이코패스라고 했어요.

겉으론 평화를 말하나 속으론 칼은 간다고 했다구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란 소설도 인간은 사이코패스란 것을 말해주고자 써진 겁니다.

 

요즘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아바타” 란 영화도 이런 이야기에요.

전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 줄거리는 다 알지 못해요.

그러나 기자들이 리뷰한 것을 보고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더라고요.

 

아바타란? 인터넷 상에서 이용되는 갖가지 캐릭터를 말합니다.

다양한 것들이 있어요.

동물도 있고 요정도 있고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수시로 바꿔요.

어느 때는 사람으로, 어느 때는 동물로,,

사람도 좋은 사람, 험상궂은 사람, 웃는 사람, 우는 사람으로 바꿀 수가 있어요.

 

이런 아바타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나를 대신하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기분 나쁘다고 하면 험상궂은 얼굴의 아바타를 보내면 되어요.

그게 내 마음이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반대로 기분이 좋다고 할 때는 환하게 웃는 아바타로 보내요.

그러면 상대방이 아! 이 사람은 기분이 좋구나 생각합니다.

 

제 블로그에 보면 제 캐릭터는 예쁜 강아지 모양으로 해 놓았습니다.

이는 나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아가는 자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에게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은혜를 달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진엔 황량한 사막을 샛별을 좇아가는 길손으로 표시를 했어요.

이는 샛별처럼 떠오르는 주님의 계시가 내 발걸음을 인도해 달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아바타 속에 내가 있는 겁니다.

 

아바타란 영화에서 전직 해병대 군인이었던 사람이 불구자가 되었는데 과학의 도움으로 다른 아바타(인물)로 변신을 해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활동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기자의 평을 보면 모든 인간은 각각의 아바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다중 인격이에요.

맞는 말이에요.

우린 다양한 아바타를 가지고 있어요.

 

제 안에도 이중인격이 있어요.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도 겉으론 점잖아보여도 어떤 사건을 만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아바타를 통해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차를 운전해보면 알아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운행 할 때는 룰루랄라~ 하는데,

갑자기 운전을 방해하면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와요.

아니 저 자식이~야휴

저걸 그냥 콱~그런다구요?

운전하는 사람이 갑자기 궁시렁 거리면 거의 다 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험상궂은 아바타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다간 온화한 아바타로 바뀌어요.

 

이중인격이란? 위선이에요.

어느 것이 자기의 본 모습인줄 몰라요.

예를 들어서 자기에게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화를 내잖아요.

 

어느 것이 자기입니까?

온화한 자기입니까?

화를 내는 자기입니까?

 

온화한 것은 선악과의 선(善)에 해당하고,

화를 내는 것은 선악과의 악(惡)에 해당되지요.

선을 행하면 천사이고 악을 행하면 마귀에요.

그럼 난 누구입니까?

 

우린 순간순간 다른 아바타를 내세워서 활동하는 괴물들인 겁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헐크에요.

지금은 악수를 하지만 언제 뒤통수를 내리칠지 몰라요.

누가?

우리 모두가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인간이에요.

 

짐승은 자기를 거두어 주는 주인은 알아보아요.

그러나 인간은 주인도 몰라요.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인간을 짐승으로 비유하면 짐승을 모욕하는 겁니다.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악마 그 자체에요.

 

자기 자신도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는 빙의(憑依)를 일으키는 귀신들이에요.

이런 귀신을 믿는다.

정신 나갔습니까?

믿게요.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나도 믿지 말고 너도 믿지 말고 우린 믿을 대상이 아니란 것을 아세요.

 

이런 아바타는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인간 속에 자리 잡았어요.

그러니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에요.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다 보니 인간의 내면도 심리학이란 학문을 통하여서 드러나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이코패스가 새로 생긴 정신병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병이에요.

모두가 선악과를 먹은 후 생겨난 겁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에덴동산에 두겠어요.

언제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인간을 어찌 곁에 두고 살겠어요.

그래서 좇아낸 겁니다.

 

거룩이란?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단순한 겁니다.

선과 악이 없는 것을 말해요.

두 가지 생각이 없고 오직 하나만의 생각을 말해요.

 

에덴동산엔 두 마음을 품고는 살 수가 없어요.

거긴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선악과를 따 먹고 보니 두 마음이 생긴 겁니다.

 

두 마음이 생기니 하나님의 뜻에 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만 영광 받아야 하는데?

내가 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 하느냐?

자꾸만 토를 달고 불평불만 하면서 항의하게 되는 겁니다.

 

죄가 왜 를 몰고 온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합니까?

내가 왜 이런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평생 왜 왜 왜 하고 사는 겁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왜 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그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에요.

주인이 자기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우리에요.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예수님의 필요가 없었다면 우리는 없는 자에요.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하신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용할지는 예수님 마음이에요.

드라마에 보면 착한 역할도 있고 악당 역할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착한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악당역할을 해요.

그건 감독이 지명하여서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어요.

이를 예수님이 주가 그리스도가 되는 드라마에요.

여기에 예수님 편에 속한 자와 그 반대편에 속한 자가 있어요.

12 제자를 보면 가룟 유다도 있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만 있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 편과 그 반대 편만 있어요.

 

그래서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정하신 이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하신 이치란? 법칙이란 말이에요.

법칙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이 결정은 하나님이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에 따를 뿐이에요.

여기에 불만을 품는 것이 죄에요.

 

우리는 반드시 주께로 돌아가야 해요.

다른 말로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두 마음이 생긴 겁니다.

예! 하던 인간이 갑자기 왜요 라고 바뀐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선악과 먹고 난 후에 자기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가 불순종이라는 왜를 몰고 온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도 눈에 안 뵈는 겁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면 눈 내리 깔면서 내가 뭐 어째서요?

그러는 겁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 하나님을 위한 마음과 자기를 위한 마음이 동시에 선과 악처럼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하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겁니다.

 

선과 악이라는 두 마음을 품고선 하나님과 살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좇아낸 겁니다.

쫓아내서 두 마음을 품은 죄의 몸을 죽이고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게 한 겁니다.

 

이러면 인간의 실존을 알 수가 있겠지요?

인간은 살면 살수록 그 속에 새로운 아바타가 자꾸만 만들어지고 튀어나와요.

 

10대 시절의 아바타가 다르고,

20대 시절의 아바타가 다르고,

30대 시절의 아바타가 다르고,

60대 시절의 아바타가 달라요.

 

새로운 아바타가 나올 때마다 아! 내 속에 이런 놈이 들어 있었구나! 를 알게 되어요.

은혜를 받으면 인간 실존을 알게 되어요.

난 지옥에 가야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우린 모르고 살았는데 하나님이 알려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너희들은 이런 악당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악당이 살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악당을 어떻게 구원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성경이에요.

성경은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을 어떻게 한 마음을 품은 인간으로 만드느냐를 말해주고 있어요.

구원은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을 죽이고 한 마음을 품은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이 하세요.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의 마음을 품도록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연합을 하여서 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두 마음이 없어요.

오직 한 마음이에요.

이를 순종이라고 합니다.

성도를 구원한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원리에요.

이렇게 하도록 구원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은 죄 아래서 난 몸이에요.

죄의 종이에요.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게 된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한 지붕 두 가족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두 법이라고 하였어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법과 불순종하고자 하는 법이 있어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싶은데 마음속에 또 다른 법이 자기를 위해 살라고 해요.

육신의 법이 네피림처럼 강대해요.

 

우리 옛 사람이 네피림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그 뜻대로 살아가지를 못하니까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습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하였어요.

 

로마서 7장이 그 내용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이런 이중구조인 인간의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넌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고 성령이 알려 주세요.

그래서 두 마음을 품고 살면서도 정죄당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내어 보낸 것은 하나님은 죄인과는 함께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거룩한 분으로 계시한 것은 인간은 상대적으로 비거룩한 자란 말입니다.

거룩과 비거룩은 서로 하나 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거룩과 비거룩은 함께 할 수가 없어요.

극과 극에요.

 

이건 마치 빛과 어둠과 같아요.

빛과 어둠은 반드시 어느 하나를 죽이면서 활동을 해요.

빛이 빛으로 활동하자면 어둠을 죽이면서 해요.

반대로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이 어둠으로 남으려면 빛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나는 거룩하다고 한 것은 “나는 비거룩을 죽이는 분이다!” 라는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섬긴다고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애굽에서 알았던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어요.

이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성결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이 돌격한다고 했어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였어요.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비백산합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도 몰라요.

자기가 저주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천지분간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교인들의 모습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죄인이 나를 보면 죽는다고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거룩하다” 라고 한 말씀은 비 거룩은 내 앞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란 의미가 깔려 있는 말이에요.

 

신앙의 근본 바탕이 뭐냐?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사실을 잘 말해주었어요.

 

6:1-5.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았어요.

하나님을 보고 난 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을 합니다.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으니 이젠 죽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만나면 다 죽어요.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주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복인 겁니다.

하나님이 낯을 숨긴 것은 죄인을 배려한 것이에요.

 

이것도 모른채 죄인들은 누가 죄인 아니라 할까봐 꾸역 꾸역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설쳐댑니다.

세상 종교가 다 하나님을 만나 라고 하잖아요.

세상 종교는 모두가 죽음의 종교인 겁니다.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좋아낸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몰라요.

아담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면전에서 좇아낸 것인데도 야속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왜 좇아냈는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쫓겨났다는 것으로만 섭섭하다고 해요.

 

이게 죄에요.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게 죄에요.

하나님이 왜 만나 주지 않는지 그 의미를 모르니까 쫓겨남을 당하였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겁니다.

 

죄인은 자기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어요.

성령이 오고 나니 죄인 중에도 괴수란 걸 알게 된 겁니다.

 

복이란? 자기 주제를 아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에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타나겠다고 하여도 안 된다고 말릴 겁니다.

하나님 제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 해 주십시오! 라고 할 겁니다.

 

실제 이런 사건이 구약에 있었어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몰랐어요.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은 자기들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광야에 나와서 안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시내산 위에 강림한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하나님과 자기들 중간에 세워서 말을 해 달라고 하였어요.

제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게 해 달라고 했어요.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제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임을 안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중간에 서서 중걔 역할을 한 겁니다.

이런 중계 역할 하는 사람을 중보자라고 해요.

 

그럼 중보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성막을 가지고 중보자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성막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로 죄가 사해진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열심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짐승의 제사로는 하늘나라로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늘에선 짐승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겐 생소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온전한 제사라고 믿었던 것이 가짜라고 하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겁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것을 보았어요.

하늘나라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본(本) 따서 지은 것이 성막이에요.

본이란? 실제를 카피한 겁니다.

그러니 실제가 아니고 모형인 겁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비유로 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비유는 아무리 그럴듯해도 비유입니다.

실제가 아니에요.

비유는 그 비유를 통해서 실제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아무리 잘해도 비유처럼 실제가 아니에요.

율법 속에서 참을 찾고자 하면 안 됩니다.

율법의 섬김으로 온전해 진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성막에서의 섬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막에서 드려지는 섬김은 그것이 아무리 정성스럽다 하여도 실제는 아닙니다.

아무리 흠 없는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지낸다 하여도 그것은 모형일 뿐 실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따로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소란 천국을 말해요.

 

하늘에 성소는 창조에 속하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창조에 속하지 않은 하늘에 성소는 제물의 피로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에 속한 제물은 실제가 아니고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에요.

모형이지만 성막은 하늘나라에 것을 본 따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성막 속엔 하늘나라 정보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막을 통하여서 그림자이지만 하늘나라 속사정을 알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비록 모형이라고 할지라도 성막은 이스라엘만 가지고 있어요.

하늘나라 정보는 이스라엘이 독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통하여서만 하늘나라를 알 수가 있어요.

 

이방인인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담긴 성경을 배우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정보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것이 율법이에요.

그런데 그 율법의 핵심이 성막이에요.

성막에 핵심이 제사이구요.

하나님의 정보가 제사에 담겨져 있어요.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보니 성막을 통하여서 알려준 하늘에 정보가 뭔가 했더니 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 말이에요.

 

그 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땅에 있는 성막에서 드려지는 피와,

하늘나라에서 드려지는 피가 다르더라는 겁니다.

 

본문을 봅시다.

 

12-1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두 가지 피가 나오지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나오고!

“그리스도의 피”가 나옵니다.

하나는 “땅에 속한 짐승의 피” 이고,

하나는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짐승의 피는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 깨끗케 한다고 합니다.

 

율법으로는 짐승의 피를 드렸어요.

율법으로 드리는 짐승의 피로는 육체만 정결케 할 수 있어요.

마음은 정결케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율법을 정의 할 때 사랑이라고 했어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렇게 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은 율법으로는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껍데기로만 사랑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율법은 반쪽 사랑인 겁니다.

 

하나님은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만 받아요.

율법 아래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나오지 않아요.

율법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도 기껏해야 껍데기에 불과해요.

그래서 율법으로는 온전케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온전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에 속한 성막을 모형이라고 했어요.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성막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에 눈길을 빼앗겨서는 안 되어요.

성막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는 지도와 같아요.

장차 온전한 피를 안내하는 지도에요.

그리스도의 피를 말해주라고 성막을 준 것입니다.

이게 성막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가 담고 있는 하늘나라 정보에요.

 

중요하니 다시 반복해서 말합니다.

 

알다시피 성막은 짐승의 피로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대 제사장이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늘에 있는 성막의 실체를 보니 거긴 짐승의 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로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비밀을 맡았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세상에다 하늘나라에 비밀을 알려주어야 할 책무가 있어요.

신약으로 말하면 하늘나라의 비밀이 교회에 주어졌어요.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비밀입니까?

천국 가는 비밀이지요.

천국에 어떻게 가느냐?

그리스도의 피로 가요.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어요.

 

세상은 자신의 행함으로 간다고 믿고 있어요.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고 믿어요.

그럼 교회는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해요.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세상과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이걸 유대인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해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지금도 이런 역사는 반복되어서 일어나고 있어요.

예수의 피를 말하면 행함을 주장하는 성화론자들이 발끈해요.

성화론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의 구실을 성실히 잘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유대인인지 꿈에도 몰라요.

알면 그런 짓을 못하지요.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세상이라 하면 너무 광대하니 구체적으로 교회라고 합시다.

교회 안에 두 부류가 있어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 안에도 육으로 난 자가 있고 말씀으로 난 자가 있었어요.

표면적 이스라엘이 있었고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었어요.

표면적 이스라엘은 육적 신자라고 하고 이면적 이스라엘을 영적 신자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있어요.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영적 신자가 가요.

영적 신자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져 있어요.

 

영적 신자는 무슨 말을 들어도 영적으로 들어요.

하늘에 말로 듣는단 말입니다.

성경을 전부 영적으로 해석을 해요.

 

하지만 육적 신자는 무슨 말이든지 육적으로 해석을 해요.

인간 입장으로 해석한단 말입니다.

성경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 해석해요.

육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단 말입니다.

 

복을 말해도 육적인 복을 말하고,

구원을 말해도 육적인 구원을 말해요.

 

복을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고,

구원을 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라 하고,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하고 있어요.

 

이런 일을 지금 누가 하느냐 하면 자유주의자들이 해요.

넓은 의미에서 육에 속한 자는 전부 자유주의자예요.

세상에 관심을 두고 사는 자 모두에요.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3:18-21.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바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그것도 여러 번 말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땅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일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땅의 일이란? 육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먹고 마시는 배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자들이 신은 배라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 그들이 가치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구원이 땅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 말라고 하셨어요.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그의 나라는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에 들어갈 의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에요.

그러니까 먹고 살아갈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를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를 믿어도 전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사는 것으로 믿어요.

입술로는 하늘나라를 말하나 마음은 땅에 것에 있어요.

천국은 립써비스이고 실제는 이 세상에서 먹고 살 궁리만 하는 것입니다.

 

몇 일전 신문을 보니 서울에 있는 사0의 교회 오00 목사 인터뷰가 나왔더군요.

2100억을 들여서 성전을 짓는다고 교계에서도 비판을 하고 있고 세상에서도 여기저기서 비판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 입장을 밝힌 겁니다.

 

왜 그런 대형교회를 지어야 하는가?

교회가 좁다는 겁니다.

지금의 교회는 4500명 수용하는데 지금은 4만 5천 명이 모인답니다.

너무 협소하다는 겁니다.

물론 협소하니 넓은 데로 옮길 수 있어요.

저는 교회의 크고 작음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이들이 교회를 짓고자 하는 발상을 문제 삼는 겁니다.

 

오00 목사는 성전을 짓고 나면 지역사회를 위해서 일을 하겠답니다.

교회가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성전건축 비용의 십일조인 210억을 사회를 위해서 쓰겠대요.

장학 재단을 만들어서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구제하는 일들을 한답니다.

지금 지진으로 아비규환을 하는 아이티에도 사랑의 교회 이름으로 구제하기 위해서 100만 달러를 모금하고 있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 일이냐 에요.

구제하고 장학금 주는 것은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다 할 수가 있어요.

교회의 본질은 구제하고 장학 사업하는 곳이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에요.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그리스도에요.

예수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해요.

시편 2편의 포고령처럼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해요.

 

교회는 세상에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곳이에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일리는 일을 하는 곳이에요.

인간의 악함을 고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천국 간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해요.

이건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말이에요.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교회는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곳이에요.

 

세상에는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에 능력을 몰라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예수님의 피로 영생이 주어지는 줄을 몰라요.

이게 하나님의 비밀인데 이 비밀을 교회가 세상에 알려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여기에 있어요.

 

예수님의 피만 증거 되어지면 다른 것 다 없어도 괜찮아요.

다른 것은 다 비본질적인 것이에요.

있어도 되고 없어도 괜찮아요.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없이 장학 사업을 하면 뭐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일하면 뭣합니까?

이런 것이 죄사함을 주는 것이 아닌데요.

그래서 오00 목사의 인터뷰가 틀렸다는 겁니다.

 

건축 헌금의 십일조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안다고 하면 교회를 크게 지으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헌금을 사회에 환원한다고도 하지 않아요.

왜 귀한 헌금을 사회에 환원합니까?

 

교회 짓는 일이 복음적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개의치 말고 지어야지요.

사람의 비난이 두려워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댄다는 것은 본인도 틀린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복음이기 때문이에요.

교회 속에 자기 탐욕이 그대로 녹아져 있기 때문에 진행하는 겁니다.

 

이건 누굴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교회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도 다 안다고 해요.

그러면서 이런 저런 합리화를 시켜요.

안다고 한다면 그러지 말아야지요.

그래야 아는 것이에요.

 

1+1= 2예요.

이건 정답이에요.

그럼 답을 안다고 하면 2를 적어야지요.

답을 안다고 하면서 1을 적거나 3을 적으면 그건 답을 아는 것이 아니지요.

 

교인들이 교회를 짓자고 하여도 교회는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해야지요.

솔직히 말해서 교회가 커야할 이유가 없어요.

왜 교회가 대형화 되어야 합니까?

흔히들 교회가 커야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게 근본부터 틀린 겁니다.

 

교회가 할 일이란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면 되어요.

그럼에도 지금 교회들이 하는 일을 보세요.

무슨 일을 합니까?

전부 세상일이에요.

 

이건 그 교회에 하나님의 정보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증거에요.

하늘에 정보가 없기 때문에 세상일을 하느라 분주한 겁니다.

교회는 구약의 성막과 같아요.

성막이 하늘나라 정보가 담겨 있듯이 교회도 하늘나라 정보가 담겨 있어야 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상한 내용이 있어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온전한 장막이 있다고 합니다.

창조 밖 세계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리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들어가시되 그냥 들어가지 않고 자기 피를 앞세우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곳은 천국입니다.

하늘나라에요.

그럼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들어가는 곳이란 말이 되지요.

그렇지요.

 

이걸 교회가 담고 있어야 할 정보에요.

이 정보를 알려주어야 해요.

여보시오!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보소!

예수님이 자기 피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국 백성은 귀가 번쩍 열려서 그 말을 듣고자 해요.

 

천국은 예수님의 피로 가는 곳입니다.

이 말이 모든 성경의 내용이에요.

이것 하나 알려주려고 성경이 이렇게 두껍게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워낙 인간들이 못 알아먹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한마디 하면 척 알아먹어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가 않아요.

 

자식들 키워보면 알지요.

어디 이놈들이 한마디에 척 알아먹던가요.

여러분은 한마디에 척 알아먹었나요.

아니지요.

 

눈만 뜨면 잔소리를 듣고 지금 이만큼 서 있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해요.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성경이 두꺼워지는 겁니다.

 

그럼 교회는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가 하면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면 되어요.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에요.

교회가 구제하고 가난한 학생들 공부시켜주는 곳이 아니에요.

이걸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교회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은 교회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수천억을 들여서 이미 폐기된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육적 신자라고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고로 땅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염불엔 관심이 없고 잿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 사람들 귀에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이 안 들려요.

예수님은 노숙자였다 라는 말이 아니고 이 세상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의 교회라고 하면서 왜 그토록 보이는 성전에 집착을 합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에요.

땅에 속하였기 때문이에요.

 

제가 복음을 깨닫고 느낀 겁니다.

좌우지간 그 무슨 이유를 대든지 간에 보이는 교회를 집착하는 자는 다 이단이에요.

마귀는 교회를 건물로 각인시켜 놓았어요.

말로는 성도 개개인이 교회다! 라고 하지만 그건 관념일 뿐이에요.

이걸 믿는다면 보이는 교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럼에도 집착하는 것은 관념이지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우기면서 짓고자 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에 집착한다는 것은 거기서 얻어 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먹고 살아갈 터전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겁니다.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우상을 섬겨요.

우상은 항상 손에 잡히고 눈에 보여야 해요.

이성으로 믿어지는 게 우상이에요.

 

인간의 이성은 오감(五感)을 통하여서 인지(認知)해요.

그래서 인간들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드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 그러면 막연해요.

안 믿어져요.

 

그래서 보이는 하나님 집이라도 지어 놓고 십자가라도 걸어 놓아야 믿겨져요.

십자가라도 걸려 있어야 야! 여기에 예수님이 계시는구나!

안심이 되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신전(神殿)을 중심으로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신전 중심의 종교에 총화가 불교에요.

세상 종교들은 모두가 신전을 가지고 있어요.

이는 우상성으로 종교가 세워졌기 때문이에요.

 

성전만 있으면 인간은 모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목사들은 욕을 들어가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물어 버린 성전을 다시 짓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에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지어요.

인간은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전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창조 밖에 있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그러잖아요.

예수님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셨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은 피조물이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말리지요.

성전은 하나님이 짓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도리어 하나님이 내가 네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잖아요.

 

이는 하나님께선 인간이 지은 집에 살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이 살 집도 지어준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피조물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독자적으로 살 수가 없어요.

창조주가 살려 주어야지만 살 수가 있어요.

이걸 알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일 하겠다고 설치지 못해요.

 

인간들은 기껏 지어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장난치는 것에 불과해요.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감 블록을 가지고 집을 짓는 것과 같아요.

이미 있는 블록으로 지을 뿐이에요.

 

인간들은 하나님 흉내를 내고자 해요.

그래서 자기 손으로 뭔가 만들면 그것에 의미를 두게 되는 겁니다.

그걸 바라보면서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좋아해요.

자기 흔적에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인간은 일평생 자기 흔적 남기기 싸움을 해요.

높은 산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는 것도 나 여기 다녀갔다고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에요.

꼭 강아지가 전봇대에 오줌을 싸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것과 같아요.

 

이게 신앙생활에까지 자리를 잡고 있어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자기가 한 일에 애착을 갖게 되어요.

율법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율법신앙엔 자기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도 자기 흔적이 남아 있고,

봉사에도 자기 흔적이 남아 있고,

교회 건축하는 데에도 자기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겁니다.

신앙의 싸움은 자기 흔적을 남길 것인가?

예수님의 흔적을 남길 것인가? 의 싸움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지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귀한 말씀이에요.

 

본문을 봅시다.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을 일컬어 새 언약의 중보라 하지요.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을 바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한다면 옛 언약의 중보자도 있겠지요.

옛 언약의 중보자는 모세에요.

모세의 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법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폐하고 주어지는 언약이에요.

새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옛 언약은 버렸다는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다면 옛 언약을 폐기하는 분이란 것을 깔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럼 예수님은 옛 것을 폐하는 일을 하시겠지요.

왜 옛 것을 폐하느냐 하면 옛 것으로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겁니다.

 

중보자란?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분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죄인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연결시켜 주는 중보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뜻을 죄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요.

 

이렇게 되면 죄인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의중을 알 수가 있어지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어요.

그럼 죄인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뭔 줄 알아야지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나 섬겨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제사보다 긍휼을 배우라고 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믿었어요.

유대인들은 짐승으로 제사를 지냈어요.

그래서 눈만 뜨면 열심히 아주 열심히 짐승의 제사 지내기에 바빴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이 차려 놓은 밥상을 걷어 차버렸어요.

하나님은 짐승의 피는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받으신다고 했어요.

이건 유대인들은 몰라요.

 

유대인의 잘못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정보를 듣고자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정보를 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과 상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상대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뜻을 알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아들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의 정보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 하나가 곧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 하나 하나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신앙도 가짜인 겁니다.

내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열심과 충성과 재물을 갖다 바친다 하여도 하나님은 받지 않아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만 받으세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바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은 인간의 행함을 말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신앙생활을 한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율법신앙이라고 합니다.

율법 신앙은 내가 뭘 하는 겁니다.

내 것을 갖다 바치는 겁니다.

이게 죄에요.

 

인간의 의가 담긴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요.

유대인들이 이걸 몰랐어요.

자기들 정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화를 낸다고 생각했어요.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율법을 과도하게 해석을 해서 결국 율법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엔 백성들이 율법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고 살았어요.

오죽했으면 안식일에 밥도 못 해먹었겠어요.

안식일에 밥 해 먹는 것도 죄라고 여긴 겁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달달볶지 못해서 안달이 난 분으로 만든 겁니다.

이러니 백성들이 하나님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생겨난 신앙이 외식신앙이에요.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여도 속으론 증오하였던 겁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세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아주 극단적인 저주를 끌어 붓잖아요.

속에는 각종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면서도 겉은 거룩한 척 한다고 평토장한 무덤 같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독사새끼들이라고 했어요.

 

거짓 선지자가 왜 나쁜가요?

가짜를 가지고 진짜라고 속이기 때문이에요.

거짓 의로 광명의 천사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말로 본다면 겉은 천사 같은데 그 속은 악마에요.

겉으로 악마 같아야 안 속는데 이 놈들은 전부 천사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교인들이 속는 겁니다.

차라리 겉으로 깡패 같으면 안 속을 텐데 말이죠.

 

왜 위장하나요?

도적질해야 하니 위장하는 거지요.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사람의 영혼을 도적질 하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처럼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교인들을 속이고 있어요.

진리를 모르면 다 속아요.

새 언약을 모르면 다 속게 된다는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이 가르치고 있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맞습니까?

어떤 목사가 목사답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목사의 말이 진짜 목사다운 말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렇게 말한 놈들이 바로 독사 새끼들이었어요.

율법신앙이 틀렸다고 나무란 예수님이 이단으로 몰렸어요.

율법신앙을 버리라고 하다가 예수님이 죽었어요.

율법신앙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거에요.

이 시대로 말하면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성화론자들은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다고 하면 화를 내요.

이단이라고 해요.

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 할 수가 없다고 하느냐!

교인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 라고 말해요.

유대인들이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 입장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신앙이 유대인에게 재앙을 불러 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작업을 하신 겁니다.

 

재앙을 불러일으킨 율법 신앙을 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면서 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핵심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 때문에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쇼킹한 이야기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살고자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증거는 율법으로는 사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붙들면 붙들수록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요.

 

바울이 이 사실을 말했어요.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보세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죽음이 쫓아오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겨냥하고 주어졌어요.

마치 유도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처럼 목표물을 쫓아다니면서 공격을 한단 말입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너 말씀 안 지키면 죽는다고 쫓아다니면서 말해요.

죽기 싫으면 항상 말씀을 지키라고 몰아쳐요.

 

인간이 말씀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저주인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는 곳엔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율법 아랜 쉼이 없고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대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시는 겁니다.

율법의 요구가 뭡니까?

죄인은 죽어야 한다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양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겁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 죽는다고 한 겁니다.

 

15절을 다시 봅시다.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는다고 하지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중보자가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려고 대신 죽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양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대신 담당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 뭐냐?

우리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신 거예요.

지금은 새 언약 시대에요.

새 언약 시대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시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왜 발생했습니까?

율법의 요구 때문이잖아요.

율법의 요구가 뭡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죽인다는 거잖아요.

 

이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 대신 죽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율법도 같이 죽었어요.

율법이 없어졌단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참소하던 기능이 효력을 다하였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의 중보자라고 믿는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 말씀을 들고 와서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 라고 참소하면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었어! 라고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으면 되어요.

이걸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럼 모든 하나님 말씀 앞에 예수님 피가 나와야겠지요.

그래요.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모든 말씀 앞에 예수님 피를 내어 놓아야 해요.

이게 새 언약의 중보자를 믿는 믿음이에요.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양인 성도는 성령이 실제화 시켜서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양들은 자기의 구원받은 바탕에 예수님의 피가 있음을 알고 모든 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은혜를 자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예수의 피에 고마움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고마움으로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아요.

도리어 그 일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이 대신 죗값을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어요.

구원을 받은 거에요.

우리가 쟁취하여서 따낸 것이 아니고!
그냥 공짜로 받았어요.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성도는 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어요.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자기백성들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과 맞바꾼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은 배경엔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10장에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어요.

양들은 이 사실을 안다고 했구요.

 

중보자가 뭐하는 분이라고요?

자기의 죽음으로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분이에요.

기억하세요.

 

세상엔 중보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자들은 모두가 죄 아래서 났기 때문이에요.

죄인은 중보자가 될 수 없어요.

 

중보자는 죄가 없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중보자는 자기 피로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 시켰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바탕에는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고 우리를 용서하신 겁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갈 때 희생 제물의 피를 앞세우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들고 갔지만,

예수님은 자기 피를 들고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들고 온 피를 보고 죄 아래 갇힌 예수님의 양들을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대제사장이 피를 법궤 위 뚜껑에 뿌리는 것은 그 법궤 속에 세 가지 증거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에요.

법궤 속엔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어요.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한 증거물들이에요.

법궤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다 죽어야 할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 위에 대속 제물의 피를 뿌리는 겁니다.

이는 흠 없는 짐승이 이스라엘 대신 죽었다는 증표에요.

하나님은 대신 죽어준 제물의 피를 보시고 죄 없는 것으로 간과해 주세요.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를 뿌려주신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라고 하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지금 우리나 동일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한 치도 다르지 않아요.

 

구약 이스라엘이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불평했다면 우리도 그래요.

구약 이스라엘이 망했다면 우리도 당연히 망해야 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언약이 바뀌었어요.

예수님이 옛 언약에 속한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어요.

 

우린 지금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 예수라는 대제사장이 이루신 대속에 은총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해 주고 있어요.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구요.

그러니 누가 율법 가지고 장난을 치면 혼쭐을 내 주세요.

너희 앞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피가 있는데 무슨 놈에 성화를 하여야 한다고 하느냐! 라고 하세요.

 

예수님의 피로 창조에 속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갈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십지가 피로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세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셨다는 것이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 복음이에요.

 

성도는 새 언약의 일꾼이에요.

새 언약으로 살고 새 언약을 증거하여야 해요.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이 새 언약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 결코 정죄함 없이 당당하게 사단의 참소를 이기고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영원한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내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다시는 천한 율법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옛 언약에 속한 죄를 다 도말하였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