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8강. 할례가 뭔가요?

정낙원 2012. 5. 30. 15:58

28강. 할례가 뭔가요? (롬 4:6-12)

 

롬 4:6-12=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義)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 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 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 할례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義)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 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義)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 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은혜의 나라” 라고 하고!

세상 나라는 “법의 나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은 서로 대조가 되는 나라입니다.

 

은혜와 법은 반대입니다.

법은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고!

은혜는 일한 것이 없는데도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보면 상반된 가치로서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법칙으로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상한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일하지도 않은 자에게 월급을 주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은 자에게 월급을 주는 것은 그것은 댓가가 아니고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인정 해 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는 그것을 의(義)로 여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의(義)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안 것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말해주었다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은혜(恩惠)란? “불쌍히 여기신다”

혹은 “긍휼을 베풀어 준다” 는 말입니다.

공짜로 시혜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입으려면 불쌍한 자로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그 불쌍함을 벗어 날 수가 없어야 합니다.

절망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처럼 물이 동하여도 뻔히 구경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라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구원을 받고 싶어도 구원 받을 수 없는 상태!

죄인 줄을 알고서도 죄를 이길 수 없는 상태!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스스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이어야 합니다.

늘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복음이 됩니다.

일하지도 않았는데 월급을 받듯이 기쁜 소식이 됩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 복음 되려면 나쁜 소식이 먼저 바탕을 깔고 있어야 합니다.

즉 나쁜 소식이 먼저 주어지고 난 후에 기쁜 소식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은 나쁜 소식입니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내가 이렇게 악한 죄인이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반드시 죄를 바탕으로 깔고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복음으로 남으려면 우린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쌍히 여기는 분은 계속하여서 자비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는 계속하여 자비를 받아야 하는 구조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구조가 곧 구원의 구조입니다.

쉬운 말로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을 계속하여 얻어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거부하면 죄에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 은혜를 거부하면 살 수가 없어요.

피조물이 창조주로부터 얻어먹는 것을 거부하면 죽음뿐입니다.

 

창조 자체가 은혜에요.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은혜에요.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은혜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는 신자이고 모르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면 법이 따라 옵니다.

그럼 죽어요.

법은 죽이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세상 나라 법칙과 다릅니다.

 

하늘은 창조 세계이고, 땅은 피조 세계에요.

창조 세계와 피조 세계는 살아가는 원리가 다릅니다.

창조 세계는 은혜를 주는 원리로 살아가고!

피조 세계는 은혜를 받는 원리로 살아갑니다.

 

이건 부모와 자식의 차이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입장이고 자식은 피조물 입장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자식은 부모가 주는 것을 받아 누림으로서 삽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주는 것이 의로운 것이고!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으로 사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을 열심히 얻어먹으면서 감사하는 것이 피조물의 삶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일하지도 않고 삯을 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해 주시고!

불법한 자를 죄 없다 해 주시고!

발가벗은 자를 가리워주신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의 구원을 예를 들어서 변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義)로 여긴 때가 할례시냐 아니면 무 할례시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의로워졌느냐!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의롭다 하심을 입었느냐!

어느 것이 맞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단호하게 무 할례시라고 강조합니다.

 

어째서 그러한지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를 통하여서 추적해 봅시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것이 창세기 12장입니다.

선택을 입었다는 말은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의 조건과 상관없이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아브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공짜로 받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입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은 무 할례시가 맞지요.

아브람으로 있을 땐 할례가 없었어요.

할례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꿔지고 난 후에 행한 사건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할례와 상관없이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75세에 아브람으로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고 그로부터 약 24년 후인 창세기 17장에서 99세 때에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할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창세기 12장에서 17장에 오기까지 언약이 주어지고 아브람의 불순종 사건이 발생하고 급기야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을 시켰느냐 하면 아브람의 불순종 사건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사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유업을 이을 후사를 주겠다고 하였음에도 아브람이 기다리지 못하고 사래의 몸종인 애굽 여자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고 맙니다.

그리고는 아브람은 종이 낳은 아들을 후사로 삼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거부하십니다.

 

애굽 여자에게서 난 자는 육으로 난 자입니다.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낳은 자는 종이지 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은 법 아래 있어요.

법으로 다스려요.

법 아래 있는 자는 다 죽은 자에요.

법으로 죽은 자는 산 자들이 살아가는 은혜의 천국을 유업을 이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종이 아닌 정실부인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정실부인이 낳은 아들은 약속으로 낳아진 자입니다.

약속으로 낳아진 자라야 약속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나라에서 살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그려내는 도구로서 선택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인 은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조는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다 하십니다.

창조 자체가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럼 아브람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창조에 모습들이 나타나려면 아브람의 힘으로 언약의 후손이 생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을 생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걸 악으로 규정합니다.

비언약적 사고라고 하여 징벌 대상입니다.

 

이스마엘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난 후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새로운 사건을 벌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짓을 한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을 죽이는 사건을 벌이십니다.

그게 할례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17장을 봅시다.

 

창 17:1-2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합니다.

“전능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는 말은 너는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고 하십니다.

 

잘 보세요.

누가 누구에게 약속을 하십니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운다고 하지요.

 

여기서 내가 누군가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누구 언약이라고 합니까?

하나님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누가 누구에게 세웁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세우지요.

 

세운다는 것은 약속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내가 너에게 한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는 거에요.

넌 가만히 지켜보아라!

내가 어떻게 너에게 언약한 내용을 지켜내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브람 몸에 언약을 새겨 넣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그려나가신다는 말입니다.

성취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의 몸을 가지고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려나가세요.

그럼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인 은혜로운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려면 아브람이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럼 또 다시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을 생산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을 새겨 넣고는 자기 힘으로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아브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 예표가 아브람의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음으로서 아브람은 이제 죽었습니다.

 

자기 가능성으로 살던 아브람은 할례로 죽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 언약을 이루고자 하던 놈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할례 받은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건 새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다.

 

할례로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이 죽었고 아브라함이라는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할례 후에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에서 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던 아브람은 할례로 죽고 하나님 은혜로 살게 되는 아브라함으로 새로 거듭난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능력으로 살았어요.

그러니 스스로 산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람을 산 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산 자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할례로 새 사람이 된 아브라함은 스스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죽은 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도구로서 사용 되어지는 자로서 산다는 의미에서 죽은 자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아브라함은 자기 주권을 상실했어요.

하나님께 차압당하였어요.

그러니 죽은 자이지요.

이해가 되나요.

 

왜?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게 하고 이름을 개명시킵니까?

이 놈이 살아 있으면 계속해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고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요.

 

알다시피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자신이 이루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이라는 놈을 그대로 두면 이 놈이 살아서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듯이 자기가 하나님 약속을 이루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러면 자기가 이루었다고 하지 하나님이 이루었다고 하지 않아요.

자기 의(義)가 드러나지 하나님 의(義)가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의(義)를 드러내고자 하는 아브람을 할례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아브라함으로 새로 만드십니다.

 

이제는 내 맘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표징으로 몸에 할례를 받게 한 후 옛 사람과 다른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무기력한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불가능한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단 한 뼘이라도 이룰 수 없는 자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아브라함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은혜로운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야 창세기 17장 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하나님 손에 질질 이끌려 다니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도 사라로 이름을 개명시킵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아내이지만,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입니다.

아브람이 죽었듯이 사래도 죽었습니다.

그 상징을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월경이 끊어졌다는 것은 아이를 생산 할 수 없는 몸이란 말입니다.

여자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경수가 끊어진 사라는 죽은 여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죽은 자이고 사라도 죽은 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에 속한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인 아브라함과 사라를 열국의 아비와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너의 후손이 심히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아들이 너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삭이 하나님이 낳은 자가 되려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조금도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이 낳은 자가 아니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준다고 하자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웃기지 말라고 하면서 비웃어 버립니다.

우린 안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비웃음 속에서 아들을 낳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이삭이란? “비 웃음”이란 뜻입니다.

이는 “우린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아이는 우리가 낳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아들이란 말입니다.

 

이삭은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볼 때마다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죄인으로 드러내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후손은 반드시 이렇게 인간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자로 서 있어요.

 

이삭은 예수님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삭처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성도들의 죄를 드러내는 분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발각이 되어요.

그리하여 내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임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남자로서의 죽음을 상징하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는 남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고자란 말입니다.

또한 사라 역시 경수가 끊어짐으로서 여자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둘 다 영적으로 보면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에게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들이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에 속한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됩니다.

사라가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은 육으로 낳아진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자식입니다.

은혜의 아들입니다.

그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된 자식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들 속에서 생명으로 창조 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인간의 힘이 완전히 배제가 된 자식입니다.

비록 사라의 몸을 빌려서 낳아진 자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에게 자식은 “오직 하나” 라고 합니다.

육적으로 보면 이삭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그 이삭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삭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 속에는 예수님의 출생에 비밀도 담겨져 있어요.

이삭이 여자의 몸을 빌려서 낳아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것처럼!

예수님도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낳아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낳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건 엄청 중요한 이야기이니까 귀 담아 들으세요.

이삭은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아들입니다.

이걸 흠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 완전히 배제가 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세요.

어떤 제물인가 하니 이삭처럼 인간의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자는 흠 없는 제물입니다.

이렇게 흠 없는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십니다.

이를 두고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삭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입니다.

흠 없는 제물이에요.

흠이 없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죽음은 죄의 삯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죄 없는 자가 제물로 죽어요.

 

이는 누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걸 대속(代贖) 제물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한 대속 제물입니까?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 제물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을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즉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놓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흠 없는 자가 흠 있는 자를 대신하여 죽어서 흠 있는 자가 흠 없는 자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어요.

의인이 죽어서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죽은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은 인함이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이삭이나 예수님은 누군가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거예요.

누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제물입니까?

죄인을 위하여 죽어주는 제물입니다.

 

그럼 흠 없는 이삭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되겠지요.

이삭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아브라함을 위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죄값을 이삭에게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막상 이삭을 결박하고 죽이려 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제물이 있었습니다.

수풀에 걸린 숫양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하자 하나님이 멈추게 합니다.

이제 되었다!

네 믿음을 보았으니 그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삭 대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제물로 대신 바치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이 되고!

이삭은 숫양을 제물로 바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이삭을 제물로 받은 것이고!

이삭 대신 숫양을 받은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 앞에서는 이삭은 흠 없는 제물이고!

이삭에게는 숫양이 흠 없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삭이나 숫양은 모두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제물을 일컬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라는 뜻에서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이삭이나 숫양은 곧 장차 아브라함처럼 선택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을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 되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가지고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셨고!

이삭에게는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숫양으로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통해서 예수님을 계시하셨고!

이삭에게는 수풀에 걸린 숫양으로 예수님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져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지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삭이 잇듯이 하나님의 유업도 예수님이 잇습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천국에 누가 가는가 하면 대신 죽은 자들이 가요.

대신 죽은 자들을 위하여 천국이 준비가 되어 있어요.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제물들이에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제물이에요.

자기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제물의 죽음으로서 살아납니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들이 되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한 아들을 죽여서 많은 아들들을 생산하였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들에 영(靈)”을 보내서 예수님처럼 아들을 만들어 버립니다.

양자로 삼아 버립니다.

이제 아들에 영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들을 다시 예수님처럼 제물로 삼아 버립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5-20=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잘 보세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은 자기로 인하여 살아난 자들을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대신 죽은 자를 위하여 살게 한다고 하지요.

이게 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났어요.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줌으로 살아났어요.

우리는 이제 야호! 신난다! 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모가지를 확 잡고 너 이리와!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그러십니까? 라고 하자!

이제 너희들은 예수 대신 살어! 라고 합니다.

 

예수 대신 살으라는 말은 너희들이 예수 대신에 죽으라는 말이에요.

결국 하나님이 예수를 죽이고 우리를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인생을 대신 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아들에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를 알고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使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있는 자에요.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던져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있다 함은 그리스도가 당하신 것을 그대로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듯이!

이젠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을 아들에 영인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 아들로 만들어서 화목의 제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예수를 죽여서 스데반을 살려냅니다.

그리곤 스데반을 예수의 자리로 밀어 넣고 사울이라는 자를 대신하여 죽게 합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사울을 바울로 살려내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살아난 사울이라는 바울을 다시 예수님의 자리로 쓰윽 밀어 넣습니다.

고린도후서의 말씀대로 사신으로 보냅니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서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물로 죽임을 당합니다.

바울의 죽음으로 또 다른 사울이 바울로 살아납니다.

바울의 죽음으로 살아난 사울이라는 바울이 바로 우리들이에요.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사신이에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은 자들이에요.

 

그럼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죄인들을 위해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사울들을 바울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죽임 당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 영을 받아 양자가 된 성도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시해요.

그렇게 본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몸에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지체이니까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죽임 당하기로 작정이 된 도살당할 양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간주하세요.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를 대신하여 사는 사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자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되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이는 모두가 대신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사명(使命)을 줍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냅니다.

 

왜? 보냅니까?

죄사함을 위하여 보내지요.

그러면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숨으로 제자들 속으로 들어간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러셨지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는데 그때 내가 너희 안에 올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잠시 후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행연습을 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죄사함을 위하여 보내시지요.

피 흘리심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으라는 말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 하는 사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았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약속으로 난 자들을 제물로 사용하여서 또 다른 약속의 아들들을 생산해 내세요.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죽임당하는 피 흘림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로부터 의인 사가랴의 피가 자기 백성들이 있는 곳에 뿌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들의 피 뿌림을 통하여서 또 새로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곤 예수를 믿게 하여서 구원해 내십니다.

이게 기독교에요.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어요.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제자들을 살려 냈어요.

그리곤 자기로 인하여 살아난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갑니다.

가서 예수님처럼 또 죽임을 당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으로 죽은 그 제자들의 죽음을 가지고 또 다른 제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예수로 인하여 살아난 아들들은 이젠 역(逆)으로 예수를 대신하여 제물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에요.

죽임 당하기로 작정이 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예수님 안에는 자기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약속의 후손이듯이 성도도 약속의 후손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약속으로 낳아진 자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약속으로 낳아진 자는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예수님처럼 죽어지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에 모습을 보았습니다.

천국에 가보니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들이 무얼 하는가 보니 하나님에게 신원을 합니다.

어떤 신원을 하는가 하면 세상을 빨리 끝장내서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아직까지 너희 동무들이 너희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숫자가 차야 된다고 합니다.

결국 성도는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져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지는 운명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몸에 예수님의 죽음을 늘 짊어지고 있어요.

그 증거로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에요.

그래서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는다고 하신 겁니다.

 

다시 할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창세기 17장을 봅시다.

 

창 17:10-11절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잘 보세요.

너희는 양피를 베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이것은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지요.

 

표징(表徵)이란?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표란 말입니다.

몸에다 표를 한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이라는 표를 몸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로 몸에 표를 한 것은 너와 나는 언약 관계 안에 있다는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11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義)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 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를 표(表)라고 하지요.

무슨 표인가 하면 너는 내 것이라는 표에요.

너는 내 소유라는 표에요.

 

예전에 “추노(追奴)”라는 드라마를 보았지요.

거기에 보면 노예의 얼굴에 노(奴) 자라는 낙인(烙印)을 찍어 놓았어요.

이건 주인의 소유라는 뜻이에요.

주인의 종이란 말입니다.

 

할례는 낙인이에요.

낙인은 자기 것에게만 해요.

내 것이라는 표시로 낙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義)를 인(印)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브라함은 할례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자에요.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 언약 안에 있었어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할례를 안 받아도 언약 백성이에요.

 

그럼에도 굳이 아브라함의 몸에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은 너는 이미 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시를 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넌 내꺼! 라고 찜을 해 놓은 거에요.

이걸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굳이 표를 안 해도 이미 하나님 백성을 왜? 표를 했을까요?

 

여기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어요.

이걸 구원으로 말하면 아브라함 너는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이 되었다는 것을 몸에다가 할례로 표시를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할례는 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라는 것을 표를 해 놓은 것입니다.

이건 의(義)와 상관이 없어요.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이미 의롭게 된 자라는 표시로 할례를 행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할례에 의미를 두면 안 되어요.

할례 받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걸 오해했어요.

할례 받음에 의미를 두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할례가 자랑거리가 되고 만 겁니다.

할례가 의(義)로 둔갑하고만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던 바리새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은 유대인 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일이 이 지경이 되다가 보니 할례를 받으면 의로운 자이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불의한 자라는데 까지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주객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은 할례와 상관없이 유대인이에요.

할례를 안 받아도 유대인이에요.

그러니 할례를 가지고 유대인이다 아니다 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할례를 가지고 유대인이다 아니다 를 판단하게 되면 육신의 조건으로 유대인과 비 유대인으로 구분이 되어요.

그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라는 조건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이 되고 말아요.

결국 할례 받은 자는 의로운 자이고 할례를 안 받은 자는 불의한 자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아브라함 후손으로 이해해 보면 심각해져요.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게 하였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여야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여겼어요.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이방인처럼 여겼어요.

이건 아니지요.

 

이걸 의(義)로 이야기 해 봅시다.

하나님은 너는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넌 의로운 자라는 표시를 할례로 해 놓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림으로 오셨을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할례를 가지고 의와 불의로 구분을 해 놓은 것입니다.

할례 받은 자는 의로운 자이고 할례 받지 않은 자는 불의한 죄인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그 할례 받음을 가지고 의로운 것으로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야~ 너희는 죄인이야!

그러자 유대인들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할례 받았잖아!

할례 받았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느냐! 라고 따집니다.

 

그러자 바울이 야~ 임마!

할례의 의미도 모르면서 할례를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인친 것인데!

너희는 왜? 할례를 받아야 의롭다고 하느냐!

 

그건 너희가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야!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할례를 받는 자는 육신에 하는 것 밖에 안 돼!

그건 받으나 마나야!

할례는 마음에 하는 거야! 라고 합니다.

마치 선문답하는 것과 같지요.

 

이건 엄청난 차이에요.

어려운 말을 하게 되었는데 잘 이해하세요.

할례를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응용해서 말해 봅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대답하기가 어렵지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피조물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피조물 입장에서 접근하면 이해가 안 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원리로 일을 하는데 피조물을 역사의 원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원리는 완료적으로 이해하고 역사는 점진적으로 이해해요.

하나님은 완료 입장에서 일을 하는데 피조물은 미완료 입장에서 이해를 한단 말입니다.

 

창조의 세계와 피조의 세계의 인식의 차이는 완료와 미 완료의 차이에요.

 

창조는 완전이고 완성이고 완료인데 역사라는 피조 세계는 시작과 끝이라는 흐름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역사는 용도가 다하면 폐기 되어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허상이에요.

실상은 묵시에 있어요.

그래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역사에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에요.

 

묵시에서 역사가 나왔어요.

이걸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역사가 묵시에서 나왔고 묵시에 속한 것들을 보여 주다가 다시 묵시 속으로 들어가요.

이를 두고 만물은 철거가 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온전한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완전치 않다는 말입니다.

시작에서 끝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요.

그러므로 역사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점진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3 시제로 나누어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어 간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고 육에 속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그 따위로 신앙생활하면 지옥 간다고 공갈을 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잘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행위 구원이 되어요.

지옥 가는 것은 애초부터 지옥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에서와 야곱처럼 지옥 백성과 천국 백성을 구분해서 이 세상에 보냈어요.

그러므로 점진적인 구원이란 없어요.

이건 육에 속한 자들이 역사적인 사고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잘 이해하시면 점진적 구원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창조 세계와 피조 세계의 인식의 차이는 마치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의 싸움과 같아요.

 

여러분 닭이 먼저 입니까?

알이 먼저 입니까?

이건 인간들 입장에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에요.

 

피조 세계에서는 알에서 닭이 나옵니다.

그럼 그 알은 누가 낳았나요?

닭이에요.

 

그럼 누가 먼저인가요?

닭을 만든 알인가요?

알을 낳은 닭인가요?

 

이건 피조물의 이치로 접근하면 답이 없어요.

하지만 창조의 이치로 보면 간단해요.

피조물의 이치는 유(有)에서 유(有)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이치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와요.

 

창조란? 완료이고 완성이에요.

창조의 세계에서는 점진적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창조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면 즉시로 완료된 상태로 나타나요.

 

창조에는 점진적이란 것이 없어요.

점진적이란 미완료이고 미 완성이에요.

점진적은 흐름이 있는 역사라는 피조 세계에서만 있어요.

 

그럼 묻습니다.

알에서 병아리로 부화하는 것은 점진적인건가요?

완료인가요?

점진적이지요.

 

알에서 병아리로 부화하는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그럼 알에서 병아리로 나오는 것은 창조의 원리인가요?

피조의 원리인가요?

피조의 원리이지요.

 

그럼 창조의 원리는 어떤가요?

창조의 원리는 완전이고 완성이라고 했지요.

점진적이 없다고 했지요.

그럼 알에서 부화가 되어서 병아리로 나오는 것이 없겠지요.

 

하나님이 짐진적으로 닭이 되는 알을 창조했을까요?

아니면 완전한 닭을 창조했을까요?

온전하고 완성된 닭으로 창조했어요.

알을 낳을 수 있는 닭으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럼 창조의 원리로 보면 닭이 먼저인가요?

알이 먼저인가요?

닭이지요.

닭은 완료에요.

속된 말로 완성품이란 말입니다.

 

마치 아담처럼 완전한 자에요.

아담은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완전한 자에요.

범죄한 하와를 위하여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온전한 자에요.

미성숙한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온전이고 완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완료라고 하고 완전이라고 합니다.

이게 창조의 세계에요.

 

하나님은 창조주세요.

완성품을 만든단 말입니다.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미 완료품을 만들지 않아요.

 

성도의 구원은 창조에 속한 일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완성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자기 백성을 창조했어요.

 

구원은 단회적이고 완료적인 거에요.

점진적인 구원은 없어요.

서서히 구원이 되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성경이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 라는 3 시제로 말하는 것은 구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역사 속에서 피조물의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역사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어요.

흐름이 있어요.

점진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과거 현제 미래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과거에 33% 현재에 33% 미래에 33% 받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100% 짜리 온전한 구원을 받았어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고 하지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리 정한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미리 정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 아니고 이미 영화롭게 하셨어요.

이건 창조와 같아요.

완성이 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

 

하나님은 완료가 된 자들을 이 세상에 보냈어요.

흐름이 있는 미 완료인 역사 세계에 보내셨어요.

역사는 시작과 끝이라는 흐름이 있고 점진적이라고 했지요.

완료된 자가 점진적인 구조 속으로 던져졌어요.

이건 마치 흐름 안에 있는 역사라는 컨베에벨트에 창조에 속한 완제품이 실려 가는 것과 같아요.

 

성도는 역사 속에서 창조에 속한 자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미 완료된 구원으로 살아요.

서서히 구원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완료 된 것으로서 세상에 속한 자들과 다름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사 세계는 온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하고 완성된 세상이 따로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후에 철거가 될 곳이라고 알려 주고 있어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에서는 열심히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성도는 단번에 다 이루어진 구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종교가 허구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시편을 봅시다.

 

렘 1:5절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시 139:16절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언제 알았다고 합니까?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다고 하지요.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구별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선지자로 선택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사용하려고 이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이 일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에요.

이걸 창세전 언약에 속한 일이라고 합니다.

 

시편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다고 하지요.

피조물 입장에서 보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창조의 세계에선 이미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몸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력서를 책에다 다 기록을 해 놓았다고 하잖아요.

 

무슨 말인가요?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천국으로 갈 것인가를 다 기록을 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가 자기가 해야 하는 역할이 대본에 다 적혀 있는 것과 같아요.

배우는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를 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일생을 창세전에 책에다 다 기록을 해 놓았어요.

우린 그 책에 적힌 대로 역사 속에서 역사의 흐름을 따라서 살다가 가요.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그 흐름에 맞추어서 그려나가야 하니까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점진적인 시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점진적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에요.

잘 이해하세요.

 

이걸 성화주의자들이 이해를 못해요.

육에 속한 자들이 깨닫지를 못해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그런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3 시제가 있다!

잘못하면 짤린다 라고 공갈을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육에 속한 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미 완료된 세계에 속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의 손에 책이 있어요.

그 책은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역사 속에 그려내는 시나리오에요.

그럼 그 책 속에 내용은 이미 완료된 것이에요.

완료된 것은 하나 둘씩 역사 속에 옮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먼저 옮겨진 것을 과거라고 하고!

지금 옮겨지는 것을 현재라고 하고!

나중에 옮겨지는 것을 미래라고 합니다.

옮겨진 순서만 다를 뿐 완료된 것들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책에 적혀 있다는 것은 곧 완료가 된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할게요.

화가가 그림을 그립니다.

그 그림은 이미 화가의 머릿 속에 완성된 것으로 그려져 있어요.

머리 속은 보이지 않아요.

마치 묵시와 같아요.

 

이 묵시에 속한 그림을 캔버스에 그립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먼저 그려진 것을 과거라고 하고!

지금 그리는 것을 현재라고 하고!

잠시 후에 그리는 것을 미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려진 것일 뿐이에요.

그 그림은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된 것으로 있던 것입니다.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의 구조에서 캔버스에 그려진 것으로 볼 때는 점진적이 될 수가 있지만 묵시라는 완료된 구조에서 보면 완성된 그림이에요.

 

성도의 일생이 이와 같아요.

묵시적 존재가 역사라는 곳으로 던져진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일생을 책에다 이렇게 적어 놓았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역사 속에서 있어야 할 일생이 70년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일생을 청소년 시절과 장년 시절과 노인 시절 이렇게 3 구분으로 나누었어요.

 

청소년 시절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시기이고!

장년 시절에는 복음을 활발하게 전하는 시기이고!

노인 시절에는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고 합시다.

 

이게 창세전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정해 놓은 시나리오에요.

그럼 그 사람은 이런 팔자를 안고 역사라는 흐름이 있는 곳으로 파송이 되었습니다.

그럼 역사 속에서 그 사람의 일생은 책에 적힌 시나리오대로 펼쳐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펼쳐지겠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청년 시절에는 지독하게 율법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책인 시나리오를 보니 그가 장년 시절이 되어서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노인 시절엔 복음 전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매 맞아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의 구원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미 완료된 것을 점진적으로 그려낸 것입니까?

완료된 것을 점진적으로 그려낸 것뿐이지요.

 

점진적으로 그려낸다고 하여서 구원이 점진적인 건가요?아니지요.

이미 완료된 것이지요.

완료를 점진적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에요.

 

점진적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표현 방법이에요.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흐름 속에 있어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어요.

항상 오늘이에요.

항상 오늘이란 완료란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묵시라는 완료의 세계에 있던 자를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으로 던져 놓았어요.

역사 속에 올 때는 역사의 흐름을 담고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자의 뱃속에서 잉태하는 과정을 밟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뱃 속에서 어린 아이로 태어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점진적으로 주어지는가요?

아니지요.

어린아이로 출생을 하였지만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예수님은 다만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일을 하시려고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흐름이라는 틀을 이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때도 완전한 하나님 아들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완전한 아들이었어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온전한 아들이었어요.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과 같은 흐름을 타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처럼 이미 창세전에 완전하게 구원이 된 상태에요.

 

그래서 미리 정하신 자라고 하고!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신 자라고 하고!

부르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제발 좀 이해하세요.

 

하나님께서 책에 적힌 대로 간섭을 하세요.

우린 다 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세요.

그럼 그 일을 하나님이 다 이루세요.

 

우리가 역사 속에 온 것은 우리의 원함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함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서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책임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책임을 지세요.

 

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아세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줄 아세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 어린아이가 제일 부러워요.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어른 입장에서 보면 어린 아이처럼 복된 인생이 없어요.

어린 아이는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성도의 일생이 어린아이와 같아요.

하나님의 손 안에 간섭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의 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에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고 천국 가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예수가 믿어지도록 믿음을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점진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단번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서서히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순간 믿어져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단 번에 믿어져요.

 

단번에 주신 믿음을 우리는 천천히 더 확실하게 깨달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 구원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에요.

미 완료도 아니고 미 완성도 아니에요.

완료이고 완성된 것이에요.

다만 피조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볼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성화주의자들처럼 그 따위로 하면 중간에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아요.

 

중간에 끊어지는 구원은 애초부터 가짜에요.

그건 믿음으로 믿은 것이 아니고 자기 행위로 믿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가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우린 예수를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음이 끝까지 믿도록 끌어 당겨요.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 되는 것이 없어요.

반드시 하나님이 성취하세요.

 

예레미야 33장을 봅시다.

 

렘 33:2-18=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11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2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의 거할 곳이 있으리니 그 양 무리를 눕게 할 것이라 13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남방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 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여호와께서 일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신다고 하지요.

어떻게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완전히 망하게 하였다가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였다 살려 낸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대로 징벌을 하여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가서 완전히 죽은 자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이건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에요.

 

자 보세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것은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모세 언약에 보면 하나님에 말을 안 들으면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을 토해 낸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세계만방에 흩어져서 종살이 한다고 하였어요.

 

그러니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집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언약대로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걸 알았어요.

그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은 너희에게 이렇게 행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했어요.

물론 백성들은 못 알아듣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서 떨어져서 이제 죄 값을 다 치루고 회복을 시켜준다고 합니다.

때가 되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해서 구원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오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이야기에요.

우리도 언약대로 죽음을 당해요.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갔듯이 우리도 죄로 인하여 넘어지고 깨어지고 합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 뜻에 온전하게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 징계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을 상하고 찢긴 상처투성이의 인생이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께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딤후 4:17-18=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간섭을 해 오셨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늘 강건케 해 주셨다고 합니다.

사자의 입에서도 건져 주시고!

악한 일에서 건져주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사자의 입에서 건져 주시고!

악한 일로부터 건져 주신다는 말은 고난 속에서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고난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고난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서 반드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게 하신다는 말이에요.

 

쉬운 말로 할 일이 남아 있으면 나사로처럼 죽은 놈을 다시 살려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다 행하게 한 후에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역(逆)으로 하나님이 맡긴 일을 다 하기 전에는 죽지도 못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는 예수를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을 수 없는 팔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계획을 세우고 책에다가 다 기록하고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는 이런 자라는 것이 이미 정해졌어요.

어떤 자로 정해졌느냐 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로 정해졌어요.

 

정확히 말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으라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린 그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았지요.

 

다시 보고 갑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의롭다 여겨주심으로 의로워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걸 알았다고 했어요.

이 앎을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겨주신 것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란 말은 우리에게 다가 오면 너희는 믿지 않았어! 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너희는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믿고 안 믿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몸에 이루어 가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이삭을 그 증거물로 주셨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했을 때 안 믿었어요.

비웃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건 안 믿건 상관치 않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다고 한 것을 이루어 내셨어요.

그러니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볼 때마다 우린 안 믿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안 믿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브라함은 이걸 알았어요.

아~ 하나님은! 내가 믿건 믿지 않건 개의치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하시는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알았어요.

성경은 이걸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해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아브라함은 믿든지 말든지 자기 맘대로 살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 내세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예요.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 주세요.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은 육적 조건을 다 잘라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아브라함의 손 발을 다 묶어 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한 그 일을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서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심어 놓은 언약을 성취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할례 속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넌 하나님께 찜 당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은 무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것을 인친 것이라고 했지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찜 당하였어요.

하나님의 것으로 찜 당한 증거로 할례를 행하였어요.

할례가 먼저가 아니고 찜 당함이 먼저에요.

 

찜 땅함을 믿음이라고 합시다.

그럼 믿음이 먼저이고 할례가 나중이지요.

맞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믿는 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려고 아브라함의 몸에다 할례라는 표시를 해 둔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우리 믿음으로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으로 말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이미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일어난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린 역사 속에서 이 사실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역사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는 시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창세전에 이미 구원이 된 것을 표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도 넌 이미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예수를 믿는다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봅시다.

 

롬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났다고 하지요.

복음이 뭔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의(義)를 믿어야 하는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를 믿을 수 있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성도는 나 예수 믿습니다 라는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에요.

이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세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믿게 해 주신 것으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잘 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를 믿게 해서 아! 저 놈은 창세전에 영생 주기로 작정이 된 놈이구나! 를 표시해 둔 것입니다.

야~ 어렵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어요.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럼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온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서 자기 양을 찾으러 왔어요.

그럼 목자가 찾는 그 양은 언제부터 목자의 양입니까?

찾아짐을 당하면서부터입니까?아니면 이미 찾김 받기 전부터입니까?

이미 찾김 받기 전부터이지요.

그러니 찾으러 가지요.

 

찾아짐을 당하기 전부터 목자의 양이기 때문에 목자가 자기 양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은 양을 찾는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가 잃어버려진 양을 찾으러 갑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소유하고 있다가 잠시 사라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비록 잃어버려짐을 당하고 있어도 양은 목자의 소유에요.

목자가 양을 찾았기 때문에 목자의 소유가 아니라 잃어버려진 상태로 있어도 양은 목자의 양이에요.

그러니까 목자가 양을 찾아 낸 것입니다.

 

그럼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창세전에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가 되는 셈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할례로 인침을 받은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에게는 할례로 인을 쳤지만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인을 쳤어요.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에 할례로 인을 친 것처럼 신약에서는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예수를 믿게 하는 인을 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예수를 믿더라” 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는 다 어린 양을 찬양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어린 양에게 찬양하는 것을 보고 아! 넌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할게요.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육의 계통이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할례 후에 낳은 이삭은 육(肉)에 계통이 아니고 영(靈)의 계통이 되는 것입니다.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 사람인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아담의 족보에 속한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족보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이를 약속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은 자는 항상 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할례의 본질적 의미는 육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 정신이 없는 자는 진정한 할례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건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입니다.

 

신명기 30장입니다.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고 하지요.

이건 거듭나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는 새 언약과 새 법을 우리 마음에 심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할례는 육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이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란 말입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새 언약으로 살아요.

자기 생명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생명으로 산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범사에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의(義)로 살아요.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아요.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와요.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는 바울처럼 은혜로 살아요.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면서 살아요.

 

하지만 육신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법으로 살아요.

자신이 용서 받음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도 용서로 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법으로 대해요.

 

이런 자들은 복음을 알아도 법으로 사용해요.

복음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심판해요.

복음을 사람을 헤치는 칼로 사용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육신의 할례를 붙잡는 자는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은 할례를 법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표면적 유대인들은 육신의 할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했어요.

너 할례 받았어! 안 받았어!

안 받았으면 저리가! 그랬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일컬어 할례 없는 자라고 조롱했어요.

육신의 조건으로 차별을 했어요.

육신의 조건으로 남을 차별한다는 것은 곧 육에 속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육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적 조건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당신 복음 알아! 몰라!

복음 모르면 꺼져!

그러는 것과 같아요.

 

복음의 내용을 마음에 담지 못하고 머리로 담고 있으면 그 복음이 지식이 되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칼로 사용이 되어요.

이런 자는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에요.

표면적 유대인들이란 말입니다.

 

제가 복음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들을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한 자들이라고 강하게 책망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어요.

어디서 학습으로 알아진 복음을 가지고 다 아는 척 한단 말입니다.

복음 복음하면서 남을 죽이고 있어요.

이걸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우리가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라고 했어요.

 

여러분 똑똑한 사람은 신학자들이 연구한 책을 통하여 공부해서 복음을 알아요.

얼마든지 지식으로 습득 할 수가 있어요.

여러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토하여 낸 글들을 통하여서 복음을 수집할 수가 있어요.

여기저기서 짜깁기 하여서 어떤 논리를 개발을 해요.

그래서 그 논리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말을 들으면 다 맞아요.

그럴 듯해요.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하게 지은 말로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공부하여서 얻어진 것은 지식이에요.

지식이다 보니 변론을 즐기고 정죄와 비판과 판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와 용서와 생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법과 죽이는 것이 나와요.

변론이 있는 곳엔 반드시 분쟁이 일어나요.

 

이런 자들이 특징이 항상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해요.

아주 교만하고 독선적이 되어요.

그래서 사람이나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로 있어요.

 

그 좋은 복음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법으로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만 옳다고 한단 말입니다.

자기 혼자만 복음 다 아는 척 한단 말입니다.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 육신의 할례를 자랑하였던 바리새인들처럼 표면적 유대인들이 많아요.

그러니 혼자 복음 다 아는 척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교만한 겁니다.

 

하지만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들은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요.

복음을 마음으로 받은 성도는 은혜로 살아요.

법이 나오지 않고 용서와 긍휼이 나와요.

남을 불쌍히 여겨요.

죄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고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단 말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용서 받은 자에게서는 용서가 나오고!

용서 받지 않은 자에게서는 정죄가 나와요.

그 안에 법이 있으면 법을 행사해요.

반대로 그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나와요.

 

그러니 그 사람이 복음을 법으로 행사하는지 아니면 은혜로 행사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육신에 할례를 받은 자인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인지를 알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뱉어 내는 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에요.

육에 속하였으면 법을 토해내고, 영에 속하였으면 은혜를 토해내요.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은혜로 살고, 법 아래 있는 자는 법으로 살아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내가 가면 너희들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보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속된 말로 주둥이로 복음 안다고 나대지 말란 말입니다.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그러니 여러분 주변에 복음 안다고 하면서 덕을 세우지 못하면 가까이 하지 마세요.

변론을 즐기고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법 아래 있는 자에요.

그래서 바울은 변론을 좋아하고 정죄와 분쟁을 일삼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말쟁이라고 했어요.

 

복음은 주둥이로 믿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는 것이에요.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요.

남을 잘라내고 심판하지 않고 보듬어 안고자 해요.

 

이게 바로 육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로 살지 않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은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할례는 마음에 행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복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마음으로 받은 복음이라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신 복음이라야 한단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라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그건 진정으로 복음 아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나는 예수님의 의(義)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요.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인데!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고 해요.

 

이제 정리합시다.

 

할례가 뭔가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식이지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언제 되었습니까?

무 할례시지요.

할례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잖아요.

그것을 할례로 확인을 시켜준 것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어요.

그냥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로 할례를 행하게 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할례는 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과 같아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도 이와 같아요.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너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인 쳐 준 것입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에요.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은 할례를 자랑하지 않아요.

감사해요.

 

그러니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그게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