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7강. 난 아니고 주님이야! (요 1:19-28)

정낙원 2021. 8. 23. 23:56

7강. 난 아니고 주님이야! (요 1:19-28)

 

요 1:19-28.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지금은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나 좀 알아 달라” 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성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세상에서는 남들이 많이 알아주는 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외면당하면 실패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연예인들입니다.

연예인들은 사람의 시선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흔히 인기라고 하지요.

 

인기가 높아야 자기 가치가 상승되고, 가치의 상승과 함께 부(富)와 명예가 따라 옵니다.

이는 운동선수나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조차도 동일합니다.

목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러분! 출세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누가 알아주면 기분이 좋지요.

 

교회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라는 핑계로 자기를 알아주는 교회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진리를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자기 인기를 위하여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닙니다.

 

이는 인간이란 자기 긍정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라도 자기를 알아주면 좋은 교회이고, 아무리 큰 교회라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나쁜 교회인 것입니다.

좋고 나쁨은 내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려고 교회 안에서 자기라는 상품을 파는 일을 합니다.

이름하여 충성이고, 봉사입니다.

“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가치를 좀 알아주세요! 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가 내 세운 교인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을 좋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좋은 신앙을 가진 자가 많은 교회는 자연히 좋은 교회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좋은 신앙을 가진 교인들을 상품으로 내어 놓습니다.

좋은 상품이라고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 진열하고 선전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좋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와서 함께 신앙생활을 합시다! 라고 호객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르고 빤질거리는 교인들에게 분발을 촉구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서 좋은 상품이 되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여기 있은 이 사람과 같이 자기 상품 가치를 높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의 말에 자기 상품가치를 높이고자 열심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춤을 추게 됩니다.

 

이 시대 교회는 사람의 영혼을 팔고 사는 종교마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였어요.

음녀가 무슨 짓을 하는가 하면 사람의 영혼을 팔고 산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 18:12-13.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은 모두가 교회의 상품들입니다.

목사가 사람을 잘 모으면 능력을 인정받아서 고액연봉과 좋은 조건으로 크고 좋은 교회로부터 스카웃을 당해 갑니다.

 

지금은 세상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 거래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모두가 사고 팔려지는 상품들입니다.

 

자녀들을 왜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합니까?

출세시키기 위함입니다.

자식이 출세하면 부모도 덩덜아 출세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투자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이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대학입니다.

좋은 대학 나와야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고 빨리 출세를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고액과외를 시키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학교들마다 명문대학이 되고자 애씁니다.

학생들을 세상에서 잘 팔려나가는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 사회에 내어 놓고자 서로 경쟁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시대 대학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상품들을 만들어 내는 곳입니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마귀가 세상을 돈의 가치로 척도를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교회마다 홈 페이지를 만들고 목사들마다 개인 블로그를 만드는 것도 나 좀 알아 달라는 뜻에서입니다.

인터넷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상품, 목사라는 상품을 품평회 하듯 진열해 놓고 호객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에 인기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타인에게 돌리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요즘 세상 가치로 본다면 제 정신이 아닌 사람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날 알아 달라고 하는데 세례요한은 지금 “난 아니야!” 라고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안에 또 다른 놈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롬 7장)

자신은 하나님 법에 굴복하고자 하는데 자기 안에 또 다른 한 놈이 자기 육신대로 살도록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놈과 싸우느라 심히 곤고하다고 탄식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 안에 있는 아주 욕심 많은 놈과 피 터지게 싸우는 싸움입니다.

내가 이기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되지만,

내 안에 있는 놈이 이기면 예수님이 내 제자가 되어 종 부림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내 제자로 삼아서 살고 싶습니까?

말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싶다고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딛고 일어서서 자기를 세상에 보란 듯이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본성으로 보면 지금 세례요한은 엄청나게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출세 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교회에 수많은 성도들이 목사님 말씀이 좋다고 벌 떼같이 몰려오는데!

제가 여러분! 저 보다 저 옆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복음을 훨씬 더 잘 전하니 그곳으로 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말이에요.)

 

여러분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저 역시 복음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목회를 한다고는 하지만 세례요한처럼 못해요.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잡고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스스로 선지자라고 사람들에게 알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세례요한을 선지자라고 따랐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선생님! 선생님! 하고 따르는데 가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세상의 정서가 그러함에도 세례요한은 지금 딴 세상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인기에는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냐! 라고 묻는 것은 세례요한이 하는 행동들이 그리스도 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던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무도 메시야로 보지 않고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행세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스스로가 그리스도 행세를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회적 배경이 메시야를 학수고대 하던 시대였습니다.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혜성처럼 나타났습니다.

하는 일이 범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라고 하는 종교꾼들과는 달랐습니다.

 

삶 자체가 가죽 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연히 선지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성 안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세상 부귀영화를 탐하던 제사장 무리들과는 달랐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유지하려고 이미지 관리를 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세속화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기 때문에 타락한 종교인들에 비해서 훨씬 상품적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권력자들에게 거침없는 말을 하니 백성들에게 자연히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대 최고라고 하는 제사장 그룹들을 거침없는 독설(毒舌)로 몰아 칠 수 있는 것은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랐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세상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사람들이 조금만 따라도 선생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릅니까?

사람이란? 두 세 사람만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도 자기 세력을 만들고 거기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풀려서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라도 부풀려서 남에게 인정받고자 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힘이 곧 진리입니다.

그 힘은 사람의 숫자로부터 나옵니다.

목사들이 교회 부흥을 외치는 것도 사람의 수에서 힘이 나온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여도 많은 사람이 모이면 금새 정통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한 때 조00 목사를 통합 측에서는 이단이라고 정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00 목사를 벤치마킹하여 교회 부흥에 열을 올립니다.

왜? 그런가요.

교인들이 무당놀음 하는 목사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대형교회 목사들을 흉내 내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목사들이 복음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숫자를 힘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사람의 숫자가 힘이라고 생각되어지면 그 마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점점 더 그 수렁 속으로 자신을 내어 던지게 됩니다.

 

이런 인간들의 본성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세례요한이 “나는 아니고! 저 분이다!” 라는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는 세례요한의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에게 세례요한의 겸손함을 본받으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의 이런 삶은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보내심을 입은 자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나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좋은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보내시는 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태어 날 때도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하였습니다.

 

눅 1:36-37.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원래 수태하지 못하던 늙은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하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요한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였다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은 무슨 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의 증거를 봅시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거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성령님은 예수님이 보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님만 증거하는 일을 고집하십니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가 생겨납니다.

그 원리는 보내심을 받는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보내신 분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요 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 때문에 죽은 것이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출세 길을 포기한 것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비우라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라는 뜻입니다.

비워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채워야 합니다.

 

불교에서 스님들은 무아(無我)사상을 가르칩니다.

즉 “나는 없다” 를 가르칩니다.

“나는 없다” 라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래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는 없다” 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 를 자랑합니다.

자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난 없다” 로 끝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로 채워야 하는데 말이죠.

 

내 속에 예수님을 채우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난 없다” 하지만 “내 안에 예수님이 있다” 가 되어야 하는데 불교의 스님들에게는 그게 안 나와요.

맨 날 “난 없다” 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 종교의 허구성입니다.

 

“나는 없다” 가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산다” 가 나와야 신앙입니다.

“난 없다” 로만 사는 것은 종교입니다.

 

바울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버젓이 살아 있는 난 “예수 안에서 사는 나” 라고 합니다.

즉 바울은 죽은 자기 안에 예수님으로 채워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내 속에 예수님이 담겨져 있어야 신자입니다.

 

집에서 엄마가 외출을 할 때 고 3인 자녀에게 TV 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엄마의 말대로 TV를 보지 않았어요.

엄마가 돌아오자 자랑합니다.

엄마 난 엄마가 시키는 대로 TV 안 봤다~ 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뭐 했는데,,,,

놀았지,,,

에라이! 이 등신아!

앞으로 밥 처먹지 말고 나가 죽어라! 라고 하잖아요!

 

엄마가 TV 보지 말라는 것은 공부하라는 말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TV를 보나 안보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이나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먹는 것이나 다 똑같습니다.

 

무엇을 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은 ‘난 착하다’

‘난 교회 다닌다’ 라는 것은 자랑하는데 그 속에 예수님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흘리신 피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자랑되어지지 않고 교회를 자랑하고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그 속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데요.

 

참으로 말이 안 통해요.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신앙이 추상적이고 관념이에요.

말만 뻔지르르 한 외식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너 믿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세력을 키우고 자기 힘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이력서를 지우고 지워진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를 써서 충만케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힘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세상의 힘을 갖고자 하는 데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힘을 갖고자 함은 세상에서 강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에서 강자로 살고 싶어서 세상의 힘을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을 갖지 않았는데 목사와 교인들은 힘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가 세상에서 권력집단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내 나라는 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보내신 분을 높이는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쏠리는 힘을 예수님에게로 돌려 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 있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나 없음” 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은 “나는 존재하여야 한다” 는 데서부터 기인됩니다.

나는 존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일을 “나 있음” 을 유지하려는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나 있음” 을 위해서 신까지도 자기 힘으로 소유화 하려고 합니다.

구원도 믿음도 나 있음을 지키는데 동원합니다.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도 믿음도 내 소유용이 아닙니다.

“나 있음” 을 유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난 없고” “예수 있음”을 위해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있음” 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란? 절간에 가서 절을 하거나 무당을 찾아 굿판을 벌리는 것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자기를 알아달라고 악악대는 것도 “나 있음”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자기 성채로 쌓아가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성채를 쌓기 위하여 부림당하는 종들입니다.

결국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를 추종하는 사이비 집단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세례요한은 전혀 다릅니다.

세례요한에겐 “나 있음 도” “이스라엘도” “유대종교도” 안중에 없었어요.

세례요한에겐 오직 “예수 있음” 만 있었습니다.

 

자기를 사라져도 “예수만 있으면 된다” 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완전히 예수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난 아니고 예수님”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동네 사람입니다.

이건 인간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을 세례 요한의 이러한 사고와 비교하면 하나님이 보낸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 금새 들통이 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 아니까 교인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압살롬처럼 백성들이 마음을 도적질 하고 있어요.

 

사람이 자기를 낮추고 부인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은 인간의 본성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본성을 거슬러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난 아니고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모습은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모든 성도가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이런 삶은 이 시대 성도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살지 못하고 있음에도 버젓이 숨 쉬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세례 요한의 자아(自我)가 살아있다면 내가 바로 “그” 라고 말하여 그리스도 행세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스스로를 예수님을 증거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소리란? 자기 존재를 남기지 않고 전달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소리란? “난 없는 사람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소리는 하나님께서 외치는 말을 그대로 세상에다 전달해 줘야 합니다.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텐데! 라고 생각하여 자기 말을 섞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게 소리입니다.

 

세례요한은 지금 자기 이미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져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만 소리로서 증거할 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던 “광야의 소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40:6-9.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은 풀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풀이므로 마르고 시들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영히 시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입니다.

결국 예수님만 영영히 남고 모두는 사라질 것이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이외에 모든 육체들은 다 풀이고 시들고 말라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만 영원한 것이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불에 탈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이 말을 그 당시 신앙으로 말한다면 유대인들의 신앙은 다 불 탈 것이고 예수님 것만 영영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신앙을 최고의 신앙이라고 자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도 스스로가 세리와 이방인같이 불의하고 토색하지 않은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너희들이 자랑하는 율법 신앙은 풀이라고 합니다.

풀과 같은 육체로 행한 시들고 말라버릴 것 같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이러한 말은 기존의 율법신앙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에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극도로 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잘났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세례요한은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말과 행동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격동하기에 충분하였고 결국에는 기득권층으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나는 이런 말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광야의 소리 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일컬어 기능적 존재라고 합니다.

 

교회론적 의미로 표현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존재하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성도 개개인은 모두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존재하기 보다는 예수가 나를 위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교회에서 무시당하면 섭섭해 하고 급기야는 자기를 알아주는 교회로 옮기게 되는 현상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귀가 가려워 자기 사욕을 좇는 스승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를 알아주고 칭찬해주는 교회와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칭찬해 주는 목사는 가짜 목사라고 했습니다.

저주 받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는 올바른 소리를 전하다가 세례요한처럼 목 잘림 당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까봐서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달콤한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풀이고 영광은 잠시 있다 없어지는 꽃 같은 것이라고 외쳐주어서 인간의 본질을 깨닫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쇠하지 않고 시들지 않는 인생은 예수님 안에만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라면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난 없어도 주님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라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시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라져도 예수님은 영영히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가 계시매 든든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난 없어도 든든하게 사십시오.

 

사업에 실패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있는데”

병들어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있는데”

이단이라 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있는데”

이 “예수 있음”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