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37강. 도우시는 대 제사장

정낙원 2009. 9. 6. 01:08

37강. 도우시는 대 제사장 (히 5:1-10)

 

히 5:1-10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기적에 속한 일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믿을 대상에서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아이에게 아빠만 믿으라고 하는 말은 너 자신의 어떠함을 보지 말고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말이잖아요.

이게 믿어지면 두렵지가 않아요.

어린 아이들은 아빠가 곁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어요.

 

아이에게는 아빠는 슈퍼맨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고 여겨요.

아빠하고 같이 가면 큰 형아들을 보고도 시비를 걸잖아요.

이처럼 어린아이에게는 아빠가 힘이고 능력이에요.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의지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부인이 선행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과 같이 쉽지가 않아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에요.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에서는 믿지 않아요.

그러니 예수 믿음이 실제 삶 속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아중심으로 살아가요.

나 이외는 믿을 것이 없어요.

항상 내가 우주의 중심이에요.

누구라도 나를 부정하면 공격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아를 긍정해 주어요.

내가 신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체가 자신이에요.

신을 섬기든, 인간을 사랑하든, 항상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움직여요.

 

신을 섬겨도 내가 섬기고, 인간을 사랑해도 내가 사랑해요.

교회를 나가도 내가 나가고,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어요.

봉사를 해도 내가 하고, 순교를 해도 내가 해요.

 

나 아니면 안 되어요.

이게 인간의 사고에요.

이 사고는 선악과를 먹고 태어난 인간이 죽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아요.

이런 인간들에게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낯설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세요.

역설적으로 해요.

우리와 상의하지도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다스려 가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에요.

이건 우리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요.

이게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몰라요.

 

이 사실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라고 합니다.

믿음이 인간들을 지리저리 끌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누구는 이렇게 살았고 누구는 저렇게 살았다는 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셨어요.

여기에 인간들은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할게요.

비유가 합당할는지 모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는 말이니 그 의미만 건지세요.

 

어느 며느리가 아파트를 살 거라고 20년 동안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고 절약하고 절약해서 적금을 부었어요.

적금 탈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적금을 타면 이제 내 집이 생긴다는 기쁨으로 꿈에 부풀어 있어요.

드디어 적금을 타는 날이 돌아와서 그동안 피같이 부어 놓은 돈을 손에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나타나서 그 적금 이리 내라고 합니다.

그 돈은 내 것이라고 빼앗아 가버렸어요.

20년 동안 쌓아온 기쁨과 소망이 일순간에 다 날아갔습니다.

 

그러면 이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죽이고 싶겠지요.

시어머니 ‘시’ 자만 들어도 자다가 경기를 일으킬 겁니다.

남편이 어머니 집에 가자고 하면 너나 갖다 오라고 하지 않겠어요.

 

제가 예수 믿는 것을 인생을 하나님께 차압당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원래 하나님 것이니까 차압이라는 말은 합당치 않아요.

그러나 죄 아래서 난 우리는 우리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살아 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서 넌 이제부터 내 것이라 하면서 차압하는 것입니다.

 

이게 12제자들의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멀쩡히 고기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가서 날 따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이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예! 하고 따라갑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거부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창조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보고 나가라 하면 즉시로 나가야해요.

조금 있다가 내일이나 모레에 나갈게요! 가 없어요.

병을 고쳐도 점진적으로 고쳐지지 않고 즉시로 고쳐져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 내일이나 모래 서서히 말라 죽는게 아니고 즉시로 말라 죽어요.

예수님이 풍랑을 보고 잠잠해라! 그러면 즉시로 잠잠해요.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은 과정이 필요가 없어요.

말씀이 곧 완성이에요.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신다고 하면 그것으로 종결이에요.

중간에 포기 되지 않아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베드로야 날 따라 오너라 라고 하면 거부 할 수가 없어요.

따라 가는게 말씀의 완성이에요.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지금까지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왔던 평생직장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가족들조차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겁니다.

 

아브라함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따나라!

그러면 싫어요!

난 안 갈래요! 가 안 되어요.

하나님 말씀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에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천국으로 에서는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러면 야곱은 무슨 짓을 해도 천국에 가도록 되어 있고 에서는 싫어도 지옥으로 가야만 해요.

야곱은 천국 가는 환경 속으로 밀어 넣고 걸어가게 하고,

에서는 지옥 가는 환경 속으로 밀어 넣고 걸어가게 하는 겁니다.

 

12제자들의 가족들 입장을 한번 헤아려 보았나요?

베드로를 예로 듭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기를 잡아서 가족들과 알콩달콩 잘 살았어요.

새벽이면 일어나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아 가족들을 부양을 했어요.

아내나 아이들도 듬직한 남편과 아빠가 있어서 감사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맙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직장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쫓아다니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월급을 주시지 않았어요.

자연히 베드로의 가정은 위기에 처하고 만 겁니다.

평화롭던 가장에 갑자기 풍파가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좋아서 예수님을 따라다닌다고 하지만 베드로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죽을 지경인 겁니다.

특히 자식을 키우는 어미인 베드로의 아내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아간 가정 파괴범이고 철천지원수에요.

 

이걸 지금 저의 가정에 적용해 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제 라이프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날 다루어 오셨는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자 함이에요.

남이 만난 하나님을 증거 할 수는 없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만난 나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간증하는 겁니다.

그러니 양해하고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다르게 다루세요.

저를 다루어 온 것은 정형이 아니에요.

그러니 참고는 하시되 표준은 삼지 마세요.

 

전 알다시피 목사로서 소득이 없어요.

교회라도 크면 사례비를 받지만 교인들이 적으니 그것도 없어요.

아내에게 돈을 줘 본적이 거의 없어요.

세상 말로 하면 아내가 벌어다 주는 것으로 빌붙어서 살고 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남자는 남편으로서 자격이 없어요.

 

그럼에도 전 교인이 많든 적든 상관치 않고 늘 말씀과 씨름하며 살아요.

만약에 제 아내가 복음을 모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어떻겠어요.

아내 입장에선 죽을 맛이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아니라 원수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목사 입네! 하면서 육신은 멀쩡해 가지고 빈둥거리고 논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얼마나 야속하고 밉겠어요.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아내에게 복음을 깨닫는 믿음을 주셔서 전 잘 살고 있어요.

자기가 먹여 살릴 테니! 복음만 전하라고 해요.

이게 얼마나 큰 횡재이고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나 제 자식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엄마 고생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 속으로 아빠를 얼마나 원망하는지 몰라요.

저에게 대 놓곤 말하지 않지만 아마도 지 엄마에겐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지네 엄마가 머리가 희면 늙었다고 일하기 어려우니 흰머리를 염색해 달라고 하면 염색을 해 주면서 엄마 이젠 일하러 가지 말라고 해요.

저 보고 들으란 말이에요.

 

전에는 아르바이트라도 하여서 생활에 보탬이라도 줄 때는 아무 소리 안하더니만 이젠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있으니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경기가 좋을 땐 아르바이트 자리도 많이 나오던데 이젠 없어요.

교회의 예배 시간을 고려해서 일자리를 찾다가 보니 시간이 맞지 않으니 자리가 더 없어요.

어떨 땐 하나님도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엊그제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로 오는데 어느 노부부가 리어카를 끌고 빈 종이상자를 주우러 다니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우리도 소형트럭을 하나 구입해서 고물을 주우러 다닐까 라고 말을 하니 아내가 웃더라고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금까지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적이었어요.

특별한 소득도 없이 자식 세 놈 다 대학을 졸업시키고 자그마한 아파트라도 내 집이라고 가지고 있는 것이 기적이에요.

물론 세 놈 다 자기들이 휴학하며 아르바이트 하면서 돈 벌어서 대학을 다녔지만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하나님께서 자식들 마음을 간섭해 주셨으니 다 그럭저럭 살아온 겁니다.

살아온 세월이 다 하나님의 은혜에요.

 

주변에서 우리 집 이야기를 하면 신기하다고 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우리도 모르겠어요.

우린 대책 없이 살아 왔는데 하나님이 여기까지 살게 해 오셨어요.

 

비록 유창하게 복음을 잘 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좌고우면치 않고 진실하게 복음 하나 전한다고 그렇게 지켜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전 가끔 아내에게 그래요.

당신이 날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복음 전하니 우리 가족이 산다고 생각하라고 말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목사 먹여 살렸다는 것을 의로 붙잡게 되니까 한 번씩 흔들어 줍니다.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말이 참 많지요.

그러나 사실이 그래요.

지금까지 이렇게 인도해 오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니까요.

하나님이 인도해 오신 것을 말하려면 밤새도록 해야 하니 여기서 각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때로는 아내와 앞날을 걱정하면 갑자기 하나님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으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기르시고 입히실 것이란 것을 믿어야지 왜 앞날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린 다 망각하고 살아요.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고자해요.

예수를 믿어도 이건 사라지지가 않아요.

자고 일어나면 살아갈 염려가 한 보따리 있는 겁니다.

 

염려해도 별 뾰족한 수단이 없는데도 우린 늘 염려를 끼고 살잖아요.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면 염려가 사라지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지 않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고 한숨을 짓잖아요.

현실을 보면 돌파구가 보이지 않고 천근만근 짓눌러요.

 

그런데 이 놈의 육신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늘 환경을 보게 한단 말입니다.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눈만 뜨면 아! 오늘은 어떻게 살지! 라는 걱정을 먼저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성령이 툭 하고 간섭하면 까짓거 눈을 뜨게 해 주셨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 믿음이 엄청 좋은 냥 살고 있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 하지 말고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해도 우린 눈만 뜨면 구하라는 것은 안 구하고 구하지 말라는 것만 잔뜩 구하고 있어요.

우린 지독히도 하나님은 믿지 않는 악당들인 겁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속으론 나요! 나요! 하면서 살아요.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책임져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바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에요.

 

오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대 제사장이야기에요.

 

성경은 우리의 짐을 대신 책임져 주시는 분에 관한 이야기에요.

이 사실을 알라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희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너희 인생을 대신 책임져 주시는 분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라세요.

그런데 우린 이걸 모르고 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때로는 사고를 당하게 하든지,

병에 걸리게 하든지,

강도를 만나게 하든지,

사기를 당하게 하든지,

배신을 당하게 하든지,

좌우지간 우리가 원치 않는 사건과 사고를 당하게 하여서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물론 성도만이 이 사실을 알아요.

성도는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 대번에 알아차려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주께서 또 간섭하시는구나! 직감적으로 알아요.

 

그래서 그동안 주님을 잊고 산 것을 회개하고 그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돌아서고 나면 또 육신에게 질질 끌려 다녀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자기 백성들을 누가 책임지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대신 책임을 지신다는 것은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식하다는 말은 가능성이 제로란 말이에요.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누구입니까?

자기 주제를 모르고 깨춤 추고 다니잖아요.

자기가 뭐 대단한 인간이나 되는 줄 알고 살잖아요.

우리가 다 그렇게 살아요.

저도 대단한 인간인줄 알고 꼴값을 떨고 살아요.

복음 쬐끔 안다고 잘난 척하고 살아가요.

속을 버선 뒤집듯이 확 뒤집으면 쥐뿔도 없으면서 아는 척 기고만장하고 살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뭐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자기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에게 무시당하면 기분나빠하고 인정해 주면 좋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기 주변에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로 포진해 두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안위 받고 싶어해요.

인간은 소외당하고 부정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항상 자기를 알아주는 인(人)의 장막에 쌓여서 살고 싶어해요.

 

이러한 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예수도 나를 인정해 주어야 믿을 만하지 인정해 주지 않으면 믿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아요.

하나님의 의(義)를 기준해서 틀렸음을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니 인간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신(神)을 어찌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을 인정해 주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다정한 친구에요.

마귀는 항상 달콤한 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며 너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해 줘요.

 

너 같은 사람은 아마도 세상엔 둘도 없을거야!

너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드물거야!

너 같이 말씀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거야! 라는 식으로 영웅화 시켜요.

마귀는 항상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고 가르쳐요

끊임없이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긍정을 해 주어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말세에 고통당하는 때가 오는데 그 때에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이키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쫓을 스승들을 찾아다닌다고 하였어요.

즉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들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면 마귀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어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 라고 했잖아요.

이것은 복음 속에는 인간의 육신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믿음 안에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없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육신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하나님을 찾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입술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몸은 주님의 뜻과 상반된 것만 추구하고 있잖아요.

 

이러고도 버젓이 살고 있으니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법대로 하면 벌써 지옥 안방에 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고 있어요.

이게 다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대신 죽어 주신 분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잊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가 누구 때문에 사는지 알라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대 제사장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히 5:1-2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대 제사장이 누구냐?

사람을 위하여 대신 속죄 제사를 드려주는 분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위해서 대신 속죄 제사를 드려준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어서 대신 속죄 제사를 드려주는 거라고 합니다.

 

대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에요.

구약 시대엔 하나님이 선택을 했어요.

인간의 원함으로 내가 대 제사장 할게요! 라고 해서 대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목하여 불러서 되는 직분이에요.

 

대 제사장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세요.

하나님께 속한 일이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이 자기 피로 우리를 속죄하셨다고 합니다.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요.

이런 무지랭이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다니까요!

이 얼마나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인가요.

 

대 제사장이 대신 속죄 제사를 대신 드려준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제사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만 받겠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아무 놈이나 제사를 드린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목한 사람이 드리는 제사만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창구가 대 제사장 하나에게로만 나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이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에요.

하나님은 인간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난 너희 죄인들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죄인들의 그 어떤 착함이나 의로움이나 선행도 하나님 앞에서 쓸모가 없는 쓰레기라는 말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배설물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죄인의 것을 받지 않아요.

오로지 대 제사장의 것만 받으세요.

그래서 대 제사장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마귀는 어떤 식으로 인간들을 미혹하는지 답을 알 수가 있겠지요.

마귀는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주어요.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주고 높여주어요.

마귀의 말이 인간들에게는 너무도 달콤해요.

 

여러분이 마귀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마귀는 인간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 주어요.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고 강하게 저주하였던 겁니다.

인간의 행위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둔다면 그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자라고 하였어요.

 

신앙생활은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말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 이걸 또 오해를 해서 여러분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죽입시다!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마치 절간에서 스님들이 말하는 무아(無我)사상을 추구하는 것과 같아요.

“무아사상”이 뭡니까?

“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이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입니다.

 

“나” 없다고 하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요.

“내”가 없는 “나”를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난”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이 말이에요.

얼마나 웃기는 말입니까?

 

이게 지금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자칭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목사들이 자기를 부인합시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라고 해요.

이건 착각이에요.

인간의 자아는 죽일 수가 없어요.

안 죽어요.

 

쉽게 말할게요.

십자가 도를 지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아를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겠다고 해요.

‘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라고 말을 해요.

 

그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나”는 또 누굽니까?

여전히 “나”에요.

“나”라는 존재가 있는 한 “나”는 없어지지 않아요.

“나”를 떠날 수가 없는 것이 “나”에요.

말이 헷갈리기 쉽고 자칫 오해하기 쉬우니까 잘 새기면서 들으세요.

 

난 누구냐! “나” 를 부인할 수가 없는 “나”에요.

예수 믿어도 “나”에요.

“나”는 죽을 때까지 “나”로 살아요.

“나”는 “나”로 살기 때문에 늘 죄인인 겁니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자아(自我)가 죽지 않아요.

육신으로 예수를 믿는 한은 자아가 안 죽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라고 의문을 제가 할 수가 있지요.

이는 역설적으로 너는 너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순간 순간 경험 할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한 것을 부인이 안 되어요.

심지어 예수 믿는 것조차도 자기 것으로 붙잡고 있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예! 저 지금 예수 믿고 있거든요! 라고 해요.

내가 믿는다고 해요.

기도해라 그러면 예! 저 지금 기도하고 있어요! 라고 해요.

내가 기도하고 있다고 해요.

 

인간의 육신은 자기를 포함 시키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무슨 일을 해도 항상 자기가 한 것으로 붙잡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라는 고백도 자기 고백으로 두고자 했어요.

그래서 멋진 고백을 하고 난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니 자기 주제도 모른채 자기가 막아주겠다고 덤벙 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사단이라고 하지요.

 

그리곤 그래 어디 네가 지금 한 그 고백을 지킬 수 있는지 보자! 라는 의미에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할 것이란 말씀을 하신 겁니다.

밤이 이르고 예수님은 잡히고 베드로도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자 그 잘난 고백은 다 날아가 버리고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해 버립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를 막아주겠다고 큰 소리 쳤잖아요.

 

그런데 그 믿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그 믿음은 애초부터 베드로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니까요.

베드로의 소유물이 아니었어요.

 

만약에 베드로가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일평생 그것을 부적처럼 안고 살아갈 겁니다.

그러면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가 없어져요.

그 믿음 내어 놓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도 필요가 없어요.

그 믿음 붙잡고 살면 되니까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일회용 반창고로 전락해요.

한번 은혜 받은 것을 일평생 울궈먹으면 되니까요.

예수님도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가 없어요.

마치 옛날 강시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강시가 나타나면 자기가 소유한 십자가를 내세우고 필요 할 때마다 물렀거라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겁니다.

어떨 땐 믿음이 엄청 좋다가도 어떨 땐 믿음이 하나도 없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난 믿을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용서의 능력으로만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 한 것은 성령을 받기 전이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고 나면 부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성령을 받아도 우리의 육신은 한 번도 자기 주권을 내어준 적이 없어요.

 

성령을 받으면 도리어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아요.

인간의 몸이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성도는 더욱 더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관리해 주세요.

지금 우리도 주께서 믿음을 관리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저 역시 주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벌써 목사 때려치우고 예수도 안 믿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 만 믿을 수가 있어요.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고백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에요.

 

참으로 조심스러운 말인데 새겨서 들으세요.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우린 예수를 믿고자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난 예수 못 믿겠습니다! 라고 할 때,

믿어지는게 있어요.

그 믿어짐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에요.

그러니 믿어지는 사람은 그 믿어지는 것조차 주님의 은혜로 돌리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자아를 죽이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못 죽여요.

자아를 죽입시다! 라고 하는 그것도 내 자아에요.

자아는 로보캅처럼 죽여도 죽여도 또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잘 할 수가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가 필요가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하심을 덮어쓰고 평생 동안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이걸 알기에 범사가 감사가 되는 겁니다.

물론 깨달을 때 뿐이지만!

깨닫는 것도 찰나에 불과 하지만 그 찰나가 있기에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자아는 항상 자기 것을 채우고자 해요.

오늘 멋진 신앙고백을 하면 그것이 지속되는 줄 알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 고백은 다른 환경에 다 다르면 변해요.

 

오늘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고백도 자신이 죽음으로 내 몰리는 상황을 만나면 즉시 철회가 되어져요.

내 몸뚱이를 살리고자 예수를 팔아먹는 것이 우리들이에요.

이런 사실을 아는 자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요.

참 재미있는 것이 율법 아래서는 순종한다고 했는데, 성령이 오고 나면 순종이 안 되는 인간임을 알게 되어요.

 

그러니 성도는 늘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고백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의 신앙도 지나고 나면 다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겁니다.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을 그 때를 일컬어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겁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난 무슨 일을 해도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음을 아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입니다.

말이 몹시 헷갈리니 잘 이해하세요.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부인이 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 합시다!

자기를 부인 합시다!

그러는 겁니다.

그건 쇼에요.

폼 나게 그래 나도 한 번 해 보는 거야! 라고 퍼포먼스 하는 겁니다.

퍼포먼스라도 해야 자기의미를 찾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몸뚱이가 자아(自我)다!

생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몸뚱이가 있으면 자아는 떨어지지가 않으니 몸뚱이는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내 자아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부인이 됩니까?

안 되어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늘 입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용서를 입고 사는 거예요.

이 사실을 놓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해 지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잘해 볼게요!’

‘앞으로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좋은 사람 될게요!’ 가 아니에요.

명경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서 대 제사장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대속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대 제사장으로 보내신 것은 우리를 도우시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죄가 뭐냐?

예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쁜 짓을 해서 망한게 아니에요.

너무도 착해서 예수님의 의가 필요치 않아서 망한 것입니다.

 

마귀는 호시탐탐 너희가 온전해져서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가 없도록 미혹을 해요.

너 예수 그 따위로 믿어서 되겠느냐!

반듯한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천국에 가겠느냐! 라고 해요.

 

예수 그 따위로 믿을래 라는 말 속에는 예수 믿는 것이 정형화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 따위로 믿을래” 라는 명제에 걸려들면 “그럼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데” 라는 방법론을 구하게 됩니다,

그럼 마귀는 여지없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면서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명대로 살아서 아버지 앞에서 당당해 지라고 해요.

아버지의 은혜 없이도 스스로 살 수 있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내가 뭘 잘못 했습니까? 라고 덤벼요.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는 자기 의로 아버지께 대항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 자기 의(義) 쌓기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의(義)를 쌓아요.

무슨 일을 해도 바벨탑을 쌓듯이 착함이라는 마일리지를 하나 둘씩 쌓아가요.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마치 6.25 참전 용사들처럼 훈장을 달고 나오는 것입니다.

 

난 목사다!

그것도 난 목사 30년 했다!

난 50년 했다! 그래요.

오죽 했으면 성역 3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겠어요.

자기 역사를 30년 50년 동안 쌓아 온 것을 자랑하고픈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삭제해야 하는데 도리어 우리 역사를 이력서 빈칸을 채우듯이 가득 채워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난 장로다!

장로면 다 같은 장로인줄 아느냐!

난 최연소 장로다!

난 수석 장로다!

난 이 교회를 위해서 20년을 봉사했다!

넌 몇 년을 했느냐?

 

난 옛날에 남전도회 회장 했다!

나도 여전도회 회장했다!

난 이 교회를 위해서 청춘을 다 바쳐서 봉사했다!

내 공로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안 알아주면 삐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를 스스로 살제하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가 자랑하고자 하는 것들을 박살내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 속으로 휘말리게 해서 묵사발 내는 일을 하세요.

 

내가 의지하고 자랑하던 것들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사건을 발생케 해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드러나게 한단 말입니다.

깨어지고 나면 아! 내가 예수님의 피보다 내가 한 일에 의미를 두고 살았다는 죄악성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말년에 인구조사 하다가 된통 혼나잖아요.

다윗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왔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그런데 노년에 자기 업적을 과신한 나머지 부하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요압이 아니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수백 배도 더 줄 터인데 왜 그러느냐고 말렸어요.

 

요압은 이것이 죄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말린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명으로 인구 조사를 하게 합니다.

 

인구 조사를 마치고 나자 제 정신이 든 겁니다.

어이쿠! 이거 큰일 났구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 라고 회개합니다.

 

삼하 24:10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람의 수를 의지한 것을 죄로 묻고 사흘 동안 칠만 명을 죽여 버립니다.

아무 죄 없이 죽은 칠만 명은 다윗의 그 잘난 의(義) 때문에 죽고 만 겁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부국강성하게 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래서 군사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다윗의 의로 여겨서 징책한 것입니다.

 

완벽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린 잘 할 수가 없어요.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마세요.

의인도 예수를 보아야 하고 악인도 예수를 보아야 해요.

우리 눈에 오직 예수만 보여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의를 쌓고자 살면 걸려서 넘어지게 만들어서 죄를 드러나게 하고,

그렇다고 죄인이 죄 짓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 라고 하면 너 왜 예수의 몸으로 창기처럼 사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그래서 제가 신앙생활은 정형화 된 틀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도 죄고 저렇게 살아도 죄는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하루 하루 주께서 은혜 주시는 대로 살면 됩니다.

오늘 하루도 주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주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물으면!

그냥 감동되는 대로 사세요! 라고 말 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사세요, 저렇게 사세요, 라고 하면 이미 정형화 된 틀에 갇히게 되는 것이에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가르치면 그 가르친 대로 산 것이 의로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어떻게 살아도 죄를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돕는 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대 제사장이에요.

하나님께서 대 제사장을 주신 이유는 무식하고 흠 있는 자들을 도와주려고 주셨어요.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를 돕는 대 제사장도 연약하다는 겁니다.

 

본문 2절입니다.

 

2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죄 아래서 s나 인간은 힘의 법칙으로 살아가요.

힘의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자기보다 월등히 나아야 믿을 수가 있어요.

인간들의 사고는 무엇이든지 외모로 판단해요.

 

육적인 조건으로 비교하고 판단을 해요.

인간들은 메시야 그러면 영웅호걸을 생각해요.

메시야라고 한다면 우리와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메시야 답다” 라고 해요.

 

여기서 “~ ~ 답다” 라는 말을 유념하세요.

“답다” 라는 말은 이미 자기가 정해 놓은 기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메시야 “답다” 라는 말 속에는 이 정도는 되어 주어야 메시야로 인정할 수가 있어! 라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흔히들 목사가 목사다워야 할 것 아니냐!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목사다워야 한다는 그 말 속에 목사다움이 이미 정형화 되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목사다움의 틀이 있었어요.

 

항상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걸음도 천천히 걷고,

말도 품위 있게 종용하게 하고,

성경은 항상 오른 쪽 가슴에 대고 걸어야 했어요.

이러한 폼을 지녀야 목사답다고 했어요.

그 틀에서 벗어나면 목사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목사가 뭐 저러느냐! 라고 비판을 했어요.

 

전 어렸을 땐 목사님들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알았어요.

목욕탕에서 목사님의 발가벗은 모습이라도 보면 그 다음부터 목사답지가 않아요.

신비감이 뚝 떨어져요.

그래서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는 목사님들은 동네 목욕탕을 안 다니고 멀리 다른 지역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목사다움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목사의 직임을 알면 답은 쉬워요.

목사는 복음 전하라고 세움을 입었어요.

그럼 목사다움이란? 복음 잘 전하면 되는 것이에요.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은 여자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어요.

그래서 목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면 답이 나온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 쪽에서 목사는 복음 전하는 자이잖아요.

맞아요.

그럼 복음 전하는데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됩니까?

아니지요.

 

누구든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할 수가 있잖아요.

성령은 남자나 여자나 구분하지 않고 주어지지요.

그럼 여자가 목사가 되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은 틀린 것이지요! 라고 했어요.

그러자 아하! 그렇구나! 유레카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목사를 외모로 평가하는 겁니다.

이 시대 교회들마다 담임 목사를 청빙하는 기준을 외국 유학을 다녀오고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정해 놓았어요.

 

목사의 조건 속에 복음 잘 전하는게 없어요.

좋은 학벌을 요구해요.

한국에서 공부한 국내파냐, 해외에서 공부한 유학파냐,

박사 학위는 있나, 없나,

인품이 좋으냐, 안 좋으냐,

비본질적인 것으로만 따져요.

 

예수님도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 할 수가 없어요.

자격 미달이에요.

서류 전형에서 탈락이에요.

 

그 누구도 복음 잘 전하는 목사를 원하지 않아요.

이 시대 목사를 판단하는 기준엔 복음 잘 전하는 기준에 없어요.

그러니 교회가 다 엉터리들인 겁니다.

교인들이 이런 기준으로 목사를 청빙한다는 것 자체가 신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겐 메시야 다움이 정해져 있어요.

로마를 압도 할 수 있는 어떤 큰 능력을 소유한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처음 기적을 베풀고 할 때는 메시야인줄 알고 환영을 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예수님은 유대나라를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해방군 출신인 열심당원인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면 민중봉기라도 일으키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예수를 판 것입니다.

그럼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들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 버렸어요.

 

그래서 가룟유다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을 한 겁니다.

가룟유다는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열심 당원이었어요.

우리나라로 말하면 과거 일제 식민지 시대로 독립군과 같은 집단이 열심 당원이에요.

가룟유다는 유대나라의 육적인 해방을 주는 메시야인줄 알고 예수를 따른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가룟유다를 선택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 주는데 필요했으니까요.

예수님은 세상 나라 해방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 사상이 엉터리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가룟유다처럼 인간적으로 정해 놓은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은 죄인이에요.

죄인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해요.

자신들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면 죄인의 나라만 든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세계만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나라를 박살을 내야해요.

그래서 죄인들의 생각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메시야를 보내서 인간들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몰라 보았어요.

왜냐하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치에 못 미쳤기 때문입니다.

매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메시야 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외면했어요.

 

누가 메시야를 알아보는가?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알아보도록 하셨어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에 지혜로만 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을 우리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보내신 겁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인의 아픔을 체휼케 하셨습니다.

죄인의 아픔에 동참해서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탄원토록 하신 겁니다.

 

히 5: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4:14-15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면서도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셨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음에도 죄가 없으십니까?

이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는 하나님 입장에서 중보자가 되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으로서는 인간의 입장에서 중보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 서도 죄인의 아픔에 100% 동참하신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간구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아픔을 모르면 진정한 중보자가 될 수가 없어요.

우리와 똑 같은 아픔을 당해 보아야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 방울 되듯이 기도한 것은 인간이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체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기 싫어하는 것은 예수님도 체험한 겁니다.

그럼에도 죽어야만 한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성도)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어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동일한 모습의 삶을 살으셨기 때문에 죄인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중보자는 양쪽 다 마음에 들어야 해요.

하나님의 마음에도 들어야 하고 인간의 마음에도 들어야 해요.

복덕방 영감님처럼 집을 파는 사람의 마음도 들어야 하고 집을 사는 사람 마음도 들어야 해요.

서로 만족케 해 주어야 해요.

 

예수님은 복덕방 영감님처럼 중보자가 되시려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천국에서 낚시로 낚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자기 백성들을 대신 하여 죽음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하지만 죽음이 예수님을 가둘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몸은 죄인의 몸을 입었지만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인만 가둘 수가 있어요.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이 죽음 속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사망의 세력이 예수님을 죄인인줄 알고 가두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인 것입니다.

죄가 없으니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해낸 겁니다.

어이쿠! 이건 우리가 삼킬 것이 아니네! 라고 뱉어낸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가 소화를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토해낸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요나의 표적으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듯이 예수님도 죽지만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이에요.

연합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죽음이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부활을 하는 것은 죽음이 가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나사로를 꽁꽁 묶어도 예수님 나사로야 이리 나오너라! 라고 하면 죽음도 꼼짝없이 토해 내어야 해요.

이게 성도의 운명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하고 신 나는 일이 아닙니까!

이런 말에 안 놀라면 어떤 말에 놀랍니까?

돈 보따리를 주어야 놀라렵니까?

 

어떤 시골에 아주 아주 형제간에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3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전답을 일구면서 욕심 없이 형님 동생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시골 동네에 골프장이 들어선 것입니다.

골프장을 짓는다고 땅을 다 매입을 했어요.

 

3 형제가 가지고 있던 전답도 다 매입을 했습니다.

3 형제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말았어요.

수백억 원의 돈 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형제간에 반목과 갈등을 일으키고 만 것입니다.

돈을 받고 보니 형제간에 서로 더 갖겠다는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 좋던 형제 우애가 돈으로 다 깨어지고 말았어요.

 

큰 형이라고 더 챙기고!

둘째라고 더 챙기니!

막내가 화가 나서 형들을 칼로 다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하고 말았어요.

이게 과거에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돈벼락을 맞게 하면 그동안 알지도 못하는 사돈에 팔촌까지 다 찾아와서 얼씬 거릴 겁니다.

생판 모르던 녀석이 친구야 반갑다! 라고 찾아와서 손을 벌릴 겁니다.

그걸 어찌 감당 하겠습니다.

부탁을 거절하면 섭섭하다고 하면서 칼을 갈고 언제 등 뒤에서 꽂을지 몰라요.

 

지난번 로또복권에 당첨이 된 사람들의 그 후 삶을 추적한 보도를 봤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또복권이 당첨되기 전보다 더 불행해 졌다고 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에요.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빈대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가난한 사람이 돈 맛을 보게 되면 돌아버려요.

 

돈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군상들을 보면서 왕 노릇하는 그 재미에 맛 들여지면 빠져 나오지 못해요.

그런데 돈이 날개가 있어요.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이미 돈 맛을 본 사람들은 그 돈 맛 때문에 돈 돈 돈 하다가 돌아 버리고 망하는 겁니다.

 

말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암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돈 때문에 망하지 말라고 돈을 안 주시는 겁니다.

복인 줄 아세요.

그러니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고 사세요.

이미 부활의 세계 안에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돈 없어서 굶어 죽어도 천국인데!

 

목사님 그건 말은 쉽지요.

말로는 다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돈 없어 보세요.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지 아십니까?

알아요.

 

저도 돈 못 벌어 주니까 구박덩어리로 살아요.

그래도 주님께 받은 소망이 있으니 구박을 받으면서도 사는 겁니다.

구박도 늘 받아 버릇하면 견딜만 해요.

처음엔 자존심이 상하고 분이 나지만 현실은 인정하면 그것도 금새 적응이 되어요.

물론 때론 불뚝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과는 견줄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에요.

구호가 아니고 실제에요.

예수님도 장차 오는 영광을 보고 십자가의 수욕을 이겨 내셨어요.

 

바울도 그러잖아요.

장차 올 영광은 지금 것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하잖아요.

지금 조금 고난당한다고 울고 불고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 말은 바울의 말로만 두지 말고 내 말로 두세요.

주께서 여러분의 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미 그 말씀 안에 들어온 분들도 있어요.

 

이제 말씀을 가름합시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겨싼다고 하여도 우리를 이기지 못해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도우시는 대 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시험 당할 일이 생기면 이기도록 도우십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주께서 다 이길 수 있게 하실 겁니다.

지금까지 다 이겨왔잖아요.

 

여러분들이 걸어온 길을 한번 뒤돌아보세요.

그땐 그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가나 걱정하고 근심 하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 않잖아요.

당시엔 죽네! 사네! 하면서 악악 거렸지만!

그래도 그 세월을 다 지나와서 지금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것이잖아요.

 

일부러 죽지 말고 사시면 다 이겨 냅니다.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일로 울고불고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곁에 여러분 보다 오랜 세월을 주님과 동행 해온 분들의 말을 들으세요.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라고 그 분들은 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사는 것도 저를 간섭해 오신 주님을 알리라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지 않고 이처럼 부려 먹고 계신 겁니다.

살면서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살려 두신 겁니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우리의 구원은 이미 확정 되었으니 믿고 감사하며 사시면 됩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다 감사할 것들입니다.

죽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이 우리의 대 제사장이 되셔서 지금 눈 시퍼렇게 뜨고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시편 23편의 시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행할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십니다.

이 말씀을 액자에 담아 놓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세기세요.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꺼내서 잡수세요.

 

제발 성경을 지식으로 쌓지 말고 잡수세요.

잡수셔야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되지요.

백날 성경 요절만 외우고 있으면 뭣합니까?

죽은 말씀인데!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달음질 하도록 하세요.

 

어! 진짜 말씀이 살아서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말씀이 산 말씀이 되는 겁니다.

야! 이거 진짜네!

진짜 주님이 살아서 나를 간섭하시고 계시네! 라고 외치세요.

세상 사람들아! 하나님 말씀아 살았단다! 라고 증거하세요.

예수님이 지금 나를 도우시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세요.

 

말씀이 농담이 아니에요.

심심해서 한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한 말씀 한 말씀들이 다 완성품으로 주어진 것들이에요.

완성품이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는 말이에요.

 

내가 실제이듯이,

예수님도 실제이고,

천국도 실제이고,

십자가에 용서하심도 실제입니다.

 

살다가 넘어지고 실수하더라도 예수님 십자가 쳐다보고 툭툭 털고 일어나세요.

어린아이들처럼 넘어졌다고 징징거리면서 울고 자빠져 있지 말고!

여러분이 죄 짓고 자빠져서 징징거리고 울고 있으면 예수님이 화가 납니다.

 

제발 예수님을 노엽게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을 무색하게 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장난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 속에서 살고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도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지금 우리 앞에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내가 실제이듯이 하나님도 실제에요.

내가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실제로 살아서 대 제사장으로 일하시고 계신다는 증거에요.

그 덕분으로 지금 우리가 죄 가운데서도 버젓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세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돌 판에 새겨 두지마시고 심비에 새겨서 그 말씀에 삼키운바 되세요.

 

그럼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빨려 들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믿어지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조만간에 어! 진짜로 말씀대로 되어지네! 라고 깨달아 질 때가 오실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 푹 놓고 사십시오.

우리 곁에 대 제사장이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몸에 예수님의 흔적들이 아로새겨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조각하고 계신다고 믿으세요.

그 아픔이 곧 그리스도의 아픔임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대 제사장을 만나셔서 안위 받으시며 당당하게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맛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시려고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비록 대 제사장을 잊고 살더라도 용서하시고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 주세요. 그리하여 멀리서 주님을 찾지 말고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과 희노애락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