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38강.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

정낙원 2009. 9. 15. 01:55

38강.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 (히 5:6-11)

 

히 5:6-11절.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도올 김용옥 교수가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 중에서 유교의 민본사상을 이렇게 정의 하였어요.

민본사상(民本思想)이란? 백성이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세상의 근본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다스려져 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인간 중심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종묘사직(宗廟社稷)도 갈아 치울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조상(祖上, 임금)이나, 신(神)이나, 백성에게 덕(德)이 되지 않을 때 갈아 치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에게 해(害)가 되면 조상이고 신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대통령도 백성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탄핵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종묘(宗廟)란 말은 조상 신(神)을 섬기는 사당(祠堂)을 말하는데,

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를 세운 조상을 숭배하는 신앙이에요.

요즈음에 인기가 많은 사극들을 보면 나라를 세운 임금을 신으로 섬겨서 제사를 지내고 태평성대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주몽을 추모성왕(追慕聖王)이라고 하면서 사당(祠堂)을 만들어서 위패(位牌)를 모시고 왕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 달라고 제사를 지내면서 기도하잖아요.

 

종묘사직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말은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조상도 신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있고 조상도 있고 신도 있다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자기중심에서 나온 실용주의로 조상을 대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죽은 사람 중심으로 살지 말고 산 사람 중심으로 살라는 겁니다.

신 중심으로 살지 말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곧 신이라는 거에요.

 

중요한 것은 종묘 뿐만 아니라 사직도 갈아 치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묘는 조상신을 말한다면 사직은 세상 신을 말해요.

사직(社稷)이란? 땅에 곡식을 주는 신을 말해요.

인간들에게 풍년을 주고 하는 신 말이에요.

이 말은 신도 백성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믿는 신이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 치우라는 거예요.

아주 통쾌하지요.

이 얼마나 시원한 말입니까?

 

기독교 교인들을 보고 한국에도 신이 많은데 왜 유대인들이 믿는 신을 섬기느냐 에요.

그러니 꼭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신을 찾아서 섬기면 된다는 겁니다.

 

백화점에서 여러 가지 신발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고르듯이,

신들도 여러 신들이 있으니까 그 중에서 자기 취향에 맞고 지기에게 유익을 주는 신을 골라서 섬기면 된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무당도 있고, 부처도 있고, 예수도 있으니 골라잡으라는 겁니다.

 

어차피 인간이 신을 찾는 것도 자기 편하라고 찾는 것이니까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신이라고 한다면 섬길 필요가 없고 버리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 편한 것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을 폄하하면서 비꼬는 말로 얼마든지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신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에게만 질질 끌려 다니느냐 에요.

왜 꼭 예수를 믿어야지만 하느냐에요.

 

인간들 편에 서서 신을 공격해 주니까 얼마나 시원합니까?

이 사람은 신도 인간의 필요에 있다는 거에요.

신도 내가 섬겨주지 않으면 없는 신이고 죽은 신이라는 겁니다.

 

민본사상은 우주의 중심을 인간(자기 자신)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상이에요.

내가 죽고 나면 신도 없어지니 편한대로 살라는 겁니다.

신에게 끌려 다니지 말고 신을 끌고 다니라는 거에요.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을 덮으면 맞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그게 아니란 것이 드러나요.

성경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죄라고 해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지요.

여기서 태초란? 만물(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해요.

태초는 피조물이 알 수 없는 피조물 바깥의 세계에요.

이를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 말씀도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라는 하나님도 계시고 말씀이라는 하나님도 계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라 하고,

말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를 증거하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만물이 말씀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만물은 말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어요.

이건 요한복음 첫 강의 때 상세하게 살펴보았으니 참고하세요.

 

암튼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김용옥씨가 말하는 민본사상은 틀린 것이지요.

김용옥씨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도 나왔어요.

예수 안 믿어도 신학을 할 수가 있어요.

이 말은 예수 안 믿어도 목사 노릇 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 믿는 목사들이 수두룩해요.

이들은 인본주의 신앙으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거짓 종들이에요.

곡식 속에 마귀가 심어 놓은 가라지들이에요.

 

신앙이 뭐냐?

나는 존재케 하는 근본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근본이 예수라는 것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 중심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다스리지 않고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요.

 

역사를 He story 라고 하지요.

그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이유는 예수님을 알려주고자 함이에요.

예수가 세상의 중심이에요.

우리의 주인도 예수님이에요.

 

이 세상은 예수로부터 나왔고,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다가,

예수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다니엘서에 보면 이 세상을 큰 신상에 비유했어요.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그 종이라는 철이고,

그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으로 되었는데 이게 세상 나라라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인간 세상은 갈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인간성을 상실해 간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더욱 더 악해진다는 거예요.

마치 노아 시대처럼 죄악이 관영하여 진다는 뜻입니다.

 

종말 때의 모습이 진흙과 철이 섞이는 시대라고 하지요.

이는 혼합을 말해요.

섞인다는 말입니다.

 

퓨전 시대에요.

종교도 섞이고, 문화 예술도 섞이고, 인간도 섞이고, 한마디로 경계가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음식도 퓨전 음식, 문화 예술도 기존의 틀을 깨서 통합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역발상이에요.

 

지금 이 시대를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하지요.

이는 지금까지 순리로 지켜온 것은 역리로 바꾸는 시대를 말해요.

그래서 이 시대 화두는 고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기존의 것을 혁파하고 인간의 본능 중심으로 편한 대로 살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 스타일들도 보세요.

모양도 천태만상이고 색깔도 각양각색이에요.

기준이 없어요.

이걸 혼돈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바로 혼돈의 시대에요.

종교도 하나의 가치라는 깃발로 내세워서 인본주의 사상으로 섞이고,

문화 예술도 하나의 가치로 섞이고,

인류 자체가 인권이라는 가치의 깃발 아래로 섞이고 있어요.

 

저수지의 방축이 터져서 물이 온 사방으로 흘러넘치듯이

교회 안에서도 절대적 신앙의 기준이 무너져서 온 세상의 종교가 통합을 이루고 있어요.

이건 마치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한 것과 같아요.

철과 흙이 섞이듯이 가치가 전혀 다른 것이 하나가 되고 있는 겁니다.

하이브리드 시대에요.

 

세상이 이렇게 변할 것을 이미 2500년 전에 다니엘이 계시로 예언했어요.

그런데 이럴 때 느닷없이 하늘에서 뜨인 돌 하나가 나타나서 그 신상의 발을 쳐서 완전히 박살을 내 버렸어요.

신상을 깨트린 그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해져요.

 

여기서 신상은 인간들 나라에요.

하늘의 뜨인 돌은 예수님이에요.

이는 곧 예수님이 세상 나라를 없애 버리고 예수님의 나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 신상을 가지고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김용옥씨는 하나님에 대한 소경이에요.

이 사람은 세상 지식으로는 유식할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지해요.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하니 하나님도 갈아치우라고 망발을 하는 겁니다.

소경이니 자기 마음대로 지껄이는 겁니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겁니다.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 가세요.

이건 인간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성경의 증거는 내가 생기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보니 육적으로 자기보다 늦게 태어난 예수님이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나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세상 밖에서는 이미 나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주장은 이성적으로는 말 같지 않아요.

이성적으로는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말 같지 않은 말이에요.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말들만 가득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일컬어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고 하는 것은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의하여 생겨났다는 말이에요.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알아먹지도 못하는 어법으로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생이 형 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까?

이건 길게 쭉 늘어서서 진행되어지는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예수님 이야기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이야기에요.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알 수가 없고 받을 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식적인 것을 진리라고 해요.

인간에겐 이성으로 믿어져야 진리에요.

믿어지지 않는 것은 신화(神話)로 여겨요.

 

죄가 우주의 중심에 인간들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지금까지 지기가 짜 놓은 구조가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알아진 주객이 전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죄 아래서는 내자 주인이었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예수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중심으로 살아온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성령을 받고 보니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주권(主權)을 예수님에게로 이양하는 것이에요.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인이 바뀐 사건이 구원 사건이에요.

 

주인이 나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뀌니 이제부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스려 가세요.

물론 우리는 여기서 순순히 응하자 않아요.

반항하고 원망하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에요.

광야 40년은 인간들 속에 있는 죄를 다 토악질 당하는 기간입니다.

광야로 끌고 다니면서 죄를 더욱 더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입을 닫도록 하시는 겁니다.

성도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두 주인 사이에 끼어서 맨 날 악! 소리 하면서 살아요.

죄는 내가 주인이라고 하고, 성령은 예수가 주인이라고 해요.

우리는 늘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죽여요.

반대로 성령은 예수를 위해서 우리를 죽이는 일을 단행하세요.

 

성도들은 늘 자기 안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성령이 이 놈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은 구원을 얻은 자에게만 일어나요.

산 자의 몸부림인 겁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것이 없어요.

불신자들은 갈등이 없어요.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도 있고 교회도 있고 가정도 있다고 생각해요.

교회도, 예수도, 나를 위하여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없는 교회나 예수는 상상하지 않아요.

 

내가 없는데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죽고 없는데 하나님이 있은들 그게 무에 그리 대수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열면 전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고, 내가 없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계신다고 해요.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잖아요.

만물이 말씀이신 예수님의 손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나 중심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낳았어요.

예수님이 없으면 우린 없는 존재에요.

반대로 우리가 없어도 예수님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보다 예수님이 우선이고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왜 없던 우리를 낳았을까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에요.

우리를 가지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보세요.

만물이 그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만물의 주(主)라고 합니다.

 

주란? 왕이고 심판주라는 말입니다.

만물 속에는 선택을 당한 자와 선택을 입지 못한 자로 나누어져요.

그런데 그 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요.

예수님 중심으로 나누어 졌으니까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려고 인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 두 부류로 만들었어요.

긍휼의 그릇은 천국 갈 사람이고, 진노의 그릇은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창조하셨다고 하지요.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거기에 들어갈 사람도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에서는 지옥가기로 태어났고, 야곱은 천국가기로 태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야곱은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지만,

에서가 들으면 억수로 재수 없고 기분 나쁜 말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은 에서와 야곱이 있으므로 기분이 좋은 겁니다.

 

야곱이나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미 각자가 가야할 곳을 정해 놓았어요.

이를 토기장이 비유에서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에서에게는 지옥의 프로그램이 내장 되어져 있고,

야곱에게는 친국의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각자가 가야할 곳의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태어난 것입니다.

 

송대관씨가 부른 ‘차표 한 장’이라는 노랫말처럼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각자 다른 열차에 몸을 싣고 가는 겁니다.

 

천국에 갈 프로그램 속에는 예수님이 내장이 되어 있고,

지옥에 갈 프로그램 속에는 범죄한 아담(마귀)이 내장이 되어 있어요.

이걸 세상 말로 팔자(운명)라고 해요.

모든 인간은 각자 팔자대로 살다가 팔자대로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합니다.

 

우주의 중심은 누구다?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우린 조연이고 엑스트라들이에요.

 

우리는 원래 없던 자였는데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나 자신이 없어진다고 해도 말씀되시는 예수님은 엄연히 살아 계세요.

우리가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으니까요.

 

이렇게 되면 내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죽어도 여전히 예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죽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심판이 있어요.

 

죽고 나면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영생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살든지, 영벌로 들어가서 영원히 살든지 각자 세상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난 자들은 예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해요.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든지! 둘 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서 영생하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서 영생해요.

 

천국이 영원하면 지옥도 영원해요.

지옥은 천국의 그림자와 같아요.

천국에서 영원히 살면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아야 해요.

이게 하나님이 정한 법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으니 나 중심으로 살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성령이 우리 중심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라고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생겨났기 때문이잖아요.

 

성령을 보내서 넌 빠지고 예수님을 앞세우는 겁니다.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넌 제발 예수님 뒤로 빠져 있으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난 너하고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하고만 상대 한다고 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이에요.

구약 성경은 전부 예수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율법 속에도 예수님 이야기를 계시해서 예표적으로 담아 놓았어요.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5-7절.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보세요.

구약의 율법 속에 담긴 제사 이야기도 예수님을 겨냥해서 말하고 있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짐승의 제물을 원치 않고 예수라는 한 몸을 원하세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아버지께서 예언한 대로 내가 왔습니다.

내가 죽으려고 왔다고 합니다.

이제 됐습니까!

그러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제사장 이야기도 결국엔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냥 온 것이 아니고 이미 예언된 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정된 그 수순에 따라서 그 계통으로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반차란? 계통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족보 즉 그 계열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같은 계통이라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딱 한번 나옵니다.

그리곤 감추어졌어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일컬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오신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구약에 나타난 멜기세덱은 신약에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음이 됩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멜기세덱이 대신 맛보기로 해 주신 겁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런 일을 하신다고 살짝 보여주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럼 구약 속에서 잠간 나타났다가 사라진 멜기세덱에 관하여 살펴봅시다.

 

창세기 14장입니다.

 

창 14:17-20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복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가라고 하여야 하나의 부족형태이니 이 시대 전쟁과는 비교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의 성격은 어느 때나 동일합니다.

 

죄인의 세계는 자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전쟁은 필연적인 거예요.

전쟁하는 이유는 내 목구멍에 밥을 넘기기 위해서 남의 목구멍에 들어갈 양식을 빼앗아 오는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것이 전쟁이에요.

전쟁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얻지만 지게 되면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잠깐 전쟁 상황을 살펴봅시다.

 

창 14:8-9절.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9.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당시 부족들 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전쟁을 했어요.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과, 소알이라는 다섯 부족이 하나로 연합하였고,

엘람과, 그돌라오벨과, 고임과, 디달과, 시날이라는 네 부족이 하나로 연합을 하여서 한편이 되어서 전쟁을 하였어요.

 

5:4 로 맞짱을 뜬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조카가 속해 있는 소돔의 연합군이 져버렸어요.

그래서 롯도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겁니다.

 

이 소식을 아브라함이 듣고 자기 집에서 기른 사병(私兵) 318명을 데리고 조카 롯을 구하려고 전쟁을 한 겁니다.

5개국이 연합을 하도고 졌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종들을 데리고 가서 전쟁을 합니다.

오합지졸과 같은 318명 가지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것입니다.

무모한 전쟁을 치른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강대국을 이겼어요.

전쟁이 이기고 난 후 포로로 잡혀 가던 롯을 구출해 오는 겁니다.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창 14:17-20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목에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복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 기도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번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소리를 듣고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쉽게 이긴 거구나!

어째 전쟁이 쉽더라!

뭔가 이상하더라!

 

이제 보니 하나님이 자기 대신 싸워 주셔서 이긴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니,

자신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얼른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다 드렸다는 의미에요.

아브라함이 왜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을 드렸을까요?

이는 전쟁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대신 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 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성경에 멜기세덱에 관하여 나온 기사가 전부인 겁니다.

그러다가 시편에서 잠간 언급을 합니다.

이건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이야기에요.

 

시 110:1-7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 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6.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7.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예언의 내용이 장차 오실 메시야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실 메시야가 하시는 일이 원수를 박살을 내고 그 원수들 수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 있던 롯을 구출해 오는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시야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원수를 박살 낸 것은 십자가의 승리를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 한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변치 않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다는 것은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선 성도들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을 만드셨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근원(根源)이란? 틀이에요.

마치 밀가루 반죽을 붕어빵 틀에 넣으면 열이고 스물이고 똑 같은 모습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과 같아요.

 

무슨 틀입니까?

십자가라는 틀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틀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하기로 확정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겁니다.

이 틀에서 구원을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아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죄를 담당해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제사장을 통해서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오는 큰 대제사장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오셔서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하늘에 속한 분이에요.

그러니 땅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즉 인간들의 조건에 따라서 멜기세덱이 하신 일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원수를 박살내고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는 이 일이 인간들의 조건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보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우리가 뭘 잘못한다고 해서 잘라내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도는 그 어떤 조건으로도 구원이 흔들리거나 취소되지 않아요.

구원은 확정적인 것이에요.

완료이고 완성이 된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완료라고 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시작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의 영원성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이 속에는 예수님이 일하시는 모습도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 꼬라지를 가지고 내가 이러다가 구원에서 짤리면 어쩌지! 라는 근심 걱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구원을 불안해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에요.

마귀는 우리의 조건으로 구원을 지키라고 해요.

여기에 걸려들면 예수는 믿지 않고 자기 꼬라지 가꾸기에 허비하게 되어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헛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고 해요.

베드로도 성령을 받고 보니 이 사실이 믿어진 겁니다.

그래서 죽일 테면 죽여라! 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한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 까지만 해도 두려워서 방문을 잠그고 벌벌 떨던 인간이 성령을 받고 나더니 겁대가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세상이 세피하게 보인 거예요.

어느 놈이 우리 앞 길을 막는단 말이야!

죽일 테면 죽여라 라고 큰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저 놈이 낮술을 쳐 먹어서 겁대가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겁니다.

 

맞아요.

성령이 임하고 나면 담대해져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이 믿어지면 겁대가리가 없어져요.

이상하게 힘이 생겨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나자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앉은뱅이를 고치고 다윗이 말한 시편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성취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 봅시다.

 

행 2:34-36절.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가 그럽니다.

이미 우리 조상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보았다는 겁니다.

시편에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 사건이 지금 너희들이 보는 이 앞에서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 중에서 3천명이 어찌할꼬!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어요.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고백이 아니에요.

성령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주의 백성들이 마귀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이 주신 의에 옷을 입고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되어서 주께로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에게 포로가 되었던 자들이 다 풀려나 주께로 돌아온 겁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내용이 아닌가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하여 말씀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임을 알아야 해요.

 

그런데 우린 먹고 사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이런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하지요.

그저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여야 좋아라 하지 우리 구원은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여도 기쁘지가 않아요.

그만큼 우리는 믿음 믿음 하면서도 허상을 좇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때론 정신 좀 차리라고 여러분 주변에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나 사고들을 일으켜서 흔들어 대는 겁니다.

예기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사느냐! 라고 뒤통수를 때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그럼 이 멜기세덱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멜기세덱을 보았어요.

한번 볼까요.

 

히 7:1-4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멜기세덱에 대해서 분석해 봅시다.

먼저 그의 신분을 봅시다.

첫째 의(義)에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둘째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셋째 하는 일이 뭔고 하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신다고 해요.

 

의에 왕이란? 그가 사는 나라가 의에 나라 라는 뜻입니다.

의에 나라는 죄가 없는 나라를 말해요.

알다시피 이 세상은 죄의 나라잖아요.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이 세상 나라에 속한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 어디입니까?

하나님 나라이지요.

 

맞아요.

하늘나라에요.

이름하여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살렘이라고 하고 평강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평화의 나라!

 

이사야의 말대로 사자와 어린양이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들과 같이 놀 수 있는 나라에요.

이는 원수가 없는 나라란 말입니다.

그토록 인간들이 꿈꾸며 소망하고 찾는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나라에요.

창세기 식으로 말하면 에덴동산이고 한문으로 말하면 낙원이고 영어로 말하면 파라다이스예요.

 

그래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세상인 하늘 나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오신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구약에선 멜기세덱이 신비의 인물이었는데,

신약에선 예수님이 신비의 인물로 오신 분이에요.

아비 없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신비이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상한 분입니다.

이를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구약의 여호와에요.

여호와는 전쟁하는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전쟁하러 오신 겁니다.

 

십자가에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전쟁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깨트렸어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망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일평생 죽음에 종 노릇하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놓아 주셨다고 합니다.

 

성도를 일컬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는 전쟁은 곧 구약 마당에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전쟁과 같은 겁니다.

아브라함 전쟁을 누가 했다고 했나요.

멜기세덱이 대신 했다고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전리품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나요?

멜기세덱이 싸워서 이긴 것이니까 멜기세덱에게 드린 겁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이 어떻게 싸워서 성도를 구원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구하는 것을 전쟁이야기로 비유하셨어요.

 

마 12:28-29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를 고쳐 주셨어요.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초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라고 폄훼를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자기들끼리 분쟁을 하면 어떻게 나라가 든든히 서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내가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좇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었던 것은 내가 귀신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전쟁을 하면 강한 자가 먼저 상대방을 박살을 내고 무릎을 꿇게 하고 난 후에 그 집 세간들을 가지고 가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건 마치 과거 야인시대라는 드라마에서 김두한이가 다른 조직의 오야붕을 박살을 내고 그 조직을 접수하는 것과 같아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강한 분이 되셔서 마귀를 결박시키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구출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던 눈멀고 벙어리 된 자들이었어요.

 

예수님이 우리들을 마귀로부터 빼내오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세간들이에요.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겨서 가지고 온 물건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찾아온 전리품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제사장이라고 하셨지요.

그럼 예수님이 성도를 위하여 대신 전쟁을 해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성도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와 전쟁을 하여야지요.

 

마귀가 사망으로 성도들을 꽉 잡고 있는 겁니다.

마치 롯을 포로로 잡고 있듯이 꽉 잡고 있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빼내는가 하면 예수님이 사망 안으로 들어가서 빼낸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예수님이 마귀에게 죽어 줌으로서 이겼어요.

그런데 마귀가 이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처절하게 박살이 나고 만 겁니다.

 

마귀와 예수님이 한판 붙었어요.

마귀가 자랑하는 최고 무기는 사망이에요.

사망이라는 무기는 죄인에게만 약효가 있어요.

모든 인간들은 죄가 있으니 사망 앞에서 쩔쩔매요.

사망을 못 이겨요.

마귀는 사망으로 사람들을 협박하는 겁니다.

 

너 죽을래!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에 쫓기는 인간들은 다 마귀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요.

 

예수님이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마귀가 예수님에게 너 자꾸만 그러면 죽는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겁니다.

이에 마귀가 화가 나서 너 정말 겁 없이 까불래!

그러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여 버린 겁니다.

그런데 아뿔사!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란 것을 몰랐던 겁니다.

 

사망이 예수님을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인만 가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무기는 사망인데 예수님에게는 사망이라는 무기가 약효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망이 예수님을 입어 넣었다가 퉤~하고 뱉어낸 겁니다.

예수님이 나올 때 그냥 나온게 아니고 포로로 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다 데리고 나온 겁니다.

 

이를 두고 도랑치고 가제 잡는다고 하는 겁니다.

돌맹이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았다는 의미에서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하지요.

첫째로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마귀의 권세를 깨트려버렸고,

둘째로는 사망 안에 가두어져 있던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다 치르고 빼내 왔으니 일석이조와 같은 것입니다.

 

마귀가 전쟁 한 번 잘못했다가 완전히 망한 겁니다.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고 만 겁니다.

예수님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데 죽인 것이 화근이었어요.

예수를 안 죽였으면 성도들이 죽음에서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은 작정하고 죽음의 길로 나아간 겁니다.

자신을 죽이라고 성전을 뒤집어엎으면서 바리새인들을 독사 새끼라고 욕을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약을 잔뜩 올려서 자신을 죽이도록 한 겁니다.

그러자 마귀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예수님을 덜컥 죽이고 만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서 마귀를 이겼어요.

예수님이 부활을 하자 마귀가 항복 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귀가 사로잡고 있던 우리들을 빼내 온 겁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예수님의 족보(생명책)에 적혀 있는 명단을 내 보이면서 다 내어 놓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성도는 예수님이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서 구원을 받은 거예요.

우린 모두가 마귀에게 포로 잡혀 갔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승리하셔서 되 찾아온 자들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빼앗겼다 찾김 받은 흔적들이 들어가 있어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드라크마와 잃어버린 양과 탕자 비유가 나오지요.

이 모두가 구원 받은 성도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겁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을 빛이 바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겁니다.

성도의 구원 속에는 우리의 공로가 단 0.000001%로 들어가 있지 않아요.

모두 예수님 공로에요.

 

이는 곧 성도의 구원도 우리의 잘못으로 소실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속에는 우리들의 행함에 요소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린 구경만 하고 있는데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싸워서 마귀가 코피 터지고 예수님에게 항복을 한 겁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다시는 우리 아이들 손대지 못하도록 하였어요.

이게 성도의 구원에 확실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 산에 서 있는 구원 받은 무리들의 이마에 전부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마귀가 뭐라고 하면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내어 놓으면 되어요.

너 왜 말씀대로 살지 않아! 라고 하면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으세요.

그렇지 않고 앞으로 잘할게요! 그러면 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피는 화투판의 장땡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일어날 모든 죄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해 주세요.

이게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능력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 겁니다.

 

신앙의 싸움은 믿음에 싸움이에요.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승리한 것을 가리려고 해요.

예수를 믿지 말고 우리더러 싸우라고 해요.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이 싸워 이겼다고 알려주세요.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다고 깨닫게 하세요.

성도는 예수님이 대신 이겨 주신 것으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을 구약의 제사장과 잠시 비교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오셨어요.

그럼 제사장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를 알면 하나님이 제사장을 주신 이유를 알 수가 있어지겠지요.

 

구약에 보니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이 있었어요.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니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분이에요.

제사를 드려준다는 것은 하나님은 죄인이 드리는 제사는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 없는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만 받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대신 드려주는 제사장을 주신 겁니다.

 

제사장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죄인을 직접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인간들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제사장이 대신 드려주는 것만 받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는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서 나아가야 해요.

이걸 중보자라고 합니다.

대신 중간에 서서 아뢰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받지 않고 예수님의 기도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봉사도 충성도 헌금도 예수의 것만 받으세요.

이걸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는 것이라고 했어요.

앞선 시간 요한복음 강해에서 살펴보았지요.

다시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제사법에 보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어요.

 

레 2: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대하 13:5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소금은 변치 않는 언약을 상징해요.

이 시대 변치 않는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여기서 소제물이란? 성도의 삶을 말해요.

그렇다면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님의 피가 묻어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봉사를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고,

헌금을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고,

기도를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여야 해요.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한다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란 말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공로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친다고 하는 겁니다.

난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삽니다! 를 고백하고 사는 것이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선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일컬어 영적예배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하나님은 왜 인간들이 직접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과 만나면 죄인은 죽어요.

 

하나님이 제사장을 주신 것은 죄인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서 성별을 하였던 것입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을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너만 나에게 나와! 찜한 겁니다.

 

제사장들이 비록 우리와 똑 같은 죄인이지만 기름 부으심 때문에 거룩한 자라고 인정해서 구별을 시키신 것입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신약적인 의미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지요.

이를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성령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만이 거룩한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 주어야지만 그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장차 성령으로 오실 제사장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제사장을 오늘 본문에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고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아버지께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고난당함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해졌다고 합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심으로 온전해 졌다고 합니까?

이는 의인의 피로서 죄인의 죄가 속함을 받기 때문이에요.

 

이를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어요.

선지자들이 예언은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예언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고난당할 것을 누가 예언하였는지 살펴봅시다.

 

그 유명한 이사야 53장 종의 노래를 봅시다.

 

사 53: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문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우리가 살아낫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목숨과 예수님의 목숨을 맞교환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담당 시킨다는 말은 대신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맞도록 하신 겁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겁니다.

 

이게 영원히 변치 않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좋아서 오신 제사장 속에 담겨져 있는 약속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을 시키셨을까요?

왜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면 안 됩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우리가 담당하면 되잖아요.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을 시키느냐 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죽으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사망이 꽁꽁 가두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사망의 세력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므로 사망이 가둘 수가 없어요.

사망이 가둘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백성들을 사망에 가두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프로그램 칩처럼 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죽어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부활의 프로그램 칩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이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성령이 예수님과 한 몸으로 만드셨어요.

결국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성도는 예수님 안으로 복속이 된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도를 한 몸으로 보시는 겁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 속에는 예수님의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연관된 사건들을 툭툭 터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희는 네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람들마다 각자 프로그램이 내장 되어 있다고 했지요.

천국에 갈 성도들에게는 예수님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 있으니까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어 넣고 다스려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운명은 인간들에게 버림당하고 죽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예수님 속에 담겨진 프로그램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에요.

이는 인간들의 배후에 있는 마귀를 들추어내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는 늘 마귀로부터 얻어터지는 겁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마귀가 심어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예수님(예수님에게 속한 자)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성도)을 죽이는 것은 그들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종들은 예수님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도 죽여요.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살 사람은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도록 해 놓았어요.

이게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운명인 것입니다.

 

12사도나 바울이 그러지요.

 

고전 4:9-13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말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물의 찌끼 같게 해 놓았다고 하지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욕먹는다고 해요.

인간적으로 보면 최소한의 의식주(衣食住) 문제도 해결 받지 못한 상태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노숙자이고 거지입니다.

 

성도는 세상 적으로 잘 되는 게 없어요.

이게 얼마나 우리 생각하고 다릅니까?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저도 복음 빙자해서 편해지고자 하지 어려워지지 않기를 바래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순 엉터리인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당당하게 천국에 갈 수가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용서의 능력이 우리에게 덮쳐오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 속에 심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약속을 심어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고후 1: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이는 죽어도 다시 살려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 전하다가 오라는 겁니다.

죽어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성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일해 가세요.

예수 잘 믿으면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나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미리 가르쳐 준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그들이 나를 먼저 미워하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산상보훈에서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의 것으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기뻐하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사건들을 툭툭 터뜨리십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게 하세요.

천국에 갈 성도는 예수님의 사건 속으로 휘말리고 지옥에 갈 사람은 마귀의 사건에 휘말려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예수님과 마귀는 사람들을 앞세워서 자기 일을 도모한다고 했어요.

모든 사람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든지 예수님이 계시든지 합니다.

성도의 배후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불신자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어요.

마치 예수님과 마귀가 장기를 두는 것과 같아요.

성도는 예수님의 말이고, 불신자는 마귀의 말이에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 자꾸만 핍박하도록 역사를 합니다.

이럴 때마다 마치 사울 왕이 다윗을 창으로 죽으려고 하던 사건들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아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세요.

내 속에 예수님의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구나 생각하란 말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의 구원을 빼앗아 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친히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세요.

우린 그 믿음을 받았어요.

그 믿음 안에서 감사하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심이 있기에 우리가 죄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전리품으로서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는다는 이 확실한 약속이 소망으로 주어져 있기에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