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40강.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

정낙원 2009. 10. 1. 01:57

40강.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 (히 6:1-8)

 

히 6:1-8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을 쓴 저자 입장에서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성경을 쓴 저자(著者)라는 말은 인간들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장에서 썼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통고하는 형식을 띠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역사 세계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즉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입니다.

죄가 주는 정보로 하나님을 접근하면 인간 입장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면 죄가 주는 정보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므로 올바른 하나님이 아닌 겁니다.

 

이처럼 인간 입장에서 알고 섬기는 하나님은 성경에서는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다른 신은 곧 우상이에요.

그래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참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마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왜곡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계시되어진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이외의 하나님은 모두가 가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하여서 인간들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예수님을 통하여서 계시가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계시가 예수님 안으로 고정이 된 것입니다.

계시가 예수님으로 고정화 되면 예수님 이외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충돌하여서 생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마귀라고 합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은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곧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도무지 받아 들일수가 없어요.

예수님 혼자의 일방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참람 죄로 예수님을 죽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이나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인 셈입니다.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과 같아요.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게 되면 전혀 다른 코끼리를 말할 수밖에 없어요.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자기가 상상하는 코끼리에요.

그러니 소경이 말하는 코끼리는 비록 코끼리라는 말은 같을지 모르지만 실제 코끼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소경인 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다른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나는 이렇다” 라고 계시를 해 주신 겁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첫 언급이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 라고 하시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 고 하신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내가 아니라고 알려준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지금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세요.

이걸 이 시대로 말하면 예수님을 통하여서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도 몰라요.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늘 놓치지 말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자아 중심의 자기 하나님을 생성해 냅니다.

나를 위한 신으로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져요.

마치 문방구 앞에 두더지 게임기의 두더지같이 두들겨 패면 잠시 숨은 것 같다가도 금새 또 다시 고개를 내 밉니다.

우리 몸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유익되는 쪽으로 이해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고가 성경을 해석하는 데까지 영향을 행사합니다.

자기 선입견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개인적으로 Q. T 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성경은 많이 읽어야 해요.

이건 아무리 말해도 부족한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데 자기 생각을 개입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Q. T 를 장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다고!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시라고,,,

 

그러면 성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약 40여명이나 되어요.

이 사람들은 시대와 환경과 학식과 재능이 다 다릅니다.

살았던 연대도 다양하고 살았던 지역도 다양합니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약 16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신분을 보면 왕, 시인, 선지자, 목동, 의사, 세리, 어부 등 신분과 직업에 있어서 다양합니다.

또한 그 시대의 많은 학문에 있어서 능통한 유식한자들도 있었지만 무식한 어부들도 있었어요.

한마디로 성경이 약 1600년 동안 대략 40명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서 써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의 통일성(統一性)이라고 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 하나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성령이 시대를 초월하여서 하나의 이야기만 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문자풀이 식으로 접근을 한다고 하면 각 권마다 다르게 보일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을 받은 성도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가 뭘까요?

예수님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요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눅 24:25-27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성경을 가지고 자세하게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풀어 주셨습니다.

왜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낙심하여서 집으로 돌아가느냐!

너희가 성경을 제대로 알았다면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을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내가 죽은 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승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 얻을 것이라고 상고하지만 그 성경은 곧 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곧 성경에서 영생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영생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모두가 이를 증거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던 두 제자는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마음이 뜨겁다” 라는 말을 “카이오오” 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다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던 것을 불태워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는 새로운 안목이 열렸다는 말이에요.

이걸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성령이 감동을 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이 되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성경 해석이 생긴 거지요.

문자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보는 안목 말입니다.

 

이걸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울이에요.

바울은 알다시피 바리새인 이였어요.

바리새인이라 함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율법주의자란 말입니다.

율법주의의 성경해석은 문자중심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구약 성경을 철저하게 문자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엔 예수라는 이름이 없어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난다는 것이 없어요.

모두가 은유적으로서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은유적이니까 문자적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겐 예수님이 포착 될 수가 없어요.

바울도 율법아래 있을 땐 아무리 해석을 해도 예수님은 이단인 겁니다.

그래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처단한 겁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엔 완전히 성경 해석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구약을 재해석하게 된 겁니다.

지금 히브리서가 그래요.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해석하는 책이에요.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반드시 예수님은 죽일 수밖에 없다고!

이 말은 인간은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도 성경해석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 되지요.

 

문자중심으로 해석하는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중심으로 하는 해석은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일을 자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엄청 무서운 말이에요.

 

오늘 본문을 이 두 해석으로 해 보시면 극명하게 차이가 남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그럼 오늘 분문을 다시 봅시다.

 

히 6:1-8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오늘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유념해 두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도(道)의 초보를 버리라는 것과,

둘째,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 할 수가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만약 초보에 머물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결론을 농사비유로 땅에 곡물을 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땅이 하늘에 비를 받아서 먹을 곡물을 내면 복을 받지만 먹지 못할 곡물을 내면 불살라버린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곡물을 내어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우리가 힘써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대다수가 이런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충성 봉사를 강조하는 겁니다.

교인들도 문자적으로 보니 그런 것 같으니까 목사님들이 하는 말에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저에게 목사님은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라고 물을 것이겠지요.

저도 이 본문을 해석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제 지혜가 허락하는 데로 해석을 해야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받은 은혜로 해석하는 것이니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전 다만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동의가 되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흘러 보내시면 되어요.

앞으로 더 나은 해석이 나오면 정정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해석을 보면 부족한 것 같아서 전 이런 해석을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어디에 속하였느냐! 라는 시각으로 살펴보았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장절(章節)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모습처럼 장(章)과 절(節)을 구분을 한 사람은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 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것을 훗날 ‘휴고’라는 사람이 1248년경에 완성하였어요.

그러니 히브리서 5장과 6장은 장(章)과 절(節)이 구분 없이 보면 연결된 문장이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 복습한다는 의미에서 잠깐 살펴봅니다.

5장 말미를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멜기세덱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6장 시작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5장과 6장을 연결해서 읽으면 멜기세덱을 모르면 어린아이고 어린아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자란 말이 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엔 멜기세덱을 알면 장성한 자이고 모르면 어린아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냐?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성도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주시는 분이라고 했지요.

이는 성도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걸 하나님께서 구원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근원(根源)이란? 틀이라고 했어요.

다른 말로 ‘확정해 놓은 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법 안에서 성도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거나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서 담당하는 것으로 하십니다.

 

그러니 이 멜기세덱 속에 담긴 구원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뭘 하겠다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모르면 자기 쪽에서 거룩해지려고 뭔가를 시도하게 되어요.

시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이처럼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자들을 일컬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은 불살라버린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도 우리더러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란 뭘까요?

이는 그 이어서 말하는 것에 힌트가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하지요.

 

그럼 먼저 죽은 행실이 뭡니까?

지난 시간 베드로가 말한 것으로 살펴보았지요.

다 잊어 버렸으니 다시 봅니다.

 

벧전 1: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베드로는 조상의 유전을 망령된 행실이라고 합니다.

조상의 유전이란? 율법대로 살아가는 신앙이에요.

그러니 율법 신앙은 하나님 앞에선 망령된 행실인 겁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망할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을 붙잡으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망령된 것으로부터 어떻게 구출이 되었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인 죽은 행실은 율법적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세례라는 말도 신약의 세례 의미가 아닌 구약의 정결 의식을 말하고 있어요.

안수 역시도 구약적 개념이에요.

주석이 진리는 아니지만 제 생각과 같아서 동의되는 말이라서 인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난해한 것은 그리스도의 도(道)의 초보라고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라고 하니 마치 그리스도를 믿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하였다고 하니 이건 믿는 자의 타락을 말한다고 결론을 짓고 이 본문을 설교 할 때마다 교인들이 신앙의 성장 개념으로 적용을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책망한 것과 같아요.

바울의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도 구원에서 짤릴 수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바울의 이런 경고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떻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라는 반어법(反語法)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듣고 있느냐! 라고 책망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의미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것이 완성이 되었는데,

뭐가 아직도 미흡해서 뭘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느냐 에요.

 

만약에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서 믿는 자가 중간에 타락해서 잘려 나간다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보존하여야 하는 오류가 생기게 되어요.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행함과 상관없이 완료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어요.

 

만약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된다면 그 구원은 미완료가 되어요.

인간의 열심으로 구원을 지켜나가야 하는 불완전한 구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능력에서 나오지 인간의 행실에서 나오지 않아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구원이 취소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하였다는 말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심과 성령의 은사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성령은 “엔(in)” 성령과, “에피(out)” 성령이 있어요.

 

“엔(in)” 성령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말하고,

에피(out)” 성령은 성령의 은사를 말해요.

성령이 두 분이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의 일하심을 말해요.

 

“엔(in)” 성령은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성령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에게 보내어진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성도 안에서 내주하시고 떠나가지 않아요.

영원토록 함께 계세요.

 

“엔(in)” 성령은 예수님의 새 언약이 믿어지도록 하셔서 성도를 예수님과 한 몸을 만드세요.

그러나 “에피(out)” 성령은 겉에서 일하시는 성령이세요.

에피(out)” 성령은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때 역사를 하세요.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어떤 기적을 일으킬 때 역사하시는 성령이세요.

 

이를 성령을 “입어” 라고 합니다.

입는다는 말은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식으로 왔다 갔다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때 필요 할 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12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좇아내었지요.

이 때 가룟 유다도 12제자의 일원으로서 파송 되어서 성령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어요.

이 때 성령은 아직 제자들 속에 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어요.

이 때 제자들에게 역사하신 성령이 “에피(out)” 성령이에요.

 

내주하시는 “엔(in)” 성령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오세요.

제자들 속에 오신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신 후에 오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은 “에피(out)” 성령으로서 제자들 바깥에서 글자 그대로 옷을 입고 벗듯이 은사적으로 왔다 갔다 하신 겁니다.

 

구약을 보면 사울 왕이 성령의 은사로 예언을 한 사건이 있지요.

모세 시대에 칠십인 장로가 성령에 충만함으로 예언한 것도 있지요.

이방나라 거짓 선지자인 발람도 성령의 은사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어요.

지금도 이런 은사적인 성령의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어요.

은사적인 성령은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병을 고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계속하여서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은 것은 성령의 능력이에요.

그러나 항상 바다 위를 걷는 게 아니에요.

 

은사는 고정화 되지 않아요.

마치 지갑에도 돈 꺼내 쓰듯이 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주어지기도 하고 안 주어지기도 해요.

이런 은사는 성도가 봉사하고 충성하는데 간섭하세요.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에요.

 

예를 들어서 평상시에는 교회 안에 가난한 형제가 있어도 별 관심이 없이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왠지 그 가난한 형제가 눈 앞에서 아른 거리고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성령께서 은사적으로 간섭하신 겁니다.

그땐 마음이 감동 되는대로 하세요.

이게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은사에요.

 

잠간 살펴보고 갈까요.

 

롬 12:3-9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바울은 믿음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각자 받은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은사를 준 것은 섬기라고 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6절에 그러지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예언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들이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로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을 위하여 식당에서 밥을 하고 교회를 청소하는 분들도 모두가 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요.

청소하는 것도 은사고, 밥하는 것도 은사에요.

가르치는 것도 은사고, 남을 돌아보는 것도 은사에요.

청소하면 낮고 목사는 높고 가 없어요.

직분엔 높고 낮음이 없어요.

 

그런데 이런 은사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에요.

글자 그대로 은사가 주어질 때만 가능한 겁니다.

성경적으로 하면 목사도 성령의 감동이 안 오면 가르치지 말아야 해요.

더 잘 가르치는 분이 계시면 그 분에게 양보하여야 해요.

 

한국교회에선 꿈같은 이야기이지요.

도리어 당회장 목사보다 복음 더 잘 전하면 쫓아내잖아요.

저도 부 교역자 시절에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어요.

은사는 교회를 위하여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때 그때 필요에 따라서 주세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은사적인 성령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요.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장차 심판 하실 때 모습을 잠간 언급하셨어요.

중요하니 찾아봅시다.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보세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요.

이 말은 구원과 상관없이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주여! 주여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냈어요.

이는 마치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 예수님이 12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성령의 권능으로 갖가지 능력들을 행하게 하신 것과 같아요.

 

에피(out)” 성령으로 일을 한 겁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한 일을 앞세우고 왔어요.

이게 불법인 겁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앞세우고 나아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오직 내주하는 성령이 계시는 성도들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 주여! 주여 하고 나아 온 자들은 “에피(out)” 성령으로 행한 일들을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가룟 유다도 행한 기적이에요.

 

믿음이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이지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을 내어 놓는 것이지 자기가 행한 일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에요.

기적을 행하는 일은 불신자를 통해서도 할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도 이런 “에피(out)” 성령의 은사인 겁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 것을 알아요.

귀신도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구원이 된다는 것을 알아요.

 

아는 것하고 믿는 것 하고는 달라요.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신앙이에요.

귀신이 예수를 지식적으로 알 수는 있지만 믿을 수는 없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 쪽에서 할 수가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이건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선택당하지 않는 자들에겐 절대로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팔을 벌려서 막아요.

제발 믿지 말라고 해요.

반대로 선택한 성도에겐 믿도록 밀어붙여요.

안 믿겠다고 하여도 반드시 믿게 하고야 말아요.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된 성도는 한번 하늘에 은사를 맛보고 타락할 수가 없어요.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애초부터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을 박는 그런 일들을 자행하게 되는 겁니다.

 

“엔(in)”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는 율법 지켜서 구원 받겠다고 하지 않아요.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낳아요.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는 다시는 율법이라는 종에 멍에를 매고자 하지 않아요.

율법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종이에요.

종은 유업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구원을 못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 신앙 아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자이므로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초보를 옛 언약이라고 한다면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것은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란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이 완전한 곳이에요.

예수 안은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요.

그러니 본문의 문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두지 말고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해요.

 

예수님의 피는 완전한 속죄의 피에요.

미흡함이 없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완전하게 속죄를 받았기 때문에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일체의 행위를 포기합니다.

여기서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안 믿어지면 자꾸만 내 쪽에서 뭔가 보태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되어야 한다고 해요.

성화는 예수 안에 들어가면 성화가 된 겁니다.

 

성화라는 말이 뭡니까?

거룩하게 변화 된다는 말이지요.

이건 완료형이 아니고 미 완료형이에요.

미완료가 되다가 보니 인간 쪽에서 완료를 시키고자 노력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의 신앙은 항상 미완료로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룩은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에요.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거룩이란? 우리의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역을 말해요.

 

구약의 성막에 보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어요.

성막에 종사하는 제사장도 있어요.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은 기름을 바르는 겁니다.

 

그릇이든 사람이든 기름이 발라지면 그때부터 거룩한 것이 되어요.

그 사람이나 물건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기름이 거룩하게 했어요.

기름은 다름 아닌 성령을 상징해요.

 

그러니 지금도 성경의 기름 부음을 받으면 그 사람은 거룩해졌어요.

성령이 예수와 한 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에요.

예수님이 거룩한 분이니 예수님에게 붙은 성도도 거룩한 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 안이 거룩한 곳이에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성화하여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아니 이미 예수의 피로서 거룩해졌는데 새삼스럽게 뭘 또 거룩해지려고 합니까?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은 아직 거룩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에요.

 

서울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입학해야지! 입학해야지! 하지 않아요.

못 들어간 가짜들이 입학시험 준비하는 겁니다.

아니~ 이미 입학을 해서 서울 대학생이 되어서 강의를 듣고 있으면서 야! 입학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가짜대학생이에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거룩한 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거룩을 만들고자 하지 않아요.

거룩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시 죽어서 거룩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단번에 모든 것을 완성하셨잖아요.

또 죽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를 두 번 죽이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을 전 나무라지 않아요.

말씀대로 살면 좋지요.

신자가 되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애를 써야지요.

하지만 그걸 믿음으로 내어 놓는 것은 반대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가 된다거나,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거나,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겁니다.

 

의니, 영생이니, 영광이니, 거룩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진 완성품이에요.

의와, 영생과, 거룩은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우리가 만들 것이 아닙니다.

 

의니, 영생이니, 거룩은 완료이지 미완료가 아니에요.

이미 예수 안에 있으면 완성되었어요.

의니, 영생이니, 거룩이나 구원은 이미 완료가 된 상태에요.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어요.

부족한 것이 없어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지 않아요.

 

이것이 믿어지면 편안하게 감사할 수가 있는데 안 믿어지면 복잡해요.

안 믿어지면 자기가 뭔가 이루어야 해요.

안 믿어지면 오늘 본문 같은 말씀을 가지고 보아라! 밭이 하늘에 비를 받아서 채소를 내지 않으면 불사름을 당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농부가 기뻐하는 채소를 내야하지 않겠느냐! 라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내가 뭔가 이루어내어야 하는 것으로 남게 됩니다.

내 열심에 따라서 결과가 결정이 되어지게 됩니다.

구원도 미완료로 남게 되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얼마나 불안 불안 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씨 뿌리는 비유를 잘못 들어 왔어요.

시중에 나와 있는 설교 집들을 보면 거의 다 엉터리에요.

 

인간들 쪽에서 본문을 해석하니 인간 열심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 쪽에서 말씀하고 있지 인간의 일함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인간 쪽에서 해석을 하니 인간들이 뭔가를 해야 하는 식의 해석을 내어 놓는 겁니다.

 

돌작 밭이나, 가시 밭이나, 길가 밭이나, 좋은 밭을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지요.

그래서 마음에 돌맹이를 빼내고 가시를 배내라고 하잖아요.

마음을 좋은 밭처럼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이런 설교를 들으면 그래 마음속에 돌을 제거하자!

마음을 부드럽게 하자! 라고 다짐을 합니다.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하겠다고 얼마나 다짐을 했습니까?

 

하지만 다짐한 대로 살아집니까?

안 살아지지요.

마음으로 다짐하는 것은 이상이고, 사는 것은 실제에요.

이상과 실제는 하늘하고 땅 만큼이나 달라요.

 

마음으로는 원수가 주리면 폼 나게 먹이고 축복하고 싶어 해요.

그러나 실제 원수를 만나 보세요.

잡아 죽이고 싶어요.

본능적으로 미움이 생기고 시기가 생겨요.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벌써 죽였을 겁니다.

 

마음은 항상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면서 살고 싶지요.

그러나 몸은 그 반대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해요.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책하지 마세요.

이건 인간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셔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겁니다.

죄인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는 것이에요.

이처럼 우리는 항상 마음은 천국에 가 있지만 몸은 지옥에서 놀아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럼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이 뭔가 알아봅시다.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밭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밭을 관리하는 농부가 있느냐 없느냐 에요.

좋은 밭이란? 농부가 관리하는 밭이에요.

농부가 관리를 하기 때문에 결실을 맺는 겁니다.

농부가 때를 따라서 잡초도 뽑아내고 이랑을 내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서 농사를 짓는 겁니다.

결실은 농부의 몫이지 밭의 몫이 아니에요.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더러 좋은 밭이 되라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너희도 나쁜 밭인데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농사를 지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거예요.

신앙생활에는 우리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 자랑 거리예요.

 

행여 여러분이 봉사라도 하고 충성이라도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아세요.

물론 인간들은 악해서 마음에도 없는 것을 오기로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오기로 한 것은 자기 의가 남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은 감사가 되고 잊어버려요.

 

봉사 충성을 감사하면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하셔서 한 겁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공급으로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한 봉사와 충성은 자기 자랑할 것이 없어요.

하고도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러니 일을 한 것은 동일한데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과 자기 의지나 각오로 한 것은 결과가 자기 자랑으로 남기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느냐로 달라져요.

하나님의 은혜로 했으면 좋은 밭이고,

자기 의지로 했으면 나쁜 밭인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한다는 옛 언약적인 사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본문에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타락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놓치는 것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율법)에 쓴 증서를 다 도말하셨잖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일체의 신앙행위를 다 태워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자고 하면 안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공연히 죽은 것이 되어요.

 

이러한 것을 마귀가 너무도 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를 섞어서 인간의 자존심도 살려주고 예수도 믿는 방식으로 미혹을 해요.

이름 하여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성화해서 영광 돌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피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고자 해요.

 

바울이 그러지요.

바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사랑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밀려오는 겁니다.

사랑이 밀려오면 왠지 좋아요.

이유도 모르게 좋아요.

 

왜 좋은데! 라고 물으면 몰라 그냥 좋다고 해요.

이게 사랑이에요.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아요.

생각만 해도 좋아요.

이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해요.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했어요.

그리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성령이 이런 사랑을 몰고 왔어요.

그래서 성도가 주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셔야지만 생겨요.

 

스데반이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부인 할 수가 없었던 것도 다 이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받은 자는 다시 타락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나중에 불살라지면 어쩌지 라는 근심 걱정은 버리세요.

만약에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4장을 봅시다.

 

요일 4:16-18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담대함이 생긴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몰려오면 두려움이 사라져요.

사랑이 오면 내가 안 보이고 예수님이 보여요.

 

예수가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내 행위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크게 보여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커다란 보자기가 되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감싸고도 남음이 있음을 알게 되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어떠함으로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염려근심이 없어요.

구원에서 짤린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내가 잘못해서 구원이 취소된다거나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구원이 짤린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래서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담대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안에 거하면 거짓 종들이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하면 짤린다고 하는 공갈에 넘어가지 않아요.

이상하게 배짱이 생겨요.

이건 객기가 아니에요.

 

믿음은 배짱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다는 배짱이에요.

 

로마서 8장을 보고 마칩시다.

 

롬 8:29-3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지요.

 

미리 아심은 창세전이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장차에요.

 

창세전에 아신 자를 역사 속에서 예수를 믿게 하여서 의롭다 하시고,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영화롭게 해 주세요.

이건 확정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어떤 놈들이 송사를 하고 정죄를 한다고 하지요.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놈이 누구인가요?

마귀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에요.

 

무얼 가지고 송사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꼬라지를 가지고 송사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너 그 따위로 살면 구원에서 짤린다고 공갈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갈을 누가 막아 준다고 합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세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의 구원은 고래심줄보다도 더 질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구원의 문제는 흔들리지 마세요.

흔들린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니까 흔들리는 겁니다.

 

믿어진다고 하면 당당하게 담대하게 사세요.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세요.

그리하여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부디 이 고래심줄보다도 더 강한 배짱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고래심줄보다도 더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지어낸 공교한 말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에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