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42강. 하나님의 맹세로 얻은 구원

정낙원 2009. 10. 24. 01:28

42강. 하나님의 맹세로 완성된 구원 (히 6:13-20)

 

히 6:13-2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모든 말씀들이 다 은혜롭지만 특별히 더 은혜로운 말씀들이 있잖아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어떤 말씀은 더 친근하게 은혜로 다가 올 때가 있어요.

 

우리가 성경을 많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말씀들이 살아서 운동하기 때문입니다.

전 과거에 말씀이 살아서 운동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하면 괜히 지어낸 말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 말씀이 살아서 운동한다는 것이 믿어지는 겁니다.

말씀 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져요.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어떤 시험거리나 근심 걱정거리들이 생기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 불현듯이 말씀이 생각이 나면 그동안 문제가 커 보이던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가 있어요.

생각만 바꾸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히 고민을 했구나를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어요.

 

만약에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그 문제를 붙잡고 씨름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 생각나면 그렇게 어렵고 심각하다고 여긴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져요.

복음을 전하다 보면 내 의중과 상관없이 남에게 모함을 받고 억울한 말을 듣고 욕을 들을 때가 참 많이 있어요.

 

그 때마다 말씀이 위로를 해 주는 겁니다.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과 같이 내 생각과 뜻을 교정시켜주고 마음에 분노도 사라지게 해 주세요.

이런 상태를 일컬어 말씀이 살아서 달음질을 한다고 합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을 보내서 그 위경에서 구원하다고 하셨어요.

이게 믿어져요.

 

시 107:18-20절.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보세요.

무슨 문제가 생겨서 밥맛도 없고 살 의욕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서 그 위경(危境)에서 건지신다고 하잖아요.

이는 말씀으로 위로받게 해 주신다는 뜻이에요.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말씀으로 문제를 이기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저기 바위가 있어서 항해 하는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바위가 나오니까 사공이 하나님께 바위를 치워달라고 기도했어요.

사공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싶어서 바위를 없애 달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위를 치워 줄까?

아니면 물을 깊게 해 줄까?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서 설명을 해 주는 겁니다.

바위는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갖가지 문제들이고, 물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때그때 문제를 해결해 줄까?

아니면 문제가 문제 아닌 것으로 여겨지도록 해 줄까?

 

여러분이 대답을 해 보세요.

무얼 구하여야 할까요?

세상은 고해(苦海)에요.

고생의 바다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그날까지 갖가지 문제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때그때마다 문제를 해결 해 달라고 기도를 할 것입니까?

아니면 문제가 문제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해 달라고 기도 할 것입니까?

 

어느 것이 좋을까요?

이 시대 교인들의 신앙 양상으로 본다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할 겁니다.

목사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심한 표현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에서의 기도는 자기 소원을 성취해 달라고 떼를 쓰는 수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조금 있으면 수능시험이니 아마도 지금부터 교회마다 자녀들 시험 점수 잘 나오게 해 달라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도한다고 난리일 겁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내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세상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우리도 엉터리로 기도하고 있어요.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 이야기가 있지요.

발목까지 잠긴 사람이 있고, 무릎까지 잠긴 사람이 있고, 허리까지 잠긴 사람이 있고, 온 몸이 잠긴 사람이 있어요.

물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에 폭 잠기면 세상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은혜가 충만 할 때는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은혜가 없으면 모든 게 문젯거리로 보여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도 그러해요.

시험 없는 인생은 없어요.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길 능력만 있으면 시험거리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이 커 보이면 세상이 두렵지만 세상이 작아 보이면 두렵지가 않아요.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사건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가 욕하면 까짓것 어때 예수님도 욕을 먹었는데!

살기 어려우면 그래 잠시 지나가는 정거장에 불과한 인생사인데!

내가 가야할 곳이 따로 있는데 뭐!

복음 때문에 고생 좀 하지 뭐!

그러면 의외로 담담하고 쉬워져요.

 

그러지 않고 난 잘 살아야 돼!

난 행복하여야 해!

난 고난 받지 않아야 해!

난 남에게 인정받고 항상 으뜸이 되어야 돼! 라고 하면 만사가 짜증이 나고 모두 원망이 되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기보다 그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는 말씀을 주세요.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말씀이 역사를 하면 야!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울고불고 했나 싶을 정도로 작게 느껴져요.

 

성도에겐 말씀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에요.

그러니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하면서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하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다스리면 세상이 작게 보여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듯이,

말씀으로 위로 받는 경험도 스스로 체험해 보아야 해요.

그래야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이 실제로 와 닿게 되어요.

하나님과 많은 부대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일하심도 깊이 알게 되어요.

남이 만난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가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시험을 많이 당해 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살아가는 게 쫓기지 않고 여유로워요.

조그마한 일에 핏대를 세우고 악악거리는 사람들은 아직 얕은 물가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미친 여자 널 뛰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요동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까 까칠해지고 살아가는데 넉넉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푹 젖어 들어야 하는데 요동치 않는데, 양념이 배지 않은 겉절이 김치같이 조그마한 일에도 펄떡 펄떡 뛰는 겁니다.

이게 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욥이 그러잖아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고난을 통하여서 만나고 난 후 이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된다고 하잖아요.

이는 하나님이 방관하고 계신 분이 아니고 우리 삶 속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책 속에 가두어 두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책 밖으로 튀어 나와서 나의 현실에서 항께 동행하심이 되어야 해요.

사도바울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라고 한 것도 다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이에요.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 줄 몰라요.

그냥 관념이고 추상적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활력이 없고 무미건조한 겁니다.

책 속에서만 하나님이 있지 전혀 자기 삶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화석화 되어 있어요.

죽은 하나님인 겁니다.

 

그러니 말로는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실제 속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해요.

교회 다니는 것을 동호회 모임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다 이런 부류의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신앙이 좋은 사람은 교회 생활도 충실하게 해요.

 

성도가 말씀을 보고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는 말씀이 살아 있는 능력으로 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함이에요.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고 내가 십자가 피로 용서 받은 자라야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내가 있어야 해요.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나여야 하고,

삶에 지쳐서 살아갈 의욕을 상실하고 사람 만나는 것이 싫어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 몰래 물 길러 나온 수가성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책 속에 예수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먼 산 불 보듯이 하지 말란 말입니다.

성경을 그냥 소설 읽듯이 하지 말란 말이에요.

 

성경은 내 피이고, 내 생명이고, 내 눈물이고, 내 삶에 이야기에요.

말씀을 늘 가까이 하다가 보면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그 말씀이 생각나서 이기게 되어요.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 겁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에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말씀이 듣고 싶고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으니까 방주를 짓게 된 것과 같아요.

믿음이 방주를 짓게 하신 것입니다.

 

산상보훈의 팔복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해지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온유해지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이 진리로 깨끗해지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긍휼이 여김이 나오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화평이 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기쁜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만드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이런 것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겁니다.

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되어 있어요.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나타나는지 보면 되어요.

 

괜히 없는 사람 깔보지 마세요.

내게 이런 것이 나오면 아! 주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구나! 라고 감사하세요.

제발 잘난 척 하지 말고 까불대지 마세요.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믿으니까 잘난 척 하고 까불고 나대는 것입니다.

제발 자기 주제를 좀 아세요.

 

믿음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니 잘난 척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도 하나님의 것이에요.

지금 깨달았다고 영원히 지속된다고도 믿지 마세요.

말씀이 깨달아지고 기억나게 하시는 것은 우리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 준비를 해도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려면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걸 알기 때문에 다 아는 것처럼 교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은 더 은혜 속으로 들어가고,

복을 받지 않은 사람은 점점 더 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선 있는 자는 더 있게 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하는 겁니다.

세상 말로 복 받을 자는 복 받을 짓을 하고, 매 맞을 자는 매 맞을 짓만 골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어요.

얼마나 행복한 말씀인지 몰라요.

행복을 느끼셔야 합니다.

설교하는 저나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나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황홀한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마음을 흥분시켜 주시리라는 바램으로 기도하면서 말씀을 상고해 보도록 합시다.

 

그럼 본문을 살펴봅시다.

 

지난 시간 성도의 구원에 확실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의 구원이 취소 될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섬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이 보살피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완성 안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더 확실하게 도장(印)을 찍어 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을 성도의 구원으로 비유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란? 육적인 것입니다.

당시에는 문자적으로 자손이 번성하고, 물질의 축복을 받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었어요.

 

구약은 육이고, 신약은 영이에요.

구약에서의 육적인 복이 신약에 오면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신약에 오면 영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신약적인 의미에서 우리들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맹세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맹세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은 자기 노력하고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짜로 받은 거에요.

그래서 복인 것입니다.

 

맹세란? 다짐이고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맹세한 쪽에서 반드시 약속한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의지이고 각오에요.

누구의 맹세인가요?

하나님의 맹세에요.

 

하나님이 맹세를 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뜻입니다.

무슨 맹세를 했나요?

아브라함을 복의 조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반드시 구원을 해 주겠다는 맹세입니다.

 

하나님은 한다고 하면 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의 별명이 창조주세요.

창조주는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이루어내세요.

그러니 하나님의 맹세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맹세를 할 때는 자기보다 높거나 강한 사람을 담보로 해요.

이 약속을 나보다 강한 분이 책임져 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친구에게 무슨 약속을 할 때 우리 아버지 이름 걸고 할게!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못 지키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지킬 것이다! 라고 자기 아버지 이름을 걸고 자기가 한 약속을 믿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이에겐 아버지는 자기 말을 보증을 서 주는 능력이에요.

그러면 약속을 받은 상대방은 그 아이의 말은 믿지 못하더라도 그 아버지의 능력을 보고서 믿는단 말입니다.

 

맹세는 그가 한 약속을 지켜 낼 수 있는 사람만 할 수가 있어요.

어린아이가 맹세하는 것을 부모는 믿지 않아요.

아이가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아이는 맹세할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우리더러 맹세하지 말라고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한 맹세를 지켜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켜준다고 맹세 했다가 부도내고 말았잖아요.

 

우린 우리 믿음을 우리가 지켜낼 수가 없어요.

우리는 시절을 쫓아서 늘 변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목숨 걸고 맹세를 한다고 하여도 안 믿어요.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하나님께 한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된다고 해요.

그러나 이건 사기에요.

하나님은 우리 서원을 받지 않아요.

밥 먹듯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인의 서원을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받겠어요.

 

서원한 것 안 갚았다고 하나님이 서운해 하시지 않아요.

예수님이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 했다고 서운해 하시지 않았어요.

이미 아시기 때문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준 것입니다.

아무 문제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맹세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실 때는 하나님 이름을 걸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말하기를 하나님 보다 더 큰 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한 약속을 안 지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어요.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시는 겁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인 아브라함 때문에 자기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잖아요.

자기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맹세는 반드시 지켜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야! 내가 널 구원시켜 줄게!

그러면 끝이에요.

사건 종결이에요.

약속 속에는 이미 종결된 것을 담고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약속을 완료로 보지 미완료로 보지 않아요.

믿음을 받지 않으면 약속을 미완료로 보기 때문에 중도에 잘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면 반드시 해 내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못하는데,

첫째가 자기가 한 맹세를 취소하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짓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취소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한다!

그럼 끝이에요.

한번 뱉은 말은 취소도 못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하나님이 맹세를 했다고 하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맹세를 “영혼의 닻”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닻이란? 배를 바다에서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바다는 물결이 늘 일어요.

물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조류에 따라서 흘러요.

그렇기 때문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무슨 작업을 할 땐 반드시 닻을 내리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닻이 바닥에 꽂혀서 배가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겁니다.

이건 마치 강아지를 줄로 매어 놓는 것과 같아요.

강아지는 그 줄을 반경으로 해서 움직여요.

도망가고 싶어도 못가요.

 

성도의 구원이 이와 같다고 합니다.

성도를 약속이라는 줄이 묶고 있어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 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맹세가 모가지를 꽉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의 구원은 인간 쪽에서 취소시킬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천국에 가!

그러면 그 말씀이 곧 내 모가지에 개 줄처럼 묶여져서 천국으로 끌거 가는 겁니다.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요.

왜냐하면! 나를 묶고 있는 줄이 천국 마당 쇠 말뚝에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요.

이게 믿어지니까 개뿔도 없으면서 큰 소리치고 사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의 구원의 줄을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이라는 말뚝에 묶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건 도망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망 가 봐야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넘어져도 천국 마당이에요.

예수님이 천국에 있으니까 우리도 천국 마당을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손오공이 도망가 보아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듯이 말이에요.

 

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런 말씀에 감격이 안 되면 어떤 말씀에 감격이 됩니까?

전 이런 말씀을 보면 한 시간 내내 이 말만 하고 싶어요.

이게 믿어지면 다른 말이 필요가 없어요.

한 시간 내내 듣고 또 들어도 지겹지가 않아요.

 

사람들이 동일한 말을 지겹게 여기는 것은 생명으로 듣지 않고 지식으로 듣기 때문이에요.

지식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동의어 반복을 하면 지겨워해요.

또 그 소리 한다고 짜증을 내요.

우리 뇌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식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항상 동일한 것을 원해요.

늘 먹던 음식을 찾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각각의 생명에게 먹거리를 주셨어요.

평생 동안 같은 것을 먹도록 해 놓았어요.

그러므로 생명은 새로운 것을 달라고 하지 않고 늘 먹던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라고 해요.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가 않아요.

들을 때 마다 달콤하고 감미로워요.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 지겹고 짜증이 나요.

들으면 역겨워요.

동일한 말인데도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라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고 싫증나지 않고 좋아요.

예수의 십자가가 듣기 싫다고 한다면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기 않기 때문에 듣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 살아 갈 수가 있는지 육적인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겁니다.

십자가 말고 인간들이 뭘 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가 북치고 장구치고 춤까지 추겠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북치고 장구 치고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박수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우린 구경꾼이란 말입니다.

 

구약에서 그러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너희들은 가만히 지켜보라고 하잖아요.

홍해를 가르고 대적들을 물리치고 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대적을 멸하는지 구경하라고 하잖아요.

홍해 사건은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새롭고 신 길을 내신 것입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말할 수밖에 없어요.

 

야! 하나님이 날 구원 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 했단 말이야!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실거야!

구원은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이게 믿어지면 신자이고 안 믿어지면 불신자인 겁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왜 복음이 되느냐 하면 성도의 구원을 하나님이 쥐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구원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하였다면 우린 벌써 상실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고삐를 쥐고 계신단 말입니다.

우리더러 구원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지켜내세요.

우리 기분에 따라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얼마나 안심이 되고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말이 그렇게 싫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준다는 것을 싫어해요.

그 이유는 자기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난 뭐냐? 라고 짜증을 내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게 뭐냐 하면 자기가 배제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무슨 일을 해도 항상 자기가 중심에 있고 싶어해요.

그래서 믿음도 구원도 은혜도 영생도 자기가 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본성은 무엇이든지 자기 소유화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이든, 구원이든, 은혜이든 그 어떤 것도 자기가 관리하고자 해요.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자기 손에 붙잡고 있어야 안심을 하는 육신의 본성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 손에 넣어야 자기 것으로 생각해요.

아무리 약속을 하여도 손에 잡히기까지는 불안한 겁니다.

이런 마음이 구원도 자기 소유화 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율법 신앙을 좋아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은 자기가 모든 것을 관리하잖아요.

내가 기도하고, 내가 전도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믿고, 내가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은혜도 자기가 따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비결이니 축복 받는 비결이니 성령을 받는 비결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겁니다.

세상에 은혜니 구원이니 축복이니 하는 이런 것은 전부 하나님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인데도 인간 쪽에서 받아 내는 비법이 있는 줄 알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뭐든지 자기가 하여야 안심이 되는 것은 인간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불신앙은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여야 확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강조하거나 인간 쪽에서 뭔가 이루고자 하는 교인이나 이를 가르치는 목사는 가짜라고 보면 틀림이 없어요.

 

오해 할까봐 못을 하나 쳐 놓고 갑니다.

가짜라고 하면 정죄하고 심판하는 극단적인 말이니까 믿음이 없다고 합시다.

제가 가짜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로 들으세요.

믿음이 연약하여서 그렇다고 합시다.

 

성경은 인간 쪽에서 가능성을 주장하는 신앙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해 주시는 겁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붙잡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근심 걱정이 되어요.

행여 살아가다가 범죄라도 저지르면 양심이 참소하잖아요.

너 그러고도 신자냐! 라고 하면 야! 이러다 짤리는 건 아닌가?

온갖 나쁜 생각들이 다 든단 말입니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것은 완료된 것을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료란? 중간에 포기 되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해요.

실패가 없어요.

이미 끝났어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이런 겁니다.

이미 완성품으로 주어졌어요.

구원의 닻이 천국에 계신 예수라는 말뚝에 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완성품을 하나님께 믿음을 받아야 믿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안 주시면 이게 안 믿어져요.

그러니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불안한 겁니다.

불안하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이 뭔가를 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서 고 3 학생이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이미 합격을 하였다면 남은 학교생활을 두려움 없이 재미있게 할 수가 있겠지요.

대학 입시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까요.

만약에 입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수시 합격증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그래요.

자기 백성들에겐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 되었다고 고지해 주셨어요.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당신은 예수 안에서 이미 구원이 완성 되었습니다! 라는 합격통지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구원에 대하여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지난 시간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섬기기 때문이라고 했던 겁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우리의 원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에서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세요.

우리가 할 일이란 없어요.

속된 말로 우리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이에요.

 

구원 문제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우리 행위로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 밖에서 결정이 되어졌어요.

이미 우리와 상관없이 끝난 거란 말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은 성도의 구원 문제를 에서와 야곱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롬 9:11-13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보세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님의 택하심” 이에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라는 말씀이에요.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하고 택하심으로 된다고 하지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안해하는 것은 이게 안 믿어지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이 없어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아요.

 

전 개인적으로 인간의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거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거룩해 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보아요.

이건 마음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안에 성령이 안 계시기 때문에 자기가 뭔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뭔가 하여야 한다는 것은 미완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완성품을 준적이 없거든요.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료된 것을 주셨어요.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봅시다.

 

롬 8: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엡 2:4-6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로마서에서는 미리 정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지요.

그리고 에베소서에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건 분명이 과거 시제로서 끝난 사건이에요.

 

그런데 다른 곳엔 구원을 이루라!

또는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말씀들이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근거해서 말합니다.

봐라! 성경엔 분명히 구원이 현재시제(現在時制)와 미래시제(未來時制)로 나와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 문법을 들고 나와서 구원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과거(過去) 구원, 현재(現在) 구원, 미래(未來) 구원이라는 3 시제(時制) 구원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겁니다.

 

이건 모두가 성경을 역사적인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육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수평적으로 길게 늘어졌기 때문에 시작이 있으면 과정이 있고 끝이 있어요.

그러니 역사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면 계속 진행하다가 끝이 나야 비로소 완료 즉 완성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역사세계에선 약속이란? 미 완료에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의 본성은 내가 직접 받아서 손에 쥐어야 약속이 이루어 졌다고 생각해요.

육은 약속을 완료로 믿지 못해요.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성취가 되어야 비로소 믿었다고 합니다.

성취 될 때까지 불안 한 겁니다.

 

역사적 관점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이 감사가 안 되고 짐스러워지는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아직 이루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어요.

이게 성화론 자들이 보는 구원관이에요.

“이미와 아직” 이라는 말로 믿어지지 않는 모순을 피해가고자 하는 겁니다.

 

물론 바울도 이미와 아직을 말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미 완료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완료를 미 완료시제로만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삼층천에 있다는 것을 보았어요.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이미 완료 안에 있는 바울이에요.

그러나 역사 속의 바울은 완성이라는 약속을 가진 미 완료로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은 미 완료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료를 보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역사적 개념이 아니고 묵시적 개념으로 말해요.

묵시세계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어요.

이는 고정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정이 되었다는 말은 완성이고 완료란 말입니다.

 

묵시세계는 점진적이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묵시세계는 창조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점진적인 것이 없어요.

완성의 세계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말씀이 떨어지면 즉시로 창조가 일어나요.

너 구원 할게!

그러면 즉시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설명할게요.

역사를 수평적이라고 한다면 묵시는 수직적이에요.

수평이란? 옆으로 길게 늘어진 상태를 말하고,

수직이란?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쭉 내려온 것을 말하지요.

 

시작과 끝이라는 길게 늘어선 수평적 구조에 놓여 있는 역사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고 완성하는 단계가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묵시는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켜요.

마치 창조 사건처럼!

창조 사건이 일어나면 즉시로 거듭나고 구원을 받아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듯이 사건이 일어나면 즉시로 완전해져요.

묵시 안에서 과거 구원이니 현재 구원이니 미래 구원이란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이 일으킨 창조 사건이기 때문이에요.

 

구원은 묵시에 속한 것입니다.

묵시에 속한 구원을 비록 과거 현재 미래 라는 시제로 말하였다고 하여도 시제와 상관없이 완성된 것으로 있는 겁니다.

 

과거 안에 현재와 미래도 있고,

현재 안에도 과거와 미래도 있으며,

미래 속에도 과거와 현재가 있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늘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고, 시작과 끝이라 하고,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한 이제도 있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는 겁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요.

역사의 인식으로 보면 모순적일 수밖에 없어요.

육의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에요.

 

묵시와 역사를 시간 개념으로 이해해 봅시다.

묵시는 하늘세계이고, 역사는 땅의 세계에요.

묵시는 시간이 고정이 되어 있고, 역사는 움직이며 진행되어가고 흘러가요.

하나님은 고정이 되셔서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묵시적인 일을 하는 겁니다.

 

엊그저께 “생활의 달인” 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이럴 때 비유하라고 보여준 것과 같아요.

건빵을 만드는 공장인데 컨베어 벨트를 타고 수많은 건빵들이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달인이라는 분이 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지나가는 건빵 중에 불량품을 탁탁 찍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사람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서 있어요.

그러나 건빵은 컨베어 벨트에 의해서 계속하여서 흘러가요.

달인은 한 자리에 고정 되어 있으니 묵시세계에 있는 것과 같고, 컨베어 벨트에 올려져서 흘러가는 건빵은 역사세계에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참 희한한 것으로 비유하지요.

 

자 이걸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달인과 같이 한 자리에 서 계세요.

움직이지 않고 고정해 계세요.

이게 묵시에요.

묵시 아래 역사라는 컨베어 벨트에 인간들이 건빵처럼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베드로와 바울이나 지금 우리에 이르기까지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꼬챙이 하나 들고 자기 백성들을 탁탁 집어내는 겁니다.

 

야! 아브라함 이리와! 하고 탁 집어내고,

야! 모세 이리와! 하면서 탁 집어내고,

야! 바울 이리와! 하면서 탁 집어내고,

야! 정낙원이 너 이리와! 하고 탁 집어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꼬챙이에 탁 집어내는 순간 이미 구원은 완료 된 겁니다.

이해가 되시는가요.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을 일컬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역사라는 세월이 컨베어 벨트처럼 1년이든, 100년이든, 1000년이든, 2000년이든, 6000년이든 흘러가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묵시세계에선 역사에서의 1년이나 1000년이나 2000년이나 6000년이나 다 같아요.

 

아까 컨베어 벨트에 흘러가는 건빵의 흐름을 시간 개념으로 보면 먼저 흘러간 건빵은 1년이고, 그 다음에 흘러가는 건빵은 100년이고, 그 후에 흘러간 건빵은 1000년이고, 지금 흘러가고 있는 건빵은 6000년 이라고 합시다.

그럼 꼬챙이를 들고 서 있는 달인과 같은 하나님 입장에선 1년이다, 100년이다, 1000년이다, 6000년이다 의미가 없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그래요.

 

땅에서는 1년이 흐르고, 100년이 흐르고, 1000년이 흐르고, 2000년으로, 6000년으로 흘러요.

그림자처럼 늘 변한단 말입니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해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지금 우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이라는 컨베어 벨트에 올려져서 흘러갔어요.

인간들은 살았던 시대는 달라도 모두가 그 흐름 속에 있는 겁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는 지금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서 이전에 살았던 바울을 몰라요.

바울도 이전에 살았던 다윗을 몰라요.

다윗도 아브라함을 몰라요.

아브라함도 아담을 몰라요.

 

그러나 묵시에 계신 예수님 입장에선 아담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지금 우리나 다 같은 방법으로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선 아담이 조상이고, 아브라함이 형님이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세계에선 모두가 동기동창이에요.

아담 할아버지가 아니고, 모세 형님이 아니고, 그냥 우리와 똑 같은 동무들이에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하고 온 것도 시대는 달라도 예수 안에선 동일하기 때문이에요.

엘리야와 모세는 친구에요.

그런 우리도 모세와 엘리야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앞서서 천국에 간 흰옷 입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빨리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자 하나님이 조금 기다려라 너희와 같이 죽어야 할 동무들이 있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면 아담보고 야! 아담아! 너 참 오랬만이다!

야! 모세야! 잘 있었나!

야! 엘리야 너 그때 불 말과 불 수레타고 올라온 기분이 어떻디!

야! 바울 너 무진장 고생했지! 라고 해야 해요.

이해되시죠.

 

고정되어 있는 묵시세계 안에 속한 사람은 어느 시대 사람이나 다 동일해요.

묵시에서 역사 세계의 수천 년이라는 세월도 한 손바닥 안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담도 보았고, 아브라함도 보았고, 다윗도 보았고, 바울도 보았고, 지금 우리도 보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한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묵시적인 존재로서 항상 계셨으니까요.

그러나 역사에 속한 유대인들은 이 말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은 육은 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겁니다.

물론 육에 속한 사람에겐 이 말 조차도 이해가 안 되어요.

 

자 이번에는 묵시와 역사를 공간 개념으로 다시 설명합니다.

여러 가지로 부연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묵시와 역사를 태양과 땅으로 이해해 봅시다.

 

태양은 묵시이고 땅은 역사에요.

묵시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고,

역사는 태양 빛을 받고 사는 땅과 같다고 합시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에서 보면 땅은 어디든지 다 보이지요.

그러니 하늘에 떠 있는 태양 입장에선 땅에 공간은 의미가 없겠지요.

 

그냥 지구가 평면이라고 보세요.

지구가 둥글다느니 천동설이니 지동설이니 하는 것으로 접근하지 말고 그냥 길게 쭉 늘어진 평면이라고 보세요.

그 평면 위에 태양이 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서울에서도 보이고, 울산에서도 보이고, 미국에서도 보이고,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가 있겠지요.

땅에선 한국과 미국은 길게 늘어져 있으니 보이지 않지요.

하지만 우주선 타고 하늘로 쭉 올라가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다 보이겠지요.

이처럼 하늘에서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디서든지 다 보고 있어요.

 

그러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동일하게 간섭하고 계시겠지요.

마치 건빵을 골라내는 달인처럼 여기저기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서 집어내겠지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컴퓨터 자판기를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여기 두드리고 저기 두드리듯이 예수님도 한국에 있는 성도이든, 미국에 있는 성도이든, 아프리카에 있는 성도이든 마구 건드리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성도에게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타나고, 미국에 있는 성도에게서도 나타나고, 아프리카에 있는 성도에게서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타나겠지요.

 

한국에 성도도, 미국에 성도도, 아프리카에 있는 성도도 모두 예수님이 하셨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어느 공간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간섭한 사람은 모두가 동일한 말을 합니다.

한국에 성도도 예수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미국에 성도도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아프리카 성도도 똑 같이 예수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동일하게 구원을 받았다면 동일한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해되시지요.

 

성도가 받은 구원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고 묵시적인 것이에요.

묵시에 속한 것이므로 완료이고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묵시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에겐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창세전에 이미 완성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 있으니 구원을 받게 돠는 것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원어를 동원해서 과거 시제니, 현재 시제니, 미래 시제니 하고 떠들거든 아! 이 사람은 지금 역사에 속한 사람이구나! 라고 상대하지 마세요.

역사에 속한 사람에게 아무리 묵시가 어떻고 하여도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러나 묵시에 속한 사람은 척 알아먹어요.

아하! 그렇구나!

“유레카” 라고 기뻐한단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해 하셨다고 치고 이걸 지금 우리가 가장 피부로 느끼는 신앙생활과 연관 시켜서 살펴봅시다.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화주의자들 이야기로 말해 봅시다.

성화주의자들은 구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이루어 가야 한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아직 남아 있는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성화주의자들은 역사에 속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미완료로 있어요.

구원도 그렇고, 거룩도 그렇고, 영광도 그래요.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고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해요.

물론 구원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해요.

 

모든 것을 우리 쪽에서 뭔가 하여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쪽에서 말씀을 지켜서 뭔가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가 뭘 하여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미완료이고 미완성이에요.

그러니 우리 쪽에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완성을 시켜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은 예수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완제품으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엔 미흡한 것이 없어요.

예수 안에 들어가면 즉시로 거룩하고, 즉시로 영광스러워지고, 즉시로 구원이에요.

점진적인게 없어요.

 

묵시는 어떻다고 했나요.

고정이라고 했지요.

변화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요.

묵시에서 주어지는 것은 떨어지는 순간 완료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내가 널 복 줄게!

그러면 이미 완제품으로 주어진 겁니다.

이러면 성화주의자들은 아직 안 받았잖아요! 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묵시에서 주어진 약속은 그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약속을 했으면 받은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창조의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그러면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즉시로 생겨나요.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야! 내가 널 복 줄께!

그러면 이미 복을 받은 겁니다.

 

묵시에 속한 사람은 이미 받은 것으로 살아요.

묵시 속에선 약속은 이미 받은 것이에요.

왜냐하면! 약속하신 구원이 하나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속한 사람은 자기 손에 붙잡혀야 받았다고 해요.

자기 손에 잡힌게 없으니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믿어지게 하려고 자기가 자꾸만 뭘 하고자 하는 겁니다.

 

안 믿어지면 방법이 없어요.

믿어질 때까지 해야지요.

그러니 계속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겁니다.

이걸 성경은 종(從)의 영(靈)을 받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종은 자기 노력의 댓가로 사는 자에요.

자기 수고와 노력이 없으면 불안해해요.

종은 주인이 시킨 것을 하지 않으면 잠을 못자요.

주인이 무섭게 여겨지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을 법으로 대해요.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일하지 않아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일 안한다고 좇아내는 일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와 아들은 일하는 조건으로 묶여있지 않고 사랑으로 묶여 있어요.

 

사랑 속에는 용서도 들어가 있어요.

말 안 들어도 잘라내지 않는다는 것이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들에 영을 받은 성도는 일을 하든 안하든 상관치 않고 편안하게 살아요.

아들이 일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일과 상관없이 아들의 위치가 유지된다는 겁니다.

이걸 믿는 자가 아들이에요.

 

아들에 영을 받은 성도는 우리 쪽에서 뭘 해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이미 주신 구원으로 감사하며 삽니다.

넘어져도 감사하고 일어서도 감사해요.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들에 영을 받지 않았어요.

왠지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면 잘려나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 되었다고 해도 이게 안 믿어지니 자기가 뭘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또 어렵고 중요한 말인데 잘 새겨들으세요.

성경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은 우리의 순종을 이끌어내고자 함이 아니에요.

이는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들추어내고자 함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이 역설(逆說)을 모르면 성경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요구를 역으로 보지 못하면 하나님께 진노만 쌓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요.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역으로 보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지키다가 망하였어요.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너무 잘 지키려고 하다가 지옥에 갔어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지키지 말라고 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못 지키게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도록 하는 줄 알아요.

이게 마귀가 주는 생각이에요.

이거 오해하지 않도록 잘 새겨서 들으세요.

 

마귀의 주장대로라면 율법을 생명처럼 지킨 바리새인들이 천국에 갔어야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지옥에 보냈어요.

뭐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 상식과 전혀 다르잖아요.

 

왜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지옥에 들어가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됩니까? 라는 의문이 생기지요.

이 의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미를 알면 금방 이해가 되어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하나님 백성이 된 자들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입었을 땐 율법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맹세하심으로 구원을 했어요.

 

아브라함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서 구원한 것이잖아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맹세로 된 것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얻은 구원은 자기 꼬라지하고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앞으로 말씀 지키는 것 봐 가면서 구원 시켜 줄게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구원했어요.

이게 아브라함의 구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어요.

비록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구원받는 데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하나님의 맹세로 지켜지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도 이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맹세로 유지되고 지켜지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도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구원이 되었으니 율법 지킴과 상관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이미 구원 된 자들에게 율법을 주셨어요.

이게 함정이에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걸러내는 시험지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미 구원된 자들에게 율법을 주셨을까요?

이는 율법으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맞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이유는 너희가 이런 악당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죄를 들추어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야 해요.

다른 말로 율법으로 자기가 저주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겁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바탕에는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의 존재 바탕엔 하나님의 맹세가 있어요.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의 존재 바탕엔 예수님의 새 언약이 있는 겁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 간에 맺은 약속이에요.

하나님이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말씀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은 확정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난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되지요.

그건 율법을 주신 취지에서 벗어나요.

도리어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걸 몰랐어요.

지금은 성화주의자들이 이걸 몰라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완벽해 지려고 했던 겁니다.

율법대로 살아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에요.

율법대로 산 것이 죄였어요.

참 아이러니 하지요.

 

성경은 육적으로 보면 모순투성이에요.

모순투성이가 되어야 육에 속한 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이에요.

육에 속한 자는 손에 쥐어 주어도 몰라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십자가에 의미를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인간의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에요.

그러니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맹세를 찾아내지 못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모든 말씀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자 주신 것이에요.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해요.

그게 말씀이 하는 역할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고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근본이 달라요.

말씀대로 사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지만,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같은 말 같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고 말씀이 주는 의미를 안다는 겁니다.

말씀이 주는 의미를 알기 때문에 말씀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지 않고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럼에도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때문인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살고 있으니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사는 것이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점점 거룩해져야 한다고 자기를 갈고 닦고 있으니 자신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예수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예수 밖에서 행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남 말씀대로 사는 것은 우리가 이룰 어떤 목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공로로 살고 있음을 아니 자기가 할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요.

이는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지요.

그냥 하나님 맹세로 구원 됐다,

이게 믿어지면 간단한데!

안 믿어지니까 자기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니까 자꾸만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하니까 이런 비유 저런 비유를 들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맹세로 구원된 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하다가 보니 힘이 드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려니 말이 많고 글이 길어지는 겁니다.

길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 계속해 봅시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안 하면 꼭 할머니들처럼 무조건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단 말이에요.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게 믿음이 아니에요.

왜 믿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앞에 굴복당하여서 토해져 나오는 믿습니다! 가 되어야 올바른 믿습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헷갈리지요!

말하는 저도 헷갈리려고 하네요.

 

아직 이해가 안 되셔서 의아해 하시는데 그 의미를 설명할게요.

잘 듣고 이해하세요.

잘못 들으면 오해하여서 억측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들에 의하여 써졌습니다.

성령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오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에요.

그러니 사도들이 쓴 모든 서신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나온 것이에요.

십자가를 거쳐서 써 졌다는 것은 해석을 십자가로부터 하여야 한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해석을 하면 구약식 해석이 되어요.

구약식 해석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데,

신약식 해석은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에요.

그러니 말씀을 지킵시다가 십자가를 거치면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로 바뀌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바뀌지요.

옛 언약에선 언약 대상이 인간이지만,

새 언약에선 언약 대상이 예수님으로 바뀌었어요.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모든 성경은 새 언약 하에서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은 모두 새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새 언약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보는 것과, 거치지 않고 보는 것의 차이는 극과 극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치지 않고 보게 되면 옛 언약 방식으로 접근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모든 말씀을 내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다가와요.

구약 식으로 보면 인간 쪽에서 뭔가 하여야 하는 행동 강령을 요구하게 되어요.

 

그렇게 되면 말씀 지킴으로 인간 자랑으로 치달아요.

나는 이만큼 지켰다 라는 식으로 나아가서 말씀 지킴이 곧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만들어 버린 단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이만큼 지켰으니 복 주세요 가 된단 말입니다.

말씀으로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 은혜로 산다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말씀대로 산 것이 떳떳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겁니다.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머리를 숙이라고 하는데,

도리어 말씀대로 살았다는 자기 의(義)로 머리를 쳐들고 나오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말씀을 주신 의미가 완전히 뒤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난 저기 있는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시건방을 떨었잖아요.

 

말씀을 지킴에 목적을 두면 반드시 누가 누가 말씀을 더 많이 실천하고 잘 지켰는가? 로 성도 간에 우열(優劣)이 생겨요

인간은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는 종자들이니 결국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식으로 말씀대로 살기 경쟁으로 치닫게 되어요.

말씀대로 많이 산 사람은 상좌에 앉고 못 산 사람은 말석에 앉아서 상좌에 앉은 자들의 똘마니 노릇을 해야 해요.

결국 계급이 형성이 되는 조폭 집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바로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교인들 간에 경쟁의 장이 되고 말았어요.

잘난 자들은 장로나 권사가 되고 못난 자들은 항상 하수인으로 있어야 해요.

 

구약 식으로 말씀을 대하면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주체로 남게 되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아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데 도리어 말씀을 지킨 것으로 의로워지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율법대로 살아서 자신들을 날마다 치장을 했잖아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랬어요.

바울이 십자가를 거치기 전에는 말씀에 순종한 것이 의라고 여겨서 자신이 죄인임을 몰랐어요.

자기가 굉장히 잘난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겁니다.

요즘 식으로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아붙였단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취급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십자가를 거치고 난 후에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았어요.

 

자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인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엔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나타나지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해요.

바울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단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못 만난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니까 자기가 뭔가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에게서 뭔가 의로운 것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자기 것을 자꾸만 쌓아가요.

바울이 배설물이라고 버린 것을 쌓고 있는 겁니다.

누가 그럽니까?

바로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 지자고 하는 성화론 자들이 그래요.

우습지요.

 

죄가 뭡니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거잖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순종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다고 여기겠지요.

 

반대로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 받고 거룩해 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건 예수 밖에서 접근하는 방식이에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아요.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보니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예수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었으니까요.

 

지금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겁니다.

물론 본인들은 모르지요.

이 시대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란 것을 몰라요.

성화주의자들은 절 보고 이단이래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있어요.

그러니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과 동일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으면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요.

본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데 서야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럼 그런대로 사세요! 라고 해야지요.

괜히 하지 말라고 하면 욕을 해요.

머리 나쁜 놈에게 정답을 가르쳐 주면 화를 내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말씀을 보니까 그 말씀들이 전부 자기 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세상에 말씀으로 자기 안을 들여다보니 자기 안에 죄가 가득한 겁니다.

말씀이 점점 더 자기 죄를 드러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랬어요.

자기는 자기 안에 탐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탐내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자기 안에

탐심이 툭 튀어 나오더라는 겁니다.

말씀이 죄를 끄집어내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의 모든 명령들이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이런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죄인이고, 범사에 감사치 않고 불평만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 말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킬 수 없으면 죽어야지요.

그런데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 말씀 앞에 서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높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마워진단 말이에요.

 

이처럼 십자가를 거치고 말씀을 대하는 것과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말씀을 대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알면 모든 게 감사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의롭다고 여기면 만사가 원망과 불평만 쌓여요.

예수 믿는 것이 감사가 안 된다면 그 사람은 뭔가 수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신 사건이잖아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해 주셨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가 정죄함 없이 의롭다 함을 받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를 다 처리해 주셨는지를 알지를 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죄란 기껏해야 율법으로 아는 죄 뿐이에요.

알다시피 율법이 고발하는 죄는 인간의 겉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만 고발해요.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죄는 몰라요.

 

십계명은 인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죄를 고발하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보훈은 인간의 속 마음에 있는 죄까지 다 고발하고 있어요.

신약의 서신서도 동일해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께서 감동케 해서 쓴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는 죄성들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것을 해부해요.

 

히브리서 4장에서 그러지요.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 말씀이 어디를 해부한다고 합니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지요.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마음과 뜻과 생각과 행동까지 다 해부한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이 내어 놓는 모든 것은 죄라는 것을 고발해 준다는 말이에요.

말씀이 인간의 언행심사 모두를 죄로 규명해 내어요.

말씀 앞에 서면 죄 아닌 것이 없어요.

 

아! 이런 생각이 죄이구나!

아! 이런 행동이 죄이구나!

아! 이런 마음이 죄이구나!

다 죄로 드러나요.

 

인간 들 속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몇 군데 살펴보고 마칩시다.

 

롬 1:28-31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엡 4: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갈 5:19-21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막 7:21-23절.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위에 열거된 죄의 모습들은 대부분 인간들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들이에요.

인간들 속에 이런 것들이 들어 있어요.

말씀이 현미경처럼 우리 안에 죄를 속속들이 찾아내 주는 겁니다.

우린 몰랐는데 말씀 앞에 서 보니 내 속에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말씀이 이런 것 하지 말라고 하지요.

명령하잖아요.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하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역으로 하나님은 이런 것이 없는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난 이런 인간을 원한다 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이런 인간이 아니에요.

이런 좌가 없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죄가 이렇게 망가뜨려 놓았어요.

괴물을 만들어 버렸어요.

우린 원래 창조한 인간들이 아니에요.

순백한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인간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인간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과 비교해서 얼마나 틀렸는지를 알아야 해요.

예수님은 위에 열거된 죄가 없어요.

 

천국에 가면 위에 죄들이 없는 사람들만 있어요.

그러나 아담 아래서 태어난 육신을 가진 인간들은 모두가 위에 기록한 모든 죄악들이 다 들어 있어요.

우리가 이런 죄를 처리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약성경에 이런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죄의 성향들을 기록케 하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죄를 처리하셨는지를 알려주시고 계신 겁니다.

 

성도는 신약 성경을 보면서 아! 우리 안에 이러한 죄가 있었구나! 를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게 알아지면 자기 자신의 잘남은 싹 가시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선 말씀을 내가 어떻게 지킬까? 라는 행위 차원으로 접근을 하면 안 되고,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살고 있구나! 라는 은혜 차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가 아니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군요?” 라고 보아야 해요.

“내가 어떻게 말씀을 지킵니까?” 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을 성취하셨습니까?” 라고 보아야 된단 말입니다.

 

말이 참 어려운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십자가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말씀을 지킬 주체가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를 거치고 보면 모든 말씀이 은혜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요.

은혜 아래서는 말씀이 부담으로 오는게 아니고 더욱 더 감사하도록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런 죄인이었고, 이런 죄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았구나! 를 알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행위로 보게 되면 결국 법이 되고, 법은 곧 자아를 확장하도록 역사를 해요.

그러나 은혜로 보게 되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죄인임을 알고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말씀이 내 바깥에 있으면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되지만,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감사가 되어요.

 

옛 언약은 내 바깥에서 역사하지만, 새 언약은 내 안에서 역사를 해요.

내 안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겁니다.

안에 있는 성령이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알려 주시니 안심이 되지요.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여도 안 믿어지는 사람에겐 여전히 하나님 말씀은 지켜야 할 것으로 남아요.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새 언약이 믿어지기 때문에 일체의 수고를 버리는 겁니다.

 

이걸 바울은 아까 아들의 영과 종의 영으로 말했다고 살펴보았잖아요.

아들에 영을 받은 자는 편안하게 안식하고,

종에 영을 받은 자는 눈만 뜨면 뭘 해야 안심이 되어요.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하여도 안 믿어지니 자기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해야 안심이 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가 구원받은 근거를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맹세는 하나님 독자적으로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신 맹세를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 스스로가 번복하지 않으면 취소되지 않아요.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가 없으니 완성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하신 맹세를 지키는데 에는 인간들 노력이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홀로 이루어가십니다.

맹세로 이루어진 구원은 인간들의 노력이나 공로를 필요치 않아요.

 

성경이 구원을 말하면 우린 빠져 있어요.

하나님의 맹세란 일종의 언약이에요.

언약은 언약을 주신 당사자만이 이룰 수가 있어요.

 

성도가 구원을 받는데 주신 언약이 뭡니까?

새 언약이잖아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맺은 거잖아요.

그러니 새 언약도 예수님이 이루어요.

 

새 언약에선 예수님의 살과 피가 구원의 근거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을 위하여 그 어떤 노력이나 조건이나 열심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보탤 것이 없어요.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맹세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졌어요.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같이 부르심으로 선택이 된 구원 받은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자유자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자입니까?

그럼 자유자로 사세요.

자유자로 사는 사람이 자유자입니다.

 

자유자로 삽시다! 라고 하는 것이 자유자가 아니고 자유자로 사는 사람이 자유자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맹세하심이 여러분 속에 잘 박힌 못처럼 영혼에 닻이 되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맹세하심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맹하심이 견고한 닻이 되어서 우리 영혼을 붙잡아 주고 계심이 믿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