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43강. 멜기세덱이 주신 복

정낙원 2009. 11. 4. 01:46

43강. 멜기세덱이 주신 복 (히 7:1-3)

 

히 7:1-3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과거 주일학교 다니면서 호기심이 많았을 때 목사님에게 아담과 하와는 배꼽이 있나요 없나요 라고 물은 기억이 납니다.

알다시피 배꼽은 엄마 뱃속에서 엄마하고 아기하고 연결시켜 하나 되게 한 탯줄로서 엄마 배속에서 태어나야 있는 것이잖아요.

 

이러한 상식으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는 엄마 배속에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었으니까 배꼽이 없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배꼽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은 진리 문제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가지고 시비에 휘말리지 마세요.

 

오늘 본문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배꼽 문제보다도 더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것이라도 있지만,

멜기세덱이라는 분은 배꼽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보다 더 의문에 쌓여 있어요.

멜기세덱은 아예 부모가 없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自存)자란 말입니다.

피조물 입장에서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사전적 의미는 말할 수 있어도 피조물은 실제로 경험할 수가 없는 생경(生硬)한 것이라서 어떤 것이 자존하는 것입니다 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본문이 얼마나 난해한 이야기입니까?

난해함을 중첩이라고 하듯이 한발 더 나아가서 아예 죽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없어요.

 

성경을 펴면 온통 이런 사람 이야기로 가득차 있어요.

인간의 상식으로 멜기세덱을 이해하려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인간의 상식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성경은 전부 이런 이야기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인간들에게 연구해서 알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만약 인간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였으면 모든 인간들이 알아먹도록 인간의 상식으로 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어요.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알 수 없도록 해 놓으신 것은 성경을 아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알 수가 있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누가 성경을 아느냐?

하나님께로 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이해 할 수가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무(無)에서 유(有)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유(有)에서 유(有)가 나와야 해요.

 

예를 들어서 나무를 가지고 의자를 만든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아무 재료가 없는데서 얏! 하니까 의자가 나왔다고 한다면 그건 마술사들이 하는 눈속임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이 이처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들로 가득차 있어요.

 

성경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역사 밖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에 펼쳐 놓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아요.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묵시라 하고, 보이는 세상을 역사라고 합니다.

묵시를 영이라고 하고, 역사를 육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역사 밖의 세계를 역사 안으로 끌어 당겨서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의 말대로 해석하면 보이는 역사 또는 육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묵시 즉 영의 세계로부터 나왔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세계를 말해주고자 만든 시청각교재와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한 시청각교재에요.

 

로마서 1장을 보면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하지요.

 

롬 1: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창세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물 가운데 담아 놓았다고 하지요.

창세란? 인간의 시간 밖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만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만물 속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창세의 능력과 신성이 담겨져 있어요.

이는 곧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세상을 말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靈)의 일을 말해주고 있어요.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肉) 이야기를 말해주고자 성경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왜 이걸 강조하는가 하면,

인간들은 하늘나라를 알라고 주신 성경을 가지고 인간 세상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지요.

“내 나라” 란 예수님의 나라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에서 오셨어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에서 무엇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이야기를 하고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 세상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어요.

저 세상이란? 예수님 나라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입니다.

죄인이 천국 가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죄인이 어떻게 천국을 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잘 살까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아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성경을 가지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좋은 말을 하고 인류평화를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하여도 그건 틀린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 이야기가 담긴 성경이라는 편지를 인간에게 주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편지를 보낸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자 성경을 주셨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편지를 보낸 사람의 뜻과 다른 오해를 하게 됩니다.

 

지금 제가 하는 설교도 동일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제 입장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각으로 해석해서 온갖 억측을 하게 되어요.

설교를 비평하고 판단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비평과 판단을 자기 생각으로 한다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의 말이나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일들이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도 있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이해하였어요.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호 4:7절.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 10:1-2절.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저희는 번성 할수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욕이 되게 하고,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이 쌓고 제단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지금 식으로 번역하면 교회가 부흥할수록 마귀를 좋게 한다는 말이에요.

교회가 세워질수록 마귀의 제단이 늘어난단 말입니다.

개척교회가 하나 세워질 때마다 마귀가 춤을 추어요.

왜냐하면! 교인들이 와서 비는 절간이 하나 더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산당을 짓는 것이 마귀의 전을 짓고 있다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호세아 역시도 몰랐어요.

 

그런데 호세아에게 성령이 임하고 보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산당을 짓는 것이 마귀의 제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외칩니다.

여러분 제발 교회 개척하지 마세요! 라고 외치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한국교회 교인들이 동의하시겠어요?

못 할 겁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저에게 돌을 던질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도 호세아에게도 그랬어요.

너 왜 그렇게 삐딱하냐?

너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 라고 핍박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 이런 말을 하다가 이스라엘에게 이단소리 듣고 죽었어요.

이런 영적인 맥은 항상 흐르고 있어요.

지금도 그대로 교회 안에서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교회 개척하려고 하지 말고 제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라고 하고 있어요.

 

호 6: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외치고 있어요.

제사 지내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좀 알라고 합니다.

 

이게 무서운 게 우상 숭배하는 이방민족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어요.

절간에 있는 중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들에게 하고 있어요.

부처님에게 비는 불자들에게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교인들에게 하고 있어요.

 

자칭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고 있다구요.

뭔가 모순적이지 않나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더러 너 예수 똑바로 알고 믿으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을 바로 알라는 소리에요.

너 예수 제대로 알고 믿고 있느냐! 라고 묻고 있어요.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서 제발 좀 여호와가 누군지 좀 알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너희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가짜란 말입니다.

너희들이 다른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열심히 잘 섬기고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었어요.

너희가 율법을 열심히 지키지만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합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로 비유한 겁니다.

잎만 무성하였지 정작 열매가 없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입술로는 요란한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뭔지를 몰라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뜻이 뭔지를 몰라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니 십자가 앞에 나와서 십자가와 반(反)하는 짓을 하고 있어요.

열심히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겠다고 하고 있어요.

십자가를 모르니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니 십자가와 원수 되는 것을 구하고 있어요.

바울은 자기 배를 위하고 땅에 일을 구하는 것을 십자가 원수라고 했어요.

십자가 앞에서 옛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십자가를 가지고 옛 사람을 도살할 양처럼 살찌우고 있으니 십자가의 원수들이지요.

 

하기야 초대교회 때도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었으니 지금이야 오죽 하겠어요.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다른 예수를 믿고 있어요.

교회마다 절간에서 부처를 섬기듯이 예수를 믿고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을 주술처럼 외우는데도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성경은 열심보다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알기를 바라는 겁니다.

왜 잘못된 예수를 믿고 있느냐 하면 성경을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세상 이치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자증하기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 기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성경을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학문으로 해석이 되어진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의미가 사라지게 되어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신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해석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아무나 성경 해석이 안 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고전 2:8-10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자들이 누구입니까?

최고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잖아요.

 

이걸 세상 관원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잘난 세상의 지혜로 예수님을 몰라보았어요.

기껏 한다는 것이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다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인간들은 가장 지혜롭게 처리하였다고 한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으로 드러나고 만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인고 하니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들만 알아먹게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 세대의 관원들이 하나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어요.

유대인들이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십자가에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죽였어요.

 

지금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해도 알아먹지를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해요.

오로지 성령을 받은 성도만 알아먹게 되어 있어요.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달라요.

예수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 지식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적 동의는 말쟁이가 되지만 마음으로 믿는 것은 삶으로 살아가요.

이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잇지 않고 능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능력이란? 살아가는 것이란 뜻입니다.

 

신학적으로 아는 것하고 신앙을 달라요.

신학은 지식이고 신앙은 삶이에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지식은 죽은 것이에요.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신학(神學)이란? 성경을 학문화 한 것을 말해요.

학문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학문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이성적이어야 해요.

신학의 다양함이 일어나는 것은 각자가 보는 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도 수많은 해석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난 이렇게 본다.

아니다 난 저렇게 본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에서 하는 해석이 다르고 진보주의에서 하는 해석이 달라요.

모두가 자기들의 가치관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단마다 성경 해석이 다른 이유가 자신들이 정한 틀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학문은 가능성을 다 동원하여서 해석 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마다 깨닫는 것이 다를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학문이에요.

학문은 생명이 없어요.

그냥 말장난이에요.

지식 자랑이에요.

 

성경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아요.

성경은 어떤 틀로 해석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묵시 세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상 밖에서 오신 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피조에 속한 자들은 피조 밖 창조에 속한 이야기를 이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누구입니까?

한 고집하잖아요.

반드시 이해하고 말거야!

그래서 성경을 전부 자기들 생각으로 난도질 하고 있는 겁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이성적으로 비평하고자 해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전부 비유적으로 상징적으로 신화화해서 해석을 합니다.

이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래요.

 

성령을 받으면 그냥 믿어지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니 전부 모순으로 보이는 겁니다.

모순을 넘고자 이성으로 비평하는 겁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해서 그 모순을 넘어가고자 하는 거예요.

 

성경이야기는 믿을 일이지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 스스로가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인간들이 분석하여도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비이성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두어야 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갖가지 번역본들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갖가지 번역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새로운 번역본들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훼손이 되어요.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게 하려니 인간의 이성을 동원해서 번역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무서운 것은 쏟아져 나오는 번역본마다 성경의 주체를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변질시켜 놓았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에 포카스를 맞추지 않고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 식으로 맞추어져 있어요.

 

많은 부분들이 성경의 주체가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바뀌어져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고 이런 일들을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데, 이를 역으로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개정을 해 버렸어요.

그러니 믿을 것은 없고 어떻게 하여야 할 것만 있는 겁니다.

 

복음이 주께서 이렇게 하셨군요!

고맙습니다! 할렐루야! 가 나와야 하는데,

아!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니 아이고 죽겠네! 라는 장송곡(葬送曲)이 나오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기쁘지 않아요.

 

설령 기뻐한다고 하여도 자기가 행한 것을 근거해서 기뻐요.

전도라도 하고, 봉사라도 하고, 헌금이라도 듬뿍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은 것이 있어야 교회 오는 것도 발걸음이 가볍고 신이 나요.

반대로 이런 것 없으면 교회 가기도 싫어요.

 

결국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행함을 믿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뭘 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벌이셨는지 알고 감사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를 깨달아 가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가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이 어째서 나에게 구주가 되시는지 알아가는 거예요.

 

신앙생활은 주체가 누구냐? 의 싸움이에요.

 

“나” 를 “나” 되게 하는 주체가 “나” 냐? 아니면 “예수님” 이냐?

“내” 가 “나” 를 살게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 이 “나” 를 살게 하느냐?

“내” 힘으로 사느냐? 아니면 “예수님” 의 힘으로 사느냐? 의 싸움이에요.

 

내가 나를 책임지는 인생은 힘들고 고달파요.

하지만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인생은 쉼을 얻어요.

내가 나를 책임지면 죽음이 두렵지만,

예수님이 책임져 주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요.

 

구약은 옛 언약을 바탕으로 쓰였고,

신약은 새 언약을 바탕으로 써졌어요.

옛 언약에서의 말씀을 지킬 주체가 인간이지만,

새 언약에선 말씀을 지킨 주체가 예수님이에요.

 

옛 언약에서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가 되어요.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우린 안 되는데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가 나와야 해요.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군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옛 언약에선 내가 주체이지만,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주체에요.

 

성령이 임하면 모든 말씀의 끝에 예수님이 나오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모든 말씀 끝에 자기가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죄인인 자기 몸으로 받으니 죽지 않고 배기겠어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은 죄 없는 분만이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하나님 말씀을 받으신 겁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저주의 화살을 예수님이 방패가 되어서 다 받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방패 때문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 그 어떤 말씀 앞에서 예수라는 방패를 앞세우고 나아가야해요.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지켜 주셨습니다! 라고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난 예수님 때문에 이런 말씀 앞에서도 살 수가 있습니다! 가 고백 되어져야 해요.

 

이러한 고백이 하나님께 복(福)을 받아야만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빈 복(福)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가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멜기세덱이 느닷없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축복(福)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복(福)을 원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복(福)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멜기세덱이 일방적으로 준겁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멜기세덱이 복을 주관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멜기세덱이 복에게 야! 복아! 아브라함에게 가라!

그러면 복은 아무소리 못하고 예! 하고 아브라함에게 온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축복 받는 비결이라는 말은 전부 사기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을 빌리면 복은 멜기세덱이 주는 것이지 인간들 열심으로 따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멜기세덱이 일방적으로 주셨어요.

아브라함은 엉겁결에 복을 받은 겁니다.

 

이삭을 복이라고 합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이 자기들 능력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아들은 준다고 해도 비웃었어요.

우리 생각과 같이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고마 됐습니다! 라고 비웃었다구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의 비웃음을 감내하시면서 이삭을 줬어요.

이삭이 사라의 태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삭이라는 복을 명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삭이 다 늙어서 쪼그랑 방탱이가 된 할머니 자궁 속에서 나온 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복 받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복인 겁니다.

만약 복 받을 짓을 해서 받는다면 그건 댓가에요.

그런데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복을 주셨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을 세울 때 떡과 포도주로 세우지요.

떡을 예수님의 살 이라고 하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했지요.

그냥 피가 아니고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살과 피를 근거로 복을 준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을 위한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에게 한 복이 죄사함을 주는 복인 셈입니다.

신약 적으로 보면 구원의 복인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구약의 복을 받았어요.

구약의 복 속에 신약의 복이 포함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자손이 번성하고 물질이 늘어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복이에요.

물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늘에 있는 본향이 진정으로 가야할 곳이란 것을 알려 줍니다.

 

구약의 복은 현세적이고 육적인 겁니다.

그러나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요.

신약에선 현세적인 것을 복이라 하지 않았어요.

전부 영적인 거예요.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신약의 복을 말씀해 주셨어요.

 

마 5:3-12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고!

애통하는 것이 복이고!

온유한 것이 복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 복이고!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잖아요.

 

복을 받으면 이런 것이 일어나요.

복을 받고 보니 심령이 가난해지고,

복이 임하고 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겁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 받는 게 복인 줄 알게 되어요.

 

구약에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하였고,

신약에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하였어요.

 

복을 받고 보니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가 하나님 앞에 의가 되고,

그 의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 복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게 없어요.

고작해야 옛 언약에 속한 복을 달라고 합니다.

 

옛 언약의 복은 땅에 복이고 육적인 것이지만,

새 언약의 복은 하늘에 것으로서 영적인 것이에요.

 

복이 땅에 것에서 하늘에 것으로 바뀌었어요.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어요.

 

예수님은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세요.

 

육적인 땅에 복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구약 사람이에요.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에요.

신약에서는 옛 언약에 속한 복을 마귀가 주어요.

마귀가 이런 복을 주겠다고 광야의 예수님에게 미혹했어요.

 

눅 4: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안합니다.

자기에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절을 하면 다 주겠다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아담과 함께 뱀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때 저주 받은 땅을 주었어요.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세상 권세를 준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는 육에 속한 자들에게 땅 것으로 신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세상에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요.

 

 

일이 이 지경인데도 목사들이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교인들은 그 말이 복음인 줄 알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밤이슬 맞아 가면서 금식하면서 달라고 떼를 쓰고 있어요.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를 소경이 소경은 인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리한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육에 속한 자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세상 것을 복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나 구하는 교인들은 모두가 구약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못 만났어요.

그러니 세상 것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주신 복이 없기 때문에 땅에 것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수십 년 교회 다니면 뭣합니까?

아무리 밤이 맞도록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목이 터져라 기도하면 뭣합니까?

전부 썩어질 땅의 것인데!

교회가 아무리 매머드같이 크고 웅장하고 교인들이 수십만 명이 모이면 뭣합니까?

다 썩어 냄새 나는 고기들인데!

 

유대인들같이 그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면 무엇합니까?

잠시 후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 내릴 것인데!

이 시대 교회 모습을 보면 바울이 버린 배설물들을 모아 놓고 희희낙락거리고 있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는 고난을 주시고,

마귀가 사랑하는 교인은 부귀영화를 주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는 복음을 주고,

마귀가 사랑하는 교회는 돈을 주어요.

 

성도는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았어요.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은 자가 성도에요.

 

엡 1:3-6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성도는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았어요.

하늘에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거예요.

흠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의(義)를 받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 의예요.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의란 말입니다.

이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만 나와요.

 

성도가 받은 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 믿음의 복인 겁니다.

이 복을 받은 성도는 자기를 치장하지 않아요.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않아요.

 

바울이 그러지요.

성도는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했어요.

 

고후 4:7-15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도는 예수라는 보화를 질 그릇 속에 담고 있는 자에요.

예수라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지켜주세요.

그러니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핍박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와 함께 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기 때문에 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성도는 이런 망할 수 없는 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부러 날마다 우리 몸을 후패하도록 죽음에 넘기우고 날마다 살려주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이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겁니다.

우리 몸에 예수라는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망함 속에서도 죽어야 할 죽음 속에서도 여기까지 살아오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욕을 먹어가면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의지나 능력으로 지켜 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육신의 이해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카멜레온들이에요.

 

인간이란? 호산나! 호산나 하다가도 금새 죽여라! 죽여라 하는 종자들이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다가도 자기하고 의견을 달리하면 원수처럼 대해요.

어제까지 다니던 교회도 오늘 다른 교회로 옮기면 자기 옳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 집단으로 만들어서 비난해요.

 

내가 이단이 안 되기 위해선 상대를 이단으로 만들어야 해요.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언제든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자들이에요.

 

베드로가 의리가 없어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아니에요.

의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면전(面前)에서 부인하고 욕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인간의 본능은 죽음 앞에선 그 누구라도 팔아먹을 수 있는 자들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전한다고 교단에서 박수쳐 주지 않아요.

도리어 출교하고 이단이라고 해요.

수많은 이단소리를 들어가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외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담긴 예수님의 피라는 보배를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전한다고 교인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목사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지 않아요.

도리어 비웃으면서 조롱하고 떠나가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니라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다 빠져 나가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교회 문 닫고 싶어요.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내 스스로가 자존심 상하고 쪽팔려요.

그럼에도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 신령한 복이 나의 자존심도 이기게 하고, 주변의 냉소적인 시선이나 비방하는 소리도 이기게 하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세상의 영화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되기 때문에 이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께서 걷게 하고 계신 겁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나보다 강하기 때문에 나를 이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십자가 속에 영생이라는 복을 담아서 주셨어요.

겉으론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고난이에요.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죽음이에요.

하지만 그 고난 속에 영생의 능력이 있어요.

 

예수님은 인간이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성도를 일컬어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가 믿어지도록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 주셔서 믿고 있는 겁니다.

그저 놀랄 뿐이에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데 우리 공로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고 감사할 것뿐인 겁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겁니다.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다.

죽어도 다시 산다.

천국에 간다.

영생한다.

 

하나같이 인간의 상식 밖 이야기에요.

신앙생활은 무슨 큰 도를 득도(得道) 하는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믿게 해 주는 것에 깜짝 깜짝 놀라며 감동가운데 사는 겁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라고 놀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마치 미친 사람이 쓰레기통에서 사람들이 버린 물건 하나 들고 무슨 신주단지나 되는 줄 알고 희희덕거리면서 좋아하는 것과 같아요.

맞아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에요.

베드로가 그러잖아요.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예수님은 인간들이 세상이라는 집을 짓는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버린 돌이에요.

 

그런데 성도들이 사람들에게 버리운 쓰레기 같은 돌을 들고 미친 사람들처럼 희희거리고 있어요.

신주단지처럼 가슴에 품고 산단 말입니다.

엄청난 보물(寶物)이라는 것으로 알고 품에 안고 산단 말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안고 사는 예수쟁이들을 예수님처럼 갖다 버린 겁니다.

 

교단에서 필요 없다고 버리고,

노회에서 필요 없다고 버리고,

교회에서 필요 없다고 버리고,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도 필요 없다고 버림당하고 있어요.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해 보세요.

혀를 차잖아요.

아직도 그 이야기 하느냐고!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천지 분간 못하고 십자가만 외치고 있느냐! 라고 조롱하잖아요.

 

세상은 예수만 버린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도 버려요.

사람들이 못 쓰겠다고 버린 쓰레기란 말입니다.

만물의 찌기 같고 사람들의 구경거리에요.

그러니 세상에서 쫓겨나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성경은 이처럼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서 버려짐 당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말하다가 욕먹고 쫓겨나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니까요.

 

요한계시록을 보세요.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세상에! 어떻게 예수 때문에 죽는 게 복입니까?

 

한국 교회 안에서 예수 믿고 만사형통하여야 복이지,

예수 믿고 가난하거나 욕 먹으면 집안 망신시킨다고 쫓겨나잖아요.

예수 믿고 반듯하게 살아야지 복 받았다고 하지,

못 살아보세요!

창피하다고 해요.

목사들도 교회도 크고 웅장하고 교인들도 많아야 복 받았다고 하지,

작아보세요.

수치스럽다고 남들 앞에서 목사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 예수님만 신비한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도 신비해요.

세상이 버린 그 예수를 구주라고 믿고 있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신비하지요.

모두가 조롱하는 그 십자가를 신주단지처럼 붙잡고 있는 우리가 신비한 존재들이에요.

 

그토록 욕을 먹고 이단소리 들으면 십자가를 포기 할만도 한데도 그 예수 십자가를 포기하지 못하고 등신처럼 믿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예수를 믿도록 한 복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포기가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보다 강하시기 때문이에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지더라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자에요.

 

잠 24: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우린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예수를 버려도 하나님은 열세 번 믿도록 하세요.

성도는 실패 할 수가 없어요.

예수가 부인이 안 되도록 되어 있어요.

 

성도에게 있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바로 예수를 부인하는 거예요.

부인이 안 되어요.

 

중간에 포기하는 자는 자기가 만든 믿음이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늘 성도에게 지진을 일으켜요.

뭔가 의지하고 붙잡을 만한 것이 있으면 흔들어서 붙잡지 못하게 해요.

 

그러면 에이 이제부터 예수 안 믿을래!

십자가 안 전할래!

그래야 하는데 그게 안 되어요.

차라리 이단 소리 듣고 말지 타협이 안 된단 말입니다.

복음을 포기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는 자기 자존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아요.

자기 생명보다 십자가가 더 귀하다는 것이 깨달아진단 말입니다.

장차 올 영광이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훌쩍 버리겠는데 믿어지니 안 버려지는 겁니다.

아니지요.

너무나 귀해서 못 버리겠는 겁니다.

 

마치 TV에 나오는 광고 같아요.

남자가 여자를 안고 가! 가란 말이야!

너를 만나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 가! 가란 말이야! 라고 하는 광고 있지요.

재미있는 것이 안고서 소리만 치는 겁니다.

자기가 여자를 떠나면 되는데 떠나지 않고 도리어 안고서 가! 가란 말이야! 라고 소리만 쳐요.

 

전 그 광고를 보면서 우리 신앙과 연관시켜 보았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안고 수많은 고난을 가지고 가! 날 버리고 도망가란 말이야!

예수 믿지 말고 가란 말이야! 라고 하는데도 우린 갈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꽉 붙잡고 계시면서 고난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때문에 이단소리 듣고 숫한 고난을 받아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성도가 받은 복이에요.

 

바울의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고후 1:3-5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자비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한다고 합니다.

고난이 넘친 것 같이 위로도 넘친다고 해요.

아니~, 위로하지 말고 고난을 안 주면 될 것 아닙니까?

무슨 심보가 고난을 주고선 위로를 한답니까?

 

이건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에요.

두들겨 패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때리지나 말든지!

기껏 때려 놓고선 무슨 사랑입니까?

 

이단 소리 듣고 먹고 사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해 주지 않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성도는 이 소리를 등신같이 믿고 있어요.

기껏 얻어터지고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고 있어요.

이런 등신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에요.

 

마지막으로 바울의 유언을 보고 마칩시다.

 

딤후 4:17-18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장이에요.

맨 마지막 말이에요.

그런데 참으로 고약한 말을 하고 있어요.

 

주께서 자기 곁에 서서 사자의 입에서 건져주셨다고 합니다.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주셨다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살게 하지 않고 사자 입에 넣었다 뺐다 했다는 말이에요.

이건 마치 야곱이 바로 앞에서 참 모진 인생 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다루는가 하면 롤러코스트에 태워 놓고 밀어버리는 겁니다.

타고 있는 사람은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예수님은 깔깔 거리고 웃고 있는 겁니다.

청룡열차 탄 사람은 까무러치고 오줌을 지리는데 예수님은 박수치고 웃고 계세요.

 

바울은 사자 입에 들어갔다 나왔다 경끼를 하는데 예수님은 곁에 서서 즐기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 할 때 풍랑이 일어 물이 배에 들어와서 침몰할 위기에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모른 척 주무시고 계세요.

제자들은 죽겠다고 물을 퍼낸다고 난리인데 말이죠.

 

그리고선 깨어나서 한다는 소리 보세요.

에라이!

이 믿음이 없는 놈들아! 라고 핀잔하고 있어요.

아니 미안하다고 말은 못할망정 죽을둥 살둥 물을 퍼낸다고 한 사람들에게 할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러고 계세요.

 

예수님이 믿음이 없다고 한 말을 곰곰이 새겨 보세요.

왜 물을 퍼낸다고 야단법석을 떤 제자들을 나무랐는지!

왜 믿음이 없다고 했을까요?이 속에 담긴 메시지는 너희들이 나를 믿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너희도 자면 안 되느냐!

그냥 자라니까!

물 퍼내지 말고,,,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 세상에서 만사형통 되는 줄 알아요.

그건 사기꾼 목사들이 가르쳐 준거에요.

도리어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 없으면 복음 때문에 고난 받을 이유가 없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갔기 때문에 풍랑이 인 겁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과 같이 자는 겁니다.

물을 퍼내지 말고 주무세요.

예수님이 죽으면 같이 죽으세요.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같이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같이 부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였다 살렸다 혼자 다 하시라고 맡기고 살면 됩니다.

목사님 그게 어디 말과 같이 쉽나요.

맞아요.

쉽지 않아요.

누가 쉽다고 했나요.

결국 믿음의 문제에요.

믿어지면 간단한데 안 믿어지면 백약이 무효에요.

 

쉽지 않으면 쉽지 않은 대로 사세요.

불평할 일이 있으면 불평하시고,

원망할 일이 생기면 원망하세요.

도망 칠 일이 생기면 도망치세요.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이에요.

베드로가 복을 받아서 예수님에게 찜 당하니 결국엔 꺼꾸러 십자가에 달려 죽더라는 겁니다.

청룡열차에 꺼꾸러 매달리고 있어도 안 떨어진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의 고집을 꺾겠어요.

못 꺾어요.

 

성도에게 축복이란? 이 꺾을 수 없는 예수님의 고집 속에 붙잡혀 있다는 겁니다.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예수님의 고집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실패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디 이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이라는 복을 깊이 깊이 묵상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셨기에 우린 꼼짝없이 구원이라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만유보다 크시니 누가 아버지가 주신 복을 빼앗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아버지 손에 있음을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