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41강. 하나님의 섬김으로 완성된 구원

정낙원 2009. 10. 13. 08:58

41강. 하나님의 섬김으로 완성된 구원 (히 6:9-12)

 

히 6:9-1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구원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저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섬김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섬김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믿기 힘든 내용입니다.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조금만 열심을 내고 충성하고 봉사라도 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섬김이라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반대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열심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 할 때 유념하여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눈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십자가의 도(道)가 구원을 얻을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생각엔 아니! 하나님께선 어떻게 일을 저런 식으로 처리한단 말인가?

나 같으면 저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할 것이야? 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들에겐 포착이 되지 않아요.

아니 인간들이 포착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생명을 공급받는 자에요.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의 마음과 생명을 공급받는 자의 마음은 달라요.

 

이건 마치 부모와 자식의 마음과 같아요.

부모가 여러 자식을 다 사랑해요.

하지만 자식은 부모가 자기만 사랑해 주기를 바래요.

형은 동생보다 더 사랑받기를 바라고 동생은 형보다 더 사랑해 주길 바래요.

 

자식들은 자기 유익으로 부모의 사랑을 이해해요.

자기에게 유익을 주면 좋다고 하고 유익을 주지 않으면 싫어해요.

자식은 부모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해요.

 

부모와 자식은 목사와 교인들과 같아요.

목사는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모든 성도들을 돌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기 입장에서만 목사를 이해해요.

 

목사는 누가 새로 오면 잘 정착을 하고 복음을 잘 깨달아 가도록 온갖 정성을 다 쏟아요.

그러나 기존에 교인들은 목사의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지 않아요.

왜 편애 하느냐고 목사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을 미워하고 경쟁상대로 보게 되고 질투를 해요.

 

이를 알고 새로운 교인들이 오면 기존에 계신 분들에게 미리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을 먼저 아는 분이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셔서 새로 오신 분이 복음 안에서 잘 뿌리를 내려가도록 잘 도우라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참고 보듬으라고 해요.

그러면서 제가 그 분들에게 관심을 쏟는다고 하여도 편애 한다고 생각지 말고 이해를 하라고 당부를 해요.

그러나 그런 당부도 공염불에 그쳐요.

아무리 한 식구처럼 여기라고 하여도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면 이런 저런 핑계로 시비를 걸고 급기야는 교회를 떠나갑니다.

 

이건 마치 엄마가 동생을 낳으면 형이 질투하는 것과 같아요.

엄마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생을 미워하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인간들은 늘 자기만 사랑 받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알아도 소용없어요.

인간이란 복음 안에서 자기를 죽이고자 하지 않고 살고자 해요.

머리로는 입술로는 엄청 믿음이 좋은 것처럼 말하여도 나타내는 행사머리는 복음과 정 반대로 나타나요.

새로 온 사람이 오면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으뜸이 되어서 상좌에 앉으려고 하고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섬기려 하지 않아요.

 

바울이 그토록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돌아보고 섬기는 자라고 하여도 스스로 강한자라고 하면서도 약한 자로 살고 있어요.

진정으로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자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기듯이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말로는 강한 자라고 하면서 연약한 자 위에서 잘난 체하고 아는 척 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그건 약한 자에요.

복음 안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모습이 역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요.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 할 때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투정을 부리니 하나님께서 70인 장로에게 성령을 주어서 예언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지요.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편을 들어 준다고 하면서 어떻게 모세 이외에 다른 장로들이 예언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자기들 딴엔 생각해서 말을 하잖아요.

 

그 때 모세가 그러지요.

무슨 말을 하느냐!

나는 모든 백성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렸으면 좋겠다고 하잖아요.

모세의 이 말은 너희들 모두가 내 심정이 좀 되어 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이토록 원망하고 불평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과 종업원은 생각이 달라요.

“갑” 과 “을” 은 같을 수가 없어요.

모두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갑” 이고, 인간은 “을” 이에요.

갑은 전체를 보지만 을은 자기만 보아요.

이처럼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만 판단을 해요.

 

사람들은 무엇을 판단 할 때는 모두가 자기가 아는 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판단은 살아가면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시절을 좇아서 환경에 따라서 자기 육신에 따라서 변해요.

동일한 사건도 20대에 판단하던 것과, 40대에 판단하는 것과, 70세에 판단하는 것이 달라요.

 

청소년 시절에는 이상을 좇아가잖아요.

그래서 사회 정의를 외치고 불의를 몰아내자고 데모도 합니다.

당시는 부모가 주는 것으로 먹고 사니 살아가는 일보단 명분에 목숨을 걸어요.

사회에 정의가 바로서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아요.

 

이 때는 부모가 주는 것으로 먹고 사니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이 그냥 생긴 줄 알지,

그 밥이 어떻게 내 목구멍까지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몰라요.

이 밥을 위해서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고 수욕을 당하면서 살아 왔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부모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정의의 사자처럼 행동을 합니다.

젊었을 땐 밥 보다 법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가장(家長)이 되어서 가족을 부양하면 달라집니다.

결혼하여서 자식들을 키우다 보면 법 보다 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나이가 들고 세상을 더 많이 더 깊이 알다가 보면 이상과 현실은 천지처럼 차이가 남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상보다 실리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경쟁을 하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에요.

이를 흔히 철이 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세상을 알아가는 앎과 가치관도 나이에 따라서 달라져요.

20세 때는 20세 만큼의 앎이 있고,

40세 때는 40세 만큼의 앎이 있고,

70세 때는 70세 만큼의 앎이 있어요.

 

그 무게는 달라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가치관과 앎이란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환경 따라 답이 달라 질수가 있어요.

 

오래전에 어떤 분과 상담을 한 내용입니다.

자기는 큰 회사에 자재과에 근무를 하는데 과장이라고 해요.

대리로 근무하다가 과장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짤렸다고 합니다.

너무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자재과 과장이 되고 보니 납품 업체들로부터 온갖 뒷돈들이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회사가 크다가 보니 납품 업체로부터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는다는 겁니다.

하나의 관행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는 교회 집사이기 때문에 양심상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신앙양심상 이런 뇌물은 싫다고 거절을 하였답니다.

참으로 순순한 마음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 위에 상사들이 달달 볶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전임 과장들은 납품 업체로부터 상납을 받으면 혼자 먹는 것이 아니고 윗사람들에게 일정 금액들을 정기적으로 다시 상납을 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뭇가지에 연줄이 걸리듯이 줄줄이 상납의 고리가 형성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과장이 되고 난후 이게 끊긴 겁니다.

그러니 상사들은 왜? 혼자 다 받아먹는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말이 돌고 돌아서 이 사람 귀에 까지 전달되어서 그 사실을 뒤 늦게 안 겁니다.

 

그래서 상사에게 자신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이런 불법은 저지를 수가 없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부장이 하는 말이 자네는 그 자리에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다른 부서로 전출을 보내더라는 겁니다.

아니 정직하게 했으면 칭찬을 못해줄망정 왜 잘라내느냐 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어떻게 신앙적으로 살았는데 이런 고통을 안겨 줄 수가 있느냐 에요.

신앙 양심 따라 살았으면 진급을 시켜 주어야지 왜 잘라지게 하느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이 사람의 착각은 세상에서 신앙양심을 지키고 살면 세상이 알아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이게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참 어리석은 바보짓을 했다고 했어요.

그건 정직이 아니고 융통성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랬다고 나무랐어요.

 

당신은 당신 정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 목숨 줄을 끊고 있다고 했어요.

위로는 당신 상사들의 돈줄을 끊어 놓은 것이고, 아래로는 납품업체 직원들 밥줄을 끊고 있는 것이라고 했어요.

 

상사들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상납금으로 자식들 과외도 시키고 품위 유지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화가 날만도 하지요.

그리고 납품업체가 상납하는 것은 그 납품을 지속하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안하면 다른 업체로 변경 할까봐서 보험을 들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대 기업에 납품을 하려면 로비를 하지 않으면 다른 업체로 넘어가요.

언제 넘어 갈지 몰라요.

그래서 회사마다 비자금을 만들어서 로비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납 안 받겠다고 하니 납품 업체가 비상인 겁니다.

만약 그러다가 미운 털이 박혀서 잘려 보세요.

그럼 그 납품업체는 망해 버려요.

업체가 망하면 그 업체에 직원들은 직장을 잃고 거기에 달린 식솔들을 다 굶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나 하나 정직이니 정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단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구조가 얼기 설기로 얽혀져 있어요.

나 혼자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납품하는 업체도 큰 회사에 납품을 하자면 로비를 해야 하지요.

처 자식과 부모님 먹여 살리자면 자기 회사가 튼튼해야 하잖아요.

회사가 튼튼해지려면 큰 회사의 보호 그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큰 회사에 붙어 있으려면 잘 보여야지요.

납품하고자 하는 업체가 어디 한 두 군데입니까?

서로 납품을 따내려고 줄을 서서 로비하고 있잖아요.

언제든지 납품 회사가 바뀔 수가 있어요.

그러니 안 잘리려고 뇌물을 주면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약육강식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에 이치에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는 다 생존게임에서 비롯되어져요.

내가 잡아먹든지 잡아먹히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이긴 자는 모든 것을 누리고 진 자는 모든 것을 잃어요.

세상이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여기엔 신앙도 통하지 않아요.

내가 신앙 양심대로 산다고 표창하지 않아요.

그러니 믿음으로 살면 고난 없이 하나님이 보호해 준다고 생각지 말란 말입니다.

 

젊어서 혼자의 몸뚱이 이면 정의니 정직이니 부르짖으면서 이리 쫓겨 다니고 저리 쫓겨 다닐 수가 있어요.

하지만 처 자식이 딸리고 봉양할 부모님이 계시면 사태는 달라져요.

정의나 정직보다 살아남는 게 진리에요.

그러자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해요.

 

교인들이 오해하기를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 그게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줄 알아요.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부정하게 살란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정직과 부정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앞에선 달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명랑치 않아요.

하물며 인간이겠어요.

가장 타락한 인간에게서 무슨 하나님이 바라는 정의니 정직이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 앞에선 다 도적놈이고 다 부정한 죄인일 뿐이에요.

그러니 세상에서의 정직이니 정의니 하는 것으로 믿음이니 신앙이니 운운하지 말란 말입니다.

 

세상에선 뇌물은 안 받는다고 하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죄인에게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없어요.

안 나와요.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고 악하게 살아도 죄인이에요.

 

물론 세상에선 착하게 살면 상을 주고 악하게 살면 벌을 줍니다.

그러니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 방식이지 하나님 방식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나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저에게 상담한 집사님이 이걸 오해한 겁니다.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보상해 줄 것이라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상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짤리고 마는 고통이 오고 말았어요.

이게 억울하니 저에게 상담을 하는 겁니다.

상담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집사님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랬다고 한다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세상에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길이란 죽는 것이란 것을 알았잖아요.

 

신앙양심으로 사니 세상이 박수를 쳐 주는 것이 아니고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빛이 어둠에 비취니 어둠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도리어 빛을 죽이더라고 하셨어요.

 

빛이 어둠에서 사는 것은 그것 자체로 고난이고 죽음이에요.

어둠이 그래 빛아 어서 오너라! 내가 안아줄게! 그러지 않아요.

도리어 뭐 이런 놈이 있어! 라고 핍박을 해요.

 

우리가 어둠 속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빛의 삶을 알면서도 빛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악 된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요.

하나님도 이걸 아세요.

 

세상에서 살려면 세상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세상 방식으로 안 살면 죽어요.

그러니 차라리 뇌물을 받아먹으면서 주님 전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세요.

세상에서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아세요.

 

난 정직한 자가 아니라 죄인입니다! 라고 하세요.

그래서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란 말입니다.

괜히 어쭙잖은 정직이니 정의를 부르짖다가 집안 식구들 다 굶어죽이지 말고!

아니 하나님께서 지금 넌 죄인이야! 라고 고발하려고 납품업체를 통하여서 뇌물을 주는데 자기는 난 죄인 아닙니다! 라고 하면 우짭니까?

 

지금까지 정직하게 산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비판하고 정죄했습니까?

정직이 무슨 의라도 되는 줄 알고 훈장처럼 달고 다니고 있잖아요.

그러니 정직 지키다가 손해 보니 하나님 앞에서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잖아요.

이게 죄인 줄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어떤 분이 시내버스 운전을 하는데 목사님 주일 날이 근무하는 날이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라고 물어요.

그래서 근무하라고 했어요.

꼭 주일을 지키고자 하면 시내 버스운전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어요.

주일 성수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으면 주일 성수하는 직장을 구해야지요.

 

그렇지 않고 주일이 뭔지도 모르는 곳에 취직을 하고선 난 교인인데 난 주일을 지켜야 됩니다! 라고 하다가 해고당하면 어쩔 수가 없지요.

버스회사에서 운전기사를 채용 할 때는 버스를 운전하게 하기 위함이지 주일날 지키라고 뽑지 않았어요.

회사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잘라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회사를 원망할 이유가 없어요.

 

그럼 주일은 언제 지킵니까? 라고 묻지 말고 주일을 그렇게 지키고 싶으면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을 구하라고 했어요.

세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인정하지 않아요.

 

제발 신앙과 삶을 이원화 시켜서 구분하지 마세요.

감상주의로 접근하지 마세요.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에요.

하나님이 불의한 세상에 우리를 던져 놓았어요.

예수를 믿자 말자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던져 놓으셨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죄악된 세상에 우리를 던져 놓았어요.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연탄공장에 던져 놓았어요.

연탄공장에 살면서 옷에 연탄을 안 묻히고 살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이처럼 죄악된 세상에서 죄 안 짖고 살고자 하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이건 악행을 저지르고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제발 말귀를 알아들으세요.

 

우린 천사가 아니에요.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뿌리심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마치 연탄 공장에 사는 사람에게 목욕탕을 지어주고 세탁기를 사준 것과 같아요.

연탄이 묻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탁기도 사주고 목욕탕도 지어준 겁니다.

그럼 난 연탄 안 묻힐 거야! 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구석에 쳐 박혀 나오지도 않고 굶어 죽는 것은 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나와서 마음껏 살면서 연탄도 묻히세요.

그리고 목욕탕에서 어 시원하다! 라고 하면서 이런 목욕탕을 지어준 하나님께 감사하여야지요.

 

신앙이 삶이고 삶이 곧 신앙이에요.

신앙(信仰)이 뭡니까?

신앙(信仰)이라는 말을 “믿을 신(信)” 자에 “바라볼 앙(仰)” 자를 쓰잖아요.

그럼 뭘 믿고 바라봅니까?

 

하나님이 믿고 바라보라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잖아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잖아요.

내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죄악 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든 불의하게 살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정직하게 사는 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피를 붙잡지 않고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고 사는 자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당신이 믿고 바라보는 것이 뭡니까?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잖아요.

그럼 신앙생활이란? 나는 죄인 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늘 알고 사는 겁니다.

 

범사에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뇌물 받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주일날 교회에 오지 못하고 버스운전하면서도 감사하세요.

 

옛날 ‘투캅스’ 라는 영화를 보면 안성기가 관내 유흥업소들을 돌아다니면서 뇌물을 받아서 마누라에게 갖다 줍니다.

그러면 그 마누라는 거기서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교회에다 갖다 바쳐요.

교회는 그 헌금으로 목사님 사례비를 드립니다.

목사 사모님은 그 돈으로 학교 선생님에게 자식들 공부 잘 가르쳐 달라고 봉투를 주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스트레스 푼다고 룸싸롱 가서 팁을 주고,

룸싸롱 주인은 팁 받은 돈으로 또 안성기에게 뇌물로 바치고 하잖아요.

 

결국 돌고 돌아 그 자리에요.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알려 주려고 그 영화를 찍은 겁니다.

모두가 물고 물려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 겁니다.

 

세상은 모두가 이렇게 물고 물리고 물려서 돌아가요.

마치 매트릭스처럼 얼키고 설켜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죄 아래 갇혔다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선 죄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세상에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죄인 겁니다.

 

이런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내어 놓을 것은 우리의 정직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에 은혜인 겁니다.

범사에 예수님 고맙습니다! 가 나와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늘 죄인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에요.

 

제발 잘난 사람 되고자 하지 마세요.

우린 무엇을 해도 잘난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 받고 사는 죄인이에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자기 치장으로 나아가게 되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에서의 그 어떤 삶도 하나님 앞에선 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 말을 잘 이해를 하여야 해요.

굉장히 조심스러운 말이라서 잘 이해하시지 않으면 정낙원 목사는 온갖 불법을 저지르면서 살라고 하더라고 말하게 되어요.

불법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고 성도라고 해서 세상 방식에서의 치외법권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성도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 살아야지요.

하지만 다름으로 살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해요.

불신자도 돈이 있어야 살고 신자도 돈이 있어야 살아요.

 

다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다름으로 살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란 것을 깨달아야 해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세상과 간음하지 않고선 살 수가 없어요.

세상과 짝하여야지만 돈을 벌고 먹고 살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그러니 뇌물을 주면 어이쿠 주여 어떻게 내 형편을 아시고 이런 천사를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서 상사에게 상납하고 집에 아내에게 갖다 주세요.

그래야 아내도 자식 키우면서 살 것 아닙니까?

억지로 달라거나 빼앗지는 말고 알아서 스스로 주면 고맙게 받으세요.

받으면서 하나님 난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세요.

 

그렇게 얻은 것을 아내에게 갖다 주면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에게 좋은 직장생활 준 것을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아내는 그 돈으로 헌금도 하고 자식들 과외비 주고 옷도 사 입히고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교회 목사도 살고 과외 선생도 살고 옷 장사도 살지요.

왜 이 원리를 깨려고 합니까?

 

‘나비효과’ 라는 말을 알지요.

남미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 짓 한 것이 아시아에 오면 큰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세상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세상의 구조가 악행 하도록 짜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도 이런 구조 속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믿음으로 살자면 고난을 당하여야 하고 세상 식으로 살자면 신앙 양심이 아프지요.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각자가 알아서 하세요.

믿음 붙잡다가 고난 받든지,

세상방식대로 살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든지 알아서 하세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하나님 앞에 의가 아니며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입니까? 라고 물으면 전 정답이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정답이라고 한다면 우린 죄인이고 이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 뿐이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다 감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빨리 아시길 바랍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은혜임을 왜 모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악이고 죄입니다.

 

제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기까지 전개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생각에 가두지 말라는 뜻에서 한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 생각으로 고정화 시켜서 판단하지 마세요.

그래서 오늘 살펴보는 내용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된 구원이에요.

 

지난시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시키셨잖아요.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다는 말은 죄인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인간이 죽었으니 인간의 행함도 죽은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의(義)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함으로 신앙을 가늠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것으로 돌리는 악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실이 아니고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서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행실이 무슨 의라도 되는 줄 알고 의미를 두면 안 되어요.

우리가 뭘 하여야 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가 나와야 해요.

주께서 이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 은혜를 입고 삽니다! 가 나와야 해요.

 

우리가 뭘 하여야 한다고 하면 여전히 우린 뭘 하여야 한다는 법에 갇히게 되어요.

이런 일들이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육신이 늘 이런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에요.

우리 육신은 자고나면 자기 몸 중심의 어떤 법(틀)을 만들어요.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지!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지! 라는 것은 곧 정해진 틀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지! 라는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살고자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틀 안에서 살았으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못 살았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결국 그 틀에서 행한 자기 행함으로 의와 불의를 가늠하게 되어요.

이건 악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십자가로 출발하여 십자가로 귀결되어야 해요.

십자가로 출발하고 십자가로 귀결하라는 말은 난 죽고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해요.

난 죽은 자 이지로 시작해서 하루를 살면 범사가 예수님이 주신 잉여품으로 사는 것이 되어서 감사가 되어요.

설령 세상이 정한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감사가 되어요.

 

잘 살아도 예수님의 공로이고 못 살아도 예수님의 용서로 남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 존귀케 되는 겁니다.

“나” 라는 존재를 의식하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을 지고자 하지만,

“나” 라는 존재가 없고 예수님의 것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되는 겁니다.

 

감사는 완전하여야 할 수가 있어요.

불완전하면 감사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 성도의 구원이 완전하여야지 신앙생활에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완전한 신앙은 뭡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맺은 새 언약이지요.

새 언약 안에 있으면 완전해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것을 온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데로 나아가는 것은 옛 언약을 버리고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행위 차원이 아니라 온전하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도(道)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우리더러 결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은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완전한데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완전한데로 밀어 넣어 주세요.

그래서 성도들에겐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섬기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엄청 중요한 말씀이에요.

놓치지 말고 잘 새겨서 들으세요.

 

본문을 봅시다.

 

9-1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행한 행위를 기억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열심히 성도를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지요.

지금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앞선 1절에서 8절까지 멜기세덱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가지고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로 말하면서 멜기세덱의 비밀을 모르면 짤린다는 투로 섬뜩한 말을 했어요.

그리고 느닷없이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이보다 나은 구원이 있다’고 확신한다고 하잖아요.

 

문자적으로 보면 9절부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의 연장선에서 해석을 하면 성도의 구원은 짤리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것으로서 9절 이하의 말씀은 주께 사랑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구원이 된다는 말로 해석 할 수가 있어요.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하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성도를 섬겨주시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섬기심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성도를 섬기는 일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성도를 섬기는 것을 성도가 성도를 섬기는 것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성도를 섬기고 있다고 보시란 뜻입니다.

전 그렇게 보고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섬기심으로 주어진 확실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문맥을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말씀을 궁극적으로 지키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설령 성도가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 행함을 성도의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바탕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적 관점의 해석법이에요.

새 언약적 해석법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겁니다.

성도가 비록 어떤 행함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 행함은 예수님의 것이에요.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행함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출발해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 전체이야기에요.

 

구원은 인간이 낄 틈이 없어요.

성경은 인간이 낄 틈을 허락하지 않아요.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하고 두 분이 맺었어요.

성도를 예수님이 책임을 지시고 구원을 하세요.

 

성도가 그 어떤 일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행함은 예수 안에서 한 행함이기 때문에 성도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였다고 하면 반칙이에요.

그런 행함은 옛 언약적 행함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 행함을 붙잡고 있다가 망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도 성도의 섬김을 주의 이름으로 섬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섬겼다는 것은 곧 주님이 섬겼다는 말입니다.

결국 주님은 성도가 섬김 것을 통하여서 주님 자신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성경 어디를 펴도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칭찬하고 자랑한 적이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고서도 자기가 한 것으로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이것을 죄라고 지적을 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도가 섬긴 것을 성도의 행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행한 그 행함은 곧 하나님 자신이 성도를 섬긴 행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성경도 하나님의 맹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사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앞 뒤에 있는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성도의 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맹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해요.

하나님의 맹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은 곧 하나님의 맹세로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아요.

결국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하나님이 구원을 지켜주시니 근심걱정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세요.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섬김은 변덕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치 않는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성도들을 섬기고 계신 겁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부모 속을 섞여도 부모는 변치 않고 자식을 보살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0절을 이렇게 해석해 보세요.

 

먼저 개역성경 입니다.

 

10절.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다음 표준 새 번역 입니다.

 

10절.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를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과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앞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신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자로서 이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하나님의 맹세로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중간에 여러분 섬기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섬김을 기억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의 흐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진 않나요.

 

제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이 없으신 분이므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지금까지 성도를 사랑으로 섬겨온 것과 같이 앞으로도 계속하여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맹세하신 언약과 같지 않나요.

어떻습니까?

성경 전체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사상과 일치하지 않나요.

그래서 전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혹시라도 오해가 되실까봐서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제 의도를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제가 성경을 해석하는 새 언약적 방식으로 해석을 해 갑니다.

 

전 제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하진 않아요.

전 다만 이렇게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혹여라도 여러분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누가 어떤 말을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믿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본문을 살펴봅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져 있어요.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 속에 자기 이름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타자(他者)로 보지 않고 한 몸으로 보아서 온갖 사랑을 쏟아 붓는 겁니다.

그 자식의 행함과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성도를 섬긴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다고 하지요.

세상에서의 섬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긴다고 해요.

 

이는 곧 창조주가 피조물을 돌보는 것을 말해요.

우리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긴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어느 시대이고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겨 왔어요.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생명을 보살펴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가 쉽지요.

부모가 자식의 생명을 보살펴 주지요.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섬기는 겁니다.

 

아빠는 새벽에 나가서 돈을 벌어다 주고,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자식들 밥해서 먹여 살리고 있어요.

자식들은 가만히 앉아서 부모가 해다 주는 것을 먹고 살아요.

이게 섬김이에요.

 

하지만 자식들을 이 사실을 몰라요.

자기들이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을 섬긴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고서 유세를 떨어요.

 

공부하는 놈들 보세요.

꼭 누굴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결국 저 잘 살게 하려고 공부시키는데도 부모를 위해서 한다고 생색을 내고 있잖아요.

부모님들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래 부모를 위해서라도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꼭 그래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셨어요.

예수를 믿게 해 주는 것도 하나님이 해 주셨어요.

은혜를 깨닫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셨어요.

 

감사하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

연보하게 하는 마음,,,,

모두를 하나님이 주셨어요.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다 간섭해 주신 결과에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섬겨주셨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신앙을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에요.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주셨으면 그들도 방주를 지었어요.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지었다고 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방주를 지은 겁니다.

 

이 시대 방주란?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믿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우리는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를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고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10절.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너희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다 내 은혜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한 번 섬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지 않고 섬기고 있다고 하잖아요.

마치 부모님이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훌륭한 자식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어요.

김연아 선수 뒤에는 극성맞은 엄마가 있고,

박세리 선수 뒤에는 극성맞은 아빠가 있었어요.

부모의 극성스러움이 성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성공 뒤에는 부모님의 보살핌이 있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 뒤에도 하나님의 애끓는 섬김이 있었어요.

우리 모두 여기까지 온 순간순간들을 반추해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에요.

하나님의 섬김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우리가 복음을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셨고,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간섭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풍성한 소망 가운데서 어떤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참고 이겨내라고 하는 겁니다.

 

11-12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으니 흔들리지 말라는 겁니다.

누가 너 그 따위로 신앙생활을 해서 천당에 가겠느냐! 라고 해도 속지 마세요.

너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할래! 라는 말은 신앙생활의 주체를 나에게 두고자 하는 악함이에요.

 

아까 말했지요.

하나님이 성도를 섬겨왔고 앞으로도 섬겨 가신다고 했잖아요.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너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할래! 라는 말은 마귀의 말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겐 너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할래! 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도를 일으켜 세우고 앉히는 것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에요.

일을 시작하신 분이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하세요.

 

단 한 순간도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해 오셨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간섭해 가실 것입니다.

 

고전 1: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딤후 4: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보세요.

사도 바울은 주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잖아요.

그냥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지켜 주신다고 합니다.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도록 지켜 주신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천국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들어가도록 지켜 주십니까?

이는 예수님의 피로 폭 싸서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간다는 말이에요.

마치 보자기에 폭 싸서 우리의 흔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보이게 해서 데리고 간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흡족해 하시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 사실이 믿어졌기 때문에 그 모진 고난 속에서도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께서” 에요.

“주께서” 가 “주어(主語)” 에요.

“주께서” 기관차처럼 끌고 간다는 겁니다.

이것처럼 확실한 보장이 어디 있나요.

 

“주께서” 견인차가 되셔서 고장 난 우리를 끌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주” 라는 견인차에 끌려가는 고물들이에요.

이런 고물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존심이에요.

 

모세가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모두 죽인다고 하자!

모세가 가로막고 하나님 여기서 이 인간들을 다 죽이면 저 애굽인 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데리고 가지 못하고 다 죽였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속이 상하더라도 참고 데리고 가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알았다고 데리고 간 겁니다.

 

부모는 자식과 영화(榮華)를 같이 해요.

자식이 유명한 대학이라도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그 부모는 유명 대학 부모에요.

항상 자식 자랑을 앞세워요.

누구누구는 몇 년도에 서울 대학을 나왔다! 라는 것이 그 부모에게나 그 집안에 역사가 되어서 길이길이 남아요.

 

그런데 자식이 대학에 떨어져 보세요.

부모는 자식과 함께 기가 죽어요.

어디 가서 자식이야기 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붙이려고 자식이 고 3이 되면 같이 고 3이 되어서 수험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성도를 고 3 수험생 엄마처럼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명예가 걸렸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렸단 말입니다.

다 천당에 데리고 가야지 그 중에 단 하나라도 떨어지면 하나님 얼굴에 먹칠을 당해요.

 

그래서 한 알갱이라도 잃어버리지 어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 살려 낸다고 하신 겁니다.

 

암 9:9절.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0-31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 흩어버리셔도 단 한 알갱이라도 버려지지 않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어떤 고난 속에서도 성도는 떨어지지가 않아요.

주님이 재림을 하시면 온 지구 구석구석을 다 뒤져서라도 자기 백성은 다 찾아낸다고 하잖아요.

 

이게 성도에게 심어진 약속이에요.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늘에 신령한 복이란 복은 다 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절대로 실패 할 수가 없도록 섬기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새 언약이라는 틀을 빠져 나갈 수가 없어요.

살아도 그 안에서 살고 죽어도 그 안에서 죽어요.

얼마나 이 언약이라는 틀이 견고한가 하면 그 어떤 죄에서도 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경에 거론된 교회들 중에서 가장 문제투성이인 교회가 고린도교회에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란 죄는 다 저지른 개 같은 인간들이 모인 곳이었어요.

 

계모와 음행한 놈에서부터,

남에 돈 떼먹고 사기 치는 놈하고,

게바파다 바울파다 아볼로파다 하면서 쌈박질하는 자들과,

우상숭배 하는 자들 하며,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들 깔보는 인간들 하며,

서로 은사 받았다고 자랑하고 지랄 떠는 인간들 하며,

자칭 선지자라고 꼴값 떠는 인간들까지 좌우지간 총천연색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다 성도라는 겁니다.

이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가 이런 것까지도 넉넉히 용서하고 구원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이런 못된 종자들인데도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구원을 하셨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새 언약 안에서는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어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살라는 말이에요.

 

성도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에요.

이 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잘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법적으로 만나지 말고 사랑으로 만나라는 거예요.

 

초보적인 율법의 법적 신앙에서 벗어나서, 사랑의 차원으로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에요.

종은 일하는 자이지만 아들은 부모의 것을 누리고 사는 자에요.

 

새 언약 안에서 우리가 할 것이 없어요.

다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받아먹으면 되어요.

예수님이 다 먹도록 밥상을 차려 놓았어요.

맛나게 먹으면 됩니다.

 

맛나게 먹는 것을 본문에선 소망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며 부지런히 돌아보고 섬기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받은 사랑을 동일하게 약속을 받은 형제들에게 나타내서 그들로 하여금 서로 본받게 하라는 겁니다.

 

11-12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본받게 하라는 말은,

이런 약속을 알려 주란 말입니다.

질기디 질긴 약속 안에서 사는 모습들을 보여 주란 말이에요.

 

더 좋은 구원을 받았으면 성도들에게 보여주라는 겁니다.

난 이런 사랑을 받았다고 간증하세요.

누가 범죄하여 비탄에 빠져서 좌절하고 낙심하거든 예수님의 피가 그 죄 까지도 넉넉히 용서해 주신다고 일러 주세요.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마치 탕자가 자기 몸에 모든 것이 아버지가 준 것이라고 자랑하고 산 것처럼 자랑하셔야 해요.

이거 자랑하라고 죄인을 예수 안에서 구원한 겁니다.

 

그러니 제발 자기 꼬락서니 보고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이 심어준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사세요.

믿음에 담대함을 버리지 마세요.

마귀가 그 어떤 말로 참소를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으세요.

 

예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쿨쿨 잠을 자도 주님은 주무시지도 못하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왜 기도하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늘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준 피를 의지하고 담대히 살라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디 이 포기하지 못하고 주무시지도 않고 끝까지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좀 깊이 알아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그 깊디 깊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합니다.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마지막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