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57강. 믿음과 고난

정낙원 2010. 5. 9. 01:53

57강. 믿음과 고난 (히 10:32-39)

 

히 10:32-39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오늘 본문은 어쩌면 히브리서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는가를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상이고, 율법은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살다보면 많은 고난이 닥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으로 살면 왜 고난을 당하여야 합니까?

이는 믿음이 율법 신앙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게 되고 그 고난이 닥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잠시 잠간 후면 예수님이 오시니 인내하고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11장애서는 믿음으로 산 증인들을 쭈욱~ 열거하고 믿음이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왜 믿음이 율법과 부딪치고!

믿음을 말하면 고난을 받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말하면 율법과 충돌이 일어나는데 이는 서로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은혜이고 율법은 법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늘에 속하였고, 법은 땅에 속하였습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율법은 그 본질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믿음과 율법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이 전혀 달라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고, 율법은 인간의 행위로 해석을 해요.

즉 은혜(믿음)는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율법은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해석이 다르니까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율법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율법은 서로를 용납할 수가 없어요.

서로 배척하고 밀어내야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으로 사는 것은 서로가 원수처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석법은 죄가 주는 해석법이에요.

죄가 주는 해석법은 전부 자기중심으로 보고 자기 유익으로 해석을 해요.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세요.

쉽게 말해서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성령은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록하였겠지요.

이렇게 되면 성경은 하나님 이야기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하고픈 이야기를 성령께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성경이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이야기는 인간들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을 누구 입장에서 해석을 하여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 입장에서 해석을 하여야겠지요.

그렇잖아요.

하나님 입장에서 말씀하시려고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성경을 하나님 입장에서 해석해야지요.

 

그런데 인간은 누구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합니까?

자기 입장에서 해석해요.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게 되면 자기 존재론으로부터 해석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성경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스님에게 성경을 주었어요.

그럼 그 스님은 성경을 불교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겠지요.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성경을 해석해도 그래요.

우리 관점에서 해석해요.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자기 관점에서 보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전부가 엉뚱한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경고 했어요.

억지로 풀다가 망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했어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성령만이 성경을 해석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 어떤 인간도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없어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인간의 조건은 상관이 없어요.

인간의 학문이나 지식이나 이성이 필요치 않아요.

즉 많이 배우나 못 배우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셔야지만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는 성경을 해석 할 수 없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순 엉터리로 하나님 뜻을 이해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성령은 너희들 지혜와 지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성경을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다 틀렸다고 해요.

 

예수님께서 보혜사가 오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고 하시지요.

책망을 한다는 말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오시기 전에 알고 있는 죄관이나 의관이나 심판관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말하는 죄에 대한 것도 틀렸고 의에 대한 것도 틀렸고 심판에 관한 것도 틀렸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율법 신앙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새로운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성경을 기록한 내가 해석 주는 성경 것만이 옳은 해석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존에 옳다고 하는 자들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자기들의 것이 옳다고 하면서 선생 노릇을 했는데 성령이 오시고 나니까 자기들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성령 받은 자들을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살려두면 자기들의 신앙이 틀렸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신앙이 은혜 신앙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1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바울은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이 율법 아래 있을 때 자기의 의를 지키고자 예수니므이 십자가 사건을 발생 시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신들의 틀림을 감추기 위하여 옳음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었어요.

이를 이 세대의 관원이라고 합니다.

율법적인 사관으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 예수는 이단이었어요.

그래서 율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지혜는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란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이에요.

인본주의란 말입니다.

인본주의란 인간 중심이라는 뜻이에요.

 

성경은 신본주의에요.

신본주의란?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이야기 하려고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인간의 해석은 십자가 사건을 발생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해석과 상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면 자기 법을 철회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법을 죽여 버려요.

그래서 나타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해석한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죽인 것은 하나님의 법을 수용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성령으로 해석을 했어요.

하나님 언약 중심으로 해석 하였단 말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반발을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은 자기 민족 중심으로 이해를 하였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성경을 하니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인간의 전통적인 해석법이 성령이 하는 해석을 거부해요.

인본주의 해석이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게 다 이루셨다는 것을 말하면 짜증내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육에 속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하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니까 싫은 겁니다.

 

자기들이 할 것이 있어야 자존심이 생기는데 말이에요.

예수님이 다 하였다고 하면 자기들은 뭐냐!

자기들 체면은 뭐가 되느냐 에요.

결국 자기 가치 챙기기를 못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은 지금 세상 관원의 지혜로 성경을 보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전통신학으로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해서 죽인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교단에서 제명하고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성령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고!어떤 것이 인간이 해석하는 것인지 분별을 하여야겠지요.

성령이 해석하는 것과 우리가 해석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겠지요.

 

이는 아주 간단해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시려고 오셨어요.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세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 묻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계셨지요.

성령도 하나님이시니까 항상 존재하셨어요.

그런데 이 성령님이 언제 우리에게 오십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오셨지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열흘 뒤 오순절 날에 오셨어요.

그런데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이 독자적으로 오신게 아니고 예수님이 보내셨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받아서 보내셨어요.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자 보세요.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오른 손을 들어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승리자로 인정하셨다는 겁니다.

마치 권투 경기를 하고 주심이 양 선수를 가운데 세우고 승리한 사람의 손을 번쩍 들어주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인간들 손에 죽었어요.

얼핏 보면 인간들이 이긴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 배후엔 마귀가 있으니 마귀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 시켜버렸어요.

마귀가 이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예수님이 이긴 겁니다.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승리자라고 손을 번쩍 들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가 승리의 깃발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라고 말하는 이유가 십자가로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해석법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해석이라는 것을 말했어요.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이 되어야 옳은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실패했다고 믿었어요.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다 제 갈 길로 간 겁니다.

베드로도 고기 잡으러 갔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흘 만에 예수님을 살리셨어요.

그리곤 하늘나라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임무를 잘 마치고 귀환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을 했지요.

그럼 약속대로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 내가 승리자라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내가 하늘나라 아버지 집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군대에 입대를 한 아들이 입고 간 옷이나 신발을 소포로 집으로 보낸 것과 같아요.

소포를 받은 엄마는 아~ 이 녀석이 군대에 가긴 갔구나! 하고 그 소포를 붙잡고 울잖아요.

이와 같이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잘 도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오순절 날에 이렇게 너희가 보는 가운데 부어 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왜 성령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인간에게 오셨을까요?

이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후 하늘나라로 승천하시고 난 후에 우리에게 오신 것도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함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성령을 물건처럼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셨어요.

그리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어요.

왜 이런 절차를 거치는가 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성령은 마치 예수님의 특사와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 함은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분이란 말이에요.

이걸 종속적 관계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5장을 봅시다.

 

계 5:6-7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거기에 보니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는 겁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고!

하나님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있고!

이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부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앞에 계신 어린 양은 성자 예수님이세요.

그 앞에 일곱 영은 성령님이세요.

 

이 세 분은 모두가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책을 취하지요.

이 책은 일곱 인으로 봉인이 되었어요.

 

어린 양이 봉인된 것을 하나씩 뗍니다.

그럼 일곱 영이신 성령이 나가서 일을 하세요.

그럴 때마다 이 땅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서상으로 보면 아들이 아버지 손에 있는 책을 받아서 큐 싸인을 내니까 성령이 일을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지요.

운행한다는 것은 일을 하신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일을 하세요.

그래서 성령을 예수님과의 종속적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속적이란? 상하 개념이 아니에요.

일을 수행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아버지 이름으로 오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위해 사셨어요.

 

성령도 예수님 이름으로 오셨지요.

그러니 성령은 예수님 뜻을 위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령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예수를 위해서 일을 하세요.

이걸 종속적 관계라고 합니다.

이해가 되나요.

 

예수님이 봉인된 책을 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위임하는가 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이에요.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앞세워서 일을 하세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委任)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는 아들 뒤에 숨어 계세요.

마치 투명 인간과 같아요.

우린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어요.

볼 수도 없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서만 계시를 하세요.

그러니 아들을 만나는 것이 곧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의 뜻이 곧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누가 알려 주는가 하면 성령이 하세요.

성령이 오시면 아들을 만나는 것이 아버지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알려 주어요.

아들에 말을 듣는 것이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아요.

성령은 예수를 믿게 하세요.

 

신앙생활은 아버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에요.

아버지를 안 믿는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알려 주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하지 아버지를 증거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성령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요.

예수님만 증거해요.

성령은 아들의 영광만 드러내세요.

그래서 성령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어지신 겁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계셨지요.

그럼에도 우리 인간들에겐 오시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세운 언약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세운 언약을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창세전 언약이 바로 십자가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을 피에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일하세요.

그러니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걸 모르면 성령을 무당 푸닥거리하듯이 오용하게 되어요.

 

이 시대 성령을 어떤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잖아요.

이는 모두가 언약을 몰라서 그래요.

창세전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니 그러는 겁니다.

 

언약을 모르니 자기 생각으로 성령을 병이나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신기한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물론 성령은 이런 일들을 행하세요.

그러나 능력 행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지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합니다.

이 때 천사들이 돕습니다.

이는 곧 성령님이 도우신 것과 같아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도록 도우셨어요.

잘 죽도록 도우셨다구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안 지려고 기도 했는데 성령은 십자가를 지도록 도우셨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예수님을 십자가 사건 속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성령의 도움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신 겁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 가시니까 이젠 성령이 성도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도가 믿어지게 하세요.

성령은 항상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세요.

지금도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또한 성도를 십자가 사건 안으로 밀어 넣어요.

 

우린 안 죽으려고 하는데 성령은 죽으라고 해요.

성령은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운명 속으로 밀어 넣어요.

그러라고 성령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어지신 겁니다.

 

성령은 어느 시대나 예수님만 증거해요.

아버지를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하세요.

성령은 예수님만 증거한다는 말이 무지하게 중요한 말입니다.

성령이 예수님 이름으로 보내어졌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종속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종속이란? 예수님을 쫓아가도록 엮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매여 있어요.

성령은 예수님 밖으로 나가지 못해요.

이는 성령님은 예수님 보다 낮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매여 있는 성령은 무얼 증거하겠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이지요.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이고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십자가는 우리 눈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비밀이고 능력이라고 했어요.

십자가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성령을 받지 않은 자칭 신자에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에겐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여요.

우리가 만약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한다면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고 살렸다 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뭘 복잡하게 처녀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고!

승천해서 성령을 보내고 합니까!

 

그냥 하늘에서 야~ 너희들 다 용서 했어!

그러니 올라와!

그러고 말지요.

 

인간들 눈에는 십자가는 승리의 모습이 아니고 실패의 모습이에요.

인간들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했다고 해요.

문00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실패자라고 합니다.

이런 망발을 하는 것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어요.

그래서 초라하게 오신 겁니다.

초라하게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알아보아요.

 

그러나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영광 중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만왕의 왕으로 강림하십니다.

심판하시는 주(主)로 강림하세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은 불 태워지고 끝장나요.

죄인의 역사 세계는 다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해요.

 

이00가 재림 예수라고 하는데 그럼 이미 이 세상은 끝장이 났어야지요.

한국에만 재림 예수가 30명이에요.

그런데 왜 세상이 끝장나지 않습니까?

다 가짜들이기 때문이지요.

 

재림 예수는 숨어 있지 않아요.

아니 만국을 호령하시려고 오신 분이 뭣 때문에 졸개 몇 마리들을 데리고 교인들 돈 뜯어내는 조폭 두목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온 세상이 예수님 것인데 무엇 하러 건물을 사고 부동산을 매입합니까?

 

이런 인간들이 설치는 것은 모두가 성경을 응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종말이 되면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들이 반드시 일어나 주어야 해요.

그래야 다른 말씀들도 다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언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약을 모르면 어느 순간 당할지 몰라요.

 

이단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시대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기존 교회 목사들이에요.

언약을 모르는 신학 교수나 목사들이 더 무서워요.

창세전 언약을 모르니 십자가 신학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성공이지 실패가 아니에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실패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조롱하고 어떤 사람들은 울었지요.

왜 울겠어요.

실패하고 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울지 않겠지요.

예수님이 십자에서 죽으시는 것이 창세전 언약의 완성이라고 믿었으면 안 울겠지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안다면 안 울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안다면 감사하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실패로 보았기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측은지심이 발동하여서 운 겁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비밀(秘密)을 모르면 울어요.

 

오늘 본문처럼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면 실패하였다고 울어요.

십자가 도를 전해서 교회가 부흥 안 되고 이단소리 들으면 에이구~쯧쯧 그러잖아요.

왜 쯧쯧 그러는가요?

불쌍하다는 겁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남에게 칭찬 받아야 성공 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복음 전하면 고난 받아요.

빛이기 때문에 어둠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다는 것은 성공이에요.

어둠으로부터 버림을 당해야 진정한 복음에 장악당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 눈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실패로 보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선 대 성공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이 죽는 것으로 말하지요.

 

농부가 한 알의 밀알을 땅에 묻을 땐 많은 결실을 보고 묻잖아요.

농부는 땅에 묻어지는 밀알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밀알이 죽는 것을 실패 했다고 보지 않고 성공했다고 보아요.

안 죽으면 실패에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고난이 없으면 실패에요.

십자가 복음을 믿는데도 고난이 없다고 한다면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농부는 밀알을 심으면서 잘 죽도록 거름을 주는 겁니다.

밀알이 잘 썩도록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심은 겁니다.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창세전에 언약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이에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요.

아니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이 어찌 영광이고 걸작이 되겠어요?

그래서 십자가 도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어리석게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 도는 죽이는 도에요.

먼저 죽이고 나중에 살려냅니다.

살리는 도가 아니고, 죽이는 도에요.

고난 없는 복음이 아니고 고난 속으로 밀어 넣는 복음이에요.

 

명심하세요.

여러분들이 십자가 도를 믿는다고 한다면 살고자 하지 말고 죽고자 하여야 해요.

십자가를 이용해서 세상에서 잘 되고 잘 살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를 죽고자 믿지 않고 살고자 믿고 있어요.

십자가 도를 교회 부흥에 이용하고자 해요.

우리 삶에 유익을 얻고자 한단 말입니다.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원대로 일하지 않고 살려주지 않고 죽여 버리는 겁니다.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안 되게 막아 버리는 겁니다.

뭔가 좀 해 보려고 하면 안 되도록 자꾸만 흔들어요.

 

목사에게 적용하면 교회 부흥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욕망의 탑을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켜서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쌓는 욕망이라는 탑은 모두가 우리 존재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허무는 겁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킨 지진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도 복음 때문에 고난당한다고 도망치지 말라는 겁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지극히 정상이니 안심하라는 겁니다.

이걸 누가 듣겠어요.

그러니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십자가를 영광으로 보지 못하는 겁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우리 몸은 죄의 몸이에요.

죽음이 지배해요.

그러니 일평생 죽음에 쫓기고 사는 겁니다.

죽음이 지배하니까 우린 본능적으로 안 죽고 살고자해요.

 

죽음에 쫓기는 이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저주에요.

맨 날 죽으면 어쩌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음에 벌벌 떠는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그리곤 죽음이 공갈을 치지 못하는 몸으로 다시 살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걸 몰라요.

그냥 죽으면 끝인 줄 알아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알게 해 주시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에요.

야! 너희들 예수 믿다가 고난당하는 것 그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앞에 영원한 상이 있다고 합니다.

 

영원한 상이란 영생을 말해요.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가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알라는 겁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우리 생각과는 정 반대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성도가 믿음 때문에 비방을 받고!

환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심지어 재산도 빼앗긴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우린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고 싶어하지 고난 받고자 하지 않아요.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남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하지 욕을 먹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 의외로 정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린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곤혹스러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아도 자기가 선호하는 말씀들만 골라서 보는 겁니다.

마치 편식하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밥에 콩이 들어 있으면 다 골라서 내어 놓고 밥만 먹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성경에서 복 받는다는 말만 골라서 하잖아요.

교인들 비위를 맞추려하니 복과 저주의 말만 골라서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싫어하도록 되어 있어요.

액면 그대로 받으면 부담스러워요.

이해도 안 될뿐더러 은근히 화가 나요.

 

교인들이 목사들 말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에는 관심이 없어요.

성경을 보아도 모르겠으니 그냥 목사님이 알아서 말하라는 겁니다.

그럼 듣겠다는 거예요.

결국 무속신앙으로 흐르는 겁니다.

 

무당에게 돈을 주면 무당이 대신 기도하고 푸닥거리를 해 주듯이 목사에게 헌금하면 목사는 대신하여 기도해 주는 겁니다.

목사에게 돈만 주면 자기는 퍼질러 자고 목사는 밤새워 철야로 굿하고 기도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것을 교인들이 좋아해요.

그러니 목사들이 인간들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서 하나님처럼 명령을 하는 겁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 이해가 되니 곧 하나님 말씀이 되어 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니 이해가 되는 거지요.

 

목사의 말이 이해가 되면 그 때부터 목사님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러니 교인들은 목사님 말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다고 믿는 겁니다.

교인들은 성경을 아는 것은 싫어하고 몸으로 때우는 신앙을 선호해요.

목사님 말에 순종하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자기 이력서만 쭉 나열하는 겁니다.

 

교회에 청소하고!

주일학교 반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들을 내어 놓아요.

 

신앙생활이라고 내어 놓는 것이 전부 이런 것들이에요.

이런 게 마치 하나님의 일인냥 생각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펴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지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고 합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애들아~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일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럼 무슨 일을 할까요 묻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전혀 다른 개념의 일을 말합니다.

애들아~ 하나님의 일이란 노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헐~ 그러는 겁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한 것을 하나님 일이라고 내어 놓는 것은 제자들과 같은 생각의 일하는 관(觀)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자들처럼 노동하는 것을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자기가 쭉 한 일들을 이력서에 적어서 내어 놓는 겁니다.

 

난 몇 살 때부터 예수를 믿었고!

세례는 언제 받았고!

주일학교 반사는 몇 년하고!

성가대도 하고!

여전도회 회장도 하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전도는 몇 명 하였고!

집사는 언제 되었고!

지금은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행한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건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것은 없고 전부 자기가 한 것 밖에 내어 놓지 못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내 쪽에서 발생 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한 일은 믿음에 포함이 되지 않아요.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잖아요.

이는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이러면 또 오해를 하는데!

믿으라고 하니 예~ 제가 믿겠습니다! 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 행위가 되어요.

예수 믿으라고 해서 난 예수 믿었어요!

그런단 말입니다.

 

성경이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리더러 결정해서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성령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해요.

 

이런 상태를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거예요.

누가 여러분~ 하나님 일 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것을 내어 놓아야 해요.

그렇지 않고 난 뭘 했다는 것을 내어 놓으면 안 되어요.

 

예를 들어서 성경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럼 예! 최선을 다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러면 틀린 겁니다.

그건 내가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셨는데요!

지금도 예수님이 하고 계시는데요! 라고 하여야 해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럼 하나님이 허~ 그 녀석 믿음이 좋네! 그래요.

 

그렇다고 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받으시고 예수님의 기도만 받으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세요.

기도 하면서 내가 왜 죄인인줄 알기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걸 모르면 기도 했다는 자기 행위를 내어 놓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이 내어 놓는 믿음은 자기가 한 것을 내어 놓아요.

자기가 지금까지 교회에 충성한 이력서를 내어 놓는다구요.

예수님이 한 것을 믿어야 하는데 자기가 한 것을 믿고 있어요.

 

성도가 수고하는 것은 복음을 받고 보니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일체의 행함은 감사의 표시이지 일이 아니에요.

감사가 봉사로 헌신으로 사랑으로 섬김으로 연보로 갖가지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사람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 믿음 속에 감사가 담겨져 있어요.

감사치 못하는 것은 올바른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러니 예수 믿느냐고 물으면 난 교회 다니는데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교회 다니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그 말에 뜻을 몰라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냐고 해요.

 

십자가를 아십니까!

새 언약을 아세요! 라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에요.

처음 듣는 말처럼 아주 생소해 해요.

믿음을 안 받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가장 쉬운 신앙생활이 뭔가 하면 자기 몸으로 충성하는 겁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은 예수가 안 믿어져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이건 믿음과 상관없어요.

그냥 열심히 하면 되니까요.

 

반대로 가장 어려운 것은 예수를 믿는 겁니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안 되어요.

믿음을 받지 않으면 예수가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는 데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러니 에라 모르겠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교회에 충성하자!

기도하라고 하니 기도하자!

뭘 기도하는지도 모르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 받고 천당 가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주변을 둘러보니 전부 자기와 같은 교인들뿐이니 이게 신앙이려니 하고 안심하는 겁니다.

 

아주 심각한 것은 교인들이 목사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안다는 겁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러니 뭐라고 하면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요 라고 합니다.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그래요.

 

그러니 목사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믿는 겁니다.

이건 목사를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교인들이 순진해서 목사가 마귀인줄 몰라요.

거짓 선지자들은 구약에만 있는 줄 알아요.

목사가 거짓 선지자인줄 몰라요.

 

그리고 우상숭배는 절간에 가서 부처님에게 빌고 절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예수 믿고 복 받고자 하는 것이 우상 숭배인줄 몰라요.

자신이 지금 우상 숭배하고 있는 줄 꿈에도 생각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면 복 받는다고 했으니 그게 믿음인줄 알잖아요.

그러니 목사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듣지요.

이는 모두가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소경이라고 합니다.

소경이 소경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싫어해요.

왜냐하면! 복음 속에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요소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유발하는 요소가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면 욕하고 때리고 조롱하고 재산까지 강탈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본문 말씀이 그러잖아요.

 

예(例)를 들어서 이건 극단적인 예이니 잘 이해하여 들으세요.

누가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숲에서 혼자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리고 놀아보세요.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으로 간주가 되어요.

모두가 전도한다고 난리인데 안 가 보세요!

믿음 없다고 하지요.

다 기도한다고 하는데 집에 있어 보세요.

믿음 없다고 그러잖아요.

이런 것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예(例) 라고 했어요.

비유 말이에요.

 

이 시대 교회에선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치부되고 있어요.

봉사가 신앙의 한 표현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러나 봉사 자체는 믿음이 아니에요.

인간의 몸으로 행하는 것은 믿음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봉사한 것을 믿음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노는 사람을 보고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해요.

봉사하는 자기는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성화 한다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속에서 난 예수님 십자가 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아보세요.

그러면 대번에 믿음이 없다고 핀잔을 주잖아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복음 속에는 부끄러운 요소가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쪽팔리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복음 속에는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인간들이 복음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시큰둥해 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할까요?

자기의 정성과 노력을 알아주지 않으니 기분 나쁘니까 그래요.

복음을 들으면 은근히 부아가 나요.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을 죄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복음은 인간을 아주 깔아뭉개요.

하나님은 죄인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하시면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아요.

짐승 취급을 해요.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고 개라고 하지요.

넌 죄인이라고 하고는 상종하지 않아요.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말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게 뭐냐 하면 남에게 무시당하는 겁니다.

 

복음은 우리를 아주 무시해요.

쓰레기라고 해요.

넌 저주 받을 자라고 해요.

우린 행복할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해요.

그러니 복음이 싫은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까지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재해석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말씀대로 살아온 율법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행함과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말할 땐 반드시 인간의 행함을 부정하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무가치 하게 보아요.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있는 자들이 반발을 합니다.

왜 우리 행함을 인정하지 않느냐 라고 말이에요.

 

그럼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요.

스스로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처하는 부류들이겠지요.

자칭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맞아요.

 

복음을 누가 싫어하는가?

반듯하게 산 자들이 싫어해요.

자칭 하나님 말씀대로 산 자들이에요.

 

지금도 말씀대로 살고 충성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전하면 신경질을 내는 겁니다.

열심히 충성한 것을 신앙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그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데요! 라고 하면 화를 내요.

십자가의 원수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의인들이에요.

이들을 자칭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어요.

이들은 모두가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온 맏아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들의 행함 때문이에요.

내가 율법을 지켰으니 착하지 않느냐인 겁니다.

지금식으로 나~ 교회 다니고, 예수도 믿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니 착하지 않느냐 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행함이 곧 그들에겐 힘이었어요.

 

얼마나 대단한 힘인가 하면 하나님을 죽이는 힘이었어요.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덤벼서 아버지의 처사를 틀렸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책망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하는 힘이었어요.

맏아들이 아버지를 탄핵한 것은 자기 행함이라는 힘을 보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반듯한 인간들이 싫어해요.

반듯한 인간이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거룩하게 사는 성화주의자들이 싫어해요.

성화주의자들에게는 예수의 피로 깨끗케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창피하게 여겨요.

 

언제까지 십자가! 십자가만 하느냐 라고 조롱해요.

언제까지 어린아이들 같이 젖이나 먹고 있을 것이냐 라고 조롱해요.

신앙이란? 십자가를 띄어 넘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젠 광야를 지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풍성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믿지 말고 행하라는 거예요.

이젠 예수를 믿는데 머물지 말고 내가 예수가 되어서 살라고 해요.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십자가를 말하면 수치스럽게 여기지요.

결국 믿지 말고 행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믿음과 행함이 싸우는 겁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것이고!

행함은 인간의 것이에요.

결국 내 행위를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행위를 믿을 것인가 입니다.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하늘에 사람이에요.

 

하늘에 사람은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가요.

하늘에 가치가 믿음이에요.

예수님의 것을 믿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고,

자기가 뭘 하여야 한다고 하면 거듭나지 못한 옛 피조물이에요.

예수 안에서 난 새로운 피조물은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아담 안에서 난 옛 피조물은 자기 행함으로 살아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에게 무슨 의미를 두는 것은 예수를 안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순교를 하든 놀든 내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옛 사람은 자기에게 눈을 떼지 못해요.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에요.

그러나 새 사람은 예수를 바라보고 살아가요.

나의 어떠함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붙잡아요.

 

이렇게 말하면 꼭 그럼 우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라고 물어요.

아니,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무얼 하든 하나님은 그 아들의 하신 일을 근거로 성도를 대하신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율법 아래 있어도 종이고,

은혜 아래 있어도 종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죄의 종으로 살았지만,

은혜 아래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요.

 

종은 일하는 자에요.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자에요.

마귀 아래 있을 때는 마귀의 일을 했고,

그리스도 아래 있으면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자기 꼬라지를 챙기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일을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르게 대한다는 말입니다.

영역이 달라졌다는 뜻이에요.

사는 동네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두 세계로 보아요.

이걸 바울은 아담 안과 예수 안이라고 했어요.

아담 안은 법의 세계이고, 예수 안은 은혜의 세계에요.

 

율법은 우리 행함을 요구하고,

은혜는 우리의 믿음을 요구해요.

 

율법 아래 있으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추궁을 해요.

너 내 말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추궁해요.

 

여기에 걸려 들면 살아남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를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으로 심판해요.

원래 하나님 말씀으로 만들어진 상태로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해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 했어요.

죄인이 되었어요.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원래 하나님 말씀대로 창조된 인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추궁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합당한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해요.

넌 원래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넌 죄인이야!

저주 받아야 해! 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담 안은 율법으로 정죄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은 은혜의 세계에요.

은혜의 세계라 함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문제 삼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힘께 십자가에 죽을 땐 율법에 의하여 정죄 받아서 죄인으로서 죽었고!

다시 살아 날 땐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로서 살아난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율법이 추궁하지 못해요.

 

새로운 피조물이란? 율법이 추궁할 수 없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나라 사람이에요.

땅은 자기가 책임지는 나라이고,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나라에요.

 

땅에서는 내 행위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만,

하늘나라는 우리 행위로 심판을 당하지 않아요.

예수 안으로 영역이 이동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는 겁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그대로에요.

변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된 겁니다.

 

과거엔 법 아래 있었는데 이젠 은혜 아래 있어요.

종은 법적 관계이지만 아들은 사랑의 관계에요.

법적 관계라 함은 일로 판단 받는 관계란 말입니다.

아들의 관계라 함은 일로 판단 받지 않는 관계란 말입니다.

 

과거엔 종이었는데 이젠 아들이에요.

종은 행위와 조건을 따지지만, 아들은 행위를 따지지 않아요.

그러니 새로운 피조물은 행위로 인하여서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은 율법 아래서 태어나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기 행위를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양심이 선악의 법으로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양심의 법이 있어요.

양심은 선악의 법으로 활동을 해요.

자기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괴로운 겁니다.

반대로 양심에 잘난 행동을 하면 뿌듯해져요.

 

예를 들어서 교회 다니고 충성하는 것을 가지고 선과 악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시다.

법에 속한 교인들은 주일날 교회 가지 않고 놀러 가면 찜찜해요.

그건 자기 안에 양심의 법이 주일날 교회 가야 믿음이 있다는 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안에 법을 만들어서 기준에 합당하면 선이라고 생각하여 뿌듯하고 기준에 벗어나면 악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해요.

 

그리고 세상에서의 법은 남과 비교하여서 만들어져요.

예를 들어서 정치인들을 말하면 상대방은 100억을 뇌물로 받았는데 자신은 10억을 받았다고 한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노무현씨가 이회창씨보다 정치 후원금을 10분의 1 밖에 안 된다고 자신은 의롭다고 큰 소리 친 것과 같아요.

자신은 50억을 받았고 이회창씨는 300억을 받았으니 상대와 비교하면 액수가 작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씨는 자기 안에 정해 놓은 양심의 법이 상대적 가치의 법인 것입니다.

뇌물 자체가 범죄임에도 상대와 비교하여서 이회창씨는 많아 받아먹었고 자기는 적게 받아먹었으니 이회창씨는 나쁘고 자기는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안에 선악의 법이 큰 죄와 작은 죄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요즘 스폰서 검사 이야기가 연일 뉴스입니다.

건설업자가 수십 명의 검사들에게 향응을 제공하였다고 폭로하였지요.

왜 폭로 했을까요?

간단해요.

왜 안 봐주느냐 에요.

받아 쳐 먹었으면 인간적으로 내가 좀 잘못한 일이 있어도 봐 줘야 하지 않느냐 에요.

그런데 받아 쳐 먹고는 모르는 척 하느냐 에요.

 

왜 안 봐 주느냐고 항의 합니까?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잘못한 것이 없으면 봐주고 안 봐주고 할 것이 없어요.

서운하지도 않아요.

잘못을 했기 때문에 안 봐주니 서운한 겁니다.

 

물어봅시다.

건설업자가 수십 명의 검사에게 향응을 왜 제공했을까요?

검사들이 찾아가서 먼저 달라고 했을까요?자신이 먼저 준다고 했을까요?

자신이 찾아다니면서 주었겠지요.

 

눈만 뜨면 돈 벌겠다고 눈을 시뻘겋게 뜨고 설쳐대는 장사꾼이 왜 검사들을 찾아가서 돈다발을 갖다 바치겠습니까?

이는 많은 돈을 훔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탈법을 해서 도적질 하더라도 눈 감아 달라는 겁니다.

 

어느 미친 장사꾼이 돈 다발 들고 검사를 찾아가서 바치겠어요.

장사꾼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해요.

정신 나갔습니까?

손해 보면서 굽신거리게!

 

문제의 발단은 건설업자에요.

처음부터 불순한 동기로 접근했어요.

도둑질 하면 봐 달라고 입막음하려고 접근한 겁니다.

왜냐하면! 검사가 도둑질 한 놈들을 잡아넣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왜 이 정목사에게는 돈을 안 줍니까?

난 그 사람을 잡아넣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자기가 잘못해서 감옥에 갈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단도리 해 놓은 겁니다.

그런데 검사들이 자기 뜻대로 말을 안 들어 먹는 겁니다.

그래서 불어버린 겁니다.

 

검사를 족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잡아야 해요.

검사들을 잡을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 검사에게 돈 갖다 바치는 놈은 사형에 처한다고 해 보세요.

그럼 뇌물 줄 사람이 없어요.

 

요즘 교통경찰에게 돈 주는 사람이 없어요.

달라고도 하지 않아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과거엔 노골적으로 돈을 달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저도 교통법규 어기면 주었어요.

그런데 이젠 안 그래요.

이젠 돈 주면 뇌물공여죄로 고발당하니까 안 주는 겁니다.

그리고 경찰도 고발하면 포상금이 더 많으니까 돈 5천원 안 받고 신고해 버려요.

그럼 청렴하다고 표창장도 받고 보상금도 받는데 누가 5천원 받아먹겠어요.

 

그러니 뇌물을 주는 놈을 잡아야지 받아먹은 놈을 잡으면 안 되어요.

그럼 시간 내서 오라고 하지도 않은 검사를 찾아가서 돈 다발 줄 사람은 없어요.

돈 받은 검사를 족칠 것이 아니고 돈을 준 사람을 족쳐야 해요.

그래야 건설업자 같은 짓을 안 해요.

 

그런데 메스컴이 검사만 나쁜 놈으로 몰아가지 건설업자를 나쁘다고 하지 않아요.

향응을 받은 검사가 잘 했다는 것이 아니에요.

사건의 본질을 보란 말입니다.

 

우린 정죄를 받으면 꼭 남을 물고 들어가요.

죄 자체로 접근하지 않고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이 정도도 용서가 안 되느냐 고 항변합니다.

 

작년에 나로호 우주선이 궤도 진입에 실패한 것은 덮개 하나가 분리되지 않아서 에요.

나로호 전체를 보면 덮개 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하늘로 못가고 바다로 떨어졌어요.

 

죄가 이와 같아요.

하나님 앞에선 큰 죄 작은 죄가 없어요.

그냥 죄일 뿐이에요.

 

죄인이면 무인도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도 죄값으로 지옥에 가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라는 행위 때문이 아니고 죄 아래서 태어난 것 자체로 지옥에 가요.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행위는 판단 기준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좌우에 달린 강도 사건이 그 시금석(試金石)이에요.

예수님은 강도의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대하느냐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렸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너 성화했어! 안 했어! 를 묻지 않아요.

너 교회 충성 했어! 안 했어! 를 묻지 않아요.

너 목사냐! 집사냐! 묻지 않아요.

너 말씀대로 살았어! 못 살았어! 묻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을 겨냥하고 있지 않고 예수님의 피에 겨냥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에베소서 1장 4-7절을 보세요.

 

엡 1:4-7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위 말씀은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요.

이것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계획이 된 시나리오에요.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물이 만들어 진 겁니다.

 

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자 하면 먼저 작품을 구상하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작품을 구상했어요.

그게 아들을 만유의 주가 되는 작품인 겁니다.

어떻게 주가 되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어서 되는 겁니다.

 

주란? 주인을 말하는데 심판자란 뜻을 담고 있어요.

심판을 하려면 악당의 무리와 선한 무리 두 부류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만드셨어요.

즉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만든 겁니다.

한 쪽을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풀고 한 쪽은 진노를 쏟아 붓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모세는 긍휼의 그릇이고 바로는 진노의 그릇이라고!

이스라엘은 긍휼의 그릇이고 애굽은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이 되어진 겁니다.

모세나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애굽은 그냥 하나님이 배치해 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역할로 배치를 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잘 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에요.

 

그러니 우린 주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외는 다른 할 말이 없어요.

 

구원 받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이에요.

천국 백성 삼아 준 것에 감사 또 감사 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시사회를 가질 때 출연 배우들과 감독을 무대에 세우잖아요.

그럼 배우들은 자기를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써준 감독에게 감사하잖아요.

이는 배우를 정하는 것은 감독이 결정하지 배우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우가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면 꼴불견이지요.

성도의 신앙도 감사만 나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암튼 하나님은 창세전에 세운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물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구상한 작품은 아들이 주인공이에요.

모든 만물은 아들이 주가 되게 하는데 필요한 주변 인물들이에요.

엑스트라에요.

여기엔 마귀도 있고 천사도 있고 천국 백성도 있고 지옥 백성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를 택하사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를 만들겠다고 했지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이건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요.

 

보세요.

이걸 보여주려고 우리를 택한다고 하잖아요.

누가 택하나요.

하나님이 택했어요.

제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된 것도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십자가 전하는 목사가 돼!

그래서 제가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목사가 된 겁니다.

 

그러니 제가 복음 전하는 목사가 된 것을 자랑하면 안 되지요.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게 해 주셔서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지요.

그러니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나 듣는 여러분이나 차별이 없어요.

그 영광은 모두가 동일해요.

예수님 편에 소속된 것이므로 누가 좋고 누가 나쁘고 가 없어요.

목사는 귀하고 성도는 덜 귀하고 그런게 없어요.

목사도 주의 종이고, 성도도 주의 종이에요.

 

목사를 특별하게 의미를 두는 것은 창세전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언약을 모르니 목사와 성도를 행위로 가지고 차별을 두는 겁니다.

목사는 높은 자가 아니고 복음 전하는 자에요.

성도는 낮은 자가 아니고 복음을 듣는 자에요.

그러니 누가 목사라고 잘난 척 거드름을 피우면 걷어 차버리세요.

 

우린 그 누구도 옥상옥이 될 수가 없어요.

다 예수님이 주가 되는 과정에 필요해서 잠시 역할을 맡긴 것뿐이에요.

같은 작품에 출연한 것으로 서로 서로 격려하고 감사하여야 해요.

다 예수님의 편에 속하여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는 패밀리(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목사를 깔보란 말이 아닙니다.

귀하게 여기셔야지요.

열심히 십자가 복음이라는 밥을 해 먹이니 감사하게 생각하여야지요.

일하는 소에 망을 씌우지 마세요.

목사 너나 나나 동일한데 뭐!

그러면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면 안 되어요.

복음이 주는 자유만 알았지 그 자유함 속에 담긴 감사를 모르면 안 되어요.

 

다시 창세전 언약을 봅시다.

우리를 택한다는 말 속에는 우리 행동을 보고서 결정 한다는 것이 없어요.

보세요.

어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들어가 있는가요?

없어요.

 

전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에요.

예수 안에서란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하는 것은 그 은혜를 찬미케 하려 함이에요.

한마디로 예수님만 찬양 받게 하겠다는 겁니다.

너희들 예수만 찬양해!

예수만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저 주신다고 하잖아요.

거저가 무슨 말인지 모르세요?

공짜란 말이에요.

공짜!

 

천국은 공짜로 가요.

공짜를 아는 사람이 천국에 가요.

천국은 철저히 예수님에게 거저 받은 사람만 가요.

 

천국은 우린 인간들이 자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러니 나 충성했다!

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했다!

이런 게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천국은 예수님만 찬송이 되어지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 찬송 하라고 우릴 구원했어요.

왜 예수님만 찬양이 되어지는가 하면 천국은 예수님 공로만 인정이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뭐냐!

예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

예수님을 찬양하는 곳이에요.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이 찬송이 되어지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미 들어가 있는 거예요.

누가 예수님을 찬양하는가 하면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공짜를 모르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에요.

공짜를 감사하는 사람이 성도에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조금만 하고 마칠게요.

 

애당초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시나리오에 쓰지 않았어요.

구원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공짜로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구속이 되도록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 속에는 이미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게 될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불 순종으로 인하여 죄 가운데 가두어질 것이 들어 있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대신 피를 흘려주는 것으로 짜여져 있잖아요.

하나님이 쓴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집중이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에 집중이 되어 있어요.

이게 창세전 언약에 담겨져 있어요.

이해되는가요.

 

우리의 신앙에 포카스를 맞추어 말하니 또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만들 때 이미 성도를 공짜로 넣어 줄 것을 예정했어요.

물론 우리 입장에선 공짜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선 예수님의 피를 받았어요.

우린 예수님의 피를 들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우린 공짜로 들고 가는 겁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미리 보여주셨어요.

우리가 범죄하고 타락 할 것을 미리 예언 했어요.

다른 말로 이스라엘을 망할 것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어요.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창세전 언약대로 예수님이 타락된 자들을 자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세가 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신명기 31장의 모세의 예언을 봅시다.

 

신 31:14-2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죽을 기한이 가까왔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문 위에 머물렀더라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흔히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를 세상에서 천국 가는 것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맞아요.

애굽은 죄의 나라 곧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을 말해요.

그리고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여 천국을 말합니다.

 

약속의 땅이란? 언약의 땅이란 말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주겠다고 약속을 한 땅이에요.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기를 네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네 피로 자기백성들을 구원해서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의 씨눈과 같아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한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맺은 창세전 언약과 같은 의미인 겁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알려주었어요.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너희를 건져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겁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들어갔어요.

 

그러니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우리의 구원을 축약해 놓은 것과 같아요.

구원을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활동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그림을 역사 속에서 되풀이해요.

가나안에 들어가 살아도 이 그림은 계속하여 그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에 땅은 가나안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도 정착민으로 살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살았던 겁니다.

원주민들을 곁에 두고서 우린 이 땅 임자가 아니야 라고 살았어요.

 

가나안 땅은 하늘에 있는 천국의 모형인 겁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도 이건 예표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살면 안 되어요.

가나안 땅에서 하늘에 있는 천국을 보고 살아야 해요.

이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표에요.

그러니 계속하여서 타락하는 겁니다.

죄를 못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복 받고 잘 살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이건 창세전 언약에 위배가 되어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은 흠 있는 자를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죄사함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대로 되려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타락을 하여야 해요.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니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거룩하게 성화 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왜 미움을 받지 않겠어요.

정 반대로 가르치니 이단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찌 합니까?모세도 저와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이 사실을 모세는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이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신경 쓰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죽어가면서도 너희들 맛 좀 볼거다 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너희가 가나안 땅에 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배반 할 것을 미리 노래로 만들어 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상상하는 바를 안다고 하잖아요.

그게 신명이 31-32장 내용이에요.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노랫말대로 산 겁니다.

결국 노래대로 망하고 말았어요.

 

이게 죄인이에요.

죄인은 이렇게 하면 죽는다고 하여도 그 죽는 길을 가고야마는 어리석은 자들인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로마서 11장입니다.

 

롬 11:32-33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갈 3: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고 긍휼을 베푼다고 하지요.

죄 아래 가두어 놓고 믿음으로 구원한다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라고 탄복을 하는 겁니다.

그 누가 이 비밀을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가르쳐 주어도 욕을 하는 겁니다.

 

암튼 창세전 언약대로 구약 이스라엘은 타락의 역사를 걸었던 것입니다.

이 타락의 역사를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로 씻어서 구원해 주었어요.

십자가에서 단번에 역전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대로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타락된 백성들을 구원해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기게 되었어요.

이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된 이스라엘 속에는 예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고 있음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만 묻습니다.

너~ 죄인인줄 알어! 몰라!

너 때문에 예수가 죽은 걸 알어! 몰라!

너~ 예수 믿어! 안 믿어! 만 물어요.

예수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보아요.

 

새로운 피조물은 그냥 의인이라고 간주해요.

의롭다 해주어요.

인간의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오로지 예수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해 주세요.

 

시험을 치는데 백지를 내도 100점을 주세요.

시험관이 그냥 100점 주고 싶대요.

시험관 마음이에요.

시험관은 시험지 문제를 풀었느냐! 안 풀었느냐! 는 관심이 없어요.

그냥 100점 주고 싶어서 시험을 치라고 한 것뿐이에요.

 

시험지를 백지로 낸 사람이 난 문제 하나도 안 풀고 백지를 냈는데요!

그러면 시험관이 그래 나도 알어!

근데 왜 0점을 안주고 100점을 주세요.

응~ 넌 애초부터 100점을 받게 되어 있어!

왜요?

 

응~ 저기 예수님이 너 대신 시험을 쳤어!

그러니 내가 너를 빵점을 주지 않고 100점을 준 것은 저기 예수님 때문이야!

넌 0점짜리인데 예수님 때문에 100점짜리로 인정해 준 거야!

왜 그런데요.

그건 내가 예수님하고 약속했거든!

난 애초부터 너의 시험 점수엔 관심이 없었어!

 

그럼에도 너를 시험을 치게 한 것은 넌 0점짜리 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런거야!

넌 0점짜리야!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100점짜리로 인정해 주는 거야!

예수 안에선 100점인데!

예수 밖에 나가면 넌 0점짜리야!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믿고 살어!

 

신앙생활은 아주 간단해요.

물론 이 사실이 믿어지면 간단한데 안 믿어지면 복잡해요.

믿어지면 빨래 끝~ 하고 두 손 드는데!

안 믿어지면 분주하게 시험 문제 푼다고 난리에요.

 

믿음이 없으면 가만있으면 본인이 불안해요.

가만있으라고 해도 안 되어요.

자기 안에서부터 엄습하는 두려움을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면 화를 내요.

 

그러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믿어져요.

예수님이 믿어지게 하려고 자기 백성들에겐 성령을 주셨어요.

하나님이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믿어져요.

 

이처럼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은 달리 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성령을 받으면 이 사실이 믿어져요.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믿는 거예요.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무엇을 믿으라고 하는가요?

예수님이잖아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인간은 의롭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에는 인간의 의(義)는 설 자리가 없겠지요.

인간은 부정 당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으라는 말 속에는 넌 죄인이라는 말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 안에서 의인이란 말은 예수 밖에선 죄인이란 말입니다.

의(義)냐! 아니냐! 는 인간들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으로 판단해요.

예수 안에 있으면 무조건 의롭고 예수 밖은 무조건 불의해요.

그러니 인간 쪽에서 아무리 갈고 닦아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인간 쪽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된다는 것을 죄라고 하면 핍박하는 겁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고 하면 욕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믿음으로 살면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전에 TV에서 하던 명란 젓갈 선전이 생각이 납니다.

할아버지가 산해진미가 가득한 밥상을 받았는데도 싫다고 하면서 나 밥 안 먹는다고 밥상머리에서 휑~하고 돌아 앉아 버립니다.

그러다가 며느리가 명란 젓갈을 갖다 주니 화색이 만발 하면서 신이 나서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후딱 해 치웁니다.

이는 앞으로 명란 젓갈을 달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래요.

인간들의 각종 선행과 성화와 봉사와 충성과 헌신을 한 상 가득히 채워서 들고 와도 휑~하고 돌아서버려요.

그런데 예수님 피를 들고 오면 화색이 돌고 버선발로 나와서 맞이합니다.

 

할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명란 젓갈이었듯이!

우리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예수님 피에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받아요.

믿음만 받는 다는 말은 인간의 행함은 안 받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받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밥상에는 예수님 행함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이러면 인간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요.

인간들은 죽자 살자 정성껏 하나님께 바친다고 성화를 하고 충성 경쟁을 해 왔는데 받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겁니다.

일평생 헛짓을 한 것이 되니 짜증이 나지요.

 

하나님이면 다냐!

왜 우리 정성을 무시하느냐!

그럼 난 뭐냐?

이렇게 본능적으로 반발을 하게 된다구요.

 

그러니 신앙생활은 열심보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앎이 우선이고 열심은 나중이에요.

하나님의 식성(기뻐하고 받으시는 것)을 아는 게 신앙생활의 첫 걸음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아요.

성령이 알게 해 주세요.

그러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나를 관리하는 대장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머리가 바뀌었어요.

쉽게 말해서 주인이 바뀐 겁니다.

 

인간은 종이에요.

죄의 종으로 태어났어요.

다른 말로 마귀가 주인이에요.

이를 성경은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죄 아래 있던 자기 백성을 다 찾아 왔어요.

자신의 죽음으로 맞바꾸었어요.

자기 백성들 대신 예수님이 대신 죽어 준 겁니다.

자기 백성들이 갚아야 할 채무를 예수님이 대신 갚아 준 겁니다.

 

이제 마귀에게는 부채가 없어요.

그러니 마귀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부채를 지게 되었어요.

예수님 종이에요.

예수님 말만 들어야 해요.

 

그동안 죄 값으로 마귀에게 강제로 노역을 당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죄값을 다 치루신 겁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치루셨으니 이젠 죄가 없는 자가 된 겁니다.

이걸 성경은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핏 값으로 사 왔으니 이젠 예수님이 주인인 겁니다.

 

이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이제부턴 예수님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니 마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마귀의 지시를 받고 살아요.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살아요.

예수님과 마귀는 서로 원수에요.

 

그럼 자연히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원수가 되는 겁니다.

소속이 다르니 원수이지요.

주인이 다르니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말해 주신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다가 고난을 당하거든 놀라지 말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살면 고난을 당하느냐 에요.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를 해 놓아서 그래요.

 

알다시피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어요.

그러나 인간들은 몰라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세상도 멸망 한다는 것을 믿기 싫은 겁니다.

하나님께 이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하면 왜 이 좋은 세상을 멸망시키느냐고 화를 내요.

이는 모두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폭로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 신은 마귀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숨어 있던 마귀가 폭로가 되고 만 겁니다.

그래서 자기 정체를 아는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예수님이 없어야 자기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서 인간들을 다스리지요.

그래서 마귀는 인간들을 충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입니다.

마귀가 이긴 줄 알았어요.

마귀가 예수님을 죽이면 끝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마귀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자기 일생일대 최대의 패착이고 실수였어요.

자기 딴에는 예수님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인 줄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로 던졌어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셨어요.

그리고 성령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예수와 같은 자들이 막 일어나는 겁니다.

이제 죽었던 밀알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수많은 예수의 형제들이 살아난 겁니다.

 

마귀도 자기 수하들을 풀어서 맞대응하게 합니다.

일대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전개가 되어요.

 

예수님이 마귀의 손에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기는 모습이 아니라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죽으면서 악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으로 통하여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십자가 도 전하다가 이단 소리 듣더라도 낙심치 마세요.

 

믿음 속에 이단 소리 듣는 것도 포함 되어 있어요.

이단 소리 안 듣는 믿음은 가짜에요.

고난 없는 믿음도 가짜에요.

 

고난 없는 믿음은 짝퉁이에요.

그러니 고난을 재수 없다고 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고난은 다 받는 것이 아니에요.

 

로마서를 살펴보고 마칩시다.

 

롬 8:17-18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

 

마귀가 먼저 우리 속에 예수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아요.

마귀가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건들지 않아요.

예수가 있으면 자꾸만 시비를 걸어요.

그러니 십자가 증거하다가 누가 시비 걸면 기뻐하세요.

 

고난 속에 장차 주어질 영광이 있다는 영안들이 열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를 믿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 힘으로는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고난 없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고난당함을 기뻐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