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58강.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정낙원 2010. 5. 27. 01:25

58강.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히 12:1-3)

 

히 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누가 교회 문에다 이런 팜플릿을 붙이고 갔습니다.

잠시 후면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합니다.

엄청난 재앙이 닥치는데 그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탕! 탕! 탕! 이라는 주문을 세 번 외우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재앙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얼른 탕! 탕! 탕! 하고 외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재앙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참 재미있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상(賞)을 주어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잖아요.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간단하게 제시해 주시니까요!

이 얼마나 인간들을 배려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 종교는 이처럼 인간 편에 서서 고난을 피하라고 해 주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각오하라고 합니다.

너희들 예수 믿다가 고난당한다고 도망가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건 탕! 탕! 탕! 종교와 너무도 다릅니다.

탕! 탕! 탕! 은 고난을 면하게 해 준다고 하는데 히브리서는 고난을 받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고난 받은 사람들을 본(本) 받으라고 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본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일 때 하는 말입니다.

술주정뱅이 아빠가 자식들에게 날 날 본받으라고 하진 않습니다.

또한 도적질하는 사람이 날 본받으라고도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선 성공하고 잘 된 것일 때 본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것을 본 삼으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고난당하고 산 것을 본 삼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본(本) 삼으라는 말은 거울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참고하라는 말입니다.

봐라! 저 분들이 반면(反面)교사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세상 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환영받지 못할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이런 삶을 사세요! 라고 권면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 이런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이들의 삶과 비교해 보라고 합니다.

이들이야 말로 믿음으로 산 증거라고 합니다.

 

너희도 예수 믿느냐!

그럼 이 사람들을 참고 하라고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어 가셨는지 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주후 60년경에 기록이 되었어요.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에게 권면하려고 기록하였어요.

당시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의 왕성한 전도 활동으로 복음이 많이 퍼져나갔을 때입니다.

이 때 유대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어요.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으로 규정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다고 생각하여서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거짓 교사들을 파송하여서 율법신앙을 강조하였어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어찌하지는 못하지만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겐 출교(出校) 조치를 취하거나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찍어 많은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완성 되었다고 하면서,

주일성수도 없고!

십일조도 없고!

성전도 없다는 십자가 도를 전하면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과 같아요.

 

한국교회에선 다른 건 다 양보 하여도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교회는 양보하지 못해요.

이 세 가지만 안 건들면 교리적으로 조금 이상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아요.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건들어도 대번에 이단으로 정죄해서 교단에서 제명 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가 목사가 살 수 있는 삶에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목사는 직업이에요.

교회는 직장이고!

얼마나 영구한 직장인가 하면 자식에게 세습을 시킬 정도로 좋은 직장이 되고 말았어요.

그만큼 교회가 매력적이란 말입니다.

 

목사들에게 있어 교회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신(神)의 대리자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힘을 행사 할 수가 있는 것은 교회라는 신전(神殿)이 있기 때문이에요.

목사의 힘은 교회라는 신전에서 나와요.

 

그런데 힘을 유지 보존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고 주일성수이고 교회(성전)에요.

이게 무너지면 목사가 설 자리가 없어져요.

그래서 교단에서나 목사들은 교회와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목숨 걸고 지켜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도가 이 세 가지를 전부 부정하거든요.

부정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완성 되었다고 하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런 것을 해야 한다는 법을 폐기시켰어요.

하나님이 이런 것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는 십자가 복음이 좋다고 하다가도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하고 제명을 한다고 하면 겁이 나서 다시 율법주의 성화주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 블로그에도 처음엔 글을 보고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십자가 복음만 붙잡겠습니다! 하다가도 주변에서 이단이라고 하니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분들이 참 많아요.

 

그러니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시대나 지금이나 영적 상황은 다를 바가 없어요.

어느 시대나 영적 상황은 동일해요.

그러니 히브리서가 지금도 성경이고 그 내용이 복음으로 남는 겁니다.

 

바울이 히브리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많은 형제들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주의와 적당히 타협을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 사회로부터 출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타협을 하게 되는 겁니다.

가산을 적몰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보세요.

믿음이 연약하면 타협을 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연약하면 목사가 저주 받는다고 하면 겁을 절절내요.

교회 옮기면 망한다고 해 보세요.

움칠 하지요.

속으론 싫어도 저주 받는다고 하니 억지 춘향으로 교회 다닐 수밖에 없어요.

 

암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신앙적인 핍박은 지금 이 시대 신앙정서로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지금은 예수 믿는다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죽이진 않잖아요.

이단이라고 교단에서 제명을 당해도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요.

그만큼 신앙생활이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여야 했어요.

극심한 핍박을 당했어요.

그러다가 보니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바울이 율법은 예수님이 완성을 하셨기 때문에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을 겨냥하고 쓰여졌어요.

그래서 히브리서인겁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10장까지가 그 본론입니다.

 

10장까지가 히브리서의 주 내용이에요.

11장부터는 부록(附錄)이라고 보면 되어요.

그래서 10장 끝에 너희가 전 날에 예수님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던 그 시절을 기억하라고 하는 겁니다.

 

히 10:32-39=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너희가 처음엔 핍박 속에서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 삼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고난이 있다고 해서 뒤로 물러가면 어찌하느냐!

믿음이란? 고난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니!

이제 잠시 잠깐 후면 예수님이 곧 오실 터이니 믿음을 지키고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믿음으로 산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그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10장과 12장의 삽입 장과 같아요.

10장과 12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11장을 보충으로 끼워놓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1장은 10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의 결론이 뭡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요.

고난이 닥쳐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그 믿는 바를 굳게 붙잡으라고 하지요.

그렇게 산 사람들이 바로 11장에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누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냐?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이렇게 성도들을 간섭하신다는 겁니다.

 

신앙은 정형화된 삶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으로 밀어 넣고 다스려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고난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1장에서 믿음이 어떻게 그들을 간섭하였는지 실제적인 예증을 들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노아 모세 아브라함 등등,,,

사사들까지 열거하면서 봐라!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믿음이 이들을 이렇게 다루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도 다 믿음을 지키다가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겁니다.

놀라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증거되는 사람들을 믿음에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미 강해를 했으니 지금은 건너뜁니다.

오늘은 12장을 할 겁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믿음에 창시자라고 합니다.

 

이게 중요해요.

오늘본문에선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본(本) 받으라고 해요.

여기서 본(本)이란? 표본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표준 새 번역이 쉽게 잘 해석을 해 주고 있어요.

한번 볼까요.

 

히 12:1-3=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이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3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 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창시(創始)자요!

완성(完成)자라고 하지요.

 

창시자란? 본(本)이란 말입니다.

시금석이란 말입니다.

완성자란? 종결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본문이 말하는 믿음에 주요! 라는 말은 믿음에 표본(標本)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 길을 앞서서 가셨다는 말입니다.

이는 히브리서를 읽는 우리에게 너희들도 따라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2절에서 예수님을 11장의 인물들과 같이 구름같이 둘러선 허다한 증인들과 같은 연장선상에 놓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들과 같은 삶을 살았음을 증거하고 있어요.

 

봐라!

예수님도 고난당하지 않았느냐!

예수님도 십자가를 달게 지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참고 이겨내라는 겁니다.

참고 이겨내라는 말은 이를 악물고 참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대접을 받아도 당연한 것인 줄 알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의 삶도 이들과 다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을 예수님의 실체적인 삶으로 인도하였다는 겁니다.

이들이 당한 이런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겨냥하고 발생 된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들이 당한 고난을 다 당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고난을 온전하게 다 당하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 당하셨으니 너희도 버림당하는 일들이 생겨도 놀라지 말란 말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삶 속에 히브리서 11장에 인물들의 삶이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고난의 창시자라고 하고 완성자라고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창세전 언약 때문에 고난이 왔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허다한 증인들의 고난이 온전하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 동참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 함은 예수님과 같은 사고와 가치관으로 세상을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운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주세요.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어 넣으세요.

성령이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본 안목과 동일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해요.

예수님과 동일한 사고로 살다 보니 자연히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에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은 증인들인가 하면? 예수님을 믿은 증인들이에요.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처럼 버림당한 사람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삶을 선취 적으로 살았어요.

선취 적이란? 미리 앞서서 살았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맛 본 겁니다.

 

구약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였지만 예수님의 삶을 선취 적으로 살면서 증인 노릇을 하였어요.

누가 그렇게 살게 하였는가 하면 믿음이에요.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살도록 간섭한 겁니다.

 

그럼 지금도 믿음을 받은 성도는 그 믿음이 예수님이 걸었던 그 길로 인도하세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 속에는 예수님의 삶이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 속에 십자가의 삶이 포함 되어있듯이 성도라는 말 속에 십자가 삶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한 그것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게 구원할 자이지요.

어떻게 구원 합니까?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자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였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어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어요.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당하셨던 십자가의 고난의 길로 인도하세요.

그래서 신약의 성도도 구약의 증인들처럼 믿음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오늘 본문은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고 했어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삶을 보라는 말이라고 했어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너~ 구원 받았느냐!

그럼 예수님이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보라는 겁니다.

예수를 참고하라는 겁니다.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삶을 말해요.

성도가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고난당하는 삶을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의 운명이 이렇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사해 졌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이건 구원론 적으로 말을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서 죄 용서가 되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인간의 조건으로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는 말 속엔 우리의 조건이나 행함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따지지 않아요.

이는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너희들이 예수 믿다가 잠시 고난당한다고 뒤로 물러가지 말라는 겁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으면서 살다가 보면 갖가지 고난들을 당할 터이니 그럴지라도 낙심치 말라는 격려의 말이에요.

권면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피 흘려서 너희 죄를 다 용서 했으니 아무렇게나 살으라는 말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면서 당하는 아픔이 있거들랑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겨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믿음으로 살다가 온갖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많은 분들이 본문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본문을 가지고 믿음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은 우리가 할 일이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예수를 본 삼으세요! 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일이 있어요.

예수님처럼 대접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본 삼으라는 말은 우리가 담당할 몫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해요.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은 맞는 말이에요.

이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진리에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라는 믿음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본 삼고 삽시다!

그러면 꼭 당신은 왜? 예수를 닮으라고 하느냐!

왜? 행함을 가르치느냐!

그러면 성화주의가 아니냐! 라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행함을 가르치는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살다 보면 이런 고난이 오니 경계 하라는 말이에요.

어렵고 힘들면 히브리서 11장의 증인들을 생각해 봐라!

예수님을 생각해 봐라!

 

그들도 믿음 때문에 숱한 고난을 당하지 않았느냐!

창세전 언약에 휘말려서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느냐!

너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 당하는 것이니 놀라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 고난의 장본인이니 본 보기로 보고 위로를 삼으라는 말입니다.

고난이 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온 것이니 참고 하라는 겁니다.

믿음이 우리를 언약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니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라는 말은 아무리 말해도 모자라요.

그런데 그 믿음을 받은 현상이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요.

반드시 어떤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허다한 증인들의 삶이 바로 믿음이 각양의 모습으로 나타난 증거들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나는 십자가를 압니다! 라는 것을 신앙이라고 믿고 있어요.

십자가를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신앙은 수학공식을 외우듯이 외우는 것이 아니고 믿고 바라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에요.

 

아니지요.

살아내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은 신앙을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십자가의 고난을 그려내세요.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증인들도 바로 이런 그림을 삶으로 그려내었어요.

믿음이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도 허다한 증인들처럼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게 그려지는 겁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오해하여 십자가를 아는 것이 믿는 것인 줄 알아요.

전혀 아픔 없이 믿는다고 말해요.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삶이에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해요.

 

머리로 아는 것은 고난이 없어요.

버려짐이 없어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도(道) 닦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서 11장의 증인들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코피 터져가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그렇게 간섭해 가세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거예요.

귀신의 믿음이에요.

 

살아 있는 지식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무 것도 안하고 입으로만 난 십자가 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레데인 들처럼 말쟁이가 되었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십자가 도는 능력이에요.

능력이란? 힘이란 말입니다.

살아서 꿈틀거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갔던 그 길을 걸어가게 하는 힘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허다한 증인들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힘이란 말입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님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삶을 일컬어 거룩한 삶이라고 해요.

 

거룩한 삶이란? 구별된 삶이란 말입니다.

 

무슨 구별인가 하면 세상과 단절 되는 구별이에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서 살아가는 삶 말이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세상 사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해요.

 

히브리서 11장의 허다한 증인들이 바로 구별된 삶을 살았어요.

그 시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자신의 삶이 차압당하는 삶을 살았어요.

물론 자발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이끌려서 산 것이지만!

믿음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는 약속을 위하여 세상에서 버려지는 삶을 살게 하였어요.

 

이처럼 믿음이 우리도 간섭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12제자들도 그렇게 살았고!

바울도 그렇게 살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살았어요.

 

성경 어디에 입으로만 나 십자가 안다! 라고 살아간 사람이 있는가요?

없어요.

그렇게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다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살았어요.

이게 십자가의 길이에요.

 

베드로가 그러지요.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예수님이 버려졌다고 한다면 성도도 버려진다는 말이에요.

버려져야 예수님과 한 통속이 되지요.

하나님께선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들을 주워서 하늘 예루살렘을 지어요.

그 모퉁이 돌은 예수님이세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입으로만 나 십자가 안다! 라는 것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아무 것도 안하고 믿는다고 큰 소리쳐요.

자기 부인(否認)과 버려짐이 없어요.

복음을 핑계대고 자기를 챙기는 겁니다.

이건 아니거든요.

 

근데 뭐라고 하면 어디 행함으로 구원받나요.

믿음으로 받지! 하면서 꼴값을 떨어요.

자기 부인(否認)이 없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에요.

 

바울이 어디 심심해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보라고 합니까?

할 말이 없어서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까?

아니에요.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라고 하잖아요.

두 눈이 있으면 좀 똑똑히 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는 말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에 매이지 말라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오는 세상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신앙의 싸움이란?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쳐서 복종 시키는 거예요.

육신이 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과 싸우는 거예요.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좀 헤아려 보라는 겁니다.

 

성도 안에는 성령이 계세요.

성령이 땅을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게 하세요.

나를 위해 살게 하지 않고 새 언약을 위해 살도록 하세요.

성도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동일한 구별된 삶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에 동참케 만들어요.

가치관을 바꿔 준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고난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지 자발적으로 고난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도 동일해요.

그런데 믿음이 이들을 간섭하니 고난의 삶으로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하늘에 있는 본향으로 끌고 가더란 말입니다.

 

하늘로 끌려 가다보니 자연히 세상 것으로부터는 멀어지는 겁니다.

결국 세상에선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나그네와 행인이란?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삶이란 말입니다.

 

믿음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예수님의 당하셨던 것과 같은 길로 인도하더란 겁니다.

너희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황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에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삶이 바로 11장의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 삶이에요.

의인은 어떻게 사느냐?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사는 겁니다.

 

믿음이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게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낙망하지 말고 아~ 믿음이 나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얽매이기 쉬운 죄란 무엇인가요?

 

어떻게 나타나겠어요?

이는 세상에서 정착하고 일락(一樂)을 즐기고 살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겠지요.

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의 삶을 벗어나려는 것으로 나타나요

 

히브리서 11장의 허다한 증인들은 한결같이 버려짐을 당한 삶을 살았는데 죄가 세상에서 정착하도록 하게 미혹을 해요.

십자가의 도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 육신은 자기 몸을 위하여 살라고 해요.

버려지지 않고 끌어안고자 해요.

죽고자 하지 않고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 육신이 끄는 대로 살게 내 버려두지 않고 자꾸만 간섭을 해요.

그러니 성도의 몸에선 죄가 터져 나오고!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예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성도는 이 두 사이에 끼여 있어요.

그러니 늘 탄식하게 되는 겁니다.

탄식하면서도 믿음에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죽을 맛인 겁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목사들이 그러잖아요.

축복이니 뭐니 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았으니 성도는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잖아요.

아니 구름같이 둘러선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말하고 있어요.

무슨 이런 개 같은 말이 있습니까?

 

아니~ 십자가가 세상에 대하여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인데!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바림당하는 것인데!

이들은 정착하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십자가를 이용해서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뚝뚝 흘리시는데!

어떻게 돈 많이 벌어서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까?

이건 가짜 목사들이 탐심으로 지어낸 말이에요.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죽인 곳이에요.

원수의 나라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죽인 원수의 나라에서 호의호식하고 빌붙어서 잘 살겠다고 합니까?

세상 기득권을 누리고 살겠다고 합니까?

 

이건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니 땅에 코 박고 잘 살고자 하는 거지요.

거듭나지 않으니 믿음으로 사는 것을 육적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거듭 났다는 것은 위로부터 났다는 말이잖아요.

하늘로부터 났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골 3:1-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보세요.

그리스도께 속하였느냐!

그럼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잖아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땅에서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합니까?

 

이 시대 축복을 외치는 목사들의 논리대로라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다 멍충이들이에요.

12제자도 바보 병신들이구요.

바보들이니 다 고난 받고 살다가 죽었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야말로 믿음으로 산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 간 성도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다 마귀의 종인 겁니다.

뱀의 후손이니 땅에 코를 박고 살라고 하지요.

 

바울은 자기 자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어요.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려고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세상 것을 얻고자 하지 않고 다 버리고 나그네와 행인처럼 다 벗어던지고 나아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운운하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느냐 에요.

 

바울은 이런 놈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빌 3:17-19=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 놈은 십자가의 원수래요.

그런 놈은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고 자기 배(먹고 사는 것)를 믿는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본적지가 하늘이 아니고 땅(흙)이니 땅에 일을 생각하지요.

그러니 세상 영광을 꿈꾸지요.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한 것이 뭡니까?

“종신토록 흙을 먹을찌니” 라고 했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신토록” 이라는 말이에요.

이는 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배로 땅을 기어 다니도록 한 겁니다.

땅을 기어 다니도록 한 것은 땅에 기운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땅은 저주가 올라와요.

그러니 땅에 기운을 받고 사는 뱀에 후손들은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거머리같이 배가 터져 죽으면서도 다고 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간마다 차고 넘치게 모으고 또 모으지만 그 모은 것에 눌려 죽고 마는 겁니다.

일평생 돈에 종노릇하면서 불안 불안하면서 사는 거예요.

배는 부를지 모르지만 그 영혼은 피폐하여 돈에 노예가 되어 사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그랬어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언적으로는 예수님 재림 직전의 교회 모습이에요.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어요.

교회마다 부흥이 되어서 돈이 차고 넘쳐요.

교인들마다 세상 물질에 풍부하여 부자로 살아요.

그런데 그 부(富)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요.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니 얼마나 불안 하겠어요.

재물은 언제 독수리처럼 날아갈지 모르는데 어찌 불안치 않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럽니다.

 

아이고~ 이 불쌍한 것들아!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발가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행복한 것이 아니고 불행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날 좀 본(本) 받으라고!

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내가 언제 세상 영광 바라고 사도 노릇한 적이 있느냐!

나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 하려고 살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았어요.

이는 바울이 잘나서가 아니라 믿음이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한 겁니다.

믿음이 바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겁니다.

 

믿음이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도록 한 겁니다.

세상 것이 배설물로 여겨지니 세상 것을 얻고자 하지 않지요.

믿음이 바울의 가치관을 바꿔 준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강해하면서 믿음을 기관차와 같다고 했지요.

 

우린 믿음이라는 기관차에 끌려가는 객차에요.

기관차가 끄는 대로 가요.

그 기관차 운전사가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로 돌진하세요.

그럼 우리도 십자가로 돌진해요.

예수님과 우리는 샴쌍둥이에요.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죽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 할 때 우리도 부활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얽매이기 쉬운 짐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허다한 증인들 모두가 세상 짐을 다 버리고 살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이들의 삶을 벗어난다는 말은 곧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따로 살겠다는 말이에요.

 

주의할 것은 이들과 같이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금욕주의나 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들의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닮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받은 자는 이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런 모습으로 인도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닥치거든 놀라지 말라는 겁니다.

지극히 정상이라는 거예요.

너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면 그건 다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다른 삶을 살겠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성령이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게 하세요.

믿음이 이리저리 끌고 다닌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증인들처럼 믿음이 그렇게 인도하세요.

 

하나님은 성도를 천국백성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천국백성 다운 삶을 살게 만들어요.

천국백성 다운 삶이 세상 분깃이 없는 겁니다.

믿음 속엔 세상 것이 없어요.

전부 하늘에 것만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가짜에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속엔 세상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잖아요.

 

믿음 속엔 보이는 것이 없어요.

보이는 것이란? 세상 것을 말해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세요.

하늘에 것을 보라고 믿음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성도는 하늘에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이 믿음으로 부활의 권능에 동참하려고 좇아간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그 길을 갔어요.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동일해요.

지금도 동일한 믿음을 받은 성도는 그 믿음이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로 인도하세요.

세상 적으로는 일이 자꾸만 꼬이게 되는 겁니다.

 

복음을 받으면 고난이 닥쳐요.

마귀가 야~ 저 놈 예수쟁이다!

알아봐요.

 

그러니 자연히 미움 받고 욕을 먹게 되는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버림당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우리 생각과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만들어요.

 

우리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복이에요.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에요.

육으로 보면 실패인데 영적으론 성공인 겁니다.

이건 땅에 속한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역설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하늘에 복을 주어도 몰라요.

하나님은 복이라고 주었는데도!

뭐! 이런 것이 있어! 하고 갖다 버려요.

 

천국 간다고 하면서 세상 백성과 동일한 사고로 살아간다면 천국백성이 아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으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심보에요.

신앙생활은 삶이기 때문에 삶에는 반드시 살아온 흔적이 남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반드시 믿는 것에 대한 삶에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은 믿음으로 살아온 삶에 흔적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증인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히브리서를 보는 성도들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1절에 “이러므로” 라는 말은 “그러니까” 라는 말과 같아요.

 

이는 성도들을 경계시키고자 하는 말입니다.

앞선 믿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는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눈 똑똑히 뜨고 바라보라는 거예요.

 

믿음이 나로 하여금 이들과 같은 삶으로 인도 한다면 그는 구원된 자입니다.

이런 일들이 나타나거든 아~ 주께서 나를 간섭하시는구나를 알고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삶을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들과 같은 동질의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이들과 같은 삶을 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과 같이 끌고 갈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게 하는 힘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버림당하도록 인도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나의 신앙생활의 삶에 원동력이 무엇이냐를 확인하여야 합니다.

억지로 고난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고난 받는게 신앙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예수를 믿으니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그러니 그런 일이 닥치거든 놀라지 말라고 하잖아요.

내가 미리 말해 주었다고 했잖아요.

 

중요한 말 하나 하고 갑시다.

믿음이 이런 삶을 살게 하였으면 그는 구원받은 신자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는 신자가 아니고 종교인이에요.

고난은 우리가 자처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당하도록 하세요.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하게 하세요.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길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였다는 것이 곧 믿음이 그를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는 또 다시 구름 같은 증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증인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의 표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히브리서 11장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 완성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히 11장 사람들의 삶이 다 들어있어요.

 

매 맞음과 찢김,

멸시와 조롱,

고난과 아픔,

좌절과 슬픔,

버림과 외면이 다 들어가 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당하셨습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요.

무시당하는 일이 생기고,

고난당하는 일이 생기고,

버림당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고후 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지금 사도된 것을 고난당함으로 말하고 있어요.

큰 교회 꿰 차고 희희낙락 한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한 증거로 내어 놓고 있지 않아요.

도리어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 거짓 종들이 세상 가치관으로 사도의 표로 삼고 교인들을 미혹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정 반대의 증거를 내어 놓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갖가지 고난을 당했어요.

 

옥에 갇히고,

매 맞고,

욕 먹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거지 같이 살았다는 겁니다.

얼굴에 기름기가 번지르르 흐른 게 아니고 땟국물이 자르르르 흘렀어요.

아무도 저런 사람이 사도라고는 짐작 할 수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육적 가치로 판단하잖아요.

복음 전하는 분들을 보면 하나같이 볼품이 없어요.

변변하게 내 세울 것이 없어요.

무시당하기 딱 십상이에요.

 

여러분! 모세가 광야 생활을 사십년을 했어요.

사십년 동안 양치기로 살았어요.

광야에서 온갖 풍상(風霜)을 겪은 사람의 몰골이란 말이 아니지요.

 

그런 형편없는 사람이 바로 왕 앞에 섰어요.

바로 왕은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어서 기름기가 번지르르 흘렀어요.

그런 사람 앞에 피골이 상접한 노인네가 지팡이 하나 들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내가 여호와의 명을 받고 왔다고 합니다.

 

바로 왕이 보니 기가 찬 겁니다.

웬 거지 깽깽이 같은 놈이 나는 여호와 이름으로 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그러니 바로가 그럽니다.

야~ 너를 보낸 여호와가 누군데!

그 놈이 도대체 어떤 놈이 길래 너 같은 이런 거지 깽깽이를 사자라고 보냈느냐!

참으로 가지~ 가지 한다고 비웃을 만 하지요.

우리라도 비웃겠어요.

 

저도 이런 수모를 많이 겪었어요.

누굴 만나면 먼저 아래 위로 쭉 훑어보잖아요.

훑어보면서 쓴 웃음을 짓잖아요.

훑는 모습 속에는 야~ 니가 목사냐 라고 비웃고 조소하는 것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요.

 

속으로 그러는 것 같아요.

야~ 니가 목사면 나는 예수다!

니 같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이라면 난 듣기 싫다!

너나 잘하세요!

그러는 것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은 하나님도 힘으로 평가해요.

교회가 크면 하나님이 있는 교회이고!

교회가 작으면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해요.

 

개척교회 목사는 큰 교회 집사만도 못해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얼마 전에 저에게 들렸어요.

복음엔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인데 과거에 친분이 있어서 집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하면서 지나는 길에 잠시 교회에 들른 겁니다.

 

부산에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가는 길에 들렀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 큰 수영로 교회에서 미 자립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을 초청해서 위로한답시고 한 모양입니다.

 

시골 교회라서 아마도 그 교회로부터 보조금을 조금 받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참석을 한 겁니다.

불러 놓곤 은근히 기를 죽인다는 겁니다.

 

그리곤 녹차 찻잔 셋트를 하나 받아 왔어요.

이것도 어디서 협찬을 받은 겁니다.

기분 나쁘다고 하면서 그 찻잔을 저에게 주고 갔어요.

제가 지금 잘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푸념하기를 에이~ 더러워서 참석 못하겠다고 합니다.

나쁜 놈들이 말이야!

교회 좀 크다고 어찌나 사람을 깔보는지 화가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게 왜? 그런 곳에 참석을 합니까?

보조 받으니 안 갈수도 없으니 가긴 갔지만 영 찜찜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사람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짐승은 무게로 판단해요.

짐승은 근수가 많아 나가면 비싸지만!

 

사람은 그 속에 뭘 담고 있는 지로 가치가 달라져요.

덩치가 산만해도 실업자면 교통사고로 죽으면 일당 오만 원 계산해서 줘요.

하지만 작아도 판, 검사가 되면 수십억 원이 나와요.

 

하나님은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해요.

큰 교회에 있느냐 작은 교회에 있느냐로 판단하지 않아요.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해요.

예수의 생명이 있으면 사람의 가치로 보고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짐승의 가치로 판단해요.

 

그러니 교회가 덩치로 판단 한다는 것은 짐승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큰 교회 목사는 귀하게 여기고 작은 교회 목사는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여기에 열 받아서 울고 불고 하면 그 사람도 같은 짐승과 에요.

 

똑 같은 짐승이기 때문에 에이~ 더러워서 나도 교회 키워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힘으로 살기 때문에 힘을 가지고자 하는 겁니다.

교회 큰 것을 부러워하거나 교회 작은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교회가 크면 똑 같이 그 짓을 할 사람이에요.

짐승이니까요.

그러니 작은 것으로 무시당한 것을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러려니 해요.

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수모라고 생각해요.

당연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십자가를 말하면서 교회 키우고자 하면 의심해 보아야 해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고자 하면 이상한 겁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를 이용해서 교회 부흥시키고자 꼼수를 쓰고 있는 겁니다.

복음 증거 자체로 만족하여야지 복음으로 뭔가 해 보고자 하는 것은 술수에요.

그건 교회를 키우고자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이지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내가 살고자 하는 것조차 죄라고 하기 때문에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를 가지고 장난치고자 하지 않아요.

암튼 십자가 복음 운운하면서 세상에서 뭔가 잘 되고자 하는 것은 전부 가짜에요.

육으로 십자가를 이해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이용해서 뭔가 하고자 꼼수를 부리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능력이 넘치는 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고 한다면 위엄 있고 번쩍 번쩍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믿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도 그래요.

 

예수님이 명문 세도가의 집안이나 고관대작 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안 죽어요.

그런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무시당하도록 태어났어요.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무시당하도록 외모로는 형편이 없었어요.

구약에 선지자들도 궁중에서 왕에게 아부하면서 빌붙어서 먹고 사는 거짓 선지자들과 비교하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하나같이 모두가 무시당하고 그들의 말이 먹히지 않는 겁니다.

다 우습게 여겼다고요.

 

에라이~ 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지!

그랬다구요.

이는 모두가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눈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 알아보아요.

 

지금도 동일해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분리될 수가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이 웃을 때 같이 웃고, 예수님이 울 때 같이 울어야 해요.

 

예수님이 우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탄식하는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파 할 때 함께 아파하여야 하고,

슬퍼 할 때 함께 슬퍼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해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근거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살펴봐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언제 웃었고!

언제 울었으며!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증인들은 성도들에게 교훈이 되면서도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닥치면 당황하지 말고!

아~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고난이 닥치면 아~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통하여서 승리 하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실패 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이지!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시고 조롱당하고 고난당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 라는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통해서 그러셨지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구약에 선지자들도 다 이런 대접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고난이 없어야지 하면 당황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에요.

그러니 십자가 정신으로 살다가 불이익 당하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미움당하고 버림당하여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야~ 하나님이 히브리서 11장에 내 이름을 등재케 하려고 그러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이에요.

십자가는 이쪽(세상)에서 보면 저주이지만 저쪽(천국)에서 보면 영생이에요.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마귀가 당신은 하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겁니다.

 

바울은 사도를 세상 미말에 죽이기로 작정한 자로 두셨다고 했어요.

만물에 찌끼 같이 구경거리로 두셨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죽임 당하고 오라고 합니다.

 

퀴즈하나 낼 테니 맞춰보세요.

 

마귀 손에 죽을래요!

하나님 손에 죽을래요!

 

누구 손에 죽을래요.

 

마귀 손에 죽으면 천당 가고 하나님 손에 죽으면 지옥가요.

마귀 손에 죽임 당하고 천국에 간 믿음에 형제들이 바로 허다한 증인들인 겁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죽고 오래요.

 

그러니 살고자 예수 믿지 말고 죽고자 예수 믿으셔야 해요.

성공하고자 예수 믿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당한다고 예수 믿어야 해요.

이건 억지로 죽고 고난당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누가 이런 복음을 들으려고 하겠어요.

누가 이런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를 좋아하겠으며 이런 말씀이 증거되는 교회로 가고자 하겠어요.

그러니 복음이 증거되는 곳엔 항상 파리만 날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이런 말씀을 복음으로 듣고 기뻐하세요.

찾는 이가 적지만 분명한 것은 있어요.

그 작은 자들을 찾기 위해서 복음은 지금도 증거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허다한 증인이 되세요.

주께서 허다한 증인처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이 관념이나 추상으로 남지 말게 하시고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일을 시작 하신 이가 주님이시니 끝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살다가 버림당하고 욕먹는 일들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고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