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강해

4강. 지상에서 영원으로

정낙원 2011. 9. 12. 08:56

4강. 지상에서 영원으로 (룻 1:19-22)

 

1:19-22.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오늘 제목이 참 멋집니다.

무슨 영화 제목 같습니다.

직역하면 땅에서 하늘로란 뜻입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란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사를 함축하고 있는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라는 한 여인이 저주받은 모압 땅 지상에서 생명의 떡이 있는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베들레헴으로 올라온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영원으로’입니다.

 

오늘은 나오미가 풍족하게 나아갔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왜 축복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압에서 성공하여 부자가 된 것이 축복이 아니고,

망하여 다 털어먹고 거지로 돌아오는 것이 어째서 복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복에 개념을 허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기독교 방송을 보면 간증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 출연하는 분들은 모두가 흥하게 하는 하나님을 간증합니다.

내용들이 거의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대부분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사업에 실패하였다가 성공하였다는 간증들입니다.

모두가 흥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세상에서 우러름을 받고, 영광 받고 성공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집니다.

자연히 힘 있는 자가 강한 자이고 성공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너도나도 힘 갖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몸은 힘의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힘 있는 사람 앞에선 주눅이 들어요.

 

이건 내가 힘을 가져 보면 알아요.

그 힘으로 남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져요.

돈이라도 많고, 높아지고, 권력이라도 가져 보세요.

남에게 뻐기고 싶고 잘난 척하고 싶어져요.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어진다니까요.

 

좋은 차라도 타 보세요.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어지잖아요.

이게 힘의 원리에요.

이 본능이 나보다 높거나, 잘 살거나, 강한 자 앞에 서면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선 힘 있음이 성공이고, 힘 없음이 실패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사업이 망하거나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거나 집안에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창피하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합니다.

창피한 것은 하나님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도 잘난 자로 남기 위해서 불철주야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힘 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기 이름을 내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앉아서 호령하고 싶어 합니다.

신조차도 자기 뜻대로 부리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잘 아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성공자가 되라고 합니다.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시상식에서 상 하나 받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구 경기에서 골 하나 넣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공격수는 하나님께 골을 넣게 해 주어서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골키퍼는 골을 막아서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합니다.

공격수의 기도를 들어주어야 합니까?

골키퍼의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할까요?

이 시대 교인들의 상식으로 본다면 아마도 그날 먼저 새벽 기도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어야겠지요.

 

왜 이런 하나님이 교인들 머리에 각인이 되었을까요?

이는 성경을 닫고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인간의 소원성취만 해 주면 그게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교회사 속에서 늘 반복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구약 교회를 보고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 백성이 무지하여 망한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울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교회마다 왜 흥하게 하는 하나님을 간증할까요?

그래야 전도가 되고 교회가 부흥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면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라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예수 믿고 복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간증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지요.

 

사람들의 관심사는 “예수냐! 부처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이든 부처이든지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내가 중요하지 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면 족합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으로 자기를 흥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비성경적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라는 여인이 간증합니다.

그런데 간증이 요즈음 교회에서 듣도 보도 못한 하나님을 간증합니다.

흥하게 하는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간증이란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만났다고 증거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는 “나는 망하게 하는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을 비교하면 뭔가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멀리 하늘 꼭대기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삶 속에서 함께 부대끼는 분이란 말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부대끼는 하나님이란 추상의 하나님이 아니고 실재하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실재이듯이 하나님도 나와 실제로 동행하십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을 떠났다가 징계당하였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면 얻어맞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를 간섭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도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삶 자체가 늘 사건의 연속인 겁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성도를 간섭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으면 잠시라도 가만두지 않고 간섭하시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너무 간섭당하므로 싫은 겁니다.

 

간섭은 사랑입니다.

반대로 무관심은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이 간섭하면 싫어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간섭을 싫어하듯이 싫습니다.

왜 싫어합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걸 자유라고 여기거든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죄는 ‘내가 왕이다’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가 자기 안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린 ‘나’라는 자아에게 가두어져 있어요.

자기의 종이에요.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처럼 자기 안에 가두어진 우리를 빼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아로부터 빼내서 피안으로 불러들이고자 합니다.

여기서 피안(彼岸)이란 예수님 안을 말합니다.

나를 벗어난 저 너머의 세계 그곳이 바로 예수님 안입니다.

이걸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나’라는 자아가 없는 곳입니다.

거긴 예수 안입니다.

천국은 예수로 충만한 곳입니다.

내가 없고 예수로 충만하기 때문에 천국인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고통도 사라집니다.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내가 죽으면 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지나온 사람은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나로 살아갑니다.

이걸 바울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 사는 나는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사는 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우린 원래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죄가 나를 자기 안에 가두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나’입니다.

눈만 뜨면 ‘나’입니다.

 

이러한 ‘나’로부터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나 밖에서 누군가가 빼내 주어야지만 합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로부터 빼내서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예수 안으로 넣어주세요.

드디어 자아로부터 탈출입니다.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요.

신앙은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역설적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살든 못 살든 그건 둘째 치고 원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를 기준으로 해서 우리 신앙을 달아보아야 합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우린 악당들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하나님이 함께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순전히 자기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잘 해 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사형통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 뜻을 온전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죄인입니다.

우리 몸은 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를 통해서 말씀하시길 나는 너희들 마음대로 살도록 방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철회시키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은 반드시 언약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약 안으로 불러들이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건을 우리 몸에 새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몸에서 사건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간섭하심 안에 있는 성도는 늘 사건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란 말은 곧 귀찮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만 터진다는 말입니다.

 

이게 복이에요.

하나님은 복으로 간섭하시는데 우린 그걸 복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주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복입니다.

죽여도 복이고 살려도 복입니다.

망하게 하여도 복이고 흥하게 하여도 복입니다.

아프게 하여도 복이고 낫게 하여도 복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복 아닌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는 나오미처럼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어도 복입니다.

과부가 되어도 복이에요.

 

복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다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바탕에 깔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 들지 않습니다.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전에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옛사람은 땅에서 난 사람인데 새로운 피조물은 하늘로부터 낳습니다.

옛사람은 땅을 지향하고 새 사람은 하늘을 지향합니다.

 

땅에서 난 옛사람은 땅 신을 섬기고,

하늘로서 난 새 사람은 하늘 신을 섬깁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은 다릅니다.

하늘의 신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땅의 신은 마귀라고 합니다.

땅의 신인 마귀는 땅의 것을 주고,

하늘의 신인 하나님은 하늘의 것을 줍니다.

 

마귀는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하고,

하나님은 땅에서 빼내 하늘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마귀는 땅의 것을 주어서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은 땅의 것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땅을 떠나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 모압은 이 세상을 말하고, 베들레헴은 하늘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모압의 신이 있고, 베들레헴의 신이 있습니다.

모압의 신을 마귀라고 하고,

베들레헴의 신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고향이니까 베들레헴의 신은 예수님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입니다.

땅의 사람은 땅에 코를 박고 살다가 지옥으로 가고,

하늘의 사람은 하늘을 지향하고 살다가 천국으로 갑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하나님이 양과 염소를 심판하실 때 각자에게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양은 천국으로 들어가고, 염소는 지옥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창세로부터 이미 예비가 된 ‘나라’라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천지(天地)란 천국과 지옥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당연히 천국 백성도 있고 지옥 백성도 있습니다.

천국 백성은 천국 백성답게 살다가 천국으로 가고,

지옥 백성은 지옥 백성답게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흔히들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팔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팔자는 타고 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넌 이렇게 살다가 오라고 했습니다.

팔자는 우리가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팔자를 우리가 결정한다고 하면 모두가 다 대통령이 되고, 다 재벌이 되고, 다 무병장수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우리가 그렇게 소원하여도 대통령이 못 되고, 재벌도 못 되고, 몸도 건강치 못하고 병들고 아픕니다.

 

무엇하나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원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왜 내 인생인데도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습니까?

이는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세상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우린 우리 팔자를 우리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팔자가 우리 힘으로 고쳐진다고 한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고,

저도 이런 목사 노릇을 하지 않을 겁니다.

목사를 해도 이런 목회하지 않겠지요.

교주 노릇 하고 싶겠지요.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과 본성은 다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해서 본성이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왕 노릇 하고자 하는 본성은 늘 꿈틀거립니다.

 

우리는 이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행하고 삽니다.

죄를 안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뿐이지 몸은 그대로입니다.

이게 죄인의 실존이고 한계입니다.

 

본성은 죄를 멀리하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즐기고자 하고 죄의 소욕을 버리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너무도 달콤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도 우리 본성은 늘 죄가 지향하는 것을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복음을 말하면서도 본성은 반복음적으로 사람 많이 모아서 큰 교회를 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비단 저만의 마음이 아니고 모든 목사들의 마음일 겁니다.

저도 내 마음대로 안 되니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목사 됨은 내 뜻이 아니고 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강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뜻을 이길 수가 없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욕먹어 가면서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연극배우입니다.

연극배우란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연극을 하십니다.

그 연극에 우리를 배우로 캐스팅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독이 되어서 그 역할에 잘 맞는 배우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필요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한 그릇을 만드신 겁니다.

그릇은 우리들이에요.

그러므로 우린 모두가 연극배우들인 것입니다.

배우는 감독이 맡겨준 배역을 하면 됩니다.

 

성도는 예수를 믿는 배역을 맡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큰 영광이고 축복입니까.

이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제발 이 깨달음이 여러분의 정체성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야! 어쩌자고 예수 안 믿는 배역이 아니고, 예수 믿는 배역을 맡았을까!’

놀라고 놀라야 합니다.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에 좀 흥분하십시오.

벙어리 꿀 먹은 것처럼 있지 말고!

 

우리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보고 측은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배역을 맡았어요.

긍휼의 그릇으로 배역을 맡았든지 진노의 그릇으로 배역을 맡았든지 맡았어요.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창조가 되었고,

바로는 진로의 그릇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무당하고 싶어서 무당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반면에 목사하고 싶어서 목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맡겼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싶어서 예수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반면에 절간에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배역을 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어떤 사람은 부처를 믿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오르바는 마귀를 찾아가고, 룻은 하나님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린 모두가 끌려가는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창세로부터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가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역(逆)으로 말하면 영벌 받기로 작정 된 자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영벌 받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

 

야곱 속에는 영생의 능력이 끌어당기고,

에서 속에는 영벌의 능력이 끌어당깁니다.

각자의 권세가 이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야곱은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립니다.

이건 야곱의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기어코 팥죽을 주고서 장자권을 삽니다.

 

야곱은 엄마의 도움으로 장자의 축복도 받아 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자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리브가가 장자의 축복을 받으라고 하자 도리어 거절했어요.

복은 고사하고 저주 받을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모든 일을 다 꾸밉니다.

 

야곱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의 도움으로 장자의 축복권까지 쟁취합니다.

이는 모두가 야곱이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주변 환경도 야곱이 영생의 길로 가도록 몰아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하신 겁니다.

 

장자권이란 신약에선 구원권을 말합니다.

야곱은 구원이 팥죽보다 소중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형 에서에게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샀습니다.

팥죽이란 먹고 살아갈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먹고 살아가는 일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팥죽을 버리고 장자권을 택합니다.

 

반면에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깁니다.

에서는 장자권보다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팥죽과 장자권을 바꿔버립니다.

이건 에서의 마음에 영생을 열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마음엔 땅의 신이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에서의 이러한 행동을 히브리서에선 망령된 것이라고 합니다.

 

12:15-16.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망령되다는 말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절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서를 일컬어 음행하는 자라고 하고 망령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야곱과 에서는 장자권을 놓고 이렇게 다른 태도를 취할까요?

이는 그들의 영적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늘에 속하였고,

에서는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이러한 구조를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토기장이신 하나님이 흙을 가지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원래 없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들어졌어요.

그러니 왜 나에게 악역을 맡겼느냐 탓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입장에서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한 악인들을 지옥에 보내는 겁니다.

지옥에 누가 가느냐 하면 감사치 못하는 자들이 가요.

지옥에 가면 전부 원망하는 자들과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 채워졌어요.

 

여기서도 억울하다 저기서도 억울하다

여기서도 개굴개굴!

저기서도 개굴개굴!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귀신의 영을 개구리 같은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마귀 자식들의 특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 자식들의 특성이 매사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엔 감사하는 자들이 갑니다.

이렇게 해도 감사!

저렇게 해도 감사!

망해도 감사!

흥해도 감사!

무엇이 그리 감사할 일이 많은지!

그저 감사해요.

 

이건 자신이 처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니 모두가 감사 거리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여기서도 감사 저기서도 감사 찬양하는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 소리처럼 메아리치는 겁니다.

이 땅에서도 은혜를 아는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건 그냥 우수갯소리로 하는 말이니 참고로 들으세요.

 

어떤 분이 꿈에 천국과 지옥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진수성찬(珍羞盛饌)이 차려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백성들은 전부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살이 포동포동한데,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피골이 상접해 해골처럼 비쩍 말라 있더랍니다.

이렇게 귀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왜 그럴까?

의아해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이 밥을 먹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이나 지옥 백성 모두에게 동일하게 기다란 젓가락을 주고 먹게 하더랍니다.

젓가락이 길어서 자기 입에 음식을 넣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백성은 젓가락에 음식을 집어서 상대방 입에 넣어주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사로가 다 배불리 먹는 겁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 식사 자리가 화기애애하고 웃음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입에다가 음식을 집어넣고자 하는데,

젓가락이 길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부딪치다 보니 하나도 먹지 못하는 겁니다.

긴 젓가락으로 자기 입에 넣으려고 하니 음식은 하나도 먹지 못하고 다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니 얼굴에 분노가 가득하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 때문이라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쌈박질하면서 이빨만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겁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하면 “당신 때문에 내가 삽니다!”라고 감사하는 곳이고,

지옥은 어떤 곳인가 하면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라고 원망하는 곳입니다.

천국 안에 있는 사람은 “다 내 잘못이야”라고 하고,

지옥에 있는 사람은 “다 당신 잘못이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감사하며 살고,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삽니다.

감사와 불평은 깨달음과 안목의 차이입니다.

동일한 환경이나 조건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깨닫느냐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감사가 되지만, 자기 입장에서 보면 원망이 생깁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니 매사가 불평이고 불만인 겁니다.

 

성도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였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요.

반면에 불신자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데?’라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어떻게 동일한 조건에서 상반된 반응들이 나타납니까?

이는 그 안에 각자의 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신이 그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그 안에 있으면 마귀 짓을 하고 예수님이 그 안에 있으면 예수님 짓을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자 신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신에 부속이 되어 있습니다.

땅 신에 부속이 되었든지, 하늘 신에 부속이 되었든지 합니다.

땅 신에 부속된 자는 땅 신을 찾아가고,

하늘 신에 부속된 자는 하늘 신을 찾아갑니다.

이는 신이 자기 백성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모압 신을 찾아갔고,

룻은 베들레헴 신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압 신은 땅 신이고,

베들레헴 신은 하늘 신입니다.

오르바는 땅 신에 부속하였고,

룻은 하늘 신에 부속되었습니다.

각자의 신이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룻을 칭찬하거나 오르바를 욕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건 이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각자의 신이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을 간섭하신 여호와를 찬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의 행동의 배후에는 각자의 신이 있어요.

 

그러므로 룻이 나오미의 청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따라나선 일을 가지고 룻을 칭찬해서는 안 되고 룻을 간섭하신 신을 찬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룻을 간섭하신 신이 바로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러니 룻을 칭찬해서는 안 되고 룻을 룻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이 장면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9:20-27.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잡니다.

이때 함은 아비의 수치를 보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수치를 덮어줍니다.

 

노아가 잠이 깨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식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내 수치를 가렸느냐?

그러자 셈과 야벳이 그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노아가 셈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 셈을 찬양하지 않고 셈의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이는 셈의 이러한 행동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셈을 이렇게 행동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셈이 행동한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셈의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성도가 행한 그 행함의 바탕엔 하나님이 계세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봉사나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해서는 안 되고 예수를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충성한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봉사하고 충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교회 오고, 봉사하고, 헌금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들을 이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듣겠다고 여기까지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들이 봉사하고 헌금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다윗이 하였어요.

 

역대상 29장을 봅시다.

 

대상 29:10-17.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백성들에게 헌물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과분할 정도로 많이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에 다윗이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이런 것을 바칠 수 있도록 그 마음들을 움직여 주셨나이까! 라고 감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마음을 동하게 해 주시나이까! 라고 감사했어요.

예물을 바친 백성들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헌물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사람들의 안목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천지가 하나님 것이라고 합니다.

부(富)와 귀(貴)가 하나님께로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자 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마음도 다스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마음도 주께서 일으킨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이 너무도 귀한 겁니다.

그래서 기쁜 겁니다.

 

저의 기쁨도 그러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기쁜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 일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성도만이 할 수가 있어요.

성령으로 거듭난 은혜 받은 성도만이 할 수가 있어요.

구약의 성막에 수종 드는 사람들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자들만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와 충성과 헌금도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성도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지만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은 헌금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봉사와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일을 근거로 자기 의를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억지로 한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는 불쏘시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받지 못한 사람에게 교회 일을 맡겨서도 안 되고 하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린 죄 아래서 출생했어요.

나 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일 날에 놀러 가지 않고 교회에 온 것입니다.

와서 놀지 않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에요.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깁니까?

용서하고,

참아주고,

섬기고,

베풉니까?

이 모두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간섭하고 계시니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주님의 간섭하심에 “할렐루야!”입니다.

 

전 여러분들이 이 긴 글을 보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건 아무나 볼 수 있는 글이 아니에요.

제가 글을 길게 써서 죄송하다고 하면 도리어 많은 분들이 글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되레 요즘 글이 짧아졌다고 합니다.

이 무슨 조화입니까?

모두가 주의 은혜가 그분들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안에도 글을 안 보는 분들이 있어요.

밥상을 차려 놓아도 안 먹어요.

이 웬수들이!

어쩌겠습니까?

밥맛이 없다는데.

하도 세상 것을 많이 처먹어서 하나님 말씀은 거들떠보기 싫다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우는 겁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저런 악당들을 내게 붙여서 이런 고역을 당하게 하십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저런 악당들의 영혼을 걱정하고 기도하여야 합니까?”라고 항의를 한답니다.

자식이 밥을 안 먹으면 엄마 마음이 미어지듯이 저도 교인들이 시름시름 앓으면 마음이 아파요.

아주 많이!

 

무슨 팔자가 이렇습니까?

내 팔자를 이렇게 만든 분을 원망해야지요.

그래서 전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산답니다.

“하나님, 정말 이럴 겁니까?”

술 취한 사람의 넋두리 같지만 취중진담입니다.

새겨들으세요.

 

암튼 성도가 행하는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하셔서 하는 일입니다.

청소하는 것도,

밥하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교회에 일찍 나오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본성에 반(反)하는 일들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의 모든 것에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알고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일만 주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도 주신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이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본성과 반(反)하는 결정을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너, 하나님 섬기면 죽는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룻은 “그래도 좋습니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 손에 죽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러면 감당이 안 됩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룻의 결심을 하나님의 결심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베들레헴에 올라오자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여자가 나오미가 아니냐?

이 사람이 진정 나오미란 말인가?

이 말은 비웃는 말입니다.

조롱하는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당하고 잘 나가던 사람이 왜 이 모양 요 꼴이 되었는고?

어쩌다가 남편을 잡아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두 아들까지 잡아먹었는고?

꼴 좋다!

싫다고 떠나갈 땐 언제고, 이제 무슨 염치로 왔느냐?

 

어쩌면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에요.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자 살기 어렵다고 저 혼자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기근이 들면 합심해서 살 궁리를 해야지.

그래, 저 혼자 살고자 이방 나라로 이사 가느냐?

고향이 싫다고 떠났으면 잘 살든가,

돌아오긴 왜 돌아왔어?

돌아오려면 성공해서 돌아오든가 하지,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건 무슨 심보냐?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짐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자기 경내에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가 있으면 그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5장을 봅시다.

 

15:7-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하나님은 법으로 이스라엘 경내엔 가난한 자가 없도록 하셨어요.

한마디로 굶어 죽은 자가 없게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동네에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까?

그래서 경내에서 누가 굶어 죽으면 하나님께서 그 동네에 책임을 물어서 징치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가 과부가 되어서 베들레헴 경내에 들어온 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외면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대로 라면 이들을 외면하면 베들레헴 자체가 혼나게 생겼어요.

그러니 얼마나 밉겠어요.

 

그런데 나오미는 며느리라는 혹까지 붙이고 왔습니다.

두 과부가 온 겁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는 짐입니다.

그러니 베들레헴 사람들에게는 미운 존재인 겁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조롱하는 겁니다.

나오미는 온갖 조소를 당하여도 할 말이 없어요.

죄인이니까요.

 

그러자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

‘나오미’란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만족함이란 뜻입니다.

‘마라’란 슬픔이고 괴로움이란 말입니다.

 

‘나오미’와 ‘마라’는 전혀 상반된 이름입니다.

쉬운 말로 나오미는 천국의 이름이고, 마라는 지옥의 이름입니다.

나오미의 고백 속에는 나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여자라는 고백이 담겨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오미의 이 고백 속에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도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날 봐라!

하나님을 떠나면 나처럼 망한다 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경험자가 되어서 너희들도 하나님을 떠나면 나처럼 슬프고 괴로운 인생이 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본보기라고 말해줍니다.

 

나오미는 스스로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떠났다가 식겁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아 날 똑똑히 보세요!

나는 하나님을 떠났다가 남편도 잡아먹고 두 아들까지 잡아먹고 과부가 되어서,

이젠 얻어먹고 살아가는 거지가 되었어요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마세요.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떠나면 나처럼 거지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시청각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떠날 때는 기쁨의 여인이었지만 이젠 슬픔의 여인입니다.

기쁨의 나오미에서 슬픔의 마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복자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얻어터지고 이스라엘로 바뀐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약탈자 또는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우는 자’ 또는 ‘하나님과 싸워서 얻어맞을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얻어터지고 이스라엘로 바뀌었듯이,

나오미도 모압에서 하나님께 얻어터지고 마라로 바뀐 것입니다.

이건 탕자가 집을 나갈 땐 아들로 나갔지만 돌아올 땐 종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아요.

좌우지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슬픔을 안고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암튼 나오미는 슬픈 여인이 되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나오미의 2기 인생이 시작됩니다.

1기 인생이 모압에서의 인생이었다고 한다면,

2기 인생은 과부로서 베들레헴에서의 인생입니다.

 

이걸 구속사적으로 말하면 나오미의 1기 인생은 옛사람의 죽음에 인생이라고 한다면,

2기 인생은 새 사람으로서의 인생입니다.

1기 인생에선 나오미로 살았지만, 2기 인생은 마라로 삽니다.

그 마라의 인생이 룻에게로 귀속이 됩니다.

 

그러므로 룻은 나오미의 2기 인생인 마라로서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부터는 나오미는 빠지고 룻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건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요셉이 등장한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은 산 자입니다.

 

나오미의 베들레헴의 삶은 거듭난 성도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같은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기업을 이어가게 하시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망한 가문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어떻게 축복으로 만들어가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앞으로 살펴볼 내용입니다.

 

오늘은 나오미의 신앙고백을 살펴봅니다.

신앙고백이란 경험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경험된 것같이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추상적인 하나님을 실상으로 만나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직접 만남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십니다.

이 앎을 히브리어로 ‘야다’ 라고 합니다.

 

‘야다’ 라는 말은 부부관계로 알아진 앎을 말합니다.

실제 경험으로 알아진 관계를 말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 되기 전에는 남남입니다.

알아도 지식으로 추상적으로만 압니다.

 

그런데 부부는 잠자리로 한 몸이 됩니다.

둘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젠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압니다.

 

부부란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넌, 내꺼!”라는 말입니다.

너와 나는 한 몸이란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나온 것과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예수님과 성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우리 성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켜 놓은 겁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몸으로 만듭니다.

이게 구원이고 결혼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를 부부로 묘사하는 것도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한 몸이 되어야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찾으러 오셨어요.

그래서 여자를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에서 성도를 빼내서 세상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리곤 예수를 보내서 찾아오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 알갱이라도 빠짐없이 다 찾아내십니다.

 

이를 두고 요한복음 10장에선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어찌 압니까?

이는 창세전에 한 몸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예수님과 한 몸이었던 자들은 한눈에 척 알아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면 척척 달라붙어요.

이는 예수님이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석처럼 지나가면 하늘에 속한 성도들을 척척 달라붙어요.

이걸 하나님께서 이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부부간에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 잠자리를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를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사랑이 없는 자는 가짜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지식으로 알고 관념으로 믿는 자는 성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를 배워서 아는 자와 예수와 한 몸으로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를 배워서 아는 자는 신앙생활이 지식으로 흐르고,

예수와 한 몸으로 사는 성도는 신앙생활이 예수님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삶(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날마다 예수님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선 예수님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시금석이에요.

열매로 나무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이 없는 자들은 다 가짜에요.

예수님과 같은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걸어온 그 길로 몰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이 나오지 않으면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납니다.

성도는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자기 몸에서 예수님의 흔적들이 나타날 때 기쁩니다.

도리어 이러한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복음에 반하는 삶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맛 본 사람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해요.

늘 갈망하게 되어 있어요.

쉬운 말로 예수님과 하룻 밤 자 본 사람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요.

그 사랑을 갈급해 합니다.

이건 마치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처럼 솔로몬의 키스를 받고 난 후 그 맛을 잊지 못해서 상사병이 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눈만 뜨면 솔로몬에게 제발 그 달콤한 키스를 다시 한번 해 달라고 “키스 미 키스” 애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맛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옛말에 겉궁합은 안 맞아도 속궁합이 맞으면 산다는 말도 부부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부부 금실이 좋다는 말은 속궁합이 맞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나오미는 하나님과 하룻 밤을 잔 겁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실제로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보다 나오미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요.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알아요.

나오미처럼 경험된 하나님이 없어요.

 

탕자 비유에서 보면 맏아들과 탕자가 나옵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집을 떠나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아버지 집의 고마움도 알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알았습니다.

 

집에 있을 땐 아버지의 사랑을 추상적으로만 알았어요.

그러나 집을 떠나서는 실상으로 알게 되었어요.

집을 떠나 개 고생을 하면서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

또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이라도 좋으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의 사랑도 모르고 아버지 집의 고마움도 몰라요.

추상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엄위하신 아버지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는 엄위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를 알았어요.

탕자도 집에 있을 땐 엄위하신 아버지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집을 떠나 망하고 보니 엄위하신 아버지가 아니고 사랑의 아버지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허물을 보지 않고 용서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입히시고 먹이시는 아버지란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을 대합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철이 없을 때는 아버지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법으로 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를 법이 아닌 사랑으로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철없는 아들이 유산을 상속해 달라고 해서 집을 나간다고 하여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이건 마치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붙잡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왜 아버지 곁을 떠나겠다는 나오미나 탕자를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을까요?

이는 이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법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그 법은 자신이 죽음으로서만 깨어집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 죽어버린 것과 같아요.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곧 나오미 자신의 죽음과 같습니다.

탕자는 타국에서 법으로 알던 아버지를 죽였어요.

이제 사랑으로 알아진 아버지를 품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탕자는 사랑으로 아버지를 대합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씀이 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명을 법으로 받습니다.

그러니 맏아들이 진짜 탕자인 겁니다.

맏아들은 진정한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맏아들이 아버지를 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이스마엘처럼 한 번도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사는 종인 것입니다.

진정한 아들은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고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죄 아래 나게 하신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죄 아래서 탕자로 만든 것입니다.

죄에 무서움을 알게 합니다.

그리곤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죄의 무서움을 알아야 용서의 기쁨도 알 수 있어요.

 

지금 베들레헴 사람들은 맏아들과 같아요.

나오미는 돌아온 탕자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을 법으로 섬기지만 나오미는 사랑으로 섬깁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어도 나오미는 안 떠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경험한 하나님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소개하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라는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산 자의 하나님이란 살아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객관적인 하나님입니다.

객관적이라 함은 하나님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다가오십니다.

이를 주관적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객관입니다.

객관이란 쉬운 말로 타자(他者)란 말입니다.

남이란 말이에요.

 

하나님도 남이고 아브라함도 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됩니다.

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이걸 객관과 객관이 만나서 주관이 된다고 합니다.

 

객관과 객관이 만나면 주관으로 바뀌어요.

주관이란 남이 아니고 하나란 말입니다.

이걸 경험이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을 객관에서 출발해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서 주관이 되어요.

그럼 객관의 하나님이 주관인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안다 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었어요.

남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런데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 관이 바뀝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만나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찾아갔듯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갑니다.

그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주란 구원자라는 뜻과 주인이라는 뜻이 있어요.

예수님을 일컬어 주와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면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예수님 안으로 흡수가 되어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또는 ‘하나 됨’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주라 고백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어요.

예수님이 성도 가운데 오신 것은 주와 그리스도로 오신 겁니다.

오셔서 내가 너를 구원한 주인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갔는데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거기까지 찾아와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순순히 가고자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이 되는 남자들을 다 죽이고 나서 더 이상 모압에서 살수 없는 처지를 만들어서 이리로 데리고 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분문에선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해서라도 기어이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면 우리의 인생은 늘 헝클어지게 되어 있어요.

즉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요.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간섭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마치 애굽에서 광야로 나오니까 간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인생을 차압하는 방식으로 간섭하세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복이에요.

이걸 경험한 사람은 절대로 멀리 가지 못해요.

잠시 어그러진 길로 가다가도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나오미가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지금 우리에게 경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 하나님 떠나면 개 고생하고 결국에는 이 자리로 다시 돌아와서 밀린 숙제를 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오미의 간증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고난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마라라는 이름은 슬픔이란 뜻입니다.

나오미와 마라는 상반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과 함께할 때는 나오미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마라가 됩니다.

나오미와 마라라는 이름으로 본다고 하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장소적인 의미를 영적으로 본다면 지상에서 영원으로 나아간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내려갈 때는 풍족하게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건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는 풍족하게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거지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는 방식입니다.

왜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게 할까요?

이는 자기 의(義)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는 우리 의가 하나도 없어야 해요.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에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거지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탕자나 나오미가 거지로 아버지 집에 돌아온 것은 죄인이 용서받는 모습으로

아버지 집인 천국에서 살아갈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들이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긍휼은 자기 의가 없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천국엔 자기 의가 없는 거지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의를 빼내게 하시려고 우리 뜻대로 살고자 할 때는 막지 않으세요.

일종의 진 빼는 작업인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다 잃을 때까지 내 버려두어요.

탕자 비유에서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아버지 집을 떠나 거지가 되게 하여 없음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오미 역시 탕자처럼 풍족하게 나아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축복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할수록 고난을 많이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개 비밀이에요.

 

이 비밀을 나오미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후손들이 살아야 하는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나라로 갔다가 망하고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실패 이야기는 우리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역설적이에요.

그래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버려짐 속에 구원이 있고 고난 속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이에요.

부디 이 비밀을 깊이 알아 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뜻대로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간섭하심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자기 백성은 나오미를 마라로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찾아온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