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강해

5강. 우연이냐! 필연이냐!

정낙원 2011. 10. 9. 01:40

5강. 우연이냐! 필연이냐! (룻 2:1-9)

 

2:1-9.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찌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찌니라

 

 

지난 시간 우리는 나오미의 간증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일하심이란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현상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만졌다고 합니다.

 

요한일서를 봅시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저자가 바로 요한 1, 2, 3서를 쓴 저자입니다.

우리는 말씀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말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처럼 경험하였습니다.

어떻게 경험하였는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란 것을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남편을 죽이고 두 아들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의 죽음을 하나님의 간섭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는 것은 나오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나는 흔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는 것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다반사이고 일상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어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게 이방인들이 바라보는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모든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나오미는 자식이 죽고 남편이 죽은 것을 일컬어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여호와께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여호와가 남편을 죽이고 자식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추상적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이방 나라인 모압에 내려가서 실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가 모압에서 빈손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념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나오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는 것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남들은 모르는 하나님을 나오미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많아 안다는 것만큼 큰 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감사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우리가 감사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을 통하여서 “나 여기 있다”라고 알려 주어도 우리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이 둔하여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보면 죽은 애인이 살아 있는 애인에게 와서 “내가 늘 함께 한다”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어떤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애인은 몰라요.

 

전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그러하다고 느꼈어요.

하나님은 수많은 일들을 통하여서 계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햇빛을 쬐이며 비를 맞으면서도 그 비와 햇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늘 있던 것이니까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덤덤하게 지나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 이방인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추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실상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하여서 이러저러한 사건들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마다 우리에겐 고통으로 다가와요.

 

이걸 나오미를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나오미는 살고자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모압으로 내려갈 땐 풍족하게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모압에서 망하고 맙니다.

집안에 기둥이라고 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타관객지에서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자가 낯선 곳에서 보호자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만난 하나님은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는 ‘나오미’라는 ‘기쁨으로’ 나아갔지만,

다시 돌아올 때는 ‘마라’라는 ‘슬픔의 여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망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들 나 떠나면 죽는다!”

“나를 떠나면 반드시 너희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면 탕자처럼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안에 있는 어그러진 하나님 상을 바꾸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로 알아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죄로 알아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나만 사랑해 주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하나님입니다.

 

마치 아이가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인정해 주고

자기만 예뻐해 주는 엄마만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엄마의 뜻과 다르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가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여겨요.

전부 자기 생각입니다.

 

우리도 이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서 알려 주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도리어 빼앗아 가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55장을 봅시다.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호와가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과 너희 길이 다르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다른가 하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합니다.

이건 이해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福)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화(禍)이고,

우리가 저주라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축복이라고 합니다.

이게 영과 육의 차이입니다.

 

예레미야의 증거를 보고 갑시다.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데 우리가 왜 바벨론으로 잡혀가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너희들 눈에는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하는 것이 재앙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는 평안이고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생뚱 맞는 말입니까?

아니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어떻게 평안이라고 하느냐?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엄마가 아이를 때리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요.

아이 입장에선, 매를 맞는데 어찌 사랑으로 이해되겠습니까?

아이에게 있어 사랑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엄마는 무조건 그냥 “오냐, 오냐!” 해 주는 것입니다.

 

아이 생각대로 내버려 두면 짐승으로 자라요.

인면수심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잘못하면 매를 대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 사랑은 그 아이가 커서 결혼하여 자기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알게 되어요.

엄마가 나를 때린 것은 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자기 자식에게 그대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치에요.

시대를 떠나서 부모와 자식 간의 생각은 늘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들 아이들을 나무랄 때에 꼭 죽을 짓만 한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이 꾀를 부리는 것이 꼭 망하는 짓이에요.

아이들은 망하는 짓 밖에 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부모가 싸워가면서 그 길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래요.

아이들과 같이 죽을 짓만 해요.

우리는 죽을 짓을 하지만 하나님은 살게 하십니다.

이게 또 역설인데,,,

잘 이해하세요.

 

산다는 것과 죽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편할까요?

산다는 것이 훨씬 어렵고 힘이 들어요.

죽음은 간단하고 편해요.

 

죽음이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손을 놓는 겁니다.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지키려고 움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체면도 지켜야 하고,

자존심도 지켜야 하고,

자기 이름도 지켜야 하고,

가족도 지켜야 해요.

온통 지킬 것뿐이에요.

 

삶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에요.

지키려고 하니까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어요.

인생이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진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어는 인생도 자기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지옥인 것입니다.

삶이 힘이 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 책임져야 하니까 힘이 드는 겁니다.

 

그 힘든 인생을 하나님이 개입하여서 평안케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인간들이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아요.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 보따리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처럼 인생을 평안하게 해 주신다고 하니까 게거품 물고 날뛰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게 자기 인생을 개입하는 것이에요.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 인생을 간섭하면 극도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왕 노릇 하고자 하는 죄성이 자기 안에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갓난아기도 자기를 간섭하면 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도와만 주고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겠다고 하면 싫다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의 인생은 일평생 고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자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자기 꾀로 기근을 피해 보고자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를 두고 보실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래서 간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자 떡은 고사하고 도리어 가진 떡도 다 빼앗기고 맙니다.

 

탕자처럼 다 빼앗기고 나니 고향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다 빼앗긴 것이 이방 나라에서 고향으로 귀향하게 만든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큰 고난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참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하나님은 나를 빈손으로 만들어서라도 기어코 자기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 빼앗기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망함이 망함 아니라 도리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았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란 죽음을 상징합니다.

지옥 같은 환경을 말합니다.

 

천국은 지옥에서만 보여요.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 빼앗기고 나서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자꾸만 흔들어서 빈손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의지할 것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는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듯이 성도들도 세상에 뿌리내리지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 강함으로 두시지 않고 약함으로 두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함을 달라고 할 때 하나님은 대노하십니다.

“야! 이 놈아! 네가 강하면 내 능력이 네게 머물 수가 없잖아”

“네가 약할 때 내 능력이 머물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야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고난이 내게 유익이고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복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원망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늘 허상이고 관념이고 추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 믿음이 허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야! 나는 믿음이 없구나!

나는 순 엉터리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빼앗기는 인생이에요.

세상 것은 마이너스 인생이고 하늘의 것은 플러스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의 말처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나중은 창대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시작은 창대하다가 나중은 미약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고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약하고 작은 자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나는 망하고 그리스도만 흥하게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내 것은 다 빼앗기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인생과 같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는 온 세상을 움켜잡을 듯이 나와서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젊었을 때에는 온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호걸로 살아가지만 늙어서는 스스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게 흙으로 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죄인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좀 과한 말로 똥 오줌 가리지 못하는 갓난 아이 인생을 태어나서 똥 오줌 가리지 못하는 노인의 인생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날 때도 도움을 입고 태어나서 돌아갈 때도 도움을 입고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신앙도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땐 온 세계를 달라고 합니다.

“주여, 내게 한국을 주옵소서! 세계를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쌓여 갈수록 “주여,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한국은 고사하고 내 몸뚱이 하나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점점 자기를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내가 의로운 자인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나 같은 죄인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죄의 깊이를 알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은 고사하고 저주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나오느니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는 고백뿐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난 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머리로 시작하였다가 꼬리로 끝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나오미식으로 말하면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탕자로 말하면 아들로 나갔다가 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걸 지난 시간에 천국엔 거지로 가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의가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긍휼로만 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자기 의를 빼내는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에게서는 의가 없다’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나 있음’에서 ‘나 없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힘을 빼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 나는 개 뿔도 아니구나!’

개에겐 뿔이 없어요.

그러니 난 개뿔처럼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의라고는 개뿔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였다는 것입니다.

‘아! 난 외식하는 자이구나!’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척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탕자처럼 “난 종입니다!”라고 할 때,

아버지는 “아니다. 넌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락지도 끼워주고, 옷도 입혀주고, 신발도 신겨주고, 잔치도 벌여 줍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할 때,

아버지는 “아니다. 넌 산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자다”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아들들을 스스로 종이 되도록 간섭해 가십니다.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하십니다.

“난 아버지의 아들이라 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난 아들이 아니고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도록 철저히 부수고 깨트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빼앗아 가십니다.

 

우린 흙에서 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는 곳입니다.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후패해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것을 받지 않아요.

땅의 것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조차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땅의 것을 순순히 버리지 않아요.

그래서 빼앗는 것입니다.

빈손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거지로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나아 올 땐 발가벗은 자처럼 ‘자기 의(義)가 없음’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 것이 없어야 채울 수가 있어요.

그래서 먼저 내 것을 다 토하여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아오자 마라의 쓴 물을 주어서 안에 있는 것을 다 토하여 내게 하시고, 엘림의 달콤한 물을 주시듯이 하십니다.

 

애굽의 것을 다 토하고 비워내야 하늘의 것으로 채우십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오도록 간섭하는 것입니다.

거지로 와야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것이 아니냐?

거지로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의 것으로 단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탕자가 가진 모든 것은 아버지 것이에요.

옷도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신발도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양식도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가락지도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집도 아버지 집입니다.

 

탕자에겐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탕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은 아버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것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아버지가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아버지께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런 못난 아들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우린 언제쯤, 이 고백들이 나올까요?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언제쯤이나 알게 될까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가 나올까요?

언제쯤 빈손이 축복임을 알게 될까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알다시피 나오미는 언약의 후손입니다.

언약의 후손이 거할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일컬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언약의 후손들은 약속의 땅에 거하여야 그 심령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이 약속의 땅을 떠나면 죽어요.

그런데 나오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떠났어요.

그러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모압은 저주받은 땅을 상징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오미에게서 땅의 것을 빼앗는 방식으로 간섭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창기가 번 것은 받지 않아요.

즉 이방과 간음하여서 얻어진 것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자기 것은 단 하나도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라반에게 빌붙어서 거부가 되어 돌아오자,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불구자로 만들고,

가진 재산을 다 빼앗기는 환경으로 몰아넣고,

벧엘로 올라갈 땐 빈손으로 올라가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도 벧엘로 가지고 가지 못하였어요.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에요.

하나님의 집에는 세상 것을 가지고 가지 못해요.

 

야곱이 빈손으로 벧엘로 올라간 것이나,

나오미가 빈손으로 베들레헴으로 올라간 것이나 영적인 의미는 동일합니다.

나오미는 야곱처럼 거지가 되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니 종이라 불러 달라고 하였듯이, 나오미도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는 나는 더 이상 기쁨의 나오미가 아니라 슬픔의 마라 라고 고백을 합니다.

심령에 젖과 꿀은 다 사라지고 슬픔만 가득 안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달라요.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우리의 것을 차압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하세요.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법이 달라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할 때는 ‘나에게 잘 해 줄 거야’라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육과 영의 차이에요.

예수님이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영생으로 가는 길은 좁다고 합니다.

우린 당연히 넓은 길로 가고자 합니다.

넓은 길이 선악과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가만히 내 버려두면 지옥으로 가요.

왜냐하면 지옥으로 가는 길이 육신적으로는 편하고 좋아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넓은 길로 가고자 해요.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우리 몸에 최적화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넓은 길로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 본성이 끝까지 우리를 괴롭혀요.

 

등 따습고 배부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길 장사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태클을 걸어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 사랑이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행적을 추적해 보세요.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내려갑니다.

흉년 속에서 산다는 것은 고난이고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 싫어서 양식이 있는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모압으로 내려간 것은 넓은 길을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자기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망하고 맙니다.

그러자 이번엔 베들레헴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베들레헴이 좋아서가 아니라 양식을 찾아 돌아온 것입니다.

 

만약에 베들레헴에도 기근이 계속하였다면 안 돌아왔을 겁니다.

나오미는 떡을 찾아서 이리저리 쫓아 다닌 것입니다.

나오미는 철저히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살아간 사람입니다.

나오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무슨 신앙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몸 챙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결국은 그 뜻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나오미가 바라는 것에 반대로 간섭하신 것입니다.

망하게 하신 겁니다.

 

성경은 이걸 복(福)이라고 합니다.

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간섭을 성경은 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이라 생각지 않고 도리어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한 겁니다.

우린 이 ‘다름’ 속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는 것과 정반대로 가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간섭하는 겁니다.

가만두면 멸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간섭하시는가 하면 우리의 원함과는 반대되는 역설적으로 간섭하세요.

세상에서 망하는 쪽으로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흥하는 쪽으로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망하는 쪽으로 간섭하시니 얼마나 아프고 힘이 들겠어요.

 

오해할까봐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하나님은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럼, 성도는 세상에서 다 거지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경이 말하는 부자와 거지는 물질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말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하실 때 부자는 물질은 많은데 하나님에 대하여는 가난하였어요.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 적으로는 부자였지만 하나님에 대하여는 가난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물질을 많이 소유한 거지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부자가 있어요.

 

물질을 의지하면 부자입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서도 그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부자인 것입니다.

반면에 물질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거지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하였습니다.

바울은 너희들 눈에는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거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거지이지만 하늘에 가치관으로 보면 부자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마다 재물이 가득하였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하였으니 영적으로 거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면 물질의 많고 적음은 문제 되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요하면 비록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처럼 살아도 하늘에서 부자이지만,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요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는 부자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난해요.

 

성도는 믿음의 부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여야 해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의 부자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살 수가 없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물질적으로 부자라고 하여도 심령이 가난한 영적 부자인 것입니다.

이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가난하면서 난, 내 힘으로 살거야!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말테야!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세상적으로도 가난하고 영적으로도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스며들 틈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 하늘나라 부지이고,

마음 속에 하나님 은혜 없이도 스스로 살 수 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입 것입니다.

 

전 여러분이 모두 물질이 많은 부자이면서도 심령은 가난한 영적 부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을 가졌으면서도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하면서 사는 하늘나라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이 나올까요?

이건 꿈입니다.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고대하고 살아봅시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다 부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그 부(富)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수고하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십시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놈팽이처럼 빈둥거리고 놀지 마십시오.

게으름은 악한 것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단 하나 열심히 돈을 벌고 사시되 내가 무엇을 위하여 왜 사는지를 궁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코람데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달아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십시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망하게 한다고 하니 세상에서 거지로 만든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망하게 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우리 마음을 세상 것에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육적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린 죽을 꾀만 쓰기 때문입니다.

우린 꼭 철없는 아이들처럼 죽을 짓만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안에 죄가 토설 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통행하면서 길이 험하다느니,

애굽의 음식을 달라느니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는 불행이나 실패로 나타날 수가 있어요.

나오미처럼 남편과 아들이 죽는 엄청난 아픔과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실패가 아니고 성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인생을 살게 되어 있어요.

 

신앙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느냐, 멀찍이 떨어져 있느냐로 가늠합니다.

세상 적으로 망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그게 복입니다.

반대로 세상 적으로 성공해서 하나님을 떠나면 그건 저주입니다.

 

나오미는 비록 육적으로는 남편 잃고 아들을 잃어 실패 같은 인생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이므로 성공인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풍족하게 채우시는지를 오늘 본문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보게 됩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거지로 돌아온 룻에게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것을 채워나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연히’라는 말이 나옵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연히’라는 말은 어쩌다 보니 우발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우연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셔서 만난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발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창세전에 계획된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기분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앉고 일어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입니다.

 

노사연이라는 가수가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에 보면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라고 합니다.

바램이란 필연이라는 말입니다.

 

어째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된 필연인지를 살펴봅시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쓰여진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책은 일곱 인(印)으로 봉하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책은 아무나 뗄 수가 없고 오직 어린 양만이 떼실 수 있습니다.

6장에서 어린 양이 인봉을 하나씩 떼니까 흰 말과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땅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이걸 다니엘에서는 하늘에서 네 바람이 바다로 분다고 합니다.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불자 짐승들이 나타납니다.

사자와 곰과 표범과 열 뿔 가진 괴상한 짐승이 나타납니다.

이건 이 세상에 나타날 나라들을 상징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말입니다.

 

스가랴서 6장에선 홍마와 흑마와 백마와 어롱지고 건장한 말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곧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땅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보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 하늘에서 어린 양의 허락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안팎으로 쓴 책의 인봉을 하나씩 떼니까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어린양이 사건을 허락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감독이 되어서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는 권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심판하는 권세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연출하신다는 말입니다.

책의 인봉을 뗀다는 것은 감독이 드라마를 찍기 위하여 배우들에게 연기하라고 “큐(Cue)~ ”하며 싸인(sign)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손에 있는 책은 만물을 다스리는 시나리오입니다.

시나리오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어떻게 다스리는지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정한 뜻대로 움직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를 예수님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나리오대로 그림을 이 땅에 하나둘씩 그려나가십니다.

마치 감독이 한 컷 한 컷을 찍어서 드라마를 만들어 가듯이 말입니다.

감독은 그 장면을 찍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배우도 준비시킵니다.

 

책의 인봉을 떼니 말들이 뛰듯이 준비된 자들을 “레디~ 액션”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컷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들을 연기하게 됩니다.

감독이신 예수님이 어떤 장면을 찍기 위하여 그 장면에 필요한 배우들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조명에서부터 소품 하나하나까지 모두가 연출자가 스텝들에게 지시합니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스텝들은 그 장면에 필요한 것들을 세밀하게 준비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사람1, 2, 3, 4에서부터 강아지 한 마리까지 준비를 해요.

상황은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이 바람도 조금 불게하고,

조명은 어두컴컴하게 합니다.

배우도 준비를 시킵니다.

그리곤 “큐~” 싸인을 냅니다.

 

“자! 스텐 바이~”

“액션!”

 

한 여인이 바쁜 걸음으로 걷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살수차에서 비를 뿌립니다.

여인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당황합니다.

 

이때 건장한 청년이 우산을 받쳐 들고 여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곤 함께 걷습니다.

둘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안팎으로 써진 시나리오대로입니다.

감독이신 예수님이 흐뭇해하면서 “오~케이!” 하면서 “컷~” 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도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준비시켜 놓고선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셋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보리밭에서의 이루어진 하늘의 사랑을 찍기 위해서 말입니다.

 

성도의 인생이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서 필연이라는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인연이란? 미리 이어지도록 되어 있는 원인에 의하여 만난 관계를 말합니다.

이걸 쉬운 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황정민이와 전도연이가 남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거기에 보면 황정민은 시골에서 소 키우고 농사 짓는 촌놈이고 전도연은 시골 티켓다방에서 일하면서 몸을 파는 종업원이에요.

 

황정민이 전도연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립니다.

여보세요! 라는 목소리에 그냥 뽕~ 가버립니다.

황정민이라는 총각의 눈에는 전도연이만 보이는 것입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입니다.

마음은 쿵쾅거립니다.

귀에는 그 목소리가 호숫가의 여울이 울려 퍼지듯이, 자기 귓전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꼭 자기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걸 ‘운명적 만남’이라고 합니다.

 

운명적 만남이란 돌고 돌아서 딱 거기서 만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에서 황정민과 전도연이 만나게 된 것은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독이 그렇게 만나고 사랑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를 찍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들과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니다.

룻과 보아스를 만나게 하셨듯이 우리와 예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이 모두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필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란 돌고 돌아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나게 된 것은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로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과 같습니다.

 

구약의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려고 먼 길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순적히’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리곤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납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적히’ 입니다.

 

이삭이 나이 들어 에서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서 오라고 합니다.

이 소리를 리브가가 듣고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일을 꾸밉니다.

리브가가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의 손에 들려서 이삭에게 나아가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때 이삭이 야곱이 가지고 온 별미를 먹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해서 별미를 만들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야곱이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순적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입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것이고,

야곱이 리브가가 해 준 별미를 들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만나고 헤어집니다.

드라마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것이 감독의 연출에서 비롯되듯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연출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세요.

 

피조물이란 창조주에 의하여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곧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창조주의 허락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이라는 말 속에는 독자적으로 살지 않는 존재란 뜻이 내포되어 있어요.

 

피조물이 뭔가요?

창조주가 만들었다는 말이잖아요.

창조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 피조물 속엔 창조주의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넌 이렇게 살아라”라는 명령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생명을 하나님이 ‘살아라’라는 명령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말이니 귀담아들으세요.

 

하나님이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지요.

그럼 만물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먹겠지요.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으니 말씀을 알아먹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지요.

풍랑을 꾸짖잖아요.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에게 “그만 해라!”

그러자 바다와 풍랑이 즉시로 잠잠해졌습니다.

이를 지켜본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이 분이 도대체 뉘시기에 바람도 순종하는고!’라고 합니다.

 

꾸짖는다는 것이 뭔가요.

말을 알아먹기 때문에 꾸짖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만물은 다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엔 우연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필연인 것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 한 장면 모두가 시나리오에는 미리 예정된 장면입니다.

각각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반드시 그 장면에서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각본이 쓰여져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만난 겁니다.

감독이 만나라고 각각의 배우에게 준비시켰다가 때가 되어서 “큐~” 하고 연기를 시켰어요.

 

이를테면 건장한 청년은 예수님이고 소나기를 맞는 여인은 우리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소나기를 맞는 여인은 룻이고 건장한 청년은 보아스입니다.

그러니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바램으로 된 것입니다.

이제 만났으니 사랑하고 아기를 낳는 다음 장면을 찍어야 하겠지요.

대본에 보면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럼 스텝들은 다음 장면을 위하여 또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보리밭에서 이루어진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 들판에 낟가리도 만듭니다.

그리곤 그 사랑으로 아이가 잉태되고 낳게 됩니다.

이 아이가 예수의 족보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룻과 보아스를 가지고 성도와 예수님의 만남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해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당연히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서로가 서로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만남이 있으면 또 헤어짐도 있겠지요.

계속하여 함께 가든지 아니면 잠시 길동무를 하다가 이별을 하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이라는 날 동안은 하나님의 섭리라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겠지요.

이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욥을 보세요.

하늘에서 원인이 되어 지상에 있는 욥에게 불똥이 떨어지잖아요.

욥은 가만히 있다가 벼락을 맞은 셈입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지금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욥과 동일해요.

환경이나 살아가는 것에는 조금씩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한 한 가지는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는 일들이 툭툭 터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간다고 하지요.

띠 띠고 간다는 말은 포로처럼 꽁꽁 묶여서 간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원함도 아니고, 자기 의지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 손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모두가 믿음이 그들을 목줄처럼 끌고 다니잖아요.

그러니 우리의 인생살이에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는 일들이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남과 헤어짐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결국 우리 인생을 누군가가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는 예수와 한 몸으로서의 삶들을 그려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고자 하는 그 그림이 바로 예수님의 운명에 연합된 그림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팔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의 상징적인 사건이므로, 룻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가 될 때 룻기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연애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마는 하나님의 필연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사건을 만들어 가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룻은 알다시피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 여자란 저주받은 자란 말입니다.

룻은 하나님도 모르던 여자, 즉 하나님과 상관없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를 만남으로서 룻은 하나님과 상관있는 자가 되고 맙니다.

룻은 나오미라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내려온 여자를 만남으로서 ‘하나님의 패밀리’라는 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창세전에 예정된 팔자로 풀리기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말로는 팔자가 꼬인다고 하지만,

신앙적으로 말하면 팔자가 술술 풀리게 되었다고 하여야 합니다.

 

팔자가 풀린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들어가서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 분이고 실패치 않는 분이니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들어간 것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팔자가 풀리는 것이 맞지요.

이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보세요.

그럼 룻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어버린 양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죄인이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죄인이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 함은 원래 주인의 소유였다는 말입니다.

애초부터 주인의 소유였는데 잠시 주인 품에서 떠나 있다가 다시 주인의 손에 의하여 찾아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한자적 의미로 보면 구원(救援)이란 말은 ‘건질’ 구(救)에 ‘당길’ 원(援)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딘가에 빠져 있는 것을 외부에서 건져낸다는 말입니다.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을 바깥에서 당겨 올린다는 뜻입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우린 원래 하나님 집에 있었어요.

창세전 언약의 완성지점을 보면 우린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요.

우리는 창세전 언약 때문에 잠시 이 세상으로 출장을 나온 것입니다.

출장이 다 끝나면 다시 돌아갑니다.

 

‘전우치’라는 영화를 보면 전우치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언약이라는 책 속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언약이라는 책 속에서는 우린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손에 있던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 세상으로 오게 되었어요.

그러니 하나님 입장에선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렸으니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를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원 속에는 몽땅 하나님이 하신 일만 담겨 있어요.

계획에서부터 진행 그리고 결과까지 몽땅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당하지 않도록 잘 간수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것을 섞으라고 합니다.

우리 행위를 섞으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한 것도 섞으라고 하고,

내가 헌신한 것도 섞으라고 하고,

내가 헌금한 것도 섞으라고 하고,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섞으라고 합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인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인가 하면 우린 종입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종속이 된 자입니다.

종이 하는 모든 것은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아이를 낳아도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로또 복권을 맞아도 주인의 것입니다.

종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였다고 하여서 그걸 의지하여 주인에게 나 좀 알아달라고 하면 주인은 화를 냅니다.

 

종이 먹는 밥도 주인의 것이고!

종이 입는 옷도 주인의 것이고!

종이 신는 신발도 주인의 것이고!

종이 사용하는 농사 일의 쟁기도 주인의 것이고!

종이 경작하는 밭도 주인의 것이고!

종이 잠을 자는 집도 주인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찌 주인에게 나 이것 했으니 내 것으로 인정해 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만약 그걸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놈은 죽여 버립니다.

주인에겐 종은 소유물이므로 죽이고 살릴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린 내 것이라곤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교회에 나온 것조차도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라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여야 합니다.

 

우린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내가 구원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니고 받았어요.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받았어요!’

우리가 따낸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자기 것을 찾으러 오신 겁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의 것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알갱이도 버리지 않고 다 찾으십니다.

쓸고 닦아서 기어코 찾아내십니다.

그래서 잃은 양을 찾고선 울러 메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하지요.

어디로 돌아갔다는 말인가요?

원래 있던 곳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다른 말로 ‘소천(所天)’이라고 합니다.

왜 죽음을 소천이라고 합니까?

‘소천’이라는 말은 하늘에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 살다가 죽음으로서 창세전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열조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열조란 조상을 말합니다.

왜 열조로 돌아간다고 합니까?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으면 다시 그 조상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조상이란 나를 존재케 하는 근본을 말합니다.

우리를 존재케 한 근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린 예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곤 예수님 안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만물이 그로 인하고,

그로 말미암고,

그 안에서 섰다고 하지요.

이는 그 안에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고향은 예수님 안인 겁니다.

마치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다가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가 한 몸이 되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도를 일컬어 신랑과 신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고향은 예수님 안인 것입니다.

천국은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랑과 신부가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룻이 보아스 품으로 돌아간 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던 나오미를 모압으로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에 실패를 통해서 룻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곤 보아스라는 신랑을 만나게 합니다.

룻을 보아스 품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창세전에 있던 자들이 이 세상으로 올 때 각각의 역할을 맡고서 옵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말이에요.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 된 팔자로 왔고,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 된 팔자로 왔습니다.

각각 팔자대로 살다가 돌아갑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이 각자의 팔자대로 간섭하십니다.

이걸 아까 드라마를 찍는 연출자가 각각의 배우에게 배역을 맡겨서 그 배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도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이걸 본문에선 ‘우연히’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이라고 합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갔다고 하고,

보아스는 ‘마침’ 그때 그 밭으로 왔다고 합니다.

 

‘우연’이란 ‘미크레’라고 하는데,

이는 ‘마침내’, ‘결국’, ‘드디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정된 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계획에 차질 없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힌~네’라고 하는데,

이는 예정된 그 사람이 왔으니 ‘보라!’라는 말입니다.

보라는 것은 ‘그 분이 오셨다’라는 뜻입니다.

“봐라! 드디어 그 분이 오셨다” 그런 뜻입니다.

 

이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라”라고 한 말과 같아요.

이 얼마나 빈틈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룻이 이삭을 주우러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시고는

마침 그 때에 베들레헴 성읍에 있던 보아스를 추수하는 밭으로 가게 하여서 룻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룻이나 보아스 입장에선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필연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룻과 보아스의 발걸음을 세시며 연출을 하신 겁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난 것은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룻과 보아스의 ‘보리밭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도록 주선하신 것입니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짜여져 있어요.

이걸 ‘우연히’라고 합니다.

‘마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세십니다.

발걸음을 세신다는 말은 발걸음을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나를 믿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 속에 황정민이 전도연을 보고,

한눈에 뽕 가서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도 감독이 허락하여서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도록 허락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에는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 살아야 할 나오미가 모압에 내려간 것도 시나리오 대로이고,

모압에서 룻이라는 며느리를 맞이한 것도 시나리오 대로이고,

옛 신랑이 죽어 과부 되어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도 시나리오 대로입니다.

이걸 운명이라고 하고 세상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팔자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자는 하나님이 정해 주십니다.

팔자는 다른 말로 영화감독이 배우에게 맡겨준 배역입니다.

 

룻이 연기를 하여야 할 배역은 모압이라는 동네에서 첫 남편을 잡아먹고,

그 남편의 죽음을 기화로 베들레헴에 올라와 보아스를 만나서 자식을 낳아야 할 역할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 역할을 하도록 간섭하신 것입니다.

 

룻은 이제부터 보아스가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부터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룻은 씨앗을 뿌리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조금도 거들지 않았어요.

모두 보아스가 지어 놓은 것입니다.

룻은 그냥 주우면 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공짜로 거두면 됩니다.

이건 마치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거둔 것과 같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절대로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곤 사환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여기에 또 비밀이 있습니다.

 

사환이라고 하는 말은 ‘나아르’라는 단어인데 이는 주인의 심부름꾼을 말합니다.

이건 종과 다릅니다.

종은 종인데 감독하는 종을 말해요.

일반적인 종이라는 단어는 ‘에베드’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아르’는 ‘에베드’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자를 말합니다.

‘에베드’는 밭에서 추수하는 소녀들을 말한다고 한다면,

‘나아르’는 그 소녀들을 감독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환을 소년이라고 하고 추수하는 일꾼은 소녀라고 합니다.

소년이라 함은 남편처럼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선 남자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를 예수님 위치에 두고 남자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독이란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을 말하지 않고,

일꾼들이 일하도록 헌신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나아르’는 도리어 ‘에베드’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는 종노릇을 하신 것과 같아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면 ‘에베드’가 길어온 물을 룻에게 마시라고 한 것을 풀고자 함입니다.

소년이 수고한 것을 소녀가 공짜로 마시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당시에 물이란 가장 귀한 것입니다.

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성읍들은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우물을 서로 빼앗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물은 생존을 위한 근거였습니다.

 

보아스가 사는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그렇다면 사환들이 길어온 물은 베들레헴에서 길어온 물입니다.

사환들이 베들레헴 성읍에까지 가서 길어온 물을 낯선 여인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것은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우물물이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 중에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먹고 싶어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봅니다.

 

삼하 23:14-17.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17.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은 지금 아둘람 굴에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블레셋 군대가 장악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먹고 싶어 합니다.

 

이때 세 용사가 블레셋과 싸우고 우물물을 길어 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드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물은 물이 아니고 ‘피’라고 합니다.

‘용사들의 피’라고 합니다.

 

그럼 보아스의 밭에 사환들이 길어온 물은 물이 아니라 용사들의 피라는 말입니다.

보아스의 밭은 영적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그 밭에 피와 같은 물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 피와 같은 물을 룻에게 줍니다.

 

이걸 신약으로 해석해 봅니다.

예수님은 자기 핏값으로 밭을 하나 샀습니다.

그 밭을 ‘아겔다마’라고 하는 ‘피 밭’입니다.

 

그 피 밭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예수의 피로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피로 산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에 누가 있습니까?

추수하는 소녀들과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지금 보아스가 농사를 지어 놓은 밭에 추수하는 소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워 놓은 교회에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아스처럼 일하는 성도들이 마실 물을 사환들을 시켜서 길어오게 하였습니다.

누구에게 마시게 하려는 것입니까?

자기 밭에서 일하는 종들을 마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걸 이 시대 교회로 보세요.

교회 안에는 각각의 지체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도 있고 그 말씀을 듣는 성도도 있습니다.

목사나 성도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직분이 다를 뿐입니다.

 

에베소서 4장입니다.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습니다.

목사를 세운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목사는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위하여 목사를 세운 겁니다.

 

알다시피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성도는 그 말씀을 먹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갑니다.

자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와 넓이와 그 길이를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먹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깁니다.

 

이걸 보아스 밭의 추수꾼들과 물을 길어오는 ‘나아르’라는 사환으로 비유합니다.

물을 길어오는 사환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소녀들은 ‘에베드’라는 성도를 상징합니다.

소녀들은 사환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고 목마름을 해소합니다.

그리곤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걸 다시 교회로 봅니다.

목사는 ‘나아르’이고, 성도는 ‘에베드’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나아르’라는 목사를 세웁니다.

그리곤 지혜의 말씀에 은사와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목사들은 은사로 깨닫게 해 주신 말씀을 ‘에베드’라는 성도들에게 설교합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은 노력하지도 않고 목사가 준비한 말씀을 가만히 앉아서 듣습니다.

 

이건 마치 보아스의 밭에 사환들이 길어온 물을 추수하는 소녀들이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목사에게 말씀을 깨닫는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들을 마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사들은 피의 복음을 전합니다.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길어온 물을 피라고 하면서 여호와께 드렸듯이,

목사들은 하늘 베들레헴에서 은사로 주어지는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성도들에게 먹고 마시도록 합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4:35-38.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구원합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추수꾼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예한다고 합니다.

 

이걸 보아스 밭의 모습과 오버랩 하여 보세요.

사환들은 물을 길어오는 노력을 하였지만,

소녀들은 물을 길어오는데 노력하지 않았어요.

소녀들은 자기들이 노력하지도 않은 물을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뿌리는 자와 가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즐거워한다는 것은 수고를 함께 공유하며 서로 간에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과 우리 성도로 적용해 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노력하였고 우리는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노력해 놓은 것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이루어주신 구원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밥상을 다 차려 놓았는데 우린 공짜로 먹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보아스 밭의 추수하는 소녀들처럼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지금 우리가 룻처럼 이러한 즐거움에 참예케 되었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차려놓은 밥상을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룻은 농사를 짓는데 씨를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물을 길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보아스의 모두 것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이러한 구원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룻처럼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홀로 다 하신 것을 공짜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각양의 성령의 은사들을 맛보고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신앙생활은 이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안다면 감사치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룻기를 통해서 이 우연이라는 필연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얻은 것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만물을 세팅해 놓으셨습니다.

지금 내 주변에 놓여진 상황은 모두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셋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성도는 이 감격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여!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해 주시나이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키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몸으로 오셔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흥분을 일으켜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여울처럼 우리 마음 구석 구석으로 퍼져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난 이런 은혜로 삽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덕을 보아야 합니다.

마치 소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길어온 물을 소녀들에게 마시게 하였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맛보게 되어야 합니다.

 

우린 룻처럼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여기까지 인도받았습니다.

서로가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며 주님을 찬미하면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부디 이 놀라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필연에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에 예비하신 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나의 원함이 아니라 주님의 원함으로 시작하신 구원이매 주님께서 끝날까지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