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78강. 한 마음으로 서로 받으라

정낙원 2014. 6. 24. 22:43

78강. 한 마음으로 서로 받으라 (롬 15:1-13)

 

롬 15:1-7=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오늘 본문을 보면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나옵니다.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라는 말은 “오페일로멘” 이라고 하는데 이는 의무나 책임과 같은 뜻입니다.

마치 빌린 돈을 갚는 것과 같아요.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고가 아니고 강제성으로서 하나의 책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한 자는 연약한 자를 책임져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듯이 강한 자는 반드시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강한 자라는 겁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강한 자도 그러합니다.

연약한 자들의 짐을 대신 담당하지 못하는 자는 강한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뭔가요?

어른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많고 아이는 책임질 것이 적어요.

아이는 놀아도 되지만 어른은 놀면 안 되어요.

 

어른은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논다고 해서 자기도 놀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른은 누릴 권리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져야 할 책임도 큰 것입니다.

영광도 크지만 고난도 커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책임도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해 질수록 자기 자유가 차압을 당해요.

내 맘대로 할거야가 강함이 아니고 내 맘대로 할 수가 있지만 약한 자를 위하여 포기 하는 것이 강함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로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각양의 은사들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은혜를 입었느냐?

그럼 마땅히 섬기라는 겁니다.

주께서 내가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라고 너에게 은혜를 주었고 은사를 주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우리’ 강한 자라고 하지요.

 

“우리”가 누구인가요?

문자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 지도자들을 말해요.신앙이 앞선 자들을 말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복음 아는 자들을 말해요.

바울이 지금 우리보고 그러는 겁니다.

야! 너희들 복음 아느냐!

 

그럼 그 복음으로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 꼴값 떨지 말고,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참고 기다리면서 그들을 받아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은 잘난 척 꼴값 떨라고 준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잘 감싸 안으라고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듭니다.

부모님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잠시 집을 비우게 되어서 형에게 어린 동생을 잘 돌보라고 재물을 맡겨주었어요.

형은 부모님이 주신 재물로 어린 동생이 잘 자라게 돌 봐 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출타한 가정에서는 형은 동생에게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형입니다.

 

그런데 그 형이 부모님이 맡겨준 재물로 동생을 돌보지 않고 도박을 하거나 유흥비로 탕진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동생들에게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구박을 해 대는 겁니다.

이건 혼이 나야 합니다.

동생을 잘 돌보았으면 칭찬을 듣지만 못 돌보았을 땐 매를 맞아야 합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장차 하나님께서 목자들을 국문을 하는데 살찐 양과 파리한 양들 사이에 세워서 국문을 한다고 합니다.

양들을 살찌게 했으면 상을 받고, 파리하게 했으면 저주를 받아야 해요.

목자들은 강한 자들이고, 양은 연약한 자들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강한 자들에게 “마땅히(당연히)” 라는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연약한 자의 “약점(弱點)” 이라는 말입니다.

약점(弱點)이란? 부족한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뜻이 아니고 아직까지 힘이 미약하여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지금은 부족하여서 감당 할 수가 없지만 나중에 자라고 나면 다 감당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치 젖을 먹는 어린아이가 고기를 소화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자라면 얼마든지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걸 소화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증거 한 복음의 내용이 뭔가요?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증거 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의(義)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자가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로만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증거 하였어요.

 

성도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실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인간의 열심과 행함은 의미가 없어요.

이는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사람의 외모나 행실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우리가 판단하고 심판해서 잘라낼 것이 아니고 이해하고 기다려야 할 것들이에요.

 

약점을 담당하라는 것은 법으로 형제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고 은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교회 안에 아직까지 율법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까지 율법 아래서 행하던 습관들이 남아 있어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날과 달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일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율법을 지켜도 의가 아니고 율법을 안 지켜도 의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율법적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하고 잘라내는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하여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을 틀렸다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형이라고 한다면 연약한 동생의 잘못을 타박할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알 때까지 돌보면서 잘 가르치고 키워가야 하는 것이 형이 할 일이에요.

 

7절을 보세요.

 

7절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그리스도가 형처럼 연약한 우리의 약점을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리스도처럼 서로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으로서 연약한 우리의 짐을 대신 담당해 주셨어요.

우린 그 은혜를 입었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받고 하나 되어서 뜻을 같이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영광을 받느냐?

예수의 마음으로 서로 돌 볼 때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 할 때 부모는 기뻐해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뿜어져 나와서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나눌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

이건 마치 한 집안에 형과 동생이 웃음꽃을 피우면서 화기애애(和氣靄靄) 하고 평화로울 때 부모님의 마음이 기쁜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죄로 인하여 나누고 잘라내고 다투지만!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 안에서 용서받은 자들이 모여서 서로 용납하고 연합하여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하여야 합니다.

세상은 법이 왕 노릇 하지만, 교회는 은혜가 왕 노릇 하여야 합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지만,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강한 자이고 누가 약한 자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로 구분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아는 자는 강한 자이고 적게 아는 자는 약한 자입니다.

십자가 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자는 강한 자이고 모르는 자는 약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의 차이로 강함과 약함으로 구분이 됩니다.

 

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법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리(法理)란? 법 속에 흐르는 정신을 말합니다.

법을 만든 취지를 말해요.

그 정신을 잘 살리는 것이 법리를 잘 적용하는 것입니다.

 

법은 악은 억제하고 선은 장려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적용 할 때는 그 법을 만들 때 취지를 잘 살려서 적용을 하여야 합니다.

옳고 그름보다 유익을 위하여 적용하여야 해요.

이러 할 때 법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 도(道)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속에도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아느냐에 따라서 믿음을 판단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의미를 잘 알면 믿음이 강한 자이고 모르면 믿음이 연약한 자에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차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살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용서를 주셨는데 그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떤 이는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가볍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아는 것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강도(强度)가 다릅니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면 십자가의 은혜가 크게 다가올 것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가볍게 다가 올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탕감 받은 종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탕감 받음을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의 차이는 달라요.

믿음에 분량에 따라서 누림이 다릅니다.

많이 누리는 자는 많이 탕감 받은 자이고, 적게 누리는 자는 적게 탕감 받은 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누구는 많이 탕감해 주고 누구는 적게 탕감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동일하게 탕감을 해 주었음에도 각자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와 같습니다.

어른처럼 많이 깨닫고 많이 누리는 자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강한 자이고, 아이처럼 적게 깨닫고 적게 누리는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아래서 지독하게 종노릇을 해 본 사람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느끼는 것하고,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강도는 다릅니다.

감사의 차이가 달라요.

종노릇을 지독하게 해 본 사람은 감사가 크게 다가올 것이고, 안 해 본 사람은 감사가 작게 다가올 것입니다.

 

십자가 도(道)가 뭔가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여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었습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7-8장을 봅니다.

 

롬 7:18-2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 앞에 하나님 말씀을 떨어 졌습니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율법입니다.

율법이 떨어지고 나니까 자기 안에 두 법이 충돌을 하는 겁니다.

 

지켜야 한다!

아니다! 못 지킨다!

이 둘이 싸우는 겁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율법이 떨어지고 나니까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지키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의 몸뚱이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도 지킬 수 없는 몸인 겁니다.

마음은 말씀대로 살고자 굴뚝같은데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 먹는 겁니다.

우리 몸이 말씀을 담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알려 주는 겁니다.

바울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바울이 해야 할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성령이 이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자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믿음으로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을 육신을 좇는 육의 법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 말씀을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을 영을 좇는 영의 법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영의 법을 좇게 하세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율법이 고발을 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앞에 서면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아! 나는 죽어야 할 자이구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입을 닫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러는 겁니다.

야! 너의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어!

하나님이 네 죄를 그 아들 예수에게 전가 시켜서 죽게 하셨어!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율법이 뭐라고 하면 내 죄 값은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 하셨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정죄입니까?

율법으로부터의 정죄입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정죄를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더 이상 율법으로 정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정죄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율법의 규례들인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율법적 관습이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따르고자 해요.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일컬어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이렇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날과 달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날로 살아가는 믿음이 강한 자들은 이러한 자들을 잘 받고 그들의 약점을 잘 담당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강한 자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라는 겁니다.

 

강함이란? 믿음이 연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들의 눈높이 맞추어서 안고 가야 하는 것이어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는 그렇게 대해 주셨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일컬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어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케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 긍휼로 구원하여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이에 온 열방들이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15:8-9=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隨從者)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할례의 수종자(隨從者)란? 할례의 뜻을 몸으로 친히 담당했다는 뜻입니다.

 

할례 뭡니까?

육적 죽음을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난 사람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세례로 나타났습니다.

할례나 세례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모두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최초의 할례는 아브람이 받았습니다.

아브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이걸 육(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곤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또한 이름도 바꿔 줍니다.

 

이건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은 죽었고, 아브라함이라는 새 사람으로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아브람은 할례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아브라함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아버지란 뜻입니다.

 

‘아브람’의 아비는 ‘데라’였지만,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은 이제부터 데라의 후손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후손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후손으로 사는 것이냐?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러면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은 약속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이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이는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의 머리를 깨트릴 자입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 권세를 깨트린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신 약속의 후손인 이삭은 곧 아브라함의 죄를 담당해 줄 대속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리고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으로 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대속해 줄 제물임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다른 제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숫양입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제물을 준비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받았습니다.

이삭 대신 바쳐진 숫양의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입니다.

그 숫양의 실상이 신약에 오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낳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께서 주신 제물이 이삭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니까 하나님이 알았다고 하면서 숫양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삭에게는 숫양이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이삭에게는 숫양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에요.

그러니까 이삭이나 숫양 모두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안으로 들어가서는 제사가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모든 제물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모든 제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것으로 드리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제물은 곧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25=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진짜를 보여주기 위한 예표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림자란 실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제물의 죽음이 그림자라고 했으니까 이는 곧 그 제물의 실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림자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로는 온전케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짐승의 제사로는 하나님이 만족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온전치도 않은 것을 왜 드리게 하였는가요?

이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제사를 누가 드리나요?

죄인이 드립니다.

그러니까 제사 속에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흠 없는 어떤 분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제사 속에 이 정신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정신이 결여된 제사는 껍데기입니다.

 

나 제사 지냈잖아요! 가 나오면 안 되고!

주여! 제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이 여기 흠 없는 제물의 대신 죽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해요.

이게 제사의 의미에요.

 

그러데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제사 지낸 것으로 나왔어요.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할례나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야 해요.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 속에는 나를 대신 하여 죽어주는 한 분을 추억하는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흠 없는 한 사람을 원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대신 하여 죽어줄 대속주입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합니다.

하나님 내가 왔습니다.

내가 바로 구약의 율법 속에서 드려지던 제사와 예물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창세로부터 가졌던 언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세전 그 언약 속의 기록이 된 한 몸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생겼습니다.

율법 속에서 드려지던 제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제물의 제사로 나아가는 것은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짐승을 드렸지만,

새 언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드렸습니다.

이제 짐승의 제사로 나아오면 반칙이 됩니다.

 

짐승의 제사를 통틀어 율법이라고 하고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할례라고 합니다.

그 율법 속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도말을 하셨습니다.

이걸 예수님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더 이상 이러한 것으로 나아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령이 이 사실을 증거케 하십니다.

성령께서 성도들 마음속에 이 법을 새겨 놓았어요.

 

성령이 새겨준 법이 있는 사람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요.

더 이상 율법의 요구로 나아올 필요가 없어요.

예수의 피로 씻었으니까 이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가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끝까지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사실들이 증거가 되어야 해요.

 

교회란? 이 사실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로 모여서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고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율법 아래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할례의 수종자(隨從者)라는 말은 율법의 수종자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다 수종(隨從)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수종들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도 있고 아직까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분쟁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율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서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니까 자칭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이해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들이 신앙이 틀렸다고 몰아 부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시험에 드는 겁니다.

 

이에 바울이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지식을 가진 강한 자들이고, 저들은 아직까지 부드러운 것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한 자들이 아니냐!

그럼 믿음이 강한 너희들이 믿음이 연약한 저희들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어떻게 어른이 아이하고 싸울 수가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이 둘은 담당하는 역량의 문제이므로 서로 배척하고 충돌 할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보듬어 안으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이 은혜로 감싸 안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교회 안에서는 성도들을 법으로 접근하지 말고 은혜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입니다.

지체와 지체가 모여서 몸을 이룹니다.

어떤 몸인가 하면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화평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죄인을 화평케 하셨고, 아래로는 이웃과 이웃을 화평케 하였습니다.

이게 십자가 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한 성령을 마셨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금 로마 교회가 서로의 뜻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뜻아 갈라졌나요?

먹고 마시는 것 때문이에요.

 

왜? 교회가 분열을 합니까?

이는 은혜로 나오지 못하고 법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나오면 율법을 지킨 자와 안 지킨 자는 차별성이 생깁니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문 것을 다시 쌓는 것이에요.

 

예수 안에서는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차별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 안은 율법의 동네가 아니고 은혜의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위로 사는 곳이 아니고 예수의 행위로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는 동네에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율법에 속한 것들 때문에 다투고 갈라지지 말고 뜻을 합하여 하나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율법적 행위는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으로는 정죄 당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정죄 당함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 안에서는 율법적 행위로 인하여 믿음이 있다!

믿음이 없다! 라는 식으로서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별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고, 이해하고 기다리며 감당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감당 할 만한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율법적 습관이 남아서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까 아는 너희들이 모르는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라는 것입니다.

 

무얼 담당하라고 하나요?

약점이에요.

약점!

 

바울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나요?

자칭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왜?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그러는가요?

 

이들이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강함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시험 들게 하고 실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강한 자들은 모든 것을 감당할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덕을 세우는데 사용되지 않고 연약한 자들을 시험 들게 하는 것으로 사용 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악이에요.

 

교회 안에서는 항상 안다고 하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자칭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이 일으켜요.

왜? 그러느냐 하면 강함을 은혜로 쓰지 못하고 법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자기 사욕으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교만은 항상 지식을 근거로 활동을 해요.

모르면 교만 하지 않아요.

다 안다고 하기 때문에 교만한 겁니다.

 

법은 반드시 차별성을 두어요.

그래서 너와 나를 갈라서 보는 겁니다.

난 하는데!

넌 왜? 못하느냐! 라는 식으로 차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함이 약함을 담당하지 못할 때는 폭력이 되고 악이 되어요.

 

어른이 만약에 어린아이들 앞에서 어른 행실을 하지 못하면 그건 어린아이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가 되고 말아요.

그건 어른이 아니고 불한당이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므로 항상 믿음이 강한 자들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이게 예수를 본받는 것이고 사랑이에요.

 

바울은 계속하여서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 주고 있어요.

우린 이 답 앞에 우리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해요.

말씀이 거울이 되어서 우리를 비추고 있어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이 일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부(解剖)하여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를 낱낱이 끄집어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를 발가벗긴다고 합니다.

왜? 발가벗깁니까?

 

예수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요?

주의 긍휼을 구하게 합니다.

 

이는 말씀이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강한 자이냐?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발당하는 자에요.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무는 자입니다.

 

산상보훈 식으로 말하면 내 눈에 들보를 보는 자들이에요.

자기 눈에 들보를 보는 자들은 남에 눈에 티를 보고 왈가왈부하지 않아요.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탓하겠어요.

 

믿음이 강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에요.

 

너도 나도 모두가 다 죄인이다!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고가 아니라!

우린 모두가 용서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고 강함과 약함을 차별치 않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은혜에 보좌 앞으로 함께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강한 자입니다.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살고 있어요.

너의 공로도 아니고 나의 공로도 아니에요.

무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도 아니에요.

이 날을 지켰느냐! 저 날을 지켰느냐! 도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 앞에 율법적 행위는 무가치해요.

여기서 무가치하다는 것은 의(義)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의가 되지 않으니 그런 것으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 싸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받은 용서와 긍휼과 사랑만 있을 뿐이에요.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서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강함이란? 역설적이게도 자기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자이구나!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남의 약함을 가지고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요.

 

자기 꼬라지를 분명히 아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보이고 내 허물이 보일 때 비로서 우리는 입을 닫게 됩니다.

내 눈에 들보가 보이면 남을 참소 할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도 이러한 사고로 보아야 해요.

우리의 실존이 고발당하는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새 번역 본을 보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 같아서 인용을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여서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내 유익을 구해서는 안 되고 이웃에게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좋을 대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려고 강하심에도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강한 자가 되셔서 연약한 우리를 받아 주셨듯이 우리도 연약한 자들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주께서 자기 맘대로 살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 말은 너희도 너희 맘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연약함을 받아 주셨듯이 우리도 연약한 자들을 받아 주라고 하지요.

먼저 주셨으니 받은 것이 있으면 내어 놓으라는 겁니다.

 

이 말씀 앞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또 갚을 수 없는 부채(負債)를 떠안은 것 같지요.

우린 이 말씀대로 살기 보다는 그와 정 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린 남에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구하고 삽니다.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남이 나를 배려 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좋을 대로 살지 남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모든 말씀을 우리의 실존을 알려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린 말씀 앞에 서서 우리 실존을 보아야 합니다.

정답 앞에서 우리의 틀림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마세요.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임의대로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린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해석을 당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하게 되면 자기 입맛에 따라 악의 적인 편집을 하게 되고 지킬 것과 못 지킬 것을 구분하고 취사선택을 하게 되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온 율법을 지키다가도 그 중에 하나만 어겨도 다 어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려면 일점일획이라도 변개치 말고 다 완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어떻게 율법을 일점일획을 어김없이 온전하게 지킬 수가 있나요?

없습니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지킬 수 있다고 한다면 죄인이 아니지요.

우린 율법을 애당초 지킬 수가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모” 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가!”

 

우리가 말씀 앞에 서면 그러하여야 합니다.

말씀 앞에 서면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야 하고 작아져야 합니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로마서 12장 이후를 강해하면서도 하나 염려스러운 것은 이것을 또 다른 법으로 받을까봐서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행동 강령으로 이해 할까봐서입니다.

그러면 자기 행위를 붙잡게 되는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됩니다.

 

로마서 12장 이후를 성도의 삶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바라심입니다.

즉 정답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난 너희들이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살 수도 없습니다.

이게 제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씀 앞에만 서면 작아집니다.

상한 심령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나를 너는 죄인이라고 고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발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죽을 때까지 자기 사랑으로 움직여요.

무얼 해도 내 유익을 구해요.

아무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대신 담당하라고 하여도 우리는 강함을 가지고 약함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려고 합니다.

선생 노릇하고 싶어 하고 으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 밖에 못해요.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자기만 위해서 살다가 가요.

그게 우리들입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마음으로는 사랑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데 이 놈에 몸뚱이가 우리가 아는 것과 마음 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습니다.

 

기껏 해서 사랑하는 흉내를 내어도 결국에는 자기 사랑을 챙기고 있어요.

누군가는 사랑해도 결국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행함을 붙잡게 되어 있어요.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건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버려지지 않아요.

주의 은혜로 하였지! 라고 하여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한 것이라고 챙겨요.

저 역시 복음을 전하여도 전한 것에 의미를 두게 되어요.

주변의 반응에 따라 희비한단 말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키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지켜도 안 되고!

안 지켜도 안 되고!

이는 지키고 안 지킨 것을 신앙의 근본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도 아니에요.

 

우리가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믿음이고! 내가 한 일에 의미를 두면 행위에요.

 

제가 말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뭘 하고 안 하고를 가지고 신앙의 싸움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신앙의 싸움에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 보다는 남의 신앙을 판단하기에 급해요.

난 하는데 넌 왜? 못하느냐고 타박해요.

 

남은 안 하는데 나만 하면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요.

그럼 안하는 사람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요.

그러다 보니까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 보다는 저 사람은 안 하는데 나만 하는 것 같은 억울함이 드는 겁니다.

 

이러면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와 감사를 놓치게 되어요.

마귀가 자꾸만 그런 생각을 주는 거에요.

그럼 신앙이 채무를 갚는 것처럼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져요.

 

왜? 남의 신앙을 판단하다가 귀한 은혜와 감사를 놓칩니까?

그러니 남에 신앙을 가타부타 따지지 마세요.

그것 따지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어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예를 듭니다.

교회 안에는 봉사(연보, 헌신, 섬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안하는 사람도 있어요.

다 하면 좋을 텐데 안한단 말입니다.

 

그럼 봉사(연보, 헌신, 섬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안하는 사람들이 미워요.

저 인간은 왜? 봉사(연보, 헌신, 섬김,,,)를 안 하는 거야! 라고 미워하게 되어요.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 잡게 되어요.

 

이러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가 깨어져요.

무엇 때문에 깨어지는가요?

봉사(연보, 헌신, 섬김,,,)를 했느냐 안 했느냐 라는 행위 때문입니다.

 

이걸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자를 식물로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봉사(연보, 헌신, 섬김,,,)를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먹고 마시는 것들과 같아요.

 

봉사(연보, 헌신, 섬김,,,) 안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아니에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봉사(연보, 헌신, 섬김,,,)를 못하겠어요.

얼마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러한 일들을 못하고 있겠어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 때문에 내가 왜? 받은 은혜에 감사를 놓칩니까?

남의 꼬라지를 살피다가 내가 받은 은혜를 놓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남의 신앙적인 일들 때문에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은혜가 임하면 하겠지 하고 기다리세요.

어쩌겠어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것을,,,

억지로 춤추게 할 순 없잖아요.

 

하나님께 맡기고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걸 따지면 하나님이 따지는 나를 뭐라고 해요.

너 왜? 그 아이 때문에 열 받느냐?

너나 내가 준 은혜 속에서 감사하며 살라고 합니다.

 

우린 우리가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싸움을 하여야 해요.

성령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보라고하고 마귀는 남과 나를 자꾸만 비교하게 해요.

마귀의 꾐에 넘어지지 마세요.

그럼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해요.

그것도 남 때문에,,,

 

우리의 눈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어야 해요.

내가 아니고 예수이어야 해요.

마귀는 우리의 관심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돌리게 해요.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인간을 미혹 할 때 어떻게 하였나요?

인간의 눈을 선악과에 붙잡아 둔 것입니다.

선악과에 눈이 고정 당하면 생명과는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생명과를 먹지 않는 한 그 속에 영생은 없어요.

영생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 하여도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어요.

하나님의 뜻은 선악과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마귀는 아담이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만 하면 되어요.

그래서 마귀는 아담의 눈을 생명과로부터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에 관심을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선악과에 눈이 고정 되면 자동적으로 생명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우리 행위와 믿음으로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의 뜻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 속에서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믿음이지 우리 행위가 아닌 겁니다.

우리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거기선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만 나와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해 할까봐 여기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예수를 붙잡아야 한다!

또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행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붙잡아야 된다!

혹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액션을 취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를 붙잡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행위가 아니고 은혜에요.

 

아까 무어라고 했나요?

인간은 자기 행위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지요.

자기가 한 일을 본능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붙잡게 되어 있다고 했지요.

이게 죄의 소욕이거든요.

 

죄는 항상 자기에게 의미를 두게 합니다.

여기에 믿음이 개입이 되면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말고 주 예수를 바라보게 하세요.

우리가 한 행위 자체도 주께서 하게 하신 것임을 알게 하세요.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죄를 용서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받으셨나요?

이는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셨어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빚을 진 겁니다.

이 빚을 형제에게 갚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갚으라고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는 바탕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보이라는 것이 깔려 있어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주었어요.

 

사랑을 주셨고!

은혜를 주셨고!

용서를 주셨고!

긍휼을 주셨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예수라는 씨를 뿌렸어요.

예수라는 씨를 우리 몸에 심어 놓았어요.

이제 그 예수라는 씨가 자라서 열매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예수라는 값을 주고 산 것은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의 농사를 짓고자 함이에요.

 

예수라는 씨는 우리 몸을 토양으로 해서 발아(發芽)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싹을 내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그게 긍휼이고 사랑이고 은혜에요.

성령의 열매들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의 몸에서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피어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이 삶으로 피어나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십자가 도를 몸으로 살아내게 되어 있어요.

이 십자가 도가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받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68편을 봅시다.

 

시 68:18-19=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아버지께 예물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 예물이 무엇인가 하면 죄인을 구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로부터 죄인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구원이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죄인이 선물인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뭐가 답답해서 죄인을 선물로 받으십니까?

이는 죄인을 가지고 뭔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은 것은 함께 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고자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이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함입니다.

무슨 짐인가요?

구원의 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구원을 날마다 이루어가시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주께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지금도 얻고 있으며, 장차 얻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사람의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구원 얻은 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 짐을 대신 져 주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지셨는데!

그 혜택은 우리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서로 간에 분열하여 차별치 말고 나누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을 봅니다.

 

갈 6:1-2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을 서로 지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짐이 뭔가요?

형제의 허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허물을 덮는 것을 짐을 진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했다! 안했다! 로 판단하고 차별하던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율법의 조문들을 다 찢어버린 것입니다.

 

이젠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의 수종자(隨從者)가 되셔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열방들도 그 혜택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수가 없어요.

또한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차별도 없어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 자들뿐입니다.

 

강한 자도 긍휼을 입었고!

연약한 자도 긍휼을 입었습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가 그리스도가 주는 긍휼을 입었습니다.

은혜를 입었어요.

 

강함도 자랑일 수가 없고! 약함이 수치일 수도 없어요.

강한 자도 용서 받은 죄인이고! 약한 자도 용서 받은 죄인이에요.

강한 자도 긍휼을 입었고! 약한 자도 긍휼을 입었어요.

그러니 강함과 약함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나누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보세요.

그리 할 때 강함과 약함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와 나가 아닌 우리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모두가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서 받은 것을 가지고서 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법을 제하시고 은혜가 왕 노릇하게 해 주옵소서! 너와 나를 가르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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