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79강. 은혜를 주신 이유

정낙원 2014. 7. 6. 00:27

79강. 은혜를 주신 이유 (롬 15:14-33)

 

롬 15:14-3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왜? 은혜를 주셨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은혜를 주셨느냐?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려고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이지만 곧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받고 달아 보고 확증 받아야 해요.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고백과 같은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이방인을 위하여 자신은 제사장 직무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신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언뜻 들으면 틀린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구원 받은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정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은혜에 속한 것이므로 행위로 인하여 구원에서 잘려 나갈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막 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해요.

왜냐하면! 구원 자체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예수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우리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맘대로 살도록 두시지 않아요

 

복음을 곡해 하면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 면죄부로 사용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이런 구원을 주신 적이 없어요.

만약에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있거나 또한 그런 가르침에 동의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자칭 신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택함을 입은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하고,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연약하여서 넘어지는 것은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회개가 동반 되지만, 막 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막 사는 것은 아픔이 없고 뻔뻔스러워요.

죄의식이 없어요.

 

성도는 죄와 싸우는 자이지 죄를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가 아니에요.

죄와 싸우는 자에게는 애통함이 일어나지만, 죄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자에게는 애통함이 일어나지 않아요.

이런 자를 일컬어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이방인 보다 더 방탕하고 방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것도 종말의 징조로 볼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을 하였고, 신약 성경은 교회의 역사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곧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교회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이는 모든 시대를 상징하고 있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온 세대 속에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대별로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해요.

쉬운 말로 역사 속에 교회가 에베소교회로 시작하여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난다고 볼 수 있어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교회사를 시대별로 보면 세대주의라고 하는데 세대주의라고 해서 다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온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맨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 모습이기도 해요.

지금을 흔히 말세지말 이라고 하니까 어쩌면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은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들의 신앙 모습이기도 해요.

우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우리의 것으로 들어야 해요.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이 어떤가요?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합니다.

그러면서 네 행위를 안다고 합니다.

뭘 안다고 하나요?

행위에요.

 

그런데 그 행위가 어떤가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하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삶은 아니란 것입니다.

말로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로는 혼자 예수를 제일 잘 믿는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은 청천벽력입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마음에 평안도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삶이 가난하고,

은혜를 받지 못해서 마음이 냉골이고 사납고,

시대의 징조도 보지 못하고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타락하여서 수치스럽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모두가 예수를 문 밖에 내어 좇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즉 그 안에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안에 없으니 자기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합니다.

즉 말씀 앞에 너를 세워서 네 꼬라지를 좀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네 모습을 뭐라고 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합니다.

어떤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성경을 상고하라고!

성경 속에는 믿음으로 살아간 성도들의 모습들이 나와 있어요.

그들이 정답이에요.

 

교만한 목사들은 자기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해요.

보통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고 하는 목사들이 자기 이름을 내고자 이런 짓을 많이 해요.

신학으로 말씀을 도적질해요.

 

성경을 통해서 자기 논리를 검증 받아야 하는데 꺼꾸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 구절을 끌어 당겨서 자신의 논리에 합당함을 꾀한단 말입니다.

이걸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하게 지은 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들 중에서도 복음 알면 막 살아도 된다고 하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망발을 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발 성경을 상고 하세요.

그럼 해답을 알 수가 있어요.

여러분의 신앙을 확인 받을 수가 있어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이라고 합니다.

 

값으로 샀다는 것은 곧 주인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값을 주고 샀는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죄 아래 가두어진 우리들을 빼내 오시려고 죄 없는 그 아들을 우리 대신 값을 치르고 사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값을 치렀어요.

누구에게 치렀나요?

우리를 붙잡고 있던 마귀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빼내 오려고 예수를 대신 마귀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 아래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자기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희생이 담겨져 있게 됩니다.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저란 예수님이고 모든 사람이란 자기 백성들을 말해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은 것은 예수 때문에 산 자들을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하여 살게 하려고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 이러한 원칙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사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난 자들은 이제부터 역설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대신하여서 살아야 하는 운명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돈을 주고 사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종은 주인에게 있어서 소유물과 같아요.

 

물건에겐 자기 삶이 없어요.

자기 뜻이 없습니다.

철저히 주인의 지시에 순응하고 주인이 허락한 삶을 살아야 해요.

이게 종이에요.

 

종은 주인의 운명과 같이 해요.

그런데 말이죠.

이게 엄청난 복이에요.

왜냐하면! 종은 주인의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잠간 집을 비운 사이에 종들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줍니다.

종들은 주인이 없지만 각자 받은 것으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달란트를 남긴 자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인의 명을 받고 그대로 순종한 종은 주인의 희노애락에 동참을 합니다.

하지만 주인의 명을 우습게 여기고 불순종한 자는 쫓겨남을 당하게 되어요.

어째서 주인의 명에 순종을 하였고,

어째서 주인의 명에 순종하지 않았나요?

 

주인의 명에 순종한 종은 자기 생각으로 살지 않고 주인의 생각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명에 불순종한 종은 자기 생각으로 살았어요.

종이 자기 생각을 가지면 종노릇을 못해요.

주인의 뜻에 반기(反旗)를 들어요.

이게 죄에요.

 

성경이 왜? 죄를 불순종으로 말하고 있는지 아세요.

이는 피조물은 창조주에 명(命)을 떠나는 순간 죽은 목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만물이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이 된 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연결 된 상태를 살았다고 해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끊어진 것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을 의라고 하고 불순종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 하라고 하니까 이걸 행위 차원으로 들을까봐서 하나 집고 넘어 갑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죄인이라 함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가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그 원함으로 살아갈 힘이 없어요.

이는 우리 안에서 죄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우린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해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어요.

 

사사기를 보면 잘 나와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함에도 그렇지가 못해요.

이는 구원을 받아도 우리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 몸뚱이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순환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구조 속에서 주 앞에 긍휼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살고 있는 바탕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음을 알게 되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덕분에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순종과 불순종의 관계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죄를 고발하는 율법을 바탕으로 해서 주어져요.

복음이 복음으로 드러나려면 반드시 죄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해요.

이건 마치 빛을 드러내기 위하여 어둠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은혜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구원입니다.

우리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에요.

그런데 이 은혜라는 복음은 죄를 통하여서 드러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에 속한 복음을 주시기 위하여 먼저 우리 죄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십시오!

죄 짓지 마세요! 라고 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순종 할 수 없음을 알기 위하여 순종하라는 것이고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게 하려고 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그러므로 자기 삶이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삶만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과 연합이 된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종은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종은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신분도 달라져요.

쉬운 말로 대통령 차를 운전하는 기사하고 사장님 차를 운전하는 기사하고 급이 달라요.

같은 운전수이지만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권세가 달라져요.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럼 우리도 예수님의 희노애락에 동참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이런 찬송이 있었어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무슨 말인가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계신 그곳에 우리도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말인가요.

 

바울은 은혜를 입고 난 후 삼층천에 가서 이 사실을 보았어요.

자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존재하는 종이라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자기 몸에는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고난도 예수와 함께 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감사이고!

평안도 예수와 함께 하는 평안이기 때문에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난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풍부에 처한 것도 그리스도의 풍부이고, 비천도 처한 것도 그리스도의 비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감사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러한 것을 간증합니까?

 

이는 우리 성도들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된 자로서 예수그리스도의 희노애락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비관하거나 낙심 할 것이 아니라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 이겨 내라는 것입니다.

 

바울 식으로 풍부하면 풍부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시고!

비천에 처하면 비천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세요.

우리는 풍부이든 비천이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승리한 자들입니다.

 

부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난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부함과 가난이 우리의 신앙을 넘어뜨릴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어요.

 

사도 바울의 간증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도행전의 역사는 써지고 있어요.

이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그 분이 만유를 이기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앙생활 하면 안 돼요.

나와 함께하는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예수가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그러한 분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세상을 이길 수가 있어요.

 

요한일서 4장을 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있는 자들을 말해요.

 

믿음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안을 주세요.

구원에 확신을 주어요.

이 확신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을 때입니다.

예수가 안 보일 때입니다.

예수가 안 보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꼬라지를 보게 되어 있어요.

 

내 꼬라지를 보는 순간 우린 사단의 참소를 받게 되어 있어요.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사단이 참소를 하듯이 우리 역시 마귀가 너 그 따위로 살아서 되느냐 라고 참소해요.

이 참소에 걸려들면 두려움이 엄습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신 겁니다.

믿음이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게 하세요.

나의 어떠함을 보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다 이루신 것을 믿어지게 하세요.

 

두려움은 하나님의 의가 없을 때 나타나요.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어요.

믿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게 하세요.

이것이 믿어지면 사단의 참소로부터 해방이 되어요.

 

이 믿음을 다른 말로 온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사랑이 있나요?

이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미친 여자 널뛰듯 하게 되어요.

어떤 땐 세상을 다 이긴 것처럼 방방 뛰다가, 어떤 때에는 소금 맞은 지렁이 마냥 풀이 죽어요.

 

제발 신앙이 관념이 아니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식이 아니길 바랍니다.

구원과 천국이 상상이 아니길 소망합니다.

 

성도는 구원 받기 위하여 사는 자들이 아니에요.

 

이미 구원 받은 자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찬국가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에요.

이미 천국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묵시 안에서는 이미 완료된 것이에요.

창세전 언약 관점에서 보면 완성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순서대로 펼쳐 보이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역사 속에서는 진행형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라는 미 완료적 시제(時制)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이는 역사 자체가 시작과 끝이라는 미완료로 진행되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도중에 취소되거나 잘려 나간다는 뜻이 아니에요.

성도는 영적으로는 이미 천국에서 살아요.

예수 안이 바로 천국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이미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 천에 가보니 거기엔 이미 구원이 완료된 상태의 자신을 보았어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나와서 예수로 살다가 예수 안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살게 되어 있어요.

마치 예수님이 천국에서 이 역사 세계로 오셨다가 다시 천국으로 가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것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광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기뻐하였어요.

 

성도는 예수와 연합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역순(逆順)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이건 마치 이미 이긴 바둑을 복기(復棋)하는 것처럼 살고 있어요.

우린 창세로부터 나왔다가 다시 창세로 돌아가고 있어요.

본래의 그 자리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렇다고 예수님과 같은 선재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선재론(先在論)이란? 전에 이미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계셨어요.

역사에 오시기 전에 계셨어요.

이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선재 할 수가 없어요.

우린 다만 창세전 언약 안에서 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니 선제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럼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사셨는지를 알아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봅시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스스로 증거 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복음에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7절부터는 자신이 지금까지 복음 전한 일들을 간증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살았어요.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인생을 자랑스러워했어요.

 

바울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요?

제사장 직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살았어요.

제사장이란? 구약적 개념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한 사람들이에요.

 

구약 때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피 뿌리는 직무를 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의 죄를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사해진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은 날마다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희생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를 짐승에게 대신 담당케 함으로서 너희의 죄를 사해 주셨다고 알려 주는 일을 했어요.

백성들에게 제사의 의미를 알려주고 제사를 대신 지내 주었어요.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죄인들 중간에 서서 중보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직접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아요.

반드시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만 받았어요.

이것은 장차 참 제사장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으실 것을 예표(豫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사만 받으실 것을 구약에는 제사장들의 제사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제사장은 목숨과 같은 자들이에요.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주지 않으면 죄사함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면서 대신 죽어준 제물의 피 때문에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보아야 해요.

또한 나 때문에 흠 없는 제물이 죽었다는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해요.

 

그런데 구약의 제사장들은 이 사실을 알리는 일에 게을리 하였어요.

제사 지내기에만 급급하였지 정작 그 제사 속에 담겨진 의미를 놓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사가 외식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의 제물인 고기를 챙기기에 급급했어요.

결국 제사가 자기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사를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종교지도자들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어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아래서 주류가 되어서 기득권층으로 살았어요.

제사의 의미를 모르고 제사만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눈이 떠진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소경이었던 것이 예수를 만나고 율법의 의미를 난 후 밝히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난 후 구약을 재해석하기 시작을 했어요.

모든 율법은 예수그리스도가 완성 하셨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율법으로는 온전케 될 수가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만 온전케 된다는 것을 증거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게 제사장 직무인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 직무를 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 보세요.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한번 달아보세요.

우리는 복음에 제사장 직무를 하고 있나요?

 

우리는 복음 알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이 다 하셨으니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마치 그것이 복음을 올바로 알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오늘 본문 앞에서 죄로 드러나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없어요.

도리어 자기 인생이 차압을 당해요.

 

구원이란? 종말을 전제로 주어져요.

 

“선 오브 갓(Son of God)” 이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갑니다.

그리곤 새로운 삶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제가 왜? 새로운 삶이 필요 합니까? 라고 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이제부턴 고기를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게 종말이에요.

예수를 만나면 기존에 나로 살던 것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어요.

이제부터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 편입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지요.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띠 띄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는 성령이 임하면 베드로의 인생은 끝장나고 이제부터 예수의 인생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내 인생이 예수의 것으로 차압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하고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일을 시키기 위함이라고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봅시다.

 

행 9:13-25=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아나니아 에게로 갑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사울을 교회를 핍박하는 악명 높은 자라고 합니다.

이에 주께서 바울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그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하지요.

그리고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害)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요.

이게 종의 운명이에요.

 

이에 아나니아가 안수하자 성령의 충만을 입습니다.

그리곤 곧 바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반발을 하고서 바울을 죽이고자 합니다.

졸지에 동지에서 적으로 바뀐 겁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울을 예수님과 같은 운명 속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이게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함에 있어 자랑거리가 없어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되어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일을 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이적들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맞는다는 것을 확증해 주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일루이곤까지 복음을 전한 것은 모두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랑 되어질 것은 그리스도이지 자기가 아니란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원수였던 자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무를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고맙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복음을 자기 용도로 챙기게 해요.

마귀가 광야에 주리신 예수님을 찾아 와서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어서 자기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이름을 내는 자들이지 자기 이름을 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기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신 분을 자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종의 모습이에요.

 

죄는 항상 자기 이름을 내라고 유혹해요.

주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가로채게 해요.

여기에 걸려들면 복음조차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용해요.

자기 영광을 챙긴단 말입니다.

이게 불법이에요.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것은 마지막 때 심판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자기가 지금까지 한 일들을 영웅담처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귀신도 좇아내고 병도 고치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갖가지 권능을 행하였다고 자랑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합니다.

 

복음도 전하고,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좌우지간 갖가지 주를 위하여 충성하였습니다.

목사도 하고 장로도 하고 자칭 스승 노릇도 하였습니다.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했으니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청천 병력과 같은 말이 쏟아집니다.

 

“난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한 놈들아 나를 떠나 지옥에 가라” 고 하십니다.

 

아니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날 벼락입니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요?

주님을 위해서 바쳐온 세월이 얼마인데 모르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일평생 오직 주님 하나만 입에 달고 살았는데 모르다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너무한 겁니다.

속된 말로 자기가 일평생 쌓아온 모든 업적들을 총동원해서 하나님 앞에 내어 보여서 큰 상(賞)을 받을 것이라고 입에 침 튀겨 가면서 자랑하고 있는데 상(賞)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으라고 하니 이건 아니지요.

 

이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 버젓이 기록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내게 하는 말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은 열외를 시켜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난 아니겠지! 라고 생각을 해요.

이런 사고가 결국엔 하나님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이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고 남의 이야기로 들려지면 이야기 하나 마나에요

 

이건 마치 남에 연애편지를 들고서 자기 편지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남의 연애편지는 아무리 보아도 내 것이 되지 않아요.

내 편지가 되려면 내가 그의 애인이 되어야 해요.

 

성경 말씀이 내 편지가 되려면 내가 예수님의 애인으로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의 애인이 되면 모든 성경 말씀이 곧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려져요.

그럴 때 비로서 예수님이 울 때 같이 울고, 예수님이 기뻐 할 때 같이 기뻐함이 되어져요.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한 말처럼 들려져요.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저건 김 집사가 들어야 하고,

저건 박 집사가 들어야 하고,

저건 이 집사가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잖아요.

그러니 자기는 들을게 아무도 없으니 말씀과 겉돌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땐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들을 이해 할 수가 없었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렇게 은혜를 받고도 어떻게 불순종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화를 냈어요.

옆에 있으면 콱 쥐어박았을 겁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보았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그 군중들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보았어요.

결국 예수님을 내가 죽인 것이란 것이 깨달아지더라고요.

성경이 이렇게 보이기 시작하니까 모든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에게 하신 말씀들이 되더라고요.

 

예수님의 책망이 나에게 하시는 책망으로 들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위에서 말한 내용이 나도 이런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내 딴엔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할 수가 있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처럼 주의 이름으로 뭘 했다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그 어떤 말씀도 나를 제외시킬 수가 없어요.

그러니 말씀을 더 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찾게 되어요.

 

혹시 내 믿음도 가짜가 아닌가?

내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가 가짜 예수는 아닌가?

예수님과 상관없이 나 혼자 좋다고 설치는 것이 아닌지 곰곰이 궁구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에 선진들의 삶과 비교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에 교인들을 만나면 어찌 그리도 믿음이 좋은지 몰라요.

다들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해요.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자신은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겐 그들의 장담과 같이 예수를 잘 믿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꼭 위에서 말한 사람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어 놓는 믿음이 전부가 자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난 너희를 모른다는 말씀 속에는 인간이 내어놓는 믿음과 예수님이 바라는 믿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분명이 예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들도 자칭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믿음이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예요.

자기 딴엔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로보건데 예수님은 인간들의 믿음을 믿음으로 간주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급선무에요.

 

신앙생활은 내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란 내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하니까요.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어떤 믿음이냐의 싸움으로 치닫게 되지요.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믿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 앞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자기들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흉내 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믿음을 주지 않아도 인간들이 만든 믿음으로도 얼마든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권능을 행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 나온 자들이 이런 것들을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무슨 일을 하였다는 것으로 그 신앙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분간 할 수가 없어요.

얼마든지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라도 이런 저런 일들을 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아니라도 복음을 말할 수가 있어요.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방언도 하고 갖가지 능력들을 행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역사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믿음의 역사들인지를 분별하여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일을 마귀는 얼마든지 모방을 합니다.

그래서 거짓 믿음을 인간들에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믿음이 뭐냐?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믿음이에요.

거짓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정성으로 만들 수가 있어요.

이걸 분별하지 않으면 속아요.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믿음을 말해요.

다 은혜 받았다고 하고 자기가 정통이라고 해요.

그럼 이들을 다 인정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까?

스스로 분별하여야 하겠지요.

 

이제부터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마귀가 준 거짓 믿음을 분별하도록 해 봅시다.

 

“믿습니다” 라는 말과 같이 모호한 말이 없습니다.

십인십색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마다 내어 놓는 믿음이 다 달라요.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내가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믿음인줄 알고 있습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요.

 

자기 믿음은 당연히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두가 참 믿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예수님 앞에서 쫓겨날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믿음이 없어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확신이 있었어요.

다만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어서 예수님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지옥으로 가라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럼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분별해 보도록 합시다.

참과 거짓을 알려면 성경이 말하는 참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일컬어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라 함은 죽음을 말하는데 이는 참과 거짓으로 따지면 거짓이란 말입니다.

참은 이 세상에 없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 되는 겁니다.

성경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 속엔 인간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 속에 모두가 하나님 것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은혜성이에요.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것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 믿음 속에는 인간이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거저 주시는 은혜뿐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자랑 할 것도 없고 혼자 아는 척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에 소유(所有) 할 수도 없어요.

 

지금 내가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은혜로 깨닫게 해 주신 것이므로 소유가 되지 않는 겁니다.

비록 오늘 깨달았다 할지라도 내일 성령에 감동이 없으면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성령의 은사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하거나 으뜸이 되고자 하지 않아요.

 

그러나 반대로 인간들이 만든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소유화가 되어요.

공부해서 자기 지식으로 깨달은 것이므로 언제든지 빼내 쓸 수가 있어요.

이렇게 되면 다 안다고 하고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으로 남는 겁니다.

항상 상석에 앉은 스승이 되어서 가르치려고만 해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가 있어요.

그가 복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은사로 알아진 자는 교만치 않고 지식으로 알이진 자는 교만해요.

 

믿음이 앎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삶이에요.

산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나무와 열매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믿음을 그려내는 화면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묵시를 그리려고 역사를 만든 것과 같아요.

이 역사는 묵시 속에서 나왔잖아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가 되었잖아요.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 언약을 그려내십니다.

 

자 이걸 우리 몸으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구원했습니다.

이는 우리 몸으로 예수님의 언약을 그려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서는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사건들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이걸 체휼이라고 하고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항상 그 사람의 행실을 유의하여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이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어요.

신앙이란 도(道)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도(道)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몸 안에 와 계십니다.

시내산 위에 계시던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셨어요.

그리곤 간섭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어요.

우리 안에서 우리 몸을 주장하세요.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인도하세요.

예수님이 간섭 하면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이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안에서 간섭하기 때문에 베드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간섭이 없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종속이 된 자를 말합니다.

주인의 간섭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에요.

 

복음을 받으면 예수님과 같은 정신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억지로 살아내라는 것이 아니고,,

이건 그렇게 되어 있다니까요.

 

억지로 살아내는 것은 종교에요.

그러니 신앙은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살게 하심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였구요.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을 아는 것이 신앙인줄 착각하고 있어요.

아는 것과 삶을 분리해요.

그러나 주께서 주신 앎이라면 반드시 그 앎이 신앙적인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 같이 자칭 예수를 믿는 자들은 아는 것만 있어요.

나 복음 안다!

그러면서 복음에 붙잡혀 살지 않고 자기 정욕에 붙잡혀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요.

 

그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이용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정욕대로 살라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추구하는 그 정욕 때문에 죽었어요.

 

그렇다면 진짜 예수를 믿고 그 안에 예수가 거하는 성도는 그 정욕이라는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정상이에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더 드러내기 위해서 내 마음대로 죄짓고 산다고 합니다.

이걸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습니다! 라고 하자,

어떤 놈들이 그럼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지어도 되겠네! 라고 했어요.

그러자 바울은 야! 이 미친놈아!

그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는데 어찌 그 예수의 죽음을 안다고 하는 놈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죄에 대하여 죽은 놈이 어떻게 죄 짓고 살겠다고 하느냐 입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사고방식의 문제에요.

 

죄를 이길 수 없어서 죄를 짓는 것은 죄에 대한 아픔과 상한 심령이 일어나지만,

그래 나 죄인인데 죄 짓는 것이 뭐가 문제냐 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아픔이나 상한 심령이 일어나지 않아요.

바울은 이런 것을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악한 것이라고 경고했어요.

그런데 이런 짓을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행하고 있어요.

 

에스겔 36장을 봅시다.

 

겔 36:24-32=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본문에서 말하는 새 영(靈)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둔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새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를 어디서 불러낸다고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을 섬기던 것에서 불러낸다고 하지요.

 

우상이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하여 신을 섬기고 살았어요.

죄란 항상 내 몸 중심으로 역사를 합니다.

여기서 불러냈어요.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불러냈어요.

 

하나님께서 왜? 우리 안에 새 영을 주신다고 합니까?

이는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내 신(神)을 너희 속에 두어서 내 율례를 지키게 한다고 하지요.

성령이 하나님 뜻을 따르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내 뜻으로 살았는데 성령이 오셔서 이젠 너희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거엔 내 마음대로 “나” 라는 우상을 섬기고 살았는데,

이젠 “나” 라는 우상을 척결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런 지향성이 일어난다는 말이에요.

 

결국 성령이 나와 싸우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옛날에 하던 것들이 더러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과거 이방인으로 살 때의 그런 악한 일을 가증히 여기고 밉게 보게 된다고 합니다.

죄를 멀리하게 된단 말입니다.

죄 짓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한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란?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면 육신의 소욕과 일대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이 가나안이에요.

우리 안에 가나안 칠 족속이 들어 있어요.

 

새 영인 성령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자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변화를 일어나게 하지 않는 복음은 관념이에요.

 

관념은 죽은 겁니다.

그건 지식이에요.

지식으로 알아진 십자가 도는 아무리 많이 알아도 죽은 것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예수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이걸 격언이라고 하고 재 같은 속담이라고 했어요.

 

욥기 13장을 봅시다.

 

욥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욥 13:12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인간은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에요.

왜? 거짓말을 하나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에요.

 

이렇게 지은 거짓말을 격언이라고 해요.

그 격언을 다 타고 남은 재라고 합니다.

재는 아무리 많이 쌓아도 잡으려고 하면 그냥 푹 꺼져요.

남는 게 없어요.

겉으로 보기엔 엄청난 분량으로 보이는데 막상 잡고자 하면 다 빠져 나가고 없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이 그래요.

말로는 엄청 많아 알고 태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막상 자기 삶에 영향을 일으키지 못해요.

 

마치 죽은 고기처럼 물결 따라 풍조에 흘러가게 되는 겁니다.

육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요.

세속에 물들어 그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불러낸 것이 없어요.

그냥 그 자리에요.

예수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달라진 것이 없어요.

달라진 것이라곤 주둥이만 달라졌어요.

 

우수갯 소리로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주둥이만 할례를 받았어요.

그러니 말쟁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청산유수에요.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경건을 말하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방인과 동일하게 살아가요.

이런 것을 두고 성경은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합니다.

자기 안에 자기를 제어할 분이 없기 때문에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기 몸을 방탕과 방임에 내 맡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자세를 말해요.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역사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죄와 싸우는 것이지 죄를 즐기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와 싸우는 것이지 죄를 먹고 마시면서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싸움이 없는 자는 가짜에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육신의 소욕을 부추기는 것은 뱀의 독(毒)이에요.

그건 복음이 아니고 사술(邪術)이에요.

 

유다서를 봅시다.

 

유 1:3-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합니다.

왜? 편지 한다고 합니까?

이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거짓 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놈들이 연약한 자들을 거짓말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미혹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다고 하지요.

색욕이란? 자기 몸에 사욕을 쫓는 것을 말해요.

 

유다는 이렇게 몸에 사욕을 쫓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 복음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구습(舊習)을 좇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의 종이 아니라 자기 종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결국 자기라는 우상 안에 가두어져 있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몸은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죄의 몸이라는 겁니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에 관심을 두지 말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바라보자고 합니다.

 

일견 맞는 말처럼 들려요.

논리적으로 보면 맞아요.

그런데 이들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어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않고 부활하여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놓치고 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우리 몸을 성전 삼고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적용 시키세요.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신단 말입니다.

 

어떻게 적용 시키시는가 하면 우리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일을 하세요.

우리를 말씀 앞에 세워서 우리 몸이 하나님의 뜻을 담아 낼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말씀 앞에 항복하게 한단 말입니다.

 

막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하여서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사함의 능력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크게 다가와요.

많이 알면 많이 감사가 나오고 적게 알면 적게 감사가 나와요.

 

성령은 우리 몸을 긍정해 주는 것이 아니고 부정하세요.

어떻게 부정하는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게 하여서 부정하세요.

우리 몸뚱이가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단 말이에요.

 

넌 죄를 이길 수 없어!

넌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어!

그래서 넌 저주 받아야 해! 라고 고발해 준단 말입니다.

그리곤 우리 시선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여서 감사케 한단 말입니다.

 

시내 산에 계시던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니까 이스라엘 속에 있던 죄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악이 드러나게 되었어요.

 

이 일을 지금은 성령이 하세요.

성령이 역사 하면 할수록 우리 몸은 죄가 자꾸만 드러나게 되어요.

마치 똥 기저귀를 풀썩 거리면 냄새가 나듯이 성령이 말씀을 가지고 다가오면 우리 몸에서 죄가 풀풀 쏟아져 나온단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어요.

이럴 때 토해지는 것들이 사랑이고 온유고 겸손이고 자비고 절제고 양선이고 관용이고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 몸에서 그려지는 것입니다.

이걸 신의 성품이라고 하고 예수의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우리 몸은 예수님의 일하심을 그려내어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비취면 우린 자기가 부인되어져요.

이를 한마디로 고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몸은 걸레가 되어가요.

무가치함을 깨달아요.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곤 우리 몸을 걸레로 사용하는 겁니다.

예수와 같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픈 겁니다.

 

제물이란?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를 말하고 12장부터는 삶을 말한다고 했어요.

12장을 시작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지요.

 

산 제사란? 내 몸을 제물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제물이 되는가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요.

 

쉬운 말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제물 되어 죽으셨으니 너희도 예수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 힘으로 하지 못하니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셨어요.

 

바울은 이 성령의 은사로 이방인을 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어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마게도냐로 서바나로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제사장 직무에요.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제사장 직무에요.

제사장은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정결케 하는 제사를 지내요.

이는 우리가 먼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유다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교리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십자가 교리를 넘어 온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에요.

십자가 교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예수와 연합된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제사에요.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을 시작하셨어요.

누구 일입니까?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심어 주어서 우리 안에서 소원이 되게 하여서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서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 하셨고 일하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시오니 주께서 우리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소원을 주어서 행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타나지는 것마다 주님의 것이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