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50강. 음녀의 멸망 (계 18:14-24)

정낙원 2016. 12. 2. 13:28

50강. 음녀의 멸망 (계 18:14-24)

 

18:14-2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 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 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 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오늘은 음녀의 멸망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음녀의 멸망은 곧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어요.

시작하는 때가 있으면 끝이 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하여 갈수록 더 후패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처처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을 보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늙어가면서 몸에 각양의 질병과 죽음의 반점들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사회 전반에 썩은 반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뿜어내는 공해로 인하여 지구가 각종 천재지변으로 종말이 다가옴을 말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은 지구의 생명이 다해간다는 징후들이에요.

 

이러한 때에 성도는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도에게 있어 종말은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므로 슬픈 날이 아니고 기쁜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끝이 난다고 하면 기쁨보다 슬프고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이는 우리의 마음이 롯의 처처럼 이 세상에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종말이라는 말이 그리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종말 때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어쩜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음녀의 멸망을 대하는 성도들의 자세는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큰 성 바벨론인 큰 음녀는 광의적으로는 온 세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적 배경으로는 로마라는 국가적 권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이므로 큰 음녀는 온 세상의 타락한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큰 음녀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정치적으로는 국가이면서,

종교적으로는 타락한 교회를 의미하고,

신앙적으로는 세속화된 교인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녀의 멸망 사건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들의 총체적 심판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의 심판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음미해 보세요.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고 하지요.

이러면 두 가지 천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질 옛 천지가 있고, 영원히 존재하는 새 천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인생으로 적용해 보세요.

우리도 두 사람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질 흙에서 난 인생과,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하늘로부터 난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이 세상에 살다가 사라질 존재이고,

새 사람은 장차 오는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천지가 있듯이 두 천국이 있어요.

영적인 천국과 실제적 천국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실 때는 영적인 천국을 몰고 오셨어요.

그러나 재림 때에는 실제적인 천국을 몰고 오실 것입니다.

 

구원도 두 구원이 있어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는 영적인 구원과,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는 실제적 구원이 있어요.

 

예수님의 초림은 영적 구원을 주셨어요.

예수님의 재림은 실제적 구원을 주세요.

지금은 우리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나 재림은 실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천년 왕국을 뜻하고 있지만,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역사 바깥에 존재하는 천국을 예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어요.

이러면 보이는 이 세상은 복사본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원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복사본이에요.

복사본은 원본을 담고 있어요.

 

복사본은 마치 씨와 같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씨앗이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내는 것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몸도 땅에서 난 헌 몸은 죽고 하늘로서 난 새로운 몸으로 받듯이 이 세상도 헌 세상은 멸망당하고 새로운 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 소식 속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쁜 소식도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멸망을 너무 암울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군대에서 제대하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성도에게 죽음이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늘에 장막을 덧입는 것이므로 기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필요한 육에 몸은 용도가 다하여서 폐기 처분하고 하늘에서 살아갈 새롭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저주가 되기도 하고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저주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사람에게는 죽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은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아야 해요.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의에 거하는 바 그 나라를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임할 종말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노아 시대 타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신약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된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일컬어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하였어요.

두 주인을 재물과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성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음녀는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음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음녀를 멸망시킬까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원수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녀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배를 불리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하였어요.

 

3:18-19.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음행이나 배도나 타락이나 다 같은 말이에요.

큰 음녀와 그를 따르는 땅의 음녀들도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하고 있어요.

음녀에 속해 있는 교인들의 머릿속에도 온통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음녀에게 속한 교인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음녀와 함께 그를 따르는 자들도 멸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에게는 세상의 멸망은 새로운 세상으로 이사 가는 것이에요.

쉬운 말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셋방살이하다가 천국이라는 내 집을 마련하여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새 집에서 영원히 살게 되어요.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천국에 누가 사나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아가는 곳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산다는 것은 기쁜 일이에요.

그래서 천국은 평화의 나라이고 영원한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은 멸망시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은 영원토록 보존을 하세요.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영원하다고 하고 천국에서의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과 영원히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 너머에 있어요.

 

음녀와 그 세력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음녀들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지옥에 누가 가느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가요.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가르쳤어요.

너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알려 주셨어요.

언약의 후손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얼마나 큰 복을 받은 민족인지를 알려주었어요.

 

율법 정신이 뭔가요?

사랑이에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정의하기를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자 함이에요.

그 사랑을 알게 하려고 죄를 고발하고 은혜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만민 중에서 택함을 입은 사랑의 민족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라고 율법으로 주어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너를 위하여 살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라고 하십니다.

 

죄가 뭐냐?

창조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찬송을 받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러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근원적으로 추적하자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것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최초의 죄가 어떻게 들어왔나요?

선악과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로 어떻게 미혹합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된다고 하였어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처럼 자기 법을 가지고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심판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기 법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자기 법이 생겨요.

자기만의 법을 가지고 하나님 같이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생각(의)이에요.

 

자기 마음에 들면 선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법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되어요.

이게 불순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자기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 만의 법을 갖게 되었어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하였어요.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과 다른 눈이에요.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발가벗고 있어도 나무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가려 주셨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들이 발가벗음은 수치라고 여긴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들의 생각이에요.

자기 생각에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해서 못 살아요.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스스로가 심판하는 법 아래 가두어지고 만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법을 하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가 아담을 하나님 자리에 앉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자기만의 선악을 판단하는 법을 가지고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사사건건 하나님과 충돌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아담에게 악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악이 아담에게 선으로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냅니다.

함께 살면 서로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들 마음대로 살라고 분가를 시킨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신이 되었어요.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기 기준으로 피아를 구분합니다.

자기 생각에 동조하면 아군이고,

자기 생각에 반대하면 적군이 되는 겁니다.

 

죄인은 모두가 자기 법으로 신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조가 된 세상을 인간들이 보기에 좋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선악의 법을 가지고 태어나요.

그러므로 동일한 것을 가지고도 서로의 이해관계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정치 세계에요.

정치인들이 늘 싸우지요.

이는 진보와 보수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선도 없고 절대 악도 없어요.

어떤 이에게 선은, 어떤 이에게는 악이 되고,

어떤 이에게 악은, 어떤 이에게는 선이 되기도 해요.

이는 서로 간에 이해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만의 선과 악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요.

내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라 하고,

내게 힘들게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해요.

이게 신을 판단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갑니다.

내게 복을 주는 신은 좋은 신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신은 나쁜 신인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귀신이 좋은 신이고,

어떤 이에게는 귀신은 나쁜 신이에요.

무당들에게는 귀신은 유익을 주는 신이지만,

교인들에게는 귀신은 나쁜 신이에요.

무당들에게 예수는 나쁜 신이지만,

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좋은 신이에요.

신도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입니다.

 

음녀란? 자기의 법으로 산 자를 말해요.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땅에서 왕 노릇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멸망 받을 죄에요.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한 죄인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운 사람들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잖아요.

이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자행되어지고 있어요.

목사들이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왕 노릇하고 있어요.

 

음녀가 그러잖아요.

“나는 여황이다” 라고 하고 있잖아요.

지난 시간 음녀의 상품은 교인들이라고 하였어요.

음녀가 양을 잡아먹는 못된 목자들처럼 교인들의 고혈을 빨아 먹으면서 왕처럼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말에 엘리 제사장을 보세요.

산해진미를 먹고 얼마나 호사스럽게 살았으면 살이 쪄서 스스로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비둔해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하겠어요.

 

이 시대가 엘리 시대와 같아요.

엘리 시대가 어떠했나요?

법궤를 이방인에게 빼앗겼어요.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빼앗겨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의 말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교인들 마음속에 예수님은 없고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서 맨 마지막 종말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엘리 시대의 모습과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음녀가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긍하고 자위하고 자만하고 자족하고 자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가요?

소경이고 발가벗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살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실상은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게 음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던 교회들이 종말이 되어서 왜 이렇게 타락을 할까요?

이 모두가 성경을 응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이 세상은 처음 창조시부터 멸망할 것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이는 이 세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유한한 것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아요.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하는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어요.

 

하나님은 이 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십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가 있어요.

죄에서 건짐받는 자가 있고 죄 아래 유기된 자도 있어요.

 

창세전 언약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를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을 하고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고 작정되지 않은 자는 예수를 안 믿어요.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그 주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아요.

하나님에게 있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을 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어 있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는 어린 양의 실체이신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아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해 주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물이니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예수 라는 이름으로 보냈어요.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말해요.

 

예수님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셨지만,

저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는 심판인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천국 백성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의 흑암에서 빛을 끄집어내는 창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어요.

이를 창세기 1장에서는 흑암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흑암이란? 죄와 사망이란 말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이 넘실거리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이런 세상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빛이에요.

창세기 1장 3절에서 하나님이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시지요.

이게 성도의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일을 하셨어요.

예수님은 초림으로 오셔서 구약 교회 안에서 이 일을 행하셨어요.

예수님이 12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흑암 속에서 건져 내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오심을 흑암이 앉은 자들이 큰 빛을 보았다고 하지요.

이러면 구약 교회가 흑암이 되는 것입니다.

 

맞아요.

예수님이 와서 보니까 구약 교회가 어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비진리로 가득한 것입니다.

성전에 장사꾼들로 가득했어요.

이건 세상의 가치로 엄몰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을 일컬어 저희는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이를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의 멸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이건 구약 교회의 멸망을 뜻해요.

 

이 모습은 장차 종말에 일어날 음녀의 멸망을 예표하고 있어요.

음녀의 멸망 속에는 이 세상의 멸망도 있지만 귀신의 처소가 된 타락한 교회의 멸망도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녀를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음녀를 바벨론이라고 할까요?

이는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 국가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이란? 하늘의 문, 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이에요.

바벨론이란? 혼란케 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음녀 바벨론은 하늘가는 길을 혼란케 하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 때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천국 문을 막아 서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하였어요.

교인 하나를 전도하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하였어요.

이 일을 종말의 음녀가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가 종교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각종 더러운 영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구원이 길이 있다고 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예수그리스도 이외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는 참 복음을 가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땅에 속한 짐승들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적그리스도와 그 세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두 짐승이 나옵니다.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으로서 이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오는데 이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소속은 땅이에요.

적그리스도가 올라온 바다나 거짓 선지자가 올라온 땅이나 영적으로는 같아요.

바다와 땅은 동의어로서 그 본질은 같아요.

이들은 이 땅의 신인 뱀의 후손들이에요.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혼돈된 땅을 바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2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면 위란? 물 위라는 뜻입니다.

 

왜 혼돈된 땅을 바다라고 표현을 합니까?

이는 성경에서 물은 사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물에서 건짐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뱀이 강같이 토한 물에 잠겨 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붉은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서 화가 가득하여 자기를 하늘에서 쫓아낸 여자의 후손들이 있는 교회를 뱀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서 홍수로 떠내려가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귀가 교회를 비 진리인 땅에 말로 엄몰하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음녀로 나타난 것입니다.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어요.

이 물은 온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열국이라고 합니다.

이는 음녀가 온 세상의 모든 사상을 다 수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녀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는 구약 교회를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였지만,

예수님 재림 때에는 신약의 타락한 교회를 귀신의 처소라고 해요.

이것은 교회가 완전히 세상의 가치에 엄몰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녀의 모습을 이 세상의 부요와 사치와 연락에 취하여 있는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가 앉은 많은 물을 무리와 열국과 방언이라고 하지요.

이는 온 세상을 말해요.

음녀 안에 온 세상의 사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를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교회가 모든 종교를 다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온 세상의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누가 하나요?

로마 카톨릭입니다.

카톨릭이 지금 WCC를 앞세워서 종교 통합을 하고 있어요.

카톨릭의 뿌리는 바벨론이에요.

카톨릭은 바벨론의 종교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세계의 모든 종교가 카톨릭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은 근본이 같기 때문이에요.

세상의 종교는 모두 그 뿌리가 같으니까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세상의 모든 종교는 구원의 길이 있으므로 배척하지 말고 하나 되어야 한다고 해요.

여기에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근본 사상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큰 음녀는 카톨릭을 말하고 있어요.

그럼 그를 따르는 땅의 음녀들은 카톨릭의 사상에 동조하는 모든 종교 세력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큰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은 로마였어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온 나라 위에 앉아 군림하고 있었어요.

이것이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온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안고 있었어요.

 

이 시대 로마 카톨릭도 온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포용하고 있어요.

지금은 카톨릭 사상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어요.

한국교회도 엄몰당하고 말았어요.

그 증거가 바로 종교 통합을 주창하는 WCC에 가입하여서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2013년 부산에서 치러진 WCC 총회를 한국의 수많은 교단들이 동조하여서 대회를 치른 모습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어요.

진보주의 교단들은 다 가입을 하였어요.

지금은 기독교가 세상의 많은 종교 중에서 하나의 종교가 되고 말았어요.

 

종말의 구원이란? 이러한 뱀 사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비진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백성아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장소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가 없듯이 음녀와는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마귀의 사상으로 빼내시는 구원을 하시고,

또한 저주받은 이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서 하늘로 데려가는 구원을 하십니다.

그래서 종말의 구원을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 세상을 떠나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어서 떠나지 못하게 해요.

육신적으로 살기 좋게 하여서 이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겁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의 모습을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는 문명의 발달을 말합니다.

인간들이 문명을 발달시키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인간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안락함과 행복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꿈 꾸는 천국은 이 땅이에요.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천국관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나라에요.

마귀는 인간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이 땅에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들이 주인인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왜 인간 나라 건설이 죄가 되나요?

이는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에 불과해요.

이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인간이 창조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중심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 밖에 있어요.

이를 하늘 나라 즉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뭐냐?

나를 위하여 살던 자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로 부르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죄에서 건짐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미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이 땅에서 빼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처음 창조시에 이 땅을 한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나왔어요.

쉬운 말로 보이는 이 세상을 지구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실상이고 이 세상은 허상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실상과 허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고자 보이는 세계를 만드셨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지만 보이는 이 세계는 유한해요.

이 세상은 정해진 기간이 있어요.

설명이 다 되고 나면 폐기가 될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애초부터 멸망 할 것을 창조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멸망할 것을 창조하였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옷과 같이 낡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은 멸망하기 위하여 보존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정해진 기간이 있다 함은 이 세상은 시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후패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시간과 함께 죽어가는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죽고 산천초목도 나이가 들면 죽어요.

우주도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면서 죽어가고 있어요.

만물이 점점 더 후패해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 수명이 다할 때가 되었어요.

이를 지구가 천재지변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은 뱀과 함께 아담을 이 세상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멸망할 이 땅을 마귀에게 주었어요.

하나님은 뱀에서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저주받은 세상을 마귀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저주받은 이 세상의 주인은 마귀에요.

저주받은 이 세상이 지옥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마귀와 함께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하는 심판을 단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 땅에 불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면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려서 너희를 저주받은 세상에서 빼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러니 너는 저주받은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자 하지 말고 여자의 후손이 와서 빼내 줄 때까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라고 하신 겁니다.

아담의 소망은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갈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이에요.

이게 아담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곳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교회 안에서 이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미혹하고 있어요.

여기에 음녀가 걸려든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이 걸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종인 적그리스도가 바다에서 올라오고 거짓 선지자들이 땅에서 올라와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땅의 것(떡)으로 미혹하여 땅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666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666을 매매하는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떡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떡을 생명으로 사는 자들은 짐승표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떡에 가치관으로 살면 짐승표를 받은 것이에요.

 

666이란 어느 한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시대이고 있었어요.

다만 그 모습이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모습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육신을 위한 것으로서 다 같은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로 살던 성도들은 고난당했어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신약의 교회 시대가 시작된 후부터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산 성도들은 말씀을 쫓아 살았어요.

어느 시대이고 말씀을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비주류로 살았어요.

반대로 육적 신자들은 돈을 쫓아가서 잘 살았어요.

 

종말에 타락한 교회가 어디에 취하여 있나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있습니다.

음행의 포도주란? 다름 아닌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에요.

진리적인 면에서는 비진리를 말하지만 가치관적인 입장에서는 세상 가치관인 돈을 쫓아가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음녀가 부와 사치와 연락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큰 음녀에게 빌붙어 사는 땅의 음녀들을 일컬어 땅에 왕족들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가 이 땅에서 왕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음녀의 멸망을 그들이 탐하던 것들이 떠나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음녀가 추구하는 부(富)가 일 시간에 망하였다고 하지요.

16-17절에서는 좋은 옷과 금 은 보석으로 꾸민 보배로운 상품이 일 시간에 망하였다고 하고,

22절에서는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등 따습고 배부르던 것이 다 사라지니까 지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에 교인들이 차고 넘치다가 다 떠나가서 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많을 때는 돈이 차고 넘쳤는데 교인들이 떠나고 나니까 돈줄이 말라 버린 것입니다.

돈의 힘으로 살던 자들에게 돈줄이 막히는 것은 죽음과 같아요.

 

유럽의 교회들을 보세요.

한 때는 차고 넘쳤어요.

그러나 지금은 텅텅 비었어요.

교회가 술집으로 바뀌었어요.

교인들이 떡을 갖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요는 반드시 타락을 몰고 와요.

떡이 말씀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어요.

한국 교회도 이미 그 길에 들어섰어요.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교인의 숫자를 힘으로 삼던 자들은 교인이 떠나면 힘을 잃게 되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뭔가요?
자기들 밥그릇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일컬어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였어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제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였어요.

성전이 복마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헐어 버렸어요.

성전이 사라지면서 제사가 폐하여진 것입니다.

성전이 헐어지고 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집단이 제사장 그룹이에요.

이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살았어요.

 

예수님 초림 때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고 난 후 제사장들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어요.

실업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성전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들이 탐하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마치 맷돌이 바다에 빠뜨려져서 일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그 화려하던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폐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모습을 누가 가장 마음 아파했을까요?
성전에서 먹고 살던 제사장들이에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는 이들이 음녀였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땅의 왕족들이었고 땅의 상고들이에요.

 

이들은 자기들이 탐하던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나니까 멘붕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를 어찌 할꼬!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세요.

 

9-11.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음행하고 사치하던 왕들이 음녀의 멸망을 보고서 울고 가슴을 치면서 그 고난을 무서워한다고 하지요.

상품이 사라진 것을 보고서 울며 애통해하지요.

 

여기서 고난이라는 말은 ‘바사니스모스’ 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문당한다’ 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무서워한다는 말은 ‘프로보스’ 라고 하는데 이는 ‘두려워서 벌벌 떤다’ 라는 말입니다.

음녀의 멸망을 왜 고난이라고 하고, 그 고난을 왜 고문이라고 할까요?

이는 돈을 힘으로 믿고 살던 자에게 돈이 떨어지는 것은 고문당하는 것과 같이 두려운 것이고 아픈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잘 보여주고 있어요.

대통령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빌붙어서 돈을 탐하던 자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세요.

대통령을 위시하여서 그에게 빌붙어서 호가호위하던 자들은 지금 고문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대통령과 그 주변의 세력들이 벌린 갖가지 비리 사건은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에요.

 

대통령과 그 세력들은 지금 고문당하고 있어요.

영원할 것 같던 권력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서 죄인을 만들어버렸으니 얼마나 슬프고 아프겠어요.

이제 죄값을 치루는 일만 남았으니 얼마나 두렵겠어요.

아마도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입니다.

 

음녀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물질의 가치를 쫓아가는 자들에게 물질의 떠남은 고문과 같은 것입니다.

돈을 힘으로 삼는 자는 돈이 떨어지면 지옥이 되어요.

마귀는 돈으로 천국을 주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주었어요.

 

마귀는 천국을 줄 수가 없어요.

천국은 예수님이 주세요.

이게 이 세상에서는 역설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정 반대의 모습으로 두었어요.

이 역설적인 천국과 지옥은 하늘에 지혜를 받지 않은 자는 몰라요.

오직 성령을 받은 성도만 알아요.

 

마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증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성공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아들 됨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마귀의 논리는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천국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 시대 땅에 속한 목사들이 기복주의 신앙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마치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속임이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 것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놓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증거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 것에 하나님 사랑을 담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 것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이 땅을 저주해 버렸어요.

그러니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라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이 세상 것이 무엇인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한 떡이고 세상의 부귀영화이고 자기 이름을 내고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마귀가 땅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는 미끼에요.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 미끼에요.

여기에 미혹을 당한 자들은 교회에 와서도 롯의 처와 같이 멸망 받을 세상 것을 뒤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바다라고 하는 것은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유발시키고 종국에는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바닷물과 같아요.

이 세상 것은 만족함이 없어요.

가지면 가질수록 갈증을 유발시켜요.

세상 것은 만족을 주지 않고 탐욕으로 지옥 생활을 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은 세상 것을 소유하면 지옥이 되게 하고, 세상 것을 버리면 천국이 되게 하였어요.

그러나 마귀는 정반대로 미혹해요.

세상 것 속에 행복이 있다고 미혹해요.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세상 것을 움켜잡고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돈 때문에 지옥이 되는데도 말이에요.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세상 것을 가진 자들이 행복하였나요?

아니에요.

겉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요.

 

편리함과 행복은 달라요.

돈은 육신의 편리함을 줄 수는 있어도 마음에 평안과 행복은 줄 수가 없어요.

행복은 육신의 편안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평안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은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져요.

마음이 평안한 자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복을 받은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떡을 가진 자들은 늘 불안에 쫓기며 살았어요.

사람의 속성은 가진 것을 지키고자 하면 쫓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권력(물질)을 가지면 가질수록 권력(물질)을 지키고자 권력(물질)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물질)을 잃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권력(물질)을 지키고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재물은 독수리가 날아가듯이 쉬 날아가는 것이므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역사 속에서 행복하게 산 사람들은 없는 자들이었어요.

비록 삶의 질은 떨어져서 조금은 불편하였지만 마음은 행복했어요.

지킬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몰고온 천국 복음 속에는 세상 것이 없어요.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하실 때에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땅에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어요.

하늘이 신령한 복이란? 영적인 복이에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에베소서 1장은 창세전 언약을 말해주고 있어요.

3절을 보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땅에 복이 아니라 하늘에 신령한 복이에요.

 

하늘에 신령한 복은 땅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하늘에 속한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어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게 하다가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세상의 것은 빼내고 하늘의 것으로 채우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창세기 1장의 창조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땅의 모습이에요.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을 창세전 언약에서는 에베소서 1장 4절의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과,

에베소서 1장 4절의 모습을 서로 비교해 보세요.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기 1장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이것은 죄 아래 가두어진 상태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에베소서 1장 4절의 죄 아래 가두어진 모습이에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말은 비 거룩하고 흠 있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죄 아래 있는 것을 말해요.

 

창세전 언약에서 말한 에베소서 1장 4절의 죄 아래 있는 상태를,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흑암에 가두어진 상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에 누가 가두어져 있나요?

빛입니다.

 

하나님이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잖아요.

그 빛을 의인화 하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빛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흑암에 가두어져 있을 때는 하늘에 신령한 복이 없었어요.

흑암에서 빼내고 난 후에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채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지 창조는 흑암에서 빼내는 구원을 말하고,

창조된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것은 곧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늘의 것을 채우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죄 아래서 건짐 받고 하늘에 신령한 것을 채움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채워지는 것을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룬다고 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면 저녁에서 아침이 없는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곱째 날 안식일인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은 천년왕국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한 천년왕국은 천국을 상징해요.

그래서 일곱째 날은 저녁이 되매 아침이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상징하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지요.

이것은 타락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해요.

그러나 천국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은 타락이 없기 때문에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구원이 완성된 세계에요.

그래서 천국을 상징하는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해와 달이 없고 어린 양이 친히 빛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어디가 흑암인가요?

땅이에요.

왜 하늘은 사라지고 땅만 있는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이 타락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타락한 땅에서 창세전 언약의 내용인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서 하늘에 신령한 복을 채워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은 흑암에서 빼낸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구원해서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는 것으로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는 땅의 것을 복으로 주신 적이 없어요.

땅에서 빼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마귀는 땅의 것을 복이라고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 성공하여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에 속한 자들은 따르지 않지만 땅에 속한 자들은 다 따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말을 듣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땅의 음녀들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음녀의 멸망을 땅의 상고들이 탐하던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의 멸망 속에는 이 세상의 멸망도 함께 들어가 있으므로,

장차 이 세상의 멸망도 음녀의 멸망처럼 일순간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세상 심판을 교회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도 다 이런 이치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세상이에요.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두 물이 합하여졌어요.

교회 안에 마귀의 말이 하나님의 말로 둔갑이 되어서 전해지고 있어요.

교회마다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귀신의 가르침이에요.

 

마귀의 논리대로 라면 12 제자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저주 받은 자들이에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이구요.

모두가 이 땅에서 고난당하고 지리멸멸한 모습으로 살다가 갔어요.

수백 년 동안 지하 카타콤에서 믿음을 지키고 간 성도들은 저주 중에서도 가장 큰 저주를 받은 것이 되고 말아요.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도 저주받은 것이 되구요.

 

하지만 성경은 이들을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모두가 이 땅에서 유리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일컬어 믿음의 선진들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구름같이 둘러선 증인들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6장을 보세요.

일찍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자들이 천국에 가 있잖아요.

계시록 14장에 하늘의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을 보세요.

모두가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에요.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죽임 당한 성도들이에요.

 

이들이 땅에서 호화로이 살았나요?

아니에요.

모두가 고난을 받았어요.

떡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았어요.

마귀의 종들이나 호사롭게 살지 하나님의 종들은 그렇게 살도록 허락하지 않아요.

 

하늘에 신령한 복은 영적 복이에요.

이게 산상보훈의 팔복이에요.

요한계시록의 7복이에요.

산상보훈의 팔복이나 요한계시록의 7복은 영적인 것이지 육적인 것이 아니에요.

산상보훈의 영적인 복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땅에서 버려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7복은 세상의 가치에 반하는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육적인 것을 복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거짓 종들이 하늘에 복을 땅의 것으로 둔갑을 시켜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세상의 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종들은 세상 것을 주겠다고 교인들과 매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인 음녀를 복마전(伏魔殿)인 귀신의 처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게 아니라고 하는 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복이 아니라 하늘에 복이 진짜 복이라고 하는 성도들은 거짓 종들과 거짓 신자들에게 이단소리 듣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녀가 있는 성에 선지자들과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종말의 타락한 교회는 성도들의 무덤이에요.

성도들이 죽임당하는 곳이에요.

아벨이 가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듯이 성도들도 형제라고 하는 자들의 손에 죽임당해요.

지금은 이단 소리 듣는 것이 죽임당하는 것과 같아요.

 

성경이 인류의 시작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이 서로 싸우는 것으로 죄인들의 세계를 시작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창세전에 하나님이 영에 속한 자들이 육에 속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짜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동족으로부터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종말의 교회에 일어날 일들을 구약에서는 한 집안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은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봅시다.

 

23:33-39.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이 선지자들을 죽인다고 하지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들을 돌로 치고 죽인다고 하잖아요.

왜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들을 죽일까요?

이는 하나님이 보낸 종들은 그들의 악을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이방 나라에 보내지 않았어요.

자기 백성들에게 보냈어요.

자기 백성들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해요.

 

하나님이 지금 누구랑 전쟁을 벌입니까?

자기 백성들이에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돌이키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지요.

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냅니까?

이는 죽임당하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양은 이리를 고발하고자 보내는 미끼에요.

바리새인들이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하여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놈들이 양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속임 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서 이들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놈들은 흙에 속하여서 돈을 좋아하는 마귀의 종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놈들이 바로 선악과로 하와를 미혹한 뱀 새끼들이라고 폭로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참 성도들은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고 매를 맞고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른 말 하다가 육에 속한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해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의인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다가 죽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계시록 11장을 보세요.

 

11:1-10.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하나님이 두 증인을 어디에다가 파송하나요?

교회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둘씩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라고 파송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둘씩 둘씩 파송하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어요.

예수님 초림 때는 율법 교회 안에 있었어요.

이게 종말에는 음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을 음녀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교회에 가서 누구랑 싸우는가요?

 

10절을 보세요.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했다고 하지요.

두 증인이 죽으니까 누가 좋아하나요?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 바로 음녀의 무리들이에요.

이들의 소속은 땅이에요.

그런데 두 증인들이 땅의 것들은 악하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두 증인들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예수님처럼 죽임당했어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죽임당한 곳을 일컬어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죽임당한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 교회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듯이 두 증인들도 신약의 타락한 교회인 음녀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들을 타락한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한 미끼로 두신 것입니다.

두 증인을 죽인 것에 대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댓가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 시켰어요.

종말의 음녀도 마찬가지에요.

 

계시록 6장을 봅시다.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구원받은 영혼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 앞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요.

누구를 심판해 달라고 합니까?

땅에 거하는 자들이지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원수인 겁니다.

그럼 구원받은 영혼들은 누구에게 바른 말 하다가 죽임을 당했나요?

교회 안에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교회 안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늘에 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나요?

잠시 기다리라고 하지요.

왜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까?

저 아래 아직 네 동무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 아래 남아 있는 동무들도 너희들처럼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바른 소리 하다가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두 증인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수를 채우려고 우리에게 죽임당하는 순번을 주고 기다리게 하셨어요.

우리는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죽임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음녀로부터 죽임당한 선지자와 성도들이 이 성 중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장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한 것의 응답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그 수가 차기까지 계속하여서 교회 안에서 참 성도들은 죽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그 수가 다 차면 하나님은 음녀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음녀를 멸망시키기 위한 명분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음녀를 구약 시대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가 자기도 멸망을 당한 큰 성 바벨론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과 음녀의 멸망은 궤적을 같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로부터 죽임을 당한 성도는 천국으로 가는 멸망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죽임 당하는 음녀는 지옥으로 가는 멸망인 것입니다.

 

누구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렵니까?
마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마귀에게 죽임당하면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어차피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다 죽습니다.

신자는 마귀로부터 죽임당하고,

불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죽임당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였어요.

구약에는 언약의 후손들과 이방인으로 나타났지만,

신약에서는 교회와 세상을 음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 이야기를 음녀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음녀의 멸망 사건을 구약의 바벨론의 멸망 사건과 같은 모습으로 기록하여 놓은 것입니다.

음녀의 멸망을 바다에 맷돌이 빠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이것은 구약의 바벨론의 멸망과 같아요.

 

21절을 보세요.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 하리로다

 

예레미야 51장을 봅시다.

 

51:60-64.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임할 모든 재앙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이르되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남쪽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에 붙여서 멸망을 시킨다고 예언을 하였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레미야는 교회의 멸망을 말하였어요.

 

이 때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이단이라고 하면서 옥에 가두고 핍박을 하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의 타락과 멸망을 말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영적 상태는 시대를 달리해도 어느 때나 동일한 것입니다.

지금도 참 종들은 예레미야처럼 예언하다가 이단 소리 들어요.

 

하나님은 타락한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붙여서 멸망을 시켜 버립니다.

유다의 멸망은 저주의 멸망이 아니고 나중에 회복케 하려는 징벌적 차원의 멸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말은 안 들으니까 이웃에 있는 바벨론이라는 조폭에게 혼을 좀 내라고 붙여 버린 것입니다.

 

51:48-49. “하늘과 땅과 그 중의 모든 것이 바벨론을 인하여 기뻐 노래하리니 이는 파멸시키는 자가 북방에서 그에게 옴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9. 바벨론이 이스라엘 사람을 살륙하여 엎드러뜨림 같이 온 땅 사람이 바벨론에서 살륙을 당하여 엎드러지리라 하시도다

 

이렇게 한 것은 자기 백성들이 조폭들이 하는 행사머리를 자꾸만 배우고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폭을 자기 백성들 눈앞에서 영원히 없애려고 자기 백성을 미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하나님 백성을 징계하는 막대기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막대기로 사용을 해 놓고는 너 왜 내 백성을 혼냈느냐고 하면서 바벨론을 멸망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바벨론을 어떻게 멸망시킵니까?

바벨론의 멸망 이야기를 책에 써서 그 책을 돌에 묶어서 유브라데 하수에다가 던져 버리지요.

이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멸망 이야기가 적힌 책을 돌에 묶어서 유브라데 하수에 던져서 영영히 보이지 않게 하였듯이 바벨론을 그렇게 멸망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일순간에 멸망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은 일순간에 멸망을 당하였어요.

 

이것이 종말의 음녀의 멸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음녀의 심판을 맷돌을 바다에 빠뜨려서 다시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구약의 바벨론을 심판하는 것처럼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녀를 큰 성 바벨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댓가로 완전히 멸망을 당하였듯이,

종말에도 음녀를 성도들을 죽인 죄값으로 완전히 멸망을 시킬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바벨론의 멸망 사건을 통해서 신약의 음녀의 멸망을 미리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큰 제국 바벨론이 일순간에 고레스에게 멸망당했듯이,

종말에도 적그리스도 세력인 큰 음녀와 그를 따르는 땅의 음녀들도 바벨론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의 음녀인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하고 있어요.

로마는 국가적 음녀를 상징하고,

카톨릭은 종교적 음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적으로 본 음녀의 멸망은 로마의 멸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적 음녀인 로마의 멸망 속에는 종교적 음녀인 로마 카톨릭의 멸망도 함께 담겨 있어요.

 

국가적 음녀인 로마의 멸망 속에는 장차 이 세상의 멸망도 담겨 있고,

종교적 음녀인 로마 카톨릭의 멸망은 종말에 나타나는 적그리스도 세력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녀의 멸망 속에는 두 번 멸망당하는 이중적인 계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교회사 속에서도 예표적으로 보여주었어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로마 국교화가 되면서 타락하고 맙니다.

교회가 세상의 부와 사치에 연락하면서 큰 음녀가 되었어요.

로마 카톨릭은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받아들였어요.

징치가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는 항상 종교를 이용하였어요.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국가 권력의 뿌리는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국가 권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국가이든지 항상 종교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종교가 정치와 야합을 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 카톨릭은 약 1300년 동안 거대한 세력으로 군림하였어요.

얼마나 세력이 강했느냐 하면 로마 교황이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교황이 만왕의 왕이 된 것입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카톨릭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어요.

영원히 지속이 되어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력이 지극히 미미한 종교 개혁자들의 손에 일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이게 종교 개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무너진 것은 음녀의 멸망과 같아요.

그런데 죽은 것 같았던 카톨릭이 다시 일어났어요.

그것이 이 시대 종교 통합을 주도하는 카톨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예수님을 모방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 하고 적그리스도를 새끼 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나 새끼 양이나 같은 말이에요.

그러나 그 근본은 달라요.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적그리스도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멸망당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카톨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놈이 종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세상과 함께 완전히 멸망을 당합니다.

 

이게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데 교회로 나타났어요.

교회사적으로 보면 두아디라 교회는 로마국교 시대를 말합니다.

이 때를 중세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국교화 되면 신앙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정반대로 말해주고 있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완전히 타락하고 말았어요.

이 때 하나님이 사데 교회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로마 국교를 깨트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의 일차 멸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급기야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서 경배하게 합니다.

우상이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이게 앞서서 말했던 카톨릭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봅시다.

 

13:11-15.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지요.

14절을 보면 이 처음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놈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놈이에요.

이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어린 양을 페러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것 같던 카톨릭이 다시 부활한 것을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 카톨릭은 이전보다 더 강한 집단이 되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차 카톨릭을 무너뜨리고 생겨난 개혁주의 교회가 로마 카톨릭화 되어서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리가 틀렸다고 뛰쳐나온 개신교가 이제는 카톨릭과 연합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더 타락을 하였어요.

그래서 계시록 17-18장에서는 카톨릭을 큰 음녀로 말하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땅의 음녀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멸망시킵니다.

 

이게 사데의 두 번 멸망 사건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일차적(一次的)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500년 전에 망한 것으로 나타났고,

이차적(二次的)으로는 큰 음녀와 그 세력들이 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걸 알려면 사데의 두 번 멸망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지정학적 의미로 볼 때 사데는 산 위에다 성(城)을 쌓고 만든 도시로서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산 아래로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자체가 자연적으로 요새화가 되었어요.

주변이 절벽으로 이루어져서 들어가는 입구의 성문만 걸어 잠그면 그 누구도 들어 올 수가 없는 그야말로 철옹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철옹성과 같은 사데가 역사 속에서 두 번의 멸망당한 사건을 가지고 있어요.

첫 번째는, 주전 549년경에 루디아 왕국 때 바사의 고레스에게 멸망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사데는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멸망 당시에는 크로에수스(Croesus) 왕이 통치하는 시기였는데 전성기를 맞이하였어요.

비옥한 땅과 풍부한 자원과 활발한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금을 생산하는 도시로서 엄청난 부와 사치를 누렸습니다.

 

이 때 바사의 고레스가 14일간 사데 성을 포위하고 있었어요.

도무지 성문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어서 성 주변을 정찰했어요.

고레스가 지친 부하들의 사기를 북 돋으려고 누구든지 성 안으로 침투하여서 성문을 열면 큰 상급을 내린다고 포상금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정찰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병사가 성벽을 정탐하고 있다가 성 위에서 사데의 한 병사가 성벽에서 자기 철모를 성 벽 아래로 떨어뜨려서 성벽 길을 따라 내려와서 주워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 병사가 그 길을 정탐을 해 보니 겨우 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고레스에게 알려주었어요.

이에 고레스는 14명의 소수의 특공대를 구성해서 올라가게 하여서 성문을 열게 하고 하루 밤 사이에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사데에서는 누가 그 길로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온전하게 보초도 세우지 않고 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자만함이 결국은 하루 밤 사이에 그 화려하던 루디아 왕국을 망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사데의 1차 멸망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에 200년 후에 또 다시 재현되어서 나타났어요.

제국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사데를 지배하던 바사가 헬라에게 정복을 당하고 맙니다.

자연히 사데는 헬라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헬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데는 또 다시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자 헬라가 네 조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때 셀류쿠스 제국의 안티오쿠스가 주전 218년에 멸망을 시킵니다.

그 당시 안티오쿠스의 정적(政敵)인 아케우스가 사데를 통치하고 있었어요.

안티오쿠스가 아케우스를 잡으려고 일 년 동안 성을 포위하면서 침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침공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서책을 통해서 200년 전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루디아 왕국이 하루 밤 사이에 점령당한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이에 안티오쿠스가 용맹한 병사 15명을 특공대로 뽑아서 밤에 그 절벽 길로 침투하게 하여서 성문을 열게 하여서 정복을 해 버립니다.

 

안티오쿠스는 역사의 교훈을 얻어서 바사 왕 고레스가 루디아를 점령한 그 방법 그대로 사데를 점령하였어요.

하지만 아케우스는 자만에 빠져서 2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교훈 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데는 두 번 똑같은 방법으로 멸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 후 사데는 로마가 통치하던 시기인 주전 17년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 때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리곤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것은 종말에 일어날 음녀의 멸망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데의 두 번 망한 사건 속에는 교회사적인 의미로 보면 의미심장한 사건이 들어있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신약의 전 역사를 교회사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면 종교 개혁시대를 상징해요.

사데가 두 번 멸망당한 사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니 교회사 적으로 보면 교회가 두 번 멸망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데의 일차적 멸망 사건은 로마 카톨릭의 멸망 사건을 의미하고 있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후 엄청난 타락을 길을 걸었어요.

그러다가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로마 카톨릭은 세력이 약화되고 맙니다.

 

철옹성과 같던 로마 카톨릭이 루터와 같은 몇 사람에 의하여 무너졌어요.

하루아침에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중세 암흑시대를 마감하고 맙니다.

이건 마치 사데의 1차 무너짐과 같아요.

 

2차의 무너짐은 종말에 나타날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종교 개혁으로 사데의 1차 무너짐과 같이 무너지고 난 후에 개혁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가 엄청난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이건 사데가 헬라의 지배 하에서 두 번째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였던 것과 같아요.

 

이 시대는 죽은 것 같았던 카톨릭이 제 2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어요.

처음 때보다 더 세력이 커져 버렸어요.

지금은 온 세계에 그 세력을 떨치고 있어요.

교황은 하나님이 되고 말았어요.

교황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요.

 

마치 계시록 13장의 말씀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짐승이 처음 짐승보다 더 경배를 받는 것처럼 되고 말았어요.

이제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교황의 치마폭으로 감싸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카톨릭이 틀렸다고 개혁을 한 개신교가 카톨릭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1998년 미국의 루터교는 카톨릭과 연합을 하였어요,

 

카톨릭과 개신교는 교리 자체가 달라요.

둘이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하나가 되어서 서로 교류를 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나가 되었는가 하면 인간중심의 세상을 만들자는데 뜻을 같이 하면서입니다.

싸우지 말고 서로의 신앙을 인정해 주자고 하면서 개신교가 카톨릭의 인간존엄 사상의 인본주의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게 진보주의 신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해요.

여기에 인본주의자들이 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 주자는 종교 통합 운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진보주의 교회들이 종교 통합을 외치는 WCC에 동참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이 카톨릭이 주장하는 사상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초록은 동색이라 진보주의와 카톨릭은 그 근본 뿌리가 인본주의이기 때문에 상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명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카톨릭을 교회로 인정하지 않아요.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규정해요.

그러다 보니까 카톨릭과 연합하는 진보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이외 구원이 없다고 외치면 독선주의자들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해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전하면 꼴통이라고 하면서 공공의 적으로 간주가 되어서 이단 소리를 듣게 되어요.

 

신앙은 독선주의에요.

신앙은 인간의 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독선주의 일 수밖에 없어요.

“모든 종교가 다 같다” 라고 하면 사람들로부터 대인배 라고 인정을 받고 멋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진리가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 이외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지식하게 이걸 믿어요.

그게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대인배들로부터 편협한 극단주의자라고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아도 어쩔 수가 없어요.

종국에는 이단이라고 하면서 종교적인 죽임을 당하게 되겠지만 말이에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만 전하는 성도들은 핍박을 받았고 급기야는 죽임을 당했어요.

이러한 일이 또 다시 종말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걸 음녀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주께서 강림하여서 음녀를 멸망시키고 자기 백성들은 하늘나라로 빼내실 것입니다.

이러면 사데의 두 번째 멸망이 종말에 나타날 타락한 교회인 음녀의 멸망 사건으로서 역사 속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데” 라는 말은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일차 음녀의 멸망 때에는 종교 개혁자들로 나타났습니다.

종말에도 남은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둔 작은 그루터기 성도들이 있어요.

이들이 종말의 두 증인들이 되어서 음녀를 고발하다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개신교가 왜 이렇게 타락을 하였을까요?

이는 물질의 부요 때문입니다.

개신교회가 부흥을 하면서 세속화하고 세상의 부와 사치와 연락에 빠지게 되었어요.

교회에 돈이 쌓이면서 세속적 가치가 성경의 가치를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노아의 때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것으로 정의하셨어요.

이는 육체적인 삶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삶에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실 때 종말의 교회들이 그런다고 하셨어요.

이걸 라오디게아 교회로 말씀하셨어요.

마지막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정의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영적으로는 소경이고 가련하고 헐벗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영적으로는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에요.

이 시대 교회들은 물질의 풍요로 인하여 배고픔이 없어요.

천국에 대한 소망도 예수님의 재림의 기다림도 사라진지가 오래입니다.

 

심지어 교회들이 이 세상의 멸망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수천억씩 들여서 카톨릭처럼 화려한 신전을 짓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초림 때에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서 자랑하던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장차 날이 임하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 내린다고 할 때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화려하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는 처절한 멸망을 맞이하였습니다.

 

음녀의 멸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일순간에 멸망이 홀연히 임할 것입니다.

 

마치 예고 없이 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을 무너뜨리듯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진동치 않을 나라를 소망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진동하는 나라에요.

진동하는 나라에 두신 것은 진동치 않는 나라를 소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멸망 속에서 일어나요.

그러므로 음녀의 멸망은 곧 성도의 구원의 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음녀의 타락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오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타락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 날이 밝아오듯이 음녀의 타락은 곧 예수님의 재림으로 몰고 오는 새로운 날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믿음으로 사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은 성경대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성경대로 성도들은 반드시 멸망 속에서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징조를 통하여서 봅니다. 이러한 때에 근신하고 정신을 차려서 믿음으로 살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오직 주의 은혜로만 믿음을 지켜 낼 수가 있으므로 그 은혜를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타락 할수록 은혜가 더욱 충만케 하여서 유혹을 이겨 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