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강해

22강.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 방법 (창 3:1-7)

정낙원 2019. 1. 12. 15:02

22강.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 방법 (창 3:1-7)

 

창 3:1-7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조는 어떤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입니다.

 

원인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입니다.

원인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중심 내용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창조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만물의 존재 목적이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언약의 내용이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예수님이 역사 속에 오셔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언약입니다.

아버지는 계획하시고 아들이 성취하는 것입니다.

 

언약은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행형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일평생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구원이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죄와 사망에서 건져냄을 입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냄을 당하려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지고 나중에 건짐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구원은 이 수순에 따라서 일어나게 됩니다.

 

아담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아담도 창세전 언약의 수순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졌다가 건져냄을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다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구원 받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선악과와 생명과를 둔 것입니다.

물론 뱀도 이 일에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뱀을 둔 것은 아담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절차상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과 구원이야기 속에는 온 인류의 타락과 구원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은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우리도 아담의 수순을 밟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 생기를 부어서 생령이 되게 하십니다.

생령은 “네페쉬 하야” 라고 하는데 이는 그냥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는 각종 생물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를 산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산 영이란 그냥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자라는 뜻입니다.

산 영인 아담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자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과 속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담이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지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자면 아담은 먼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에게 빠져서 부모를 떠나고 맙니다.

아담에게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여자와 함께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면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자신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뱀이 어떻게 미혹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병서(兵書)에 보면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적(敵)의 전술 전략을 알고 싸우라는 말입니다.

그럼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도 그러합니다.

성도가 싸울 적은 마귀입니다.

그러자면 뱀이 어떻게 인간들을 미혹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기셨습니다.

이는 첫 아담은 뱀의 전술전략을 몰랐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사단의 계락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첫 아담을 통해서 뱀이 어떻게 인간들을 미혹하는지를 알 수가 있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를 통해서는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뱀이 무엇으로 여자를 어떻게 미혹하였는지를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에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과실이 있습니다.

먹으면 죽은 과실이 있고,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두 과실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두 과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뱀은 여자를 타깃으로 삼고 접근을 합니다.

 

뱀은 여자에게 의문을 던집니다.

 

창 3: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이 참 말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다른 과실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뱀은 먹지 말라고 하더냐 라는 의문문으로 여자가 자연적으로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바라보도록 유도를 한 것입니다.

 

만약에 뱀이 질문을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과실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면 당연히 여자는 생명과라고 하면서 생명과에게 눈길을 주었을 것입니다.

뱀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뱀이 여자보다 더욱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은 여자의 눈길을 선악과로 행하게 하려고 먹지 말라고 한 것으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마귀가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까 라는 명제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명제에 걸려들면 주 예수를 믿는 것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쪽으로 화제가 바뀌게 됩니다.

그럼 예수 믿는 것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까 라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고 만 것이 됩니다.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렸듯이 마귀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주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행위 신앙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신앙은 선악과를 안 먹는 것이 아니고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이 시대 신앙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죄사함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신앙의 본질을 주 예수를 믿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의 눈길을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게 하였듯이 지금도 마귀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눈길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주 예수를 믿는 것을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일들이 지금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단의 종들이 뱀이 되어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선악과를 가지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 가두는 일을 하였듯이 지금도 마귀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율법 신앙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먹으면 죽는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이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붙잡으면 죽을 의와 붙잡으면 영생하는 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에덴동산의 두 과실은 이 시대 교회 안에 두 의(義)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두 의가 있습니다.

 

율법으로 난 의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가 있습니다.

율법으로 난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를 붙잡으면 삽니다.

 

뱀이 여자에게 먹으면 죽을 선악과로 미혹하였듯이,

지금도 마귀는 교회 안에서 붙잡으면 죽을 의인 율법의 의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선악과에 미혹 당한 것은 선악과의 매력 때문입니다.

여자의 눈이 비친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습니다.

단박에 여자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율법의 의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으로 난 의는 선악과처럼 인간들 눈에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달콤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는 인간을 긍정해주고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고 인간에게 보람과 영광과 자랑 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애(自己愛)로 가득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자존감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이 일이든 신앙이든 모든 면에서 동일합니다.

그런데 선악과 신앙이 이를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 선악과 신앙으로 자기 영광으로 살아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율법의 의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 영광으로 성자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의 의가 선악과와 같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의로 자기 영광을 얻는데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사 새끼란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미혹한 뱀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이 예수님 초림 때 바리새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으로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신앙이 바로 뱀이 여자를 미혹한 선악과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이 뱀의 새끼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해 놓았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자가 보기에 선악과는 볼품이 없고 생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을 것 같았으면 인간의 속성상 선악과는 멀리하고 생명과를 따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너무도 맛나게 생겼고 생명과는 맛이 없게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생명과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볼품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생명과의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 53:2-3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생명과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매력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기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 전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힘들어도 죄 짓고 사는 일은 쉽습니다.

사람을 타락케 하는 것은 화려하여도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죄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달콤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만약에 죄 짓는 것이 힘이 들고 아픈 것이라고 한다면 죄 지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항상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죄는 하지 말라고 하여도 자발적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는 강요해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짓습니다.

그것도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어가면서 정성을 쏟고 기쁨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짓지 말라고 하여도 인간들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게 죄가 담고 있는 마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고 도적질 한 물이 달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성은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금지 할수록 더욱 더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더 하려는 것이 인간들의 죄성인 것입니다.

 

이건 인간이 범죄하기 전의 모습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 속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자 하는 기질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과를 먹기 전의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뱀은 이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부정의 말을 던져서 적극적으로 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정말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더냐 라고 하자 여자는 적극적으로 아니야 먹으라고 그랬어 라고 하면서 다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그랬어 라고 말을 합니다.

 

이에 뱀이 아니야 그걸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것이야 라고 의문을 증폭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의 눈에 선악과가 더 매력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보고 한 눈에 빠진 것도 하나님이 금지하는 것이니까 저걸 먹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강제로 먹게 한 줄을 알지만 실상을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뱀은 여자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뱀은 다만 여자에게 선악과가 담고 있는 정보만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추구하자 아담과 하와가 변명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뱀이 꾀므로 먹었다고 합니다.

꾀었다는 말은 따 먹을 수밖에 없도록 호기심을 유발시켰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강제로 죄를 짓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죄 속에 담겨져 있는 달콤한 것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호기심을 유발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맨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경고 하면서 결론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타락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 22:18-19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마귀의 주 특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다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한 것은 인간의 지혜로 인간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하여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모든 성경을 예수그리스도 해석하였습니다.

모든 율법을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몽학선생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 입장에서 해석하도록 미혹하였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들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고 인간들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하라고 미혹하였습니다.

그것도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명제를 깔고서 말이에요.

 

여기에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지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속는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의 설교가 마귀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하던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인들이 신앙이 기복주의로 흐르고 신비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으로 여자를 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뱀이 여자에게 준 정보는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눈이 밝아서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같은 권세인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판단은 창조주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 자체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논할 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의 판단에 따라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게 인간들에게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입니다.

아담도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군소리 없이 받아먹은 것은 아담에게도 선악과는 매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일수가 없듯이 에덴동산에도 선악을 판단하는 권세를 가진 자가 둘이 있을 수 가 없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을 가진 아담은 그대로 에덴동산에 둘 것 같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들의 판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좋은 대로 선악을 판단하는데 인간은 자기들이 좋은 대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인간들을 에덴동산 바깥으로 추방을 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인간을 추방하시면서 천사들로 하여금 생명나무 길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범죄한 자들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까봐서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죽이는 이유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 3:22-24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과는 그 속성이 먹으면 영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나무 길을 지키게 한 것은 죄인이 생명과를 먹게 되면 죄인으로서 영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서 영생을 하면 어찌될까요?

이건 영원한 재앙입니다.

영원한 저주이고 비극이 됩니다.

그래서 죄인의 눈에 생명나무를 가려 버린 것입니다.

 

이를 이렇게 비유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식이 있다고 합시다.

그 자식이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와 같다고 생각해 봅시다.

38년 된 병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밥을 먹은 것에서부터 용변을 보는 것까지 부모가 곁에서 해 주어야만 합니다.

 

38년 된 병자의 병은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치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자식이 죽지도 않고 부모 앞에서 얼쩡거리며 영원토록 산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모는 그 자식을 볼 때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집니다.

 

이런 불치의 병든 몸으로 오래 산다는 것은 결코 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삶에 의미로 둔다면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를 삶에 의미를 둔다면 오히려 일찍 죽는 것이 복이라 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식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으로서 영생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고 천사들로 하여금 생명나무의 길을 밤낮으로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한 것은 죄인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으로 오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죄인의 몸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저주이기 때문에 노아 홍수 이후에는 인간의 수명을 10/1로 줄여 버린 것입니다.

 

홍수전에는 거의 1000년을 살았는데 홍수 후에는 100여년으로 줄여 버린 것입니다.

이건 저주가 아니고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한 배려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고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다시 살려내는 방식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죄와 사망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자들을 죽이고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다시 살려내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를 입게 됩니다.

이를 하늘의 몸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몸에 구속이라고 합니다.

 

두 예수가 있습니다.

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있고,

부활하여서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오신 예수가 있습니다.

육신으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셨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는 새 사람으로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사역을 두 세례로 보여 주었습니다.

두 세례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입니다.

물 세례는 죽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 세례는 선악과를 먹은 죄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두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먼저 옛 언약인 율법으로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어서 죽이고 새 언약인 은혜로 살리는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먼저 보내지 않고 예수를 육신으로 먼저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가 먼저 선악의 사람을 죽이고 난 후에 성령이 오셔서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인을 죽이고 의인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구원의 순서가 옛 사람이 먼저 죽는 것이고,

나중에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죽이는 언약을 먼저 주시고 나중에 살리는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믿음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언약이고 믿음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율법은 행위 언약이고 믿음은 은혜 언약입니다.

 

언약을 이루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예수님을 육체로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하십니다.

이들을 일컬어 하늘로부터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영생하는 자로 새롭게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이를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죽었다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예수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옛 사람이 있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살아난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아담 안에서 난 선악의 사람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생명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 왜 죄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람이 죽는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아니하여서입니다.

아담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명과를 먼저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면 선악과를 먹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영생하는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하는 자는 선악의 법도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사용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생하는 분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정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이는 율법도 살리는 것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율법으로 살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는 바리새인은 죽은 자이고 예수님은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살리는 복음을 가지고도 죽이는 일을 하지만,

산 자이신 예수님은 죽이는 율법으로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으로도 살리는 일을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복음을 가지고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산 자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죽은 자에게서 사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만약에 먼저 생명과를 먹고 산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선악과를 먹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필경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해독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갓 지어진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닙니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생명과를 먹어야 합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예수님처럼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그 다음에 선악과를 먹어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다스림을 받지만,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율법의 다스림으로부터 자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으로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했습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뱀의 지혜는 사람보다 한 수 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뱀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하려고 생명과로부터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작전을 편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여자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뱀의 작전대로 여자는 선악과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따먹고 맙니다.

뱀은 자신의 작전대로 선악과로서 여자의 눈길을 생명과로부터 돌리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여자의 눈길이 선악과를 보는 순간 게임은 이미 끝이 나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로울 만큼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보는 순간 선악과가 주는 마력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죄는 그렇게 인간들에게 침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역사 전반에 걸쳐서 인간들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의로 나타납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선악과 속에 담긴 의는 율법의 의로서 인간들의 의입니다.

율법의 의는 인간들의 마음을 빼앗고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 속에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랑과 인간의 영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 뱀이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율법이라는 인간의 의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을 하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뱀이 선악과로 여자를 미혹하였듯이 거짓 선지자들이 율법의 의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여자처럼 걸려들고 맙니다.

여자들이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을 하듯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각종 행함이라는 인간들의 의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쉽게 인간의 의에 빠져드는 것은 그 속에 자기 가치 챙기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의가 인간의 자존감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광을 주고 인간의 자랑거리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율법 신앙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그 첫째 조건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의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의를 버리라고 할까요?이는 인간의 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롬 3:20-22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남과 차별성을 두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차별성이 곧 자기에게 영광을 안겨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의 차별성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잘 난 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가지고 세리와 창기들과 차별성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와서 그 차별성을 다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영광을 다 뭉개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두었다가는 자신들의 존재감이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는 종들과 인간의 의를 증거하는 종들이 부딪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는 종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는 인간의 행함은 의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의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갈라디안 신앙입니다.

 

갈라디안 신앙은 <예수 믿기 + 율법 지킴 = 온전한 믿음> 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단호하게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바울이 전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믿음의 의에 복음을 훼손하고자 복음에다 율법을 혼합한 이단 사상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는 알미니안 계통의 인본주의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의롭다고 하는 인본주의 성화주의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에다가 인간의 행위를 혼합시키는 이단 사상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있어 왔던 사상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사상과 싸웠습니다.

 

인본주의 알미니안 성화주의는 인간의 의인 선악과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인 생명과를 가리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행위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율법적 신앙을 부각시킴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하는 알미니안 성화주의에 잘 현혹당하는 것은 그 속에 인간의 가치 챙기기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이 있고 자기 긍정이 있고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을 잘 보세요.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행위를 자랑하지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산물을 자신들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는 것을 내어 놓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내어 놓지를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 7: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였다고 자기 업적들을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면서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반드시 해야 하고 얼마든지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한 것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고 있을 때는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에 종속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 인본주의 성화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행위 신앙을 신앙의 본질로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뱀이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예수그리스도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서 무엇을 행할 것인가로 신앙의 명제를 옮겨버립니다.

무엇을 행할 것인가는 옛 언약이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에 고정되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를 붙잡게 됩니다.

율법에 시선이 고정 되면 “무엇을 믿을까” 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신앙의 본질이 믿음에서 행함으로 과녁이 옮겨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사라지고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쪽으로 과녁이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미혹이고 죄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얼마든지 경험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발생된 것을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 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 내가 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충성한 내가 행한 일들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충성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나로 하여금 죄사함을 주지 못합니다.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성도가 행하는 일은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부산물이지 그 자체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행위는 자랑할 것이 못되고 붙잡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죄란? 본질에서 이탈한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무엇을 믿을까의 싸움이지 무엇을 행할까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은 입술로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들은 그럴 듯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믿는 것은 없고 온통 행할 것들만 가득합니다.

 

기도를 들어보면 무엇을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는데 정작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구원 받음에 대한 감사와 찬송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회개한다고 하는 것들을 들어보면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지 “앞으로 주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도리입니다.

지극히 합당한 말입니다.

백프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바로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데 사용하는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 속에는 뱀의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은 합당한 말로 미혹을 하지 불합리한 말로 미혹하지 않습니다.

뱀은 인간들의 이성에 합당한 말로 신앙의 본질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뱀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이라야만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죄의 몸입니다.

죄의 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로마서를 씁니다.

로마서를 쓰면서 자기 실존을 보고서 탄식을 합니다.

그것이 로마서 7장입니다.

 

롬 7:21-25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자기 안에 두 법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법과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악한 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악한 법이 선한 법을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으나 그 원함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보고서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답은 아는데 그 정답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성도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성령께서 답을 알려 주십니다.

8장에서 해답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 대신 그 죄값을 담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값을 예수님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내가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서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의 신앙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인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만 있습니다.

이걸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절대 명제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는 명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서 주 예수를 믿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입었습니다.

성령은 이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뱀은 옛 언약식 신앙으로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은 아닙니다.

정답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뱀은 주 예수를 믿는 것에서 말씀을 지켜야 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버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믿을까 는 사라지고 무엇을 행할까만 남게 됩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인간의 의를 섞는 것입니다.

이를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인본주의 알미니안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주의가 인간들에게 먹히는 것은 그 속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뿌듯함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랑거리가 있고 내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빠져들고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종이냐 그리스도의 종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 있어도 종입니다.

죄의 종이든지 그리스도의 종이든지 둘 중에 속한 종입니다.

죄 아래 있으면 죄의 종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의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신분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주인이 충신이면 종도 충신이고, 주인이 역적이면 종도 역적이 됩니다.

이처럼 종의 신분은 주인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죄가 주인이면 죄의 종으로 살고,

그리스도가 주인이면 의에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주인이면 율법을 지켜야하고,

그리스도가 주인이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죄의 종은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고,

의에 종은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의 종은 자기가 지킨 것으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님께서 지킨 것으로 살아갑니다.

 

죄의 종은 지킴의 끝에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지킴의 끝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고 그리스도의 자랑이 있습니다.

동일한 지킴이라도 그 영광은 다릅니다.

 

뱀은 지킴의 주체를 인간이 행사하여서 인간이 영광을 받으라고 합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뱀의 말이 훨씬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뱀의 미혹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는 선악과와 같습니다.

하지만 붙잡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붙잡으면 죽는 인간의 의가 인간들에게는 너무도 큰 매력적이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면 신자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냐 라고 말을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답은 아닙니다.

 

좋은 것과 정답은 다릅니다.

 

정답은 본질이고,

좋은 것은 비본질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본질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비본질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지만,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새 언약에 속한 것입니다.

구원은 옛 언약으로 주어지지 않고 새 언약으로 주어집니다.

신앙의 정답은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새 언약으로 살아가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 맺어진 언약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탕으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맺었지만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한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속량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알고 예수의 피로 구속이 된 것은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라고 합니다.

 

벧전 1:18-21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하고만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인간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서는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예수그리스도만 의가 됩니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서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것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만 관심을 두시는가요?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만 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신앙에 인간의 것을 섞으라고 미혹합니다.

너도 구원받아서 이젠 의인이 되었잖아!

의인이 되었으면 의인답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라고 미혹합니다.

 

마귀가 제시한 의인다움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다움은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말씀 지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싸움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인간의 의가 섞이지 않도록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끊임없이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에 인간의 것을 섞으라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가리는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귀는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귀는 절대로 도적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귀는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착하게 사는 영혼들을 칭찬하고 권면하며 신앙인의 표본처럼 떠받들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선악의 구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로 바뀌게 됩니다.

율법지킴이라는 행위로 선과 악으로 나누이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 자는 선한 자가 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는 악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상관없이 도적질 안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도적질을 행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가 정한 선악의 구도에 빠지게 되면 자기 행함으로 선과 악을 따지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을 때는 천국인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 때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행함이라는 선악과만 남고, 믿음이라는 생명과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 주간 동안 착하게 산 사람들은 당당하게 교회에 나오게 되지만,

그 반대로 한 주간 동안 나쁜 짓을 한 사람은 교회에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게 됩니다.

이는 선악이라는 법에 매여서 스스로의 양심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평생 선악과 속의 선은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우리가 도적질 안 하는 사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도적질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적질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구원은 도적질 여부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적질 여부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지를 아는 것을 바라십니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서만 구원이 주어지는지를 아는 것을 바라십니다.

예수는 죄인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그 말씀대로 온전하게 살아 갈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들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긍휼을 구하게 합니다.

긍휼의 자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도적질을 하느냐 안 하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화두(話頭)를 던진 것은 여자의 관심사를 선악과에 묶어 두고자 함입니다.

 

뱀은 인간들로 하여금 삶의 주소를 선악과라는 동네에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선악과라는 동네에 주소를 두고 살면 생명과라는 동네는 자연히 발길을 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일평생 선악의 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의 법 아래서 아무리 잘 살아도 거기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으냐 안 살았느냐는 헛 싸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율법을 어기도록 부추기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율법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할 뿐입니다.

율법의 동네에 머무는 한 생명의 동네로는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인들은 선악의 동네에 주소지를 두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마귀가 교인들의 시선을 인간의 가치를 긍정시켜주는 행함이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성화주의 신앙으로 붙들어 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혹당한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는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식의 회개를 하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나는 이런 저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자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인들로 하여금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같이 나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아니하고 한 주간동안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였습니다 라는 것들을 신앙으로 내어놓도록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생명의 능력은 선악의 지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생명은 율법 지킴에서 주어지지 않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능력은 생명과를 먹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주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도적질해도 괜찮단 말인가? 

살인해도 되고, 간음해도 된단 말인가?

이건 하라는 소리인가?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이 싸움이 바로 선악의 법 아래 머물러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명제에 묶어 두고자 합니다.

그럼 신앙이 하라 하지 말라 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눈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신앙의 논점을 흐리게 합니다.

마귀가 이러한 명제로 신자의 삶의 방향성까지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을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을 하였고 예수님은 마귀를 어떻게 대응 하였는지 살펴봅시다.

 

마 4:3-11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접근을 합니다.

이 정도는 죄어야 하나님 아들답지 않느냐 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아들다움을 자기 영광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다움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응수하였습니다.

마귀는 떡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하자,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세상에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영웅호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하나님 아들답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다움이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은 내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싸움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느냐의 싸움입니다.

자기 잘남을 증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것인가?

마귀는 자기를 증명하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라고 합니다.

 

마귀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신앙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말씀을 자기를 증명하는데 끌어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심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엄청난 일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이 주 예수를 믿는 것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죄는 오로지 예수의 피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피 흘리심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피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피입니다.

 

왜 죄사함이 우리 피로는 안 되고 예수님의 피로서만 되는가요?

이는 우리 피는 죄인의 피고 예수님의 피는 의인의 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기 때문에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피로는 죄사함을 얻을 수가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흠 없는 제물로만 주어집니다.

죄 없는 자가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던진 죄사함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께서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에 반하는 죄사함의 방식을 제사합니다.

그것이 죄 지은 자가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 종교에서는 고행으로 죄값을 치루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방 종교는 상선벌악 하는 신앙과 인과응보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종교에서는 복을 받기 위하여 정성을 드리고 벌을 피하기 위하여 육신을 고행케 하는 것을 신앙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간에서는 삼천배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절간 바깥 길에서는 일보삼배 하는 것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모습만 다를 뿐 그대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만 특별 새벽기도이니 철야 기도와 금식이니 충성이니 봉사이니 전도이니 성전건축이니 단기선교니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율법 신앙입니다.

 

율법은 아무리 지켜도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이 악을 이겼느냐 악이 선을 이겼느냐 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를 두시지 않습니다.

그건 여전히 선악과 아래 머무름이며, 그 결과는 필연적인 사망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지 예수 밖에서 성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은 정죄함이 없지만 예수 밖은 무조건 정죄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에게 눈길을 고정시키고 산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지켜야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눈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야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스스로 말씀을 지켜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 하신 것은 성도가 그 말씀을 지켜낼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공연히 죽인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를 보내지 말고 바로 성령을 보내서 말씀을 잘 지키도록 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고 사흘 만에 부활을 시켜서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고 성령을 대신 보내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번거로운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셨을까요?

이는 죄인은 반드시 죄의 삯대로 죽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죄 없는 몸으로 창조를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이 망쳐 놓은 것을 그 아들을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서 새롭게 창조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이 사실들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이런 일들을 하셨다고 알게 해주시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고 아! 그렇구나!

내가 이런 몹쓸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이시고 다시 살려내는 일을 하셨구나! 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지는 성도는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천국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립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이러한 천국의 모습이 나옵니다.

 

계 5장 11-14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성도가 천국에서 하는 일은 어린 양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왜 어린 양을 영원토록 찬송하는가요? 

이는 어린 양이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세상에서는 교회 안에서 맛보기로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성도들을 그 몸의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체는 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몸에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신앙에는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릴 틈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에게만 눈길을 주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 말고 다른데 눈길을 주고 살면 간음한 자로 취급합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마귀는 성도들에게 다가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룩하고 멋진 사람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라는 식으로 자극을 합니다.

그럼 그 안에 법이 작동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아들다움을 보이고자 합니다.

그것이 율법 지킴으로 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를 미혹한 함정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자기 주체 챙기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렇게 살아서야 안 되지! 라고 분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을 것은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 것들만 남게 됩니다.

 

마귀는 이런 자들에게 박수를 치면서 너 참으로 대단하다고 부추깁니다.

사람들 앞에 거룩한 사람이라고 영광을 받게 합니다.

사람들의 영광은 마약과 같아서 점점 더 깊은 자기 영광 챙기기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마약에 빠져서 사람에 영광을 구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새끼라는 말을 듣고 지옥으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을 율법 신앙을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할까요?이는 마귀가 인간의 가치를 챙기는 신앙으로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하였듯이 교회 안에 거짓 종들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종말의 교회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뱀들이 우굴 거리고 있습니다.

거짓 종들이 뱀 사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는 인본주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하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할 구주이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선생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본받고 배워야 할 선생인가요?

믿어야 할 그리스도인가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본 받아야 할 선생이냐?

믿어야 하는 그리스도이냐?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정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가 정답입니다.

예수만 본질이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가 비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오직 예수만 보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