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강해

23강. 선악과가 몰고 온 다른 눈 (창 3:1-8)

정낙원 2019. 1. 29. 20:51

23강. 선악과가 몰고 온 다른 눈 (창 3:1-8)

 

창 3:1-8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옛 말에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눈이 귀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보배라고 합니다.

 

성경은 눈을 몸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마 6: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합니다.

온 몸이 밝다는 것은 옳은 삶을 산다는 것이고,

온 몸이 어둡다는 것은 틀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옳은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틀린 삶은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천국에 소망으로 살아가게 되고,

눈이 어두운 사람은 땅 강아지처럼 흙만 파 먹고 살다가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눈에 의하여 결정이 됩니다.

결국 옳은 길을 가느냐 그른 길을 가느냐는 어떤 눈을 가졌느냐로 판가름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밝히 보는 눈을 가진 것은 큰 축복인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소경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가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우린 모두가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태어나서 사니까 사는가 보다 라고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것을 몰라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고 불편하지도 않았고 전혀 문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짐승처럼 먹고 배부르면 그것이 행복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내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니까 인생의 좌표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뜨고 나니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이고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생보다 내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모두가 눈을 뜨고 난 후에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인생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야~ 인생 막살아서 될 일이 아니구나,

이 세상의 인생은 전반전에 불과한 것이구나,

죽음 이후의 후반전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후반전 인생은 이 땅에서 결정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짐승처럼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이 떠지고 나니까

내가 돌아갈 고향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 고향을 알고 나니까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내 고향 내 부모가 계신 그곳을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전 3: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능에 이끌려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늘나라 고향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곳이 내 집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살아갈 집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이 세상의 삶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니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알고 나니까 세상에 대한 미련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창세전 언약 안에서는 이미 완료된 자들로 있습니다.

성도는 창세전에서 이 세상이 나왔고 이 세상에서 창세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선제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전체 그림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5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이 때는 예레미야가 한참 자란 인생의 꿈이 부푼 청년의 때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찾아 오셔서 하는 말씀이 내가 너를 복중이 짓기 전에 이미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미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건 인간들의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있음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태어난 날부터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어나기 전 존재케 한 근원으로부터 말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워진 것입니다.

만물은 창세전 언약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안에서는 만물이 선제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가 되어서 세상 속에서 존재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창세전에 이미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창세전에 열방의 선지지로 세웠다고 합니다.

너는 그 계획에 따라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 된 때가 되어서 내가 이렇게 너를 찾아와서 열방의 선지자 역할을 하도록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네 입에 넣어준 말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다가 비록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는 창세전 언약 속에 구원을 받은 자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는 이미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레미야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2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더러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이름은 야곱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구속을 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지명하여 부르시고는 조성하여 가십니다.

이는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만들어 가는데 물 속에도 들어가고 불속에도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는 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복된 자리로 인도 할 것이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에서 구속을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일을 하도록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미리 정하심은 창세전이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은 이 세상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이 세상이 끝난 후입니다.

 

창세전에 정하시고,

역사 속에서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하게 살게 하십니다.

 

이게 성도의 구원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이게 믿어져야 합니다.

 

이게 믿어지는 자는 미래의 천국을 현재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중에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고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영원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이미 나의 완성된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을 봅시다.

 

요일 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이 천국을 소망하게 합니다.

천국이 소망으로 다가오니까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귀소본능이 강하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이 두고 온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면서 망향의 한을 달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만이 가지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영원을 사모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영원에서 나온 사람들은 영원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꺼꾸러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이 영원에서 나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역설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출향케 하시고 에덴동산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에게 너희를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올 메시야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떠나온 아담은 그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아담은 우리의 표상입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여도 죽은 자와는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식일지라도 죽은 자와는 함께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아담을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으로 내 보내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나온 아담은 실향민이 되었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죽은 자의 몸으로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은 산 자만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죽음을 안고 있는 선악의 몸을 죽이고 죽음과 상관없는 생명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 일은 아담이 독자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선악과를 담고 있는 아담을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 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아나기 위해서 먼저 죽음에 동참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선악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생명의 사람으로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이건 마치 뉴 타운을 건설하기 위하여 낡은 건물들을 다 허물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낡은 건물을 허무는 것은 새 건물을 짓고자 함입니다.

이와 같이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새 사람으로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것은 구원의 수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죄 아래 있던 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들을 양자(養子)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에 양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자란? 어떤 원인에 의하여 아들이 된 자들을 말합니다.

양자는 양자가 된 그 원인을 걷어 내면 안 됩니다.

양자가 되게 한 그 원인 안에 거할 때만이 양자로서의 자격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하나님의 아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보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게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은 내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자기 의로 살아가는 자들과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의로 살아가고,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갑니다.

자기 의로 살면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면 영생을 얻습니다.

 

두 의를 에덴동산의 두 과실로 이해해 보세요.

 

죽이는 과실은 무엇이고,

살리는 과실을 무엇인가요?

죽이는 과실은 선악과이고 살리는 과실은 생명과입니다.

 

여러분이 마귀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어떻게 미혹을 하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 의로 살지 않고 자기 의로 살도록 하겠지요.

 

뱀이 무엇으로 여자를 미혹하였나요?

죽이는 과실인 선악과입니다.

여자의 눈이 비친 선악과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는 죽음에 속한 것은 화려하고 생명에 속한 것은 볼품이 없고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고, 반대로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서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많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적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적고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많다는 뜻입니다.

참 종들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적고 거짓 종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많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는 자들은 적고 멸망 받는 자들은 많다는 뜻입니다.

 

죄는 항상 인간들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다가옵니다.

 

하와의 눈에 비친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습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와의 눈에 비쳐진 것입니다.

 

눈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동일한 것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사람에 따라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하와의 눈에 비치 선악과는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본인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면 그걸 취하여야 행복해집니다.

 

사람은 만족해야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이 좋아야 행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어야지만 만족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따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와가 자기만족을 위하여 선악과를 먹었는데 죽음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기만족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는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죄는 누가 지으라고 해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짓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은 죄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뱀은 선악과에 대한 정보만 알려주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와의 눈에 선악과가 너무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하와의 눈에 선악과가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면 따 먹으라고 권유해도 안 먹었을 것입니다.

 

옛 말에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여도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다 자기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인간은 언제 기분이 좋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집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에 들 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했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입어도 내 마음에 들어야 하고,

음식을 먹어도 내 마음에 들어야 하고,

일을 해도 내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이게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죄의 속성입니다.

 

이런 죄의 속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유지되고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좋은 대로 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진 죄인들을 에덴동산에 두면 자기 좋은 대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세상을 자기 왕국으로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왕이 되어서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게 가정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편은 가정에서 왕으로 살아갑니다.

아내는 가정을 자기 마음에 들도록 가꾸어 갑니다.

부모는 자식도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좋은 예화라 생각이 들어서 소개를 합니다.

 

어제 저녁 KBS2TV 안녕하세요 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주 이기적인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20세 된 딸이 고민을 상담하였는데 어머니가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술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고, 밤 길은 다녀서는 안 되고, 정한 시간에 집에 들어 와야 하고, 친구는 누굴 만나야 하고,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안 되고,,, 하나에서 열까지 다 엄마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자기 손 안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엄마 자신은 매일 술을 먹고 새벽 2-3시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자기는 어른이기 때문에 밤길을 다녀도 괜찮고 술을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어른이기 때문에 다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혀를 차면서 분개를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딸과 남편을 감시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인생도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남편이나 딸도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역시도 우리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 모두 내 뜻대로 움직여 줄 때 행복하다고 느끼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실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 인간들이 이렇게 되었는가요?

 

이는 모두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자기들의 눈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선악 체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발가벗음이 부끄럽다고 여기게 되었고 그 부끄러움을 자기 방식으로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기 시작하자 자신의 생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만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또한 만물의 처한 모습조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셋팅이 되어 있습니다.

만물 속에는 생명과도 있고 선악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선악과도 아름답고 생명과도 아름답습니다.

만물의 셋팅 속에는 아담의 발가벗음도 있습니다.

아담의 발가벗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일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발가벗음이 수치로 여겨진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가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선악과가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몰고 왔고,

선악과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 인간의 눈에는 악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눈을 갖게 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뜯어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발가벗은 몸에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보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자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타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다름으로 보인 것입니다.

너와 내가 다름으로 보이니까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사람 일 때는 발가벗음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각자의 눈을 갖게 되니까 남자와 여자로 보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보이자 각자 다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사람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게 결혼입니다.

결혼하여서 한 몸이 되면 발가벗음을 부끄러움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구원론 적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로 있으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부끄러움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음을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것은 하나님과 한 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발가벗음을 부끄러움으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발가벗은 그대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선악과를 먹기 전에 발가벗음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본인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 본인의 방식으로 부끄러움을 가려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은 그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으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은 아담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벗겨버리십니다.

그것으로는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부끄러움은 너희들 방식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가려지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흠 없는 짐승이 죽어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부끄러움을 가리움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가리움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면 발가벗음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눈을 가지면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입니다.

 

자기 생각에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려야 합니다.

수치를 가리지 않으면 본인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불편함을 자기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방법을 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를 가리는 행위는 곧 인간들의 신앙생활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율법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행위로 의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고는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은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율법신앙을 예표하는 있는 그림입니다.

 

아담이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긴 것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그럼 아담의 수치는 아담이 가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가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해 주어야지 괜찮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가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마음으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진다고 믿은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으면 가죽 옷으로 치마를 해 입었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을 보고 왜 이런 것을 해 입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발가벗음이 수치스러워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누가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하더냐 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동안 발가벗고 다니면서 한 번도 그것을 수치라 여기기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발가벗음이 수치로 여겨진 것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실토를 합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발가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선악과가 아담에게 다른 눈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보았습니다.

 

만약에 아담의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졌으면 하나님이 옷을 해 입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이 발가벗는 그 모습 그대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아담의 발가벗음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옷을 해 입히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인간들의 생각을 가미시켜서 변질을 시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인간들 생각을 섞어서 훼손을 가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만든 화단에 심긴 꽃들을 뽑아내고 인간들이 자기들이 좋아 하는 꽃들을 심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만든 곳을 인간들이 좋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선악과가 아담에게 다른 생각을 심어 준 것입니다.

다른 생각이 심겨지자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보자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자신들 눈에는 보기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자기들에게는 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방식으로 자기들이 좋도록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인본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이란? 인간들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걸 불의라고 합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럼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일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일은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종말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심판 날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각자가 한 일들을 내어 놓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각양의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모른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일평생 한 일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온 종일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온 것을 하나님이 확 찢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열심과 충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뜻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뜻대로 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정성껏 하면 하나님도 그 정성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들 뜻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뜻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 신앙이 에덴동산 바깥에서는 가인의 제사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자기 딴에는 지극정성으로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외면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인지 아닌 지에는 상관치 않고 자신의 제사가 거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자기가 뭔데!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 라고 적개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과도 같습니다.

가인의 자기 생각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 생각과 다르면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의가 부정당하면 하나님까지 죽이는 자들입니다.

 

제사의 옳고 그름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보다 제사를 받는 분에 의하여 결정이 됩니다.

가인은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의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사를 드린 자기 가치를 더 중요시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처사에 반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선악과가 몰고 온 죄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가인은 선악의 법아래서 난 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가인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게 이방 종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방 종교는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상입니다.

인간들이 지극정성으로 빌면 하나님도 감복하여서 받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에서는 인간의 정성을 제사의 근본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도 정성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돈을 더 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복채를 더 많이 내어서 신을 달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가인식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정성이 부족해서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속에 인간들의 정성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를 드리면 인간의 정성과 상관없이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장을 봅시다.

 

창 4:3-5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 아이들이 커서 이들은 각자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어린 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나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고 아벨의 제사를 받았는지에 대하여서는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서 성령으로 오신 후에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 11: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은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더 나은 제사란? 올바른 제사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예물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셨다고 합니다.

 

아벨은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양을 받으신 것입니다.

아벨은 어떻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물이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아벨에게 하나님은 양을 받으신다고 알려 준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이 알려준 대로 어린 양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벨이 드린 그 제물을 보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보니까 아벨이 드린 양이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벨은 예수그리스도를 제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것만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제사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드려질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이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제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나아오는 자들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썩을 양식이 있고 영생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제사는 썩은 양식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생하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영생하는 양식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일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제사는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흡족하여야 합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제사를 지내기 전에 하나님이 무얼 받으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형식이고 긍휼은 내용입니다.

긍휼이 빠진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제사입니다.

성도의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삶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삶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가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사는 껍데기입니다.

긍휼이 알맹이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때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이 담긴 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제사 속에는 긍휼이 없었습니다.

제사라는 행위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긍휼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너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가인처럼 얼굴색이 변하면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앙이 틀렸음이 고발을 당하자 적개심이 일어나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행하여 독사의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바로 뱀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율법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의로 여겼습니다.

그 의로 사람들을 판단하였습니다.

그 의로 하나님에게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서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저 세리와 창기들은 맨날 죄 짓고 살지만 자신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았다고 합니다.

나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 세리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신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만이 자신이 살 수가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절하였고 세리의 기도만 받으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가인의 제사였고, 세리의 기도는 아벨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제사에는 긍휼이 빠졌고, 세리의 제사에는 긍휼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사에는 어린 양의 피가 없었고, 세리의 제사에는 어린 양의 피가 있었습니다.

 

일보다 앎이 먼저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난다고 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를 소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

하나님의 눈으로 보느냐?

인간들의 눈으로 보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럼 아담처럼 자기 방식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를 죄라고 합니다.

 

지금도 너희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의 물음을 계속됩니다.

아담처럼 내가 수치를 가려야 한다고 보여지면 일평생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겨지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겨지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신앙으로 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내 행위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행위입니다.

결국 인간의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입니다.

 

인간의 의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옷입니다.

 

내가 치마를 만들어 있을 것이냐?

하나님이 만들어준 치마를 입을 것이냐? 의 싸움입니다.

 

내가 만든 치마에는 내 영광이 담겨져 있고 내 자랑이 담겨져 있고,

하나님이 만들어준 치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담겨져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집니다.

 

선악의 눈으로 보느냐?

생명의 눈으로 보느냐?

 

선악의 눈은 율법의 눈이고,

생명의 눈은 예수그리스도의 눈입니다.

 

율법의 눈으로 보면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은혜의 눈으로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구원은 새로운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눈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원을 받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눈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의 눈으로 보니까 예수 믿는 자들이 이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다메섹으로 사울이라는 바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합니다.

사울은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울의 눈을 뜨게 합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즉시로 일어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율법지킴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눈이 예수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떠지고 나니까 모든 성경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이 예수그리스도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셨다고 알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증거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눈이 떠지고 나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바울은 자기 동족들에게 애타는 마음으로 외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율법지킴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핍박이고 욕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입니다.

 

모두가 소경으로 살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사는 곳에서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아픔입니다.

달리 아픔이 아니고 외톨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픔인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존재입니다.

소경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같이 소경이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하고 다름을 거북해 합니다.

배척하고 멀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할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결코 기뿐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소경들이 사는 곳에서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고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소경의 세계에서 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던 곳에서 쫓겨남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로 기쁜 일이 아니고 아픈 일인 것입니다.

 

구원은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떠나옴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옴은 고난의 길에 들어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율법입니다.

 

율법의 동네는 자기 의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인간의 자랑거리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계 3:17-18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교회사적으로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교회를 말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긍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로 자긍하고, 자만하고, 자족하고, 자고하고, 자위하면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예수를 문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문 밖으로 쫓아냈다는 것은 교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지 않고 인간의 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의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합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간들의 의가 자랑거리가 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의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곤고한 것이고 가련한 것이고 가난한 것이고 눈먼 것이고 벌거벗은 것임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의 의에 취하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는 주의 이름으로 이것 저것을 했다고 자랑을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내침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는 것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소경입니다.

스스로의 의에 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잘못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가 하면 눈이 실족케 하면 차라리 빼 버리라고 합니다.

눈이 실족케 한다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6: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 5:29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마 18:9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오디게아 교회가 눈이 나쁜 것입니다.

눈이 나쁘니까 그릇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 치마를 해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 치마를 해 입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발가벗음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수치를 가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수치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럼 발가벗은 수치를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가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사회 현상론적으로 보면 벗는 문화가 온 세상을 뒤 덮고 있습니다.

지금은 노출의 시대입니다.

여자들이 서로 서로 옷 벗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누가 누가 옷을 더 벗느냐 경쟁하고 있습니다.

수치를 수치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치는커녕 옷 벗음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그 시대의 교회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자는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의로 치장한 것을 발가벗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인간의 의를 쫓아가고 있을까요?

이는 인간의 의를 주장해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왜 인간의 의를 강조 합니까?

그래야 교인들이 충성을 하고 헌금을 하기 때문입니다.

잘난 자들을 칭찬해 주어야 교인들 간에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마약과 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칭찬은 교인들로 하여금 충성 경쟁을 일으킵니다.

 

종교꾼들에게는 이처럼 좋은 미끼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인간의 열심과 충성이라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으라고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누구 옷이 더 예쁜가 콘테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가 이러한 일을 했다고 광고를 해 댑니다.

그럼 교인들은 그 광고 속에 자기 이름이 불려지게 하려고 충성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자기를 믿습니다.

자기의 열심에 따라서 천국에 가기도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열심히 특심하면 안심이 되고 열심히 떨어지면 낙심을 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었음에도 하나님이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자기 의로 치장을 한다고 하여도 자기 안에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지고 두려움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수치는 그대로 있고 두려움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결국 헛일을 한 셈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것은 헛일입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로 하여금 선악과 아래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처음부터 속이는 자입니다.

마귀는 선악과로 인간들을 속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가 너무도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된다고 가르치는 인본주의 성화주의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화가 있다고 하였을까요?

사람의 칭찬이 바로 선악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칭찬을 들으면 화가 있다고 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자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사람에게 칭찬 듣고자 하는 자는 화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도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그 감격이 나로 하여금 충성케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행하는 것이지 가지 열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나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은 성경 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은 사람들은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9-10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타인들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어야지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눈을 뜨게 해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뜬 성도는 옷은 우리가 해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혀 준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라는 가죽 옷을 입혀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정답입니다.

 

이를 아는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가죽 옷을 벗지 않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13:16절.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나는 지금 어떤 눈으로 살고 있나요?

 

오직 예수만 보이는 눈이시길 소망해 봅니다.

 

막 10:46-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소경 거지 바디매오처럼 외치시길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여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간절함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주님이 지금 오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에 하늘에 열린 문이 보여지고 우리를 데리러 지금 오고 계시는 그 주님이 보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