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가라지를 뽑지 말라

정낙원 2009. 1. 28. 23:40

가라지를 뽑지 말라 (마 13:23-30)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사람의 본능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능은 철저하게 자기 몸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은 잘되길 바라고, 못 대해 주는 사람은 망하길 바랍니다.

 

이처럼 본능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유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알아주고 교회를 좋아하고, 자기에게 복을 주는 신을 믿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연적으로 사람을 만나도 자기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고, 교회를 다녀도 자기 유익이 되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어도 자기 유익이 되는 예수를 믿고자 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분명히 비 복음적인 교회임에도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자기 교회가 그렇게 좋고 자기 교회 목사님 말씀이 그렇게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은혜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해 주면 설교가 좋다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기분 나쁘게 하면 무슨 설교가 저러냐면서 화를 냅니다.

 

이처럼 자연히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사람도 있고, 영에 속한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사람마다 은혜관이 다르고 예수가 다릅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가 만들어 낸 예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지붕엔 십자가를 세워 놓았는데 들어가 보면 십자가가 다 다릅니다.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서도 수많은 해석들을 쏟아 냅니다.

목사마다 다르고 교단마다 다릅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를 통하여서 계시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계시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이 되어진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일하신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고 먼저 나는 이렇게 일을 한다고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대로 일을 하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어떻게 세상 역사 속에서 구체화 되고 실현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는 것이지,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반칙이고 죄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설치된 연극무대와 같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펼쳐 보이기 위하여 잠시 사용하는 무대입니다.

연극이 끝나면 무대가 철거 되듯이 이 세상도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어지면 철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엔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만물의 주(主)” 가 되는 것이 언약의 핵심 내용입니다.

주란? 주인이고 중심이란 말입니다.

 

세상은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인간 중심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 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물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수님께서 주가 되기 위하여서 발생된 사건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서 만물의 주가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만물의 주가 되는 일을 십자가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명실상부하게 만물의 주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만물의 주에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발생시킨 사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 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아버지가 영광 받으시는 일이 예수님에게로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기뻐하십니다.

 

만물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천국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바로 어린양에게 영광 돌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계 5:11-14=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계 4:9-11=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천국이 어떤 곳이냐? 바로 예수님이 주(主)가 되셔서 영광 받는 곳입니다.

이 세상이든지 저 세상이든지 예수님이 찬양되어지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양이 되어지면 천국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만물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간 24장로들이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고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안 사도바울도 만물의 창조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을 예수님 앞에 무릎 꿇리려고 창조를 하였다고 합니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만물은 그 안에서 함께 섰다고 합니다.

섰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한다면 만물은 예수님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세상은 존재에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계는 곧 불태워질 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왔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기 위하여 세상의 역사가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이 만물의 주가 되는 것인데, 그 만물의 주가 되는 일에 십자가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 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러므로” 말입니다.

“이러므로” 란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일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므로” 란 말은 “십자가로” 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라는 말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근거해서”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주(主)가 되는데 십자가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세상 역사는 블랙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역사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언약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도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언약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님이 죽고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를 알아야겠지요.

예수님은 늙고 병들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타살 당하셨습니다.

누군가에 의하여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놈이 예수가 미워서 죽인 겁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죽인 그 어떤 놈을 밝혀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걸 전쟁이라는 구도로 밝혀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주(主)가 되게 하는 그 전쟁 속으로 발을 내 디뎌 보십시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여자의 후손” 과, “뱀의 후손” 간에 벌어지는 전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라는 말이 됩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인류역사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전쟁으로 점철 되어 왔습니다.

이 전쟁은 최초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인과 아벨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의도한 전쟁에 개입이 된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벌린 전쟁 속으로 휘말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앉히시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시려고 인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쪽에 속한 사람과, 뱀의 후손 속에 속한 사람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세상이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서로 성질이 다른 두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天地)를 창조했습니다.

 

하늘(天, 천국)과, 땅(地, 지옥)은 성질이 다른 두 세계입니다.

빛(光)과, 어둠(黑)은 성질이 다른 두 세계입니다.

생명(生命)과, 죽음(死亡)은 성질이 다른 두 세계입니다.

 

이 둘은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하나를 필연적으로 잠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영적 구조가 육신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다투어야 하는 전쟁의 구조가 이스라엘 속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짜 놓았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언약으로 난 자와, 언약으로 나지 않은 자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공존케 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아벨과 가인이 그러하였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러하였고, 야곱과 에서가 그러하였습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분명히 혈통적으로는 한 형제임에도 두 계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을 입지 못한 계열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편이 갈라진 것입니다.

결국 한 아비 아래 두 형제가 있는 셈입니다.

국가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속에 또 다른 이스라엘이 있는 셈입니다.

전혀 다른 성질의 두 개의 나라인 것입니다.

종자가 다른 국가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곡식과 가라지입니다.

 

둘 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은혜를 입지 못한 다른 하나는 자연 그대로 아담의 후손이므로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이 둘 사이엔 항상 긴장 관계가 흘렀고 하나님께 선택 당한 자가, 선택 당하지 않은 자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도록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녀에게 핍박을 당하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두 종자를 심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렘 31:27-2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한 집안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뿌린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두 종자를 뿌려 놓겠습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사람의 씨란? 여자의 후손인 천국 백성이고, 짐승의 씨란? 뱀의 후손인 지옥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둘을 가지고 뽑았다 세웠다 하시겠다고 합니다.

싸우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싸움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싸우라고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 간에 싸우라고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혀주고 다른 놈들에겐 개털을 입혀 준 것입니다.

질투심을 유발시켜서 쌈박질하라고 말입니다.

 

무슨 부모가 그렇습니까?

예뻐하려면 둘 다 예뻐해야지 한 놈은 예뻐하고 한 놈은 미워하면 싸움이 안나고 배깁니까?

부모가 형제끼리 싸움을 붙인 것입니다.

왜?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한 가정사에서부터 일어납니까?

모두가 하나님이 벌려놓은 주의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싸움은 곧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즉 예수님과 마귀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합니다.

 

마 10:34-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검을 준다는 것은 전쟁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집안에 원수가 생긴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없을 땐 모두가 한 통속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시니 야곱과 에서처럼 사랑 받은 자와 사랑받지 못한 자로 갈라지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와 자식이 싸우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어미와 딸이 싸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혈통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한 가정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을 수가 있고, 아니면 한 가정 속에 자식은 선택을 입고 아비는 선택을 입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어떤 가정은 몽땅 선택을 입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좌우지간 인간 쪽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을 두 민족으로 갈라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이심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어질 때부터 이미 이 세상엔 자기 백성과, 자기백성 아닌 자로 구분이 되어져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평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육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은 평화를 좋아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철저하리만치 니편과 내편으로 나누이시는 분리주의자이십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너희와 저희를 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닮아서 싸움을 붙이는 전문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분쟁이 생기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복음이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로 두 종류로 분리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싸우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삭의 가정에 야곱과 에서가 싸우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야곱의 가정에 요셉과 그 형제들이 싸우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싸우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바울과 유대인들이 싸우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교회도 예수님이 개입하면 영과 육으로 갈라집니다.

지금 우리가 비언약적 교회와 싸우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싸가 다른 두 백성이 있습니다.

싸워야 할 운명을 가지고 한 집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하면서 천국 속에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곡식은 여자의 후손을 말하고 가라지는 뱀의 후손을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의 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천국이라고 하면 성도들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예수님만 믿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악은 천국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천국 속에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 속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은 모순적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악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우리가 “하늘나라” 라고 하는 천국엔 악의 무리가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거기는 오직 거룩함을 입은 성도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하늘나라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교회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천국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이란? 장소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모임입니다.

이름하여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 속에 다른 무리를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서로 함께 동거 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무리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민족이 한 지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민족이 한 지붕아래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쟁은 일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 안에 두 민족을 심어 놓았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곳이라고 합니다.

피 값으로 샀다는 것은 곧 죽임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죽임 당하였다는 말은 타살을 말합니다.

즉 누구로부터 죽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죽이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으니까, 뱀의 후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뱀의 후손이 예수님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선 가룟유다가 뱀의 후손임을 알고 선택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에 뱀의 후손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지옥에 갈 놈이면서도 잠시 천국의 무리들 속에 섞어 놓았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곡식이 있는 밭에 가라지를 덧 뿌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앞서 곡식은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고, 가라지는 뱀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가라지는 가룟유다처럼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피 흘리게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장선상에 있는 곳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피 값으로 산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의미는 예수님의 피에 잇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증거는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증거 되어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이 놀이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늘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 민족을 두신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하셨듯이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비 언약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녀들에게 죽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악에 수중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고발해 주어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셨듯이 영이 육에게 공격당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이미 구약 시대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갈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으로 난 이스마엘이 약속으로 난 이삭을 핍박했습니다.

신약교회도 구약 이스라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이제도 육체로 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육에 속한 자들이 성령에 속한 자들을 핍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꿈을 가진 요셉이 꿈이 없는 형제들로부터 죽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의 꿈이란? 신약에서는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육으로부터 죽임 당함으로서 완성이 되어집니다.

 

그래야 세상은 하나님을 죽인 가해자가 되고 하나님은 피해자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피해자가 됨으로서 이 세상은 악에 속하였다는 것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세상 속에 있으므로 악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합니다.

악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희생을 남겨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율법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형제들처럼 형제 싸움으로 귀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 속한 자와 옛 언약에 속한 자간의 싸움입니다.

믿음에 속한 자와, 행함에 속한 자간의 싸움입니다.

신앙고백이 동일한 자들과, 다른 자들 간에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가룟유다와 같은 자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누가 뱀의 후손인지 드러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은 육으로 드러나게 해 주고, 영은 영으로 드러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들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이 진짜를 밀어내고 핍박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비 복음에게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 피 흘림(핍박당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다가 핍박을 받음으로서 예수님과 한 통속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교회들마다 문제투성이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곳을 보세요.

얼마나 시끄럽게 싸웁니까?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사단의 일꾼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교회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남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 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악에게 살해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엔 예수님이 악에게 살해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세상 속에 남기기 위해서 재현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다가 죽임 당한 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단이 뿌려 놓은 가라지 신자들은 교회 안에 예수님의 피를 가리고 인간의 의를 심고자 합니다.

 

사단은 가라지를 통하여서 보이는 교회를 세상에 남기고자 합니다.

인간의 의로 예수님의 의를 가리고자 합니다.

교회를 고정화 시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교회 안에다 묶어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가 고정화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의 피를 남기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남기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피만 남기고자 하는 사람과 보이는 교회를 붙잡고자 하는 사람 간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집니다.

약속으로 난 자가 육체로 난 자들에게 핍박을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고정화되는 일을 막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교회를 고정화 시키고자 하는 뱀의 후손들과 예수님의 피를 남기고자 하는 여자의 후손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들은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몸소 재현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교회는 항상 거짓 교회에게 핍박당하는 가운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교회는 보이는 교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셈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뱀의 후손들이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가라지들이 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요.

 

이렇게 되면 가라지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곡식이 곡식으로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악당이 있어야 선한 사람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드러내기 위해서 뱀의 후손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이 싫다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거기서 맞아 죽어야 합니다.

욕하면 욕먹고 미워하면 미움 받아야 합니다.

때리면 맞고, 꺼꾸러뜨리면 꺼꾸러져야 합니다.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그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진 자로 남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자고 하니 주인이 가만 두라고 하는 겁니다.

가라지가 없으면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 않아요.

그래서 절대로 뽑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가라지가 곡식들을 두들겨 패야 피가 터집니다.

 

요셉의 예로 든다면 요셉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터져 나오려면 요셉을 미워하는 형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버림당하고 미움당하지 않았으면 요셉 속엔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없어요.

형제들이 뱀의 후손에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기 때문에 요셉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그토록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모두가 다윗은 여자의 후손 노선에 있었고 사울은 뱀의 후손 노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던 것은 사울을 통하여서 메시야의 고난을 보여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교회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심어 놓은 것입니다.

뱀의 후손들과의 싸움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하시려고 심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곡식들을 가라지들로부터 얻어터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셨다는 것을 알리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항상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 마귀에게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미 천국에 들어간 믿음에 선배들이 하나님에게 자기들의 원수를 하루 빨리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장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여야 할 성도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라지들에게 곡식이 얻어 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라지들이 곡식을 죽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악한 자들을 쫓아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쫓아내지 말고 다름으로 있어야 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서 다름으로 있어야 합니다.

다름을 드러내고자 두셨는데 쫓아내면 안 돼지요.

곡식과 가라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발자로 있는 겁니다.

 

교회 안에 새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름으로서 고발해 주어야 합니다.

단 하나 새 언약 안에 있다는 이유로, 옛 언약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또 다른 교회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교회란? 예수님처럼 피 흘림으로서 생겨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가 유대인이라는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가능성 아래 있는 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를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감사치 못하고, 예수님 십자가를 이용해서 뭔가를 남기려고 해요.

육에 특징은 교회 속에 자기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는 겁니다.

육은 자기영역을 보존코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교회를 남기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들 힘으로 좋은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은혜롭고 아름답고 싸움이 없는 교회를 만들자고 해요.

천사들만 모여서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라는 교회를 만들자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악당들을 가라! 천사들만 남아라! 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마음이 얼마나 가상합니까?

아니 아름답고 좋은 천사들만 있는 교회를 만들어서 세상에 자랑하겠다는데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말이죠.

천사들만 모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요.

천사들에겐 예수님 피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피는 죄인에게만 필요합니다.

죄인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피가 복음이 안 돼요.

 

천사들만 모이면 교회는 아름다워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예수님이 피가 복음이 되는게 사라져요.

예수님의 피는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아! 내가 이런 죄인이구나! 를 알 때 복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교회를 원하지 않고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교회를 원해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원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교회 안에 곡식과 가라지를 섞어 놓아서 예수님의 흔적들을 재현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의 교회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세워진 곳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천사들이 있는 곳에서 터져 나오지 않아요.

마귀새끼들이 있어야 터져 나와요.

 

이렇게 되면 천사들만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피가 터져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가짜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좋은 교회 만들자고 하는 자들은 가짜 교회로 드러나고, 왜? 예수 믿으면 좋은 교회인데 굳이 또 좋은 교회 만들려고 하느냐 라고 하다가 얻어터진 자들은 진짜 교회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지요.

 

진짜 교회는 천사만 있으면 안 되고 마귀가 있어야 해요.

마귀가 천사를 괴롭혀서 피가 터지게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은 마귀에게 얻어 터져서 피 흘린 자들이 주워 다가 진짜 교회를 만들어요.

 

이걸 베드로 사도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 신령한 집을 짓는다고 했어요.

 

벧전 2:3-8=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잘 보세요.

사람에게 버린바 된 자들을 신령한 집으로 세운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일번 타자로 버림당하였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성전에 모퉁잇돌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처럼 버려진 자들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란? 하나님께 사랑 받는 것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우리 생각엔 하나님께 사랑 받으면 버려지지 않고 도리어 남아 있어야지요.

이 땅에서 성공한 자로 남아서 봐라! 난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받았다! 라고 자랑해야 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고 반대로 버림당하게 하십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을 후패함으로 자라갑니다.

이는 모두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성도는 단독자로 세상에 있지 않고 예수님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하나님께선 성도가 매 맞는 것을 예수님이 매 맞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를 핍박하는 놈들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인 유대인에게 죽임 당하였듯이 성도가 교회 안에 비 언약 교인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가짜 교회가 진짜 교회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가라지가 곡식을 핍박해야 피가 튕겨 나올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가라지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주어야 스데반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자기를 돌로 쳐 죽여주는 자들에게 고마워했어요.

너희들 때문에 내가 예수님 품으로 간다고 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한 겁니다.

 

가라지들이 얼마나 착한 일을 해 줍니까?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믿음에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이 되고 아픈 겁니다.

모두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가라지를 곁에 두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훈련 파트너로 두셨다고 생각하세요.

아주 강한 놈으로 두셨다는 것은 나도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면 안 돼요.

가만히 두세요.

가라지가 곡식들을 열심히 핍박을 해야 곡식들이 보이는 교회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곡식들을 가라지에게 핍박 받게 함으로서 보이는 교회에 의미를 두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할 때는 아픕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 하는 아픔입니다.

그러니 영광의 상처가 되는 겁니다.

이런 상처는 많아야 해요.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자랑했어요.

하나님은 착실하게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아로새기는 작업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장차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는 신랑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세우시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고난 없는 것은 수치스러운 겁니다.

핍박도 많이 당해보면 그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물론 당할 땐 아프지만 지나고 나면 감사가 나와요.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심을 깨닫고 감사케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가 하신 말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꼭 사랑하는 자들아! 그러면서 고생 좀 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불 시험이라는 택배 속에 담아서 보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택배를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그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니 즐거워 할 일이라고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불 시험 속에 담긴 사랑을 보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택배를 받습니다.

 

불 시험은 교회 밖에서 당할 일이 없어요.

교회 안에서 당해요.

그래서 성경은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

성도는 가시밭에 백합화입니다.

바람이 불때마다 가시가 몸을 찔러 댈 때 백합화는 십자가라는 향기를 토해냅니다.

백합화 향기는 가시를 통하여서 토해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 때문에 당하는 아픔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흔적임을 알게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셨으니 시험 당할 때 그 시험을 이기는 능력도 함께 주시옵소서. 어떤 고난이라도 당할 때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이라 깨달아지게 하셔서 감사함으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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