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정낙원 2009. 5. 27. 16:5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창 12:1-5)

 

창 12: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자 죄인과의 단절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좇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들 앞에서 숨어 버리신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은 숨어 계신다는 것을 보았어요.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숨어 계신 하나님은 인간들의 원함이나 애씀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계시(啓示)하여 주시지 않는 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는 요원합니다.

 

그러던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찾아 온 것을 일컬어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가 아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은 다르게 됩니다.

노아가 아는 하나님 이외는 모두가 다른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가 심판대상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심판이란? 끝내겠다는 말입니다.

두 쪽으로 갈라내고 구분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심판 속에서 구원해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방주와 세상은 다른 영역이 되고 맙니다.

방주 안은 생명의 영역이고, 방주 밖은 죽음이 영역입니다.

 

노아에게 있어 방주는 새로운 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죽음의 땅에서 죽음이 없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는 자기가 태어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셈입니다.

노아는 죽음의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자기가 태어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도록 하신 겁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자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열납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의 후손들이 살아갈 땅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부정한 짐승들이 살아가는 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사한 땅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부정한 것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심으로 이를 알려 주셨습니다.

 

홍수 이후의 세상은 다른 세상입니다.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세상입니다.

 

제물을 인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흠 없는 제물은 곧 예수님을 의미하고 부정한 것은 우리 죄인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 이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나 때문에 의로운 분이 희생 당하셨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내가 예수님 덕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만약 이 사실을 잊으면 홍수 이전의 심판당한 땅에서 사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이 땅은 모두가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땅입니다.

어느 곳은 거룩하고 어느 곳은 부정하지를 않습니다.

모두 다 동일하게 저주를 받은 곳입니다.

 

그러니 장소적인 의미를 가지고서 거룩하다 부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이고 애굽은 부정한 땅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면 그 곳이 새로운 땅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면 저주 받은 땅입니다.

 

땅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달라집니다.

장소적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지금 이 시대도 동일합니다.

흔히들 교회는 거룩하고 교회 밖은 부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는 은혜가 퐁퐁 솟아나고 교회밖엔 저주가 솟아나는 줄 알아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놓았기 때문이에요.

건물을 가지고 성(聖)과 속(俗)을 구분해 놓았어요.

교회 안은 성스러운 곳이고 교회 밖은 부정한 곳이라고 가르쳐 놓은 겁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교인들도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천사 같지만 교회 밖을 나가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를 거룩한 장소라고 하여서 성전(聖殿)이라고 신성시 해 놓았어요.

자연스럽게 교인들은 교회를 세상 집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급기야는 교회안의 물건을 성물(聖物)이라는 것으로 까지 인식하기에 이르렀어요.

 

이런 가르침이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우상시 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신전(神殿)입니다.

신이 거하는 집이 되고 말았어요.

 

마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최고급으로 지어야 한다고 하면서 수백 억 씩 들여서 화려하게 꾸며 놓았어요.

 

신전(神殿)이 되다 보니 교인들은 기도를 해도 집에서 하면 안 되고, 교회에 와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배를 드려도 꼭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더 신령하고, 교회 밖에서 드리는 예배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성(聖)과, 속(俗)을 장소적 의미로 두고 있는 우상성 때문입니다.

우상(偶像)은 고정되어 있어요.

고정 되어 있다 함은 틀이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주어야 하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주어야 하는 공식 말입니다.

사람들이 신에게 그렇게 정해 놓은 겁니다.

 

우리가 이 장소에 와서 빌면 복을 주어야 된다고 정해 놓은 겁니다.

그래서 거룩한 장소가 있고, 거룩한 시간이 있고, 거룩한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거룩한 장소란? 교회이고,

거룩한 시간은 교회가 정해 놓은 시간이고,.

거룩한 사람이란? 목사를 말합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신전(神殿)이 필요한 겁니다.

고정된 복 받을 장소를 마련해 놓고 누구든지 복 받고 싶으면 여기 와서 빌라는 겁니다.

거기가 어디냐!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를 해도 교회에 가서 해야 응답이 잘 된다고 해요.

 

그러니 교회라는 이름의 우상의 전당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기도원이라는 절간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기도원은 기도하는 장소라는 말이잖아요.

기도하는 장소라 참 우습지요?

 

이런 것을 모두가 죄 아래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틀렸다고 가르쳐 주지 않으면 인간은 늘 이런 틀을 고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시면 기존의 틀을 허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노아의 후손으로 새로운 인간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월은 흘러 또 다시 세상엔 다시 인간들이 번성하여 편만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은 마귀의 궤계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기 시작한 겁니다.

또 다시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노아의 홍수 이후로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왔습니다.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스스로를 아브람에게 드러내신 겁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노아 시대 이후 구전(口傳)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직접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아브람이 아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아브람이 아는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고, 나머진 모두가 가짜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노아 때처럼 방주를 지으라고 하지 않고 다른 주문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아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는가요?

아니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무작정 떠나라니요!

누구 인생 망칠 일이 있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폭거입니다.

 

지금까지 일구어온 터전을 다 버리고 일가친척(一家親戚) 아비 집을 떠나라니요!

이건 죽으라는 말입니다.

 

인정(人情)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일진데!

그런 인간에게 인정(人情)을 끊어버리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정(情)에 울고 정(情)에 웃는 인간에게 정(情)을 끊으라니요?

이건 너무 합니다.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전혀 낯선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도와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이시는 하나님입니다.

한마디로 저승사자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서 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이 인간들에겐 유익입니다.

차라리 찾아오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아니 인간을 찾아오면 반드시 끝장을 내는 하나님이니 어찌 달갑게 맞이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아브람은 인간적으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셈입니다.

부모도 친척도 형제도 친구도 보지 못합니다.

영영 이별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야속합니다.

아브람 입장에선 얼마든지 원망 할 수가 있습니다.

왜? 많고 많은 사람들을 내 버려두고 날 찾아 왔단 말입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분이 바로 이런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을 끝장내시는 분입니다.

한국교회가 말하는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가 아니란 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전도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상식에 하나님 곧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끝짱 내는 하나님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망하게 하는 하나님” 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증거하면 아마도 교회는 텅텅 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불러 주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불러 주지 않은 자는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도는 교회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자를 찾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사람의 숫자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렇다면 교회가 부흥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들이 성황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합니다.

망하게 하는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개 발바닥에 땀이 나듯이 쫓아다니면서 교회를 부흥시켜 놓았어요.

그리곤 수백억 들여서 세계 최고의 맘모스 같은 성전(?)을 지어 놓았어요.

이제 내일이면 헌당식(?)을 한다고 온 천지에 광고를 해 놓았습니다.

 

설레고 흥분되는 밤입니다.

내일이면 온 세상이 이 정낙원 목사가 피 땀 흘려 일구어 놓은 울산 목양교회를 세상에 알리는 날입니다.

벅찬 가슴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아! 내가 피 땀 흘려서 이루어 놓은 업적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자” 그럽니다.

어디로요?

그동안 수고 했으니 죽으라고!

이제 죽어서 편히 쉬라니까?

예~에?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농담은 무슨 농담!

넌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느냐!

난 네가 그동안 너무 수고를 해서 이젠 쉬게 해 주려고 왔어!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할까요?

아마도 전 하나님 미쳤습니까?

내가 왜? 지금 죽어야 하는데요?

아니 지금까지 죽을둥 살둥 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켜 놓았는데 이제 와서 죽으라니요?

이건 너무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난 그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시고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게 하였나 봅니다.

제가 반항 할까봐서!

전 지금 하나님이 오셔서 야! 정목사 그 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그만 가자! 라고 하실 때를 소망하고 삽니다.

 

지금 같이 붙잡을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어요.

그러고 보면 울산목양교회가 부흥 되지 않는 것도 얼마나 큰 은혜인줄 모릅니다.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구요!

맞아요.

육적으로 들으면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니 어찌합니까?

 

암튼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셨다는 것은 곧 종말을 말합니다.

인생 종 쳤다는 뜻입니다.

 

노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나,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기득권을 다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망하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은 싫어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그냥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요?

왜? 꼭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까?

 

이는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좇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맞아요.

하나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근본(根本)을 버리는 일입니다.

근본이란? 뿌리란 말입니다.

즉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근본을 버리는 일은 곧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나는 가짜에요.

원래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지 않고 죄인의 형상이 담겨져 있어요.

이 아담 안의 나는 죽어야 할 나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내가 가짜라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도 가짜 하나님인 겁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가짜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 안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아담 안에 있는 나는 오직 나 밖에 몰라요.

하나님도 나를 위한 하나님이고,

부모도 나를 위한 부모이고,

자식도 나를 위한 자식이고,

친척도 친구도 모두가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에요.

 

아담 안에선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존재케 하려고 해요.

죄인의 본성은 자기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자기소멸을 싫어해요.

그래서 부모도 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친척도, 이웃도 형제도, 심지어 아내나 자식까지도 나를 위하여 존재하기를 위하여 이용을 해요.

 

아니라고 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여러분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로 포진해 있잖아요.

나를 불편하게 하면 관계를 끊어요.

 

연애할 때 당신 없으면 못산다고 해 놓고도 막상 결혼해 보세요.

자기를 힘들게 하면 내가 왜? 이 인간하고 결혼을 했던가?

후회하지요.

왜? 이런 생각들이 듭니까?

날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처녀 총각들이 결혼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알고 해야 실망하지 않아요.

서로에게 기대를 하는 만큼 실망은 배가 되어서 다고 옵니다.

믿는 것만큼 충격이 커집니다.

 

인간이란? 남을 배려하고 살만큼 너그러운 존재가 아니에요.

다 아집 덩어리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을 불편하고 힘들게 하면 죽이고 싶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죄가 나를 힘들고 불편하게 하는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도록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나의 근본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어요.

나의 근본으로부터 떠남이 없으면 하나님도 이용대상이에요.

결국 우상숭배로 흐르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정사정없이 근본을 끊어버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를 낳아준 고향으로부터 떠나라는 겁니다.

너를 위하여 살지 않는 그런 세상으로 가라는 겁니다.

아무도 네 편이 되어주지 않는 그런 땅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근본이 아닌 새로운 근본으로 만들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오자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 주는 겁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넌 이제부터 옛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부터 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옛 사람 아브람은 자신을 위하여 살았지만, 새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근본을 바꾸는 일을 단행 하십니다.

 

옛 아브람의 근본은 아담이라면, 새 아브라함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새로운 근본이 되려면 옛 근본으로부터 떠나야해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담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부터 신약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지요.

그럼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영적으론 마귀로부터 떠나는 것이 됩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먹게 해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지요.

선악과는 먹으면 죽습니다.

 

그럼 이 시대 선악과는 무었습니까?

율법에 의(義)이지요.

유대인들이 왜? 망했습니까?

율법에 의(義)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한 의(義)를 주셨잖아요.

율법 외에 한 의(義)란 어떤 의(義)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이지요.

 

이렇게 되면 율법은 선악과가 되지요.

율법은 정죄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엔 생명이 안 나와요.

율법엔 죽음만 나와요.

그러니 율법을 붙잡으면 죽는 겁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정죄해서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선 두 법이 있습니다.

선악의 법과 생명의 법입니다.

 

선악의 법 아래선 죽고, 생명의 법 아래선 영생을 합니다.

 

선악의 법에서 떠나면 어디로 갑니까?

생명의 법으로 가지요.

그럼 선악의 법 즉 율법은 우리가 떠나야할 본토친척 아비 집이 되는 것이지요.

이해되세요.

 

신약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옛 언약에서 나와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브람 당시엔 실제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 형제 고향을 등지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땅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신약 시대로 오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율법으로 바뀝니다.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향한 말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곧 떠나야 할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 것과 같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사람은 율법 아래 있고, 새 사람은 믿음 아래 있습니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 사람이고, 새 사람은 예수님 안에 사람입니다.

이걸 언약으로 이해해 봅시다.

옛 사람은 율법 아래 사람이고, 새 사람은 믿음 아래 사람입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믿음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율법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정죄를 받는단 말입니다.

정죄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그래서 율법아래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 아래서 죽어가는 자들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죽은 자로 살고 있었어요.

 

율법 신앙은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신앙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좋아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키면 심판을 받기 때문에 지키는 겁니다.

죽지 않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해요.

그러니 그 율법 지킴도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 되지요.

 

그러니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 겁니다.

율법 지킴은 우상숭배와 동일해요.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구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율법 신앙에서 빼낸 것은 12제자들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12제자들 속엔 우리 성도들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이해가 되시죠.

 

그럼 이 시대 한국교회로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이 마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가리면 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생명의 떡이니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만 먹지 못하게 하면 죽잖아요.

그렇지요.

 

그럼 교인들을 어디에 머물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만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라고 하겠지요.

예수님의 살과 피만 안 먹으면 무슨 짓을 해도 죽게 되니까요.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만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할 것 아닙니까?

 

이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義)를 를 가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붙잡았던 율법에 의(義)이지요.

 

율법이 뭡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럼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화주의자들이에요.

개혁을 외치고 성화를 외치는 자들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뱀처럼 교인들에게 선악과를 먹이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 피를 전하면 누가 제일 반발하는지 아세요.

성화주의자들이에요.

개혁주의자들이에요.

왜?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막느냐 이겁니다.

왜? 막겠어요.

 

거기서 구원의 의(義)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구원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만 나와요.

 

바울이 이것 전하다가 동족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고 그 모진 핍박을 당했어요.

예수님도 율법에선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다가 죽임 당하셨어요.

지금도 성화나 개혁에서 의(義)가 나오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만 의(義)가 나온다고 하니 핍박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유대인이 죽였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세요.

유대인은 율법으로 의(義)를 만들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이 시대 성화나 개혁주의나 동일해요.

맥(脈)이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가 있었으면 지금도 있어요.

어느 시대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한 것은 율법주의가 원수란 말입니다.

우리도 원래 율법 아래서 낫잖아요.,

그러니 우리의 원수 같은 집안 식구는 율법이 되지요.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여러분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이유는 개혁에서 의(義)가 안 나오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개혁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

교회가 아니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듯이 떠나면 되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음녀에게서 나오라고 했어요.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음녀가 누구입니까?

타락한 교회에요.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고 거기서 나오라고 하잖아요.

 

인간이 뜯어 고쳐서 되어 질 교회라면 애당초 교회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세운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에요.

그러니 뜯어 고치고 개혁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하지 않았어요.

거기서 빼냈어요.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 냈다구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헌 부대가 감당치 못해요.

그래서 옛 언약을 수선하고 보완해서 새 언약으로 만들지 않았단 말입니다.

교회에다 적용하면 헌 교회를 개혁해서 새 교회로 만들지 않았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근본이 달라요.

새 언약 안에는 인간의 힘으로 개혁할 것이 없어요.

 

이 시대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보이는 집단을 교회로 보기 때문입니다.

조직을 참신하게 해 보겠다는 겁니다.

 

제도를 바꾸고,

조직을 바꾸고,

룰을 바꿔보자는 겁니다.

 

제도를 바꾸고, 조직을 바꾸고, 룰을 바꿔 봐야 거기서 거기에요.

속된 말로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아요.

종자가 바꾸지 않으면 맨 날 뜯었다 고쳤다 해요.

 

예수님은 이런 조직을 만들지 않았어요.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을 한 자가 교회라고 했어요.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자가 교회에요.

혼자 있어도 교회이고 둘이 있어도 교회이고 만 명이 있어도 교회에요.

숫자와 전혀 상관없어요.

 

여러분!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뭔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잖아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이에요.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교회에요.

 

그럼 제가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개혁합시다”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성화합시다” 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건 말이 안 돼지요.

신앙고백은 개혁하거나 성화할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교회라고 했으니 “교회를 개혁하자” “신앙을 성화하자” 라는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지요.

그런데 이 말 같지 않은 말을 진리인냥 외치고 있어요.

누가?

목사들이 그래요.

교인들은 이렇게 외치는 자가 진짜 목사인줄 알고 있어요.

 

예배당 없이 학교 강단 빌려서 예배드리면 엄청 신령한 목사인줄 알아요.

헌금의 절반을 구제하고 선교하는데 사용하면 개혁적이라고 해요.

목사의 임기를 정하고 장로의 임기를 정해서 정관을 만들어 규칙대로 하면 개혁적이라고 해요.

그러니 목사들이 뭔가 신선해 보이려고 별짓거리를 다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인간 쪽에서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면 좋은 건 줄 알아야 해요.

예수 밖에서 아무리 바꿔 보세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예수 밖에선 신령한 것이 없어요.

모두가 부정해요.

 

반대로 예수 안에 들어가면 모두가 신령해요.

예배시간에 유행가를 불러도 신령해요.

노래방에 가도 신령해요.

제가 왜?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하는지 알겠습니까?

 

성과 속은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구분을 하지 인간이 만든 제도나 형식으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 어떤 형식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면 속지 말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은 가짜에요.

예수 밖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로 사람을 미혹하는 겁니다.

 

전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런 것을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자가 바로 음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원수들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한 내용들이 나오지요.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뭡니까?

교회가 처음 생길 때 가졌던 신앙이지요.

그럼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이 뭡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직 십자가였어요.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그 기쁨과 감사함입니다.

이걸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이걸 놓친다면 그건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촛대를 옮긴다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아니니 옮기지요.

 

타락이 뭡니까?

예수님의 의(義)에다가 다른 것을 섞는 거에요.

예수님의 의(義)에다 인간의 의(義)를 섞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이걸 가르치는 자는 다른 영(靈)을 받은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승천하고 나자 유대인들이 곳곳에 다니면서 예수만 믿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율법도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가르쳤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이건 미혹이고 다른 복음이다 라고 목숨 걸고 싸운 겁니다.

누구랑?

율법주의자들과 싸웠어요.

이 시대로 말하면 개혁주의를 외치고 성화주의를 외치는 자들과 싸운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전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아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좋지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면 반대합니다.

 

신앙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개혁이나 성화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마치 신앙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겁니다.

죄인들 속에선 온전한 개혁이 나올 수가 없어요.

지금은 이것이 옳다고 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 옳다고 여긴 그것도 개혁의 대상이 되어요.

결국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음녀를 개혁하고 성화시키라고 하지 않고 나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과 싸운다는 것은 똑 같다는 말입니다.

똑 같으니 싸우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만이 복음이라고 믿고 있느냐 입니다.

바울처럼 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 하였느냐 말입니다.

이 복음 하나 전하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핍박한다 하여도 지킬 수 있느냐 입니다.

 

이건 인간의 의지로 지켜 낼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지킬 수가 있어요.

 

괜히 어쭙잖게 정의감에 불타서 덤비지 마세요.

중간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목사나 교인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처음에 덥석 물었다가 데어서 다 도망갔어요.

 

이것 하나 전해서 참신한 목사라는 말을 들어서 교인들 끌어 모으려고 하다간 큰 코 다칩니다.

복음이 그리 호락 호락한 것이 아니에요.

복은 자체가 자정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짜들은 다 떠나도록 만들어요.

 

이 시대 인터넷은 복음이 홍수에요.

모두가 십자가! 십자가 해요.

복음! 복음 해요.

 

그래서 들어가 살펴보면 십자가를 빙자해서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십자가를 이용해서 자기 터전을 구축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이는 것이 십자가인데 십자가를 이용해서 살고자 하고 있어요.

 

진정 십자가를 안다면 난 예수님 하나로 만족 합니다 가 나와야 해요.

다른 것 없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로 만족 합니다 가 배어져 있어야 해요.

 

바울은 십자가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였어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으로 손익계산하지 않았어요.

 

야! 이것 전하면 복 받겠다!

야! 이것 전하면 교회 부흥 되겠다!

야! 이것 전하면 참신한 목사라고 인정해 주겠지!

야! 이것 전하면 먹고 살게 해 주겠지!

야! 이것 전하면 사람들이 날 도와줄거야! 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전한 겁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복음 전하면서 다른 것을 바라면 안 돼요.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보니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되었고!

그 동안 쌓아 왔던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리고,

과거에 동문수학 하던 친구들과 원수가 되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앞 뒤 가리지 않고 증거한 것입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하고 도와주면 복음 전하고 했어요.

 

그럼에도 십자가를 가지고 뭔가 꼼수를 부리려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에 도움을 주지 않아요.

도리어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해가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믿어지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빛과 어둠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경계인은 허락지 않아요.

십자가도 전하고 세상에서 영광 받고 살겠다는 것을 용인 하지 않아요.

 

또한 십자가도 믿고 성화도 해야 한다는 것을 허락지 않아요.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갈라디인식 경계인의 신앙을 허락하지 않아요.

 

반드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도록 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달랑 믿고 떠나는 것이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눈물이고 한숨이었어요.

아쉬움과 미련을 다 버리고 떠나는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자 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전하지 못해요.

성령이 그렇게 몰고 가요.

우리가 싫다고 하여도 그렇게 몰아갑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헛 소리가 아니에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까요.

하나님이 일으켜요.

고난 속으로 밀어 넣어요.

 

오직 십자가만 증거해 보세요.

원수가 누구인지 금방 드러나요.

아내 일수도 있고, 자식일수도 있고, 부모 형제일수도 있어요.

가장 친한 친구일수도 있어요.

 

전 십자가를 증거하고 난후 모든 친구들을 잃었어요.

과거 율법 아래서 알고 지내던 목사들과 다 헤어졌어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동무들을 만나게 해 주었어요.

 

그러니 십자가를 전하면 기존에 알던 사람들과 헤어진다고 각오하셔야 해요.

십자가를 알면 예전에 알던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새 언약 안에 들어오면 옛 언약 아래서 사귀던 사람들과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접점이 없어요.

서로가 밀어내요.

그러니 자연히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 옛 언약 아래서 사귐을 갖던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겁니다.

과거 동료들이 이단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이 나옵니다.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계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을 두 선지라고 하지요.

선지자라 함은 기존에 것을 부수기 위해서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교회가 하나님 뜻대로 잘 세워져 가면 선지자를 보내지 않아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선지자들이 언제 나타났는지 잘 알 수가 있어요.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끝났다는 겁니다.

기존에 신앙은 틀렸다는 거에요.

 

그러니 선지자를 기존에 기득권층들이 좋아하지 않지요.

죽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 살 궁리 하면 안돼요.

지금은 오직 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증거하는 자가 선지자에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만을 증거하겠다고 하면 이젠 죽었구나 하세요.

 

교단에서 쫓겨나고, 교회도 깨지고, 교인들이 다 떠난다고 생각하여야 해요.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선지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기 때문이에요.

선지자는 예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대신 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대접을 당한 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죄를 지적하다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겁니다.

지금 두 증인을 선지자라 함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있다는 겁니다.

 

이들의 뭐라고 합니까?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다고 하지요.

땅에 거하는 자란 육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거짓 목사, 거짓 신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십자가를 이용해서 교회 부흥시키고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영역을 넓혀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잘 살아보고자 하는 모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선지자가 죽으니 육에 속한 자들이 너무 너무 기뻐서 서로 예물을 주고 받는다고 하지요.

 

이걸 만약 저에게 적용을 하면 어찌될까요?

제가 만약 선지자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누가 저를 가장 미워할까요?

성화주의 개혁주의자들이겠지요.

자기들의 정체를 폭로시키니 얼마나 밉겠어요.

저 인간 빨리 안 죽나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 제가 봉화산에 등산 갔다고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아마 서로 문자를 주고 받고 전화하면서 그 인간 죽었데! 라고 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엣세나파나 쿰란 공동체나 서로 으르렁 거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싸잡아서 가짜들이라고 폭로하니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죽였어요.

공공의 적이 죽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이와 같아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죽은 곳을 일컬어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죽은 예루살렘이라고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다가 교단에서 쫓겨나고 미움 받고 핍박 받으면 여기가 바로 2000년전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과 원수가 된다는 뜻입니다.

난 너희와 다르다고 하여야 하니 원수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을 종말이고 심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너희는 저희와 다르기 때문에 떠나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를 뜯어 고치고 싸우려고 하지 마세요.

거짓 목사를 세운 것도 하나님입니다.

거짓 신자들은 누가 추수합니까?

거짓 목사가 해야지요.

 

그냥 다름으로 있으면서 욕을 먹고 살든가 아니면 아니다 싶으면 떠나세요.

하나님이 거기서 나오라고 했는데도 눌러 있겠다는 것은 다른 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 터전을 버리기가 아까우니까 못 나오는 겁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오면 새로운 식구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동무들이 있어요.

물론 많지는 않겠지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처럼 하나님이 만남을 주십니다.

 

부디 여러분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심방이 이루어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과 다르기에 떠나라고 하는 그 말씀이 위로가 되게 하옵소서. 떠나오면 아버지께서 준비해 놓은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것도 알게 하시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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