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탕자 이야기

정낙원 2009. 6. 26. 02:42

탕자 이야기 (눅 15:11-31)

 

눅 15:11-3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잃어버려졌다가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찾김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선 아담의 형상으로 있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작정된 자기 백성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만세전에 자기 안에서 예정된 자기 백성을 찾으려고 오셨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에게 종노릇하고 있을 때 모세를 보내서 찾아오라고 하셨듯이, 세상 마지막 때가 되시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마귀로부터 찾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찾김 당하고 나서야 아! 내가 원래부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천국백성으로 예정이 되었었구나! 를 알게 됩니다.

 

구약에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본토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빼내시더니,

신약에선 예수님이 성도에게 찾아가서 아담 안에서 빼내십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을 찾아 오셨고, 바울에게 찾아 가셨습니다.

우리에게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곤 야! 거기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엔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내용이 있습니다.

양이나 드라크마는 원래 주인의 것이었는데 잠시 동안 잃어버려졌다가 주인에 의해서 찾은바 되었습니다.

원래 주인의 품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주인이 잃어버려진 것을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속에는 주인의 피와 땀과 노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려진 것을 찾은 주인이 기뻐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야! 이제야 내 것을 도로 찾았구나!

다 찾으시고 안식하는 겁니다.

 

목자가 잃어버렸다가 찾아진 양을 볼 때마다 기쁩니다.

너무 너무 즐거워요.

야휴! 저놈을 못 찾았으면 아직도 쉬지 못하고 땅 끝까지 이루어 찾고 또 찾고 있을 텐데!

다행히 찾아서 이젠 쉴 수 가 있구나!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 놓고 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이 양(자식)이 죽었다가 살아 왔어요.

그러니 기뻐해 주세요!

이 양은 죽었다가 살아난 놈이거든요.

마치 자식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기쁨인 겁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그래서 주인이 찾고서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린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탕자 이야기도 동일해요.

아버지가 이 아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고 하면서 잔치를 벌리잖아요.

그리곤 탕자에게 온갖 것을 다 주잖아요.

 

주인은 찾아짐을 당한 자를 보면 그 속에 자기가 찾아낸 흔적들이 몽땅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볼 때마다 흐뭇해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구원 받은 자기 자신을 기뻐 할 것이 아니라 찾아 주신 분께 대한 감사와 기쁨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는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속에는 예수님의 것만 가득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린 잃어버려졌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입니다.

 

탕자 이야기는 이 사실을 말해주고자 있는 것입니다.

탕자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탕자가 담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나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탕자 같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 당하게 하는 손해를 입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이 하찮은 것을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어요!

이걸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우리가 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게 하여서라도 마귀로부터 빼내 와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선 우리를 구원하려고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셨는데 우린 고작하여서 사네! 못사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아요.

찾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없고 오직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라고 투정만 부립니다.

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언제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구원을 잃어버려진 것을 다시 찾았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구원 속에는 찾아 주신 분의 것만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찾김 받은 자는 오직 찾아 주신 분의 공로만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아들을 찬미코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찬미케 하시려고 그 아들의 피로서 우리를 구속 하신 것입니다.

찾아진 한 사람 한 사람 속에는 예수님의 피로서 찾아 졌다는 흔적들을 새겨놓았습니다.

예수님의 흔적들이 담긴 자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찾아주신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엔 누가 갑니까?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가지요.

그럼 누가 성도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럼 누가 예수를 믿습니까?

죄인이지요.

이렇게 되면 천국엔 누가 갑니까?

죄인이 가는 것이지요.

 

자 보세요.

예수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품으시는데 누구를 품으십니까?

죄인을 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가 믿습니까?

의인이 믿을까요? 죄인이 믿을까요?

죄인이겠지요.

 

그럼 예수님에게 찾김 받아 구원 받은 성도에게서 신앙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야 합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겠지요.

찾아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하겠지요.

 

반대로 불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자기가 의인으로 나타나고자 하겠지요.

그래서 예수의 피가 필요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여러분이 만약 마귀라고 합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을 지옥으로 데리고 가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럼 인간들은 어떤 자로 만들겠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인이 되라고 가르치겠지요?

의로운 자가 되어서 예수의 피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할 것 아닙니까?

 

여기에 걸려든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 지옥에 간 것은 예수의 피가 소용없었기 때문이에요.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완벽해서 예수의 의(義)가 필요가 없었어요.

 

그럼 하나님 앞에서 누가 죄인입니까?

너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의(義)가 필요 없는 바리새인들이지요.

자기 의가 없어서 예수의 의(義)를 소유한 세리와 창기들은 의인이 되겠지요.

 

반대로 바리새인적 시각에선 누가 죄인입니까?

세리와 창기 같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이지요.

의인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지요.

이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살아가는 맏아들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럼 성화주의자들이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

성령의 말입니까? 마귀의 말입니까?

마귀의 말이지요.

이해가 되세요.

헷갈리기 쉬우니 곰곰이 생각하면서 들으세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이 비밀을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이 몰라요.

이 시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완전히 마귀의 말을 하고 있어요.

 

일이 이지경이 되면 왜? 개혁주의나 성화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이런 사상으로 세워져 가는 한국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성화주의자들 입장에선 우리가 이단이고 우리 입장에선 그들이 이단이에요

합일점이 없어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다른 종자들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이 하는 말은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라는 것과 같아요.

목사들이 뱀이 되어서 교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 온전하고 거룩하여 의로워지라고 하고 있어요.

 

그 누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아요.

예수의 의(義)가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가르치면 마치 마귀 대하듯이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싫어서가 아니라 죄인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좋고 장려할 일이지만 본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말은 개에게 사람처럼 살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중풍병자가 축구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축구를 하겠다고 나서면 당신은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조롱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아요.

모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인간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솔직히 인간적으로 보면 교인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성화주의자들이 옳다고 여겨집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제가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인간적으로는 성화론자들이 말이 맞고 훨씬 귀에 착착 달라붙는 매력적인 말로 들리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는 인간들의 자존심을 치켜 세워주어서 자기를 긍정해주고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 두어야 듣기가 좋기 때문이에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넌 안 돼?

네까짓 것이 뭘 한다고 까불고 있어! 라고 하면 엄청 기분이 나쁩니다.

본능적으로 화가 치밀어요.

 

만약 모처럼 마음을 먹고 성경을 좀 보려고 하는데 아내가 또 두어 장 보다가 치울 거면 아예 시작하지 마소! 라고 하면 뚜껑 열리겠지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그 어떤 인간도 자기가 부정당하면 발끈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본능이고 본성이어요.

인간은 거부당하고 부인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안돼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가 거부되자 하나님이 인정한 아벨을 죽임으로서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시위하였어요.

가인도 자기가 왜? 그런 줄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를 죄가 네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죄가 가인에게 아벨을 죽여라! 죽여라 해서 죽인 겁니다.

 

이처럼 죄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진리를 말하고 옳은 말을 해도 자신을 부정하는 말엔 동의 하지를 못하고 적개심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면 교회에 올까요? 안 올까요?

안 오겠지요.

예를 들어서 주일날 교회에 오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한다면 책망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요.

그런데 목사가 책망해 보세요.

수용합니까?

말은 맞는데 선뜻 수용이 안돼요.

수용하면 지는 것 같아서 싫어요.

 

그래서 몇 주 더 빠져서 시위하면서 어깃장을 놓는 겁니다.

목사가 지는 척 하면서 전화라도 해 주어야 그럼 그렇지 하고 기어 나온다니까요.

삼고초려(三顧草廬) 해서 목사가 숙여 주어야 못 이기는 척 하고 나와요.

이게 인간이에요.

 

누가 듣기 싫은 말을 하는데 오겠어요.

예수를 믿어도 자기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믿으라고 하여야 기분이 좋아요.

갈라디안 식으로 예수도 믿고 말씀대로 사십시오! 라고 하면 그게 복음인줄 알고 좋아해요.

 

솔직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니 우리는 할 일이 없다고 하면 듣기 좋습니까?

우린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멘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럼 우리는 뭔데요? 라고 자기가 제외 되는 것을 시큰둥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이 복음은 분명한데 마음 한 구석엔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죄가 이런 마음을 들게 만들어요.

 

죄는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서고 싶어 하게 해요.

머리를 숙이면 진다고 생각해요.

남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해 지려고 하나님 말씀을 다 지켜서 난 이렇게 의롭습니다! 라고 나서고 싶어하는 겁니다.

말씀을 다 지켜서 죄인의 수치를 가리고자 해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수치를 알았어요.

하지만 그 수치 또한 가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수치를 가리고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제일 먼저 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를 가리려고 했을까요?

이는 수치는 두려움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고,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떳떳해 지려는 것입니다.

 

아주 노골적인 말로 하면 똥 싼 놈이 성낸다고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죄를 짓고선 그 죄가 역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고 있어요.

아주 웃기지요.

이게 죄의 본성이에요.

죄라는 놈은 항상 하라고 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발해요.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예수는 안 믿고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이 그렇잖아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십시오! 라고 하면!

아니요! 저희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게 성화하겠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성화를 외치는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말이에요.

그 소리가 듣기 좋으니 그리로 벌떼 같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거에요.

참 재미있지요.

 

이제 죄가 어느 식으로 일하는지 알겠지요.

 

여러분들도 제가 뭐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그 말을 따르기 싫지요.

멀쩡히 청소하고픈 마음이 있다가도 제가 집사님 청소 좀 하세요! 그러면 본능적으로 반항하고 싶지요.

 

속으로 목사 니가 하면 되지 왜? 날 시키고 지랄이야! 라고 욕을 하고 싶지요.

아니 하고 싶은게 아니라 실제로 욕을 하잖아요.

전 그 소리를 다 들어요???

여러분 얼굴에 써 있기 때문에 알아요.

 

저도 집에서 집사람이 청소 하라고 하면 짜증을 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하면서도 꼭 토를 달아요.

해도 궁시렁 거리면서 해요.

실제론 잔소리 안하면 안 해요.

잔소리 때문에 궁시렁 대면서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멀쩡히 잘하던 것도 더 잘하라고 멍석을 깔아주면 안 해요.

누가 시키면 재미가 없으니까 안 해요.

남에게 지시 받으면 이상하게 싫어지고 짜증이 나지요.

이는 모두가 인간이 남에게 지시받기 싫고 남에 말을 듣기 싫어하는 죄성 때문에 그래요.

 

제 아내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면 시킬 일이 있으면 아침에 출근하면서 식탁 위에 오늘에 할 일이라고 하면서 메모를 해 놓아요.

빨래 널기, 청소기 밀기, 음식물 찌꺼기 버리기, 설거지하기 등등,,,,

필요에 따라서 그래요.

 

그러면 직접적으로 지시받는 것보다 반발심 덜 생겨요.

출근하는 아내의 고마움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요.

좌우지간 죄라는 놈은 죽어도 꽥하고 죽는다고 그냥 순수하게 순응하지 않아요.

 

자! 다시 아담과 하와에게 두려움이 왜? 찾아 왔는지 조금만 더 살펴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엔 하나님 앞에서도 벌거벗었으나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두려움이 없었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자 이상하게 하나님이 두려워졌어요.

아담과 하와도 왜? 두려운지 몰라요.

선악과를 먹고 나니 왠지 벌거벗음이 수치로 여겨지고 하나님이 두려워졌어요.

 

마음속에 두려움이 엄습하면 그 두려움을 해소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불안해서 살지 못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주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퀴즈하나 낼 테니 심사숙고해서 여러분이 답을 해 보세요.

여러분의 신앙을 체크해 보고자 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하고 어느 때가 괴롭습니까?

 

1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을 때이다.

2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을 때이다.

3번) 말씀대로 살았든 살지 못했든 항상 두렵다.

4번) 말씀대로 살았든 살지 못했든 전혀 두렵지 않다.

 

정답은 4번입니다.

 

1. 2. 3번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자에요.

옛 언약 안에선 항상 말씀에 추궁을 당해요.

말씀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 4번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람이 죽으면 되겠지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중압감과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을 때 엄습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겠지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두려움은 항상 따라다닙니다.

말씀에 대하여 죽은 자는 더 이상 말씀이 두렵지가 않아요.

 

그럼 4번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말씀에 대하여 죽으면 되지요.

즉 율법에 대하여 죽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인 율법을 도말시켰지요.

도말 시켰다는 말은 없애 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어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예수 안에 들어가면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요.

왜냐하면! 우리를 추궁하던 율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다 도말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 안에서 말씀을 대하면 우리가 지킬 말씀은 없어요.

모두가 예수님이 지켜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든 안지키든 두렵지가 않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 말씀을 함부로 대하라는 뜻이 아니고 말씀의 요구에선 치외법권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두려워지는 것은 선악과가 가져다준 법이지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고 난후 두려움이 생겼잖아요.

그러니 두려움은 선악과가 가져다준 것이잖아요.

그럼 역설적으로 두려움을 가져다준 아담과 하와 속에 들어 있는 선악과라는 독(법)을 쏙 빼내면 어떻게 됩니까?

두려움도 사라지겠지요.

 

그럼 지금 우리에게 정죄하는 법이 뭡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은 선악과와 같아요.

이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도말시켰어요.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 받는다는 것을 몽땅 십자가에서 일괄처리 했어요.

그러니 이젠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 받는다는 것도 날아간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겐 말씀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 받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기독교 방송에 나와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 받는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놈들은 몽땅 마귀새끼들이에요.

이런 놈들은 예수님처럼 독사 새끼라고 해야 해요.

 

하나 같이 전부 옛 언약 아래서 말씀에 영향을 받고 있어요.

말씀대로 살면 좋다고 하고 못 살면 음매 기죽어! 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피 아래 있지 않으니 말씀에 따라서 춤을 추는 거예요.

거기에 교인들도 부화뇌동이 되어서 같이 춤추고 자빠졌어요.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설교하는 인간들을 보세요.

거기에 어디 새 언약을 아는 인간이 있는가?

어디 예수님의 피를 말하는 인간들이 있나요?

없어요.

전 아무리 눈을 씻고 귀를 열고 들어도 없어요.

 

백 % 라고 하면 어패가 있으니 거의 다 라고 할게요.

혹 1 %가 있으면 제가 실수하니 99%라고 할게요.

 

이 시대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속에 선악과가 가져다 준 독(毒)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안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 전처럼 벌거벗었으나 두려움이 없어요.

지금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벌거벗었으나 두려움이 없어요.

지금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벌거벗음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비록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일지라도 두려움이 없어요.

죄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왜? 예수 안에는 죄가 있음에도 두려움이나 수치를 모를까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요일 1:5-7=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자 보세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니 귀담아 들으세요.

 

여기서 빛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사귐이 있다고 하지요.

즉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우리도 빛이 되어야겠지요.

어둠은 빛과 사귐이 안 되잖아요.

그럼 우리는 원래 빛입니까?

어둠입니까?

어둠이지요.

 

그럼 어둠이 어떻게 빛이 됩니까?

빛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빛이 되겠지요.

예수님도 빛이시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도 빛이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예수의 피로서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함을 받은 자들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죄” 입니다.

모든 죄란? 죄라는 죄는 모두를 망라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피가 용서 못할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는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나요? 없나요?

없지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했으니 용서 못 받을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죄” 속에 여러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집어넣으세요.

 

“모든 죄” 에다 괄호 열고 (살인과 강도와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한 생각과 정욕과 탐심과 탐욕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지금까지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집어넣으시고 괄호를 닫으세요.)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에서 탈락 될 수가 없는 운명이에요.

이게 믿어져야 되요.

이걸 믿는 자가 성도이고 구원받은 자이고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자에요.

빛 가운데 있는 자로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에요.

 

이걸 사도요한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봅시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지요.

 

온전한 사랑을 우리가 만들어 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겁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지요.

온전한 사랑이란? 믿음을 말하고 구원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사랑(믿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겠지요.

 

만약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사랑(믿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만든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웃었다가 울다가 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은 어떤 땐 믿음이 억수로 좋은 것 같다가도 어떤 땐 낙심천만이 되어 있어요.

이건 자기 행위로 시소게임을 해서 그래요.

 

아침엔 마음이 천당인데, 저녁 땐 마음이 지옥인 겁니다.

그래서 잠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라도 하루의 잘잘못을 반성하고 자야해요.

 

성화주의자들은 이걸 회개라고 해요.

회개가 뭔 줄도 모르고 회개라는 말만 갖다 붙이면 회개인줄 알아요.

저녁에 하루 일과를 반성하는 것이 그게 무슨 회개입니까?

 

여러분 반성과 회개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반성은 잘 할 수 있었는데 못했을 때 하는 거예요.

아! 오늘은 잘못 했으니 내일은 반드시 성공 할거야! 라고 할 때 반성이라고 해요.

그러니 반성은 자기 가능성을 깔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회개는 자기에게 가능성이 없어서 돌아가는 거에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탕자가 바로 회개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탕자가 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나요?

자기에게 더 이상 걸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들로 돌아가지 않고 종으로 돌아가지요.

 

아들은 아버지에게 요구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종은 요구 할 것이 없어요.

탕자가 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아가 완전히 죽은 겁니다.

난 아버지께 요구 할 것이 없는 놈입니다! 라는 표현이에요.

 

회개란? 탕자처럼 자기 자존심 다 버리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자기 스스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항복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주여 긍휼히 여겨주소서! 라고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거에요.

이게 회개예요.

 

신약에서 회개란?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난 안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진짜 믿는 자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아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성도는 자기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가 나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간 성도가 회개한 자에요.

 

오늘 본문 앞에 나온 잃어버린 양을 찾아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을 예수님은 회개했다고 하잖아요.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보세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서 집에 데리고 가 놓고선 죄인 하나가 회개했다고 하잖아요.

저녁마다 반성한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회개하고 얼마나 다릅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다는 것은 잃은 양의 허물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는 거에요.

목자가 잃어버려진 양을 찾았다는 것은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찾아 나섰다는 것은 용서했다는 겁니다.

 

어렸을 때 엄마 말 안 듣다가 집에서 쫓겨난 경험들이 있지요.

그러면 밖에서 해가 질 때까지 놀잖아요.

그러면 저녁 때가 되어서 밥 먹을 시간인데도 안 들어오면 엄마가 찾아 나서지요.

찾는다는 것은 용서 했다는 거에요.

 

성도는 잃어버려졌던 양들이에요.

목자에 의하여 찾김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나 예수의 피로서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심을 받은 성도는 전혀 두려움이 없어요.

느긋해요.

이게 예수님의 피가 주는 능력이에요.

 

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요.

그러나 전혀 두렵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안심하라고 해요.

 

아는 것하고 아는 것대로 사는 것은 달라요.

우린 아는 것대로 살아내지를 못하는 중풍 병자들이에요.

 

자기 안에 두려움도 의지나 각오를 새롭게 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소리치고 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두려움이 있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해요.

 

아무리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었다고 해도 안 돼요.

안 믿어지기 때문이에요.

자기 안에 선악의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사람을 만나면 그냥 그렇게 사세요! 라고 해야 돼요.

 

발가벗고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고,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어찌합니까?

본인의 마음이 벌거벗음을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리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가리는 일을 하여야 마음이 편해요.

 

하지만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냥 웃으면서 살아요.

본인이 수치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데 누가 말립니까?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심에 감사하고 기쁘게 살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일평생 수치를 가리고자 애쓰고 수고하고 살아야 해요.

 

제가 과거 인도에서 겪은 일이에요.

과거 목사가 되기 전에 인도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하도 오래전 일입니다.

나체 해수욕장에서의 일이에요.

우리나라에선 없는 나체 해수욕장이라고 하니 생소한 것이라서 호기심에 구경삼아서 한번 가 보았어요.

나체 해수욕장이라서 주로 외국인들이 모두가 발가벗고 피서를 해요.

 

그곳에선 옷을 입으면 출입을 통제해요.

반칙이에요.

모두가 발가벗었으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아요.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겐 낯설어요.

룰에 따라서 벌거벗고 들어갔지만 벌거벗음이 익숙지 않으니 수치스러워서 죽겠더라고요.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너무 난감해서 오래 있지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내 양심이 그걸 용납 하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차라리 옷을 입는 것이 낳지 옷을 벗고는 못 있겠더라고요.

 

예수 안은 나체 해수욕장과 같아요.

모두가 벌거벗었으나 수치를 몰라요.

예수 안에는 모두가 죄인이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 안엔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예수 밖은 말씀대로 살지 못한 벌거벗음은 수치에요.

두려워요.

그래서 예수 밖에선 말씀대로 살아서 수치를 가리는 일을 일평생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수치를 가리고 싶습니까? 드러내고 싶습니까?

감추고 싶지요.

그래요.

인간의 본능은 누구든지 수치를 가리고 싶어 해요.

수치를 드러내고 다니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를 못해요.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수치를 다 드러내 놓고 다니는 미친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기 수치를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탕자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런 사설이 기느냐 하면 탕자 이야기를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탕자 비유의 의미를 예수 밖에 시선으로 보고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어요.

왜? 이런 비유를 하셨는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고 비유 자체만 달랑 가지고 해석을 하면 윤리 도덕이 되어 버려요.

 

그럼 오늘 살펴보는 탕자 비유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가 있겠지요.

왜? 탕자 비유를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눅 15:1-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하루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나누고 있었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원망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았어요.

자신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라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과 동류라는 뜻이에요.

식사를 함께 하고 담소한다는 것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과 어울리고 있는 겁니다.

호시탐탐 예수를 옭아맬 기회만 엿보고 있던 놈들에게 예수님이 걸려 든 겁니다.

율법으로 보면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탄핵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은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는데 사람들에게 예수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잡아 족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너 예수 한번 당해 봐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혼자 거룩한 척 하면서 어찌하여 율법이 금하는 개 같은 죄인들과 상종하느냐 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겁니다.

서기관이라고 하면 이 시대로 말하면 신학자들이에요.

자기들 신학으로 판단하면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이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공격하려고 미끼를 던졌는데 이 등신들이 예수님이 던진 밑밥인줄도 모르고 덥석 물은 겁니다.

자기들은 모르지요.

도리어 예수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탕자 비유를 하시는 겁니다.

 

탕자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 재산을 말아먹은 불효막심한 세리와 죄인들이에요.

반면에 맏아들은 눈만 뜨면 하나님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에요.

 

인간들의 관습법인 윤리도덕적인 행위로 보면 누가 보아도 맏아들이 착한 놈이고, 둘 째 아들이 나쁜 놈이에요.

인간들의 선과 악으로 따지면 맏아들은 선한 자이고, 탕자는 악한 자에요.

 

이렇게 되면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악한 자인 탕자를 받아들인 아버지가 틀렸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윤리적 행위를 가지고 선악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저 같아도 맏아들 편을 들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는 아들은 탕자 같은 아들이에요.

그럼 지금부터 왜? 하나님께서 탕자 같은 자들을 원하는지 살펴봅시다.

 

탕자 비유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왜? 보내셨는가를 알아야 해요.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모르면 성경은 전부 인간들 살아가는 이야기로 바꿔 버려요.

 

인간들 눈에 비췬 예수님의 모습은 성자에요.

너무너무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좋은 사람이에요.

가진 자들에겐 사정없이 나무라고, 없고 소외 받는 자들에겐 어머니 같이 자상한 분이에요.

 

천주교에 정의사제구현단 인가 뭔가 하는 놈들은 가난한 사람은 선하고 재벌은 악당이라고 보는 이유가 이런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도 그렇게 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항상 약자 편에 서서 강자들을 공격하였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가 약자 편에 서서 가진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상대적으로 약자인 소외계층들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재벌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성 정체성이 혼란스러워 고통당하는 게이나 레즈비언 같은 동성연애자들이나 또는 트렌스젠더가 된 하리수와 같은 약자들이나 비정규직과 같은 사람들을 교회가 그들 편에서 서서 강자들과 싸워서 약자들을 보듬어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모두가 죄 중심으로 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을 하는 겁니다.

성경은 휴머니즘이 아니에요.

성경은 부자나 가난한자를 구분하지 않아요.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보아요.

다 저주 받아야 할 자로 본단 말입니다.

 

천주교에선 인본주의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휴머니즘이 묻어 나와요.

좋은 나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겁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예수님의 정신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는 거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득권층들과 싸우다가 가진 자들의 횡포에 의하여 죽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민중의 해방자와 성자로 둔갑 시킨 것이 천주교에요.

물론 지금은 천주교나 기독교나 세상 종교나 다 같아졌어요.

이름만 천주교이고, 기독교이고, 불교이지 그 지향하는 이상은 같아요.

지난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 4대 종단 대표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든 것이 유유상종(類類相從)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다.

사상이 같기 때문에 서로 간에 말이 통하고 하나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선 종말의 교회를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겁니다.

각종 개구리 영들이 모여서 온갖 소리로 개골개골하는 겁니다.

 

탕자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이런 자를 원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탕자와 맏아들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엔 탕자와 같은 자들이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고, 탕자와 같이 전적인 아버지의 용서가 담겨져 있는 사람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자기 할 말이 없고 오직 아버지 자랑만 하는 자가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자입니다.

 

탕자와 맏아들의 차이는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 에요.

천국은 스스로도 잘하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들어 갈 수가 없어요.

하나에서 열 까지 아버지가 다 도와주어야 하는 자들이 들어가서 사는 곳이에요.

인간의 자랑은 0.1%도 섞이면 안 되는 곳이에요.

백 % 예수님의 공로만 담겨져 있어야 해요.

그래야 세세토록 어린 양만 찬양 할 수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양을 따르는 십사만 사천 명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써 있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있는 자가 아니라 어린양 안에 복속이 되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마에 이름이 써 있다는 것은 모든 정신머리가 예수님과 같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이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어린 양의 것으로 채워져 있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이런 자가 바로 구원받은 성도인 겁니다.

 

그러므로 탕자 이야기는 성도 이야기인 겁니다.

탕자는 성도의 모형이에요.

탕자는 자기가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으로 몽땅 뒤집어쓰고 있어요.

그러나 맏아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이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치가 않아요.

스스로 독립하여 살아가는 자에요.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의 두 아들은 마치 야곱과 에서 같아요.

야곱은 마마보이가 되어서 엄마 치맛자락을 놓지 못해요.

늘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살았어요.

그러나 에서는 부모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도 잘 살아가는 유명한 사냥꾼이었어요.

에서는 부모가 없어도 살아 갈 수가 있지만 야곱은 그렇지가 못해요.

에서 입장에선 야곱은 수치스러워요.

 

어떤 집에 건강한 형과 지체 부자유한 동생이 있다고 봅시다.

건강한 형 입장에선 병신인 동생은 수치스러운 존재에요.

자기 동생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요.

왜? 저런 못난 놈이 하필이면 내 동생이 되어가지고 자기 체면을 구기느냐! 라고 신경질을 내요.

부모가 없으면 동생을 구박합니다.

난 너 때문에 쪽팔려서 못살겠다고 해요.

 

이런 모습을 엄마가 보았을 때 어떻겠습니까?

동생을 업신여기는 그 잘난 놈을 나무라겠지요.

형이라고 한다면 부모의 마음으로 동생을 보듬어야 해요.

 

흔히들 맏이는 부모 앞잡이라고 하지요.

이는 형은 부모님을 대신하는 자란 말입니다.

부모님을 대신한다는 말은 동생들을 부모님의 심정으로 보살핀다는 뜻이에요.

그래야 부모의 유업을 이어 받을 만한 자가 되는 겁니다.

 

지체 부자유스러운 아들을 부모가 낳았어요.

그 아이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부모가 그렇게 낳아 주어서 그런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자식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못난 자식을 공격하면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해요.

 

지금 맏아들이 탕자를 공격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격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맏아들이 탕자를 받아준 아버지에게 왜? 저런 병신을 받아 주느냐고 따지잖아요.

난 한 번도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고 살았는데!

저 놈은 아비지 재산을 다 말아 먹고 왔는데 왜? 쫓아내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하는 겁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에 동참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기엔 너무도 자기가 잘났어요.

그러니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해 진치를 베푸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따지는 거예요.

 

구원이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쁨이 아니고 주인의 기쁨입니다.

죽었던 자식이 돌아와서 기뻐하는 아버지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겁니다.

 

가정에 기쁨은 가장에게 달렸어요.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면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웃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는 겁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회사에서 돌아 왔는데 기분이 다운이면 온 가정은 함께 다운이 되요.

아버지가 한숨을 푹푹 쉬는데 아이들이 깔깔 거리고 웃을 수가 없어요.

그건 아비를 욕되게 하는 거예요.

 

가족이란? 아버지와 함께 희비하는 자에요.

 

성도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자에요.

아버지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고 아버지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기뻐하면 우리도 기뻐해야해요.

 

지금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너무 기쁜 겁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찾아서 기쁜 겁니다.

마치 죽은 줄로만 알았던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기뻐하는 아버지와 같아요.

 

그러나 잘난 바리새인들은 하나도 기쁘지 않는 겁니다.

도리어 수치스럽게 생각해요.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같은 죄인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 눈에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가 좋아 보이지가 않지요.

유대인들 망신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먹고 어울리니 맏아들처럼 왜? 저런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예수님을 탄핵하는 겁니다.

 

제가 전에 교육전도사로 있던 교회 목사는 설교시간에 하는 말이 개척교회는 없어져야 한다고 하더래요.

개척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큰 교회로 와야 된대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하꼬방만 하면 세상에 수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인들이 없어서 집세도 못 내고 하면 하나님 영광 가린다는 겁니다.

큰 교회를 짓고 나니 개척교회는 창피하게 보이는 거예요.

이 인간이 지금 맏아들과 같아요.

 

바리새인들과 같아요.

세리와 창기들을 보면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자기 민족들 중에 창기가 있고 죄인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망신시키는 일이란 겁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과는 상종해서는 안 된다고 금기시 해 놓은 겁니다.

일이 이 지경인데 예수님은 그것도 모르고 그들과 놀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밉겠어요.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기니 세리와 죄인들이 얼마나 하찮겠어요.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의(義)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으러 오셨어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냐를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혹시 내 도움이 필요치 않습니까? 라고 묻고 계신 것 같아요.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에서 한민관이가 스따가 되고 싶으면 연락해! 라고 사람들에게 자기 명함을 던지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누구라도 내 의(義)가 필요한 사람은 연락을 하라는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에게 죄인을 구원하려고 왔는데 전부 의인이라고 하니 예수님이 할 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탕자 비유를 통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세리와 죄인들과 비교해서 누가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탕자가 만약 객지에서 사업에 성공했으면 집에 안 옵니다.

성공했다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아요.

그러나 사업이 망하고 자기가 가진 것이 없으니 아버지 것이 필요한 겁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빈털터리로 왔어요.

다 털어먹고 아무 것도 없어요.

 

집을 나갈 때에는 자기 것이 있어서 아버지 것이 필요치 않았지만 지금은 아버지 것이 필요해요.

 

재산을 의(義)라고 생각해 보세요.

 

탕자가 의(義)를 소유하고 있을 땐 아버지가 주실 의(義)가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다 털어 먹고 온 지금엔 아버지가 주는 것이 아니면 살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주시는 것은 모든 것을 받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빈주머니로 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채워줄 여유가 많은 겁니다.

아버지는 이때를 기다렸어요.

이제 마음껏 아들에게 아버지 것을 채워 줄 수가 있기 때문에 기쁜 겁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망해서 빈털터리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요.

 

만약에 탕자가 성공을 해서 돌아 왔다면 아버지와 동등하고자 할 것입니다.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자랑할 겁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있지 않고 아버지와 다른 독립된 자식으로 있을 겁니다.

 

독립된 “나” 를 자아라고 해요.

“나” 라는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義)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버지가 의(義)를 주고자 하여도 안 받아요.

자기 의(義)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자식에서 아비의 의(義)를 채워주고 싶어하는 하나님 입장에선 자기 의(義)를 완전히 상실한 체로 돌아온 아들이 너무도 기쁜 겁니다.

아버지는 늘 아들이 망하길 바랐어요.

 

아버진 탕자 속에 “나” 라는 자아가 깨어질 때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다행스럽게 탕자는 완전히 거지가 되어서야 비로서 “나” 라는 자아가 깨어져 버렸어요.

자기의 소유가 다 날아가자 이제는 “나” 라는 자아가 없어졌어요.

깨어진 “나” 속에 아버지 것을 담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건 마치 우리 속에 예수님의 의(義)를 담는 것과 같아요.

 

“나” 라는 자아가 깨어진 증거가 바로 아들로 돌아오지 않고 “품꾼”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품꾼에겐 마음껏 채워 줄 수가 있어요.

월급쟁이에겐 보너스를 많이 주면 줄수록 좋아해요.

줄 때마다 감사해요.

사장님이 보너스를 주면 기쁘잖아요.

내 주머니 속에 사장님의 저금통장을 집어넣어 주면 좋겠지요.

요즈음 말로 법인 카드를 주어서 마음껏 사용하라고 했으면 좋겠지요.

아내들이 사장님 것을 주머니에 담아 오면 엄청 좋아 할 겁니다.

 

품꾼으로 돌아온 탕자에겐 주인이 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니 탕자가 망한 것이 복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을 하시면서 팔 복을 이야기 하셨지요.

 

팔 복중에서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고 하지요.

탕자는 지금 자기 잘난 것이 아무도 없어요.

즉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요.

자랑거리란 의(義)에요.

 

탕자에게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이걸 예수님은 복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았다고 해요.

복을 받고 보니 의(義)에 주리고 목마름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의(義)가 고픈 겁니다.

예수님 저에게 의(義) 좀 주세요.

 

탕자가 망해 보니 아버지 집이 그립듯이,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보니 예수님의 의(義)가 그립고 배고픈 겁니다.

 

배부른 사람에겐 산해진미(山海珍味)도 소용없어요.

그러나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에겐 라면 하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의(義)에 배고프지 않아서 예수님이 주는 의(義)도 필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의(義)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밀어 냈어요.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의(義)라곤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예수님의 의(義)를 가득 가득 채워주시고자 같이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누는 겁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이 주는 의(義)를 가지고 있어요.

누가 당신 그 의(義) 어디서 났어! 라고 물으면 예수님 것인데요! 라고 해요.

 

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가진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에요.

가락지도 아버지 것이고,

신발도 아버지가 신겨준 것이고,

좋은 옷도 아버지가 입혀 주신 옷이고,

풍성한 음식도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채웠어요.

아버지가 준 명품으로 도배를 했어요.

 

탕자가 동네방네 인사하면서 뭘 자랑하겠습니까?

사람들이 탕자에게 그 반지 누구꺼냐?

너 신발 누구꺼냐?

네 옷은 누가 입혀 주었느냐? 라고 물으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아버지꺼 라고 말할 것입니다.

 

집 떠나 자기 수중엔 돈이 있을 땐 자기 자랑했어요?

나는 이만큼 가졌다!

날 무시하지 말라! 고 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엔 아버지가 주신 것을 자랑하게 되었어요.

전부 다 공로를 아버지께 돌려요.

 

아버지께 공로를 다 돌리면 자기는 뭐가 됩니까?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되지요.

아무 것도 없으면 자기 기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사람이 자기 것이 있어야 기가 죽지 않고 큰 소리 치는데!

지금 탕자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큰소리칠 꺼리가 없어요.

큰 소리 칠게 없으니 자기 기쁨이 없는 겁니다.

모두가 아버지 기쁨으로 사는 거에요.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이면 같이 기뻐하고 아버지가 슬퍼하는 일이라면 함께 슬퍼하게 됐어요.

 

이런 상태를 자기 기쁨을 포기하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한다고 해요.

내 기쁨을 포기하고 주인의 기쁨에 참예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는 것은 자아의 기쁨을 포기하라는 말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포기 현상이 일어나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된다는 기쁨으로 자기 포기가 일어나요.

 

억지가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요.

내가 없으면 내가 지킬 것이 없어져요.

내 목숨조차도 아버지께 일임해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라는 믿음이 생겨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에요.

천국은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에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모두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칭칭 감은 사람들이 가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한 사람만 천국에 가요.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는 집에 있는 놈을 찾지 않아요.

잃어버린바 되고 난 후에 찾아요.

탕자가 집에 있을 땐 가락지고 신발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벌려 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집을 떠나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칮김바 되니 가락지도 끼워주고 진치도 벌려 주는 겁니다.

 

이젠 아버지가 어떤 분인 줄 알았어요.

잃어버려지긴 전엔 아버지가 잔소리꾼으로만 알았는데!

막상 집 나가 망해보고 나니 아버지의 말씀이 잔소리가 아니라 생명이고 복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젠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달라요.

모든 말씀이 나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것으로 들려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것도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의인으로 있을 땐 하지 않아요.

잃어버려진 자를 찾을 때는 거지가 되어야 해요.

거지라야 모든 것이 감사가 되요.

아버지 집에 거한다는 것 자체로 감사가 되요.

 

세리나 창기는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어요.

죄 밖에 없어요.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후엔 내어 놓는 것마다 예수님의 것이에요.

의(義)도 예수님 것이고,

봉사도 예수님 것이고,

사랑도 예수님 것이고,

헌금도 예수님 것이고,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하여도 그 끝엔 항상 예수님 자랑만 남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 세리와 죄인들이에요.

예수님과 식사를 같이한 사람은 늘 예수님 영광에 사로잡혀 있어요.

나 같은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자랑해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것을 자랑 할 것이 없어요.

모두가 자기 것이에요.

자기 것을 내어 놓을 것이 너무도 많아요.

바리새인들에겐 하나님이 채워 줄 것이 없어요.

 

그들은 의(義)에 배가 불러 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의(義)를 준다고 해도 우린 그런 것 필요가 없다고 거절 했어요.

그런 의(義)는 개 같은 세리나 창기들이나 이방인에게 주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스라엘 집에 가지 말고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라고 한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면서도 잃어버려진 자들인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말씀을 나누고 교제를 하고 계신 겁니다.

 

탕자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큰 아들은 자기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버지께 늘 충성했으니까 잘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동생(탕자)한테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니까 완전히 돌아버리겠어요.

자기는 아버지를 잘 모셨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 번도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았으니까요?

 

맏아들은 가출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아버지 재산에 손해도 끼치지 않았어요.

도리어 재산을 증식시켰어요.

 

그러니 아버지에 것으로 산다는 고마움이 없는 겁니다.

아버지 집에서 우거하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없어요.

 

여러분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지요.

곧게 쭉 쭉 뻗은 나무들은 전부다 베어져 나가요.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어요.

그러나 굽은 나무는 누가 베어가지 않아요.

그래서 그 굽은 병신들이 산을 푸르게 지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잘난 놈들은 항상 목이 곧아요.

자기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자만해요.

난 이만큼 했는데 너희들은 뭐냐! 라고 남을 판단해요.

그래서 항상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해요.

 

목사로서 이런 인간들을 보면 화가 나요.

자기 의(義)로 교회 안에서 활보하고 다니기 때문에 감사나 겸손이 없어요.

교회 안에 탕자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수치라고 여겨요.

자기 교회 안에는 다 유능한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바래요.

세상 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만 남기를 바래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은 나가줬으면 해요.

그런 사람들이 교인으로 있으면 교회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요.

돈 없고 무식하고 천한 사람들은 개척교회에 다니라고 해요.

은근히 염소새끼들처럼 밀어내요.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하나님이 바라는 성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자에요.

그래서 아버지 집에 품꾼들이 모두가 아버지의 은혜로 가득 가득 채워져서 어딜 가도 아버지 자랑을 하기를 바래요.

 

천국을 아들이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義)로 채워진 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하늘나라엔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진 자들만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오해하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완벽하면 천당 가는 줄 알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천당 가는 줄 알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천국은 예수님이 입혀준 옷이 있어야 해요.

예수님이 대신 맞아 주신 죄가 있어야 돼요.

나는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흔적이 있어야 돼요.

 

구원이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해요.

구원을 공식화 하면 “구원 = 죄인 +용서” 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요.

 

죄인이 용서 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하잖아요.

그 용서의 근거는 예수님의 피에요.

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 흥건히 배어있어야 해요.

그래서 누르면 예수님의 피가 툭툭 튀어 나와야 해요.

입만 열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증거가 되어야 해요.

 

의인이 되면 큰일 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 주신 것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걸 잊으면 안 돼요.

 

죄인이라야 용서가 필요해요.

죄인이 용서 받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공식 외에 다른 공식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성화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교인들을 죄인에게서 의인으로 바꾸려고 해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義)를 만들어서 구원받으라고 해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는 한은 자기 의(義)를 쌓아가는 겁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거져 주신 기쁨은 날아가고 자기가 지켜 행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맏아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집에 산다는 것이 기쁘지가 않는 겁니다.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의(義)를 소유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의(義)를 입어서 받는 겁니다.

주님의 용서 속에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 포함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피를 앞세우고 아버지여! 내가 정낙원이 때문에 피를 흘렸습니다! 라고 변호해 주는 것을 의(義)라고 해요.

의인은 예수님만이 만들 수가 있어요.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義)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자라는 것을 잊어선 안돼요.

의롭다 여김을 유효하게 하려면 나는 항상 죄인으로 남아야 해요.

난 죄인이 맞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해요.

 

맏아들처럼 난 아버지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라고 나오면 안돼요.

제발 맏아들처럼 난 잘난 놈입니다! 라고 독립선언하지 마세요.

 

전에는 죄인이어서 말씀 못 지켰는데 이제는 의인이기 때문에 이 말씀 내가 지키겠다는 것은 스스로 의(義)를 쌓아가겠다고 독립 선언하는 겁니다.

난 더 이상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사는가?

탕자가 돌아와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가 끼워주신 가락지 끼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누구 자랑했어요?

아버지 자랑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구원 후의 삶입니다.

성화 되는게 아니고 예수님 의(義)로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사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바울을 보세요.

어떻게 살았나!

가는 곳마다 서신 서마다 난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종이 라고 하잖아요.

바울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말은고상하게 겸양을 떠는게 아니에요.

탕자처럼 난 품꾼입니다 라는 말이에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

탕자 같으면 나는 개판이었는데 아버지가 용서 해 주셨다고 하지요.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긍휼이 자랑이 되어야지 난 이젠 괜찮지 하면 안 됩니다.

 

오로지 난 탕자고 아버진 이런 나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여야 해요.

예수님이 피 흘려주심으로서 내가 용서 받았다고 해야 해요.

이게 바로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 자랑이고 이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사는 자를 일컬어 의(義)의 종이라고 해요.

바울이 그토록 자랑하던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겁니다.

 

바울이 말끝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말은 상투적으로 듣지 마세요.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말 속엔 과거 율법 아래서 독립군으로 살았던 아픔들이 절절히 배여 있어요.

 

성도가 끝까지 보여줄 것은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발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니 죄인으로 사세요.

그래서 같은 죄인을 용서하세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하지 말고,

그래 당신이나 나나 모두가 도낀 개낀이지!

나도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고 당신도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고 사니 우리 모두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고 삽시다! 라고 하세요.

 

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보이지가 않습니까?

다 잘난 놈들만 천지를 가득 덮었어요.

죄인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작금의 한국교회에요.

 

이걸 어찌 애통해 하지 않겠어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께서 편지 하셨어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지막 때 교회를 상징해요.

지금 이 시대 한국교회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교회마다 부자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니 모두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마음엔 평강이 없고, 소망도 없고, 예수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안 믿으니 전부 벌거벗고 있다는 겁니다.

성화 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어찌 그 마음이 곤고하지 않겠으며, 예수님의 의(義)가 없으니 가난하고 벌거벗은 소경인 겁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돈 몇 푼에 속살까지 파헤치고 있는 창기들이에요.

본인이 창기인줄 알고 탕자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갈 것 아닙니까?

 

맏아들처럼 너무 너무 착하니 돌아갈 아버지 집이 없어요.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는 자가 없고 곡을 해도 울어주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발가벗기십시오.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앞에서 아직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랑할 의(義)가 있습니까?

그런 의(義)라면 밖에 던지세요.

절간에 중들에게나 주세요.

 

부디 예수님의 피라는 안약을 사서 발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을 살펴보세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신지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세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는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외치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눈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옵소서. 내가 탕자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예수님에 것이란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의(義)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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