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몸에 구속을 기다리면서

정낙원 2011. 2. 16. 01:51

 

몸에 구속을 기다리면서

 

롬 8:23절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몸의 구속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몸에 구속이란? 몸에 구원을 말합니다.

몸에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의 몸이 정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장이 났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몸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몸이 아니란 뜻입니다.

죄의 몸이에요.

그러니 원래 창조한 그 몸으로 되돌려 달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몸에 구속을 위한 복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복음이 뭐냐?

어원적으로 말하면 기쁜 소식이에요.

뭐가 기쁜 소식이냐 하면 그의 아들이 왔다는 겁니다.

 

그의 아들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아들이 뭔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한 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느냐 입니다.

 

우리에겐 각자의 기쁜 소식이 있어요.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겐 좋은 직장에서 연락이 오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대학에 원서를 낸 학생에겐 좋은 대학에서 입학합격 통지서가 오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주식을 산 사람에겐 자신이 산 주식 값이 오르는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 온 것이 기쁜 소식은 바울처럼 자기 몸이 범죄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 국한 된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그 아들을 자기백성들의 죽을 몸을 위해서 보냈습니다.

그럼 인간의 몸이 도대체 어떻게 고장이 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주어야만 합니까?

우리 인간들 스스로는 고칠 수가 없는가요?

애석하게도 성경은 그렇다고 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인간의 몸은 죄와 사망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사망을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죄와 사망에서 도무지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죽음을 이겨 보려고 종교도 만들고 과학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모든 인간들이 고민을 해 온 것은 어떻게 하면 안 죽을까 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고민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으로도 이건 해결이 안 되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야! 이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더라!

그러니 인간이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게 된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니 순순히 받아들이자고 합니다.

 

부처님도 이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했어요.

죽음을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이게 할까 궁구하다가 자연에서 그 이치를 찾았어요.

자연의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니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더라는 겁니다.

나무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에서 또 다른 생명을 티우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죽는다는 것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태어난 인생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습으로 윤회한다는 겁니다.

갖가지 생명으로 윤회하다가 억겁의 세월을 지나면 다시 인간으로 환생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생명은 윤회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했어요.

 

멋있지요.

그냥 죽으면 끝이다.

그러면 죽음이 절망이고 저주스러운 일이 될 수가 있지만 뭔가 소망이라도 주니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불교에선 죽음을 열반(涅槃)한다고 하는 겁니다.

불교적 열반(涅槃)이란? 모든 번뇌를 그치고 쉰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열반(涅槃)을 어원적인 의미로 보면 흙을 쟁반에 담아 빙빙 돌린다는 의미인데 이는 곧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 윤회를 시작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이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죽으면 다 좋은 곳으로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종교적 가르침이지 실제는 아니에요.

실제는 인간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이에요.

모든 인간은 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고 하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요.

이 험한 세상에서 사느니 죽어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인간들은 입술로는 극락왕생을 말하지만 그래도 저승보다 이생이 좋다고 하고!

잘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고 하면서 이생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사람들의 의식 속엔 종교가 말하는 극락왕생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극락왕생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니 종교적 수사(修辭)일 뿐이지 진리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눈만 뜨면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몸을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몸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절간이나 교회에서 소원 기도하는 것은 모두가 올해는 건강하게 잘 살아가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무얼 위해서 빕니까?

몸을 위해서 빌어요.

결국 몸 끌어안기입니다.

 

도대체 몸이 어찌 되었길래 자나 깨나 몸을 끌어안고자 합니까?

성경을 펴 봅시다.

성경에서 인간의 실존을 뭐라고 하는지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2장입니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의 실존을 말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

일생에 사망(死亡)에 매여 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죽음에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망이 왜? 왔느냐 하면 죄 때문에 왔다는 겁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이 주어졌어요.

결국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와 사망을 주관하는 세력이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가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인간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다 죽는 겁니다.

 

이걸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구조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이 구조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이 구조 밖으로 건져주어야만 합니다.

그럼 건져 주실 분은 죄와 사망이라는 영역 밖에서 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죄와 사망의 영역 밖에서 오신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인간과 동일한 몸을 입고 계시지만 죄와 사망 밖에 계신 분이에요.

그래서 구원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사망 권세로부터 빼내 주셨어요.

죽음에 벌벌 떠는 몸을 구원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 아들이 온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뭐냐!

그 아들이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빼내 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죄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뭘 빼내 줍니까?

몸이에요.

몸!

여기서 몸이란? 육신과 영혼 둘 다를 말해요.

 

사도 바울이 그러지요.

누가 이 “사망의 몸” 에서 나를 구원해 줄꼬! 라고 하지요.

이는 자기 몸이 지금 사망에 가두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와서 날 좀 이 사망에 가두어져 있는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비록 구원을 받았어도 몸에 구속을 바랐어요.

 

“누가” 좀 구원해 달라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몸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몸이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에서 빼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군가” 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몸을 구원키 위함입니다.

몸이에요.

몸!

이걸 간과하지 마세요.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 피가 성도의 몸에서 어떻게 능력으로 나타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말 할 때 “택하심”과 “부르심”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놓치면 안 되어요.

“택하심”은 구원을 말하고!

“부르심”은 왜? 무엇을 위해서 구원을 했느냐 입니다.

구원의 목적을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라고 할 때 첫 번째 의미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라는 것이 있어요.

이를 택하심이라고 합니다.

택하심이란?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를 각각의 그릇으로 선택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하신 것을 말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일방적으로 복에 조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이에요.

 

그래서 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이 지켜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에이! 나는 복에 조상 안 할래요! 라고 도망을 쳐도 안 되어요.

하나님이 반드시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걸 택하심이라고 해요.

이 택하심에는 인간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홀로 다 하셨어요.

 

이걸 출애굽 사건으로 봅시다.

출애굽을 할 때 온 세상이 죽음의 재앙을 당합니다.

이 때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어린 양의 피로 받았어요.

애굽을 일컬어 죄와 사망의 세력이라고 합니다.

이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신 것은 어린 양의 피에요.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받느냐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받아요.

여기엔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뺄 수가 없어요.

그러니 누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이건 변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당신 그 따위로 살아서 구원을 받겠어! 라고 하면!

그럼 여러분은 예! 제 꼬라지가 이래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이걸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받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취소시킬 수가 없어요.

 

비록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를 해도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구원은 베드로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선택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지켜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담 안에 있던 베드로를 예수님 안으로 불러들인 겁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구원론 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이러한 원리를 구조(構造)라고 해요.

한마디로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하늘에 속하였느냐! 땅에 속하였느냐!

구조 안에서는 어느 영역에 속하였느냐! 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조 안에서는 인간의 행위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속된 말로 개판으로 살아도 구원과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살으나 저렇게 살으나 우리가 바라 볼 것은 오직 예수님 피 뿐이다! 라고 살아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식의 행위로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택한 자는 절대로 망하지 않아요.

택하심이라는 구조 안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구조 안에서의 믿음을 신앙의 근거로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마귀의 참소를 이길 수 있어요.

마귀는 항상 인간의 행위로 참소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너 그따위로 살아서 구원을 받겠느냐 라고 하면!

그래 마귀야! 내가 이렇게 저렇게 살아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어! 그래야 해요.

이게 택하심에 능력이에요.

 

그런데 구원은 이 택하심이라는 구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엔 부르심이 있어요.

이건 무엇으로 부르심을 입었느냐 에요.

다른 말로 왜? 구원 했느냐 에요.

무엇 하려고 구원을 했느냐가 남아 있어요.

 

예수님이 바울을 택하시고 아나니아에게 보냅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아니 예수님!

이 놈은 악질 중에 악질입니다.

얼마나 많은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였는지 압니까! 라고 항의하자!

예수님이 응! 이 놈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서 예수를 증거하다가 자기가 예수쟁이들을 핍박한 그대로 핍박받게 하려고 택하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바울을 선택한 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구원을 한 목적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자기 피를 흘리셨잖아요.

이걸 값을 주고 샀다고 합니다.

왜? 값 주고 샀습니까?

뭔가 써 먹기 위해서 에요.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엔 다 목적이 있는 겁니다.

 

나 구원 받았다!

땡!

그런게 아니라구요.

나 구원 받았다!

이제 내 마음대로 살래!

그런 택하심과 부르심은 없어요.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를 위하여 부르셨다고 하는데 무슨 자유냐 하면 종노릇하는 자유라고 합니다.

나 자유다 그러면서 자기 몸뚱이 좋은 쪽으로 살지 말고 남에게 종노릇하라고 불렀대요.

한마디로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이걸 부르심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끄집어냈어요.

여기에 왜? 끄집어냈느냐가 있어요.

죄와 사망에서 의(義)와 거룩으로의 부르심을 입었어요.

마귀의 종에서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한마디로 죄 짖고 살던 놈을 의롭게 살라고 부르셨어요.

그러니 죄에서 건져 낸 것은 거룩하게 살라고 건져 냈다는 말입니다.

장소적인 의미로 본다면 가나안으로 가자고 애굽에서 끄집어 낸 겁니다.

 

베드로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벧후 1: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즉 이미 예수 안에 들어 온 자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하심이라는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고 신의 성품에 참예키 위함이라고 합니다.

신의 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들이에요.

그런데 신의 성품이 없는 자는 소경이고 죄에서 깨끗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소경이란? 어둠에 있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예수님의 성품이 나오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못 받은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너희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 각성시키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왜? 이런 편지를 쓰는가 하면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 사상이 교회에 깊숙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란? 쉬운 말로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이에요.

육은 무익하고 영만 거룩하기 때문에 구원이란 지식으로 깨달으면 된다고 하였어요.

이게 어떤 식으로 발전을 하였는가 하면 육신의 쾌락주의로 발전했어요.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았는데 이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건 예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구원이에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 구원받았다!

땡!

그러는 겁니다.

나 구원 받았다!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산다!

그랬어요.

이건 택하심만 있고 부르심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마다 개판으로 사는 교인들이 생겨나서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교회에 분란을 일으켜서 교인들끼리 파당이 지어져서 반목과 갈등이 유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건 이단이라고 하여서 그토록 싸운 겁니다.

이러한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서신서마다 이방인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도 여기에 포카스가 맞추어져 있어요.

의와 거룩으로의 부르심에 관하여 말하려고 해요.

여기에 우리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나타나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죄와 의가 어떻게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죄가 어떻게 이 부르심을 방해하고 반대로 성령은 어떻게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는지 살펴볼까합니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여러분의 열심과 충성을 끄집어내어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전 이렇게 깨닫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 생각에 동의가 되지 않으면 흘러 버리면 되어요.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최종적으로는 여러분이 소화를 하여야 해요.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깨우침을 갖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을 한다고 해요.

그러므로 자기가 믿는 신앙이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피를 말하지만 그 피가 우리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건 지식이에요.

신앙이 지식이 되면 교만해지고 말쟁이가 되어요.

혼자 복음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자기가 심판자로 활동을 해요.

이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아니고 마귀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에요.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자들을 소경이고 어둠에 있는 자라고 했어요.

가짜로 구원을 받은 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지요.

먹고 마시라는 것은 양식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우리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 몸이 밥을 먹고 힘을 얻어서 일을 하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로서의 삶이 몸으로 나타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럴 때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십자가 도(道)가 머리 속에 지식으로만 쌓이면 삶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입으로만 예수 믿어요.

 

야고보 사도는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어요.

이런 믿음을 가진 자를 귀신의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했어요.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귀신도 믿음이 있어요.

무슨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에요.

영지주의자들의 믿음이 바로 귀신의 믿음이에요.

 

죽은 믿음이란?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을 말해요.

즉 입으로는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의 피를 말하지만 그 십자가의 피가 자기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밥을 먹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죽은 자이지 산 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십자가가 어떻고, 피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하면서 말은 현란하데 행실이 십자가 정신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 죽은 믿음이고 가짜인 겁니다.

그 사람은 지금 영지주의 빠져 있는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구원은 생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구원을 받은 자는 그 몸에서 구원 받음에 대한 어떤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기쁘면 기쁨으로 나타나고, 감사하면 감사함으로 나타나요.

이런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인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온 몸이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옥에 갇혀서도 그 안에 예수의 살과 피가 지식이 아니라 양식으로 먹어짐이 있었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가 나온 것입니다.

전혀 찬송과 기도가 나올 수 없는 환경임에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기 때문에 그것이 힘이 되어 고난을 이기고 원수를 용서하는 능력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자의 삶에 모습이에요.

이렇게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살아진다는 말입니다.

살으라고 하면 행함이 되지만 살아지는 것은 믿음이에요.

그러니 오늘 말씀은 잘 이해하면서 들으세요.

잘못 들으면 행위를 가르친다고 오해하게 되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라고 하면 그건 행위가 되어요.

그건 인간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하십니다! 라고 하면 그건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고 은사에요.

성도의 신앙생활은 은사에 속한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니에요.

이걸 잘 구분하세요.

 

제가 때론 나무랄 때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복음적으로 살지 않을 때 그게 무슨 복음이냐 라고 책망을 하는 겁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복음 적인 행함이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없는 사람들은 이걸 행위주의라고 생각해요.

 

전 지금까지 행위를 가르친 적이 없어요.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을 한 것뿐이에요.

다만 글의 특성상 예수의 피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여 결국 우리가 바라 볼 것은 예수의 피뿐이라는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행함을 말한 적은 있어요.

이는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은혜를 드러내고자 반어법(反語法)으로 말한 것입니다.

 

글을 중간 중간 한 단락을 잘라서 말하면 행위로 보게 되지만 전체 내용은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을 알게 될 겁니다.

글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간파 할 겁니다.

이걸 못 잡으면 글을 잘 못 본 거에요.

 

물론 못 깨달으면 오해하겠지만,,,

오늘의 말씀도 잘못 들으면 오해하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하고자 글을 이렇게 전개하는지 잘 따라오세요.

글을 어떻게 전개하고 어디로 끝을 맺는지를 잘 살피세요.

 

설교가 길다고 해서 고등어 토막 잘라 먹듯이 중간 중간 잘라 읽고 예단하지 마시고 찬찬히 잘 음미하면서 읽으세요.

그래야 양식이 되어요.

설교를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설교가 내 양식이 되어서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야 해요.

 

왜? 이런 말을 사설로 길게 하느냐 하면 오늘 주제가 몸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부득불 몸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가지고 십자가 정신으로 이야기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을 이야기 하여야 하기 때문에 잘못 들으면 행위로 들려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유언을 잘 기억하고 들으세요.

베드로는 지금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피 마셨느냐!

그럼 신의 성품에 참예하라는 말을 흘러 듣지 마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구원이 뭐냐를 알아야겠지요?

구원이란? 몸이 구원을 받는 겁니다.

죄와 사망에게 가두어진 몸을 죄와 사망이 가둘 수 없는 몸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해요.

 

초반부터 이상하지요.

몸을 구원한다고 하니 생소하지요.

사고의 발상에 전환을 가지고 이해하면 어려울 것도 생소할 것도 없어요.

 

구원을 일컬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걸 성령으로 거듭남이라고 해요.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피조물이란? 몸을 말해요.

 

새로운 피조물이란? 헌 피조물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헌 피조물은 옛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몸은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하는 몸을 말해요.

그럼 새로운 피조물은 새 사람으로서 죄와 사망을 이기는 몸을 말하겠지요.

그래서 구원을 몸에 구원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온전한 몸은 땅에서 난 육신이라는 몸이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몸을 덧입어야지만 가능해 집니다.

그 때가 언제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

이걸 부활의 몸이라고 해요.

 

부활의 몸이라야 천국에서 죄가 없는 몸으로 예수님의 신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예수님이 죄인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시고 자기의 신부가 되는 성도의 몸을 구속하는 일은 곧 모든 성경을 통하여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몸이 죽게 되었고 예수님은 선악과로 죽은 몸을 생명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로 죽은 몸을 생명과로 살려내는 일을 몸의 구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탄식하면서 몸에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어요.

 

롬 8:23절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몸에 구속이란? 죄 없는 몸으로서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니 바울은 더 이상 죄가 지배 할 수 없는 그런 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몸이라야 비로서 창조의 목적대로 어린 양의 신부로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말은 현재의 몸은 아니란 말이지요.

잘 들으세요.

지금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언제입니까?

구원 받고 난 후에 하는 것이지요.

성령으로 거듭나고 난 후에 하는 고백이란 말이에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후에 토해내는 고백이란 말입니다.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몸이라고 하여도 온전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현재의 몸으로 하나님 뜻을 감당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담 안에서 나온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몸도 온전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없어요.

예수 믿어도 죄를 짓고 우리의 몸이 죽는 것도 다 이런 이치 때문이에요.

성령 받으면 죄 안 짖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성령 받아도 죄를 지어요.

아니 지을 수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몸의 한계에요.

 

그래서 바울은 탄식하면서 간절하게 죄 안 지을 수 있는 몸에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 땅에선 불가능해요.

죽으면 주어져요.

결국 바울은 하나님 나 빨리 데려가 주세요!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이런 기도를 하고 살아요.

 

비록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지금의 몸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몸은 아니에요.

몸에 성령이 거하고 계시지만 몸이 성령의 요구를 감당해 내지를 못해요.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몸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짖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감사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우리 몸은 성령을 받기 전과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다른 반응이 나타나요.

과거엔 죄를 자각하지 못하였는데 이젠 자각을 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예전처럼 몸을 방탕과 방임에 내어 맡기지 않고 추스르게 된단 말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자꾸만 몸이 이끄는 대로 살지 못하도록 제어하게 되어요.

 

쉬운 예로 말할게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마치 잘 돌아가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버벅 거리듯이 예전과 같이 잘 돌아가지 않고 뭔가 자꾸 오류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죄를 지어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는데 이젠 뭔가 뒤통수가 땡긴단 말이에요.

뭔가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에겐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게 죄라는 것을 알아요.

죄를 미워함이 생긴다구요.

 

비록 헌 몸이긴 하지만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순간 순간 살게 하세요.

베드로의 당부처럼 신의 성품이 간헐적으로 나오기도 해요.

그럼 옛 사람의 모습을 잠시나마 벗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요.

이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해요.

성령이 간섭하면 천국백성으로서의 맛을 내요.

물론 맛보기에 불과하지만 말이에요.

맛보기를 하게 함으로서 우리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더욱 더 몸에 구속을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린 여기서 왜? 인간의 몸이 이렇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 온 것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입니다.

처음 지음 받은 아담은 빈 그릇과 같아요.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생명과를 먹었으면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영생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살 수가 있었어요.

그럼 죄나 죽음을 모르고 살았을 겁니다.

아담이 만약에 처음부터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에 죽으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어요.

 

인간이 죽은 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니에요.

순전히 인간 잘못이에요.

하나님은 아담에게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어요.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엄중히 말했어요.

그럼에도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만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 졌을까요?

우리들 상식으로는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고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려고 하면 에헴~ 하면서 네 이 놈!

그랬으면 아무리 뱀이 꼬셔도 안 따 먹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마치 다 아시고 묵인 하시는듯 하셨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찾았잖아요.

이는 다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알면서 막지 않았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에 나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나라란? 국토와 국민과 주권이 있어야 해요.

즉 땅과 백성과 다스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의 나라인 천국을 만드십니다.

 

그리곤 거기서 살아갈 백성을 창조합니다.

아들과 살아갈 백성이라고 한다면 아들과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에 다스림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본(本) 따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린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은 숨어 계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알려주어야지만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런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앞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 계세요.

누군가 하면 예수님이세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에 본체(本體)시라고 했어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태초의 인간은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에 본체시니까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예수님과 같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 같아요.

똑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가 한 가지 다른 것은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달라요.

 

우리 속엔 마귀의 것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 속엔 하나님의 것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 속엔 죄(罪)가 담겨져 있고 예수님 속엔 거룩이 담겨져 있어요.

죄(罪)가 죽음이라고 한다면 거룩은 생명이에요.

그러니 인간은 죽이는 일을 하지만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을까요?

 

이는 역(逆)으로 천국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천국을 보니 거기선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린 양의 신부로 있는 것을 보았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예수님의 신부란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기 형상으로 자신의 신부를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자기와 같은 몸이 필요하였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형상으로 몸을 만드신 겁니다.

그 몸 속에 예수의 생명을 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 속에는 죄로 인하여 마귀의 생명이 담기고 말았어요.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명과 정 반대인 마귀의 생명이 담기고 만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아니고 마귀의 몸이 되고 만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린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몸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신부가 될 성도들의 몸을 구원하려고 오신 겁니다.

자기 신부들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몸과 몸을 맞바꾸신 겁니다.

 

죽음이란? 몸이 죽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몸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신부가 될 성도들의 죽은 몸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으로 십자가에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 몸이 죽어서 자기 신부들을 살려 냅니까?

이는 자기 신부들의 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의 몸과 의에 몸으로 맞바꾼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의 몸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의 죄에 몸은 예수님이 받아서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이걸 세례로 말해주고 있어요.

세례란? 연합을 말해요.

세례를 받는 사람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 속으로 연합이 되어요.

예수님이 죄 없는 몸으로 죄 있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죄인에게 연합이 되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은 죄인이 되었어요.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죄값을 치룹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인하여 죄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합니다.

죽었다가 부활을 했으니 이젠 죄의 몸이 아니에요.

자기백성들의 죄 값을 짊어지고 대신 죽었던 예수님은 죄인으로 죽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와 상관이 없는 성령의 몸으로 부활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역(逆)으로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백성들은 죄인의 몸에서 성령의 몸으로 연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죄의 몸이 아니고 의에 몸이 된 거에요.

원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殿)이라고 하는 겁니다.

비록 성도의 몸은 겉으로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다른 몸이에요.

성령이 거하는 몸으로서 새로운 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넘겨 준 것은 대속이에요.

대속(代贖)이란? 값을 대신 치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상관없는 자신의 몸을 사망에 넘겨주고 대신 죄 아래 있는 자기 신부들의 몸을 살려내시려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죽이신 겁니다.

 

이게 무지무지하게 중요해요.

몸을 기억하세요.

몸!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대신 주고 죄 아래 죽어 있는 자기 신부들의 몸을 대신 살린 것은 창세전 언약에 담겨진 핵심 내용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죽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자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서 자기 신부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 주세요.

이건 아무리 많이 들어도 또 들어야 할 내용이에요.

 

에베소서 1장을 한 번 볼까요.

 

엡 1:4-10=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기 전에 우리를 예수 안에서 택하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것은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구원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한다고 했어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백성이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애초부터 십자가 사건을 겨냥하고 있는 언약이었어요.

 

자기 백성들의 몸이 무엇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 받지요.

몸이 건짐 받아요.

몸이!

 

자 보세요.

무엇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까?

몸이지요.

 

그렇다면 자기 백성의 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야 합니까?

죽음이지요.

몸이 죽음에 가두어져 있어야 예수님의 몸이 죽어서 건져 줄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반드시 몸으로 와서 죽어야 하는 이유도 자기 신부들의 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을 하려면 그럼 누군가가 자기 백성의 몸을 죽음에 가두어야 하겠지요.

이 일이 동원된 놈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뱀이에요.

하나님이 뱀(마귀)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해서 사용하신 겁니다.

그럼 마귀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어야 해요.

 

하나님 입장에선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해서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게 된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겁니다.

마귀가 자기 역할을 잘 해 준 것이에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죄는 인간이 지은 겁니다.

그래야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해서 구원해 준다고 하면 그건 은혜가 될 수 없어요.

그건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에요.

하나님이 말렸는데도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어야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게 되었는지 창조의 대략을 살펴봅시다.

창세기 2장입니다.

 

창 2:7-18=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어요.

그리고 아담에게 선악과와 생명과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으니 결코 먹어선 안 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리곤 생명과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어요.

 

이렇게 되면 선악과 속엔 죽음이 담겨져 있고!

생명과 속엔 영생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한 것은 인간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귐을 갖고자 함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에요.

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천국에서 신랑과 신부로 사는 것이라고도 해요.

 

장차 예수님과 성도가 신랑과 신부로서 살아갈 것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려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 하신 겁니다.

먼저 아담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곤 나중에 아담 안에서 여자를 창조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먼저이고 성도가 나중이며 예수님 안에서 성도가 나올 것을 말해요.

 

그럼 성도가 어떤 식으로 창조가 되는지 여자가 창조되는 모습을 통하여서 살펴봅시다.

 

창 2:21-2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엿새째 되는 날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합니다.

그리곤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서 여자를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 되지요.

 

이걸 예수님과 성도로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여섯째 날인 금요일 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으시고 교회를 만드십니다.

물과 피를 쏟았다는 것은 마치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물과 피를 쏟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과 같아요.

성도는 예수님에게서 나왔어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의 몸이라고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내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제가 몸을 강조하는 이유를 아셔야 해요.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란? 내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자기 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해요.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구원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려고 택하시고 부르셨어요.

 

그러니 바울은 자기 몸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았어요.

이건 바울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가 살아야 할 것을 바울을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다시 창조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자 아담은 대뜸 자기 몸에서 나온 자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리곤 여자를 자기 몸속으로 끌어당겨서 한 몸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걸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해요.

두 몸이 아니라 이제 한 몸이 되었어요.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이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해요.

원래 하나였다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합하는 것을 말해요.

이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하늘로 이끄신다고 했어요.

누가 끌어당기는가 하면 낳아준 자가 자기 안으로 끌어 당겨요.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긴 겁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요.

이걸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세요.

그래서 만물이 주께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구원이란? 신랑이신 예수님에서 나왔던 성도가 신부가 되어서 다시 신랑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해요.

 

암튼 아담과 하와는 한 몸으로 에덴동산에서 얼마동안인지는 모르지만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아담은 하와에게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저기 있는 선악과는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어요.

이 때 까지만 해도 아담이나 하와는 아직 선악과나 생명과 중에 그 어떤 것도 먹지 않았어요.

그동안 다른 실과를 먹고 산 겁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엔 선악과와 생명과 말고 다른 실과도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다가옵니다.

 

창 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서 미혹을 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말로 미혹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참말로 너희들에게 동산 나무에 모든 실과들을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아니야!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저기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으면 큰일 난다고 했어!

우리 신랑이 말하기를 저건 먹으면 죽으니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했다고 손 사래질을 합니다.

 

이에 뱀이 무슨 소리!

아니야! 죽지 않아!

하나님이 저걸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저걸 먹으면 너희들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미혹을 합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나서 선악과를 보니 참으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고 맙니다.

그리곤 그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합니다.

 

우린 여기서 아담의 행동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 즉 신랑과 신부의 밑그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 동안 먹지 않았던 겁니다.

 

알다시피 아담은 여자 없이도 한 동안 홀로 살았어요.

그 때도 뱀은 에덴동산에 있었어요.

그럼 뱀이 아담에게도 꼬셨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뱀이 남자가 없는 틈을 타서 여자를 꼬신 것을 보아서 그렇게 유추해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담이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자 자기도 여자와 함께 죽음으로 뛰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동안 뱀의 꼬드낌에 안 넘어 갔다고 한다면 여자가 주는 것도 받아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여자 혼자 죽게 내 버려두어야 했어요.

그런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여자가 주는 죽음이 담긴 선악과를 덜렁 받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자가 자기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자기백성의 밑그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여자의 죽음에 뛰어든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 것의 예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위하여 죽으신 것도 자기백성들이 자기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처럼 죽은 겁니다.

 

예수님은 안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죽으셨어요.

실제로 겟세마네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죽기 싫어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이 잔(盞)을 내게 옮겨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럼에도 결국엔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는 자기 몸에서 나온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와같이 아담도 안 죽을 수 있었는데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위해서 죽음에 넘겨준 것입니다.

결국 아담의 죽음 속엔 창세전 언약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물론 아담이 죽어서 여자가 살아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담이 여자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씨눈과 같은 형태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예수님과 성도의 표상으로 본다면 아담의 죽음으로 하와가 살아난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되면 이 땅에 창세전 언약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어떻게 펼쳐지는가 하면 생명을 주는 자가 생명을 받을 자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서 죽어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살아났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도는 창세기에서부터 면면히 흘러왔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 역사 속에는 창세전 언약의 씨눈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담겨져 있는가 하면 언약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로 표상이 되는 인물이 희생당함으로서 죄인이 살아나는 구도로 펼쳐진다는 말입니다.

바로가 꾼 꿈처럼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으로 전개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은 의인이 죄인에게 죽임 당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어요.

 

그래서 아벨을 시작하여서 이런 구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희생당하였어요.

결국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죽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희생을 도리어 용서하는 방식으로 가인을 살려줍니다.

가인이 자기 죄 벌이 너무 무겁고 두렵다고 탄원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죽음으로부터 면하게 해 줍니다.

가인의 삶에 바탕에 아벨의 피가 깔려 있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노아 시대에는 정결한 제물이 희생당함으로서 부정한 것들이 살아나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에겐 흠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이 살아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항상 정결한 제물은 부정한 것을 위하여 죽임 당하였어요.

그럼 부정한 것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결하다는 것은 죄 없다는 말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항상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던져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죄인이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후손을 상징하는 요셉도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다윗도 사울로부터 미움을 받고!

예수님도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죽임당하여 자기 백성을 살려낸 것입니다.

 

이러한 맥(脈)은 언약 자손에게 멍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운명처럼 항상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는 삶으로 초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잠시 후에 하나님이 성도의 몸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로 더 상세하게 살펴볼게요.

 

그럼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의 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몸에 이상이 왔어요.

갑자기 하나님이 두렵고 정신적으로는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어요.

몸에 죽음의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육체적으로는 병들고 죽음이 찾아 왔어요.

 

그리고 삶 속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귀적인 본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마귀적 본성이란? 하나님을 싫어하고 남을 죽이고 해치는 것입니다.

 

죄가 몰고 온 인간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바울의 증거를 통해서 들어봅시다.

 

롬 1:23-31=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걸 십계명에선 다른 신(神)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몸뚱이는 자기 쾌락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음욕이 불 일 듯 일어나서 순리(順理)를 역리(逆理)로 바꾼다고 합니다.

이는 창조 원리를 역행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지음을 받은 인간이 도리어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어요.

이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해서 남을 죽이고, 해치고, 빼앗고, 사기치고, 미워하고, 싸우고, 교만하고, 부모를 치는 패역하고, 무자비하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을 다 한다고 보면 되어요.

사도들의 서신서에선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정욕과, 음란과, 포학과, 훼방과, 악함과, 더러운 말과, 불의와, 추악과, 미움과, 이간질과 좌우지간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을 다 포함되어 있어요.

이걸 십계명에서 이웃을 해치는 모습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어디로 나타냅니까?

몸이에요.

몸!

 

마귀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자기의 속성을 드러내게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죄인의 몸은 죄를 표현해 내는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말할 때 인간의 타락한 삶으로 말하는 겁니다.

몸은 죄의 모습들을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자 보세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몸 속에서 남을 죽이고자 하는 악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를 보면 적개심이 들어요.

죄가 가인을 주장하니 아벨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게 죄인 줄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어서 죄가 몸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가르쳐 주었어요.

이게 죄라고 알려 주셨어요.

죄가 이런 현상들을 나타낸다고 알려 주셨어요.

인간관계 속에서 남을 해치고 빼앗고 사기 치는 것이 죄라고 알려주었어요.

남을 해치고 빼앗고 사기 치는 것은 모두가 자기 몸뚱아리 하나 살자고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을 땐 예수님의 신부를 겨냥해서 만들었어요.

그럼 예수님의 신부가 될 인간 속엔 예수님의 성품들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범죄로 인하여 마귀의 성품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몸에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들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몸에서 내 목구멍이 밥을 넘기기 위해서 남에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을 빼앗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죄가 자기 배를 채우려고 남에 것을 도적질 하고!

죄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죄가 내 쾌락을 위해서 남의 아내를 빼앗고!

죄가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 남에게 사기를 쳐요.

죄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짓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흔한 현상들이에요.

이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와 상관없이 일어나요.

죄인에겐 하나님도 복음도 교회도 내가 살고자 하는 이용대상일 뿐이에요.

목사나 교인이나 하나같이 나 살기 위해서 예수도 이용하고 복음도 이용해요.

 

교회도 내 밥 먹는데 이용의 대상일 뿐이에요.

목구멍이 포도청이에요.

복음도 내 목구멍에 밥을 넘기기 위한 수단이고!

십자가 피도 내 목구멍에 밥 넘기는 것보다 우선일순 없어요.

 

죄가 이런 것을 몰고 온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 속에 마귀적 성품들이 들어 있어요.

이건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선천적으로 타고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요.

이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와 상관이 없어요.

목사냐 교인이냐도 상관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같아요.

 

어린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목사도 있고!

교인도 있고!

절간에 중들도 있고!

작두타고 푸닥거리하는 무당에게도 있어요.

그래서 죄인이 살아가는 곳을 지옥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죄가 토해내는 모습들입니다.

 

이런 것을 세상에서는 비윤리 비도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죄가 몸을 장악하면 반드시 비윤리와 비도덕적 인간의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옛 사람이나 새 사람이나 동일해요.

죄는 항상 인간의 몸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제동을 걸기 시작을 합니다.

자기백성들에게 이러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구약에선 십계명으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금하고!

신약에서도 사도들이 이방인의 행실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에 행실을 죽이라고 하고!

몸에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하고!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몸이 죄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죄(罪)는 몸에서 마귀적 본성으로 나타나지요.

그럼 의(義)는 예수님 본성으로 나타나겠지요.

마귀와 예수님은 상대적이잖아요.

마귀는 죽이는 자이고 예수님은 살리는 분이에요.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과를 먹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삶 속에서 생명과의 속성이 나타나겠지요.

몸에서 생명의 속한 것들이 나올 것입니다.

생명과의 속성은 예수님 마음이고 예수님 성품이에요.

이걸 신의 성품이니 또는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은 예수님의 신부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예수님과 같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 있는 생명과를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었으면 예수님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잘 살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하늘에 몸을 덧 입고 천국에 가면 이런 성품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부로 만든 인간이 어떻게 되었나요?

선악과를 먹고 마귀의 마음을 소유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몸으로 마귀의 속성을 그대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이 남을 해치고 죽이는 모습이라고 했어요.

자기 몸에 쾌락을 쫓아가고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예수님의 신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성품과 마음을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신랑과 신부로 살수가 있어지지요.

예수님과 마귀가 살순 없잖아요.

예수님의 속성은 살리는 것이고 마귀의 속성은 죽이는 것이잖아요.

 

이 둘이 살면 맨 날 의견 충돌이 일어나 싸울 것 아닙니까?

그럼 집구석이 어떻게 되겠어요.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살 수 없겠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함께 할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마귀의 속성을 죽여야 하겠지요.

마귀가 장악한 몸을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런 몸뚱아리 교체 작업 하는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는 방식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대신 하셨어요.

이제 이 원리를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 원리를 적용하려고 그 속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그런데 성령을 어디다 보내주십니까?

성도의 몸이지요.

그래서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殿)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비록 몸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옛 몸이지만 그 속에 새로운 성품이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겁니다.

품으란 말은 준 것을 잘 간직 하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 안엔 아직도 옛 주인인 마귀의 성품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을 서로 우리 몸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웁니다.

 

암튼 예수님은 자기 몸을 죽음에 넘겨주고 자기백성들의 몸을 값으로 샀어요.

뭘 사왔다고요?

몸입니다.

몸!

 

그런즉 너희 몸으로 너희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그 증표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셨지요.

그럼 성령이 성도의 몸 안에 와 계시지요.

원래 우리 몸 안엔 마귀가 준 성품만 가득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성도에게 마귀의 성품과 정 반대인 예수님의 성품을 심어 놓았어요.

 

이건 마치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과 같다고 했어요.

잘 돌아가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이상하게 버벅 거리지요.

원래대로 작동이 되지 않고 바이러스가 오류를 일으키잖아요.

심지어 컴퓨터를 다운시키기도 하고 작동 불능 상태가 되게 하기도 해요.

이는 한 컴퓨터 안에 두 프로그램이 충돌을 하기 때문에 잘 안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의 몸에 성령이 들어오면 자기의 원함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요.

성령이 마귀의 몸에 바이러스처럼 들어와서 우리 몸을 원래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몸은 잘 돌아가던 컴퓨터와 같이 마귀가 심어준 프로그램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몸은 죄 짓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했어요.

죄 짓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고 쉬웠어요.

죄를 지어도 전혀 부끄러움도 없고 당당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우리 몸에 성령이라는 강력한 바이러스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둘이 자꾸만 충돌하게 만든 겁니다.

성령이라는 바이러스가 자꾸만 우리의 원래 습성대로 살지 못하도록 오류를 일으키는 겁니다.

어 이상하다!

예전에는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고 남을 해치는 마귀적인 습성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고 전혀 거북스럽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뭔가 찜찜하고 부자연스러운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엔 남을 헐뜯고 욕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성령이 들어오고부터 죄를 지으면 뭔가 찜찜한 겁니다.

 

가장 쉬운 예로 말할게요.

예수 믿기 전에는 술 먹고 담배피우고 도박하고 룸싸롱 다니고 춤추러 다니고 바람피우고 나쁜 짓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보편적인 일이라 당연하다고 여기고 스스럼없이 했어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후로는 이러한 일을 하면 이상하게 찜찜해요.

예전처럼 기분이 좋지 않아요.

뭔가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고 나면 왠지 안타깝고 한단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왜?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찜찜한가요?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간섭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하게 되는 겁니다.

나중엔 하기 싫어져요.

왜? 그런가요.

이는 성령이 바이러스처럼 우리 속에 들어와서 가치관의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는 말이니 참고적으로 들으세요.

여기서 그럼 술 먹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그럼 술 안 먹으면 죄가 아니겠네요? 라는 식으로 따지지 마세요.

그건 누구 안이냐 라는 택하심이라는 구조론으로 이해하여야 할 다른 문제이니까요.

 

암튼 성도 안에 성령이 임하면 예전에 느끼지 못한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이 심어 놓은 성령이라는 바이러스 때문이에요.

성령이라는 바이러스가 마귀와 정반대인 예수님의 성품으로 살라고 우리 몸을 툭툭 건드려요.

하지만 우리 몸은 예수님의 성품을 온전히 담아 낼 수가 없는 고장 난 몸이에요.

그러니 곤고한 겁니다.

 

하지만 이 두 성품은 끊임없이 싸워요.

두 주인이 서로 몸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주인의 성품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몸은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마귀의 것을 그려내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것을 그려내든지 해야 해요.

마귀의 것이 그려지면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예수님의 것이 그려지면 남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려져요.

 

마귀의 성품은 자기 몸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육신의 소욕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성품은 타인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성령의 소욕이라고 해요.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몸은 쾌락을 쫓아가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고!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몸은 예수님처럼 남을 위하여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지요.

그럼 십자가 피로 구원을 얻은 성도라고 한다면 몸으로 누구의 속성을 드러내야 합니까?

예수님의 속성이지요.

십자가 피를 마신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생명에 흐름이 나타나야 하겠지요.

그래야 그 속에 성령이 계신 성도에요.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 마음대로 살면 안 되겠지요.

만약에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서 자기 꼴리는대로 살아진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옛 사람의 습성을 죄라고 지적을 해요.

자꾸 태클을 걸어주어요.

예수님의 속성을 드러내라고 우리 몸을 값으로 사서 성령을 주셨는데 마귀의 속성을 드러내면 안 되잖아요.

원리적인 말을 하고 있으니 인내하면서 들으세요.

 

예수님과 마귀는 서로 몸을 차지하고자 싸워요.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역에 귀신들린 자를 만나지요.

이 때 귀신이 뭐라고 합니까?

왜? 아직 때도 아닌데 왔느냐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그 몸에서 나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 나오라고 합니까?

몸이지요.

예수님이 왜? 귀신더러 그 몸에서 나오라고 합니까?

그건 예수님이 그 몸속으로 들어가시고자 함입니다.

 

그러자 귀신이 발악을 합니다.

귀신이 몸에서 나오면 갈 데가 없어요.

귀신은 몸이 없으면 활동을 못해요.

죄는 반드시 몸을 통하여서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몸이 없으면 병이 생기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몸이 없으면 죄가 활동하지 못해요.

죄는 반드시 우리 몸을 통하여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제발 어디 들어갈 몸을 달라고 요구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돼지에게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에 귀신이 돼지 몸에 들어가 몽땅 물에 빠져 죽었어요.

마치 요즘 구제역 걸린 소와 돼지를 땅에 묻어서 구제역이라는 병을 죽이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과 마귀는 우리 몸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은 전쟁터이겠지요.

바람 잘날 없겠지요.

맞아요.

전쟁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은 몸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왜? 탄식합니까?

몸이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몸이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왜냐하면! 몸 안에 원래 주인인 마귀가 가나안 원주민처럼 떡하니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은 늘 가나안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몸에 주인이 마귀 혼자 일 때는 갈등이 없었어요.

그냥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면 되었어요.

그런데 마귀와 정 반대의 성품을 가진 예수님이 들어오신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진을 치고 육신의 소욕과 상령의 소욕 간에 일전을 치루는 겁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자기 몸뚱이는 죄 짓는 일에 단련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자꾸만 간섭해 대니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누가 이 “사망의 몸” 에서 나를 좀 구원 해 줄 수 없느냐고 소리를 치는 겁니다.

뭘 구원해 달라고 합니까?

몸이에요.

몸!

 

무슨 몸입니까?

사망의 몸이지요.

왜?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까?

성령이 몸으로 뭔가 그려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몸은 고장 난 몸이잖아요.

그러니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잘 안 되는 겁니다.

 

바울이 자기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자기 속에 또 다른 법이 있는데 이 놈은 마귀의 법을 즐거워해요.

그래서 자기 몸을 자꾸만 마귀의 것들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고장 난 몸에서 나를 구원해 줄 자가 없느냐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만 섬기는 그런 몸을 달라고 몸에 구속을 기다렸어요.

여기서 구속이란? 해방을 말해요.

벗어남을 말해요.

죄가 주관하는 몸에서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무슨 구속을 기다린다고 합니까?

몸에 구속이에요.

몸!

 

이런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몸에 구속을 기다리는 겁니다.

즉 온전한 몸으로서의 구원을 기다리는 거에요.

 

그러자 하나님은 잠시 후에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즉 이 몸이 죽으면 새로운 몸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우리 몸은 원래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몸을 마귀에게 넘겨주고 우리 몸을 샀어요.

이게 십자가의 죽음이에요.

 

이제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으로 산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자기 흔적을 새겨 놓은 겁니다.

성도의 몸엔 전혀 낯선 성질이 들어 온 겁니다.

자기에게 없던 것들이 들어와 있어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몸으로 어떤 모습을 토해내야 합니까?

예수님의 성품이지요.

예수님의 성품이 어떤 겁니까?

생명을 살리고 자기를 비워서 남을 섬기는 것이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전부 자기를 위하여 움켜잡고 살았어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전혀 다른 모습들이 나타난 겁니다.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을 했어요.

 

지금까지 자기를 위하여 움켜잡고 살던 것에서 내어 놓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에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죄 아래선 볼 수 없는 희귀한 현상이에요.

우린 내 목구멍에 밥을 넘기기 위해서 남에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을 빼앗던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자기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을 빼내 남에 목구멍에 넘겨주고 있어요.

 

아주 역설적이지요.

이게 성령이 토해내게 하는 능력인 겁니다.

이건 아주 생경한 모습이에요.

 

성령 받기 전에는 이기주의로 살았는데 성령을 받고 난 후에 이타주의로 변한 것입니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건 강요나 협박에 의하여 나타난 현상이 아니에요.

자발적이에요.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마귀가 움직이던 마음에 강력한 바이러스가 되어서 오작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성령은 마귀의 몸 입장에선 아주 나쁜 바이러스와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게 자꾸만 트러블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몸이 마귀의 성품을 토해내지 못하고 순간순간 예수님의 성품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마귀가 장악하던 몸에 트러블을 일으켜서 예수님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성령 받은 자에겐 자연스럽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은 예수님 마음이에요.

그럼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당연히 성령이 일하는 흔적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흔적이 뭡니까?

성령의 열매에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하지요.

육신의 소욕을 버리라고 하지요.

행하라는 것은 성령이 시키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시키는 일을 무엇으로 행합니까?

몸이에요.

몸에서 마귀의 모습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게 싸우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머리로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에요.

실제 죄사함 받은 자로서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몸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몸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이 다 이 때문이에요.

성령 충만 받으라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게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으면 마귀적인 것들이 쏟아져서 남을 죽이고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사람이 포악해지고 심령이 강팍하고 사나워져요.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야차가 되어요.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완벽하게 살아진다는 말은 아니에요.

죄의 몸으로서는 온전하게 살 수가 없어요.

다만 살아가는 가치성과 지향성이 예전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 받았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이건 예수 안에 들어 온 성도에게 말하는 거에요.

이런 것을 행하면 구원을 해 준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으니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살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이미 구원을 받은 아브라함 후손에게 율법을 준 것과 같아요.

율법대로 살라고 율법을 준 것이 아니고 율법을 통하여서 자기 꼬라지를 알고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에요.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예수 안에 들어 온 자들에게 고장 난 몸으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자인지 알라는 거에요.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런 죄인이 산다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를 선택사상이라는 구조로만 이해하면 안 되어요.

물론 성경을 누구 안에 있느냐 라는 구조적인 영역으로 보아야 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구조적인 의미로 말하기보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부르심이라는 삶에 자세를 말하는 것이 훨씬 많아요.

 

구원을 구조적으로만 접근하면 성도의 몸을 구원해 준 의미가 사라지게 되어요.

의와 거룩으로의 부르심을 간과하게 되어요.

서신서는 예수 안이라는 구조 속에 들어온 자들이 어떻게 몸으로 예수의 생명을 토해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죄 문제로 접근 할 때는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라는 구조로 접근하여야 하는 것이 맞아요.

이건 나와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로 나아갈 때의 법이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보아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내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보지 말고 예수님에 의(義)를 앞세우고 나아가면 되어요.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이러한 믿음으로 살 것을 인도하세요.

성령이 야! 정낙원이 너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여도 네가 바라 볼 것은 오직 예수님 피이다 라고 해요.

맞아요.

우린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해요.

 

그러나 예수 안에서 택하여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의와 거룩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삶으로 접근 할 때는 몸 중심의 신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택하심이라는 구조로만 접근하면 우리 몸을 값으로 사서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殿)으로 삼으신 이유가 날아가요.

부르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몸의 기능이 사라져요.

그럼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하는 이유가 사라져요.

성령이 우리 몸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몸을 간섭하겠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로마서를 가지고 설명할게요.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라는 구조를 말하고 있어요.

율법에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행함이냐!

믿음이냐! 를 말했어요.

그러나 12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이런 것들이 나타난다고 하고 있어요.

 

롬 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라는 말은 그래 너희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이라는 말이에요.

바울은 지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권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느냐!

그러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느냐!

그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겁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으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흔적을 그려내는 삶을 살으라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이 은사를 주어서 그렇게 살도록 간섭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장부터는 전부 신자로서의 삶에 모습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12:3-8=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너희 속에 십자가 피가 있느냐?

예수의 살과 피를 마셨느냐?

그럼 십자가 정신으로 살으라는 겁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예수님처럼 자신을 제물삼아 남을 섬기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라고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각자 받은 은혜대로 섬기라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두 달란트 받았으면 두 달란트만큼 섬기면 되고, 다섯 달란트 받았으면 다섯 달란트만큼 섬기면 되어요.

그래서 믿음에 분량대로 믿음에 분수대로 섬기라고 하는 겁니다.

 

또 못을 하나 치고 갑니다.

이런 것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행하라 가 아니고 행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행하라 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어서 내 행위가 되어요.

하지만 행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안에서 행하게 하는 분이 따로 있다는 뜻이므로 나의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으킨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은사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힘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을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신다는 뜻이에요.

그럼 어렵지도 않고 억지스럽지도 않아요.

억지가 아니기 때문에 하면서도 기뻐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 누가 안 한다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요.

넌 왜? 그렇게 사느냐 라고 욕할 이유도 없어요.

각자 받은 은혜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하면 은혜 안 받은 사람이고 하면 은혜 받은 사람이에요.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감사의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살지 않아요.

이건 마치 동일한 물을 마셨는데도 양은 젖을 내어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뱀을 독을 만들어 남을 죽이는 것으로 뿜어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동일한 십자가 복음을 들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마귀의 마음으로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가만 내버려 두라고 했어요.

 

계 22:11절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하였어요.

 

한마디로 간섭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할 것이고 없는 사람은 안 할 것이란 말입니다.

마음에 선(善)이 있으면 선한 삶을 내어 놓고 마음에 악(惡)이 있으면 악한 삶을 내어 놓게 되어 있어요.

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드러나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로 드러나는 겁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은혜로 살고 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나오는 것이 은혜이면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고 나오는 것이 법이면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속에 예수의 마음이 있으면 예수의 마음으로 살고 예수가 없으면 마귀의 마음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교회 안에서도 참과 거짓을 갈라내기 위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상반된 모습으로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밭에 곡식과 가라지를 함께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를 같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하면 아멘 하고 순종으로 나타나는데!

어떤 사람은 마치 악귀가 들린 것처럼 발악을 해요.

마음에 분노가 가득해서 씩씩 거려요.

왜? 씩씩 거리느냐 하면 자기 속에 죄가 드러나니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어 죽이려고 하듯이 그런 행사머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 안에 누가 주인이냐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라고 강요할 이유가 없어요.

성령이 알아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런 모습으로의 삶이 나타날 것이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안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제가 이렇게 한번 살아 보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반(反) 복음적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에서는 악독과 강포와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수군 수군거림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내 뱉으면서 예수의 피를 마셨다고 하니 그건 아니라는 차원에서 소리치는 것입니다.

 

정답은 우린 그냥 예수님이 우리를 섬겼듯이 섬기면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저렇게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십자가 정신으로 섬기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행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삶이라고 하지 않고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고 했지요.

언제 이런 때가 온다고 했습니까?

그건 성령이 오셔야 한다고 했어요.

 

그럼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라는 것은 너희가 예수 안에서 성령을 받았으면 너희 몸이 영적예배로 드려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까?

몸이에요.

몸!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지요.

즉 성령이 우리 몸을 희생 제물처럼 죽이게 한다는 말입니다.

남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는 것이 제물이에요.

이 삶을 예수님이 사셨어요.

 

예배란? 십자가 정신을 몸으로 살아내는 거에요.

그래서 산 제사 라고 하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아보고!

서로 섬겨야 하니 모여야지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성도들이 날마다 모여서 섬겼어요.

사도바울도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성을 본 받지 말라고 했어요.

그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더 모이라고 했어요.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을 섬기라는 겁니다.

수군거리면서 남을 헐 뜯고 정죄하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 위로하고 돌아보고 삼기라는 거에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나누는 교제에요.

 

오순절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살았어요.

사도 바울이나 12 제자들을 위시하여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이런 삶을 살다가 갔어요.

사도요한은 평생 동안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만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요한의 설교를 문자적인 의미로만 들으면 성화주의라고 몰아붙였을 겁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골 3:1-10=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보세요.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잖아요.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하잖아요.

이런 것은 옛 날에 하던 것이라는 거에요.

옛 날에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았지만 이젠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을 입혀 주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너희가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새 사람을 입혀 주셨어요.

마치 야곱이 합환채를 먹고 난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 준 것처럼 입혀 주었어요.

그러니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고하잖아요.

그러다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당하지만 말이에요.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옛 사람의 일을 벗어 버리는 겁니다.

옛 사람은 남을 해치고 육신의 쾌락을 쫓아갔지만!

새 사람은 남을 나보나 낫게 여기고 자기 몸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몸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옛 사람을 죽이시고 새 사람의 몸을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 증거로 우리 몸에 새 영(靈)을 부어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에 그리스도의 편지로 두셨어요.

 

세상은 성도를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 속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편지들인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란 말입니다.

동일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세상 사람들 앞에선 예수님과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통해서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도 하고 편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나 편지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걸어간 뒤에는 예수님의 성품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런 것이 안 나타나도록 우리 몸을 방해 하겠지요.

 

그래서 사도들이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죄와 싸우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습성을 본받지 말고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으로서 살으라고 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이젠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어요.

몸을 마귀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어떻게 계모와 상간한 자를 교회 안에 버젓이 둘 수가 있느냐!

이런 죄악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죄인데 어떻게 너희들은 이런 자를 보고도 통한히 여기지 않느냐고 책망한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의 몸은 사단에게 내어주고 영혼은 그리스도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한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이런 악행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구원에서 취소 될 수는 없어요.

택하심이라는 구조 안에서 보면 구원은 불변하지만 새 사람으로의 부르심으로 보면 악한 것이므로 몸은 징벌을 받아 멸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준엄한 경고는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이는 곳인데 어찌하여 이방인의 삶에 모습들이 나타나는데도 그대로 방치 할 수 있느냐 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용납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니 당장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내가 가면 이런 놈은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구요.

 

왜? 사도들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살아가는 삶들을 지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줄 아세요.

이는 죄가 항상 우리 몸을 가지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을 행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죄의 모습과 반대인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도라고 한다면 너희 몸을 마귀의 도구로 쓰임 당하지 않게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말을 큰 소리로 하는 것은 그 당시 거짓교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이원론 사상을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역사는 늘 반복되니 이 시대도 그노시스주의가 있어요.

지금도 사단은 교묘한 논리로 십자가 정신을 흐리게 하고 성도의 삶을 미혹하고 있어요.

어떻게 살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예수의 피만 믿으면 된다고 해요.

 

물론 구조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부르심에서는 경계하여야 하는 말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그래 예수 피 믿으면 됐지 라고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산다면 그 사람에겐 뱀의 독처럼 자신을 죽이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멍석을 깔아 주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달콤하잖아요.

그러니 훅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나쁜 것은 금방 퍼져요.

금방 받아 들여요.

 

그러니 교인들이 자기 몸을 방탕과 방임에 맡기고 즐기며 사는 겁니다.

몸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빼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 십자가 피를 이런 삶을 사는데 면죄부로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상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겐 뱀의 독처럼 작용을 해서 부르심에 반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서신서마다 이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들이 하는 짓이 아니라고 책망을 하고 권면을 하였던 것입니다.

너희 몸을 왜? 창기처럼 사느냐고 책망한 겁니다.

 

고전 6:15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보세요.

너희 몸이 너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고자 하느냐고 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결코” 를 놓치지 마세요.

“결코” 란 “절대로” 란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겐 그 어떤 행위로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듯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결코”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코” 란 말은 아주 무서운 말이에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절대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강조형 명령이에요.

절대로 선악과를 따 먹지 말아라!

절대로 너희 몸을 너를 위하여 살지 말아라! 같은 말이에요.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공부를 합시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고 굉장히 중요한 것이니 놓치지 마세요.

너무 길어서 죄송하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예수님은 성도의 몸이 필요해서 자기 피값으로 성도의 몸을 샀어요.

 

예수님은 성도의 몸을 통하여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해요.

성도의 몸에 성령을 주셔서 그 몸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모습을 드러나게 함으로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의 몸은 마귀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미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배치한 언약의 구조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자들에게 먹힘 당하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들의 손에 죽임 당한 것도 다 이런 언약의 구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로 세상에 던져져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가운데 보낸다고 했지요.

이는 먹힘 당하라는 겁니다.

먹힘 당하게 함으로서 그들이 악(惡)에 속하였다는 것을 고발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 속에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 용서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해 주세요.

이럴 때 구원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리는 마귀를 상징해요.

그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귀의 밥으로 준 겁니다.

가서 마귀에게 잡아먹히라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잡아먹히도록 보내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죽임 당하게 함으로서 유대인들이 악에 속하였음을 고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은 힘없이 죽임 당함으로서 유대인의 배후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겁니다.

그러니 이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입은 제자들은 마귀를 들추어내는 미끼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십자가 도(道)로 구원하세요.

십자가 도(道)란? 의로운 자가 죄인을 위하여 죽임 당하는 거에요.

언약의 후손에 피를 통하여서 언약의 후손을 찾아내고자 해요.

그 속에 은혜를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임 당하고자 오셨어요.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자에게 먹힘 당하는 모습으로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죽음에 넘기운 것은 죽음 속에 갇힌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짐승의 밥 통에 나신 겁니다.

이는 예수님은 죄인의 밥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죄인에게 먹힘 당하러 오셨어요.

 

왜? 죄인에게 먹힘 당하는가요?

이는 그를 살려내기 위함이에요.

날 잡아 먹고 영생을 얻으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 겁니다.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다 죽은 자에요.

성경에서 죄인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짐승의 밥통에 나신 것은 죄인에게 먹힘 당하여 영생을 주고자 함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먹은 자는 영생을 얻어요.

이게 십자가 도(道)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 자로서 죽은 자에게 먹힘 당함으로서 죽은 자를 살려내신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깨닫고 자신은 날마다 죽음에 넘겨주고 자기 몸에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고백한 겁니다.

어디에 예수의 생명을 나타낸다고 합니까?

몸이에요.

몸!

 

한 번 보고 갈까요.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고후 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바울이 이 말을 왜? 하였는지를 먼저 알아야 이 말에 의미를 바로 알 수가 있어요.

바울은 지금 예수 때문에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어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했어요.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란 말이에요.

누구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면 예수님 때문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당하셨던 고난 그대로에요.

그래서 자신은 항상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때문에 자신은 늘 죽는다는 거에요.

복음 때문에 늘 욕을 먹고 핍박과 고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늘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몸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 몸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원수가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7절에서 예수라는 보배를 자기 몸이라는 질그릇에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자기 몸에 보배를 담고 있으니 도적놈들의 타깃이 되지요.

마귀가 예수라는 보배를 빼앗으려고 바울의 몸을 늘 공격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나 홀로 집” 이라는 영화를 보면 도적들이 귀중한 칩을 담은 자동차를 훔치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아이는 그 자동차 속에 칩이 들어 있는지 몰라요.

누가 심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도적놈들이 그 자동차를 빼앗으려고 아이를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는 안 빼앗기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도망 다녀요.

아이가 죽을 지경인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래요.

하나님이 성도들 속에 예수의 생명을 심어 놓았어요.

마귀가 이걸 빼앗겠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죽겠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바울의 이 고백 속엔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뿌림 안에서 산다는 고백이기도 해요.

 

하지만 본문에서의 의미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원수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은 늘 죽음에 넘겨주고 산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죽음에 넘겨주며 살게 되는 것은 다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자기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고 자기는 날마다 죽음에 넘기어진다고 합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보고 욕먹고 고난당한다는 겁니다.

 

무엇이 고난당합니까?

몸이에요.

몸!

예수의 생명을 몸에 나타나게 한다고 하니 몸이 고난인 겁니다.

 

그러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어요.

12절입니다.

 

12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사망은 자기 안에 있고 생명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너희들 때문에 죽고 너희는 우리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죽고 자식을 살려내는 것과 같아요.

 

쉬운 말로 그래 너희들이 날 잡아 먹고 너희가 살으라는 말이에요.

모든 죄는 내가 짊어지고 죽을테니 너희들은 나 때문에 살으라는 말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럽니다! 라고 기도한 것과 같아요.

 

이건 예수님이 우리에게 잡아먹힘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에요.

그러듯이 말 많고 탈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이 욕을 들어 먹고 이단 소리 들어가면서도 참고 또 참는다는 겁니다.

이걸 로마서에선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진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모습이에요.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은 늘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았어요.

그들이 원치 않아도 믿음이 이들을 이렇게 살아가도록 소고삐 잡고 끌듯이 끌고 다녔어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성도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로 살게 되어요.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날 죽인 그 사람이 살아나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세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 했어요.

이는 부모란 말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참아주고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속이 얼마나 터지겠어요.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했지요.

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냅니까?

그건 이리에게 잡아먹히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몸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의 생명으로 파송을 받는 겁니다.

쉬운 말로 세상 속에 예수님의 신분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짐승 밥통에 먹이로 오셨듯이 제자들을 이리라는 짐승 먹잇감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리들이 양을 잡아먹음으로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에요.

이리들이 양을 잡아먹었는데 양이 그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밥을 먹으면 밥에 힘으로 사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힘으로 사는게 아니고 밥 힘으로 살아요.

밥을 안 먹으면 죽어요.

그러니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밥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를 아는 제자들을 파송하여서 그들 속에서 죽으라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제자들을 죽인 놈들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시청각교제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 스데반의 죽음이에요.

알다시피 스데반은 예수를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누가 담당 했는가 하면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이에요.

예수님이 스데반을 사울이라는 바울의 먹잇감으로 던져 준 겁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먹은 겁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고 나자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 갑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다!

 

알다시피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어요.

다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 믿는 성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울이 죽인 스데반은 곧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곧 사울에게 잡아먹힌 것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데반을 잡아먹은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먹고 살아난 겁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곧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해요.

 

이렇게 되면 이제 예수님이 바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바울을 또 다른 사람들에 먹잇감으로 보냅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였듯이 이제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듯이 죽이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바울의 죽음을 통하여서 바울을 죽인 그들을 용서하고 구원해 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 때문에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운명이에요.

그러니 진짜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버림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 안에는 사망이 역사하고 너희 안에 생명이 역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를 비워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것을 안다면 지금 우리가 복음 안다고 나대는 것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짓인 줄 알기나 합니까!

우린 복음 안다고 잘난 척 하면서 모르는 사람들을 얼마나 깔보고 비웃고 판단하고 조롱합니까.

이게 무슨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우린 나의 정당함을 알리기 위하여 남을 모함하고 비방하잖아요.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잖아요.

저 놈이 나쁜 놈이지 난 괜찮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복음 핑계를 대면서 말이에요.

 

이건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삶이 아니에요.

진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마셨다고 하면 늘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같이 싸우는 모습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하는 모습으로 살아요.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고 죽을 지경입니다.

이게 십자가의 길이에요.

 

예수의 생명은 항상 우리 삶에서는 마시기 싫은 쓴 잔으로 나타나요.

십자가의 도(道)는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고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바울처럼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항상 자기를 죽음에 넘겨주고 남을 살리는 식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누가 모함 하면 모함을 받고!

누가 무시하면 무시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9장에선 성도들의 고난의 삶을 일컬어 신부의 옷이라고 했어요.

 

계 19:7-14=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어린 양의 신부가 하얀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하지요.

그 옷을 성도들이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행실이란? 삶을 말해요.

 

그런데 신랑이 백마를 타고 오는데 그가 입은 옷은 피 뿌린 옷을 입고 있어요.

그리고 그 뒤를 군대들이 따르는데 전부 어린양의 신부처럼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있어요.

이는 곧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모습을 말해요.

 

세마포는 죽은 시체를 감싸는 옷이에요.

그렇다면 어린 양의 신부들은 순교자란 말이에요.

예수 때문에 죽은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행실이란? 바로 예수님처럼 죽임 당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신부를 맞이하러 오는 겁니다.

이에 하나님이 신부에게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옳은 행실이라는 세마포 옷을 입혀서 맞이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신랑은 죽임 당한 모습으로 오는데 신부는 말짱하면 안 되잖아요.

신랑과 신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같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되는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쓴 잔을 마시게 하여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옳은 행실이라고 하고 신부가 입을 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에요.

 

그저 머리로 십자가라는 지식을 주워 담는게 아니에요.

편안하게 수학 공식 외우듯이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십자가 피를 안다고 해서 신앙이 될 수가 없어요.

그건 귀신도 알아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삶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道)는 남을 위해서 내가 죽는 거에요.

이 일은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어요.

오직 성령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 성령을 주셔서 보내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21-23=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로 가야합니다.

그럼 이 세상엔 제자들만 남게 되어요.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아버지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왜? 보내는가 하면 죄사함을 위하여 보낸다고 해요.

이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죽으러 온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자기백성들에게 죄사함이 주어졌어요.

이걸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가서 죽으라는 거에요.

제자들이 죽어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죽는 것이므로 제자들의 죽음은 곧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죽음으로 예수님은 죄사함의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가 없으니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 제자들은 전부 죽음의 현장으로 던져 졌어요.

12 제자들은 다 비참하게 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어요.

 

결국 하나님은 12 제자들의 죽음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12 제자들이 피를 흘린 그 곳에 예수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12 제자들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는 방식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 받은 자들에겐 항상 예수님의 피가 발려져 있는 것입니다.

난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짊어지고 늘 복음에 빚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거 안 전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친다고 했어요.

이건 억지로 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이 복음 전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도(道)는 항상 성도에게 덮쳐오면 자기를 부인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도(道)는 쓴 잔인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미끼로서 몸이 필요한 겁니다.

성도의 몸은 죽임 받기로 작정이 된 몸인 거예요.

그래서 몸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일을 하려고 예수님이 우리 몸을 구속하려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 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선택이라는 구원론 입장에서 살펴보지 않고 왜? 선택을 했는지의 의와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입은 십자가 정신이 어떻게 성도의 몸으로 피어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에 발자국을 한 발 두 발 따라가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 방식이 아닌 십자가 너머의 삶에 방식으로 초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거꾸러 사는 삶인 겁니다.

무엇으로 거꾸러 삽니까?

우리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안 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택하심 안에서 십자가 피를 바라보세요.

결국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고장 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와 거룩으로의 부르심은 잊지 마세요.

 

부디 몸에 구속을 기다리면서 십자가 너머의 삶에 방식으로 초대받은 자들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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