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정낙원 2011. 5. 3. 02:00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다 이루니라 (창 2:1)

 

창 2장 1절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이 다 이루느라”

 

성경을 펴면 제일 먼저 창세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창세기를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였다는 이야기로 대문(大門)을 활짝엽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시작부터 끝까지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절에선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1장과 2장이 어떻게 다른가요?

 

1장 1절에서는 천지(天地)를 창조 하였다고 하였는데!

2장 1절에선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고 하면서 천지(天地)에다가 만물(萬物)이 포함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1장에서 없던 만물이 2장에선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럼 만물은 1장과 2장 사이에 만들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2장에선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이 다 이루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이루니라” 라는 말은 하나님이 결심하고 작정한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차질 없이 다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창세기 1장 1절에서 천지(天地)를 만들 때 뭔가 작정한 것이 있었는데 일곱째 날까지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작정이 무엇인가 하면 “천지(天地) 속에다 만물(萬物)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 1절에선 천지를 만드시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천지 속에다 만물을 채우는 일을 다 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주부(主婦)가 집안에서 설거지며 청소며 빨래와 아이들이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다 치우고 이제 다 했다고 하면서 차 한잔 마시면서 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1절 사이엔 온 인류 역사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다른 말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자기도 일한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럼 창세기에서 말하는 천지 창조 이야기는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이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표(豫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이 말하는 천지창조는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 이야기를 창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는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 이야기를 자신의 구원이야기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2장에선 그 천지를 천지와 만물이라고 구분하셔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은 어떻게 다른가요?

문자적으로 보면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입니다.

또 만물(萬物)은 하늘과 땅 가운데 살아가는 수많은 종류의 물건들 즉 하늘과 땅에서 살아가는 갖가지 생명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천지는 만물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즉 천지는 공간(空間)을 말하고, 만물(萬物)은 그 천지라는 공간 속에 채워진 내용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창조 사역을 보면 첫째 날부터 셋째 날 까지는 공간을 만드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그 공간에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왜? 천지 창조 이야기를 이렇게 둘 나누어서 기술하고 있을까요?

이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 이야기는 그냥 천지 만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뭡니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창세기 1장도 성경이니까 예수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구원 받는 이야기로 풀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속에도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가 씨눈처럼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자기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신 겁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쓴 책입니다.

모세가 성경을 쓰기 전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자기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난 후에 창세기를 쓰게 했습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를 가지고 너희들이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하게 세상 만물을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천지 창조라는 것을 통하여서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신약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모세처럼 천지창조 이야기를 하는데 구체적으로 천지창조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만드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물은 그 안에 함께 선다고 합니다.

만물이 그 안에서 선다는 말은 만물 속에는 온통 예수가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만물이 다 예수님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속에도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고!

달 속에도 예수가 있고!

별 속에도 예수가 있고!

하늘을 나는 새 속에도 예수가 있고!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 속에도 예수가 있고!

들에 피는 풀 속에도 예수가 있고!

짐승들 속에도 예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모든 만물은 다 예수님과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만물 속에 다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렁이 한 마리도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두에게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들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만물이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다 예수님의 손때가 묻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다도 예수님 말씀에 순종 하였고,

무화과나무도 예수님 말씀에 순종 하였고,

바다에 물고기도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脈)으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천지 창조 이야기가 단순하게 세상 창조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구원이야기로 풀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는 말씀 속에 성도의 구원사적인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음이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가지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보여주고자 하신다는 말이다.

 

그럼 창조 사역 모두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표(豫表)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내고!

땅과 바다를 갈라내고!

갈라낸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공중엔 새들이 날아다니게 하고,

땅에는 각종 나무와 풀과 생명들을 만들고,

바다에 고기를 만들어 채우신 것들은 모두가 구원한 자기 백성들 속에 채우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천지가 있고!

우리 안에 만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이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이야기를 우리 신앙으로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세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모티브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을 역사(歷史)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묵시(黙示)라고 합니다.

 

그러니 역사는 묵시에게 나온 겁니다.

역사 속엔 묵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가지고 묵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역사는 묵시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습니다.

 

역사는 묵시에서 나왔다는 말은 묵시는 실상(實狀)이고 역사는 허상(虛像)이란 말입니다.

묵시가 진짜이고, 역사는 가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은 장차 철거 될 것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철거 한다는 말은 용도 폐기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보여 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를 통해서 뭔가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게 뭔고 하니 묵시에서 행하여질 것들을 보여주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묵시에서 행할 일들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일을 하십니다.

마치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가지고 잠시 후에 우리가 살아갈 진짜 아파트가 이런 곳입니다 라고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장차 성도들이 가야할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역사가 묵시에서 나왔다고 했으니 천국이라는 묵시는 이미 완료된 것으로 있습니다.

천국은 장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성된 것으로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三層天)에 올라가 자신을 보았습니다.

 

셋째 하늘에 있는 바울은 이미 구원이 완성된 자로서 예수님 품에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세상에도 바울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세상에 있는 바울은 수고하고 눈물 흘리는 바울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에서 고난당하는 바울입니다.

 

삼층천이라는 묵시에서 예수님과 안식하는 바울은 실상이고, 역사라는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바울은 셋째 하늘에 있는 바울의 아바타입니다.

세상에 있는 바울이 가짜란 말이 아니고 삼층천에 있는 바울로 예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바울이 그 어떤 환란이나 핍박을 받아도 바울은 반드시 삼층천에 가서 예수님 품에서 안식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의 표상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그 어떤 수모를 당하고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도 삼층천에 있는 바울처럼 예수님 품에서 안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에서 완성된 우리로서 역사 세계에선 안식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들로 보내심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을 삼층천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네가 지금 역사 속에서 당하는 고난은 이 삼층천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잠시 철거 될 몸으로 세상에 보내진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네 육신이라는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여기 삼층천에 있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막인 죄 없는 몸이 기다리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잠깐 고난당하다가 이 안식의 세계로 오라고 합니다.

역사라는 세상에 던져진 바울은 가짜이고 삼층천에 있는 바울이 진짜인 겁니다.

 

모든 성도는 이와 같습니다.

지금 눈물 흘리고 아픔 당하는 나는 가짜입니다.

천국엔 이미 흠 없는 자로서의 완성된 내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의 우리의 인생도 끝이 있습니다.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린 모두가 삼층천에 있는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 간에 이러한 소망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묵시는 완료(完了)의 세계이고, 역사는 미완료(未完了)의 세계입니다.

우린 묵시라는 완료의 세계에서 역사라는 시작과 끝이 있는 미완료의 세계로 잠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곤 미완료의 세계에서 다시 역순(逆順)으로 완료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창세후에서 창세전으로 꺼꾸러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나아갈 때 그냥 나아가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뿌림 받고 나아갑니다.

그러니 묵시에서 역사로 온 것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고자 나온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을 담고자 역사로 나온 것입니다.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걸 현재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구원 이야기를 미완료가 어떻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완료로 되어 가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비록 미완료라는 역사에 살고 있지만 이미 완료된 묵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삽니까?

바로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여 사는 것입니다.

 

아까 만물이 예수 안에서 섰다고 했지요.

예수 안에서 섰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완료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을 일컬어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지창조에서의 천(天)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묵시를 예표(豫表)하고, 지(地)는 보이는 역사를 예표합니다.

 

예표(豫表)한다는 것은 실제가 아니고 가짜란 말입니다.

첫 창조에 속한 천지는 모두가 허상에 속하였어요.

장차 철거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도 다 사라진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천국이에요.

 

그러니 첫 창조에 속한 하늘은 진짜 묵시가 아니고 다만 보이지 않는 묵시를 예표(豫表)하는 모형(模型)일 뿐입니다.

진짜 묵시는 셋째 하늘에 있어요.

여기서 셋째 하늘이란? 역사 바깥에 있는 묵시를 말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시니라고 운을 떼고 있으면서도 2절에서는 땅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이 1절에선 하늘(天)과 땅(地)을 창조 하였다고 하면서 2절에부터는 하늘(地)을 사라지고 땅(地)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중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創造)라는 말은 ~ ~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원인(原因)이 있어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곧 창세전 언약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천지창조 속에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天地) 속에 내가 포함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목적이 있어서 만들었겠지요.

왜? 만들었느냐?

다른 말로 왜? 구원했느냐?

바로 창세전 언약 때문에 만들고 구원했어요.

 

창세전에 하신 언약은 “하나님의 의지”에요.

하나님께서 난 이렇게 하겠다는 뜻이 언약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깨서 “난 과거에 이렇게 일을 했고, 현재는 이렇게 하고 있으며, 장차 이렇게 할 것이다” 는 것을 통보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떨어지면 반드시 그 약속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와 언약을 했다고 합시다.

 

야! 정낙원이 내가 널 구원 할게!

그러면 정낙원이의 구원은 이미 완성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완성이고 창조의 능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 속에서 만물이 나왔다는 것은 언약이 곧 창조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창세전 언약 속에는 언약을 하신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언약은 언약을 하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언약(言約)이란? 맹세가 말씀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마음에 하시고자 맹세 한 것이 입밖으로 뱉어지면 그 말씀은 맹세와 묶여져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맹세란? 하나님의 의지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떨어지면 반드시 그 말씀이 품고 있는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창세전 언약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세워졌습니다.

즉 우리가 생겨나기 전에 언약이 있었어요.

우리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우리가 있었어요.

 

말이 이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가 있기 전에 이미 있었어요.

이미 있던 것을 만든 것뿐입니다.

 

쉽게 설명할게요.

제가 지금 칠판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럼 칠판에 그려진 그림은 언제 있던 겁니까?

이미 있던 것이지요.

 

어디에 있었나요.

제 마음에 있었어요.

제 머릿속엔 이미 완성된 그림이 있어요.

전 다만 칠판이라는 장소에 내 머리 속에 완성되어 있는 그림을 칠판에 옮겨 놓은 것뿐이에요.

 

이걸 아까 묵시에서 역사가 나왔다고 했어요.

제 마음이 묵시에요.

그리고 칠판에다 그린 그림이 역사에요.

그러니 칠판에 그려진 역사라는 그림은 이미 제 마음이라는 묵시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묵시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창세전 언약이라는 묵시 속에서 나왔어요.

그럼 우린 이미 창세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조금 전에 바울이 삼층천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자신을 본 것으로 말씀했어요.

 

묵시에서 역사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묵시는 창세전 언약이에요.

우린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어요.

 

우리는 창세전 언약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창세전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창세전 언약을 지켜내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이 지켜내세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창세전 언약은 이루는 일은 예수님이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요.

피조물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므로 피조물은 언약을 행사할 자격이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사역(使役) 동사(動詞)라는 것이 있어요.

사역(使役) 동사(動詞)란? 누군가가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하세요.

일을 행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걸 신약으로 오면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일을 합니다.

그 일을 누가 주도하여서 하는가 하면 믿음이 하세요.

그래서 주어(主語)가 “믿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피조물은 언약을 그려내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에요.

예수님이 화가(畵家)처럼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을 우리 몸에 그려내세요.

우린 그냥 칠판처럼 가만히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 몸을 칠판으로 사용하셔서 “구원 받은 자는 이런 자이다!” 라고 그려내세요.

 

이 말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 말씀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켜내세요.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와는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성취하신다는 뜻에서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언약의 당사자인 예수님이 지키고 성취해 가세요.

즉 창세전 언약은 피조물이 창조가 되기 전에 세워졌으니 그 언약을 하신 당사자인 예수님만이 이루어 가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에 속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에 의하여 일으켜지고 예수님이 성취하는 것으로 역사가 전개 되도록 계획이 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획하고 예정(豫定)한 창세전의 일들을 예수님이 모두가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하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만물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되겠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예전에도 언약대로 일을 해 오셨고,

지금도 해 가시고 있고,

앞으로도 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뒷방 영감처럼 뒷짐 지고 노는 분이 아니고 일을 하세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눈을 부릅뜨고 일을 하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선 예수님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내일도 계시는 분이세요.

 

예수님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계신 분이고,

지금도 계시고 있고,

장차 이 세상이 망하고 없어져도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도 계셨고 창세후에도 계십니다.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이 안 계신 적이 없어요.

이로 보건데 예수님은 만물(萬物) 가운데 가득하신 분입니다.

만물(萬物)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온통 예수로 충만해요.

결국 세상은 예수로 시작하고 예수로 끝이 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자연히 천지(天地) 창조이야기도 다 예수님의 일하심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천지 속에 만물을 담는 일을 하시고!

예수님이 만물을 번성케 하시고 충만케 하시고 정복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가 핵심(核心) 주제에요.

성령이 모세로 하여금 창세기를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말해주고자 쓰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경을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었어요.

 

자기 백성이 누구인가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럼 천지창조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신 것은 자기백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천지 만물을 다 이루어가는 일을 벌이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핵심 사상입니다.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다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천지창조를 성도의 구원이야기로 말할까요?

이는 성도의 구원이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에서 만물을 다 이루는 이야기는 곧 우리 자신들 이야기인 것입니다..

내가 천지(天地)이고, 내 안에 만물(萬物)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채우는 일을 하세요.

그리고 번성하고 충만케 하고 정복하는 일을 하십니다.

 

지금부터 천지와 만물 이야기를 우리들 구원 이야기로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고 의역(意譯)해서 보세요.

그럼 천지창조가 내 구원이야기로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1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습니다.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 중에 있다고 합니다.

 

2절에 가서는 “땅”만 나옵니다.

하늘은 언급하지 않고 있어요.

이는 하늘은 감추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다고 하지요.

이는 타락을 의미합니다.

타락은 죽음을 말해요.

그럼 땅은 죽은 곳이란 말입니다.

이러면 하늘은 생명이 거하는 산 곳이고, 땅은 죄와 사망 안에 가두어진 죽은 곳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땅이 타락하였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하늘나라는 타락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땅을 죽었다고 하면 하늘은 살아 있는 곳이란 말이 되지요.

그래요.

성경은 하늘은 죄가 없는 생명이 있는 곳이라고 해요.

 

이사야 14장을 봅시다.

 

사 14:12-17=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16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17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계명성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고 하지요.

이는 계명성이 타락하자 하나님께서 땅에 던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계명성의 타락을 마귀의 타락을 말합니다.

원래 마귀가 하늘에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보좌를 탐내다가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말하는 용이 하늘에서 쫓겨난 것과 같지요.

에스겔 28장을 보면 두로 왕을 빗대어서 이 이야기를 또 해 주고 있어요.

 

에스겔 28장을 봅시다.

 

겔 28:12-19=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두로 왕을 마귀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두로 왕을 하나님의 동산에 거하던 완전힌 인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인이란 천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불의가 드러나 하나님이 동산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쫓겨난 것과 같지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의 뱀이나, 이사야의 계명성이나, 에스겔의 두로 왕이나, 요한계시록의 용이나 모두가 마귀를 상징해요.

성경은 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묵시적인 의미에선 다 같은 의미입니다.

역사 속에선 길게 늘어져 있지만 묵시 안에선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오늘에 사건이에요.

그러므로 이사야의 계명성이나, 에스겔의 두로 왕이나, 에덴동산의 뱀이나, 요한계시록의 용이 하늘에서 쫓겨난 것은 다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한마디로 말하면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땅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과 인간을 쫓겨 난 것과 같아요.

이는 인간에겐 에덴동산은 감추어졌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을 하늘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감추어져 버린 겁니다.

 

하나님은 왜? 하늘이 감추어졌을까요?

이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이야기가 아니고 땅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이 타락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땅에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에요.

죄는 타락이고 죽음이에요.

그래서 2절에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땅이 죽었다는 겁니다.

땅이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을 의인화(擬人化) 하여 봅시다.

하늘나라엔 누가 있습니까?

의인(義人)들이 있지요.

 

그럼 하늘나라는 타락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타락하지 않았으니 구원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겠지요.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럼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나요?땅에 있지요.

땅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타락하지 않은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지 않고 땅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는 하늘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나라에요.

예수님이 일을 하실 곳은 하늘이 아니고 땅이에요.

 

예수님은 땅에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땅에 죄인들이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에 있지 않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지요.

 

하늘나라엔 의인(義人)들이 살고 있고, 땅 나라엔 죄인(罪人)들이 살고 있어요.

하늘나라는 생명(生命)이 세계이고, 땅 나라는 사망(死亡)의 세계에요.

하늘엔 산 자들이 살고, 땅엔 죽은 자들이 살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 내려고 땅에 오셨어요.

 

땅에 와서 일을 하려니까 땅에 필요한 몸을 입고 오신 거에요.

이제 땅에 일을 다 하고 나면 하늘로 가세요.

그럼 그 때는 하늘에 몸을 입고 가요.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그러니 창세기 1장 2절 이후의 이야기는 전부 죽은 땅에 이야기인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2절에 말하는 땅이란 곧 죄인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곧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어요.

 

그럼 2절을 인간으로 의역(意譯)해 봅니다.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죽은 모습입니다.

타락한 모습입니다.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혼돈이고 공허이고 흑암이에요.

아담 안에서 출생하는 인간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그 자체에요.

죽었어요.

 

죄인의 마음은 혼돈이고 공허하고 어둡습니다.

죄인의 일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혼돈(混沌) 그 자체이고,

소망이 없으니 공허(空虛) 그 자체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르니 흑암(黑暗)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신(靈)이 운행을 하십니다.

운행(運行)한다는 말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듯이 뭔가 생명을 잉태하고자 하는 모습을 말해요.

마치 에스겔 37장의 해골 골짜기의 해골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기(生氣)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에스겔 37장의 해골 골짜기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물론 좁은 의미에선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곧 우리들입니다.

 

죄인은 해골들이에요.

이런 죄인들 위에 성령이 운행(運行)하십니다.

그러니 에스겔 37장의 해골골짜기에 생기가 부는 것은 흡사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에요.

 

2절을 다시 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합니다.

그 혼돈된 땅 위에 하나님의 신(靈)이 운행을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신이 수면(水面) 위에 운행하신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면(水面)위라는 것은 물 위라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성령이 물 위로 운행 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본 그림이지요.

마치 노아의 홍수 때 온 세상이 물로 덮여 있을 때 바람이 부는 것과 같지요.

맞습니다.

 

지금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 바로 노아의 홍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물로 덮여 있었어요.

물에 푹 잠겨서 다 죽어 있어요.

성경은 물을 죽음으로 상징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물에서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첫째 날에 깜깜한 세상에서 빛을 불러냅니다.

흑암 속에서 빛이 나옵니다.

흑암 속에서 빛을 빼 내자 이제 땅이 빛과 어둠으로 갈라집니다.

 

이건 마치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하시면서 상대적으로 이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과 같습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어요.

 

그런 세상에 참 빛이 오셨어요.

이제 이 참 빛을 통하여서 빛과 어둠으로 세상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1장에서 첫째 날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빛과 어둠으로 갈라진 그 어둠 속에서 다시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첫째 날 빛과 어둠으로 갈라졌지만 아직도 세상은 물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속에서 또 물을 갈라내십니다.

같은 물인 줄 알았는데 두 물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냅니다.

 

하나님이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나누어서 그 중간에 궁창이라는 하늘을 만들어서 경계(境界)를 두어서 서로 섞이지 않게 하십니다.

마치 물속에 유리벽을 만들어서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이 세상에 인간을 “두 부류”로 갈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영접하는 자들이 없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접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다 한 통속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자 하늘백성과 땅에 백성으로 갈라진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궁창 아래 있는 물속에서 다시 “뭍(육지)”을 끄집어냅니다.

뭍(육지)이란? “마른 땅”을 말합니다.

천하에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뭍(육지)”과 “바다”로 나누어버립니다.

“뭍을 땅”이라고 하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뭍(육지)이란? 생명이 기식 할 수 있는 땅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바다는 죽음이 됩니다.

즉 뭍이 생명의 세계라고 하면, 바다는 죽음의 세계란 말입니다.

 

바다에 사는 것은 창세기 1장 2절의 그 상태 곧 수면(水面) 아래 푹 잠겨 있는 상태가 되므로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바다를 일컬어 죽음이라고 합니다.

땅이 물속에 잠겨 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 온 세상이 물에 잠겨서 죽어 있는 모습과 방불합니다.

물속에 잠긴 것을 죽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것을 세례라고 하지요.

 

세례(洗禮)란? 죽음을 말해요.

 

뭍이 물을 뚫고 올라온 것은 생명이 죽음을 뚫고 올라온 것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를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물속에 잠겨 세례를 받은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물속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이 분이야 말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알려 줍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은 이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의 셋째 날과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물속에서 생명을 살게 하는 뭍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지금까지 일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땅은 물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죽음에 잠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사망으로 죽었습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은 물속에 잠긴 세상과 같습니다.

 

죽음에 잠긴 세상에 성령이 운행하면서 갈라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곧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성령으로 살려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運行)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시고 계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이 운행한다는 말은 마치 순찰자가 여기 저기 감찰하고 살피고 있다는 말과 같아요.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보면 하늘나라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어린 양”이 있고 “일곱 영”이 있습니다.

이건 삼위(三位) 하나님을 말해요.

 

그런데 “일곱 영(靈)”에겐 눈이 가득합니다.

이 “일곱 눈”을 가진 일곱 영(靈)이 온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요.

일곱 영(靈)이란? 성령이에요.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신이세요.

그 하나님의 신이신 일곱 영이 온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습니다.

천지창조(天地創造) 이야기는 곧 죄인이 구원받는 이야기라고 했으니 우리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령이 어디에 보내심을 입었는가요?

성도의 몸에 보내심을 입었지요.

성령이 성도에게 보내심을 입었어요.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된 땅이란? 성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되지요.

 

그래요.

우리 죄인의 몸이 혼돈이고 공허이고 흑암이란 말입니다.

우린 죄로 인하여 죽어 있었어요.

우리 몸 안엔 마귀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어요.

 

이런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무얼 하러 오셨나요?

창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무슨 창조를 하시는가요?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갈라내고,

바다와 뭍을 갈라내는 창조를 하세요.

 

무슨 뜻인가요.

죄와 사망에서 의와 거룩으로 건져 내는 것이고!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빼낸 것이고

율법에서 은혜로 빼내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첫째 날에서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를 뜻합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는 창세기 2장 1절에서 말하는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는 말씀 중에서 천지에 속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천지(天地)란? 만물을 담는 그릇과 같아요.

 

천지는 마치 새로운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새로운 집에 들어갈 살림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듯이 우리 안에 채우는 일을 하세요.

버릴 것은 버리게 하시고 취할 것은 취하게 하십니다.

 

우리 안엔 옛 사람이 있어요.

성령은 옛 사람 속에 새 사람을 창조 했어요.

이제 새 사람에게 필요한 살림들을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전쟁을 합니다.

옛 사람은 육신의 소욕으로 살게 하고 새 사람은 성령의 소욕으로 살게 합니다.

옛 사람은 아담의 성품으로 살게 하고 새 사람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살게 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몸은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이에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하늘에서 큰 전쟁이 있었어요.

큰 용과 미가엘이 싸웁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하나님의 사자인 미가엘이 큰 용을 이깁니다.

이 큰 용은 옛 뱀이라고도 하고 마귀 사단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하늘에 있을 집을 얻지 못하고 땅으로 쫓겨납니다.

그 후론 용이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죽음을 지배하도록 권세를 주셨어요.

죽은 자들의 아비는 마귀에요.

 

요한계시록 사건을 창세기 1장 1절에서 2절 사이에 사건으로 보세요.

그럼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귀가 땅으로 쫓겨나자 땅이 죽음에 도시로 바뀌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뱀이 여자의 후손들을 죽이려고 물을 강같이 쏟아 낸다고 하지요.

세상은 뱀이 쏟아낸 물로 다 떠내려갑니다.

이는 이 세상은 뱀의 말(독)로 죽은 세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뱀의 말(독)을 창세기에선 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을 보면 음녀(淫女)가 많은 물위에 앉았다고 하지요.

많은 물이란? 온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사상! 즉 뱀의 말을 말합니다.

 

그러니 온 세상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포도주는 포도주인데 “음행(淫行)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이는 타락케 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죽게 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물 속에 잠긴 것이나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서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있는 것이나 다 같은 영적 의미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다 한 이야기에요.

한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뱀이 하늘에서 쫓겨난 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쫓겨난 것과 같아요.

에덴동산은 하늘이고 이 세상은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 밖으로 뱀과 함께 쫓아내지요.

그리곤 땅을 저주하잖아요.

 

그러니 땅은 하나님의 저주로 죽은 곳이 되고 만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종신토록 흙만 퍼 먹다가 필경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이게 바로 혼돈이고 공허이고 흑암인 겁니다.

땅은 소망이 없어요.

 

이렇게 되면 에덴동산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감추어진 하늘나라에요.

땅은 아담과 하와와 뱀이 쫓겨나 살아갈 땅인 겁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과 뱀을 동시에 추방했어요.

뱀에겐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했어요.

이는 땅에 것으로 살도록 한 겁니다.

 

알다시피 땅은 하나님께서 저주 했어요.

그렇다면 뱀은 저주의 기운을 받고 살게 된 겁니다.

땅에 착 달라붙어서 저주의 기운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도 뱀처럼 근본(根本) 된 토지를 갈게 하셨어요.

근본 된 토지란? 흙이에요.

저주 받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뱀과 인간이 쫓겨난 곳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의 땅인 겁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 2절 이후의 창조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 받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마귀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마귀가 사람의 몸에 있지요.

거라사 지방의 무덤가에서 살고 있는 귀신들린 사람을 보세요.

그 사람 안에 군대 귀신들이 들어 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우리에요.

우리 인간들이 바로 귀신들이 사는 처소에요.

귀신들린 자가 무덤가에 산다는 것은 귀신들린 자는 죽은 자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죽은 자에요.

 

그러니 창세기 1장 2절의 죽은 그 땅이 바로 우리 몸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용이 하늘에서 쫓겨난 그 땅이 바로 죄인의 몸인 것입니다.

죄인의 몸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어요.

마귀가 지배하는 인간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그 자체에요.

이는 곧 타락이고 죽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은 곧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상태를 말하고 있음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절 이후부터 2장 1절 사이에 전개되는 창조이야기들은 곧 창세기 3장 이후의 아담이 타락하고 난 후에 일어나는 이 땅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가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바로 타락한 아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구원 이야기를 창세기 1장 2절 이후로부터 2장 1절 사이에서 일어나는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는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나요.

제발 이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럼 창세기 1장 2절 이후의 세상 창조이야기를 가지고 죄인 구원이야기로 살펴봅시다.

 

구원이란?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겁니다.

죄에서 빼내는 것만 있지 않고 의와 거룩으로 채우는 것이 있어요.

의와 거룩이 채워져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져서 일곱째 날 안식이 되어요.

엿새 동안 예수님이 부지런히 우리 안에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듯이 새로운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십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그러니 구원이란? 단회적이면서도 현재 진행형이에요.

이미 얻은 구원이면서,

현재 이루어가는 것이고,

장차 얻게 되어 있어요.

묵시적인 입장에선 이미 완성된 구원이고 완료가 되었어요.

마치 삼층천에 올라가 있는 바울처럼 완료된 구원이에요.

 

그러나 아직 역사 속에 바울이 고난 중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듯이 우리도 이루어가고 있어요.

바울도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을 향하여 쫓아간다고 했어요.

쫓아가는 구원은 장차 얻게 될 구원이에요.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졌어요.

야곱과 에서처럼 이미 창세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이 된 채로 태어났어요.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완료이고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창세전에 예정 된 수순으로 역사 속으로 보내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창세전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현재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또 장차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구요.

이 구원관을 잘 이해하세요.

 

이 구원은 우리의 잘잘못으로 취소되거나 실패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미 야곱처럼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완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야곱은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야곱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구원은 야곱의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지가 않아요.

이는 야곱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얻은 구원은 역사 속에서의 우리들의 행실로 인하여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구원의 근거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에요.

 

자 그럼! 성경의 중심사상인 예수님의 구속사로 천지창조이야기로 더 살펴봅시다.

성경은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구원 받는 이야기라고 하였어요.

아까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에 빠져 있는데 그 땅이란 바로 자기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혼돈으로 허무하고 엉망진창이고!

자기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공허로 텅 비어 있고!

자기백성이 죄로 인하여 흑암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르고 있어요.

 

이제 예수님이 자기백성들 안에 혼돈으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을 구별해 해 주시고,

공허로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

흑암으로 분간치 못하는 것을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창조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 속에는 섞여 있는 것에서 구별해 빼내 주는 것도 있지만, 채워주는 것도 있어요.

 

이 두 가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었다는 창조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가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간과치 마세요.

 

지금 엄청 중요한 말을 했어요.

반복한다고 짜증내지 마시고 잘 이해하세요.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겁니다.

언제까지 하느냐 하면 엿새가 차기까지 하세요.

우린 아직 엿새 가운데 있어요.

엿새 동안 천지 속에 만물이 다 이루어지면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로 갑니다.

이름하여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다 채워지기 전에는 못가요.

마치 밀린 방학숙제를 다 하여야 하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다 하게 하세요.

새로운 피조물로서 채워야 할 것을 다 채워야 우리 인생이 끝이 나요.

무얼 채우는가 하면 예수님의 것으로 채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세요.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을 일컬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정복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세요.

무엇을 정복 하는가 하면 우리 몸을 정복하세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 둘씩 정복해 나가세요.

아담에 것을 빼내고 예수님에 것으로 체우세요.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하니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예수님이 죄 아래 있던 우리를 빼내셨어요.

죄 아래서 빼낸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마치 첫 아담처럼 빈 그릇이에요.

 

이제 그 빈 그릇 속에 채우세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우십니다.

빈 그릇과 같은 아담이라는 천지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만물의 풍성함들로 채워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하세요.

 

천지란? 성도의 몸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성도의 몸을 구원하셨어요.

왜? 몸을 구원합니까?

이는 몸으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에 성령이 오신 겁니다.

구원된 몸 속에 성령이 오셨어요.

 

이건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에 운행하던 그 하나님의 신이 우리 몸 안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몸에서 하늘에 것과 땅에 것으로 갈라내시고 또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몸에서 주인으로 일을 하신다고 하여도 무방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일하심으로 말하여도 오해하지 마세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라낼 것은 갈라내고 채울 것은 채우세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뭔가 만들어 가세요.

 

예수님이 화가처럼 우리 몸을 가지고 당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내신단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이루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만족해하시면서 안식을 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빼내시고 의와 거룩으로 채우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서 안식을 하시게 되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곧 우리 안에 성육신 하신 것이에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오셨잖아요.

이는 곧 우리 안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이건 시내산 위에 계신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신 것과 같아요.

왜? 하나님이 시내산 위에 계시지 않고 율법이라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셨는가요?

이는 이스라엘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애굽에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성막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은 곧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곧 성막이기도 하지만 우리 몸도 곧 성막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잖아요.

그럼 천국이 우리 안에 임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 안에 원래 있던 나라가 있어요.

누구의 나라입니까?

마귀의 나라이지요.

이름하여 지옥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둠 속에 예수님이 빛으로 천국을 몰고 왔어요.

마치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처럼 들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엔 두 나라가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과 원래 있던 지옥이 있어요.

우리 안에서 땅에 것은 빼내시고 하늘에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세요.

 

성령이 마귀의 것을 멸하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세요.

마치 여호수아가 군대 장관을 앞세우고 가나안 성읍들을 하나 둘씩 정복해 갔듯이 성령이 우리 안에 옛 사람을 하나 둘씩 정복해 나가실 것입니다.

정복 해 나갈 때마다 우리는 부인이 되어져요.

나 라는 존재를 점점 후패해져 가요.

 

비로서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창조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고 해요.

구약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한 전쟁은 곧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예수님이 우리 몸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세요.

 

우리 몸은 전쟁터에요.

그러니 한시라도 편할 날이 없어요.

예수님이 육신의 소욕들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빼 내세요.

빼내 질 때마다 우린 죽을 맛인 겁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요.

 

예수님은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모습들을 그려내세요.

우리 몸은 예수님을 그려내는 캔버스에요.

예수님이 우리 몸에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들을 하나 둘씩 그려나가세요.

이걸 예수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어요.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런 흔적들을 지니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 흔적들을 새기십니다.

 

자 보세요.

창세기 1 장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지요.

떨어질 때마다 텅빈 공간 속에 뭔가 하나 둘씩 채워지지요.

 

하늘엔 해와 달과 별이 채워지고!

공중엔 새들이 날아다니고!

땅에는 각종 나무와 식물과 채소들이 나고!

각종 짐승들과 생물들이 살아나고!

바다엔 고기들이 헤엄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들이 충만하게 채워지지요.

 

하늘에는 새 소리가 지저귀고!

땅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각종 나무들을 열 두 가지 과실들을 주렁 주렁 열리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함이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드셨나요?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어디에다 만드나요?

우리 안에 만들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세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억울함과 불의와 추악과 음욕과 탐심과 같은 것들을 하나 둘씩 차압해 가십니다.

 

이때마다 우리 몸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죄인에게 있어 제일 좋은 것이 죄 짓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 짓지 말라고 하니 몸이 고난인 겁니다.

죄 짓고 싶어하는 나 라는 존재가 하나 둘씩 차압당하며 부인되어지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이를 고난이라고 해요.

 

내 욕망이 무너지고!

내 자존심이 사라지고!

내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내 의가 사라져 버려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가고 그 자리에 대신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로 채우세요.

이게 성도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내 것이 차압당할 때마다 예수의 흔적들이 불도장처럼 찍혀져요.

그럴 때마다 우리 육신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갑니다.

만물의 찌끼같이 되어가요.

육신의 소욕들이 배설물처럼 쏟아져 나갑니다.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예수님이 그렇게 몰고 가세요.

 

예전엔 누가 욕을 하면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이젠 그러려니 해요.

그럴 수 있지! 라고 무덤덤해 진다니까요.

이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를 자꾸만 포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이기고자 했지만 이젠 이겨 보아야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기든 지든 개의치 않게 되어요.

 

설령 옳고 그름을 가지고 싸워서 내 옳음이 증명이 된들 무엇 하겠어요.

싸우기가 싫어져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을 알기에 옛날처럼 방방 뛰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성화가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나를 그만큼 죽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정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일이면 또 살아나지만 말이에요.

그럼 또 예수님은 마치 문방구 앞에 두더쥐 게임기처럼 머리를 치켜든 내 자아라는 두더쥐를 방망이로 두들겨 패듯이 패서 십자가에 죽이세요.

 

우리 안에 여전히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옛 사람이라는 놈이 있어요.

이 놈이 자꾸만 머리를 들게 한단 말입니다.

그럼 여지없이 또 말씀의 방망이가 두들겨 팹니다.

우린 날마다 이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구원이란? 이처럼 우리 몸이라는 천지(天地) 속에다 만물(萬物)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천지(天地)는 몸이고,

만물(萬物)은 예수님의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채워질 때마다 우리 육신은 부인이 되어져요.

 

신앙생활이란? 쉬운 말로 아담의 것을 빼내고 예수님의 것들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 의를 뽑아내고 예수님의 의로 채움을 입는 것이에요.

이를 두고 천지(육)와 만물(영)을 다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우리 안에 천국을 만드셨어요.

우리 안에서 땅에 것을 빼내고 하늘에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육신의 소욕을 빼앗아 가시고 성령의 소욕으로 채우세요.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은 우리더러 세상을 정복하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정복해 가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복당할 때마다 우리 것은 하나 둘씩 빼앗기게 됩니다.

 

내 자랑 거리를 빼앗아 가고!

내 영광을 빼앗아 가고!

내 가치를 빼앗아 가십니다.

예수를 믿는 세월이 많아질수록 많이 빼앗기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성공하여 영웅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세상이 좋아 지는 것이 아니라 싫어지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비의 유업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여 아비의 유업을 한 터럭이라도 받지 못하게 하셨고!

야곱에게 장자의 유업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유업을 단 한 톨도 받지 못하게 하시려고 정든 고향 부모 친척이 사는 집에서 쫓아내 버리시고!

요셉에게 야곱의 유업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형들에게 버림당하게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이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정복당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제할 것은 제하고 새길 것을 새겨 넣으시듯이, 예수님이 우리 몸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가면서 뺄 것은 빼내고 채울 것은 채우고 예수님이 만들고 싶은 작품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때로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 할 것이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 하면서 담금질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띄우고 끌려가는 인생살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 영광을 빼앗고 어린양을 찬양하도록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빼내시고 그에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날마다 부정당하고 죽임 당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내 가치성이 상실되고 내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어요.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정복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본래의 자리인 죄인의 자리 즉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나는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사는 개 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어린양이 찬양되기 위해서 우린 점점 부인되어지고 내 영광이 빼앗기는 삶을 살아지게 됩니다.

내 소원을 번성하고 생육하고 충만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 소원을 차압하고 빼앗고 그 자리에 대신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으로 채우십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케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군대 장관이 되셔서 이 전쟁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 양을 찬양하는 그 일 조차도 인간에게 주지 않고 어린 양이 다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으로 수거해 가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 것은 너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자랑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어요.

우리기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죽여도 은혜이고 살려도 은혜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하면 자기 자랑 거리가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우린 우리를 위한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우리입니다.

죄 아래 있을 땐 나를 위한 나로 살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정복하시고 난 후로는 나를 위한 나는 죽었고 예수를 위한 나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걸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럴 때 엿새 동안 창조가 완성이 되고 일곱째 날이 됩니다.

우린 아직도 엿새 속에 있어요.

예수님이 엿새가 차기까지 우리 안에서 우리 것을 빼내시고 예수님의 것을 채울 것입니다.

나를 정복하고 다스려 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안식을 하십니다.

안식이란? 모든 일을 다 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쉬는 것을 말해요.

안식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수고하고 일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슬픔이 없는 안식은 없어요.

여호와의 안식은 반드시 엿새 동안 정복당한 수고와 슬픔이 있어야 주어집니다.

 

안식은 우리 안에서 가나안 전쟁이 끝나야 이루어져요.

가나안 전쟁은 우리 육신이 살아 있는 한 계속되어집니다.

가나안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우린 도살할 양처럼 죽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창조주가 되셔서 우리 안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와 같은 일들은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엿새가 차기까지!

 

엿새가 차면 일곱째 날에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으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다 이루시면 우리의 몸도 안식하게 됩니다.

이름하여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장례식 때 꼭 증거하는 말씀인데 보시고 마칩시다.

 

이사야 57장입니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성도가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은 침상에서 편히 쉬는 안식인데 뉘라서 이 축복을 알 수가 있는지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린 언제쯤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가 될까요!

그 날을 고대하면서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겉 사람을 날로 후패하고 속 사람은 새롭게 되어 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날이 가까이 다가옴을 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주께서 시작 하신 일이므로 주께서 반드시 이루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정복하시고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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