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하나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정낙원 2011. 11. 7. 01:59

하나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신 2:1-9)

 

신 2:1-9절 “우리가 회정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행하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고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행한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8 우리가 세일 산에 거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진행할 때에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와 성도들에 모형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가는 길은 성도가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模型)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전 생애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은 성도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간섭하신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림을 보고 실체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구약의 그림을 신약에서 어떻게 실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과 같은 내용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갈 자들에게 여기까지 어떻게 간섭해 왔는지를 말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선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업이란? 땅입니다.

땅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성도들의 인생 전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도에겐 이 세상 것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알다시피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이란?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럼 성도의 기업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기업이 없다는 것은 나그네란 말입니다.

나그네의 삶이란? 한마디로 고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세의 이야기가 그리 달가운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성들에게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을 한마디로 하나님이 부족함 없이 동행해 주셨다고 합니다.

 

7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7절 내용 그대로를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 년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넙죽 넙죽 받아먹고 살았습니다.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이건 모세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이 해 주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합니다.

대접을 하는 자가 아니라 대접을 받는 자가 대접을 잘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평가합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이 아무리 나에게 잘 해 주어도 자기가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면 잘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아무리 정성껏 준비하여서 잘 대접을 해주었다고 하여도 내가 맛없이 먹었다면 대접을 잘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매사를 자기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정성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뜻에 맞느냐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본인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이들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기껏 도와주었더니 원망하고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계신데 미워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신데 우리가 사랑으로 받지 않고 미움으로 받으면 미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고선 선지자들을 보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지금 너희를 이렇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한 것은 사랑이고 평안이란다!

내 마음은 너희 마음과 다르니 너희가 좀 이해 해 주렴!

그러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이를 두들겨 패면서 하는 말고 같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패면서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라고 말합니다.

아이의 생각엔 사랑이란? 무엇을 하든지 잘했다고 하고 무조건 칭찬해 주고 자기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기 마음대로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 게임을 해도 가만히 두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부모는 공부 안하고 게임을 하면 게임기를 박살을 냅니다.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팹니다.

그러면서 다 너를 사랑해서 라고 합니다.

아이 입장에선 아무리 보아도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이건 부모 자식 간에 영원히 좁혀 지지 않는 갭입니다.

큰 구렁입니다.

 

이 큰 구렁이 언제 좁혀 지는가 하면 자신이 커서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기 자식을 낳아서 기르면서입니다.

내 자식을 키워보아야 비로서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나를 두들겨 패면서 사랑한다고 하신 말씀들이 이해가 되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죽여도 사랑이고!

살려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이걸 신약에선 바울이 믿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겐 모든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두들겨 패도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기업을 주지 않아도 사랑입니다.

 

모두가 사랑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 사랑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간과치 말아야 하는 안목입니다.

 

성경은 인간 입장에서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마다 인간들 입장에서 보아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시험에 들고 실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심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기업을 주시지 않을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한 마디로 회상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에 동의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년을 한마디로 말하면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삶이었습니다.

눈만 뜨면 불평하고 악악거리고 원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이 간섭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광야에서처럼 부족함이 없이 간섭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게 신명기 전체 내용입니다.

 

모세의 말은 너희들은 이제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다가 하나님께 징벌을 당한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의 징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곳에서든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너희들이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하여도 거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지 않으면 그 곧 역시 광야와 같은 곳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은 또 다른 광야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을 대하였듯이 가나안에 들어가도 동일하게 간섭을 하실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간섭하셨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4-5절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찐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8-9절 “우리가 세일 산에 거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진행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18-19절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땅에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땅입니다.

그 땅을 지나서 가나안으로 갑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을 지나 천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에서에 후손들이 사는 땅을 지나가듯이 우리도 에서의 땅을 지나갑니다.

말이 지나가는 것이지 40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겐 땅 한 뼘도 기업으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에서의 자손들에 땅을 탐내지 말고 또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모압과도 다투지 말고 그들의 기업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암몬 족속과도 다투지 말고 그들의 기업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들 기업은 여기에 없다고 합니다.

그 땅에 살면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미칠 일입니다.

 

왜? 땅을 안 줍니까?

그는 이 땅은 에서의 후손들에게 준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가 에서의 자손들입니다.

광야란? 이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세상은 에서의 후손들이 기업으로 살아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에서의 후손들에게 이 세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에서의 후손이 누구인자 살펴보아야겠지요.

 

에서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쌍둥이 형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 형제입니다.

그런데 분깃이 다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 어미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모태로부터 운명이 갈려서 태어납니다.

야곱은 천국으로 가는 상행선 티켓을 받고 태어났고! 에서는 지옥으로 가는 하행선 티켓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하늘에 유업을 이을 자로 출생을 하고! 에서는 땅에 유업을 이을 자로 출생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에서는 하늘에 복을 받지 못하고 땅에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두 민족을 상징하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어떻게 간섭을 해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들을 어떻게 간섭을 해 가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과 에서는 시청각 교제로 태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야곱은 구원 얻을 자의 표상이고, 에서는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의 표상이라고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천국백성의 모형이고 에서는 지옥백성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영적 성도의 표상이고 에서는 육적 교인들의 표상입니다.

 

이삭이라는 한 집안에 두 민족의 표상이 있다는 것은 한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신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야곱의 계보에 속한 자가 있고 에서의 계보에 속한 자들이 있습니다.

 

에서의 후손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육적 신자들을 표상합니다.

육적 신자는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어도 세상 사람들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믿습니다.

 

모세가 에서의 기업을 탐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서의 후손들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지금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백성들은 모두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모두가 야곱의 12 아들을 통해서 번성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12 아들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종살이 시킬 때 에서의 후손들에게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의 땅에서 살도록 해 두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후손들을 가나안으로 인도 하실 때 시험코자 미리 그들이 통행 하여야 할 길목들을 차지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후손들에게는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목들의 땅을 주셨고, 야곱의 후손들에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에서의 후손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지옥 백성들이고,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천국 백성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땅은 이 세상을 말하고 야곱의 후손들이 들어갈 땅은 천국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갈 백성들은 이 세상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은 단지 천국의 모형 일뿐 천국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곳에 들어가서도 에서의 후손들과 같이 너희들을 유혹하는 것들이 있을 터이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을 다 쫓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광야 길에 있던 에서의 후손들과 같은 자들이 됩니다.

 

출애굽한 1 세대들에겐 광야에서 에서의 후손들이 유혹을 하였지만, 광야에서 출생한 2 세대들에겐 가나안 원주민이 유혹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거민들을 다 쫓아내라고 하신 겁니다.

가나안 전쟁을 승리한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었습니다.

 

여호수아 23장을 봅시다.

 

수 23장11-16절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유언(遺言)을 합니다.

너희가 가나안 원주민과 사귐을 가지면 반드시 그들의 올무에 걸려서 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삶에 방식대로 살아가게 되면 필경 망하게 되니 그들과 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 쫓아내지를 않고 조금씩 남겨 놓았습니다.

사사기 1장을 봅시다.

 

삿 1장 21절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 ~ 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2장 20-23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은 그 땅 거민을 다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각 지파마다 자기들이 받은 땅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조금씩 남겨두었습니다.

남겨 둔 이유는 그들을 가지고 집안 일을 시키고자 함입니다.

육신의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도리어 가나안 원주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모세가 지금 에서의 후손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미래 가나안 원주민을 지칭하여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원주민은 광야에서는 에서의 후손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땅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하나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에겐 가나안은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들이 눈엔 광야만 보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가나안 땅은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감추어진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뿐입니다.

 

약속만이 소망입니다.

약속이란?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지 현재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약속도 미래의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땅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 세상은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정거장이 너무도 화려하여서 우리 눈을 사로잡습니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습니다.

우리 눈에는 정거장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거장에 붙잡히지 않는 것은 오직 천국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성도에겐 어떤 환경이나 어떤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환경을 불문하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이 세상을 정착할 곳으로 보느냐 아니면 정거장으로 보느냐 입니다.

내 환경이 정거장인가!

아니면 장착할 곳인가 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정거장으로 보이면 짐시 지나갈 것이니 이길 수가 있지만 정착할 곳으로 보이면 슬퍼집니다.

내 자식이!

내 아내와 남편이!

내 부모형제가 다 정거장으로 보이면 기대하지 않지만 정착하여야 할 것으로 보이면 기대하게 됩니다.

 

기대하면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허상입니다.

이미테이션입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진짜는 하늘에 있습니다.

내 부모도 하늘에 있고!

내 남편도 하늘에 있고!

내 가족도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니 허상인 땅에 있는 것으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지나가는 정거장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정거장과 같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정당한 값을 주고 무엇이든지 사 먹으라고 합니다.

 

6절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이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 특권층을 살게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핑계로 공짜로 먹고자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쉽게 살려고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게 피 땀 흘려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광의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염세주의가 아니에요.

천국을 핑계 삼아서 현실을 대충 대충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신 생명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건달처럼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핑계로 건성 건성으로 살아요.

그건 신앙을 핑계로 자기 게으름을 희석시키는 악입니다.

성도는 2 달란트 5 달란트 받은 종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회계하는 자처럼 말입니다.

코람데오!

 

죄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편하고 좋은 것을 찾고자 합니다.

등 따습고 배불리기를 원합니다.

죄인들은 신에 힘을 빌려서라도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들 세계에선 우상숭배가 늘 자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이용해서 육신의 이득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덕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당한 값을 주고 사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우상숭배를 하지 못하게 함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데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신앙을 세상 살아가는데 이용하고자 합니다.

예수 믿고 덕을 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성도가 만약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을 섬기느냐 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너~ 예수를 왜? 믿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하는 말이 이 시대 성도들에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도 자기 뜻에 맞도록 증거해 달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걸 귀가 가려워서 사욕을 쫓을 스승을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믿고 득 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 탐욕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우린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죄가 그대로 폭로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특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 믿어 줄 테니 세상에서 특권층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탐욕이라는 우상성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는 자기 안에 감추어진 탐욕을 하나님이 속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목사들은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면서 입술로는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여야겠으니 교회를 부흥 시켜 달라고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속아 넘어 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속이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코미디 같고 아이러니 합니까?

누가 신이고 누가 피조물인지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습니다.

막무가내 식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신앙을 흥정하듯 하고 있습니다.

내 소원을 안 들어주면 교회 안 나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교인들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과 비교하면 얼마나 성경과 다른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를 행진하던 백성들에게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야말로 천국과 같이 보입니다.

자기들은 물도 없고 매일 같이 만나만 먹으면서 광야에서 고생하는데 에서의 후손들은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은 부러움 그 자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에서의 후손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빌딩을 짓고 아파트에 사는데 야곱의 후손들은 개 고생하면서 광야 길을 행진하고 있으니 불만을 쏟아 낼만 합니다.

 

하나님도 참으로 야속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려면 이 놈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나 인도할 것이지 꼭 눈 앞에 빤히 보이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사흘 굶은 놈 앞에 밥상을 차려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불가능해요.

 

그럼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하나님이 짱구가 아니잖아요.

뻔히 죄 지을 줄 알면서 죄 짓는 환경으로 몰아넣고 있잖아요.

 

그래요.

여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할까요?

이는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고발코자 함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은 순종하라고 합니다.

아니~ 순종 할 수가 없도록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고선 왜? 순종하라고 합니까?

이는 죄를 끄집어내고자 함입니다.

왜? 죄를 끄집어냅니까?

이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땅이 어떤 곳입니까?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넘치는 곳이란 말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다른 말로 긍휼이라고 합니다.

 

긍휼의 나라에서 살려면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긍휼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 후손들에게 긍휼을 주고자 합니다.

야곱을 일컬어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그럼 야곱의 후손들도 긍휼을 입을 자들입니다.

 

긍휼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을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곳으로 인도해 놓고선 그들이 감당 할 수도 없는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여 우린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 할 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죄를 이기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죄 짓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너희들 죄 지으면 죽인다고 합니다.

이는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살리고자 함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죄인에게 가장 행복한 것은 죄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 짓는 일은 인간의 육체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죄 짓는 일을 하면 신이 나고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어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사는 것이 더 재미가 있습니다.

죄인은 죄 짓는 일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합니다.

아주 쉬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꼭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불만을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것인지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무조건 못하게 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명령법들은 모두가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죄인이 가장 쉬운 것이 죄 짓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악(惡)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본성과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따르자니 원초적 본능이 울고!

원초적 본능을 따르자니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게 되니!

여간 고민스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순간 순간 갈등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본성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축복하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아니 죽이고 싶도록 미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몰랐을 땐 미워하면 속이 시원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니 괴롭습니다.

차라리 안 들은 만 못합니다.

사랑하려니 배가 아프고!

미워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여기는 기도를 합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어떻게 도와주기를 바랍니까?

하나님 뜻을 이루기보단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 잔(殘)은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쓴 잔을 마시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은 나를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용납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지시에 거역해 봅니다.

내 고집대로 했는데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무겁습니다.

심령이 편치를 못합니다.

 

깨달은 것이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면 심령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반복하다 보면 말씀에 거역하면 금방은 재미가 있는데 지나고 나면 마음이 괴로워서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내가 손해보고 말지! 라고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짓는 것이 싫게 만들어서 죄를 멀리 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게 성도가 가지고 있어야 할 실력입니다.

이러한 실력은 실패를 통해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죄의 몸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깨달음이 있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인가를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얼마나 죄 앞에 무기력하고 악한 종자인가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웅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패잔병으로 세우십니다.

개 같이 무가치한 인간으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도록 하십니다.

그래 나 같은 죄인이 천당에 가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소리인지를 알아가게 하십니다.

천당에 가서도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유구무언이 되게 하십니다.

처음엔 산을 들어 바다에 빠트릴 정도로 대단한 열심이었는데!

지나고 나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는 고백만 남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성도들을 특권층으로 살게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특권으로 살면 자기를 포기하고 비우는 실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는 망하고 예수가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잘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긍휼을 입고 용서 받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폼 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쪽 팔리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해지고 속 사람은 강건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살고자 합니다.

겉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겉 사람을 자꾸만 깨트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만물의 찌끼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실패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창피 당하게 만듭니다.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지면서 이기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한국 축구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으로 비유하여서 말합니다.

실력은 실전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실력이란? 강팀과 할 때 강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강팀들을 많은 돈을 주고 사와서 친선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은 한국 팀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한국 팀들은 유럽 팀만 만나면 기가 죽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은 역으로 유럽 강팀들만 골라서 싸움을 붙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약팀이 강팀에게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지는지 문제점들을 깨닫게 합니다.

 

일각에서는 선수들 사기를 도리어 죽인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과거의 한국 팀 감독들은 강팀들과 붙어서 지면 사기가 떨어진다고 하여서 약체 팀들과 만 실전을 하였습니다.

우물안 개구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30년 동안 월드컵 본선에는 나갔지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유럽 팀에 대한 기를 살리려고 강팀들과만 경기를 하였습니다.

번번이 깨집니다.

쪽 팔립니다.

그런데 깨어지고 쪽 팔리면서 실력이 쌓여갑니다.

히딩크 감독은 약점을 고치라고 강팀들과 붙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월드컵이 열리자 불가능이 가능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유럽에 강팀들이 한국팀과 만나면 번번이 깨어집니다.

보따리 싸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흔히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닙니다.

실력입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이루지 못한 것을 단번에 4강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히딩크라는 감독이 아주 약한 놈들을 아주 강한 놈들에게 붙여서 지게 하여서 종국엔 강한 팀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강한 놈들에게 무참히 깨어져서 창피 당하게 만들고, 쪽 팔리게 만들어 놓고서는 쪽 팔리게 한 그 놈들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영원한 감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이라는 강팀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약점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시험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죄인들이 무엇이 약한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그 약함을 강하게 하시려고 세상이라는 상대를 통해서 약점을 공격하도록 시험거리들을 두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을 위해 세상이라는 강한 곳에 두고서 실전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패 할 줄 알면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잘하는 것은 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되기 때문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려운 것은 안 하려고 하고 자신 있는 것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자기보다 큰 아이들하고는 놀지 않으려 합니다.

놀아도 꼭 자기보다 약하고 어린 아이들하고 놀면서 대장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그럼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성도가 세상 속에서 믿음을 잘 지킬 것 같았으면 훈련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의 요구에 맞는 실전 상황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 집어넣어 놓고 천국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옥 속에서 천국을 바라봅니까?

어려움 속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금까지 광야 40년을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7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지옥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40년이나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년을 버틴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지만 광야생활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도피하는 마음으로 하루 빨리 광야를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편안히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들이 어디에 가서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복인 줄 모르면 소용없다고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날 믿지 않으면 그것이 또 광야라고 합니다.

 

성도에겐 좋은 환경이란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모르면 어디에 가도 지옥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알면 그 어디라도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도 저주의 땅이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광야도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지옥 같은 감옥에서도 천국에서처럼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그 어디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에겐 이 세상에선 천국과 지옥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도에게는 광야냐?

가나안이냐?

이 세상이냐?

천국이냐? 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는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져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복인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입니다.

좋은 환경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까?

돈입니까?

믿음입니까?

 

성도에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에 개념을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신다 함은 때를 따라서 간섭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도와주시는 것이 만족이고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선 죄를 탐욕이고 탐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탐욕이란? 모아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아두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려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사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사란? 그 때 그 때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사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때 그 때 알아서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기 손에 무엇이 있어야 만족해하고 안심을 합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이나, 에돔이나, 암몬 족속을 곁에 두고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시험을 하십니다.

 

우리는 원수를 치워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원수를 곁에 두고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천국백성의 자격이 안 되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나 같은 몸이 천국에 가겠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나를 천국에 보내 달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자기 주제를 모르는 소리임을 알게 하십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나 라는 존재가 얼마나 잘못된 인간인가를 뼈저리게 알아 가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깊이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앞에 감탄과 감동에 빠질 수밖에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비로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 24장로들이 자기들이 쓴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에게 던져드리고 있습니다.

왜? 면류관들을 어린양에게 벗어 던집니까?

이건 자기들이 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써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천국에 온 것은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에게 드린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무엇을 한다는 말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이 깊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깊이 깨닫는 자는 자기를 자랑하지를 못합니다.

비록 자기 생명을 바쳤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 같은 죄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적임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벼락 맞지 않고 살고 있는지 놀랄 뿐입니다.

또한 자기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철없고 못난 소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당할 만한 조건들을 우리 곁에 두고서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모압과 에돔과 암몬을 지나게 하시면서 그들에 것을 탐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쉬운 말로 교회 안에 원수 같은 인간을 두시고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원수 같은 남편이나 자식이나 마누라와 살게 해 놓고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이 가장 필요한 세상에 두고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던져 놓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시킬 수밖에 없음을 알게 하시고!

왜? 성도가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들이 믿음 생활하는 길목에 눈길을 돌릴만한 것들을 두고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을 달아보시기 위해서 좋은 환경으로 개선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같이 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합니다.

원수가 없는 환경!

눈물 없고 고통 없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들의 요구를 외면하십니다.

나중에 믿음에 철이 들어서 지나고 나면 다 내게 필요한 것이었구나! 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을 일컬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 보지 않으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난 속에서 견고해 집니다.

내 연약함을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환경에 몰아넣고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천국은 은혜를 아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천국에 가도 불평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자는 불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고생을 하게 하느냐? 라고 불평 할 수가 없습니다.

 

불평을 한다는 것은 아직 자기 꼬라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환경을 가지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가를 깊이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으면 천국이고 못 깨달으면 지옥입니다.

 

전 이번 한 주간 동안 허리를 삐끗하여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내 평생에 5일 동안 누워 있기는 처음입니다.

또한 5일 동안 연거푸 병원에 다닌 것도 처음입니다.

벌벌 기면서 병원에 다녔습니다.

누웠다 일어나고자 하면 헉~ 하고 자지러집니다.

머리를 숙일 수가 없어서 며칠 동안 머리도 감지 못하였습니다.

 

그 동안 머리를 감고 산 것이 큰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몸이 아파 보니 그 동안 건강하게 산 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이고 축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앉아서 자판기를 두들기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모릅니다.

막상 아프고 보니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시려고 이런 아픔을 주셨구나 깨달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사를 알게 하시려고 허리를 아프게 한 것이구나 로 생각했습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허리 아픔도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픈 것만 보이지 그 아픔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놓치고 있습니다.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라고 주셨는데 우린 그 아픔만 보고 징징거립니다.

복을 주어도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어렵고 힘든 길로 간섭을 하실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 같은 곳에서도 감사하며 찬송 할 수 있도록 간섭해 가실 것입니다.

왜? 그냥 두시지 않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면서 엄청난 고통입니다.

자신이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현재의 환경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은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는 깨닫는 마음과 은혜를 보는 눈들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천국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국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범사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천국의 맛을 볼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놓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미련해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기이한 법도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이 열려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이 내게 큰 위로임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환란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는 눈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