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한 자들

정낙원 2011. 6. 19. 00:23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한 자들 (롬 11:17-24)

 

롬 11:17-24=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오늘 본문을 보면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 감람나무는 죄인을 말하고 참 감람나무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이고 참 감람나무는 유대인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 감람나무인 유대인들 중에 얼마를 잘라내고 그곳에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을 접붙임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을 잘라냈는가 하면 자긍하여서입니다.

잘려나간 유대인들을 일컬어 인자(仁慈)에 거하지 않고 엄위(嚴威)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자기 의(義)를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았다고 자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의가 없어도 자기 의로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는 자긍(自矜)한 것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 실력을 의지 한단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나를 부인하고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것을 붙잡지 않고 예수님 것을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속에는 반드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기 부정이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긍이란 난 죄인 아닙니다! 라는 자기 긍정이 깔려 있게 됩니다.

난 예수 없어도 괜찮아!

내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구원 받을 수 있어!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 주셔도 내 실력으로 얼마든지 성경을 이해 할 수가 있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긍이란? 자기 실력을 믿기 때문에 나타나는 교만입니다.

요즘 말로 나 복음 안다고 잘난 척하는 겁니다.

자기 실력을 믿는 자는 반드시 남을 무시하게 되어 있어요.

실력이란? 힘입니다.

힘은 반드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에 우열(優劣)이 생깁니다.

복음을 힘이라고 한다면 복음을 아는 자는 그 힘으로 없는 자를 다스리고자 합니다.

마치 난 복음 아는데 넌 모르지 하면서 무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복음 안다는 것으로 복음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남보다 낫다고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엄위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이 말 속에서 나타납니다.

넌 아직도 멀었어!

더 배워야 해! 라는 식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다 아는 자로 태어난 것처럼 꼴값을 떨어요.

이게 모두가 복음을 은사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 지식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복음을 은사로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남과 차별을 두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눈과 귀를 열어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듯이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 은혜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게 오늘 본문 속에서 말하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하여 은혜에 거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것이나 행한 것들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이나 충성이 특심한 것도 힘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힘입니다.

 

힘은 자기 근거로부터 나옵니다.

자기 근거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섬기는 자세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는 자세로 대하게 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으로 차별성을 두고 무시해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의를 근거하여 세리나 창기들과 이방인을 개 같이 취급하며 교만을 떨었던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힘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개라고 취급하고 상종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게 바로 은혜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고 세리와 창기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선 자긍하던 가지는 잘라내고 거기에 이방인을 접붙였다고 합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이방인들을 은혜로 접붙임 한 것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잘남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접붙임 당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들도 엄위에 거하면 잘린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잘려나간 유대인들처럼 엄위에 거하면 언제든지 잘려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은혜를 다른 말로 긍휼이라고 합니다.

이 긍휼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만약 이 긍휼을 잊고 잘난 척하면 유대인들이 잘난 척하다가 짤려 나간 것과 같이 짤려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여야지 엄위에 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자란? 은혜이고!

엄위란? 법입니다.

인자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긍휼을 구하는 것이고!

엄위는 난 다 압니다! 라는 교만입니다.

잘난 척 한다는 말입니다.

 

왜? 잘난 척 합니까?

이는 구원이나 복음 아는 것을 자기 실력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실력으로 붙잡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이란? 내 실력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난 척 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진짜 믿음을 가진 성도는 나 복음 안다 자랑치 않아요.

잘난 척하지 않아요.

아니 할 수가 없어요.

내 실력이 아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 것이면 판단하겠는데 하나님께 공짜로 받은 것이잖아요.

그러니 자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긍하면 잘린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 구원이 보존되기도 하고 잘려 나가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접붙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접붙였다 함은 붙이고 잘라내고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식언치 않습니다.

한 번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그 구원을 중간에 인간의 조건으로 취소되지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조건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보존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하면 잘린다고 하는 것은 은혜 받은 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한 마디로 은혜 받은 자는 은혜를 토하며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뿌리에서 은혜를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나오지 않고 엄위가 나온다는 것은 뿌리에 붙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가짜란 말이에요.

왜냐하면! 참 감람나무 뿌리에서는 가지에게 은혜를 공급하지 엄위를 공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위는 마귀 것이에요

엄위를 다른 말로 교만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서 기록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면 이런 자들을 자칭 사도요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칭 목사이고 자칭 성도라고 한단 말입니다.

자칭 복음 다 안다고 자랑하는 자들을 말해요.

자칭 믿음 좋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말해요.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사단의 회(會)이고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을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이라고 했어요.

 

사단의 회(會)란? 마귀 자식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고!

사단의 위(位)란? 마귀의 소굴이란 말입니다.

어디가 그렇다고 합니까?

교회가 그렇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그러합니까?

이는 자칭 믿음 좋고 복음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 하였던 것입니다.

 

왜? 자칭이라는 말을 할까요.

이는 그 속에는 예수가 없는데 예수를 믿는 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척 하기 때문에 인자가 나오지 않고 엄위가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뿌리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인자를 맛보지 못하여서 아담의 본성인 엄위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엄위가 나온다는 것은 교만하고 잘난 척한다는 말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잘난 척 한다는 것은 그 복음은 은사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구하고 철학이나 심리학으로 공교하게 만들어서 지식으로 쌓아진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학문으로 알아진 복음은 지식이 되어서 반드시 교만케 해요.

나 이만큼 안다고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자랑함으로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받고자 하는 겁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이렇게 복음 잘 알아!

나 이렇게 믿음 좋아!

 

이런 사람들은 복음 안다는 것으로 선생 노릇이나 하지 그 복음이 함유(含有)하고 있는 예수의 생명으로서의 섬김이 없어요.

그 속에 긍휼이 없단 말입니다.

이는 한 번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안 나오는 겁니다.

예수라는 떡을 양식으로 맛을 보지 않으니 예수의 맛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고 했어요.

자기 안에 쌓여진 선(善)이 있으면 선을 내어 놓고!

자기 안에 악(惡)이 쌓여져 있으면 악을 내어 놓아요.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이란? 선악과가 말하는 선과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법을 말합니다.

긍휼이냐! 엄위냐!

사랑이냐! 미움이냐! 를 말해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는 그 안에 받은 은혜가 용서와 긍휼을 토하여내게 되지만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인간 본연의 선악과가 주는 심판하는 것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고상하게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여도 내어 놓는 것은 반(反) 십자가 정신의 것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새 사람의 것이 나오지 않고 아담 안에 옛 사람의 것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는 짓들을 보면 반(反) 복음적으로 나타나요.

그러니 입만 열면 미움이고 시기이고 다툼이고 비판이고 정죄이고 심판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엄위에 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귀처럼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에요.

예수님에게 연합이 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님이 우리 스스로 살아가게 하지 않아요.

옛 사람의 본성을 죽이고 새 사람의 성품으로 살아가도록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성도는 그 안에서 말씀이 살아서 간섭을 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 함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역사(歷史)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黙示)입니다.

 

그럼 이 역사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묵시에서 나왔지요.

묵시란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한 감이 있으니 함축적으로 말합니다.

묵시에서 나온 내용이 뭔가 하면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러니 묵시를 언약이라고 합시다.

 

그럼 역사는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다는 말이 되지요.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 역사라는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역사가 없으면 언약을 펼칠 수가 없어요.

그럼 이 역사 속에는 창세전 언약이 옴팡 담겨져 있겠지요.

역사가 꿈틀 거릴 때마다 창세전 언약이 사건화 되어서 터져 나오겠지요.

역사라는 보자기에 언약을 싸고 있다고 합시다.

그럼 보자기가 풀럭 거릴 때마다 그 속에 있는 언약이 나올 것이 아닙니까!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어요.

제가 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쓰고 싶어요.

제 머리 속에 뭔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드러내려면 반드시 글을 쓰는 공책이 필요합니다.

 

내 머리 속에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묵시에 속한 언약이라고 한다면 그 글을 표현하는 공책을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머릿속에 있는 언약이라는 이야기는 위하여서 공책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공책이 바로 역사에요.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이미 제 미리 속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것이 있어요.

그걸 여기 종이에다 쓰고 있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제 글이 너무 길다고 합니다.

글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제 속에 할 말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께서 제가 글을 쓰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고 한다면 제 글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할 말이 많다는 뜻입니다.

 

글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제 머리에서 나왔지요.

제 머리 속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것을 묵시라고 했으니 제 머리 속은 묵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글을 쓰는 흰 종이는 보이는 것이니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종이라는 역사에다 제 머리 속에 있는 묵시의 일을 그려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풀어내는 장소에요.

도화지란 말입니다.

도화지가 없으면 그림을 그려낼 수가 없어요.

반드시 도화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 이걸 우리 구원이야기로 풀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구원했어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 무엇을 구원 했습니까?

 

몸이지요.

몸!

몸을 구원 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왜? 몸을 구원 했는가 하면 새 언약이라는 그림을 우리 몸에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그려내는 도화지에요.

성령이 우리 몸에 오신 것도 다 새 언약을 우리 삶으로 그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몸이 필요해서 몸을 구원한 겁니다.

우리 몸에다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려야 할 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화가가 되셔서 언약이라는 우리 몸에서 그림을 하나 둘씩 그려가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여백을 예수라는 그림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엿새가 차기까지 천지를 만들고 만물을 하나 둘씩 채워가듯이 말입니다.

이걸 아들에 형상을 본 받는다!

혹은 그 에게까지 자라 간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새 언약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의 실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니 성도의 삶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어요.

그만큼 바울의 일생에 예수님의 삶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겁니다.

거룩한 산 제사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몸에 재현시키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옛 사람이 죽임 당하는 십자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만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우리 몸 전체를 구원했습니까?

몸 전체이지요.

 

그럼 성도의 몸에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을 그려나가시겠지요.

몸과 마음 모두 속에 그려나가시겠지요.

몸과 마음 모두에요.

정신만 아니고,,,

마음 속엔 예수의 마음이 품어지고!

삶 속엔 예수님의 삶이 그려지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정신만 구원했으면 머리로만 예수 믿지 몸으로는 예수 안 믿어요.

이런 것을 바울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라고 했어요.

이걸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사상이 팽배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이런 것들과 싸웠어요.

 

머리로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마치 공갈 젖꼭지 먹는 아이들 같이 되어요.

아이가 공갈 젖꼭지를 빨게 되면 배가 고파 성질이 난폭해져요.

물어 버려요.

 

이처럼 머리로 예수 믿는 사람은 입으로만 조잘거리고 성질이 난폭해져요.

사나운 개가 되어요.

아무나 물어 버립니다.

 

그건 그 속이 허해서 그래요.

배가 고파서 그래요.

밥을 못 먹어서 그래요.

말씀을 밥으로 먹지 않고 지식으로 쌓기 때문이에요.

아니면 자신이 듣는 말씀이 죽은 것이라서 그래요.

죽은 말씀을 들으면 공갈 젖꼭지 빨듯이 들을수록 머리만 커지고 사나워지는 겁니다.

 

그러니 하는 짓들이 거라사 지역 무덤가에 옷을 벗고 사는 광인(狂人)처럼 되어가요.

미친 사람이 옷을 벗는 이유는 수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말씀을 들으면 수치를 몰라요.

죄 의식이 사라져요.

뻔뻔스러워진단 말입니다.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무슨 복음에 합당한 것인 줄 안단 말입니다.

 

오죽 했으면 자신들이 죄를 지음으로서 예수의 의를 더 드러낸다고 하겠어요.

이건 아주 무서운 뱀 사상이에요.

이는 마치 로마서 6장에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무슨 그런 망발을 하느냐!

죄에 대하여 죽은 놈이 어찌 죄를 먹고 마신단 말인가 라고 했어요.

이는 이러한 논리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행실을 옷이라고 합니다.

그럼 공갈 젖꼭지 같은 지식에 속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더러운 행실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행해요.

죄 의식이 없이 뻔뻔스러워요.

마치 자기 마음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 복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공교하게 지은 말로 자기 행실을 합리화 시켜요.

 

제가 지금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행실을 똑바로 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온전해지라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죄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을 받고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죄에 대하여 자각 증상이 일어나요.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멀리하고자 하는 반응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죄에 대하여 아파함이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보세요.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겔 36:24-32=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靈)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神)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방나라인 마귀에게서 빼내서 새 영(靈)을 부어준다고 합니다.

이는 십자가 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서 성령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면 새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새 마음을 준다는 것은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마음에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어요.

 

성령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요.

새 마음이란? 예수의 마음인데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에요.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이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고 하잖아요.

이건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소욕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과거 죄 아래서 살던 삶으로부터 단절하고자 하는 애통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정서로 가장 쉬운 예로 본다면 술 담배도 끊게 되고 과거에 좋아하던 것들을 버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하던 짓을 부끄러워하고!

그 일을 하게 되면 한탄이 일어나고 옛 사람이 즐기던 것들을 멀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죄를 전혀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미워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이는 성령이 임하면 죄가 미워지게 되어 있어요.

죄가 미워져야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그렇지 않고 죄에 대하여 미움이 없으면 그 사람은 거짓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나타나는 자연 발생적인 자각증상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미워하는 자각 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분은 지금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는 겁니다.

머리에 지식만 가득 채워져서 입으로만 예수를 믿고 영적 깡패가 되어 가고 있는 겁니다.

영적 깡패가 되면 자기하고 생각이 다르면 물어뜯고 죽여요.

니편 내편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적을 만들어요.

토해내는 말마다 썩은 송장 냄새가 나고 마귀 냄새가 풀풀 나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거짓 선지자이고 이들이 말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고 몽사를 받은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고 몽사를 먹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통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러지요.

하나님 말씀을 반석을 쳐서 깨트리는 방망이 같다고 했지요.

이건 하나님 말씀이 반석처럼 굳은 우리 마음을 깨트린단 말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깨트려져요.

그 말씀 앞에 꼬꾸라져요.

깨어지고 꼬꾸라진다는 것은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입는 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요.

 

여러분!

예수님을 양식이라고 하지요.

말씀을 양식이라고 하잖아요.

양식이란 먹고 배부름을 얻는 겁니다.

 

양식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는 양식에 따라 그 사람의 성질이 달라져요.

아니지요.

본성에 의해서 양식을 찾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 하실 때 각자가 먹을 양식을 주셨어요.

두 양식이 있어요.

풀과 고기에요.

풀을 먹는 초식동물이 있고, 고기를 먹는 육식 동물이 있어요.

 

초식 동물을 온순하고 남을 헤치지 않아요.

그러나 육식동물은 사납고 남을 헤쳐요.

그래서 초식 동물은 인간과 같이 살지만 육식동물은 같이 살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식동물들을 거친 들판에 살도록 하였고 초식동물들은 사람과 가까이 살게 하신 겁니다.

 

성경에선 풀을 하나님 말씀을 은유(隱喩)하고 있어요.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왕의 신하로 천거 되어 일을 합니다.

이 때 왕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자신이 먹는 왕의 진미를 줍니다.

왕의 진미는 육식이에요.

이 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왕의 진미를 거절합니다.

 

바벨론 왕은 사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마귀는 자기가 먹는 양식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먹이고자 한 겁니다.

이를 알고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귀의 양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 백성이 먹을 양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채소와 물이에요.

 

채소와 물은 초식동물이 먹는 양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양처럼 풀을 먹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자 왕의 신하가 당신이 만약에 고기를 먹지 않아서 얼굴이 초췌하게 되면 난 왕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제발 왕에 음식을 먹으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다니엘이 그 신하에게 제안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가 열흘 동안 물과 채소만 먹을 테니 그 때 우리 얼굴이 초췌하면 그 때 우리가 당신이 주는 왕에 음식을 먹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얼굴이 도리어 광채가 나고 빛이 나는 겁니다.

그러자 왕의 신하가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겐 채식만 주었어요.

이건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채소만 먹었다는 것은 우린 초식 동물입니다 라는 말과 같아요.

우린 양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풀을 주세요! 그랬어요.

양이기 때문에 고기는 거부하고 풀을 먹은 겁니다.

 

이게 나중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아세요.

그냥 은혜로 들으세요.

시비 걸지 말고 전 이렇게 은혜를 받으니까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지요.

이 때 사자가 다니엘을 안 잡아먹어요.

시큰둥해요.

사자가 왜? 시큰둥하고 다니엘을 안 잡아먹습니까?

사자 눈엔 다니엘은 풀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고기를 먹는 육식 동물이에요.

그런데 풀이 들어 온 겁니다.

다니엘이 들어오자 왠 풀이야!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겁니다.

 

그래서 사자가 다니엘을 소 닭 보듯 했어요.

그런데 다니엘을 음해하던 자들을 사자 굴에 던지자 입구에서 사자가 씹어 먹었어요.

고기가 들어 온 겁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잡아 먹은 거에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에요.

이들이 풀무불 속에 들어가지요.

그런데 불꽃이 이들을 사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이 물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 속엔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 이들이 먹은 음식이 뭐라고 했나요.

물과 채소라고 했지요.

그러니 물통이 불에 들어가니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을 불 속에 집어넣으려던 사람은 불 입구에서 타 죽었어요.

왜? 그럽니까?

이들은 불에 탈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시비 걸지 마세요.

괜히 정낙원 목사는 다니엘을 풀이라고 하고 그 세 친구는 물통이라고 하더라고 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어뜯는 사람이 많아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전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으니까요.

남이 은혜 받는 것까지 관리하려 하지 마세요.

양식이란 이런 겁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말한 것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양식이에요.

양들이 먹을 양식이란 말입니다.

양식은 사람의 성격을 결정해요.

그래서 예수를 먹은 사람마다 양처럼 온순해져요.

 

예수를 먹고 사는 양과 같은 성도는 남을 헤치지 못해요.

도리어 헤침 당해요.

양들이 얼마나 바보인가 하면 이리가 와서 자기 몸을 뜯어 먹는데도 가만있어요.

싸우질 못해요.

그 속에 싸우는 기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무 말 안 해요.

그냥 당하기만 해요.

그래서 그 속에 진짜 예수가 있는 성도는 예수처럼 당하기만 해요.

 

예수님이 양식이라고 한다면 마귀도 양식입니다.

마귀는 육식동물들이 먹을 양식이에요.

그러니 마귀의 말씀을 먹은 사람은 사납고 남을 헤치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는 것입니다.

툭 하면 시비 걸고 자기 힘 자랑하고 남을 깔아뭉개려고 합니다.

남에 집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하려고 해요.

 

제가 남을 설득시키려고 하지 말고 변론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복음은 변론이나 설득으로 알아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깨달아지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해요.

이걸 알면 자기하고 다른 사람을 시비 걸 이유가 없어요.

그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할 일이나 하면 되어요.

자기가 받은 은혜로 감사하며 봉사하고 섬기면서 살면 되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나하고 다른 말을 하느냐!

너 이단이지!

너 복음 모르지!

너 성령 안 받았지! 그러고 있어요.

자기하고 다르면 쫓아내요.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런 짓이 마귀가 하는 짓인지 몰라요.

심판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야 하는데 자기가 심판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 된 마귀의 양식을 먹은 자들이 하는 짓인 겁니다.

이 모두는 마귀가 주는 양식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는 말씀을 먹는 사람은 복음을 힘으로 사용해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해요.

그 복음으로 남을 살려내지를 못해요.

엄마처럼 참고 기다리고 보듬어 주고 하는 일을 못해요.

 

그런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들을 보면 전부가 상하고 찢긴 것들만 남아 있어요.

자기 주변에 그런 친구들하고만 놀아요.

남을 씹어대는 재미로 말씀을 배우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배워도 남을 이기는 논리를 개발하는 겁니다.

그 말씀에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방망이가 반석을 깨트리듯이 깨트림 당한 흔적이 없는 겁니다.

입술로는 예수 예수 하는데 나타나는 행사 머리는 영락없는 마귀에요.

이는 예수를 먹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안 나오는 겁니다.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를 먹은 사람은 그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유출되어요.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디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에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요.

 

여러분! 생명을 살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줄 아세요.

 

이건 자기가 죽지 않고서는 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뱃속에서 나온 갓난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죽이고 그 아이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여자는 약하고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하지요.

여기서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는 자를 말하고, 엄마는 아이를 낳은 자를 말해요.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 자기 몸뚱이만 챙기고 살지만, 아이를 낳은 엄마는 자기 몸뚱이가 걸레가 되어도 낳은 아이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그토록 속을 썩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지요.

바울은 스스로를 아비(엄마)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은 예수라는 양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참아주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보듬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을 많지만 아비(엄마)는 적다고 했어요.

스승은 여자같이 자기 몸뚱이만 챙기는 자이고!

아비는 엄마처럼 자기 몸이 걸레가 되어도 자식을 키우는 자에요.

 

스승은 복음을 이용해서 자기 몸뚱이만 챙기면 끝이에요.

실제로 고린도교회에 거짓 종들은 성도들에 것을 빼앗고 위에서 군림하고 다스렸어요.

교인들 뺨을 때리면서 말이에요.

이게 스승이에요.

남이야 어떻게 되는 상관없어요.

교인들이 어떻게 살든 말든 신경 안 써요.

그냥 방관해요.

 

자기 안에 예수가 없음을 감추기 위해서 주께서 알아서 하겠지 간섭하지 말라고 해요.

이건 엄청 복음적인 말 같지만 그 속에 예수와 같은 부모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그러진 길을 가면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삯을 받고 가르치는 선생은 악을 보고도 방치하는 겁니다.

그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손익계신만 합니다.

자기에게 무슨 불 이익당하는 일이 닥치면 길길이 날 뜁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벌어지면 그 때는 주께서 간섭하겠지 라고 맡기지 않고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처리해요.

 

이런 사람들은 판단하는 잣대를 두 개 가지고 있어요.

누가 자기에게 유익(有益)이 되는 일이면 성령이 하는 일이니 간섭하지 말고 가만 두라고 하고!

반대로 누가 자기에게 해(害)가 되는 일을 하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제재해요.

항상 자기에게 유익이 되느냐 불이익이 되느냐!

내게 유리(有利)하냐!

불리(不利)하냐!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어요.

자기가 챙길 것만 챙기면 끝이에요.

 

그러나 아비(엄마)는 돈이 목적이 아니고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참고 또 참고 인내하면서 보듬고 사랑하며 돌보고 지켜요.

이건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엄마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보듬고 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자신의 몸을 걸레처럼 버리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마 같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낳아진 아이가 있어요.

누군가 하면 새 사람이에요.

이 새 사람을 키우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탄식하면서 돌보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한다고 하지요.

이는 탄식하면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왜? 탄식을 합니까?

우리가 그토록 말을 안 들으니 그렇지요.

 

스승 같으면 확 내 팽개치고 니 마음대로 해 하고 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이 아니고 엄마이기 때문에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겁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예수님도 아파하고!

우리가 일어서면 예수님도 기뻐해요.

 

엄마는 자식에 따라서 울다가 웃다가 합니다.

자식이 잘 되면 웃고 못 되면 아파해요.

엄마는 자식에게 엄마의 사랑을 새기는 겁니다.

자식은 엄마의 사랑으로 크는 겁니다.

엄마는 지식의 몸에다 자기 사랑을 새겨 넣는 겁니다.

 

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생명은 새끼로부터 출발합니다.

커 가는 과정이 있어요.

 

그런데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짐승의 새끼는 낳자 말자 스스로 엄마 젖을 찾아서 먹고 자라가는 능력이 있어요.

이는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본성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납니다.

미숙아(未熟兒)란? 부모의 절대적인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엄마가 젖을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갓난 아이 스스로 젖을 찾을 수가 없어요.

미숙아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자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겁니다.

아이 속엔 엄마의 사랑이라는 생명이 채워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새끼에게는 반드시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겁니다.

사람이 누구인가?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생명이에요.

그래서 인간만이 사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랑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는 겁니다.

 

사람은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여 산다는 뜻에서 인간이에요.

엄마가 그 아이에게 자기의 사랑을 공급하고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마의 사랑이 새겨진 아이는 또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자는 반드시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남을 헤치거나 악한 일을 하면 금수만도 못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짐승이기 때문에 사람을 헤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생명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다 어린 아이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낳았어요.

그리고 사랑으로 말씀이라는 젖으로 키우세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 은혜를 더 많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항상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져 주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섬김이 많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 보다 더 열심을 내고!

남 보다 더 헌금도 하게 되고!

남보다 더 성도들을 섬겨야 한단 말입니다.

걸레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이처럼 은혜를 알고 말씀을 많이 알아갈수록 자기가 점점 부인되어져 가요.

 

성경은 하나님의 자식은 사람이라고 하고 마귀의 새끼는 짐승이라고 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하는 자들이고 마귀의 새끼들을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란 성도는 사랑하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꽝인 겁니다.

그 속에서 사랑이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짐승이에요.

 

성도는 그 속에 하나님께서 새겨놓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도 우리 몸에다 하나님의 사랑을 새겨 넣으세요.

공급해 주세요.

하나님 말씀을 새겨 넣으십니다.

말씀이 우리 몸에 새겨진다는 것은 말씀이 일하신 흔적들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묵시에 속한 창세전 언약을 그려낸다고 하였잖아요.

언약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잖아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그 새 언약을 어디에 새깁니까?

우리 몸에 새깁니다.

 

그럼 우리 몸에서 언약의 그림들이 하나 둘씩 구체적으로 그려지겠지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겠지요.

하나님이 우리 몸에다가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고 하는 것들을 새겨 넣습니다.

누가 그려갑니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그려 가세요.

우리가 그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몸에다가 새겨 넣으십니다.

우린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화가가 되셔서 우리 몸에다 새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려나가신단 말입니다.

 

자 이렇게 설명합니다.

묵시에 속한 하나님이 역사에 침투하여 묵시를 역사 속에다 그려낸다고 했습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럼 우리 몸에다가 하늘에 것들을 그려나가시겠지요.

예수라는 그림을 그리려고 우리 몸에 오신 겁니다.

 

우리 몸을 누구 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잖아요.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예수를 맏아들이 되게 하는 일로 사용하세요.

맏아들이란? 둘째 셋째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와 한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라 할 때는 한 아버지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와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같은 팔자를 띠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대하듯이 성도를 대하세요.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십자가에 죽여요.

물론 영적인 말이지만,,

정과 욕심을 죽인다고 합니다.

옛 사람을 죽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안 죽여도 하나님이 죽여요.

 

지난 주일에 시편 44편을 살펴보았지요.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시편 기자가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편의 이야기들을 십자가 상에서 토하여 내신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시편 이야기를 그려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의 말씀을 예수님의 몸에다 새겨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44편의 내용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조롱당하고!

버림당하고!

치욕을 당하고!

팔리심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시편 44편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는 매일 도살당할 양처럼 죽음을 당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시편 기자나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똑 같은 말씀을 몸으로 그려냈어요.

몸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그 말씀이 몸에 그대로 성취가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님 몸이나 바울의 몸에 시편 44편의 말씀이 몸에 새겨졌다니까요.

 

한마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예수님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말씀이 우리 육신으로 새겨집니다.

그러니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 겁니다.

저도 이번에 말씀이 내 몸에 새긴바 됨을 경험하였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이 글이 아니고 생명인 겁니다.

좋은 은혜를 받았어요.

 

구원이란?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불 속에서 건져 냄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쉽게 말합니다.

 

구원이란? 불 타고 있는 나무를 조각가가 불 속에서 건져 내는 것과 같아요.

참으로 멋진 비유이니 귀에 담아 두세요.

 

나무들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조각가가 불 속에서 한 나무를 건져 냅니다.

옆에 수많은 나무들이 타고 있어요.

그들은 잠시 후에 재로 변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불 타는 나무 중에 조각가가 임의대로 하나를 건져 냈어요.

이게 구원이에요.

 

그러자 그 나무가 휴~ 살았다!

야~ 난 살았다!

고맙습니다! 라고 기뻐합니다.

일단은 불 속에서 건짐 받았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건짐 받은 나무가 옆에 불 속에서 타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기를 불 속에서 건져준 조각가에게 고맙다고 하겠지요.

처음엔 그래요.

 

그런데 조금 있자 조각가가 나무를 자기 작업실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더니 껍질을 벗기고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자르고 끌로 파고 사포로 밀고하는 겁니다.

껍질이 벗겨지고 톱으로 켜 질 때마다 나무는 죽겠다고 합니다.

도끼로 잘라질 땐 까무러칩니다.

끌로 팔 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아픕니다.

 

이걸 우리 구원 이야기로 풀어봅시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조각합니다.

옛 사람의 껍질을 벗겨내고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잘라내고 끌로 파내요.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의 것들을 뽑아내요.

미움을 뽑아내고!

시기를 잘라내고!

욕심을 도려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잘라냅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가요.

온유과 겸손과 자비와 양선과 오래 참음과 관용과 섬김과 봉사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들로 새겨 넣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우리 본성과 거스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아픈 겁니다.

이건 불 속에서 타는 것 보다 더 아파요.

차라리 구원 받지 않는 것이 더 나아요.

 

그래서 나무가 소리칩니다.

야~ 차라리 불에 타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다!

왜? 날 건져내서 이 개고생을 시키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차라리 죽이라고 아우성입니다.

길길이 날 뛰며 원망합니다.

 

조각가는 나무의 원망과 상관없이 자기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그 나무에게 새깁니다.

애초부터 나무를 불 속에서 건진 것은 조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무를 위해서가 아니고 조각가 자신을 위해서 건져 낸 겁니다.

 

그런데 나무가 착각한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건져 준 줄 알았어요.

불 속에서 건져 놓고 나무 마음대로 살라고 해 주는 줄 알았던 겁니다.

그건 착각이에요.

나무 마음대로 살라고 건져 준 것이 아니고 그 나무에다가 조각가의 혼(魂)을 불어 넣은 작품을 만들려고 건져낸 겁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예수님처럼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성도는 이렇게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렇게 만들어 가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아들에 형상을 입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야 맙니다.

장차 천국에 가면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처럼 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고 우리는 형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불타 버릴 나무 같은 우리를 가지고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에 형상을 입은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변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변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열심이 아니고 주님의 열심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쓸모없는 불타는 나무와 같은 자들을 선택해서 조각가가 열심히 갈고 닦아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짠~ 하고 사람들 앞에 전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리와 창기들을 의인 만들어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마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 보세요.

이 조각품이 예전에 이렇게 불에 타던 것이었습니다.

불 속에 타던 것을 제가 건져내서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 이 작품을 보고 기뻐해 주세요!

그런단 말입니다.

이 때 조각가의 손에 의하여 멋진 작품으로 변화된 불에서 건짐 받은 나무는 조각가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 믿고 변하면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저 사람 언제 저렇게 되었어!

옛날엔 왈패 같더니만 이젠 온순한 양 같으네!

참 많이 변했다!

저 사람 예수 믿고 저렇게 되었데!

이럴 때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어도 변하지 않으면 예수 백날 믿으면 뭘 해!

저 인간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랄한데!

어휴! 예수쟁이들은 재수 없고 밥 맛 없어!

그러면 예수망신 제대로 시키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답니다.

지하철에서 싸우면 야! 교회 가서 싸워!

그런 답니다.

얼마나 교회가 쌈빡질을 했으면 세상 사람들이 싸움을 교회와 연관시켜 말하겠어요.

이런 것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너희들 때문에 내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이런 모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백성들을 다듬어가는 겁니다.

맨 날 간섭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하십니다.

 

마치 솔로몬 왕이 검둥이 노예인 술람미를 자기 것으로 꾸며서 사람들에게 여기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람입니다! 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아요.

술람미가 왕후가 되기까지 얼마나 갈고 닦인 줄 아세요.

차라리 천박하게 노예로 사는 것이 훨씬 낫지!무식하고 천박한 여자가 왕후로서 변해 간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개조되는 아픔이에요.

이 일을 솔로몬 왕이 엄마가 자식을 키우듯이 인내하면서 만들었어요.

 

이게 구원이에요.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죄인 중에 괴수인 자들을 예수님이 그 속에서 갈고 닦고 다듬어서 천국에서 예수의 신부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부가 되기까지 불에서 타던 흔적들을 지워내야 하잖아요.

우리 옛 사람을 지워내야 하잖아요.

그리고 새 사람을 입혀야 하잖아요.

 

그 일을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벌리는 겁니다.

이 일을 하려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이걸 말씀을 우리 몸에 새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 몸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아니!

아들에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 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들에 형상을 본받는 일을 하실 것이 아닙니까!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실 것이 아니에요.

 

우린 원래 마귀 형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마귀의 형상을 끄집어내고 예수의 형상을 심는 겁니다.

마귀적인 것은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잘라내고 대패로 밀고 끌로 파내서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이걸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거에요.

그러니 우리는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겁니다.

 

이게 꼭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불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예수)를 보내서 그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 낸 겁니다.

불 구덩이 속에서 건져 질 때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호! 했어요.

좋아했습니다!

실제로 홍해바다를 건너고 소고 치며 춤추고 환호성을 질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서서히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조각가가 나무에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애굽에 사람은 죽이고 가나안에서 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겁니다.

가나안에서 살 사람으로 만드는 거에요.

그러자 이스라엘이 난리를 칩니다.

 

아! 애굽이 그립다!

속았다!

이건 사기다! 사기!

괜히 애굽에서 나왔다!

우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래!

징징거리고 난리를 칩니다.

사람이 자기본성을 고친다는 것이 어디 가능 합니까?

안 고쳐져요.

그러니 광야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죽여서라도 하나님은 기어코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입니다.

 

이걸 우리 구원에 적용해 봅시다.

출애굽한 세대들이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이 죽는 것과 같아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들이 이 땅에 삶은 광야와 같아요.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린 애굽인이었어요.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교회라는 광야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었어요.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라고 했어요.

 

교회라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옛 사람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우린 반항합니다.

예수 안 믿었을 때가 좋았다!

 

실제로 우리 육신은 예수 안 믿었을 때가 훨씬 좋아요.

그땐 죄 지어도 아픔이 없었어요.

우리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도 전혀 부담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성령이 사사건건 죄라고 들추어내는 겁니다.

 

아주 고약한 시어머니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겁니다.

불편한 겁니다.

그러니 늘 죄와 싸우면서 상한 심령 일 수밖에 없어요.

바울처럼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오직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에게만 나타나요.

 

어떤 이들은 구원을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을 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십자가 알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예수님은 이 세상이 피만 남기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 육신은 어차피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죄 짓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된다고 말해요.

그래야 예수님의 의(義)를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불 구덩이에서 건져진 나무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건 왜? 구원 했는지를 모르는 처사에요.

 

예수님은 피만 남기고 간 것이 아니고 그 피 뿌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옛 사람을 날마다 죽인단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반항해요.

그러면서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옛 사람과의 싸움은 날마다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시작이지 끝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는 것에선 끝이지만 새 사람으로서의 시작이에요.

성령의 오심은 옛 사람으로서의 삶을 종식시키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근거로 한 새 사람의 삶입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없다면 옛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어요.

새 사람으로서의 살게 하려고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서 살리신 겁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라는 공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에 의미를 안다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주신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그 십자가에다 나의 옛 사람을 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고 십자가가 끝인 줄 알아요.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죄 짓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예수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지주의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런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에 의미를 안다고 하면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죄 짓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거기에 무슨 고난 있고!

애통함과 탄식이 있으며!

자기 부인이 있고!

자기 옛 사람이 죽는 것이 있으며!

죄에 대한 아픔이 있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겠어요.

없어요.

 

그러니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뭐 어때 그러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왜? 구원시켜 주었는지 몰라요.

마치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줄 알아요.

 

구원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구원은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에서의 삶까지에요.

홍해 바다 건너면 끝이 아니에요.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사람은 새 사람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광야에 나온 자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등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를 인도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면 인간의 살 수 없는 길로 인도해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길이 힘들고 험악했으면 우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데모를 하였겠어요.

 

이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아픔이에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차라리 애굽에 있는 것이 나았다고 할 정도로 입에 단내가 풀풀 나듯이 하나님이 끌고 가는 일들이 앞에 놓여 있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고난인 겁니다.

육이라는 본성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엄청난 큰 고난이기 때문에 그 유업으로 엄청난 천국에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난이 크면 영광도 커요.

이건 고난을 받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이 유업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지옥을 경험케 하신단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옛 사람이 죽어지는 아픔이 있어요.

이 아픔은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잘리고 끌로 파내지고 대패로 밀려지는 아픔이에요.

마치 예수님이 버려짐을 당하고 조롱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그런 아픔들이 있단 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과 한 몸 되어 사는 겁니다.

한 몸이란? 같은 팔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힘들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팔자이니 우리 몸에서 예수님이 그려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삶이 하나 둘씩 새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죽겠다고 아우성칩니다.

 

여기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죄가 터져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몸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음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죄를 토하여 내개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언제 죄가 토하여 집니까?

이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게 하면 죄가 터져 나옵니다.

 

죄는 항상 육신의 소욕대로 살라고 역사를 합니다.

죄는 항상 우리 몸을 편하게 해 주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죄인은 자기를 누가 간섭하면 싫어해요.

스스로 왕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언제 편합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 때가 가장 편해요.

죄 짓고 살 때가 가장 행복해요.

 

반대로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발악을 합니다.

죄가 지적당하면 난리를 칩니다.

이건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고 오락만 하고 싶은 아이에게 오락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허물을 고발하니 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지요.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죄를 지적하면 발악을 하고 죽이고자 덤벼요.

죄가 지적당하면 맞아!

내가 이런 악당이야! 라고 회개 하면 되는데 안 그래요.

왜? 그런 말을 해! 라고 덤벼요.

 

하나님이 우리 몸을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세요.

말씀이 그 일을 하게 만들어요.

속에 미움이 가득한데 원수를 사랑해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순순히 예~ 사랑할게요! 가 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더 미움이 나와요.

이건 애초부터 안 되는 일이에요.

 

물론 때로는 잠시나마 원수 사랑이 되어요.

그건 그 때 주께서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 몸에 하나님 말씀을 새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건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겁니다.

 

마치 인형 속에 손이 들어가서 인형극을 펼친 것과 같아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죄인의 몸으로서는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지켜 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은 의인만 지킬 수가 있어요.

죄인은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죄인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건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넌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고발을 해 주어야 아~ 난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이구나! 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인간이라야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죄인에게 말씀을 쏘아 대는 겁니다.

너 이것 했어! 안 했어!

너 저것 했어! 안 했어!

 

성경이 나와 있는 명령을 보세요.

꼭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은 겁니다.

그냥 자기들 귀에 듣기 좋은 말 해주는 사람의 말만 듣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기 종들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이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죄를 끄집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럼 제대로 말씀을 받아서 자기 죄가 고발당한 사람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 성령이 그 속에 있는 성도는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지 않고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대로 살게 되면 누가 욕을 당합니까?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이 욕을 당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가만 두지 않아요.

 

이걸 모세가 알았어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야! 이 놈들 다 죽이고 새로운 민족을 만들자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 그러면 저 애굽 놈들이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자기백성을 끌고 가다가 광야에서 다 죽였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내 생명을 담보로 할 테니 용서해서 그대로 끌고 가자고 했어요.

이게 지금 예수님이 하는 기도에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피로 우리를 용서 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우리 몸은 항상 두 가지가 교차해서 나타나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과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탄식을 하잖아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과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우리 몸이 도무지 하나님 말씀을 담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아니 보세요.

성도의 몸이 누구 겁니까?

예수님 것이지요.

그럼 우리 몸에서 예수가 그려지겠지요.

하나님이 우리 몸에 예수를 그려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을 그려낸단 말입니다.

 

이걸 시편 44편의 이야기로 말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움 받게 하고 수욕을 당하게 하고 버림 당하게 하고 사망의 그늘을 드리우게 한다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몸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그렸지요.

그러니 시편 기자는 죽겠다고 아우성치잖아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 몸에 예수님을 그린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난리를 칩니다.

난리를 칠 때마다 죄가 툭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죄가 터져 나올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이 고달픈 겁니다.

 

만약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도 어떤 제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히브리서 12장에선 아비가 없는 사생아라고 했어요.

사생아(私生兒)란? 구원 받은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당시에도 실제 이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가 목자가 되어서 양들을 어디로 인도 한다고 합니까?

푸른 초장이나 맑은 시냇가로 인도 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런다는 겁니다.

목자는 자기 자존심 때문에 자기 양을 혹독하게 간섭하는 겁니다.

지금 목자는 양 속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목자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목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양인 성도는 곧 목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두 돌 판에다 말씀을 새기지요.

그런데 바울은 새 언약에선 그 돌 판을 우리의 마음에 새긴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에 말씀을 새긴다고 하셨어요.

 

우리 몸에 말씀을 새긴다는 것은 말씀대로 살아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완벽이니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지향성을 말해요.

아들에 형상을 본받게 하고자 하는 부르심에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의 삶을 살아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우리 몸은 죽어나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말씀을 감당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맨 날 죄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을 한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왜? 탄식 합니까?

자기 몸이 말씀대로 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죄가 터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탄식이 나오지요.

 

그러나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야~ 바울아! 너의 이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 줍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그건 그 아들에게 우리 죄를 대신 담당시키심으로 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마다 예수가 우리 대신 죽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예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 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돌 판에 새긴 율법을 이스라엘 진 속에 두셨지요.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들 속에 말씀을 새긴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과 동행한다는 것은 죄인으로서는 날마다 죽임 당하는 일입니다.

 

말씀이 새겨지면서 이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겁니다.

너희는 이런 죄인이야! 라고 고발해 대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죽겠다고 합니다.

이 때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용서가 주어집니다.

 

그러니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고발하겠다는 겁니다.

고발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말씀이 어떻게 고발 합니까?

우리 몸으로 말씀대로 살라고 고발해요.

한 번 살아봐라!

 

여러분!

밥에 소중함은 배가 고파보아야 알 수가 있어요.

구원의 기쁨이란? 저주 속에서 건짐 받았을 때라야 맛 볼 수 있어요.

죄사함의 기쁨을 알려면 죄를 이기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기쁨이 되려면 율법 아래 가두어져 보아야 알아요.

이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 진정한 맛을 몰라요.

 

진짜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사람은 할 말이 없어요.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하여서 더욱 더 예수님의 피를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로 용서 받은 사람은 누구에게 돌은 던질 수가 없어요.

도리어 누가 잘못을 할지라도 이해하고 그 사람을 보듬게 되어요.

 

예수를 맛 본 사람하고 예수를 연구한 사람은 달라요.

그 속에서 토해지는 것이 달라요.

예수를 맛본 사람에게서는 예수의 생명이 나오지만 예수를 연구한 사람에게선 자기 지식이 나와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그러니 지식으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면 용서받음이 없기 때문에 용서가 튀어나오지 않고 정죄와 심판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용서 받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있는 마귀적인 본성인 정죄와 심판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속에 용서가 있는 사람은 용서를 토해내고!

그 속에 정죄와 심판이 있는 사람은 정죄와 심판을 쏟아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토해내는 것을 보고 판단하세요.

아! 저 놈 용서를 토하는 것을 보니 내 용서를 받았구나!

아! 저 놈 정죄와 심판을 토하는 것을 보니 내 용서를 받지 않은 놈이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용서 안에 있는 사람은 용서하는 삶을 살고!

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법으로 살아요.

예수가 그 안에 있으면 용서가 나오고!

마귀가 그 안에 있으면 정죄와 심판이 나와요.

 

그러니 그 사람이 하는 행실이 곧 그 사람이 지금 어느 소속에 속하여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하는 행실을 보면 예수에게 속하였는지 마귀에게 속하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마귀 짓을 하면 마귀에게 속한 것이고 예수에게 속하였으면 예수 짓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뱉어내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열매에요.

하는 짓이 그 사람의 실체에요.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해도 나타나는 것이 저주이고 악독이고 심판이면 그 속에 마귀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말 주변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도 예수를 먹고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아무 말 안 해요.

그냥 도살당할 양처럼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고!

싸우지 않아요.

 

이렇게 비유할게요.

전 분명히 정낙원이가 맞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정낙원이가 아니야! 라고 한다면 그건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 사람 마음이 넌 정낙원이가 아니야! 라고 고착화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말해 주어도 안 되어요.

 

그럼 그냥 예! 그러세요!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그래야지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나를 정낙원이가 아니라고 하여도 내 신분에 뭐가 달라집니까?

아니잖아요.

여전히 정낙원이에요.

그러니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전 주님 사랑을 입고 주님 사랑을 증거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이들이 넌 아니야! 라고 합니다.

그들이 아니야! 라고 한다고 해서 제가 받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그러세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걸 제가 노름판에 장땡이로 비유했어요.

내가 가진 패가 분명하게 단풍 잎사귀 두 개가 맞으면 누가 옆에서 무슨 말을 하고 협박을 하여도 흔들리지 않아요.

곁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가진 것은 장땡이면 돌 부처처럼 부동해요.

 

그런데 만약 시월 단풍 잎사귀 하나하고 유월 목단 잎사귀 하나 들고 장땡이 인줄 행세하면 불안해요.

그건 본인이 더 잘 알아요.

사람들이 자기와 다르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자기가 가진 패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감이 자기와 다른 상대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상대를 죽여야 자기가 편하거든요.

이건 열등감이에요.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사람을 폄훼하고 물어뜯는 겁니다.

 

진짜 젖을 먹고 배부른 아이는 칭얼거리지 않아요.

온순해요.

사이좋게 놀지 남 공격하지 않아요.

 

그러나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는 아니는 칭얼거려요.

공격적이에요.

배가 고프니 사이좋게 놀 수가 없어요.

옆에 있는 사람들을 넘어뜨려야 해요.

 

원래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들어요.

무슨 설교든지 편집해서 들어요.

이건 고착화된 틀이 있다는 겁니다.

그 틀 속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사람의 본성은 보이는 신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해요.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무지 무지하게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시금석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을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 한 겁니다.

지금까지 모세를 졸졸 따라 왔어요.

그런데 모세가 안 보이는 겁니다.

불안 한 겁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가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하고 우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겁니다.

 

출 32장 1절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보세요.

백성들이 모세가 눈에 안 보이자 불안해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모세만 보였지 하나님이 안 보였어요.

그러니 모세가 안 보이니 불안 한 겁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에요.

금송아지는 모세의 대체물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모세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어요.

그런데 모세가 안 보이자 하나님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기들을 인도할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과 같은 존재에요.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이 금송아지는 곧 모세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게 우리 신앙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교인들이 목사를 추종하는 이유가 목사만 보이고 목사 뒤에 있는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목사가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 목사를 보호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이비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망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자기 목사를 지키고자 하는 겁니다.

누가 자기 목사를 비판하거나 하면 벌떼들처럼 달라붙어 죽이고자 해요.

 

이단들이 교주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도 교주가 사라지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추종하는 목사가 없으면 불안 한 겁니다.

그 목사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사라는 그늘에서 안주하고 싶은 겁니다.

이들은 보이는 목사를 믿지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그래서 그 누구라도 교주를 비난하거나 그 목사를 비판하면 화를 내는 겁니다.

그 사람에겐 그 목사는 곧 금송아지에요.

그 목사는 곧 자신을 인도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목사의 말을 곧 하나님 말씀처럼 듣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가 말하는 것은 다 진리처럼 들려요.

그 목사가 하는 짓도 곧 복음적인 행동이라고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를 그대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편견이고 맹종한다고 하는 겁니다.

 

예전에 만민00교회 이00 목사가 미국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가 들켰어요.

그러자 이00목사가 나는 교회 건축헌금을 하려고 도박을 했다고 변명을 합니다.

어떤 반응이 일어난 줄 아세요.

그 교회 교인들이 아~!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자 하였으면 저렇게 카지노에 가서 도박까지 할까 그랬다니까요.

아니 도박하지 말고 은행을 털어야지요.

아마 은행을 털어도 그 교회 교인들은 옳게 보았을 겁니다.

 

mbc에서 그 목사의 정체를 방영하고자 하니 온 교인들이 mbc 방송국을 장악해서 방송을 못하게 하였잖아요.

이게 모두가 그 목사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행하는 짓들인 겁니다.

이게 편견이에요.

 

편견이 이처럼 무서워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것이 흠이 되지 않아요.

다 이해가 되고 두둔하게 되어요.

무슨 잘못을 해도 그럴 수 있지 그래요.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이런 잣대를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러는가 하면 절대로 안 그래요.

다른 사람에겐 법을 적용해요.

편견에 사로잡히면 선과 악을 그 목사를 기준으로 정해요.

자기 목사가 하면 진리이고 다른 목사가 하면 이단이에요.

그 목사의 편을 들어주면 내 편이고 안 들어주면 적이에요.

 

그래서 인간들 세상에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잖아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에요.

이게 편견이에요.

 

편견에 사로잡히면 사실을 말해도 아니라고 해요.

실제 일어난 사실을 눈 앞에 보여주어도 안 믿어요.

실제로 근거를 제시하여도 에이~ 그럴 수도 있지! 그래요.

그 일을 만약 다른 사람이 하면 난리를 치면서도 그 목사에게만 관대하게 여기는 겁니다.

이는 편견으로 인한 이중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자아 주체사상이라고 합니다.

김일성 집단처럼 그 주체사상에 쇠뇌당하면 분별력을 상실해요.

이게 종교로 나타나면 감당이 안 되어요.

제일 무서운 것이 이런 사상이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 그 누가와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와서 말씀해도 안 들어요.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의 말 이외는 안 들어요.

 

그래서 종교에서 교주가 생기는 겁니다.

교주는 자기 사상을 교인들에게 주입시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빙자해서 그 속에 자기 사상이나 신학이라는 독(毒)을 섞어서 먹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독(毒)을 마신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며 말투며 사고관이 정립이 되어서 그 사람과 똑같은 복제품이 되어서 활개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독을 마실 지라도 해함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은 미혹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집단에서도 그 가르침을 추중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추종자들은 반대하는 자들은 이단라고 하여서 쫓아내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떤 곳이든지 한 목소리로 일통(一統)하자는 것은 이단이에요.

그래서 이단들은 자기들 집단이 아니면 구원이 없다고 하고 자기들과 다른 말을 하면 다 이단이라고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사람을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과거에 이러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제가 그랬어요.

당신들에게 지금 예수님이 와서 말씀해도 안들을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는 이미 자기들 안에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답으로 예수도 판단하는 겁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자 함이 아니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자기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겁니다.

복음 아는 나를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누구든지 날 좀 꺽어봐!

나 이만큼 알거든!

 

이런 것은 밥을 분석만 하고 먹지 않는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본인들을 꿈에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논쟁만 하게 되어 있어요.

맨 날 자기 것하고 같은 숨은 그림 찾기 하게 되어요.

자기하고 맞으면 복음이라고 하고 아니면 다른 복음이라고 해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 따라 그 기준이 수시로 변해요.

동일한 말을 똑 같이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복음이고 미운 사람이 하면 다른 복음이에요.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편을 만드는데 익숙해 있어요.

 

모든 인간은 다 우상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이러한 일들은 어느 교회이나 집단에서도 일어나는 현상들인 겁니다.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는 집단 이데올로기에 안 속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속아요.

그럼 복음을 떠나서 그 교회나 집단을 위하여 충성하고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 교회나 집단 속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이런 죄성이 제 안에도 있어요.

이걸 알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와 싸우는 겁니다.

전 나와 다르다고 심판하고 배척하진 않아요.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주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실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린 우리 일만 하면 되어요.

우리 일이란? 우리 몸에서 주님이 마음껏 일하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겁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지 않았어요.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만 있지 않았단 말입니다.

사도들은 십자가를 삶으로 풀어낸 사람들이에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았어요.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바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사랑에 빚진 자로서 남을 섬기며 살았어요.

이게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린 그림입니다.

말씀이 삶으로 그려진 겁니다.

 

사도들이 쓴 서신서들을 보세요.

다 그래요.

처음에 교리적인 말을 하다가 나중엔 항상 삶에 문제를 언급했어요.

이건 성도 안에 계신 주님이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악악거리지만 말이에요.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몸에다 하나님 말씀을 새기고 계십니다.

새겨질 때마다 그 말씀이 성도의 삶으로 툭툭 터져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이 삶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일컬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드러나요.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이 조각가가 되셔서 우리 몸에서 제할 것은 제하고 새길 것은 새기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돌 감람나무인 우리를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을 붙이셨으니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님이 부지런히 자신의 진액을 공급하셔서 맺고자 하는 열매들을 반드시 맺어 가실 것입니다.

 

진액이 공급 될 때마다 돌 감람나무의 성질은 빠져나가고 참 감람나무의 성질이 유입이 됩니다.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공급 받은 자들의 삶에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로마서 12장 이후의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서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한 이야기를 하고 12장 이후부터는 성도의 삶에 모습을 자기 몸을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아들의 형상을 그려가실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열심으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 할 때 성도의 몸에서 아들이 하신 일이 드러나게 되고 이는 곧 아들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하루 하루 옛 사람의 것은 많이 제하여지고 새 사람의 것은 많이 새겨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시므로 끝 날까지 이루어 가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몸에 새겨질 때마다 은혜로서 붙잡아 주시고 든든하게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