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는 소

정낙원 2011. 12. 23. 02:06

 

벧세메스로 가는 소 (삼상 6:1-15)

 

삼상 6:1-15=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찌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4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줄 알리라 10 그 사람들이 그 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오늘은 성탄절 특집으로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의 암소 이야기를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의 이야기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또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법궤 실은 젖 나는 암소를 통해서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이므로 오늘 본문은 또한 성도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 속에는 성도의 삶도 함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가늠해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과 성도는 한 운명이에요.

샴쌍둥이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어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살으심이 나의 살으심이 되고!

예수님의 천국이 나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을 한약 달이듯이 달이면 예수님이 나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모든 인간이 주께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왔으니 몽땅 달이면 예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말하는 사람의 인생사 속에도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건 속에서도 예수님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은 모든 성경을 푸는 “마스터 키” 라고 합니다.

“마스터 키” 란? 모든 자물쇠를 열수 있는 만능열쇠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사건이나 인간들 속에 씨눈처럼 담겨져 있어요.

이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계시(啓示)사 적인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도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쉽게 이해가 되어요.

반면에 예수님과 성도는 한 운명이라고 했으니 오늘 본문 이야기는 곧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젖 나는 두 마리 암소는 곧 예수님과 성도라고 보아도 무방해요.

영적 의미에선 같단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한 몸이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 곧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영적상황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길 당시는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엘리는 제사장이면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입니다.

엘리와 사무엘은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동 시대 사람입니다.

 

엘리가 죽고 난 후 사무엘이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를 끝내고 왕정 시대의 문(門)을 열어주는 일을 위하여 잠시 세움을 입은 선지자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마치 세례요한과 같아요.

 

세례요한이 무슨 일을 했나요?

유대교의 멸망 소식을 알리고 예수님 시대를 알린 사람이잖아요.

율법이 아니라 예수라고 알려주잖아요.

그래서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을 끝내고 신약을 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선지자에요.

 

사무엘이 그런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 사무엘은 “사사” 라기보다는 선지자입니다.

사사는 엘리가 마지막이에요.

 

사사시대의 특징이 뭡니까?

그건 사사기를 어떻게 마감하는지를 보면 그 시대 상황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 마지막 절을 봅시다.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장 25절은 사사기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 때란? 사사시대를 통틀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직역해서 읽으면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가 됩니다.

 

이는 한마디로 사사시대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았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마치 이 시대 우리의 모습과 같아요.

우리들도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상에선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러니 영적 의미로서는 지금도 사사시대와 동일합니다.

 

죄인의 특징이 누구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아요.

스스로 왕으로 살고 싶어해요.

이걸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없으므로”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저주에요.

죄인을 누가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찌 될까요?

당연히 저주의 길로 가게 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 저주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죄인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죄인에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는 것이 저주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선 죄인의 특징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상실한 마음을 그대로 두셨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네 마음대로 살라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타나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살인과 패악과 다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죄가 서로 해(害)하는 각양의 모습들로 나타나 파멸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고의 저주는 하나님이 간섭치 않는 것입니다.

 

말라기 2장을 봅시다.

 

말 2:2-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러니 말라기는 구약을 끝내는 선지자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구약을 끝내는가 하면 “니들 맘대로 하라” 고 하시고선 끝내 버립니다.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여기서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 로 나타납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전쟁하는 여호와란 말입니다.

전쟁하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끝장내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저주를 내린다고 합니다.

이건 말 안 들으면 저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저주했기 때문에 말을 안 듣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미 저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주 하셨는가 하면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두지 않도록 저주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간섭하지 않으면 어찌 되겠어요.

죄가 활개를 치지요.

죄가 활개를 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을 잊어 버려요.

그럼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고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려요.

결국 자기 마음대로 육신을 좇아 살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말라기에게 하나님이 그럽니다.

난 이제부터 너희에게서 손을 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우습게 여기도록 저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스워지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사라져요.

그럼 죄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이걸 우리 가정으로 비유해 봅시다.

가정에서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맙니다.

자식은 부모의 통제 속에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알면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럼 패륜아가 되어요.

 

말라기에게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신앙이 외식으로 흐른다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우스워지니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절기를 지키는데 형식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절기 지킴을 “똥” 이라고 합니다.

 

똥이란? 양분이 다 빠지고 없는 찌꺼기를 말합니다.

절기 속에 내용이 없고 형식만 있다는 말입니다.

제사라는 허울만 있고 그 속에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절기의 똥”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절기 지킴은 곧 지켰다는 자기 의(義)만 쌓이고 그 의(義)가 결국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에라이! 이 도적놈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아니 우리가 언제 하나님 것을 도적질 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있나요?

우린 꼬박 꼬박 드렸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느냐!

돈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없는데!

그러니 그건 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이 퉤~ 하고 뱉어 버렸어요.

똥을 너희 얼굴에 처발랐다고 극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 시대가 그랬어요.

엘리의 아들들 속에 그 시대 신앙이 다 들어가 있어요.

엘리의 아들을 지칭하기를 그들을 불량자라고 합니다.

불량자란? 마귀 새끼란 말이에요.

 

이 놈들이 얼마나 악(惡)하냐 하면 하나님에게 제물이 바쳐지기 전에 삼지창을 들고 고기를 삶기도 전에 날 것을 도적질 했어요.

날 것이란? 죄인이 죽지 않고 살아서 펄떡 거리는 상태를 말해요.

한마디로 육이 펄펄 살아서 날 강도 짓을 한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말이에요.

 

이게 그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 속에 녹아져 있었어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뭐라고 했나요?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지요.

강도의 굴혈이란? 강도들이 사는 소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있는 모든 놈들이 강도란 말입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제사 드리러 오는 백성들까지 몽땅 다 강도란 말입니다.

 

여기서 강도란?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자기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말라기에선 똥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했구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외식이란? 내용이 없고 껍데기만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진 예물이라고 했어요.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과 똑 같아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모두가 하나님이 그들 속에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들 맘대로 살라고 방치 해 두셨기 때문에 외식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 중에서도 가장 큰 저주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유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입니다.

잔소리 해 대는 것이 복이에요.

 

그런데 사사 시대가 바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은 시대에요.

이를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게 내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내용이 타락과 징계라는 악순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인류 전 역사를 축약하고 있어요.

지금도 영적으로는 사사시대와 동일해요.

사람들이 그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사사기 마지막 절을 살펴봅시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을 잘 음미해 보세요.

누가 없다고 합니까?

왕이 없다고 하지요.

 

왕이란? 나를 간섭하고 책임지는 분인데 나를 간섭하고 책임져 주실 분이 없으니 내가 모든 일을 판단하고 그 결과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게 왕이 없는 모습이에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말 속에는 역설적(逆說的)으로 이스라엘은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 사는 자이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이 깔려 있어요.

누군가가 책임을 져 주는 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그래서 원래는 책임을 져 주는 왕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의미로 그 때는 왕이 없으므로 각각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기 1장 2절에선 혼돈이라고 합니다.

죄인이 각각 자기 소견대로 행한다는 말은 무법천지란 말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다 왕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스스로가 다 왕이에요.

 

다 왕이니까!

그럼 자기 신앙이 제일이고 옳다고 하겠지요.

스스로의 소견이 정답이라고 여기고 살게 되니 무법천지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을 합니다.

다 자기 편한대로 살고자 하니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고 합니다.

 

양의 특징을 그릇 행한다고 합니다.

그릇 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그러진 길을 간다는 말입니다.

양이 누구냐?

그릇 행하는 자에요.

어그러진 길을 가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법궤 실은 암소는 대로(大路)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대로(大路)란? 바른 길을 갔다는 말이에요.

어그러진 길의 반대로 옳은 길이란 의미에서 대로에요.

양과 비교하면 다르지요.

양은 그릇 행하는데 법궤 실은 암소는 올바른 길로 갔어요.

 

양이 우리 죄인들이라고 한다면 법궤 실은 암소는 누구를 상징할까요?

올바른 대로(大路)로 가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니 법궤를 싣고 가는 암소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암튼 양은 그릇 행하는 자에요.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목자(牧者)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자가 막대기와 지팡이로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성경에서 죄인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인간이란 양처럼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양치기 하던 목동이 목사가 되었는데 그 분이 양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얼마나 우리 죄인들과 똑 같은지 놀랐어요.

양이 얼마나 이기주의고 어리석은가 하면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아요.

양의 특징 속에 죄인의 특성이 숨겨져 있어요.

 

그럼 양이 어떤 놈인지 상징적으로 한 가지만 살펴봅시다.

 

겨울에는 춥잖아요.

그럼 양들이 서로 엉켜서 붙어 있으면 따뜻하고 좋잖아요.

그런데 이 놈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주의인가 하면 서로 붙어있으니 내가 따뜻하단 말이에요.

그럼 생각하기를 야~ 내가 따뜻하니 저 놈도 따뜻하겠네! 라고 하여 떨어진다고 해요.

저 놈이 나 때문에 따뜻하게 된다고 생각하여서 떨어져서 혼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이면 이와 정 반대라고 합니다.

혼자 떨어져 있으면 시원하잖아요.

그럼 저 놈도 시원하다고 생각하여서 같이 엉켜서 덥게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같이 엉켜서 땀을 뻘뻘 흘린다고 합니다.

 

추울 땐 떨어져 있고 더울 땐 붙어 있어요.

그러니 겨울엔 달달 떨고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는 겁니다.

내가 죽을 지언정 네 놈이 잘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심산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 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저 놈이 내 덕을 보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심보가 아주 고약하지요.

완전히 죄인의 심보에요.

우리들 심보잖아요.

 

그래서 목자가 염소를 풀어서 겨울에 혼자 있는 놈들을 들이 받게 하여서 한 군데로 몰아서 같이 있게 한다고 합니다.

여름엔 반대로 붙어 있는 놈들을 염소를 풀어서 들이 받게 하여서 흩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데에는 반드시 염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요.

양은 성도를 싱징하고 염소는 마귀 새끼들을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 성도들 틈에 마귀 새끼들을 섞어 두는 이유가 다 있어요.

복음 복음하면서도 반(反) 복음 적으로 마귀 짓을 하는 인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암튼 양은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아요.

이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에요.

우리가 바로 양이에요.

 

우리도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잖아요.

남이 잘 되면 박수를 쳐 주기보다 본능적으로 시기하고 헐뜯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끌어내리잖아요.

꼭 저 놈 때문에 내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 내가 바로 양인 겁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니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적개심이 가득해서 자기보다 잘났다고 생각되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등신짓을 했는가 하면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인 이방인이라는 마귀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데 자기 사위인 다윗을 죽이겠다고 설쳐대면서 체력을 다 소진했어요.

이런 등신이 어디에 있나요.

그러다가 정작 이방인과 싸울 땐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것입니다.

사울은 양과 같이 어리석은 자인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누가 하고 있는 줄 아세요.

바로 우리가 하고 있어요.

우리도 누가 나 보다 잘 되는 꼴을 못 보아요.

저 놈이 꼭 내 밥그릇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들이 그래요.

 

그래서 온갖 음해와 모함으로 상대를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네! 모르네!

이단이네! 삼단이네! 하면서 말이에요.

자기하고 다르면 다 이단이래요.

자기만 복음 안대요.

 

그건 자기 생각이지요.

아니 죄인 주제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그런데 다 안대요.

그러니 자기하고 다르면 틀렸다고 해요.

 

우린 색깔 맞추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자기하고 다른 색깔을 가지면 무조건 이단이래요.

왜? 하나님 입장에서 보지 못할까요?

이건 그만큼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편 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아! 저 사람도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고 있구나! 라고 여기고 함께 동역자라고 생각하고 아껴주면서 같이 길동무하면서 가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러지 않아요.

꼭 헐뜯는단 말입니다.

그리곤 온갖 구실을 붙여서 쫓아내요.

 

꼭 우리 모습이지요.

맞아요.

우리가 사울이고 양이에요.

우리는 타인을 배려할 만한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 사사시대처럼 각 사람마다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 중에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안중에도 없어요.

오로지 자기 자존심만 있어요.

 

이렇게 되면 지금도 사사시대가 되겠지요.

맞아요.

영적으로 사사시대와 같아요.

 

그러니 엘리의 시대가 곧 영적으로는 지금 이 시대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바꿔치기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 라는 제사장과 사무엘이라는 제사장이 바뀌는 시기였어요.

 

그럼 어떻게 제사장이 바뀌는지 살펴봅시다.

엘리는 제사장 가문이라는 혈통으로 제사장 직을 계승(繼承)하여서 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육적 제사장인 것입니다.

육에 법에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으니까 육적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입니다.

한나가 기도로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은 영적 제사장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 앞에 나실 인으로 바쳐졌어요.

나실 인이란? 구별 된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자란 뜻이에요.

 

쉽게 말하면 엘리와 반대로 사무엘이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엘리가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가문의 멸망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 거에요.

이는 사무엘이 엘리 가문을 닫겠다는 말이에요.

 

사무엘의 이런 맥(脈)이 다윗에게로 가요.

그러니 엘리와 사무엘은 왕으로 따지면 사울과 다윗의 상징이에요.

엘리의 맥은 육적 맥이므로 이게 인본주의로 흘러가서 인간들이 세운 사울 왕에게 계승이 되고 사무엘의 맥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세운 다윗 왕에게로 계승이 되어요.

그러니 엘리와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은 서로가 다름으로서 드러내기 위하여 대척점에 서 있는 겁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우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선지자라고 했지요.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입니까?

다윗이지요.

사울은 인간이 세운 왕이에요.

가짜에요.

진짜 왕은 하나님이 세운 다윗이에요.

 

예수님이 이 다윗의 맥을 따라서 오셨어요.

그러니 영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 한 사람인 겁니다.

곧 예수님을 상징해요.

 

사울은 다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말해주기 위해 사용이 된 도구에요.

성경에는 항상 가짜가 먼저 출현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건 설명하고 갑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그토록 선악과를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당부하였음에도 생명과 보다 선악과를 먼저 먹은 것도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죽은 자를 예수님이 살려내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어요.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1:4-12=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 보세요.

창세전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여기서 창세전이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1장 1절에선 태초라고 합니다.

 

그러니 에베소서가 말하는 창세전은 태초에 라고 읽어도 되어요.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세웠어요.

무슨 계획인가 하면 아들에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에요.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있어요.

골로새서 1장입니다.

한번 보고 갑시다.

 

골 1:15-2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가 나오지요.

“그”란? 예수님을 말해요.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계셨다고 하지요.

그러니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에요.

창조주 하나님이에요.

 

보세요.

만물이 누구로부터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까?

“그”로부터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누구를 위해서 창조 했다고 합니까?

“그”를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리곤 만물이 “그” 안에서 섰다고 하지요.

“섰다”는 말은 온전케 된다는 말입니다.

“산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만물은 예수 안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고 예수 안에서 온전해 진다는 말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산다는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創造)란 말은 “비롯할” 창(創)에다, “지을” 조(造)자를 써요.

이는 곧 설계 도면을 가지고 집을 지었다는 말과 같아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무엇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말이에요.

뭔가 원인에 의하여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럼 원인이 뭔가요?

“그”를 위해서잖아요.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만물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되지요.

이걸 “그로 말미암았다” 고 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을 봅시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잘 보세요.

만물이 만들어지고,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수순이 있어요.

그런데 그 주어(主語)가 “주에게서” 에요.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지요.

이건 창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요.

이는 존재케 되는 원인을 말해요.

만물이 주 안에서 존재 하는데 왜? 존재 하느냐 하면 주를 위해서 에요.

 

그리곤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이는 모든 목적을 이루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온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이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이고 하와는 성도의 표상이에요.

하나님께서 엿새째 되는 날 저녁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지요.

 

여자란? 신약에 오면 교회를 상징해요.

그럼 아담이 하와를 낳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낳는 것의 모형이겠지요.

예수님이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지 봅시다.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어서 교회를 낳았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교회란? 성도를 말해요.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 피로 구원을 받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여자를 빼 내고선 다시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지요.

그러자 아담이 대뜸 “이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로다” 라면서 반가이 맞이하잖아요.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이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기쁜 겁니다.

이걸 결혼이라고 합니다.

 

결혼이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성도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합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나왔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여기서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편의 희생을 통하여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성경의 핵심이에요.

성경 전체가 남편의 희생으로 신부가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걸 언약으로 말하면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를 다시 봅시다.

 

엡 1:4-12=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전에!

즉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계획을 세웠어요.

어떤 계획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아들 만드는 계획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계획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그럼 자기 백성이 무슨 연고인지는 몰라도 비거룩하고 흠이 있는 자로 있다는 말이지요.

타락된 죄인이란 말이에요.

누가요.

자기 백성들이 그래요.

 

그래서 7절에 보면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한다고 합니다.

죄사함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가요?

“그”의 피로 되어요.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에요.

 

신랑의 죽음으로 타락한 신부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랑의 생명으로 신부가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부는 신랑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되었다고 하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10절에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통일(統一)이란? 하나 됨을 말합니다.

그럼 통일이 되려면 분리됨이 먼저 있어야 하겠지요.

거룩에서 떨어져 나와서 비거룩으로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다가 거룩하신 신랑의 죽음으로 비거룩한 신부가 신랑의 생명으로 거룩으로 부르심을 입어 하나가 되어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분리 되었다가 하나 되는 것을 말해요.

그 과정에 반드시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그렇다면 성도가 타락 되었다가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되지요.

그래요.

이게 성경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이 살아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하시길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을 예수님이 가서 대신 죽어서 그들의 죄값을 다 처리하고 구원을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 피로 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알려주시려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겁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백성들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옆구리 푹 찌르면 예수님 피가 툭 튀어 나와야 해요.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이십니다!

 

나는 가짜고 예수님이 진짜입니다! 라는 것이 터져 나와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에요.

다른 게 나오면 가짜에요.

 

나 전도 했는데요!

나 교회 열 개 개척했는데요!

나 집 팔아서 헌금 했는데요!

나 복음 전했는데요!

이렇게 “나” 가 나오면 그 신앙은 가짜에요.

 

그건 옛 언약 안에 있는 것이에요.

율법 아래 있는 자에요.

새 언약 안에서는 “나” 가 없어요.

다 예수에요.

새 언약 안에선 내가 한 것이 없어요.

다 예수님이 하셨어요.

새 언약 안에선 내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으로 사는 곳이에요.

 

의(義)도 예수님 의(義)이고!

생명도 예수님 생명이고!

거룩도 예수님 거룩이고!

천국도 예수님 천국이고

마치 탕자가 집에서 아버지 것으로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탕자에겐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신앙생활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일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심으로 하는 것이에요.

믿음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이에요.

이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내가 뭘 했다고 하지 않아요.

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해요.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복음을 깨닫고 믿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에요.

 

이걸 아는 성도는 자기가 뭘 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나 복음 아는데요!

나 복음 전했는데요! 라고 하지 않는다구요.

성도가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하신 공로를 기리는 것이지 우리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라고 하면 나 복음 아는데요! 라고 해요.

복음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복음 알았으니 복음으로 살아야지요.

복음 속에 함유된 그 정신으로 살아야지요.

그런데 나 복음 아는데요! 라고 주둥이로만 나불거릴 줄 알았지 하는 짓거리는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반(反)복음적인 짓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요.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 아는게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복음으로 사는게 무엇인데요! 라고 묻지 마세요,.

그건 복음을 받으면 스스로 알아요.

복음이 그 사람을 복음에 합당하게 살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러니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알아서 그 사람을 간섭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간섭하심이 없으면 그 사람은 가짜에요.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이 지식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복음을 알고 있으니 나 복음 아는데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지 예수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에요.

중계 방송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예수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예수와 한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요.

이 삶은 누가 가르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이 알아서 살게 하세요.

 

제발 신앙생활을 중계방송 하듯 하지 마세요.

필드에서 뛰세요.

하기사 이 말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건 잠시 후에 묵시(黙示)와 역사(歷史)를 가지고 더 설명할게요.

 

다시 창세전 언약을 더 살펴봅시다.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예수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렇다면 자신이 예수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살까요?

당연히 예수님께 받은 생명으로 살겠지요.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향성을 말해요.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성향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님의 신부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었어요.

우리의 거룩이 아니고 예수님의 거룩이에요.

우리가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룩해 지고자 노력 할 것이 없어요.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할 것이 없어요.

그냥 받은 것으로 살면 되어요.

 

죽었던 자가 누구의 생명으로 살아났는가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났지요.

그러니 성도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누구를 자랑하겠습니까?

당연히 자기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자랑하지요.

 

맞아요.

성도는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천국에 가면 영원토록 어린양만 찬송해요.

어린 양의 업적을 기린단 말입니다.

이걸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맛보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창세전 언약을 끄집어냈는가 하면 항상 가짜가 먼저 출현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가짜에요.

예수 안에서 태어난 인간이 진짜에요.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나야 해요.

 

가짜란? 죽음을 말해요.

구원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에요.

그러니 구원이 되려면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죽는 사건이 먼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어요.

생명과를 먹으라고 했어요.

 

그리곤 아담을 잠들게 하고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생명과와 선악과의 정보를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뱀이 하와에게 접근을 합니다.

하와의 눈에 선악과는 너무도 아름다운 겁니다.

도무지 가만 둘 수가 없어요.

그래서 홀라당 따먹었어요.

 

아담이 잠깐 마실을 갔다가 오니 난리가 난 겁니다.

하와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얼마든지 난 책임 없다! 라고 하면서 여자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아담은 여자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자 자신도 선악과를 먹고 죽음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자기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린 아담의 이러한 행동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이라는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성도를 위하여 죽는 것도 성도가 자기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여자를 홀로 떠나보내지 않고 그와 함께 죽음 속으로 뛰어 들어서 그의 운명에 함께 한 것과 같아요.

 

이게 예수님에게서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의인이신 예수님이 죄인에게 연합되는 모습으로 보여 주셨어요.

그 세례가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모습을 드러나신거구요.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속에는 장차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실까 하는 비밀을 예표 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전부 죽은 자들로 태어납니다.

죄 아래서 죄의 종으로 출생을 합니다.

죄 아래 났다 함은 죽은 자란 말입니다.

가짜란 말이에요.

이 가짜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서 진짜로 바꿔치기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엔 항상 가짜가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음이 먼저이고 생명이 나중인 것입니다.

 

가인이 먼저이고, 아벨이 나중이고!

이스마일에 먼저이고, 이삭이 나중이고!

사울 왕이 먼저이고, 다윗 왕이 나중이고!

육적 유대인이 먼저이고, 영적 유대인이 나중이고!

적 그리스도가 먼저이고, 그리스도가 나중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먼저 나온 가짜들이 나중에 나온 진짜들을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가짜들에게 죽임 당한 진짜들의 희생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짜가 진짜 속으로 흡수가 되어서 가짜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시나리오이고 예수님이 죄인이 구원하는 구원의 프로세스에요.

 

창세전 언약의 핵심은 예수님의 피에요.

즉 예수님의 희생으로 타락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은 성경을 푸는 키와 같은 말씀이에요.

모든 성경은 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풀어지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이 구조로 풀어야 이해가 됩니다.

엘리의 시대상(時代相)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의 시대상으로 오버랩을 시켜서 보세요.

그럼 훨씬 이해가 쉬울 겁니다.

엘리 시대가 어떻다고 했나요.

 

사무엘상 3장입니다.

 

삼상 3:1-5=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稀貴)하여 이상(異狀)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잘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다고 하지요.

그리고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적 상태가 이렇다는 말입니다.

 

엘리 시대를 한마디로 하면 “영적 암흑기” 입니다.

말씀이 희귀(稀貴)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고!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가고 잘 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꼭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00년 동안 계시가 단절된 상태와 같아요.

 

눈이 어둡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희귀(稀貴)하다” 라는 말은 “야~카르” 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이 아주 드물고 귀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겨자씨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말씀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교회는 많은데 정작 복음 증거하는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홍수 속에 생수가 귀한 것과 같아요.

목사는 많은데 복음 전하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복음 전하는 교회들은 큰 교회라는 숲에 감추어져서 잘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야~카르” 라는 말은 아주 없다는 말이 아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는 말이에요.

이걸 선지서에서는 “그루터기” 또는 “남은 자”라고 해요.

그래서 “여호와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고” 라고 합니다.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올 바로 증거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올바로 증거 되지 않으니 자연히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異狀)이 흔히 보이지 않다고 하지요.

이상(異狀)이라는 말은 “하존”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기능이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感知)하는 촉(觸)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이 깜깜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르고 있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모습이 이러했어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소경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소경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예수님 앞서서 보냅니다.

세례요한은 와서 유대인의 멸망 소식을 전합니다.

이건 마치 사무엘이 엘리 가문의 멸망 소식을 전하는 것과 같아요.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했지요.

이는 세례요한이 사무엘처럼 마지막 사사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 라는 형식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왜? 드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어요.

하나님을 왜? 섬기는지도 모르고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란? 교제이고 사귐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고 삽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 예배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앎이 먼저이어야 해요.

 

예배를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교제한다는 말입니다.

교제 한다는 말은 사귐을 가진단 말이에요.

마치 아버지와 아들에 사랑으로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해요.

이게 예배에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자기 식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 시대가 그래요.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여도 헛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외식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외식적이었는가 하면 엘리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엘리는 상한 심령으로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술에 취하였다고 책망했어요.

성도가 기도하는지 술에 취한 것인지도 분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르고 있어요.

또한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데 엘리는 감감해요.

 

참으로 웃기는 것이 엘리는 자기 집구석에서 자고 있고 사무엘은 법궤 옆에서 자고 있어요.

이건 그냥 잔다 아니다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엘리와 사무엘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 하는 곳이에요.

 

그러니 엘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고 사무엘은 하나님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엘리와 사무엘이 뒤 바뀌어 있는 것이에요.

원칙적으로 말하면 집에서 자야 하는 사람은 사무엘이고,

하나님 궤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은 제사장인 엘리에요.

그런데 엘리 시대는 꺼꾸러 되었어요.

 

이걸 이 시대로 말해서 제사장인 엘리를 목사라고 하고 사무엘을 성도라고 칩시다.

그럼 목사는 집구석에서 자고 있고,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목사는 놀러 다니는데, 성도는 말씀을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목사는 복음을 모르고, 성도는 복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가 죽을 때 비둔한 연고로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의 제물을 먹고 살이 피둥피둥하게 쪄서 잘 걷지도 못했어요.

얼마나 제물에 배를 불렸으면 자기 몸도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대하여서 일어나지 못해서 목이 부러져 죽겠어요.

 

어제 신문을 보니 서울에 어떤 목사는 십일조는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20억이나 횡령을 해서 입건이 된 기사가 났어요.

세상에 십일조가 자기 것이래요.

이런 무식한 사람이 있나요.

아니 목사가 왜? 십일조를 받아 처먹습니까.

이 사람은 아마도 엘리와 같은가 보아요.

 

그러니 엘리는 마치 이 시대 십일조는 자기 것이라고 챙겨 먹는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과 같아요.

교인들의 피 같은 헌금을 빨아 먹으면서 호의호식하는 목사와 같아요.

등 따습고 배부른데 복음으로 씨름할 이유가 뭐 있나요.

그냥 적당히 교인들 비위를 맞추어주고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고 하면 되는데!

 

요즘처럼 목사하기 쉬운 때가 없어요.

이젠 설교 준비 할 필요가 없어요.

돈만 주면 설교 은행에서 설교 원고를 다 보내 주어요.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들이 설교를 짜깁기해서 보내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지 않아도 인터넷이 있어 얼마든지 남에 설교를 카피해서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맨 날 놀러 다니고 맛난 음식 먹으러 다니고 목사입네 하면서 끼리끼리 모여서 히히거리고 있어요.

 

이러한 것은 엘리처럼 집구석에서 드르렁~ 드르렁 코 골고 자고 있는 것과 같아요.

어린 사무엘은 기도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러니 사무엘과 엘리는 서로의 신앙상태를 극과 극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들어서 엘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볼 줄 아는데 목사는 몰라요.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니 말씀을 풀어도 전부 육적으로 풀어서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듣는 교인들이 전부 육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겠어요.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육적 신자들만 북적 거릴 것이 아닙니까.

그럼 교회가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말아요.

 

맞아요.

엘리 시대가 그랬어요.

소경인 목사에게 양육을 받으면 똑 같이 소경이 되어요.

자기가 소경이니까 소경인 목사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영적 소경이란? 상대적으로 육적으로는 눈이 밝다는 말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에는 민감하고 밝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소경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셈이 밝은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멀지만 마귀하고는 가까워요.

 

그러니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어요.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알았어요.

 

그래서 엘리의 아들들은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자들과 행음하고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 중에서 좋은 것들을 자기들이 먼저 처먹고 했어요.

이건 완전히 개판인 겁니다.

그러니 마귀의 놀이터가 맞지요.

 

이걸 성도들 개인으로 적용하면 하나님 말씀을 모르니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 것으로 가득해요.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떠나면 끈 떨어진 연처럼 세상 풍조에 떠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럼 마음은 어둠이 됩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세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어요.

사는 것이 재미도 없고 짜증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이 지옥인 겁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불량자라고 하는 것은 마귀 새끼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우습게 여기는 거에요.

교회 다니는 것을 경시한단 말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치 않은 때에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하나 마나에요.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그러자 전쟁에 나간 엘리의 두 아들들이 백성들에게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야! 이 전쟁을 하나님이 안도와 주어서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로에 있는 법궤를 전쟁터로 옮겨 놓자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을 전쟁에 끌어 들이겠다는 심산입니다.

 

법궤만 가지고 오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였어요.

그러니 법궤를 전쟁터에 옮겨 오는 것을 찬성을 한 것입니다.

군사들이 법궤가 전쟁터에 들어오자 찬송하며 난리를 칩니다.

이는 군사들도 법궤가 뭔가 능력을 나타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블레셋 너희들 죽었어!

이제 끝났어!

이제 이겼다! 라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걸 지켜보던 블레셋도 낙담합니다.

야! 저 놈들이 드디어 하나님을 전쟁에 끌어 들였다고 큰일 났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의 위력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어요.

블레셋 사람들은 과거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법궤를 앞세우고 무너뜨렸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전쟁을 하자 법궤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전쟁에 대패하고 법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어요.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신성한 법궤를 이방인에게 빼앗겼으니 난리가 난 겁니다.

 

엘리 제사장이 이 소식을 듣고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어요.

그리곤 비느하스의 아내가 놀라서 아이를 해산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아들을 낳았다고 축하하자 하나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고 하면서 아이 이름을 “이가봇” 이라고 지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떠났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이에요.

이젠 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가봇을 낳았다는 것은 곧 죽은 자식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무엇하느냐?

하나님도 모르는 죽은 놈인데!

마귀 새끼인데! 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엘리와 같은 목사 밑에서 양육을 받으면 이가봇 신자가 되어요.

육적 신자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고 교인이에요.

교인은 그냥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말은 바로 합시다.

이가봇이기 때문에 엘리 같은 목사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엘리 같은 육적 목사를 따르지 않아요.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님을 말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분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더니 야! 이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신 분이라고 증거했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하는 이가봇 신자에게는 그 속에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없으니 홉니와 바느하스 처럼 법궤를 부적으로 사용하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듯이 지금도 예수를 부적처럼 믿고 따르다가 이방인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법궤를 부적처럼 여겼어요.

법궤가 무슨 능력이라도 되는 냥 우상처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법궤를 전쟁터에 옮겨 갔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의 신앙이 우상숭배로 젖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예수를 복 받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자기 삶에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에요.

목사들이 예수 믿어서 복 받으라고 하잖아요.

이게 비로 예수라는 부적이에요.

예수가 부적이란 말이 아니고 복받는 수단으로 믿는 예수를 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마귀가 그럽니다.

야! 예수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 합니다.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움켜잡으라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 이용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야! 너 예수 믿잖아!

그러니 예수에게 돈 달라고 그래!

세상에서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은 마귀 앞에 모든 성도를 대표하여서 시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야! 너 예수 믿는다면서!

그럼 복 받고 돈 많이 벌어서 니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증거해야 안 되겠니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는 말과 같아요.

예수 믿으면 복 받아야 된다고 하잖아요.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라고 외치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은 새벽부터 밤 새워 가면서 돈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땅에 복을 주시지 않아요.

하늘에 복을 주십니다.

영적 복을 주신단 말입니다.

 

영적 복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복이에요.

이 복을 받으면 세상에 조건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아요.

구원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영적인 복이란? 믿음에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와 같이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을 보지 못하는 목사들을 만나면 예수님을 이용하여서 땅에서 잘 되고 복 받는 것을 추구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 법궤를 전쟁터에 옮겨 간 것과 같아요.

 

이러한 영적 무지가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이스라엘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의 유대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꿈을 꾸었어요.

이건 메시야를 이용해서 자기 살기에요.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한 사고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전부 이방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에 있어야 할 법궤가 블레셋에 가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나 절간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나 불자들이나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 속을 까보면 다 신(神)을 이용하여서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아보고자 하는 탐심으로 가득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늘에 것이 있지 않고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재물이 주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치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 심령이 어둠이고 죽어 있는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세상 떡을 구하였어요.

 

그러나 빛에 속한 자들은 이러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거짓 목사들의 말에 속지 않아요.

저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인지 마귀의 말인지 분별한단 말입니다.

자기 안에 빛이 있으면 분별해요.

무당 같은 목사에게 속는다는 것은 그 안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가봇 교인이기 때문에 무당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듣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빛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빛에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예수를 모시고 사는 성도는 빛이에요.

자기 안에 예수라는 빛이 있어요.

 

자기 안에 빛이신 예수님이 없으면 소경인 목사를 선생으로 따르게 되어 있어요.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을 자기가 차지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단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뭘 얻고자 함이 아니에요.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지 무얼 얻고자 하는 미끼가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거래하는 것이 아니에요.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절대로 어둠에 다니지 않아요.

소경을 인도자로 세우지 않아요.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인 엘리 같은 목사들을 따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어요.

자신이 소경이니 소경을 따르는 것입니다.

 

엘리 시대는 마치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의 모습과 같아요.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가 그러했어요.

유대인들은 소경이었어요.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사는 것은 육적인 것의 상징이에요.

영적 상징은 전부 율법 아래 매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 신앙은 감사의 신앙이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신앙이에요.

율법 지켜서 복을 따내고자 하는 신앙이에요.

율법 지켜서 의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신앙이에요.

이건 종들이나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니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 섬기기를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억지로 율법을 지킨다고 지쳐서 기진맥진하고 있었어요.

마음에 기쁨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없고!

안 지키면 혼 난다고 하니 억지로 하느라 오로지 원망과 불평불만만 가득했어요.

 

이러 한 때에 예수님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무거운 짐들을 다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담당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젠 정죄함이 없는 세계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같은 옛 언약은 십자가에 다 폐하고 자신의 살과 피로 새 언약을 맺습니다.

이젠 우리가 뭘 지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십니다.

이것도 우리가 믿을 수 없으니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찾아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이건 오늘 본문에서 벧세메스로 가는 소를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이방인에게 빼앗긴 법궤를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법궤가 블레셋 땅에 일곱 달을 거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블레셋 인들은 법궤를 행여 잘못 취급하다가 재앙을 당할까봐서 동네와 멀리 떨어진 동구 밖에 있는 다곤의 신당에 보관을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다곤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가 보니 다곤 신이 작살이 나 있는 겁니다.

목이 부러지고 손 모가지가 부러져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이걸 장소를 잘못 정했는가 싶어서 다른 곳으로 옯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보면 똑 같은 일들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렇게 일곱 달을 옮겨 다닙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법궤가 가는 동네마다 쥐들이 들끓고 이 놈들이 병균을 옮겨서 온 몸에 독종이 생기고 염병이 번지고 온 동네가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야! 이거 재수 옴 붙은 물건이니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궁여지책으로 새 수레를 만들고 그 위에 법궤를 싣고 금으로 쥐의 형상을 만들고 독종의 형상을 만든 부적들을 싣고 멍에 매지 않은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송아지들은 집에 떨어뜨려 놓고 실려 보냅니다.

 

그러자 암소가 울면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대로(大路)로 향하여 벧세메스에 있는 여호수아의 밭에 이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 온 것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리고 법궤를 실어온 수레를 패서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수레를 끌고 온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서 그 위에서 죽임 당하는 것과 같아요.

 

본문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 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추적해 봅시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영적 상황이 엘리 시대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다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율법 신앙은 외식으로 흐르고!

성전엔 탐심으로 가득찬 제사장들이 이권에 개입하여서 돈을 뜯어내는 강도들로 들끓었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란 말은 이방인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법궤에 블레셋에게 빼앗긴 상태와 같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는 일을 하십니다.

백성들이 마음을 제련하기 시작합니다.

교만한 자는 낮추고 낮은 자는 높이십니다.

 

그리곤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죄를 다 담당하십니다.

마치 법궤를 싣고 온 암소가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법궤를 빼앗긴 벧세메스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 중에서도 모성애(母性愛)가 가장 강한 짐승이 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 위에 법궤가 실리자 모성애(母性愛) 마저 차압당한 채 울면서 법궤가 지시하는 대로 갑니다.

이건 육신의 정(情)에 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을 울며 가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땀이 피가 되도록 하셨다 함은 우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육적인 부모 형제들을 다 떠나는 아픔을 감내 하셨습니다.

 

법궤를 지금식으로 말하면 언약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성도에게 언약이 주어지면 암소처럼 끌려가는 인생살이가 시작이 되어요.

예수님이 성도 안에 오시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받게 되어요.

이게 성도가 걸어갈 십자가의 길이에요.

 

십자가의 길이란 세상에 정(情)을 끊는 길입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아픔을 당합니다.

정(情)을 끊는단 말은 언약이 덮쳐오면 인간의 정(情)에 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일가친척 간에도, 친구 간에도, 이웃 간에도 언약과 비 언약이 충돌을 하게 되면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상종하지 않는 원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언약이 인간의 정(情) 보다 앞 설 순 없다는 뜻입니다.

언약과 비 언약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원수가 맞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언약에 속한 자들은 늘 희생을 감수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관계는 정(情)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情)에 매일 수 없다는 말은 그만큼 언약은 인간관계보다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

이걸 잘못 이해하여서 이단들은 부모 자식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집단에 빠져 나 몰라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고 광신 집단에 빠진 것이에요.

 

신앙생활은 염세주의(厭世主義)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을 등지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집단으로 은둔 생활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수도승들처럼 신앙은 도(道)를 닦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이 묵시(黙示)라고 하면 삶은 역사(歷史)에요.

묵시는 추상이고 역사는 실제에요.

묵시가 앎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삶이에요.

묵시가 아파트 도면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실제 아파트에요.

묵시는 복음을 아는 것이고 역사는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이 시대 그릇된 복음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어요.

신앙만 가지고 있어요.

생활이 없어요.

아는 것은 많은데 삶이 없어요.

입으로만 주절거리고 있어요.

 

묵시가 역사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이원론(二元論)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에요.

이걸 영지주의라고 해요.

 

예수님은 묵시이고 우리는 역사에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와 계세요.

하지만 눈에 안 보여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해요.

그러려고 묵시이신 예수님이 역사인 우리 몸 안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몸으로 보여주시려고 우리 몸을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예수님처럼 버려지는 삶이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나 여기 있다고 우리 삶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도를 보고 예수님을 보게 되어요.

 

그러니 성도의 삶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이 자꾸만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터져 나올 때마다 내가 부인되고 예수님이 드러나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제물로 삼는단 말입니다.

이를 로마서 12장에선 산 제물이라고 하였고 이를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이게 없으면 가짜에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신앙생활을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은 마치 일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과 같아요.

신앙생활은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고 말씀을 아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말씀이 삶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나타남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의 희생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부인이 따르게 된단 말입니다.

암소처럼 죽임당하는 아픔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말로만 해요.

신앙생활은 말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손 걷어 부치고 섬기고 베풀고 희생하는 것이에요.

남에게 이것하세요! 저것하세요!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 안다는 것을 핑계대면서 자신은 손 하나 가딱하지 않고 상전이 되어서 판관이 되어서 옳네 그르네 판단하고 심판만 하고 있어요.

이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손 하나 가딱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겐 무거운 짐을 지우고 가게 한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리새인들처럼 그 짓을 하고 있어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봉사를 합니까!

헌금을 합니까!

그렇다고 섬기기를 합니까!

입으로만 나불거리고 있잖아요.

 

이 모두가 어디서 어쭙잖은 영지주의 복음을 들어서 지식으로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사람에겐 도리어 복음이 독약(毒藥)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남에 신앙을 심판하는 판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나중 형편이 저음보다 더 나빠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다고 했어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하고 있어요.

 

제발 남들 신경 쓰지 마세요.

너나 잘 하세요.

남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라는 판단은 주님께 맡기고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남 심판하라고 복음 주시지 않았어요.

가서 섬기고 희생하고 죽으라고 주셨어요.

 

 

그런데 우린 섬기진 않고 그 잘난 복음 안다고 하면서 거드름 피우고 있어요.

생 솔 나무 태우듯이 연기만 피우고 사람들 눈에 눈물만 흘리게 하고 있단 말입니다.

복음 복음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복음관을 가지고 있는 줄 몰라요.

어디서 이런 것을 복음이라고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성도 가운데 와 계신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집구석에 틀어 박혀서 성경구절 외우라고 와 계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은 예수님의 삶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이걸 예수의 증인이라고 해요.

 

증인이란? 말로도 증거하여야 하지만 삶으로도 증거하여야 해요.

그러라고 성령이 성도 안에 오신 겁니다.

성령이 삶으로서 예수님을 증거케 하세요.

성령은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삶을 몸으로 드러내세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그 새 언약이 성도의 삶으로 토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으로 나타나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삶들이 자기 삶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이게 십자기의 길이에요.

 

오늘 본문에 벧세메스로 가는 소와 같이 등짝에 짊어진 법궤가 이랴~ 하면서 끌고 가요.

어디로 끌고 가는가 하면 자기 죽을 자리로 끌고 가요.

소가 스스로 벧세메스로 찾아 간 것이 아니고 법궤가 죽어야 할 자기 자리로 찾아가게 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복음을 받으면 내가 봉사할 자리로 찾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란 뜻인데 이는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이란 말입니다.

벧세메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땅이에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고 땅을 분배 할 때 벧세메스는 아론의 지파에게 주었어요.

알다시피 아론의 지파는 제사장 지파에요.

그래서 벧세메스는 제사장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암소가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의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지요.

여호수아의 밭이란? 신약식으로 하면 예수님의 밭이란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식 이름인데, 헬라식으로 말하면 예수에요.

 

예수님의 밭이란? 어딘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요.

암소가 여호수아 밭에 법궤를 내려놓고 거기서 제물로 바쳐지지요.

이는 예수님이 교회를 위하여 죽임 당하는 것과 같아요.

 

제발 신앙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우린 땅콩 까먹으면서 놀면 되겠네!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으로서의 연합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 팔자가 그대로 우리에게 씌워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서 움직여요.

믿음이 살아서 뭔가 사건을 일으켜요.

그러므로 성도는 삶으로 믿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 사건 속에 휘말려서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성도는 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건 속에 휘말려서 살아갔듯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있어요.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삶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있어요.

세상은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세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게도 하시지만 성도 자신을 예수님화 하여서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하셨던 것을 그대로 재현을 시키세요.

이렇게 함으로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마귀를 드러내는 미끼로 사용이 되셨듯이 성도 또한 마귀를 드러내는 미끼로 사용이 되어요.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예수님의 운명이 전이(轉移)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세요.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서 용을 땅으로 내어 쫓으니 용이 뿔따구가 나서 이 땅에 예수님의 후손들을 공격하잖아요.

 

마귀도 자기 사람들을 가지고 마귀 짓을 하게 해요.

어떻게 마귀 짓을 하는가 하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마귀 짓을 합니다.

복음을 훼방하고!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면서 말이에요.

그것도 복음을 핑계 대면서 말이에요.

 

복음 복음하면서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한다니까요.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하여서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표면적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 하나님 이름 들먹이면서 예수님을 죽였듯이!

지금은 복음 들먹이면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이게 마귀 짓인지 꿈에도 몰라요.

 

그래서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그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어리석음이란 바로 예수 예수하면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어요.

복음으로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드러내요.

복음 복음하면서 그 입에서 악독이 나오고, 패역이 나오고, 정죄와 심판이 나온다는 것은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죽이는데 힘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복음을 받으면 주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로 세우지 않고 긍휼을 베풀고 사랑하게 하는 자로 세워요.

주께 받은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덮쳐 오면 나를 부인하게 하고 나를 죽이게 해요.

 

제발 복음을 지식 쌓듯 하지 마시고 염불 외우듯이 하지 마세요.

복음은 수도(修道)정진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스님들처럼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능력이고 살아가는 에너지에요.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이고!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갖게 하는 꿈이 있고!

예수로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고 능력이란 말입니다.

 

나 복음 아니까 아무것도 안 해가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 아니까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뭘 해도 죄(罪)인데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를 다녀도 아무 것도 안 해요.

심지어 내가 교회인데 뭘 교회에 가느냐 하면서 교회 갈 필요가 없다고 해요.

 

도대체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이 어떤 복음이기에 복음 알면 교회에 안 가는지 모르겠어요.

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요.

왜? 복음을 알면 교회에 안 가야 하는가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교회에 가서 섬기고 봉사하여야 하잖아요.

 

아니 지금 벧세메스로 법궤를 싣고 간 암소가 어디로 가서 어찌 되었습니까?

벧세메스로 갔지요.

그곳에 뭘 가지고 갔나요.

법궤 가지고 갔지요.

그리곤 어찌 되었나요?

희생 제물로 죽었지요.

 

원래 법궤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벧세메스에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벧세메스에 법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없습니까?

적국에게 빼앗겼잖아요.

 

벧세메스를 교회라고 합시다.

그리고 법궤를 예수라고 하여도 좋고, 언약이라 하여도 좋고, 복음이라 하여도 좋아요.

하나로 통일해서 복음이라 합시다.

그럼 교회에 복음이 없지요.

교회라는 이름은 맞는데 그 속에 있어야 할 복음은 없고 빈껍데기뿐이에요.

 

그러니 암소가 법궤를 찾아서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겁니다.

 

그리곤 가서 어찌 됩니까?

죽지요.

여호수아 밭에서 제물로 바쳐지잖아요.

자기 몸을 죽임 당하잖아요.

이건 복음을 받았으니 교회에 죽으라는 거에요.

 

법궤 실은 암소를 우리 성도라고 적용해 보세요.

 

벧세메스가 제사장이 사는 땅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이 시대 제사장들이 누구인가요?

성도들이에요.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어요.

그럼 왕 같은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 어디인가요?

교회에요.

그러니 벧세메스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법궤를 복음이라고 하고!

법궤 실은 암소를 복음을 아는 성도라고 하고!

벧세메스를 교회라고 한다면!

그럼 복음 받은 성도가 어디로 가야합니까?

교회이지요.

 

이 시대 제사장들이 누구인가요?

성도들이에요.

그럼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 어디인가요?

교회에요.

그런데 그 교회에 제사장들이 복음을 몰라요.

그러니 복음 아는 우리가 복음 들고 교회로 가야지요.

 

자 보세요.

벧세메스에 법궤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법궤를 복음이라고 했으니 그럼 교회가 복음이 있나요?

없나요.

없잖아요.

 

암소가 법궤를 찾아서 벧세메스로 간 것은 복음을 받은 성도가 복음 없는 교회로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저 교회는 복음 전하지 않는다고 나 교회 안 갈래! 라는 말이 안 되지요.

그럴수록 가야지요.

 

그럼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하면서 교회 안 간다는 것은 맞지 않지요.

이건 복음을 준 의도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집구석에서 쌈 싸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집에서 빈둥거리거나, 주일날 등산 다니고, 낚시 다니고, 여행 다니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복음 없는 곳에 가서 죽으라고 준 것이에요.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성령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지요.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곧 복음을 받았다는 말과 같아요.

그렇다면 복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가야지요.

예루살렘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이고 사마리아는 내 주변이고 땅 끝은 세상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라는 말은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율법신앙으로 외식하고 있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복음을 모른단 말입니다.

사마리아나 땅 끝 또한 복음을 몰라요.

그러니 복음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 없는 곳으로 보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받고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구제한다고 서로 쌈박질이나 하고 땅 끝으로 안 가니까 하나님이 큰 환란을 일으켜서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렸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 주변에 복음 모르는 교회가 있다고 하면 거기가 예루살렘이에요.

여러분이 과거에 복음 없다고 하면서 나온 그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복음 안 전한다고 나 교회 안가 그러지 말고 목사가 복음 안 전하니 복음을 아는 여러분이 가서 누룩처럼 복음을 전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린 안 가 그러고 있어요.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복음 알아서 뭘 하고자 합니까?

이젠 해방이다 하고서 집구석에서 놀고자 합니까?

그런 복음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놀라고 복음 주시지 않았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온 성도들이 메뚜기처럼 뛰었어요.

다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들처럼 다 자기가 죽을 자리로 찾아 갔단 말입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다 순교했어요.

이게 복음을 주신 목적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건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이 이렇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 사람은 그 복음은 지식이고 관념이지 실제 생명이 아니에요.

가짜란 말입니다.

 

이런 복음을 듣고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지금 공갈 젓꼭지를 빨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 점점 신경질 적으로 변해가고, 심령이 메말라가고, 들개들처럼 누구든지 걸리기만 해 보아라 물어뜯을 것이다! 라는 모습으로서의 깡패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요.

참으로 딱해요.

 

제발 남에게 신경쓰지 마세요.

그 사람도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내가 받은 은혜만 증거하면 되어요.

남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주께 맡기고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감사함으로 섬기세요.

그게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러니 복음이 있다 없다 따지지 말고 가세요.

교회가 복음을 모를수록 복음 아는 우리가 가야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세상이란 복음을 모르는 교회를 말해요.

여러분의 논리대로 라면 저 교회는 복음 전하지 않기 때문에 나 교회 안 갈래 그러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으로 말해요.

저 교회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 아는 우리더러 가라고 합니다.

저 교회가 어둠이기 때문에 빛인 너희들이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비추라고 합니다.

이게 복음이다!

알려 주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교회 안에 있잖아요.

율법 교회 안에 있잖아요.

여러분의 논리대로 복음 모르는 교회 안에 있잖아요.

 

그럼 복음 모르는 교회 일수록 복음 안다고 하는 여러분이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요.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은 복음을 모르면서도 자신이 복음을 모르는 줄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 아는 자를 복음 모르는 교회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을 받은 자들이 하여야 하는 일이에요.

가서 간첩들이 접선하듯이 지혜롭게 전하세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신 것도 동일해요.

쉬운 말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고 보내심을 받았듯이 성도도 복음 없는 교회에 가서 죽으라고 보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이 죽었으니 살려주려고 오신 겁니다.

법궤 실은 암소를 벧세메스에 보내서 제물로 드려지게 한 것이 여기에 있어요.

가서 그들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빛은 어둠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빛을 위해서 있지 않아요.

빛끼리 모여서 야간 경기 할 일이 있나요.

그건 나중에 천국에 가면 영원토록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둠 속으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이 빛이신대 그 빛에 나라에 계시지 않고 어둠에 나라로 파송 받아 오셨어요.

이는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너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죽음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셨어요.

 

빛을 어둠으로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성도를 빛이라 함은 어둠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어둠을 빛으로 만들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어둠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고발하는 것은 살리기 위함이지 죽이고자 함이 아니에요.

그러니 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빛에 의해서 고발당한 자는 아니 내가 어둠이었네!

주여 살려 주세요!

그런단 말입니다.

 

소경거지 바디메오처럼 주께서 내가 뭘 해주길 원하느냐! 라고 물으니!

주여 내가 보기 원하나이다! 라고 한 것처럼!

어둠 속에 있던 자기백성들이 복음을 들으면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어둠이 고발당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에요.

도리어 믿음 없으면서도 믿는 척하는 것이 창피한 일입니다.

소경이 주여 내가 소경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도리어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난 눈 떴는데! 라고 하면서 예수를 거부한 자들이 수치스러운 자들입니다.

 

신앙을 감추고자 하지 마세요.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하세요.

안 믿어지는데 억지로 믿는 척하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하란 말이에요.

속은 곪아서 푹 썩어가고 있는데 난 괜찮아요! 하면 우짜자는 겁니까?

 

사람 눈치 보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구원해 주지 않아요.

신앙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디메오처럼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개의치 말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하여야 합니다.

내 눈 좀 뜨게 해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항상 어느 때고 믿음 없는 것들이 믿음 있는 척 하여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제발 하나님 앞에 솔직하세요.

복음이 안 믿어지면 주여 복음이 안 믿어집니다.

예수가 안 믿어집니다.

믿어지는 은혜를 주옵소서! 하시라구요.

 

그러니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곁에서 시끄럽다고 책망을 하는데도 난 소경이라서 눈을 떠야 한단 말이야!

난 너희들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난 예수를 만나야 된단 말이야!

그러고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달라요.

복음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한단 말이에요.

영적으로 소경이면서 보는 척 한단 말이에요.

어둠인데 본인들은 어둠인줄 몰라요.

죽음인데 자신들이 죽은 자인 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빛으로 보내서 너희는 죽은 자이고 너희는 어둠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임 당해요.

어둠이 빛이 비추면 그래 우린 어둠이다 고맙다 그러지 않아요.

너 왜? 우리하고 달라!

왜?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데! 라고 하면서 죽여 버려요.

이게 빛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운명입니다.

결국 빛은 어둠을 악으로 드러나고 죽임 당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하셨어요.

가서 이리를 다 잡아 먹고 쳐 부수 라는 것이 아니고!

가서 죽으라는 거에요.

너희 속에 있는 생명을 이리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리들이 너희를 뜯어 먹고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뜯어 먹고 산 것처럼 말이에요.

바울이 스데반을 뜯어 먹고 살았듯이 말이에요.

바울은 다시 이리에게 가서 잡혀 먹히고 바울을 잡아먹은 자들이 또 살아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피의 역사에요.

피를 먹고 살아나는 역사란 말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도 대동강 변에서 아펜젤라 목사가 피를 뿌림으로서 시작이 되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세요.

 

그래서 옳은 복음을 받은 성도는 집안에 틀어 박혀 있는 염세주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로 가야한단 말입니다.

신천지처럼 말이에요.

이단도 교회에 들어가는데 왜?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안 들어가고자 합니까?

교회 안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자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컴퓨터에 앉아서 설교 듣는 것이 전부라고 하지 말고 들었으면 가세요.

가서 부딪쳐 보세요.

그러면서 우리 주님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그 아픔이 장난이 아니구나 를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엄청난 은혜로 다가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알라고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서 매도 맞아 보고,

욕도 먹어 보고,

이단 소리도 들어보시란 말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장난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 되이 여기지 않게 되어요.

복음이 귀하게 여겨진단 말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쓰디쓴 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지 않아요.

 

신앙생활이란? 복음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자기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에요.

십자가 복음을 내 삶화 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옛 사람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죄를 들추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신데 그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어요.

육신으로 오셔서 말씀을 삶으로 풀어 내셨어요.

이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생명으로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말씀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우린 성경 구절을 외우고 있어요.

그건 말씀을 구경하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은 우리가 먹고 소화시켜야 할 양식이에요.

내가 말씀에 장악당하여 날마다 나는 부인되어지고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법궤를 싣고 가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암소들의 운명입니다.

이 길을 예수님이 가셨어요.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성도라면 반드시 이 길을 가도록 주께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법궤 실은 암소처럼 성도의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자꾸만 내가 부인되어지고 죽는 길로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젖 나는 암소처럼 징징거리면서 손에 돌맹이 들고 하나님께 던지고 울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길이 그러했어요.

법궤가 앞서 가면 그 뒤로 졸졸 따라 갔어요.

울면서 말입니다.

말이 울면서이지 원망하고 불평하고 돌을 던지면서 갔어요.

그냥 룰루랄라~ 하면서 가지 않았어요.

 

성도가 가는 길은 광야 길이에요.

광야 길은 늘 하나님으로부터 시험 당하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악함들이 토설되어지는 길이에요.

제발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따라 가면서도 길이 험하다고 불평하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고!

누가 욕하고 이단이라고 한다고 불평하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원망하면서도 따라가는 길이에요.

한숨과 원망과 울음이 끊이지 않아요.

그래서 눈물 골짜기로 통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가는 길은 하루하루 도살할 양처럼 죽임당하는 길이에요.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빼앗김을 당하고 쫓겨남을 당하고!

그럼에도 돌아보면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고 있어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그렇게 죄를 짓고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정죄당하지 않고 보란 듯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새 언약이 실제이지요.

 

이 모두가 예수님의 대속에 피 흘리심 덕분입니다.

그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이 믿어지기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주여!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큰 주의 은혜입니까!

우리가 이런 은혜를 입었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다하기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이게 성도의 운명입니다.

그 일을 다 이루기까지 주께서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다 이루시면 살고 싶어도 데리고 가세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감사하면서 말이에요.

이번 성탄절엔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깨에 주님이 걸터앉아 계시니 감사합니다. 우린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는데 선수들입니다. 그러니 늘 주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의에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벧세메스로 가는 그 길이 힘들고 아플 때마다 하늘 문을 여셔서 주께서 서신 모습을 보게 하시고 이겨내도록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