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올무가 된 기드온의 에봇

정낙원 2013. 3. 12. 16:02

올무가 된 기드온의 에봇 (삿 8:22-27)

 

삿 8:22-27=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24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니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지니 26 기드온의 청한 바 금 귀고리 중 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백성들이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기드온이 자신들을 구원한 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노(怒)를 격발할 일입니다.

 

알다시피 기드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겼어요.

실제로 기드온이 블레셋과 싸울 때 여호와의 칼로 싸웠습니다.

300명의 군사들이 항아리 속에 횃불을 치켜들고 나팔을 불면서 외친 말이 “여호와의 칼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동시에 외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기드온의 칼이란 말은 여호와가 기드온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외친 말이지 기드온의 능력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오합지졸(烏合之卒)과 같은 300명이 잘 훈련이 된 메뚜기 떼처럼 많은 블레셋의 정예 군대를 어찌 이긴단 말입니까?

그것도 살상(殺傷) 무기도 아닌 횃불과 나팔로 말입니다.

이는 기드온이 지금 벌리고 있는 전쟁이 인간을 때려잡는 전쟁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둠에 세력을 물리치는 전쟁이란 뜻입니다.

마귀와의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장차 죄와 사망이라는 어둠에 세력을 물리치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예수그리스도가 하시는 전쟁을 예표(豫表)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전쟁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 뒤에 숨어 계세요.

그런데 백성들 눈에는 하나님은 안 보이고 기드온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기드온이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기드온에게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서 우리를 지켜 달라고 청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버릴 수 없는 우상(偶像)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우상성이란? 신(神)의 도움을 빌려서 자기 지키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교회 부흥시키기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이 복음으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복음 아는 것으로 나 잘난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과 같아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관심사가 주의 뜻에 있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의 영광과 안위에만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그 내면(內面) 속에는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졸장부와 같은 기드온을 들어서 그 큰 블레셋을 이기게 하였으면 당연히 기드온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기드온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서 자기들을 지켜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에게 유익된 것은 붙잡고 곁에 두고자 해요.

 

그것이 신(神)이든 사람이든 조직이든 말입니다.

신(神)을 이용하여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하고!

목사를 이용하여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하고!

조직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신(神)이라는 그늘!”

“목사라는 그늘!”

“교회(조직)라는 그늘” 아래서 보호 받고 싶고 안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 신(神)이란 자기가 쉴 그늘에 불과해요.

 

그래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그늘 막이가 되어줄 것을 찾고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는 교회로 나타나고!

목사로 나타나고!

어떤 집단과 조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안위 받고 그 속에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이게 죄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아래서 쉬고자 하는 그늘 막을 철거하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 쉴 곳이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그늘 막을 철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을 보고, 그 교회를 보고, 그 조직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수천 명의 신자(信者)들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직(組織)을 만듭니다.

또 하나의 힘에 결집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유대교와 한판 붙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신자들 눈에는 교회가 우상(偶像)이 되어 버려요.

교회의 힘으로 세상의 힘과 겨루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교회만 보이게 됩니다.

이건 교회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자(信者)들은 보이는 것을 붙잡지 않아요.

보이는 힘을 의지 않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로부터 난 교회들을 간섭하여서 날마다 눈에 보이는 의지하고 붙잡고자 하는 것을 치우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이면 교회를 치우고!

그것이 목사이면 목사를 치워요.

그리하여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붙잡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기 백성 사랑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수(數)를 힘을 삼고자 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큰 환란으로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흩어진 자들은 조직을 만들지 않았어요.

어느 특정한 사람을 추종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만 의지 하였습니다.

 

이게 진정한 교회에요.

이러한 자들이 모인 곳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인 지역교회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서신서에서 언급하는 교회들이 다 이런 교회들입니다.

 

이렇게 모인 교회는 보이는 세력을 힘을 삼지 않아요.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고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장차 오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였어요.

 

그런데 꼭 마귀가 이러한 모임을 조직화 하여서 힘의 결집체를 만들도록 미혹을 한단 말입니다.

세력화 시킨단 말입니다.

여기에 미혹 당한 자들이 교회라는 조직을 집단화하고 세력화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들만 특별한 존재로 남기고자 합니다.

자기교회만 특별하다고 차별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지금 사사기에 나오는 백성들이 그러고 있는 겁니다.

기드온을 구심점으로 하여서 이방 나라와 대적 할 수 있는 힘에 나라를 만들고자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사람의 의지하는 민족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하나님께서 유약한 기드온을 데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게 하였잖아요.

왜? 숨어서 밀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찾아가서 여호와의 용사여 라고 하였습니까?

이는 숨어 사는 기드온이야 말로 여호와의 일하심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힘없는 자를 부르신 겁니다.

 

여호와 용사는 힘 있는 자가 아니고 힘 없는 자에요.

똑똑한 자가 아니고 무능한 자이고!

많이 배운 자들이 아니고 못 배운 자들입니다.

이건 많이 배우고 똑똑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은 인간의 방법으로 일을 하시지 않는단 말입니다.

 

기드온은 자기 힘이 있으면 안 되어요.

그래서 3만 명이나 되는 군사도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기게 한 겁니다.

이건 싸우고자 남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전쟁 같지 않은 전쟁놀이로서 이기고 만 것입니다.

 

그럼 기드온을 볼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기드온만 보였어요.

그러니 당신이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기드온 자신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잘 알아요.

자기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왕이 되어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를 다스리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요청을 거절 합니다.

 

이건 하나님께 붙잡혀서 사용되어지는 종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서 사용되어지는 종들은 자기를 내 세우지 않아요.

능력이 자기에게 있음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에게 뭔가 대단한 능력이 있는 냥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건 은사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고 복음을 말하면서 자기에게 무슨 능력이 있고 비상한 비밀(秘密)한 것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다 성도들의 눈을 미혹하고 있는 거에요.

그건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가지고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암튼 기드온은 이 전쟁은 하나님이 하신 전쟁이고 또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에봇”을 하나 만듭니다.

 

“에봇”이란? 제사장이 재판을 할 때 입는 옷입니다.

 

제사장이 재판을 할 때 에봇을 입는 것은 이 재판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뜻으로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봇은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재판장이 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제사장은 에봇을 입고 재판을 하면서 지금 당신들을 다스리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봇 입은 제사장은 백성들의 눈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제사장이 할 일이에요.

 

백성들 눈에 제사장이 보이면 안 되고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살아 계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동행(同行)하고 있으며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럴 때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제사장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기드온은 지금 에봇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세요!

날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세요!

나와 내 자식들이나 그 누구도 당신들을 다스릴 자가 없고 여러분들을 다스릴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보라고 만든 에봇이 그들에게 “올무(거치는 것)”가 되고 말았어요.

백성들이 에봇을 음란이 섬기고 만 겁니다.

에봇이 하나님을 가리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음란히 섬겼다는 말은 우상숭배 하였단 말입니다.

에봇이 보이는 신(神)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을 알려주려고 만든 에봇이 도리어 하나님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목사들과 같아요.

예수를 증거하라고 세워 놓았는데 자기가 예수의 자리에 앉고 말았어요.

교인들의 눈에 예수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우리 목사! 우리 목사! 라고 하면서 목사를 외치는 겁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신(神)이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목사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드온 시대에 백성들이 에봇을 음란히 섬기듯이 교인들이 목사를 우상처럼 음란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올무란? 미혹에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가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올무에요.

 

왜? 목사가 눈 앞에서 사라지면 웁니까?

안타까워서 우는 거에요.

누가 울까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울어요.

가장 가까이 있다는 말은 가장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많은 것을 공유하였다는 말입니다.

목사의 영광이 곧 자기 영광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웁니다.

목사와 별개의 사람은 울지 않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누가 울었나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울었어요.

왜? 울었나요?

예수가 없으면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뭔가 예수로부터 얻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지니까 우는 겁니다.

 

떡을 주던 분이 죽었습니다.

병을 고쳐주던 분이 죽었어요.

내 존재의 가치를 상승시켜 주던 분이 죽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원통 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가 살아서 능력을 행하고 각양의 권세 있는 일들을 행할 때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웠어요.

으쓱했습니다.

 

봐라! 나도 이렇게 능력 있는 예수와 한 편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

예수가 자기 존재감을 상승시켜 주었어요.

마치 자기도 예수처럼 능력 있는 자라고 행세하며 자랑했어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유명한 목사와 함께 하면 자기도 유명한 자가 된 줄 착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졸지에 예수님이 죽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다 잃게 생겼어요.

자기 존재감의 붕괴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원통함을 울음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날 위해 울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는 죽어야 해요.

사라져야 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내 가치를 챙겨주고!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게 유익을 주는 예수가 죽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가 눈에 보이면 그 예수는 곧 내겐 우상이 되어요.

내 가치를 챙겨주고 내 유익을 챙겨주는 눈에 보이는 예수는 누구나가 믿을 수 있어요.

아니~ 능력 행하고, 떡 주고, 병 고쳐 주는데 누군들 안 믿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은 다 이런 신(神)을 원해요.

 

인간들은 내게 떡을 주고!

내 병을 고쳐주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신(神)을 원해요.

나를 유명하게 해 주는 그런 신(神)을 원한단 말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가 바로 자기들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에요.

군중들 눈에 비춰진 예수도 마찬가지에요.

우상의 예수란 말입니다.

이 예수를 살려 두면 결국 사람들은 예수를 자기 소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음란히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렇게 신(神) 조차도 자기 유익을 위해 음란히 섬기고자 하는 그 죄를 없애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이런 우상숭배적인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는 예수를 죽인 것은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상의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눈에서 예수를 사리지게 하시므로 참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그 올무를 제거 하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죽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건 심심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창조 속성이 하나님 이외 그 어떤 것도 사랑 받을 수 없도록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제 일 계명이 뭔가요?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지요.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의 근본에 두어야 합니다.

“나 이와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는 말은 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말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몰라요.

하나님은 우리 입장은 전혀 고려해 주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리가 생겨난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독자적으로 행복할 권리조차도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행복에 동참할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죄가 내 중심으로 살게 해요.

그래서 신(神)도 내 유익을 위해서 섬기고!

목사도 내 유익을 위해서 따르고!

부모 자식 그 어떤 것도 다 내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속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이런 죄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데려감으로서 우리 안에 자아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그 죄성을 고발하여서 원망을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내 뜻만 생각하는 그런 죄를 고발하고 토설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자식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고!

아내나 남편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고!

목사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그 사랑하던 사람을 데려가신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눈에 하나님을 가리는 그 사랑의 대상을 제거하심으로서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건져 낸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때문입니까?아니면 하나님 자신 때문인가요?

하나님 때문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내 자식이 남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얻어터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내가 불편해요.

속상해요.

그래서 돈을 주어서라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러고 있어요.

자기 백성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 종 노릇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속전(贖錢)을 주고서 죄에서 빼내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에서 건져 낸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에요.

너희는 내 것이란 뜻에서 건져 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을 찾아 온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안식(安息)이란? 모든 일을 다 끝내고 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인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고 계신가요?

아닌가요?

 

안식하지 못하고 계세요.

왜? 안식하지 못하고 계신가요?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식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손 걷어 부치고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십니까?

하나님이 안식하고 싶어서 입니다.

이게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아들을 역사에 보내서 야! 네가 가서 내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서 날 좀 쉬게 해 주렴!

저 놈들을 건져 내지 못하고서는 내가 쉴 수가 없구나!

그러신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 속으로 오신 겁니다.

알았습니다 아버지! 내가 가서 저 놈들은 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해 내겠습니다!

내가 이 일을 다 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들 다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셨어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22-2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린도전서 15장을 일컬어 부활장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을 살려 내시지요.

그리곤 그 살아난 자들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즉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의 피로 다 속량하시고 그들에게 아들에 생명을 주어서 영생하는 자로 살려내어서 아버지께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 구원이 다 이루어져야 일곱째 날 안식이 됩니다.

그러니 첫 창조에 속한 일곱째 날의 안식일(安息日)은 장차 창조 바깥에 있는 안식을 보여주는 모형(模型)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여덟째 날 안식일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7대 절기가 있습니다.

 

이 절기는 우리 인생으로 적용하면 온 인생을 함축하고 있어요.

그 절기 중에서 맨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수장절이라고도 하고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이 때는 첫째 날부터 성회로 모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이 지난 후 여덟째 날에 거룩한 대 성회로 모여요.

이 날이 여덟째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묵시 속에 안식일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덟째 날 안식은 여덟째 날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간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역사는 일곱이라는 창조의 싸이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일곱이라는 창조 싸이클 바깥에 있는 여덟째 날이 있어요.

이 여덟째 날은 창조 바깥에 있는 묵시에 속한 날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역사 속에서는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모이지만 이 안식일은 곧 이 역사 바깥에 있는 영원한 안식일인 여덟째 날의 안식일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일곱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는 역사 속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을 해서 여덟째 날이라는 묵시 속에 계신 아버지께 바치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구약 시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보내서 구원하신 것도 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쉬운 말로 그 놈들을 거기 놔 두고서는 하나님이 편히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에 모세를 보내서 찾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미리 예표(豫表)적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빼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양 고기 대신 빵으로 자기 몸이라고 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 피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언약의 피 곧 죄사함의 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은 아버지가 안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바쳐진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그럽니다.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대로 여기 한 몸이 왔습니다.

내가 제물로 왔습니다.

그러니 내 몸을 받아 주옵소서! 라고 하였어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제물은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을 위한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바쳐진 제물이에요.

 

아버지가 아들을 왜? 제물로 보내셨는가요?

이는 아버지를 위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신 겁니다.

아버지가 안식하고 싶어서 말이에요.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 백성은 누가 지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지었다고 하지요.

 

누구를 위해서 지었다고 하나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나요?

죄 아래 팔렸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게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누가 손해를 봅니까?

하나님이 손해를 봅니다.

아니~!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창조를 했는데 하나님은 찬송하지 않고 지음 받은 물건들을 찬송하고 있단 말입니다.

 

쉬운 말로 교인들이 목사를 추종하면서 찬송하고 있단 말입니다.

죄가 교인들을 미혹해서 하나님께 돌아갈 찬송을 목사에게 돌리게 하고 있단 말입니다.

죄가 본말을 전도시켜 놓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치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들 눈에 오직 하나님만 보이게 하십니다.

 

죄를 도말을 하는데 누구를 위해서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잖아요.

 

그럼 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린 그 하나님의 안식 때문에 구원에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이 싸워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기드온이 찾아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 오셨어요.

기드온은 이 사실을 알아요.

자기가 한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가 하신 전쟁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너희의 왕은 내가 아니고 여호와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에봇을 만들었는데 백성들이 도리어 그 에봇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단 말입니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요?

 

에봇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적(表迹)입니다.

에봇을 섬기면 안 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해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목사도 에봇처럼 하나님을 알려주는 표적이에요.

표적은 섬기고 찬송할 대상이 아니에요.

여기서 섬김이란? 추종하고 찬송할 대상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에봇처럼 보이는 목사에게 무슨 신령한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려고 만든 그 에봇과 같은 목사를 신(神)처럼 섬기고 찬송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에봇을 치워야지요.

 

그 에봇을 이 시대로 적용하면 목사에요.

 

목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에요.

자기 잘남이 증거 되면 안 되어요.

그럼 교인들이 목사를 추종하고 찬송해요.

 

인간의 본성은 보이는 신(神)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있어 보이는 목사는 신(神)이에요.

교인들이 목사를 보이는 신(神)으로 섬기고자 해요.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들 눈에서 자기를 사라지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인들 스스로가 목사를 거치지 않아도 스스로 예수를 만나서 쉼을 얻게 해 주어야 해요.

 

목사는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하는 중매쟁이에요.

성도들이 예수와 살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이 예수에게로 가야 할 교인들을 자기가 가로채고 있습니다.

자기를 추종하게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마치 압살롬이 다윗에게로 가야할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의 마음이 예수에게로 가지 않고 목사에게 두게 되는 겁니다.

목사 비위를 맞추고 있어요.

목사를 찬양하고 있어요.

 

교인들 눈에 목사가 보이면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보여야 합니다.

목사의 능력이 보이면 안 되어요.

그 목사를 통해서만 뭔가 나온다고 생각하게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목사는 여러분~ 하나님은 나 아니라도 얼마든지 자기 백성들을 다 구원해 내십니다!

그러니 날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세요!

나 아니라도 복음 전하는 분이 많습니다!

나를 추종하지 마세요! 라고 하여야 해요.

 

나만 특별한 복음을 전한다는 식으로 각인시키면 교인들은 목사를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목사가 교주가 되고 맙니다.

이건 목사가 원치 않아도 교인들이 그렇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고정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목사가 싸워야 하는 싸움입니다.

왜냐하면!교인들은 본능적으로 보이는 목사를 쫓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인간들 속에 본성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우상성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런 우상성을 깨트리라고 목사를 세운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우상성을 깨트리기 보다는 교인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고자 하고!

자기에게 무슨 비밀한 능력이 있는 척 하고 있게 되면 큰일 나요.

교인들이 눈과 마음을 훔치게 되는 미혹이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러면 안 되어요.

반칙이에요.

 

그래서 이 시대 목사들이 신앙에 올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예수를 가리고 있어요.

자칭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이 다 여기에 걸려들었어요.

주변을 둘러보십시요.

교인들이 목사를 신격화하여 섬기고 있잖아요.

 

이러한 모습이 어느 특정한 목사를 추종하고 오직 그 목사만이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특정한 목사를 에봇과 같이 음란히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중보자가 되고 만 겁니다.

결국 목사들이 예수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속에 자기 지식이 드러나면 안 되어요.

이건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 아는 것이 마치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아는 것처럼 차별성을 두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성이 날아가요.

이건 악한 것입니다.

 

자기 똑똑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 속에 우리의 잘남이나 지식이 비춰지지 않도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설교를 할 때 항상 자기 잘남이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를 하여야 합니다.

세상 지식이 나오지 않도록 하여야 해요.

 

행여라도 성도들 속에서 우리 목사님이 유능하고 똑똑하다는 것으로 비춰지면 그건 교인들이 목사를 좇게 되는 독(毒)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자칫하면 자기 사상을 전하는 맹독(猛毒)이 될 수가 있어요.

목사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교인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에봇을 음란히 섬기라고 만든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을 섬기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기드온의 바램과 달리 에봇을 음란히 섬기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는 항상 자기를 살펴야 하는 겁니다.

혹여라도 교인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가 경계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교인들이 목사의 말만 참 진리라고 따르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교인들은 그 목사의 말이 곧 독(毒)이 되어요.

그 독(毒)에 중독이 되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어져요.

그 목사가 해석을 해 주어야 해요.

 

결국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없는 소경이 되고 마는 겁니다.

목사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을 빼앗가 버린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목사의 본심을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교인들은 그렇게 되고 말아요.

 

결국 그 목사가 가르쳐준 성경 해석을 가지고 성경을 재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교인들은 목사에게 종속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럼 목사를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에봇을 음란히 섬기는 것과 같아요.

 

이게 모든 이단들의 공통된 점이에요.

이단이 뭡니까?

어느 특정한 사람의 말을 절대 진리라고 따르는 것이잖아요.

인간은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교주가 되기 쉬워요.

우리 안에 죄성이 늘 이렇게 유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은 넘어 뜨립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막는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서 알아지는 세상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은사에요.

성령의 은사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는 데에는 세상 학문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세상 학문으로 박사라고 해서 성경을 많이 알고 무식하다고 해서 성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시대나 많이 안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였고 복음을 가렸어요.

안다고 하는 자들이 특권층을 형성하여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성을 두어서 편 가르기를 하고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서 복음을 가지고 복음을 가리는 일을 행하여 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자기들만의 구별된 언어로 타인과 다름을 두고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냈어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일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내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했어요.

그 잘남이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세상 먹물 냄새만 풍겼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 자신도 예외 일수가 없어요.

제 안에도 영웅본색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자 하는 교주성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걸 알기 때문에 늘 내 자신과 싸우는 겁니다.

 

암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눈에 오직 하나님만 보이도록 우리 눈에 얼씬 거리는 것들을 치우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우리에겐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 속으로 밀어 넣어서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붙잡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서편제를 보면 소리꾼 유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양악(洋樂)으로 사라져가는 한국의 소리를 남기고자 합니다.

한국의 소리는 한(恨)에서 나오는 소리에요.

가슴 저 밑바닥 아픔에서 나온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송화라는 딸에게 한(恨)을 심어 줍니다.

어떻게 심어 주는가 하면 한약(韓藥) 속에다 눈을 멀게 하는 부자라는 약초를 써서 육신의 눈을 멀게 하여서 한(恨)을 심어 주어요.

아비가 죽고 나자 송화는 온갖 고난과 역경(逆境)을 거처가면서 한(恨)이 쌓이고 그 한(恨)이 득음(得音)을 하게 되는 촉매(觸媒)가 되어서 소리꾼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장면에 가면 소리가 싫다고 도망을 간 동생이 누나를 찾아옵니다.

그리곤 둘이서 밤이 맞도록 소리로서 서로의 한(恨)을 풀어냅니다.

서로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송화는 고수인 동생의 추임새에 대번에 자기 동생임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아는 척 하지 않고 소리로서만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어요.

 

동생이 떠나고 난 후 송화는 또 다시 한(恨) 많은 길을 나섭니다.

너무 편안하면 소리가 사라진다고 하면서 평안한 삶을 청산하고 어린 딸아이가 내민 지팡이 끝을 잡고서 또 다시 그 한(恨)의 세월 속으로 뛰어 듭니다.

 

저는 복음을 깨닫고 이 장면을 보고서 펑펑 울었어요.

마치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하고 선생 노릇하고 안주(安住)할까봐서 주께서 제 손을 잡고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려고 한(恨)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한(恨)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한(恨)이 서려 있어요.

이 예수그리스도의 한(恨)은 이 세상에서 버려지는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한(恨)으로 산 민족이에요.

신약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한(恨)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늘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와 행인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는 그 눈 앞에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보이게 하시려고 자꾸만 한(恨)이 있는 곳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자 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늘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 멀리 보는 시온성을 향해서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한(恨) 많은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더욱 더 밀쳐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선진들이 모두가 이 한(恨)의 길을 걸었어요.

믿음이 주체(主體)가 되어서 이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의 한(恨)에 동참케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의지 할만한 것들을 빼앗아가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마다 아파요.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그러나 그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나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붙좇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를 버려야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고!

보이는 선생인 목사를 죽여야 보이지 않는 참 스승인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요.

여러분 안에 예수를 가리는 목사라는 음란한 에봇이 버려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눈에 율법이라는 표적의 비늘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눈앞에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