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나무와 열매 그리고 말

정낙원 2013. 8. 2. 13:54

나무와 열매 그리고 말

 

마 12:22-37=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어제 어떤 분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어떤 교인이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다고 한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절대 진리가 되어서 남을 판단할 때는 문제가 된다.

 

실제로 이 분은 자기가 듣는 목사님만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결국 안다는 것으로 판관이 되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문제만 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다툼이 심각하다고 하면서 이걸 과연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느냐?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참으로 착잡해진다.

 

왜? 그 귀한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데 사용할까?

이는 모두가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만하고 무례하여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교회의 문제는 안다고 하는 자들이 일으킨다.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체하면서 덕을 세우지 못하고 불협화음만 일으킨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직 하나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자의 말만 듣는다.

결국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고 사람의 종이 되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다 안다고 하는데서야 그 누가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러했다.

스스로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면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가련하고 곤고하고 발가벗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복음 앞에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 안다고 하면서 자고하고 자만하고 자긍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 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고 교회에서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복음이 그 사람을 고발하고 있음이 된다.

물론 본인은 복음이 자기를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귀신이 들어서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

이에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셨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야~! 이 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라고 한다.

이는 곧 메시야란 말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발끈한다.

군중들의 시선이 예수에게 쏠리자 시기심이 발동을 한 것이다.

시기심이 발동하면 그를 폄훼하여야 한다.

 

인간들의 어리석음이란? 내가 상대를 폄훼하면 내가 그 보다 나아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기심은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누가 누구를 시기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예수 앞에서 자신의 열등함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암튼 바리새인들은 군중들의 시선이 예수에게 쏠리자 견제에 나선다.

백성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라고 하자 즉각 반발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 다윗의 자손은 무슨 다윗의 자손이야! 이는 모두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 것이라고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일갈하신다.

야~! 이놈들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가 어찌 온전케 되겠느냐!

 

쉬운 말로 고을끼리 서로 싸우고 가정에서 부부간에 서로 헐뜯고 쌈박질을 하고 사는데 어떻게 그 고을이 평화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그 가정이 온전할 수가 있느냐!

무너지지 않겠느냐 이다.

 

너희들 말대로 내가 사단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몰아냈다고 한다면 너희 중에서 귀신을 좇아낸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그럼 그들은 무엇이냐?

그들도 사단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좇아낸 것이냐?

 

너희들은 너희 중에서 귀신을 좇아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좇아낸 것이라고 자랑하지 않았느냐!

그럼 너희가 지금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좇아낸 것을 가지고 사단의 힘으로 좇아낸 것이라고 한다면 너희 중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귀신을 좇아낸 자들이 너희를 고소하지 않겠느냐!

 

귀신을 좇아낸다는 것은 그가 귀신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귀신보다 강하기 때문에 귀신들이 내게 결박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좇아냈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귀신 들린 자로 몰아가는 것을 나무와 열매로 비유하신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는 것이다.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으로 말을 하게 된다고 하신다.

그 속에 선(善)이 있으면 선(善)을 내어 놓고 그 속에 악(惡)이 있으면 악(惡)을 내어 놓는다고 하신다.

한마디로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나오고 가시나무에서 가시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악이나 선이 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지금 내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좇아내는 것을 가지고 귀신의 힘으로 좇아낸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너희들 속에 귀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 새끼들이라고 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남을 죽이는 독(毒)이 가득한데 어찌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된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듯이 너희가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귀신이 하는 것으로 내어 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걸 법과 은혜로 보자.

 

그 안에 법이 있는 사람은 법을 토해내고!

그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를 토해내게 된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법에서는 법이 나오고, 은혜에서는 은혜가 나온다.

죽음에서는 죽음이 나오고 생명에서는 생명이 나온다.

 

예수 안에는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을 토해내게 된다.

마귀 안에는 죽음이 있으므로 죽음을 토해 내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죽음을 토해내는 것은 그들이 죽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뱀은 물을 마시면 독을 생산하고 양이 물을 마시면 젓을 생산한다.

물 자체는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그러나 그 물을 누가 마시느냐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독(毒)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는 약(藥)이 되기도 한다.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면 죽이는 칼이 되고!

복음을 은혜로 사용하면 살리는 칼이 된다.

바리새인들처럼 악한 자들이 복음을 사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사용을 하게 된다.

 

그 속에 법이 자리 잡고 있으면 복음도 법으로 둔갑을 하고 만다.

그럼 그 복음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을 행사하게 된다.

그 속에 법이 자리 잡고 있는 자는 복음으로 변론을 일삼고 분쟁을 일으킨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망을 토해내는 것은 그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망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이다.

 

왜? 그 귀한 복음으로 정죄하는 일을 하는가?

이는 복음이 믿음에 화합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은혜로 믿음과 화합을 화면 생명을 토해낸다.

그러나 복음이 법으로 사용이 되면 사망을 토해내게 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했다.

 

마 23:1-6=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거짓말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즉 말과 내용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를 예수님은 나무와 실과로 이야기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말은 듣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은 곧 그 말은 내용이 없고 텅 비어있는 것이란 말이다.

즉 생명이 없는 죽은 말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 왜? 저들의 말은 듣고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는가?

이는 바리새인들은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을 내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곧 귀신의 믿음이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고 가시나무는 가시를 맺는다.

가시나무는 죽었다 깨어나도 포도를 맺을 수 없다.

또한 포도나무 역시 가시를 맺는 법은 없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너희는 악하니(법) 어떻게 선한 말(은혜)을 할 수 있느냐이다.

당연하다.

 

포도열매는 포도나무만 맺을 수 있듯이 선한 말은 선한 사람만이 할 수가 있다.

악한 사람이 하는 말은 아무리 그 말이 성경 내용이더라도 악한 말이다.

성경을 그냥 가감없이 읽더라도 그것은 악한 말이 된다.

사단이 아무리 성경을 인용해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사단의 말이다.

 

마귀가 예수를 시험 할 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하였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사람을 시험하는데 사용한다.

이는 마귀는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도 악함으로 남을 시험하고 넘어뜨리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도 육으로 사용한다.

육은 하나님 말씀도 육으로 이해 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근거로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운 형제들에게 구제를 하고!

요즘 말로 밥 퍼주는 사랑을 했다고 하자.

 

비록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땅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러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것을 신앙의 본질로 내어 놓지 말라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인간의 행함에서는 의(義)가 나오지 않고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의미를 두면 영(靈)이고 자기들의 행위에 의미를 두면 육(肉)이다.

 

바리새인들은 육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자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 말은 육신에 속한 것으로서 선한 말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십계명을 예를 들어서 말해보자.

 

바리새인은 육(肉)에 속한 자들이다.

성경은 육에 속한 자들을 법 아래 있다고 한다.

그럼 바리새인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해석을 하였는지를 보면 육(肉)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법으로 이해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살인하지 말자!

간음하지 말자!

도적질 하지 말자! 로 사용하였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고!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였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충실히 지켰다.

 

문자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걸 육신에 속한 일이라고 한다.

악(惡)이라고 한다.

그래서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을 내어 놓을 수가 있느냐 라고 하신다.

 

그럼 살인하지 말자는 말이 선한 말이고, 살인 하라는 말은 악한 말인가?

도적질 하라는 말은 악한 말이고,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은 선한 말인가?

간음하지 말자는 말은 선한 말이고, 간음 하라는 말은 악한 말이란 말인가?

 

이는 누가 이 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한 말이 되기도 하고 악한 말이 되기도 한다.

악한 자가 사용하면 악한 말이 되고, 선한 사람이 사용하면 선한 말이 된다.

마귀가 사용하면 악한 말이 되고, 예수가 사용하면 선한 말이 된다.

 

바리새인들은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키자는 법을 내어 놓게 된 것이다.

법 아래 있으면 고작하여 “죄 짓지 말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는 것을 내어 놓게 되어 있다.

 

법 아래서는 은혜가 나올 수가 없다.

은혜는 은혜에게서만 나온다.

 

바리새인들에게서는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

생명은 예수에게서만 나온다.

이는 바리새인은 사망에 속하였고, 예수는 생명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법에 속하였고, 예수는 은혜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십계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떤 답을 내어 놓는가?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예수를 바라보자” 를 내어 놓는다.

그 속에 은혜가 있는 성도는 “십자가를 바라보자” 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고 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지키자고 하는 것은 악한 말이 되고!

“주 예수를 바라보자” 는 것은 선한 말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십계명을 법으로 나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십계명을 은혜로 나아갔다.

 

십계명을 복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럼 법에 속한 자는 복음을 법으로 사용할 것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복음을 은혜로 사용할 것이다.

 

법에 속한 자는 복음 아는 것을 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것으로 사용하고!

은혜 아래 속한 자는 복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것으로 사용하게 된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씀은 곧 입에서 나오는 말로 그 사람을 안다는 말씀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올 때 이것을 말이라고 한다.

 

마음에 죄가 들어 있는 사람의 입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죄 짓지 말자가 최고이다.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죄 짓자는 말은 악한 말이고, 죄 짓지 말자는 선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도 악한 말이고, 살인하라는 말도 악한 말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도 악한 말이고, 도적질 하라는 말도 악한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도 악한 말이고, 간음해도 된다는 말도 악한 말이다.

 

법 아래 있으면 실제로 했느냐! 안 했느냐! 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살인을 했느냐! 안 했냐!

도적질을 했느냐! 안 했느냐!

간음을 했느냐! 아니했느냐! 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왜? 그런가?

이는 모두가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인 했느냐! 안 했느냐!

도적질 했느냐! 안 했느냐!

간음했느냐! 안 했느냐! 로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안에 법이 있느냐” 아니면 “은혜 안에 있느냐” 로 심판 하신다.

그 안에 마귀가 있으면 법이 나오고!

그 안에 예수가 있으면 은혜가 나온다.

 

그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자! 라는 말도 악한 말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선한 말인가?

 

“주 예수를 믿자!”

“십자가를 바라보자!” 가 선한 말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예수만 선한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나오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법 아래 있던 자가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

법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성도가 은혜를 입으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게 된다.

 

법에서 은혜로!

정죄에서 용서로!

행위에서 믿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것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선이 옮겨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복음으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쏟아낸다.

 

그러므로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 한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어둠에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어둠에 있기 때문에 복음도 어둠에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어떤 말을 하느냐는 중요치 않다.

마귀도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을 살려내지 못하고 죽이는 일을 한다.

 

그 앎이 법에 속한 것이냐!

아니면 은혜에 속한 것이냐! 이다.

 

법에서는 법이 나오고 은혜에서는 은혜가 나온다.

그러므로 복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을 토해내고 있느냐 가 그 사람이 어떤 나무인가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왜? 복음으로 교회에서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가?

이는 그 복음이 그에게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날에 너희가 한 그 말이 곧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고 경고 하신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