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복이냐! 저주이냐!

정낙원 2013. 8. 3. 22:43

예수 믿는게 복이냐! 저주이냐!

 

 

신앙은 사고의 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말은 극과 극을 말합니다.

극과 극으로 다르면 어찌 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저주로 보여지고 반대로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에게는 사랑으로 보여지겠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제 우리를 사랑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게 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날 달달 볶느냐고 합니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못 살게 구느냐고 합니다.

 

마치 철없는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미움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사랑해서 잔소리를 하는데!

자식들은 그것을 미움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부모처럼 간섭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간섭하심을 복이라 여기지 않고 저주라 여깁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심을 복이라 하고 유기하심을 저주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복은 저주라 하고 반대로 유기하심의 저주를 복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수 믿는게 복이냐? 저주냐?

 

잘 아는 어떤 집사님이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딸에게 돈을 끌어 부어 준다고 하였답니다.

기도원에 갔더니 어떤 용한 부흥사가 그렇게 기도해 주었다고 하면서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꿈 깨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건 복이 아니고 저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놈은 목사가 아니고 무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합니다.

 

어떤 분이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왜? 드렸을까요?

복 받기 위해서입니다.

 

목사님이 정성껏 일천 번제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정성껏 드렸습니다.

그런데 복은 고사하고 어려운 일만 생긴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건 자기가 바라던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

일천 번제를 받아 잡수셨으면 복을 주어야지요.

그런데 복은 커녕 힘든 일만 생기게 하니 이런 하나님을 더 믿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문제입니까?

 

정답은 신(神)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일천 번제를 마귀에게 드렸어야 하는데 하나님께 드린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일천 번제를 안 받습니다.

일천 번제를 안 받았으니 당연히 복을 줄 리가 없지요.

 

분명히 말합니다.

복 받고자 하나님을 찾으면 저주 받습니다.

복 받고자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죽여 버린 사건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가지고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야! 정낙원이 네가 바로 유대인이야! 라고 합니다.

 

성도는 복을 받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저주 받기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헐~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잘 사는 길이 아니고 도리어 망하고 죽는 길입니다.

아~! 이 무슨 망발이란 말입니까?

 

역설(逆說)입니다.

신앙이란? 이 역설을 정설로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역설을 정설로 추적해 봅시다.

 

그리하여 복이 저주이고 저주가 복으로 보여지는 눈들이 떠지시길 바랍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땅 사람으로 출생합니다.

이름하여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이러면 땅의 것에는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복을 운운하는 것은 모두가 마귀적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모두가 허상이고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세상에 것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가 있습니까.

우린 본능적으로 세상 것을 구하고 찾고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에 것이 무엇인가요?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오매불망 바라고 좇아가서 얻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눈만 뜨고 입만 열면 이러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은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 좋아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린 이러한 것들을 얻고자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이런 것 찾으려면 오지 말라고 합니다.

헐~

 

마귀를 일컬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그럼 세상에 것들은 마귀가 주는 것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흙을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원흉인 마귀와 죄의 종이 된 죄인에게 흙을 주었습니다.

그리곤 죄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저주 받은 땅은 죄인의 나와바리(구역)입니다.

흙을 일컬어 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4장을 봅시다.

 

눅 4:5-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하나님이 마귀에게 이 세상 것을 넘겨주었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왕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땅에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을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와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합니다.

자기에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고 합니다.

 

하늘의 사람에게 땅에 영광을 취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하늘의 사람은 하늘의 복을 추구하지 땅의 복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땅의 복은 땅 사람이나 추구합니다.

 

이렇게 되면 땅에서 복을 받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 언약적이고 비 신앙이 됩니다.

뱀은 항상 땅에 것으로 사냥을 합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뱀으로부터 사냥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땅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를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 속에는 땅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일어납니다.

성도는 아담 안에서 난 죄인인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십자가란? 옛 사람이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 속에는 땅의 사람의 죽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십자가 속에는 땅의 소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땅에 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날마다 땅 사람이 죽고 날마다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나는 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주께서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란? 세상 가치를 버리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땅에 것의 버려짐과 하늘에 것으로서의 채움을 입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땅에 속한 옛 사람의 죽음과 하늘에 속한 새 사람으로서의 부활이 동시에 들어가 있습니다.

땅 사람은 나를 위하여 살지만 새 사람은 언약을 위하여 삽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자란 늘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간섭하심으로 부인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를 띠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띠를 매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맨 띠를 끄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린 끌려 갈 뿐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끌려가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을 가려면 필연적으로 애굽을 떠남이 있게 됩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림을 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이걸 아브라함에게는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떠나는 삶을 살도록 강요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언약을 위한 구원입니다.

이는 곧 나를 위한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 속에는 나를 위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만 들어있습니다.

나를 위한 것이 없다는 말은 나의 세상적 행복을 위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사는 나를 위한 구원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 미혹 당하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세상에 복을 달라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사는 것을 두 눈뜨고 보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범죄한 아담이 살아갈 근거인 땅을 저주하신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서 세상 적으로 신세를 망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들을 믿음으로 산 구름 같은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그 증인의 우두머리가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아버지 집을 떠남을 요구받게 됩니다.

세상에 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라는 명(命)을 받고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리를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을 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을 예수와 같은 운명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 뽑힘 당하는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쉬운 말로 세상에서 신세 망치는 길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서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을 대하십니다.

 

아브람을 보세요.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하는 말이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 인연을 끊으라는 말입니다.

 

부모 친척 아비 집은 나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고 근거입니다.

나무의 뿌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로부터 끊어져 나가라고 합니다.

이건 한마디로 죽으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럽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이 그럽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초두에 말씀 드렸듯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 복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세상에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저주의 길로 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주의 길로 인도 하신다고 하니까 세상에서 거지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 합니다.

믿음에 조상이라 함은 곧 아브라함 속에는 믿는 자들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루어 가시는 것 속에는 우리를 다루어 가심이 들어가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루셨나요?

땅에서 뽑아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게 한 것은 근원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이건 세상에 속한 아브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을 일컬어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이란 말은 “아다마”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다마” 란? 흙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났습니다.

흙이 우리의 본토 친척 아비 집입니다.

구원이란? 흙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는 것은 흙으로부터 떠남이 됩니다.

흙으로부터의 떠남은 곧 하늘로의 여정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아브람을 개명(改名)을 시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줍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지어 주십니다.

이름은 부모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꿔준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부모란 말입니다.

 

하늘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이는 곧 너도 이제부터는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족보(族譜)가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어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가족이 되는 사람도 아브라함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집니다.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살도록 간섭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낯선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낯선 삶을 일컬어 성경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결국 하늘에 사람들에게 평안과 불안에 요소는 환경이 아니라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안 할 수가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환경일지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복을 엄청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복을 받고자 노력을 합니다.

 

야곱은 장자권에 복이 있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는 프로젝트를 가동 합니다.

사냥 길에 허기져서 돌아온 형에게 팥죽으로 흥정을 합니다.

 

장자 권을 주면 팥죽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런 못된 인간이 어디에 있나요?

에서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그래 니가 형 해라! 하면서 팥죽과 장자권을 바꿔 버립니다.

 

둘 사이에 거래가 형성 된 것입니다.

이제 이걸 아버지로부터 추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어미가 합세합니다.

아버지가 늙어서 이제 가문을 장자에게 넘겨주고자 장자권 위임식을 거행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맏아들 에서에게 장자권 위임식을 준비하라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어미가 듣고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알려 줍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비는 강한 자식 편을 들고 어미는 약한 자식 편을 듭니다.

어미는 모성애(母性愛)로 유약한 야곱을 위하여 장자권 찬탈 작전을 폅니다.

 

형의 옷을 훔쳐 둘째에게 입힙니다.

그리곤 아버지에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야곱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합니다.

이에 어미는 모든 것은 내가 책임 질 테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야곱은 어미가 시키는 대로 하여서 아비를 속이고 장자권의 축복을 받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야곱이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인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복 받을 줄 알고 장자권을 받았는데 집에서 쫓겨나다니 이게 왠 말인가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복이라고 합니다.

 

무슨 복이 이런 복이 다 있습니까?

누가 집에서 쫓겨나 나그네 신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겠습니까?

이걸 복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귀에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로 들립니다.

 

우린 이것을 복이라 하지 않고 저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별 희한한 복과 사랑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별나고 희한한 복과 사랑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구약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 인생 종치는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그 아들 요셉에 그러했고!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도 누구든지 예수님이 찾아가면 여지없이 인생 종말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하루하루 가족들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서 인생 종치게 됩니다.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심지어 가족도 버리는 길로 들어서고 맙니다.

베드로의 마누라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가정파괴범입니다.

이런 일은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12제자 모두가 동일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장래에 출세가 보장된 전도가 유망한 바리새인 중에서도 진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대 제사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잘하면 앞으로 본인이 대 제사장까지도 바라 볼 수 있는 기대가 짱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가자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전도가 유망한 자가 아니라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변절자로 낙인찍혀서 죽음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잘나가던 바리새인으로서의 사울에 인생은 완전히 쫑 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부모 입장에선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유학을 보내서 모범생으로 승승장구 하던 아들이 예수를 만나서 하루아침에 인생을 말아 먹게 생겼으니 부모 입장에서는 예수는 아들에 신세를 망치게 한 웬수입니다.

아마도 사울의 부모님 입장에선 예수라는 말만 들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홍두깨를 들고 죽인다고 달려 들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찾아가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쟁이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때문에 가족에 불화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 하였을 터이나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고 가정에 행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도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착각을 깨트려주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야무진 꿈을 깨트리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입장에선 예수는 진짜 만나고 싶지 않는 재수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찾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세상 인생이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사건을 일컬어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뭐냐?

인생 쫑 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구원을 받고 싶습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였는데?

잘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고 하는데?

왜? 인생 쫑 나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싫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구원이 내가 원치 않는데도 주어진단 말입니다.

난 싫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찾아 와서 꾸역 꾸역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와 상의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우린 악악거립니다.

 

가세요!

제발 좀 가세요!

날 좀 간섭하지 말고 내 버려두란 말입니다!

 

저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가겠는데!

우리 주님은 자존심도 없는지 떠날 기색이 없습니다.

도리어 더 파고드십니다.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라고 하면서 착 달라붙습니다.

 

아~!

이걸 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주라고 해야 할까요?

 

언제쯤 우리에게는 이러한 저주스러움이 복이라는 것으로 깨달아질까요?

 

어제 밤에 기독교 TV에서 어떤 양복 입은 무당이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는 설교를 하길래 속이 상해서 가볍게 적어 보았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헥~ 헥~ 거리는데 무당들이 푸닥거리를 하니 더 덥네요.

찜통이 따로 없습니다.

엄청 덥습니다.

 

암튼 무더위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