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십계명과 약자 보호법

정낙원 2016. 7. 6. 12:12

십계명과 약자 보호법

 

 

21:1-2절.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고 그 속에 약자 보호법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약자 보호법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을 말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짐으로서 평균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힘의 법칙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랑의 법으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속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여호와를 통하여 동일한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십계명이 무엇을 겨냥하고 주어졌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율법)이 뭔가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죄인으로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법입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법은 옳은 자를 위하여 있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말하는 것은 너희는 이미 죄인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틀렸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율법 앞에 서면 입을 닫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야 라고 알려 주신 겁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율법을 지킨 자이냐?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입니다.

 

율법 앞에 모두가 죄인이므로 모두가 약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는 그 속에다가 약자 보호법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이는 율법을 가지고 강한 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약한 자인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 보호법 속에 “고엘” 제도가 있습니다.

고엘은 약자의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해 주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고엘이라는 이름 속에 무엇을 담당해 주실 것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엘이라는 말 속에는 구속할 자” “회복시켜 주실 자” “보상해 주실 자 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얼 구속하였나요?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나 대신 죽어주신 분이 나의 고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율법 속에 고엘 제도를 두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고엘이 되셔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무얼 회복시켜 주셨나요?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린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잠시 죄의 종이 되고 말았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원래 아들인데 잠시 정한 때까지 율법이라는 청기지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속량을 받은 자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 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할 자들이 죄로 인하여 마귀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어 주심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신 우리의 “고엘”인 것입니다.

 

무얼 보상해 주었나요?

 

우리의 기업을 보상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우리가 살아갈 땅입니다.

기업입니다.

 

우린 원래 에덴동산에서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뱀의 미혹으로 범죄하고 쫓겨났습니다.

 

죄로 인하여 그 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다시 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엘 제도는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주신 제도인 겁니다.

 

하나님은 지키지도 못할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 속에 고엘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고엘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 이스라엘은 약한 자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강한 자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대신 담당하는 것이 약자 보호법과 고엘 제도의 의미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강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고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계명을 정의하시기를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 13장입니다.

 

13:8-10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완성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율법은 죄를 고발하는 것이고,

죄는 이웃을 헤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이 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니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율법이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여 인간들 간의 차별성을 없애버리고 평등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율법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차별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동등하고 평등한 상태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율법 정신이 온전하게 나타나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 속에 아브라함의 피만 흐르고 있지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애굽 사람과 똑 같습니다.

애굽의 가치관이 그대로 있습니다.

 

애굽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은 강자와 약자를 나눕니다.

약자들은 강한 자들이 먹잇감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출애굽을 하였지만 여전히 애굽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비록 종살이를 하였지만 그 속에서도 우열과 서열이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비록 같이 종노릇하면서도 서로 높고 낮음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에 광야에 나와서 고라 일당이 모세에게 너만 왜 지도자 노릇하느냐 우리도 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라 일당은 모세와 자기들은 높고 낮음이라는 애굽에 가치로 접근을 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속에도 고라와 같은 사고를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모두가 같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므로 서로 간에 차별이 없는 자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속에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져서 사람 간에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살라고 약자 보호법을 담아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애굽과 다른 백성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동등한 자로서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차별 없이 가나안 땅을 각자의 몫에 맞도록 평등하게 배분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준 대로 살면 차별 없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탐욕이 발동하여 더 갖게 되면 평등은 깨어지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이게 됩니다.

그럼 애굽처럼 변하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규례로 약자 보호법을 주신 것입니다.

혹시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 죄로 인하여 빈부가 나누이고 종과 자유자로 나누이게 되면 안식년과 희년이 되면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고 안식 제도를 주셨습니다.

 

제 7일 안식일과,

매 7 년마다 안식년을 주어서 땅도 쉬게 하셨고,

7 안식년을 7번이 되는 다음 해인 50년을 희년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7일 안식일과 7년 안식년과 안식년 7번째의 희년은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키 위한 것입니다.

 

제 7 안식일을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이란? 쉰다는 의미보다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있을 때 안식이 됩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의 완성의 날을 제 7 안식일로 삼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열심으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일을 알리려고 제 7일은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케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되는 사람은 모두가 여호와의 일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차별도 없고 차등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자로서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등 없음이 가나안에서 그대로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혹시 누가 병들거나 다치거나 죽거나 하여서 하나님이 주신 토지를 팔아서 기업을 잃어버리고 남에게 종이 된다고 하면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지 말고 6년은 종으로 삼되 제 7년 안식년이 되면 종에서 해방케 하여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원래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자들이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유자로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15:15. “너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하나님은 약자 보호법을 통해서 너희도 애굽에서 약자였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 보호법을 주시면서 너희는 애굽 땅 종 되었던 너희를 여호와께서 구속해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도 종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너희는 누구도 그 형제 중에서 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종으로 삼았다 하여도 7년 째는 풀어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동네에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와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도와주라고 합니다.

 

15:7-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약자를 도우라는 말은 약자인 너희를 강자인 내가 희생하여서 구원해 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지경에 가난한 자들이 있으면 너희는 그들을 도와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약자였는데 강자인 나 여호와가 도와주었으니 너희도 너희 동네에 있는 약자들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면 그 때는 그 동네 전체를 징벌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 십계명의 약자 보호법 정신을 잊고 애굽인들처럼 살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서 이방 나라에서 종이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는 십계명 정신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정신을 온 몸에 새기도록 이마와 손목에 기호로 새겨서 다니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율법 정신을 삶으로 토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계명을 어깁니다.

약자 보호법을 버렸습니다.

애굽인들처럼 힘의 법칙으로 종을 부리고 살았습니다.

안식년이 되어도 종을 풀어주지 않고 부리고 살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서 뽑아내고 이방나라에 팔아 버립니다.

이방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벨론에 멸망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레미야 34장입니다.

 

34:1-22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와 그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3. 네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 손에 붙임을 입고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4.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6.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7. 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3.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워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거든 칠 년 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그가 육 년을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케할지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목전에 정당히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언약을 세웠거늘 16. 너희가 뜻을 변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서 너희 노비를 삼았도다 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19.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백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21.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시드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당시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포위당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멸망 직전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시드기야 왕에게 보내서 너희가 왜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바로 약자 보호법입니다.

 

13-14절을 보세요.

 

13-14절.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워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거든 칠 년 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그가 육 년을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케할지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고 너희 형제 중에 누가 종이 되었거든 6년만 부리고 7년이 되면 풀어주라고 언약을 세웠는데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언약대로 너희를 가나안에서 뽑아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바벨론에게 붙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얼마나 악하였는가 하면 1차적으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시드기야에게 보내서 경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방백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종을 풀어주라고 합니다.

 

이에 방백들이 왕의 말을 듣고 종들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난 후에 마음이 바뀝니다.

손해를 본 것으로 여겨져서 풀어주었던 종들을 다시 잡아서 종살이를 시키게 됩니다.

 

8-11절을 봅시다.

 

8-11절.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이스라엘의 방백들이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놓아 주었다가 다시 종으로 삼고자 추격하여 온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방백들이 애굽의 바로와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를 징벌하였듯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성전의 파괴는 곧 이스라엘 신앙의 멸망과 같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1:11-17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절기마다 의미도 모르면서 내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는데,

그게 무슨 제사이고,

그게 무슨 제물이냐?

내가 언제 이런 걸 달라고 했느냐?

이런 걸 가지고 오는 것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들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피가 바로 약자 보호법을 어기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제물을 가지고 오려고 하지 말고 너희들 주변에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와 같은 약자들을 도와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서 언약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방백들은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배부름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뽑아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간섭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순순히 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방 땅에서 70년을 종살이하고 난 후에 다시 이 땅으로 불러들이신다고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긴 죄값으로 70년 동안 이방 나라에 팔려가 종살이하면서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고레스를 통해서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와서 불타버린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그들의 선조들과 같이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약자 보호법이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직전의 모습과 동일했습니다.

 

예수님은 초림 당시의 유대교 모습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비유하였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습니다.

부자는 약자 보호법을 안다면 당연히 집 앞에 있는 거지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약자 보호법에는 어느 지경이든지 그 지경 안에 가난한 들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동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지 않은 이방인으로 간주하여 징치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자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배만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자는 지옥으로 가게 하고, 나사로는 천국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 초림 때 유대인들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언약 정신이 사라진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시고는 저주하시고 멸망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자가 이런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지옥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럼 행위 심판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심판도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이미 창세전에 정해진 것입니다.

창세전에 성도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고 불신자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이미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이고, 거지 나사로는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였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언약 밖에 있는 자는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심겨진 언약이 없으니까 자기 집 앞에 있는 형제를 돌아볼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시나무이기 때문에 가시를 맺는 것이고,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를 맺는 것입니다.

 

부자가 비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강자로 산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위선과 외식으로 가득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 먹으면서 호화로이 연락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재물로 배가 불러서 강한 자가 되어서 약자들을 권력으로 압제하고 있었습니다.

과도한 율법 해석으로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전을 돈버는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은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이 언약 정신은 사라지고 지도자들이 이방인과 같이 돈과 권력을 힘을 삼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타락된 성전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워진 초대교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여호와의 신에 임하신 분이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61:1-3절.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4:16-20.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펴시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내가 바로 여호와의 신으로 와서 너희에게 희년을 이루어 주실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죄와 사망과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던 것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율법 신앙으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자기 선조들이 언약 정신을 어겨서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과유불급이라 율법을 과도하게 해석하여서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장로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서 새로운 강자와 약자가 생겨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들은 강자가 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세리와 창기들은 약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과거 바벨론에 멸망하기 전에는 부와 권력으로 강자와 약자로 구분이 되었다고 한다면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돌아와서는 율법을 지킨 것과 안 지킨 것으로 새로운 강자와 약자의 개념이 바뀌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고 하여도 여전히 십계명 속의 약자 보호법의 그 의미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여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 주겠다는 말입니다.

이 일이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도말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서 율법적 행위로 강자와 약자로 구분하는 것을 없애 버린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지킨 자와 안 지킨 자 간에는 우열과 서열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서열과 우열을 십자가에서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는 상관이 없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새롭게 모두가 평등한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차별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차별을 없애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조건으로 인하여 일어난 차별은 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민족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 교회는 구약 교회와 다릅니다.

 

누구나 예수 안에서 동등하고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희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2:44-47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율법 아래서는 움켜잡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그 속에서 희년 정신이 살아나 움켜잡았던 손을 펴기 시작합니다.

이것에 부자들이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전답을 팔고 재산을 교회에 내어놓고 유무상통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들 속에 희년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 정신이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생겨난 새 언약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새롭게 생겨난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는 인간의 의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증거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차별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겁니다.

그러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으로 살던 자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은혜로 사는 자들로 새롭게 창조 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마음속에 희년이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법이 사라지고 은혜가 왕노릇하기 시작합니다.

은혜가 인간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게 합니다.

그러자 너와 나가 다름이 아니라 한 형제임을 알게 되고 서로 유무상통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사자와 어린 양의 함께 노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는 힘에 논리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자는 양을 먹잇감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양은 사자의 밥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질서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사자와 양이 함께 놉니다.

이는 천국은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고 서로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한 형제로서 은혜의 원리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러한 은혜의 원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사람의 외모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거짓 종들을 풀어서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정신을 훼손하기 시작합니다.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려 놓은 겁니다.

가라지들이 은혜로 세우진 교회를 법이 통용하는 곳으로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인간의 의를 섞기 시작합니다.

 

이게 갈라디아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바울이 전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게 된다는 순수한 복음에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섞어 버립니다.

바울은 이걸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교회 안에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으로 복음을 부패케 하는 일을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 섞여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혼합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 각양의 이설(異說)들이 난무합니다.

각종 더러운 영으로 가득해서 귀신의 처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교식 신앙이 있는가 하면,

예수의 의에다가 인간의 착함이라는 의도 있어야 한다는 인본주의 갈라디안식 성화주의 신앙도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였으니 우리의 행동에는 죄가 되지 않으므로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도 있고,

복음을 무슨 도를 깨우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였으니 진리를 아는 자는 육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하는 자들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우리의 행위로 심판받지 않으므로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각양 더러운 영의 말들을 듣고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닌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신자인데 그 속은 불신자입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들의 몸이 귀신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패역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보다 더 악한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죽하면 세상이 개독교라고 할까요?

세상이 봐도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희년 정신이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고상한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 착각하고 지적 유희를 즐기는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무례하고 교만하고 패악하고 시건방지고 악독합니다.

 

예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맨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입니다.

 

3:14-17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모습이 어떠한가요?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원리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돈에 가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강한 자가 되었나요?

 

육적으로는 물질로 배부름을 입고 있다는 것이고,

영적으로는 복음을 다 안다고 하면서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무늬만 신자이지 그 속은 아니란 뜻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마치 무슨 도 닦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가 고상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 신앙인줄 알고 있습니다.

거짓 종들이 복음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변화시켜 놓았습니다.

 

복음을 사색하는 것으로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머리는 크고 아래는 작은 가분수 신앙이 되어서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들 속에는 희년 정신이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법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냉엄합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소경이고 발가벗고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하다고 합니다.

영적 소경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다 문 밖으로 내어 쫓아 놓고도 부자라 부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그 속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살게 할까요?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지 마시고 복음이 나로 하여금 어떻게 살게 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난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나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는 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연구하고 분석하여 득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십계명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곤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희년을 몰고 오셨습니다.

 

왜 희년을 우리 안에 몰고 오셨을까요?

이는 우리 몸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을 토해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몸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피워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신 성도는 예수님이 그 몸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삶으로 증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서 희년을 선포하고 계신가요?

혹시 예수를 구경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착각하지는 않으신가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아니신가요?

 

나는 지금 법을 내어놓습니까?

아니면 은혜를 토해내고 있습니까?

토해내는 것이 우리 신앙의 현 주소입니다.

 

유다서가 그럽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가 있고,

비 없는 구름이 있고,

물 없는 샘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모두가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가을이면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없으니 거짓이고,

구름은 비를 몰고 와야 하는데 없으니 거짓이고,

샘은 물을 내야 하는데 물이 없으니 거짓인 것입니다.

 

나 예수 믿는다,

나 복음 안다 자랑하지 마시고,

내게서 예수의 냄새가 나는지를 보십시오.

 

제발 성경을 좀 상고해 보십시오.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던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바울이 칭찬하는 사람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바울이 책망하고 사귀지 말라고 하는 자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지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고후 13: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 안에 예수가 계시느냐?

이런 말을 누구에게 했을까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평안하신가요?

희년이십니까?

주님이 곧 오십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