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仰专栏

蛇迷惑人的方法(뱀이 미혹하는 방법)

정낙원 2018. 1. 8. 11:31

(5) 蛇迷惑人的方法(뱀이 미혹하는 방법)

 

人不吃生命果,必带来死亡。

蛇最清楚这个事实。

所以蛇把人的关心远离生命果。

 

蛇让女人靠近善恶果。

女人见善恶果的同时陷入在善恶果里。

这是因为善恶果对人有魅力和吸引力。

 

善恶果和生命果在新约的意义上看,有两种义和两种应许。

善恶果代表着律法的义和旧应许。

生命果代表着耶稣的义和新的应许。

教会有两个应许。

 

蛇迷惑人的方法是 以旧应许遮盖新应许。

以律法的义,抓住人的眼睛。

魔鬼想法设法不让人离开律法的约束。 

 

人固定在律法之上,首先想的是我要做什么。

这样  就把靶子挪在守话语,得拯救上。

蛇抓住人的心,把关心放在吃善恶果上。

 

吃善恶果必死 但善恶果在世人眼里很有 魅力。这是深刻的问题。

 

旧应许给人带来夸耀。

律法的义上升人的价值,这是好作食物,也悦人的眼目,且是可喜爱的善恶果。

 

所以很多人选择律法信仰。

律法信仰抬高人的价值。

 

人选择律法,因为律法能给人带来夸耀。

新旧应许的话语是守的主题来显现。

新应许把守话语的主题,放在耶稣基督身上。

但旧应许把话语的主题放在人的行为上。

 

这样当然得荣耀的是人。

律法信仰的人抗辩我们守话语有什么错。

律法信仰的人不说守话语是错误的而是 主张他们是正确的。

 

魔鬼不断的强调人不许杀人,不许奸淫,不许偷窃。

让偷窃的灵魂陷入烦恼当中。

 

相反称赞劝勉认真生活的人,使他们成为标本 抬高他们。

 

如此善恶构图,善恶果里也有善也有恶。

举例说明,没有偷窃的人是善人 偷窃的人成为恶人。

所以人们一生不想偷窃而争战。

 

认真行善的人带着人的义站在神的面前。

相反做坏事的人,不敢站在神面前。

神不让我们活在律法之下,而让我们活在恩典之下。

 

我们信耶稣与守不守话语没有关系。

魔鬼对我们吃或不吃善恶果没有关系。

只是抓着我们,把我们的住所按在善恶果村。

 

蛇对女人说 神真说不许你们吃那个树上的

果子吗? 魔鬼就这样引开话语的目的是 就把 女人的关心放在善恶果上。

人把住所放在善恶果村生活,自然远离生命树村。

 

所以蛇现在也让我们守律法,不让我们活在恩典之下。

蛇用律法来捆绑我们,不许我们离开律法的世界。

得救是?从律法村搬到恩典村,从律法当中 释放出来          

◆ 뱀이 미혹하는 방법 ◆

 

사람이 죽는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아니하여서입니다.

이런 사실은 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뱀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과로부터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작전을 폅니다.

 

그래서 뱀은 선악과로 여자에게 접근을 합니다.

이는 여자의 관심사를 선악과에 붙잡아 두고자 함입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보는 순간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이는 선악과 속에는 인간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와 생명과는 신약적인 의미로 보면 두 의(義)와 두 언약(言約)을 말합니다.

선악과는 율법에 의와 옛 언약을 의미하고,

생명과는 예수님의 의와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새 언약은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뱀은 옛 언약으로 새 언약을 가리는 방식으로 미혹합니다.

율법의 의로 인간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눈이 율법에 고정되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붙잡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쪽으로 과녁이 옮겨지게 됩니다.

뱀은 에덴동산에서처럼 먹으면 죽을 것에 인간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먹으면 죽을 것이 인간의 눈에 매력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인간에게 영광을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는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 줌으로서 인간들 눈에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와 같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율법 신앙을 선호하게 됩니다.

 

십자가 도는 인간을 부정하지만 율법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도를 싫어하고 율법을 좋아하는 것은 그 속에 자기 영광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말씀을 지키는 주체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새 언약은 말씀을 지킬 주체를 예수님에게 둡니다.

그러나 옛 언약은 말씀을 지켜야 할 주체를 인간에게 둡니다.

 

옛 언약 신앙은 인간이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율법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귀는 사람들에게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도적질한 영혼더러 번민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착하게 사는 영혼들을 칭찬하고 권면하며 신앙인의 표본처럼 떠받들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선악구도가 선악과 속에서 나온 선과 악으로 나누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도적질 안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도적질을 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해 입은 것과 같습니다.

수치는 아담이 어떤 행동을 함으로서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흠 없는 제물을 죽여서 그 가죽 옷으로 가려주셔야지만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화과나무로 치미를 만드렁 입도록 합니다.

그것이 자기 행위로 인하여 희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의 미혹에 빠지면 착하게 산 사람은 그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반면에 나쁜 짓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숨게 됩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죄이고 불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법 아래 살지 말고 은혜 아래 살기를 바라십니다.

말씀을 지키는 법의 세계에서 나와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은혜의 세계 안에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삶의 주소를 선악과라는 동네에 붙잡아 두면 그것으로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화두(話頭)를 던진 것은 곧 여자의 관심사를 범의 세계인 선악과에 묶어 두고자 함입니다.

선악과라는 동네에 주소를 두고 살면 생명과라는 동네에는 자연히 발길을 끊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뱀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율법을 어기도록 부추기지 않습니다.

뱀은 다만 우리를 율법에 묶어 두고 율법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의 동네로 이사를 하여서 율법과 상관없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자는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며,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사람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이 시대 경건주의를 표방하면서 성도의 눈길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멀어지게 하는 성화주의 뱀의 말을 조심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