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78강.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영적의미 (창 47장 1-12절)

정낙원 2026. 3. 16. 18:25

78.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영적의미 (471-12)

 

47:1-12.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가로되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 형들 중 오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3.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5.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1.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12.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창세기는 창조로 문을 열고 요셉의 입관으로 막을 내립니다.

만약에 성경이 창세기만 있다고 하면 창조에서 요셉의 죽음까지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다 담고 있음이 됩니다.

창조는 구원과 같습니다.

창조의 시작이 첫째 날 빛이 오심으로 시작하여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빛과 어둠을 갈라내시고 채우시고 안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보면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해서 그 후손이 애굽으로 내려가 번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어서 입관이 되고 훗날 그 해골이 언약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으로 마감을 합니다.

 

성경이 참 신묘한 게 모든 성경은 각각 서론부터 결론까지 다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만 가지고서도 모든 성경을 다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

출애굽기는 또 출애굽기를 통해서 구속사를 다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각 성경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모두 응축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진행형으로 다른 성경과 연결되면 스토리가 그대로 이어져서 구속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 어디를 펴도 다 예수 이야기란 말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어떤 인물이나 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 몸 어디를 찔러도 피가 나오듯이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이야기가 증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께서 감동으로 그렇게 편집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어요.

어메이징이에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의 후손들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스려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들의 구원 이야기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구원을 해 내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이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한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46:2-4.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보내신 것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서 나오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낳아서 천국에 데려가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이게 창세기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또 그 일 속에 담겨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언약을 이루어가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갈 테니 염려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언약의 주체로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애굽에 실제 주관자는 요셉이에요.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자 바로가 요셉에게 모든 주권을 넘겨주었어요.

실질적 통치는 요셉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누구인가요?

야곱의 2기 인생을 사는 사람이에요.

이러면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언약의 주체가 내려간 것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요셉의 머리가 내려간 것입니다.

요셉의 머리는 야곱이에요.

야곱의 머리는 하나님이세요.

그럼 야곱이 애굽에서 행한 일들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을 인본주의적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맞지 않아요.

야곱이 애굽 땅에 객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얻어 먹으러고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 축복을 하고 있어요.

이건 이치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에요.

거지가 주인에게 복을 비는 것과 같아요.

 

거지가 여러분에게 와서 복 받으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기가 차서 헛 웃음을 치며 에끼 이놈아 너나 복을 받아라 라고 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근데 왜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해 놓았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주체가 야곱이에요.

야곱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창세전 언약을 누가 이루어가시는가요?

예수님입니다.

어디에서 이루나요?

이 세상이에요.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걸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이 어디에 살았나요?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장소에요.

이러면 가나안은 창세전 언약을 맺은 태초의 나라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약속이 주어진 곳이라는 뜻이에요.

천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에 있는 야곱에게 뭐라고 했나요?

애굽에 내려가서 큰 민족을 이루어서 이리로 올라 오게 될 것이라고 하잖아요.

실제 출애굽을 할 때 큰 민족이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을 이끌고 나오는 분이 누구였나요?

겉으로는 모세이지만 실제로는 요셉이었어요.

그래서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을 봅시다.

 

50:25-26.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이 110세에 죽습니다.

그런데 요세빙 형제들에게 나는 죽지만 장차 너희들은 내 해골을 메고 애굽을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요셉은 죽었음에도 언약의 후손들과 애굽에 함께 살고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야곱이 죽어서는 가나안에 묻었어요.

그러나 요셉은 죽었으나 애굽에 있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은 죽었으나 우리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요.

 

해골이라는 말은 골고다라는 뜻이에요.

골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곳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내셨어요.

이는 요셉의 해골이 사단을 상징하는 바로 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언약의 주체로 애굽에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아요.

그럼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것이 되겠지요.

여기에 큰 비밀이 있는데 잘 보세요.

 

창세기 27장을 보세요.

 

27:26-2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때 축복의 내용을 보세요.

만민이 너를 섬기겠고 만민이 너에게 굴복당하고 네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했어요.

이는 만왕의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 언약 속에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 있어요.

그 언약을 누가 실현을 하느냐?

요셉이 실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요셉이 기근을 해결하고 실제 통치자가 되어 있어요.

 

기근으로부터 양식을 준비한 사람은 요셉이지요.

그럼 바로는 누구의 양식을 먹고 사나요?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이 주가 되고 바로가 신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의 실제 인물은 누구인가요?

야곱이지요.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을 사는 자라고 하였잖아요.

그래서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약전이란? 족보에요.

쉬운 말로 이력서에요.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이 등재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요셉이 행한 일은 모두 야곱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기근 속에서 양식을 준비해서 먹이는 것은 곧 야곱이 한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바로에서 주의 자격으로 축복을 하는 거예요.

이해가 되시지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냈지요.

왜 보냈느냐?

기근으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보냈어요.

기근은 세상 왕을 상징하는 바로가 해결할 수가 없어요.

기근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만 할 수가 있어요.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해방시키신 분은 바로도 아니고 요셉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거에요.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적 인물인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되어요.

사건이나 인물 속에는 이중 계시 삼중 계시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성경의 진의를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해 놓은 이유에요.

인간들 이성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사야 9장을 봅시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보았어요.

그런데 그 분은 오묘하신 분이에요.

기묘자이고, 모사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는 아버지이고,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한 분 속에 다양한 것이 담겨 있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내가 한 일이 곧 아버지가 한 일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합니다.

 

이게 다 계시의 복합성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나온다고 해서 성경을 알 수가 없어요.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요.

학문만 가르쳐요.

 

학문은 성경 해석이 아니에요.

학문은 인간의 이성에 속한 것이에요.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이성 밖에 이야기에요.

그래서 목사가 되어도 성령의 감동을 입지 않으면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껏 해봐야 인간의 지식으로 해석하는 거에요.

인간의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인간들 살아가는 이야기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느냐?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에요.

이 세상은 누구 때문에 존재하고 있나요?

예수그리스도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들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이라도 이 세상에 자기 백성들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멸망 시켜버려요.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이걸 모르고 있어요.

 

바로가 살고 있는 것도 요셉 때문이에요.

그런데 바로는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가서 알려주는 거예요.

네가 지금 요셉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은 이걸 몰라요.

이 사실을 신자들이 세상에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말을 듣지 않아요.

도리어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핍박해요.

재수 없는 자라고 조롱해요.

그래서 세상이 망하는 겁니다.

 

애굽이 망한 이유에요.

애굽이 존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인데 모르고 있단 말이죠.

오히려 핍박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내 버리고 나면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으므로 애굽을 멸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은 철거할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 세상은 누구 때문에 존재하느냐?

하나님 자녀들 때문에 존재해요.

우리 때문에 살고 있다니까요.

원래 세상은 우리 것인데,

마귀 새끼들이 강도짓을 해서 빼앗은 거에요.

자기 것이라 우기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포도원을 세 주고 갔더니 셋방살이하는 놈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급기야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는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군대를 보내서 악한 놈들을 죽이고 초토화 시켜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이 세상은 불로 타버리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크루즈 여객선이 있는데 미국 대통령 아들이 타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테러범들이 배를 장악하고 승객들을 협박하는 겁니다.

대통령은 어떻게 할까요?

그 배를 격침시킬까요?

아니면 아들을 구출한 후에 격침시킬까요?

아들을 구하고 난 후에 격침을 시키겠지요.

 

보세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을 사탄의 세력들이 붙잡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이 자기 아들들을 빼내야 하겠지요.

아모스에서는 타작마당에서 한 알갱이도 버려지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자기 백성들을 다 빼내고 난 후에 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까지 길이 참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이를 모르고 있어요.

 

그것을 지금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을 애굽으로 객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객으로 오신 것과 같아요.

주인이 객으로 온 겁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너는 누군데? 라고 하니까,

잠깐 우거하러 왔다고 합니다.

우거란 말은 잠시 기거하다가 떠난다는 말이에요.

잠시 산다는 것은 언약이 완성될 때까지 머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때가 차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약속의 때가 찰 때까지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세상을 살다 가게 되어 있어요.

각자 하나님이 심겨준 언약이 있어요.

그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제대를 시켜요.

이제 고생 그만하고 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죽음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안식하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그러지요.

험악한 세상을 살았다고 하지요.

우리 조상들이 나그네로 살았던 삶과 같이 내가 그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 정착민으로 둔 것이 아니고 나그네로 두었어요.

그래서 야곱이 바로에게 우리 조상들이 나그네로 살았던 것같이 나도 나그네로 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는 것은 고생했다는 말이 아니고,

세상에서 주류로 살지 않고 비주류로 살았단 말입니다.

그게 나그네란 말이에요.

나그네로 살았던 모습을 일대기로 담아놓았던 것이 히브리서 11장이잖아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았어요.

나그네로 살게 한 것이 믿음이에요.

그 믿음이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험악한 세월을 살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하늘에 있는 본향 찾아서 떠나는 삶으로 살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어요.

언젠가는 떠나야 해요.

나그네들 삶이 안락합니까?

불편합니까?

당연히 불편해요.

험악해요.

 

정글의 법칙을 보세요.

한끼 한끼 근근이 먹지요.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두 부류가 있잖아요.

배우들을 찍는 스태프들은 텐트치고 먹을 것 다 먹어요.

그러나 배우들은 고기 한 마리 잡아 가지고 나눠 먹고 그래요.

한쪽은 거지같이 살고,

한쪽은 풍요롭게 살아요.

배우들은 거지같이 살아도 불평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출연료를 받잖아요.

 

지금 우리가 그런 거예요.

우리는 정글의 법칙같이 살고 있어요.

그러니 험악한 세월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게런티를 받아요.

게런티가 뭐에요?

천국이죠.

천국의 약속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니 잘 먹고 잘살아 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을 게런티가 있어.

천국의 유업으로 받으니까 세상에서 고생 좀 하는거야,

우린 호의호식 못하여도 괜찮다고 해야 하는 거예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현실을 이겨내야 한단 말이죠.

 

야곱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유목민으로 떠돌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이끌고 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애굽 왕 바로는 세상 왕을 상징해요.

세상 왕은 세상 사람이라고 의역해도 되어요.

세상이 지금 누구의 양식으로 살고 있나요.

요셉의 양식이에요.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한 것은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야 잘 봐라,

네가 지금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고 있잖아.

요셉은 양식을 주는 자이고 너는 받는 자이잖아.

그럼 누가 강하냐.

주는 자가 강하냐,

받는 자가 강하냐,

당연히 주는 자가 강하지 않느냐,

그런데 애굽이라는 이 세상의 구조는 어떻느냐,

피조물이 창조주 보다 강한 자로 살고 있지 않느냐,

이게 죄 아래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야,

이게 애굽이라구.

실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왕노릇 해야 되는데 핍박을 받고 있어요.

이게 역리에요.

 

바로의 꿈을 보세요.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잡아먹히고,

마른 이삭이 풍성한 이삭을 잡아 먹고 있어요.

이건 비정상이에요.

역리라고 해요.

이것이 바로가 다스리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양식을 얻어 먹는 자가 양식을 준비해서 먹여 살리는 자 위에 있어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세요.

천국에 간 나사로는 세상에서 거지 생활을 하였고,

지옥에 간 부자는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왕노릇 하였어요.

부자와 거지의 의미는,

부자는 땅에 주류로서 정착민으로 산 것이고,

거지는 세상에서 비주류로서 나그네로 살았다는 뜻이에요.

 

그렇다고 우리 거지 됩시다 그러면 안 되어요.

이건 거지는 천국 가고 부자는 지옥 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하늘 백성과 땅의 백성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하늘에 속한 자들은 세상 속에 나그네로 살고,

세상에 속한 자들은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비주류로 살면 자연적으로 거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게 험악한 세월이에요.

그래서 야곱이 그러는 거예요.

나만 험악한 세월을 산 것이 아니고 우리 조상 모두가 그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셋팅을 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9-10절을 보세요.

 

47:9-10.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나의 나그네 길이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조상은 나보다 더 유리하였다는 겁니다.

 

이걸 우리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당하는 아픔보다

우리의 조상이신 예수님의 삶이 더 비참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낳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우리 조상이지요.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어요.

늘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유숙하셨어요.

그리고 반항 한 번 하지 않으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런가요?

아니에요.

힘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도살당하는 양처럼 잠잠히 계신 것은 이 세상의 본질을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이는 이 세상이 악에게 놓여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당연히 핍박할 것이니라,

그러니 그러한 일이 일어나거들랑 당황하지 말고 당연히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맡기라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성경이 바로와 요셉 이야기를 하면서 바로에 대하여는 소상히 말하지 않는 것은 요셉과 바로를 통해서 이 세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떄문이에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실제 통치자는 요셉인데,

바로의 권세 아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은 온 세상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는 주님이신데,

마귀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야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우리의 조상은 예수님이에요.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야기는 곧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말을 들어 보세요.

우리 조상들이 자기 보다 몇갑절 더 심한 나그네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에는 나그네로 살았나요?

정착민으로 살았나요?

정착민으로 살았지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기득권층으로 살았어요.

 

아브라함 아버지가 누구인가요.

데라이지요.

데라는 니므롯의 군대장관이었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이란 말이에요.

그럼 아브라함은 금수저이지요.

재벌 2세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가서 빼내 옵니다.

정착민으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빼냈잖아요.

가나안으로 빼내고서는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은 이 세상에 없고 저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신 겁니다.

이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겠어요.

고생 한번 해 보지 못한 아브라함이잖아요.

그런데 복의 조상 삼아주겠다고 꼬셔서 데리고 와 놓고는 막상 그 땅에 들어가고 나니까 너에게 줄 땅은 여기에 없다고 하잖아요.

 

아브라함은 완전 사기 당한 거에요.

졸지에 거지가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정착민으로 살다가 나그네로 살게 되는 그때부터가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쫒기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마누라도 빼앗기는 힘든 세월을 살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유목민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 때 감사하며 살았겠어요?

원망하며 살았겠어요?

당연히 원망하지요.

갈대아 우르에서 안 나왔으면 재벌 2세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았을텐데 말이죠.

그런데 재수 없게 하나님께 걸려서 가나안 땅에 와보니까 세상에 땅 한 평도 주지 않고 유목민으로 살게 하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럽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 그 원망스러운 삶이 험악한 세월인 거에요.

 

만약에 나그네로 살아도 자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기 할 것 다하고 살면 험악한 세월이 아니지죠.

근데 하나님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조차 마음대로 해 주시지 않았어요.

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었어요.

믿음이 없으니까 마누라를 한번도 아닌 두 번 씩이나 팔아먹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셨어요.

어디에서,

남의 나라에서,

아브라함에겐 가나안은 이방 나라에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어요.

그럼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간섭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 없는 아브람을 믿음 있는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네가 애굽으로 내려가면 나도 따라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순순히 내려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만큼 사는 것도 다 은혜에요.

아브라함의 험악한 세월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과 사도들이 걸어간 길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걸어간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앞서간 선배들이 우리보다 더 험악한 세월을 살았어요.

그러므로 야곱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바로에게 세상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게 축복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야 이 세상의 실제 주권자는 니가 아니고 언약을 가진 사람이야,

내가 비록 네 눈에는 거지같이 보여도 내 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어,

내 아들 요셉이 내 언약을 이루어가는 거야,

요셉이 너희 집을 살리고 있는 것이야,

 

장차 오실 메시야도 그래,

나처럼 거지 같은 모습으로 오실거야,

그러나 그 분은 창세전 언약을 품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 분으로 인하여 세상이 존재하고 있어,

그런데 세상은 그를 몰라보는 거야,

지금 네가 나를 몰라보듯이 말이야,

 

재미있는 것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오자 요셉이 자신의 집안 내력을 다 말해줍니다.

자신의 집안은 조상대대로 목축업을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그럼 우리 가축도 너희가 좀 맡아 달라고 합니다.

6절에 보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고 합니다.

 

47:5-6.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는 말은 집안을 맡기는 겁니다.

당시 가축 떼는 재물이에요.

바로가 자기의 가축 떼를 야곱에게 맡기잖아요.

이렇게 되면 바로의 집안에 실질적 운영자는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516~22까지 봅시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1.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22.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하나님이 요셉을 바로의 집안에 주권자로 삼아서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지요.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 집안을 맡기지요.

그런데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니까 이제는 야곱에게 맡기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가 요셉에게 모든 통치권을 맡기는 것과 같은 거예요.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애굽을 실제 통치하면서 사람으로 세우고 낮추게 하는 권세를 주었다고 하지요.

쉬운 말로 요셉이 생사 화복권,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실제적으로 애굽의 주인은 누구냐?

요셉이 되어버렸단 말이죠.

야곱이 그걸 바로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바로야 이 세상 주인은 너가 아니고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언약의 후손 중심으로 다스려가고 있어,

그런데 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잖아,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너에게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거야,

너의 집안을 실제로 내 아들이 요셉이 다스리고 있잖아,

내가 너를 축복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야,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종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되면 바로는 요셉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리고 싶어하는 그림이에요.

예수가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서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세상이 알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종으로 팔려간 사람이 나라를 통치한다.

이건 뭐야?

이 땅에 객으로 오신 예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만유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어요.

이 세상은 예수님께서 통치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겁니다.

이걸 알려주는 자들이 언약의 후손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떠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은 실상이 아니고 사라질 허상이라고 알려주어야 해요.

그것이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의 삶인 것입니다.

세상 가치를 쫓지 않고 하늘의 가치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보고 놀라야 해요.

저 사람들은 왜 자기들 하고 다르게 사느냐,

왜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먹고 잘사는 것에 올인하지 않고,

예수 믿는 일에 올인하고 있는 거냐,

저 사람들 정체가 도대체 뭐냐,

의문을 품게 하여야 해요.

그게 세상이 감당치 못할 능력이에요.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스려오고 있는지를 배우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는 거에요.

성경은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란 말이죠.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오신 역사적 기록물이에요.

 

역사란? 실제 일어난 이야기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내가 지금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걸 배워가고 있는 거에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거에요.

왜 성경은 구원의 마지막을 구원받은 자들의 천국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지를 아셔야 해요.

감사와 찬미는 깨닫지 못하면 할 수가 없어요.

감사와 찬미는 깨닫는 자들만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성도에게만 주신 겁니다.

깨달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고 다스려 가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에요.

자기 백성들은 성경을 통해서 내가 지금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어떤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지를 깨달아 가야 하는 것이에요.

성경 속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에요.

성경 속의 인물들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많이 깨달은 사람은 많이 감사하고,

적게 깨달은 사람은 적게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이 탕감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가 깨달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신앙을 어린아이로 머물지 말고 장성한 자로 나아가라는 말은 그 은혜를 좀 많이 알아가라는 것이에요.

 

감사와 찬송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리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감사와 찬송은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아요.

효도는 철이 들어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인생이란? 어린아이로 출발해서 부모가 되는 것이에요.

어린아이 때는 부모로부터 도움을 입고 살다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면 부모를 알게 되어요.

부모가 되면 우리 부모님이 날 지극정성으로 키웠구나를 알게 되어요.

그럴 즈음이 되면 부모는 늙고 병들어 있거나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예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 내가 부모가 되면 부모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감사해라 찬송해라 소리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목사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여정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는 것도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어른이 되라는 말이에요.

 

생명이란? 자람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자람이 없다고 하면 그건 부모에게는 재앙이에요.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는 것은 그 아이 속에 어른이 되어서 부모가 되는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는 것도 자람을 전제하는 것이에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출생되었다는 뜻이에요.

출애굽을 한 것은 출생과 같아요.

이제 광야(교회)에서 주어진 구원을 열심히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구원이에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구원을 다 이룰 것입니다.

천국에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는 성도의 인생이 담겨 있어요.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 이 땅에서 사셨어요.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나그네로 살았어요.

그럼 예수에게 속한 자들도 나그네로 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나그네를 하비루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비루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와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고 종이었다고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나그네고 종이던 자들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서 빼내서 이 땅에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불쌍히 여기심으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걸 잊는 순간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서는 약속의 땅에서 살 수가 없어요.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이스라엘 경내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두신 것입니다.

이 놈들이 내 은혜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를 시험하시려는 겁니다.

하비루들을 가지고 시험하는 겁니다.

어느 성읍이든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성읍에 책임을 묻겠다고 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나그네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촉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러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하비루로 두셨어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해요.

다니엘서에 나오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제국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존재케 하는 것은 자기 백성들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데리고 가면 이 세상을 불바다가 되어요.

지금 불바다가 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돌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러지 않아요.

도리어 핍박하고 죽이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 되어서 매일 분노하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칼을 갈고 그 분노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분노의 화살을 누가 막고 있느냐?

예수님이 막아내고 있어요.

왜 그러느냐?

예수님께서 피흘려서 낳은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지요.

중보자가 하는 일이 뭔가요.

자기 백성들을 변호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을 보세요.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지요.

누가 감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느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데 어떤 놈이 정죄하느냐 라고 하지요.

정죄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간에서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정죄 받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죄 받을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까 마귀가 정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계속 변호하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요한12장을 봅시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이 애들아 애들아 내 바램은 너희들이 죄 안짓고 살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죄를 지으면 너희를 위해서 대언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언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대언자이지 모든 사람들의 대언자가 아니예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구원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에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변호해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잘려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 뭐냐?

내가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지켜주심을 믿고 사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피 흘림으로 내가 살고 있다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이 사실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겠지요.

이 사실을 교회를 통해서 보이라는 거예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 교회를 주셨어요.

교회는 누가 모이느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모여요.

천국은 누가 가느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자들이 가요.

그럼 교회는 누가 오는가요.

예수의 피 뿌림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오는 겁니다.

 

우리를 왜 구원했나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토록 하기 위해서에요.

그럼 천국의 모형으로 주신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자들이 모여서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는 겁니다.

성도 간에 너 나가 따로 없고 우리가 되어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의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너와 나라는 담이 사라졌어요.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무리들이 나타났어요.

이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너와 나라는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되니까 유무상통이 되는 겁니다.

그 유무상통을 누가 이루었나요.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구약 교회는 차별이 있었어요.

그러나 신약교회는 차별이 없어요.

모두가 예수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이기 때문에 재물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과 가족의 차이는 뭔가요.

남은 법으로 대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대합니다.

상대가 남으로 보이면 못 내 놓아요.

그러나 가족에게는 내어 놓아요.

 

법은 손을 움켜쥐게 하고,

사랑은 손을 펴게 만들어요.

사랑을 하면 주고 싶어져요.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속성이 있어요.

이게 부모와 자식 관계로 잘 나타나요.

부모는 무조건적 사랑으로 자식을 키워요.

그러나 자식들은 조건적 사랑을 해요.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어요.

어떤 아픈 일이 일어나면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자식들은 부모에게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느냐,

내가 뭘 잘못했느냐 라고 불평을 해요.

 

부모와 자식 관계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아요.

부모와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고 돌보아 주세요.

그러나 우리는 따지고 원망해요.

우리는 하나님과 거래를 해요.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한다고 해도 거래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걸 계속 고발당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바로가 야곱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발당하는 것처럼 우리도 고발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있구나,

그걸 알아가는 거예요.

신앙을 생명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알아가라는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이 이걸 위해서 기도하였어요.

 

에베소서 3장을 봅시다.

 

3:14-20.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의 기도는 곧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기도에요

기도하는 내용이 무언가요.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그 은혜를 좀 많이 알아가라는 것이에요.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의 풍성함을 알아가라는 거예요.

그거 알아서 뭘 하려고 하나요.

서로 사랑하고 섬김라는 겁니다.

 

이어서 4장을 보세요.

 

4:1-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은혜를 알게 되면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지체끼리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보듬어주게 되어요.

누가 잘못한 것 있어도 이해하라는 거예요.

이걸 우리더러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에요.

은혜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에요.

 

이런 걸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왜 죽으셨나요?

죄로 인한 막힘 담을 허물어 버렸어요.

담이 막혀서 너와 나로 살게 되었던 것을 십자가에서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담이 허물어지고 보니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게 하였어요.

십자가로 너와 나가 우리가 된 것이에요

지금 우리가 여기에 누구로 모였나요.

우리로 모였어요.

그게 교회에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몸은 수많은 지체로 이루어졌어요.

지체는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지체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 라는 몸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신 겁니다.

누구의 몸을 세운다고 하나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라고 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마치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아요.

이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 가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부화 되어서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생명을 삶으로 풀어내기 위함이에요.

 

그 모습이 어떤 것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에 복종하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에요.

 

예수를 오래 믿으면 그리스도 마음이 그 안에서 풍성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겁니다.

신앙을 왜 생명이라고 하느냐 자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성장은 두 가지 개념이 있어요.

외적 성장이 있고 내적 성장이 있어요.

외적 성장은 열심과 충성으로 일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내적 성장은 은혜와 긍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드러나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왜 나그네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놓았느냐?

이 땅에서 영화를 누리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또 다시 정글의 법칙 이야기를 합니다.

정글의 법칙에 투입이 되는 순간 고단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고단한 정글의 법칙이 촬영이 끝나면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와요.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은 고난일 수 밖에 없어요.

고난을 통해 하늘에 안식을 사모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언약에 이끌려 사는 삶을 험악한 세월이라는 하였어요.

자기 뜻대로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날마다 내가 부인당하고 살아가는 길이에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그래요.

 

인간의 본성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해요.

예수의 마음을 왜 우리 안에 집어넣었느냐,

남을 사랑하는 자리고 나아가게 하고자 하심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고,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지킨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게 좋습니까?

사랑하는 게 좋습니까?

우리는 사랑받는 걸 좋아하지요 사랑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그 본성을 거스리고 도리어 사랑하게 하는 겁니다.

예수의 마음을 드러나기 위하여 나는 날마다 부인되어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의 몸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고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애굽 땅에 집어넣었겠어요.

애굽 땅에서 평안히 살라고 그랬나요.

아니에요.

이방의 객이 되라고 하신 겁니다.

애굽에서 종노릇 하도록 내려 보낸 것이에요.

종 노릇하면서 애굽에 속한 자들의 죄를 고발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을 핍박함으로서 그들의 악함이 고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에요.

과거에 로마가 세계를 점령 할 때에 로마 사람들은 일을 했나요? 안했나요?

안했지요.

전부 점령지에서 데려온 포로들을 종으로 삼아서 일을 시키고 자신들은 날마다 주지육림이 빠져서 흥청망청했어요.

 

그럼 로마인들이 누구 때문에 풍요를 누리고 있나요.

종들 때문이지요.

일은 종들이 하는데 누림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어요.

이게 악이에요.

 

지금 애굽의 바로 왕이 그래요.

일은 요셉이 하고 자기는 열매만 따 먹고 있는 겁니다.

애굽의 속성이 그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바로에게 보내서 애굽의 악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요셉이 죽고 난 후에 애굽인들이 언약의 후손들을 노예로 삼아서 자신들의 부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가 그 악을 고발한 것입니다.

모세가 야곱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지금 이 시대 이야기로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종으로 오셨지요.

인간들이 왕 노릇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 세상은 예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겁니다.

예수님의 덕분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르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지금 바로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바로 왕이라니까요.

 

예수님이 야곱처럼 자신의 고향인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낯선 땅에 나그네로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감사하며 살고 있지 못 하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을 죄의 상징으로 나타나게 하느냐?

하나님이 은혜를 주었는데도 은혜로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세요.

 

1:1-6.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밥 주는 주인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못 알아본다고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밥을 먹여주는데도 몰라본다는 겁니다.

짐승들은 아는데 자기 백성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은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슬픔을 토설할까요?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은혜를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어요.

그럼에도 감사치도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게 하여서 교회 안에서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은 귀에 달콤한 소리를 듣고자 함이 아니에요.

우리의 악함이 고발당하고 회개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복음을 안다고 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지식으로 화석화 되어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관념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하지 않는 겁니다.

전부 앉은뱅이요 중풍병자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오는 것이 힘들고 봉사하는 것이 힘들고 섬기는 것이 힘든 겁니다.

 

초림 때처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가 되어 버렸어요.

이 모두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인본주의 사신 신학이 강단을 휩쓸고 있어요.

교회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었어요.

그러니 입술만 나불거리고 삶은 다 죽어 있는 겁니다.

감사도 없고 찬송도 없는 겁니다.

 

신앙이 다 관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이에요.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반드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생명은 움직이는 거예요.

말씀이 역사 속으로 떨어지면 동사적으로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사역동사로 쓰여 있는 것은 산 믿음은 반드시 일을 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를 주었어요.

그러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어요.

그동안 성전 미문에서 한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찬송도 못했는데 예수의 생명이 들어가니까 일어나서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찬송도 하게 된 것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지금 제가 나사렛 예수를 여러분들에게 주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 속에 예수가 들어가서 생명의 역사를 하면 일어나 걷고 찬송하고 섬기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신자의 삶이에요.

 

제발 성경을 아는 지식을 관념화하지 마세요.

그럼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아져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취하여 있어요.

말씀을 다 안다고 하면서 복지부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요?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하지요.

니 꼬라지가 어떤지 좀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바로에게 보냈듯이 저를 여러분에게 보내서 고발케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살고 있는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보내서 바로를 축복케 하십니다.

말이 축복이지 바로가 먹고 있는 양식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너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이라고,

요셉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바로 너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오셔서 가르치는 내용이에요.

너희들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그걸 알아 가는 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끝자리에 은혜와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해요.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부디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은혜와 감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그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바로 짐승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를 힘입고 나와서 감히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음을 알기에 이렇게 긍휼을 구하오니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