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선수와 관중

정낙원 2009. 1. 9. 01:42

선수와 관중

 

운동경기를 하는 경기장에 가면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와 관중석에서 구경하는 관중이 있다. 

선수는 실제로 온 몸으로 경기를 풀어내는 자이고, 관중은 몸은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 경기를 즐기는 자이다.

 

선수는 실제로 몸으로 필드에서 경기를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치고 하는 아픔과 상처들이 있다. 

그러나 관중은 의자에 앉아서 맥주 마셔가면서 땅콩이나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관전만 하기 때문에 자기 몸엔 전혀 상처가 없고 아픔도 없다.

 

선수가 경기하는 것은 삶이지만,

관중이 구경하는 것은 오락이다.


선수는 이기느냐 지느냐의 사투를 벌리면서 싸우지만,

관중은 즐기면 된다.

 

선수는 경기에 대한 실력이 있어야 하지만,

관중은 경기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된다.

 

 

이것을 성도의 신앙에 비유하면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아는 것의 차이로 말할 수가 있다.

 

십자가를 아는 것과, 십자가로 사는 것은 다르다.

십자가로 사는 것은 선수가 필드에서 몸이 깨어지면서 치루는 경기이지만,

십자가를 아는 것은 관중석에 앉아서 관전하며 이래라 저래라 소리치며 즐기는 것이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삶이다.


아는 것은 관념이지만,

믿는 것은 실제이다.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르다.


예수를 아는 것엔 아픔이 없지만,

예수를 믿는 것엔 아픔이 있다.

 

아는 것은 머리에 있고,

믿는 것은 가슴에 있다.


아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고,

믿는 것은 심장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은 바깥이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안이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예수와 남이지만,

십자가를 믿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신자가 있다.

 

실제로 예수로 살아가는 자와,

예수를 아는 자가 있다.


약속으로 사는 자가 있고,

약속을 아는 자가 있다.


십자가로 사는 자와,

십자가를 아는 자가 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선수이고,

예수를 아는 자는 관중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믿음 때문에 실제 삶에서 무시당하고,

욕을 먹고, 춥고, 배고픔을 당한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자는 아픔이 없고 춥고, 배고픔이 없다.

십자가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남에게 무시당하고, 욕을 먹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관전하는 자이지 경기하는 자가 아니다.

선수가 아니라 관중이다.

 

목사가 왜? 날 알아주지 않느냐? 라고 한다면 그는 십자가를 아는 자이지 믿는 자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당한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당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궁핍하고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된다.

여기엔 그 어떤 교인이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믿음은 목사나 교인이나 다르지 않다.

목사의 믿음이 다르고 교인의 믿음이 다르지 않다.

목사나 교인이나 십자가의 길은 다르지 않다.

 

모두가 좁은 길이고, 협착한 길이다.

피투성이 되면서 가야하는 길이다.

목사만 경기하고 교인은 관전하는 자가 아니다.

 

선수와 같은 신자는 신앙생활을 경기하는 선수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몸으로 풀어내는 자이다. 

자기 안에 입력된 복음을 삶으로 토해낸다.

그러다 보니 온 몸에 다치고 넘어지고 아픈 십자가의 상흔들로 가득하다.

 

예수가 남이 아니라 자신이다.

십자가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이다. 

예수가 울 때 같이 울고 예수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한다.


선수와 같은 신자는 예수와 하나 된 샴쌍둥이다.

예수가 있는 곳엔 반드시 자신도 거기에 있다. 

이런 상태를 사도바울은 주가 내 안에, 내가 주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중과 같은 신자는 말로만 한다.

자기 몸으로 살지 않으니 십자가의 상흔들이 없다.

 

당연히 예수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와 상관없는 삶을 산다.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상관없는 삶을 산다.

예수나, 십자가나, 약속이나, 믿음이나 모두가 여흥거리일 뿐이다.

 

예수와 하나가 아니니 예수의 아픔이 있을 리가 없다.

예수와 하나가 아니니 예수의 생명도 없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선수로 살았다.

자기 몸이 찢기고 찔리고 매 맞고 곤욕을 당하셨다.

 

실제로 십자가에 죽었고,

실제로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실제로 승천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다시 오신다.

 

오실 때 이 땅에서 당하셨던 그 모습으로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 증거품으로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부도 피 뿌린 옷을 입고 맞이하여야 한다.


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라야 맞이할 수가 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는 관중은 맞이할 수가 없다.

오직 예수님과 같이 필드에서 뛴 사람만이 맞이할 수가 있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목사가 있다.

 

예수님처럼 경기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중계방송 하는 아나운서와 같이 십자가를 구경하는 목사가 있다. 

경기하는 목사는 십자가의 흔적들이 온 몸에 가득하다.

 

바울 식으로 표현하면 핍박 받고, 욕먹고, 가난하고 헐벗고, 자지 못하고, 꺼꾸러지고, 우겨쌈을 당하고, 성한 곳이 없다.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볼품이 없다.

사람들이 싫어한다.

난 저런 목사가 되기 싫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를 관전하며 중계방송 하는 목사는 멋있고 화려하다.

얼굴에 기름기 번지르르 하고 영광 받고, 대접 받고, 잘 먹고, 잘 자고 한마디로 팔자가 오뉴월 개팔자이다.

만인이 부러워한다.

아! 나도 저런 목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성경 어디를 펴도 하나님의 종들이 이런 호사를 누렸다는 기록이 없다. 

구약에선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그 시대로부터 버림당하였고 핍박과 미움을 받았다.

신약에선 예수님을 필두로 12제자나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다.

 

눈을 부릅뜨고 돋보기로 성경을 살펴보아도 이 시대 목사들처럼 대접 받고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지금은 너도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한다.

 

이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모두가 중계방송 하는 아나운서 같은 목사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목사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나운서 같은 목사를 보고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바울처럼 헐벗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욕먹고 핍박당하고 이단 소리 들어가는 목사로는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욕먹고 핍박 받고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 목사를 만들고자 하겠는가?

자식이 목사를 하겠다고 하면 밤잠 자지 말고 말릴 일이지 하라고 할 일이 아니다.

 

목사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목사를 서로 만들겠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목사는 아나운서이지 선수가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선수들에겐 부러움이나 영광이나 명예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경기하는 목사는 복음으로 죽고 살지만, 복음을 중계방송 하는 목사는 복음으로 자기 이익 챙기기에 분주하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라고 하였다.

즉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목사는 직업이고 교회는 직장이고 복음이니 십자가라는 말은 자기 배를 불리는데 이용을 하는 구호 일 뿐이다.

결국 아나운서 같이 중계 방송하는 목사들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십자가를 안다.

나도 예수를 안다.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한다.


내게 배우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을 그 속에 빛이 없는 사람은 속는다. 

본인이 소경이기에 복음을 중계방송 하는 아나운서 같은 소경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이다.

 

천국은 누가 대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는 누가 대신 믿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경기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누가 대신 지고 가는 길이 아니고 내가 지고가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아픔이고 버려짐이고 매 맞음이다.

아픔이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버려짐이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매 맞음이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피 흘림이고,

십자가는 버려짐이고,

십자가는 욕먹음이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등 떠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스스로 목사를 하겠다고 하는 자는 가짜이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등 떠밀려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십자가 도를 전하면 하나님께서 고난 없는 삶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이다.

 

예수도 사실이고 십자가도 사실이고 복음 전하면 고난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다.

이건 우리더러 고난을 자초해서 받으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를 올바로 믿으면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앙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비주의를 경계하라  (0) 2009.05.23
만남 그리고 복음과 죽음  (1) 2009.03.09
교회라는 우상 허물기  (0) 2008.12.24
배 부른 넋두리  (0) 2008.11.22
조0기 목사의 이단성  (0) 2008.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