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나요?

정낙원 2012. 12. 7. 22:16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나요?

 

 

어떤 분이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있나요?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가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답을 해 주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들 교인들을 만나면 신앙생활 잘하느냐?

또는 예수 잘 믿으라고 덕담을 합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말이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어떤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 그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답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하고 예수를 잘 믿을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가요?

왜? 서두에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가 하면 많은 교인들이 나름대로 예수를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데 성경적으로 판단하면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딴엔 정답이라고 썼는데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답을 보면 정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나 교인들이 당신은 신앙생활 잘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판단일 수가 없습니다.

 

전 과거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할 때는 온 교회 교인들과 목사님이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을 최고로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엔 믿음이 없었어요.

그건 내 의지와 각오와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보니 나를 위한 신앙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치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최고인데 믿음의 기준으로 보면 가짜였으니까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들은 모두가 최고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드러난 이단들인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정통이라고 하는 장로교나 감리교나 침례교나 순복음교회 다니는 교인들도 나름대로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일들은 모두가 자기가 알고 있는 신앙과 믿음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난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한다!

난 믿음을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는 겁니다.

 

이건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관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우리도 답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처음엔 복음적이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면 이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으로 가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귀는 항상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 교인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다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적 신앙의 답을 내어 놓을 것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은혜의 답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율법적 신앙생활은 인간이 신앙을 관리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은혜로 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관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행함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지만, 은혜는 행함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말을 육에 속한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무슨 생뚱 맞는 말이냐?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지 무슨 말이냐? 라고 의아해 하고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사도바울의 말을 빌려서 살펴봅시다.

 

로마서 9장을 봅시다.

 

롬 9:30-10: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의에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에 법을 쫓아갔다는 것은 율법 지킴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로워지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율법 아래서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깨달은 것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율법 외에 다른 의(義)” 를 말하는 것이잖아요.

율법 외에 다른 의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를 사해주는 의 아닙니까.

즉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두 가지 의(義)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처럼 율법으로 의를 만들고자 하는 교인들과,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의를 얻은 성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교인들이 알고 있는 신앙생활과,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를 얻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이 다름을 알게 됩니다.

마치 바울과 유대인의 신앙생활이 다르듯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어적으로는 예수 믿는다! 또는 신앙생활을 한다! 라는 말은 같을 수 있지만 그 내용면에선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바울도 신앙생활을 했고 유대인도 신앙생활을 했어요.

바울도 하나님을 믿었고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천국에 갔지만 유대인들은 지옥에 갔어요.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 신앙생활을 한다! 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식이냐!

아니면 유대인식이냐! 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식의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충성을 다하여도 지옥행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열심과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의 싸움을 경주하여야 합니다.

 

괜히 유대인들처럼 평생 동안 자기 딴엔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주님께서 난 너희들을 모른다고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내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 옳은 믿음인지 내가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신앙생활이 옳은 것인지를 늘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목사도 율법 아래 있는 목사가 있고, 믿음(은혜) 아래 있는 목사가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목사는 율법식으로 성도들에게 가르칠 것이고,

은혜(믿음) 아래 있는 목사는 믿음으로 가르칠 것입니다.

 

지금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는 목사가 율법의 종인지, 아니면 은혜의 종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복음을 증거하는지 율법을 증거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속지 않지요.

 

이걸 분별 하려면 먼저 내가 복음에 대하여 눈이 떠 있어야 합니다.

옳은 믿음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소경이면 지옥으로 끌고 가는 목사를 따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눈을 뜨고 밝히 보면 소경 목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럼 율법아래 있는 목사와 은혜 아래 있는 목사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먼저 율법 아래 있는 목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교인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가르칩니다.

 

항상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이들의 특징은 열심과 충성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 따위로 신앙생활해서 천국이나 가겠느냐 라는 식으로 공갈겸 협박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을 가지고 이건 하지 말고 저건 하라는 식으로 행동지침을 명령을 합니다.

 

가령 술을 먹지 말라던가,

거짓말 하지 말라던가,

가정예배를 드리라던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경보고, 주일 성수를 하라는 식으로 가르치게 됩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모든 것을 내가 이루어야 할 부채가 됩니다.

 

그래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이런 것을 하면 믿음이 있고 안하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목사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가르치는 신앙관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을 보면 믿어야 할 것은 없고 행하여야 할 것만 난무합니다.

신앙생활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것들만 가득합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심에 대한 복음에 풍성함이 주는 안도감과 안식과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신앙상태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열심에 따라 신앙이 춤을 추게 됩니다.

열심이 있을 때는 천국에 간다고 믿어지는데, 열심히 없고 속된 말로 양심에 거리끼는 윤리 도덕적인 죄라도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한숨을 짓습니다.

즉 열심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믿음이 좋고 예수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열심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못하고 믿음도 없고 예수도 못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이를 신앙생활 잘하고 예수 잘 믿는 것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고 예수 잘 믿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한다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판단은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게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심판 때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라는 청천병력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합니까?

아니 평생 천국 갈 것이라고 예수를 믿었는데 정작 천국에 주인이신 예수님이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환장할 노릇이 있습니까?

 

마치 유대인들처럼 메시야가 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는데 막상 메시야가 와서 몽땅 지옥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런 벼락 맞을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뢰아 교인들 같이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상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슬피 울며 이를 갈 날이 속히 이릅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을 보면 유대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유대교 신앙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흔히들 율법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신앙이 아니고, 내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행함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두 자기 열심과 충성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의 열심과 충성이 있고 은혜 아래서의 열심과 충성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의 열심과 충성은 내 의지와 각오로 하는 것이고!

은혜 아래서 하는 열심과 충성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일으킨 것입니다.

동일한 열심과 충성일지라도 그 행함의 주체가 나와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했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이지만 주의 믿음이 했으면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에는 내 자랑이 남고, 믿음이 하게 한 것에는 주의 은혜를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열심이냐! 입니다.

베드로 식으로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했으냐! 아니면 내 힘으로 했느냐! 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알면 아무것도 안하는 줄 알아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우린 종이에요.

율법의 종이든지 은혜의 종이든지 종이에요.

 

종은 나를 위한 삶이 없어요.

율법 아래서도 열심과 충성을 하여야 하고, 은혜 아래서도 열심과 충성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 열심과 충성이 누구에 의하여서 하는 것이냐의 차이에요.

내 열심과 충성이면 내가 자랑이 되어지고 내 영광을 추구하지만, 주의 믿음에 열심과 충성이라면 주님이 자랑되어지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어있어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가짜 복음이에요.

그건 복음을 지식으로 습득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믿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믿음이란? 믿을 대상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으라는 것이 있어요.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뜻은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하면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몽땅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천하에 구원 얻을 이름을 예수 밖에 안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믿으라는 말은 우리 행위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반대말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주 예수님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리 행위는 안 보겠다는 뜻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내가 얼마나 열심을 냈는지 아니면 농땡이를 쳤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최소한도 우리 행위 때문에 천국가고 지옥가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잘 믿으면 천국에 가고, 잘 안 믿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그건 거짓 목사들 곧 종교인들이 공교하게 지어낸 말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예수 믿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줘서 가는 곳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내 행위이지만,

하나님이 예수 믿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내가 버릴 수도 있어져요.

이건 믿음이 아니고 자기 의지이고 자기 각오예요.

인간의 의지와 각오는 시절을 쫓아서 변해요.

아침엔 주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가도 점심땐 자기가 살고자 주를 팔아먹기도 해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겠다고 하니 자기가 막아 주겠다고 큰 소리 치다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다 이런 맥락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알려 줍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 것은 아버지께서 믿게 해 주어야 믿는 것이지 너희들이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측면에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했다고 섭섭해 하지 않았어요.

 

그게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시고 자존심도 없이 베드로를 찾아간 것입니다.

나 같으면 배신자라고 하고 안 찾아 갔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나 각오를 믿지 않아요.

여러분이 아무리 서원을 하고 다짐을 하여도 하나님은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어 보세요.

하나님을 죽이네! 살리네!

믿네! 안 믿네! 난리를 치잖아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넜을 땐 우리 하나님 최고야! 라고 소고를 치고 춤추면서 부라보 했어요.

그러다가 먹을 것 안 주니 죽이겠다고 돌변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그 믿음이 천국까지 끌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주는 믿음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요.

나 천국 가기 싫어요! 라고 해도 안 돼!

넌 천국에 가야해! 라고 합니다.

왜요?

 

왜? 내가 천국가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넌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됐어! 라고 합니다.

이걸 에서와 야곱을 통해서 부여 주셨어요.

이 둘의 운명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미 결정이 되고 작정이 되어서 태어났어요.

후천적으로 바뀌지 않아요.

하나님이 간섭을 하여서 반드시 엄마 뱃속에서 약속한대로 이루어지게 하세요.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천국보내기로 직정을 했기 때문에 미꾸라지 같이 살아도 하나님이 질질 끌고 천국에 데리고 간 겁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내 나이 130살이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라는 말이 난 하나님께 질질 끌려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말입니다.

 

성도가 누구냐 하면 야곱처럼 천국가기로 작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질질 끌려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천국 가!

그러면 완성이고 완료이에요.

속된 말로 빼도 박도 못해요.

하나님의 약속은 그걸로 종결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을 대상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내 쪽에서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에는 내 쪽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믿어야 할 타자(他者) 즉 예수님의 행함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타자란 예수님입니다.

구약에선 하나님의 약속이고, 신약에선 예수님입니다.

 

구약의 신앙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구원은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졌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 받는 것이 없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나서 율법을 주었어요.

즉 구원 시켜 놓고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때는 율법이 없었어요.

알다시피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430년 후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어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 아브라함 내가 너를 구원시켜 줄께! 라는 약속을 해서 구원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걸 믿음으로 살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하나님 백성은 아브라함처럼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율법 지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겨납니다.

이 시대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천국에 가요.

 

그런데 성도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가르치면 이런 자는 마귀 종이지 예수님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종은 말씀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예수님의 종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다 지키셨어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다 지켜 주신 것을 믿음으로 사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예수님의 공로에 감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면 됩니다.

 

이 감사가 열심과 충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감사하고 살면 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미 하나님 백성인 자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시켜 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지킴의 목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은혜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착각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처지에 처해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를 보라고 거울을 주었는데, 화장을 하기에 바쁘더라는 겁니다.

네 얼굴이 어떤 흠이 있는지 그 흠을 발견하라고 한 것을 화장을 해서 감추어 버린 겁니다.

이건 거울을 준 의미를 완전히 곡해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아! 우리는 이런 죄인이구나! 를 알아야 했었는데, 도리어 말씀을 지켜서 자기가 죄인임을 가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그러니 율법대로 살면 살수록 신앙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잖아요.

무슨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자기 딴에는 열심과 정성을 다하여 한다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노를 촉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흰색을 좋아하는데 인간들은 검은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검은 색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통 검은 천지를 만들어 놓고선 하나님 나 그림 잘 그렸지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제가 늘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것은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고 옳음의 문제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제사 드리기에 바빴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하는데 제사를 착실히 지내다 보니 상한 심령은 커녕 자기 열심에 도취가 되어 교만하고 잘난 척 한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 잘 나타나 있어요.

 

눅 18:9-13=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어째서 당당합니까?

그건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았다고 생각하니 어디 그 마음에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자비를 구할 마음이 생기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지 못한 세리와 자기를 비교하여 우월성에 빠져서 교만을 떠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율법주의 유대교의 저주 받을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지금 교인들 하고 있어요.

이건 유대인들처럼 완전히 헛다리 짚은 겁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나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은 지극히 경건하게 살았고,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고,

지극히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천사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착한 사람들을 일컬어 천사 같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바로 천사같이 산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경건주의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처럼 안 가요.

인간적으로 보면 진짜 야! 저런 사람이 천국에 가지! 라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바리새인들의 의 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의를 최고로 인정했어요.

최고의 의란 더 이상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잖아요.

 

요즘 말로 윤리 도덕적으로도 완벽하게 살았고 나쁜 짓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종교적으로도 완벽하게 살았어요.

한마디로 무흠한 삶을 살았어요.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인 상 아닙니까?

목사들이 시간 시간마다 이런 교인들이 되라고 가르치잖아요.

이 시대 목사들이 기독교 TV에 나와서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신앙들이 아닙니까?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라야 TV에 출연시켜 주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의(義) 보다 더 나은 의(義)라야 천국에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의(義)를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義) 보다 도 더 나은 의(義)라야 된다고 합니다.

이는 천국에 갈 의(義)는 인간이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시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지도 못할 의(義)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고 보기 좋다고 하여도 천국에 갈 수 없는 의(義)라면 하나 마나 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교회이야기입니다.

아주 청교도적인 경건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교회에서 공부방과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요.

거기에 보면 솔로몬 영재 사관 학교 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담임 목사가 심혈을 기우려서 성경적이라고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해요.

전국 교회에다 최고의 진리인냥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어요.

 

설립 이념이 세상 교육에 아이들을 맡길 수가 없어서 대안 학교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운영하겠다고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겠답니다.

 

마치 유대인들 교육 이념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마귀의 권세로부터 보호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로 양성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 이름도 솔로몬 영재 사관학교입니다.

아마도 솔로몬 같은 사람을 배출하겠다는 의지이겠지요.

 

이들이 설립이념을 보세요.

 

01. 민족의 지도자 양성

 

(창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02. 행복한 그리스도인 양육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01. 성악설의 관점에서 교육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02. 주입식으로 교육

 

(신 6:7~9)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03. 철저한 조기 교육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04. 능력별 차등 교육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05. 훈계와 체벌을 통한 교육

 

(잠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잠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 10:17)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이들은 자기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성경적인 것이라고 합리화 하려고 각 조항마다 성경적 근거라고 하면서 성경 구절들을 첨부해 놓았어요.

성경에 비슷한 내용이 있으면 그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래서 조항마다 성경 구절을 하나 하나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어 놓은 겁니다.

아주 웃기지요.

 

더 가관인 것은 학칙과 같은 십계명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번 보세요.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무식한자?

 

1. 나는 철저히 예배(말씀읽기, 기도)의 삶을 산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 나는 철저히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삶을 산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3. 나는 철저히 성경을 암송하는 삶을 산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딤후3:15~16)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4. 나는 부모님, 선생님, 목사님,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며 산다.

 

(엡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골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갈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5.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고 철저히 거룩한 삶을 산다.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6. 나는 철저히 신앙일기 작성하는 삶을 산다.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7. 나는 다양한 체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체험학습)

 

(시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8. 나는 목숨 걸고 공부한다.(학습)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9. 나는 철저히 건강을 관리한다.(건강)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10. 나는 하나님이 주신 특기 계발에 최선을 다한다.(특기적성)

 

(마25:14~15)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건 완전히 공산주의 사상 교육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교회라는 틀 속에 가두어서 가두리 양식을 하겠다는 겁니다.

완전히 이 세상에서 잘되고 잘되는 것을 위한 것들입니다.

이게 교회가 할 일인지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설립 이념이나 교육실천의 십계명의 각 항목마다 전부 아전인수식으로 성경구절을 적어서 합리화시켜 놓았어요.

적용하는 말씀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성구사전 찾아서 비슷한 낱말이 있으니 적어 놓은 겁니다.

 

성경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해 놓았어요.

물론 인용한 성경말씀들은 전혀 그런 의미가 없는 말씀이에요.

이건 완전히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것을 육에 속한 자들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고 했어요.

신앙을 세상 살아가는데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교육을 과거 유대인들이 한 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철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경건을 가르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예수님이 그런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먹으면 죽을 것으로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신앙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율법신앙이 예수를 죽였어요.

그러니 율법신앙은 붙잡으면 선악과처럼 죽어요.

 

사도바울이 그랬지요.

자기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는데 그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했어요.

율법 신앙은 그리스도 밖에 신앙입니다.

 

율법 신앙이 뭡니까?

자기를 갈고 닦는 겁니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성불(成佛)하는 겁니다.

자기를 갈고 닦으면 의로워지는 줄 아는 겁니다.

 

영재 교육하는 목사는 아이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면 성도가 되는 줄 알아요.

이 사람의 착각은 믿음을 인간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훈련하고 가르치면 믿음이 좋아지고 없던 신앙도 생기고 성도가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걸 하면 하나님이 신앙 좋음이라고 인정해 주는 줄 알아요.

 

여러분 멋있는 것하고 옳은 것은 다릅니다.

뽀대 나는 것하고 정답은 달라요.

멋있다고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아까 믿음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다고 했지요.

거룩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여러분 위에 적힌 십계명을 지킨다고 거룩해지고 의로워지지 않아요.

 

거기 보세요.

예배 잘 드리고, 십일조하고, 성경 암송하고, 신앙일기 쓰고, 부모나 목사에게 순종하고, 컴퓨터 게임 안하고, 공부 잘하고, 건강관리 잘하고, 체험 학습 잘하고, 자기 특기 잘 살린다고 죄가 사해지고 의로워지지 않아요.

이런 것 한다고 천국 가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예복 입고 가는 것이지 내가 만든 옷 입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예복이란? 예수님 의(義)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로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의(義)에 인간의 의를 보태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 쪽에서 뭔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종교예요.

종교와 신앙의 차이는 종교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약속을 믿는 것이지 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생활은 인간이 항상 갈고 닦고 노력해야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은혜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쳐서 인간 만들고자 하는 것은 검은 얼굴을 하얗게 분칠해서 위장하는 것과 같아요.

만약 교회 밖 세상에서 이런 교육이념으로 한다면 시비 걸지 않아요.

어차피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것도 신앙의 이름으로 진리인냥 이런 짓을 하면 시비를 걸어야 해요.

교회는 이런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 되어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인간에게선 의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모든 인간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난 죄인입니다! 라고 시인하게 하고 예수님을 주(主) 라고 고백케 하는 곳입니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깨트려 주어야 해요.

성경은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에게 기대를 걸지도 않아요.

 

인간은 썩었고,

인간에게선 의로움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경건주의자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갈고 닦아서 완벽해지라고 합니다.

 

이건 믿음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그냥 세상과 또 다른 하나의 자기를 성찰하고 도를 닦는 종교 집단 일뿐입니다.

이런 교회를 사교(邪敎)라고 해요.

아무리 그럴싸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교육을 시킨다 하여도 교육으로는 단 한 사람도 믿음을 주고 성도로 만들 수가 없어요.

 

믿음은 우리가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부르심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들이 교육하고 훈련하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되는 겁니다.

구원이란? 부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롬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부르심이란? 내게 조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건으로 되어졌다는 뜻입니다.

불러 주면 그것으로 성도가 된 것이지 점차적으로 성도가 되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나 성도는 등급이나 차별이 없어요.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고 완료가 된 것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가야 할 미완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끝이지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들어갔다가 나중에 탈락 시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가 구원을 챙기지 않아요.

자기 조건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 조건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 신앙이 좋다 나쁘다를 가늠하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안에서 용서받음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예수 믿는 것이잖아요.

그럼 예수는 어떻게 믿습니까?

방법이 없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영에 속한 일인데 이건 육으로서는 도무지 감당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은 영을 몰라요.

소경이에요.

 

그래서 육인 인간은 영이신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어야만 믿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주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믿어져요.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내가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고 믿을 만 하면 믿고, 믿을 수 없으면 안 믿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 믿는 방법론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데에는 방법이 없어요.

성령이 믿어지게 하면 그냥 믿어져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게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은 자기가 깨달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게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가요?

그건 베드로 신앙고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게 해 주신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하게 해 주시면 누구든지 고백 할 수가 있어요.

이건 목사가 가르치고 교회에서 배운다고 고백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면 그냥 고백이 되어집니다.

 

이건 전혀 노력할 일도 어렵지도 않아요.

그냥 술술 믿어진다니까요.

안 믿어지는 것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인간이 만든 믿음이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믿음은 항상 흔들리고 불안하고 수고로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믿음은 흔들림도 없고, 불안함도 없고, 수고로움도 없고 편하고 안정적이고 쉼이 있어요.

 

그러니 행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눈에는 신앙생활이 낙천적이니까 겉으로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는 성도는 그냥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며 살아요.

경쟁할 이유도 없고 남과 비교할 이유도 없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율법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틀 속에 가두어지지 않으니 잘 훈련되어진 신앙을 가진 사람들 눈에는 전혀 믿음 같지 않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문제에 있어서는 목사에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 난 안 믿어지는데요.

어떻게 삽니까? 라고 물으면 안돼요.

 

저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요.

목사가 성령을 주고 구원을 시켜주는 보따리 장사가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라는 것을 증거해 주는 증인들입니다.

 

그러니 목사를 추종할 필요도 없고, 목사의 말에 순종 할 필요도 없어요.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복음 전하는 목사에게 있으면 자기도 복음 안다고 착각을 해요.

물론 한 성령 안에서 복음을 공유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개중에는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 자신이 복음으로 산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목사를 우상화해요.

그 목사에 말만 들어요.

그 목사에게 인정받고자 해요.

그 집단에서 안위 받고자 해요.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지 않고 그 집단을 위하여 충성해요.

그러다보니까 그 집단에서 추구하는 사상을 진리처럼 신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하여 자기 집단을 엘리트화 하여서 다른 집단과 차별화 하고 우상화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복음이 지식으로 습득하여 신앙이 관념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제발 목사를 신령한 천사로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목사의 말을 진리라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는 진리를 알아도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지 혼자 독점적으로 다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그 놈이 예수 행세를 하고 교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음을 받은 목사는 교인들이 자기를 추종하지 못하게 해요.

날 믿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해요.

신앙생활을 예수님에게 인수인계 시켜주는 중매쟁이 노릇을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목사에겐 큰 믿음을 주고 성도에겐 작은 믿음을 주시지 않았어요.

목사나 성도나 다를 바가 없어요.

다 성령께서 믿게 해 줘서 믿을 뿐입니다.

믿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일엔 동일해요.

 

그러니 목사에게 어떻게 삽니까? 라는 물으면 안돼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처럼 가르쳐 준다고 하는 놈은 다 사기꾼이고 가짜에요.

속지 마세요.

 

성경적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게 믿음 좋음이 아니에요.

신앙은 학문적 발전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목사에게 신앙적인 방법론을 알려 달라고 하면 안 되어요.

예수 믿는데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안 믿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데에는 방법론이 없어요.

 

방법론이 없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믿음으로 못 사는 겁니다.

믿어지게 해 주지도 않는데 어찌 믿음으로 산단 말입니까?

그리고 믿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지도 않아요.

 

예수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 믿어지게 해주어서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믿어지게 해주는데도 무슨 방법이 필요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성도는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도를 만드는 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교육을 통하여서 뭔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 교회 직원을 만들려는 것이지 성도는 아닙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잖아요.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낳아 주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이 낳아 주는데 인간 쪽에서 뭐 애쓰고 보탤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데 무슨 교육이 필요하고 행할 것이 필요합니까?

성령이 폼으로 와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알아서 성도답게 살게 해요.

 

가장 성도답게 사는게 무엇인가 하면 범사에 자기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이것 이상 좋은 신앙은 없어요.

최고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어떤 자세로 살았을까요?

 

1번) 개과천선해서 잘 살았다.

2번)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고 살았다.

 

정답은 2번이에요.

 

아버지의 바램이 어떤 것일까요?

탕자에겐 개과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중요해요.

개과천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살아갈 수 없는 종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란?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종이라고 해요.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움직여요.

그래서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가 없어요.

 

여러분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 명을 순종하고 살았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께 순종한 것은 잠간이에요.

물론 아버지 명을 따라 살고자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살 수는 없어요.

 

처음엔 아버지 명대로 살고자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 다 잊어버려요.

이게 인간이에요.

또 옛날에 행사머리가 나와요.

늘 아버지 속을 썩이며 살아요.

그래서 탕자인 겁니다.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도의 구원을 탕자 비유로 한 것은 탕자의 회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탕자를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깊디 깊은 사랑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탕자 비유를 통해서 포카스를 탕자에게 맞추면 그건 성경을 잘못보고 있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요.

이 못난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돼요.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깊이 깨달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우리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것을 요구하겠어요.

아니 만유가 하나님 것인데 뭘 달라고 하겠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에 신앙의 포카스를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 포카스를 맞추고 살아야 해요.

아버지의 명대로 산다는 것도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용서받은 은혜로부터 파생된 열심과 충성을 내어 놓으세요.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에 감사의 깊이가 달라져요.

이 깨달음이 교회에 나가게 하고,

이 깨달음이 옥합을 깨트리게 하고,

이 깨달음이 연보를 하게 하고,

이 깨달음이 봉사와 충성을 하게 하고,

이 깨달음이 형제를 사랑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고 수고이고 일이 되어요.

그러나 깨달음으로 하는 것은 수고와 일이 아니고 헌신이고 믿음의 삶입니다.

목사가 할 일은 성도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이 알아서 해요.

그러니 목사는 성도를 관리할 필요도 없고 간섭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성도가 복음만 알면 범사가 감사가 되어요.

병들어도 감사하고,

세상에서 실패해도 감사해요.

 

그러니 범사가 감사가 되어져요.

물론 복음을 깨닫는 순간만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요.

 

믿음은 우리가 만들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면 믿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솔로몬 영재 사관학교가 필요합니까?

 

웃기는게!

컴퓨터 게임 하지 말고 거룩하게 살라고 합니다.

아니 컴퓨터 게임 안하면 거룩합니까?

인간 자체가 썩었는데 게임하고 안하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생각하는 것부터 행동하는 것까지 몽땅 썩었는데 무슨 거룩한 행실이 있어요.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창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 마음과 생각과 모든 하는 일이 악함이라고 했잖아요.

이런 인간에게서 무슨 거룩이 만들어집니까?

속된 말로 회식 자리 가서 소주 마시면 부정하고 사이다 마시면 거룩한가요.

노래방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면 거룩하고 유행가를 부르면 속된 것인가요.

술집을 하면 타락이고 기독교 서점을 하면 정한 것인가요.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거룩은 예수 밖에 없어요.

예수 안에 있으면 거룩해요.

반면에 예수 밖에 있으면 부정해요.

그러니 우리의 어떤 행실을 가지고 거룩하다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컴퓨터를 해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면 되어요.

이를테면 컴퓨터를 안 하고 난 거룩하다고 하는 것보다 컴퓨터를 하면서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훨씬 나아요.

컴퓨터를 하나 안 하나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이 사람은 거룩이 뭔지를 몰라요.

거룩을 인간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게임 안하면 거룩합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신앙일기 쓰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부 잘하고, 특기를 계발하면 거룩해집니까?

 

성경구절 인용한 것 보세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해라”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했어요.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죄인이 어떻게 거룩해 집니까?

 

죄인에게서 거룩이 나옵니까?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까?

 

온전이니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거룩이에요.

 

여러분 강아지에게 사람 노릇하라고 해 보세요.

안 되지요.

강아지에게 훈련을 시킨다고 사람의 속성이 나오지 않아요.

훈련이 부족해서 안 나오는게 아니고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강아지 보고 너 왜? 사람 노릇 못하느냐? 라고 하는 그 인간이 개 만도 못한 놈입니다.

 

죄인은 다 동일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에게 등급이 없어요.

다 똑 같은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일 뿐입니다.

 

좋은 믿음 나쁜 믿음도 없어요.

믿음이냐! 아니냐! 만 있어요.

믿음 비슷한 것도 없어요.

옳으냐! 그르냐! 만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겐 고급 믿음 주고 어떤 사람에겐 저급 믿음을 주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피가 어떤 사람에겐 더 큰 구원의 능력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작은 구원의 능력으로 작용하지 않아요.

모두 동일해요.

 

그러니 믿음을 가르치거나 신앙을 획일적으로 교육해서 가르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 도만 증거하면 각 자 안에 있는 성령이 알아서 각 사람에게 적용하며 살게 합니다.

각자 깨닫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깨닫고 많이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적게 깨닫고 적게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랬지요.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이는 탕감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의 폭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추상같다고 할지라도 죄인은 하나라도 지킬 수가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쥐꼬리 삼년 묻어 두어도 쥐꼬리입니다.

쥐꼬리를 십년 묻어둔다고 해서 호랑이 꼬리가 되지 않아요.

이처럼 죄인도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교육을 해도 죄인이지 의인이 되지 않아요.

 

거룩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거룩해집니다.

이건 만들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지 실제 거룩해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아서 의인이지 실제론 죄인 그대로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의롭고 거룩해요.

예수 밖에 나오면 죄인 그대로에요.

 

이 세상엔 예수님만 의로운 분입니다.

예수님 안은 무조건 의롭고, 예수님 밖은 전부 부정합니다.

그러니 죄인에게 하나님같이 거룩하고 온전하라는 말은 안 된다는 말이지 우리더러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으란 말입니다.

포도나무 가지 비유에서처럼 나무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단독자로 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봅니다.

 

인간이 어떻게 거룩해지고 온전해 집니까?

그건 온전하고 거룩하신 분 안에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 온전하고 거룩한 분이 누굽니까? 물어야지요.

그 분이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구하고 찾아야지요.

 

그럼 성령께서 예수님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 믿으면 온전하고 거룩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어야만 믿어지잖아요.

 

성령께서 예수 안으로 밀어 넣어 줘요.

믿어지게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온전이니 거룩이니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영역이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신앙과 생활을 구분하지 말고 하나로 사세요.

 

신(信)이란? 믿는 것을 말하고,

앙(仰)이란? 바라보는 것을 말해요.

그리고 생활(生活)이란?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신앙을 생활(信仰生活)로 사세요.

 

신앙생활이란? 글자 그대로 믿고 바라보고 사는 겁니다.

그럼 누구를 믿고 바라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고 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의로워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믿는 것엔 내 것을 보탤 것이 없어요.

오직 믿는 분에 대한 것들만 담겨져 있어야 해요.

불신앙이 뭐냐?

 

믿는 분에 것에다가 자기 것을 보태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섞는다고 해요.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변질이 되어요.

썩어요.

물이 섞인 포도주는 버려야 해요.

 

마귀는 이걸 알기 때문에 자꾸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다 인간의 공로를 섞으라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을 섞으라고 해요.

인간의 행함이 섞이면 인간의 본성 상 자기 행함을 남기고 예수님의 행함을 밀어버리게 되요.

 

여러분이 교회에 열심과 충성을 해 보세요.

당장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지잖아요.

누가 날 안 알아주나!

사람들 이목을 살피게 되잖아요.

이게 본능이에요.

 

반대로 농땡이 쳐 보세요.

남들이 농땡이 친 것을 몰라주기를 바라지요.

우리의 본성은 잘한 것은 자랑하고 싶고, 수치스러운 것은 감추고 싶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집에 가면 자식들 상장을 액자에 걸어 놓지요.

그건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 자식이 이렇게 공부 잘한다 라고 남에게 나타내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빵점 받은 성적표가 있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찢어버리지요.

그것 보면 혈압 오르니 잊고 싶어서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예수님 공로와 자기 공로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예수님 공로를 뒤로 밀쳐 내게 되어 있어요.

이건 여러분들을 충성하고 열심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겁니다.

 

열심을 내고 충성을 해 보세요.

그래야 여러분 속에 죄성을 알게 되요.

예수님 십자가 보다 내가 한 충성 봉사가 더 의미 있다고 여기는 악을 발견하게 되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보다 내가 흘린 땀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열심과 충성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저기 안에 이런 죄성이 있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 안에 죄를 모르면 예수를 믿는 것은 관념으로 흘러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신 죽어 주심에 감사를 몰라요.

 

열심히 충성하고 열심히 봉사하세요.

그리곤 야! 내가 예수님의 피 보다 내 행함을 더 사랑하는 악당이라는 것을 아세요.

자기가 악당이라는 것을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으로 나의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셨구나 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한 열심과 충성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열심과 충성이 헛된 것이 아니지요.

성도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자들입니다.

 

해 보세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열심히 하되 예수님 공로를 들고 나오세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자기 것을 내어 놓는 것은 종교생활이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종교 생활은 하나님 앞에 내 것 들고 나오는 것이고,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예수님 것 들고 나오는 겁니다.

 

누구 볼 것 없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신앙생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종교 생활 하고 있는지!

본인이 알아요.

 

그래서 바울이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확증 하라고 한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스럽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고 종교인입니다.

지옥엔 종교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종교인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등 신앙을 외식이라고 한 겁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탤런트처럼 연기(演技)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 탤런트가 되어서 신앙 연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이 서로 간에 연기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누가 누가 잘하나 연기 콘테스트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니라 놀이터이지요.

 

자기 마음을 놀이터로 만들지 마세요.

마음이 성전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성전이어야 합니다.

 

성전엔 항상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의 피가 묻어 있어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란 말입니다.

 

성도의 심령이 성전이잖아요.

그럼 성도의 마음속엔 항상 예수님의 피가 묻혀 있어야겠지요.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집에 문설주에 발라진 것과 같이 발라져 있어야 해요.

 

성도의 몸에는 예수님의 피가 묻혀 있어야지 내 피가 묻혀 있으면 안 되어요.

내 열심과 충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흔적으로 보시고 천국 문을 열어 주시지 우리 흔적보고 열어 주지 않아요.

혼인 잔치 집에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어야지 자기가 만든 예복 입고 있으면 쫓겨나요.

 

그러니 제발 자기 잘남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 믿음을 내어 놓으세요.

난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삽니다! 라는 것을 내어 놓으시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부디 예수님 자랑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