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행함! 그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여!

정낙원 2011. 7. 7. 01:24

 

행함! 그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여!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왜? 우리 안에 와 계신가요?

우리 몸을 가지고 창조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창조의 일을 하십니까?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 몸은 아담의 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아담의 몸에서 예수님의 삶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담의 몸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나온다는 것은 곧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 특기는 창조하는 일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불 가능을 가능케 하십니다.

죄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서는 죄인의 몸으로서는 도무지 해 낼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과는 정 반대의 삶이 나옵니다.

 

지금까진 모으고 살았습니다.

섬김 받고 살았습니다.

높은 자로 살았습니다.

상전처럼 대접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 속에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뚫고 들어오자 이상하게 변합니다.

지금까지 혼자 배불리 먹고자 악착같이 모았던 것을 교회에 성도들을 위하여 내어 놓습니다.

지금까지 섬김만 받고 살던 사람들이 섬기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높은 자로 상전으로 살던 사람들이 성도들을 수종 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예수 믿는다고 쫓겨 가는 판국임에도 가면서 예수를 전합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태가 일어나자 온 예루살렘 교회는 혼비백산이 됩니다.

 

예수쟁이들은 도망자들이 됩니다.

저 멀리 안디옥까지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교회를 세웁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담임 목사로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가서 보니 성도들이 극심한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서로 섬기면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가 이러한 각양의 모습으로 토하여 내게 하심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나바는 자기보다 복음을 더 잘 증거하는 사울이라는 바울을 청빙합니다.

바울에게 담임 목사 자리를 내어 주고 자신은 부 목사로서 섬깁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마게도냐 성도들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았습니다.

초근목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어서 그곳 교회 성도들이 굶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한끼 두끼식 절식하면서 십시일반 모읍니다.

자기 입에 다 털어 넣어도 시원치 않는 판에 생판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힘에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합니다.

 

내 입에 들어 갈 것을 형제의 입에 털어 넣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로 살아가는 아담의 몸에서는 도무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분명히 옛 몸인 아담의 몸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성도 안에 부어지자 예수님의 삶에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자기 부인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새로운 창조를 하고 계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얻은 아들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니 군말 않고 바칩니다.

 

라합은 여리고에서 태어나고 여리고에서 먹고 살아가는 여리고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관리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리려고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알고 관가에 신고하라고 방을 붙입니다.

누구든지 신고하면 큰 상금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합은 정탐꾼을 관가에 신고하여 포상금을 받지 않고 도리어 숨겨 줍니다.

간첩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아 잘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도리어 죽는 길을 택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행함이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행함이란? 예수님의 창조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 안에서 도무지 죄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게 하는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도리어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죽이는 자를 저주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축복을 합니다.

이는 아담의 몸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창조 하신 것입니다.

 

예수 전하면 죽인다고 하는 협박과 공갈이 난무하는 환경에서도 사도들은 예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깁니다.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래야 하는데 도리어 나 더 예수 믿을래 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사도들 속에서 창조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자기 입에 다 넣어도 모자랄 판에 먹지 않고 도리어 자신은 굶고 생면부지인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위하여 기꺼이 연보합니다.

 

사람의 본능은 내 배부터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배를 채우지 않고 남의 배를 채워 줍니다.

아담의 몸에선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안에서 창조의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러한 일들을 뉘라서 할 수가 있습니까?

인간은 못 합니다.

그런데 합니다.

 

누군가 보니 예수가 그 안에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담의 몸을 가지고 예수의 삶을 풀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은 아주 어리석을 짓들을 하게 된답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리는 일을 한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담의 몸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입니다.

이걸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이란? 예수님의 창조입니다.

 

이 행함이 없는 자는 죽은 자라고 합니다.

가짜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자입니다.

귀신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는 산 분이지 죽은 분이 압니다.

산 예수가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능력이란? 삶입니다.

십자가는 말이 아니고 삶입니다.

 

성도는 복음은 전하는 자가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배 부름을 얻고 살다 보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혜택을 누립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혜택을 입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전도하는 예수님의 전도법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가지고 바로 예수가 이런 분이다!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십자가에 죽었던 그 예수가 부활하여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이상한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봐라!

예수가 여기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다!

 

봐라!

예수가 스데반 속에서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지 않느냐!

 

봐라!

예수가 마게도냐 성도들 속에서 극심한 궁핍 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신 것이다!

 

이게 바로 예수를 품고 사는 성도들이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 나타나면 그 사람 속에 예수가 있는 것이고!

안 나오면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나와도 되고 안 나와도 되는 그런 성질이 아닙니다.

산 에수님의 생명이 자연적으로 토해내는 생명 흐름의 현상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예수의 삶이 있고 죽은 자는 삶이 없습니다.

 

갑자가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돌아가던 선풍기가 꺼집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야! 선풍기야 돌아라!

너 왜? 안 돌아!

너 안돌면 갖다 버린다!

아무리 소리쳐도 기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들어옵니다.

 

전기가 들어오자 죽었던 선풍기가 돌아갑니다.

돌아가라고 소리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돌아갑니다.

야! 그만 돌아!

그래도 돕니다.

 

그래서 선풍기에게 묻습니다.

 

야! 너 아까는 왜? 안 돌아갔는데!

그야! 그때는 내 안에 전기라는 생명이 없으니 안 돌아갔지!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돌아 가냐?

그야 지금은 내 안에 전기라는 생명이 공급되니 돌아가지!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전기라는 생명이 들어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안 들어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버려!

 

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전기로 사는 것이야!

내가 사는 것은 전기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거야!

그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야!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라는 생명이 들어오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의 생명이 툭툭 터져 나옵니다.

안 하던 짓들을 합니다.

 

이름하여 봉사하고 섬기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예수의 생명인 자기 부인의 삶들이 나옵니다.

죄를 미워하고 싸우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라는 생명이 있으면 자연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는 모든 일들은 자기가 한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행함입니다.

스스로 한 것은 행위이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은 행함입니다.

 

행위는 예수 없어도 내가 할 수가 있는 일이지만!

행함은 내 본성과 반대되는 일로서 에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일들을 행하고 산 겁니다.

 

그러니 나 십자가 안다고 떠벌리지 말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십시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라고 하니 십자가 정신이 뭡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건 가르쳐 주어도 모릅니다.

 

어떻게 음식 맛을 말로 가르쳐 줍니까?

음식 맛은 그 음식을 먹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 이 맛이구나! 를 압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성도는 십자가 정신이 뭡니까? 라고 묻지 않습니다.

아! 그거요!

그렇게 삽니다.

십자가 정신으로 살라고 하지 않아도 십자가 정신으로 삽니다.

 

말 귀를 못 알아들으면 그냥 내비 두어야 합니다.

알려 주려고 하면 뭅니다.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무는 겁니다.

자기 무식이 들통 나기 때문에 무는 겁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입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고집 센 사람과 똑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의 주장이 옳다는 하는 것 때문입니다.

 

4 X 7 = 27이 맞느냐?

4 X 7= 28이 맞느냐? 입니다.

 

고집 센 사람은 4 X 7 = 27 이라 주장합니다.

똑똑한 사람이 4 X 7 = 28 이라 주장합니다.

 

둘이서 서로 자기의 셈이 맞다고 다투다가 똑똑한 사람이 고을 원님께 가자고 말합니다.

그 둘은 고을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고을 원님이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을 합니다.

 

네가 4 X 7 = 27 이라 말하였느냐?

네!

나는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 놈이 4 X 7= 28 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고을 원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4 X 7= 27 이라고 답을 한 놈은 풀어주고,

4 X 7= 28 이라고 답을 한 놈은 곤장을 열 대 치라고 합니다.

 

이에 고집 센 사람은 자기가 맞는 줄 알고 기세등등하며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반대로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야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곤장을 맞으면서 원님께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원님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4 X 7 = 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 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어리석은 놈과 시비를 하느냐 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의 행함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어느게 맞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그럽니다.

 

야! 임마 왜? 그걸 나에게 묻냐!

너희 안에 예수가 있어!

없어!

 

그 안에 예수가 있는 놈은 있다고 하고!

그 안에 예수가 없는 놈은 없다고 하는거야!

 

뭘 그걸 가지고 싸우냐!

너 곤장 한번 맞아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