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아담한 생각 (퍼온 글)

정낙원 2011. 7. 2. 23:36

 

아담한 생각 -손하진-

 

 

 

‘아담’한 생각

 

 

 

저 때문에 늘푸른교회 준성아빠님께서 먹을 필요도 없는 욕을 십자가마을에서 애매히 먹으신 것 같습니다. 준성아빠님의 글에 상당 부분 공감이 가서 퍼오게 된 것인데, 이쯤해서 저의 생각도 밝혀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남겨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전지전능의 관점에 서서 성도의 칼럼란에 ‘이근호 목사의 문제점 재구성’이란 글에서 ‘준성아빠나 손하진씨가 주장한 이근호 목사의 문제점을 재구성’해놓으셨는데,

어이없는 그 ‘재구성’에 대한 저의 소심한 반박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이 글이 복음적이면 복음적인 대로, 비복음적이면 비복음적인 대로 여기에 남겨지겠지요.

비복음적이라면 ‘십자가복음’과의 좋은 대조도 되겠네요. 아님 그저 넋두리가 될 수도 있겠구요.

 

십자가마을에는 ‘십자가’, ‘피’의 담론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십자가 정신’은 그 어디에?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부쩍 이근호 목사님의 ‘넘겨짚기’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급한 성격에서 비롯된 줄 알기에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만,

몇몇의 경우는 문제가 꽤 심각해 보입니다.

 

최근 저를 포함해서 몇몇 분들이 ‘믿음+행함=복음’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자칭 오직 ‘십자가 피’에만 관심 있다는 분들에게 ‘좋은’ 말씀들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십자가 피를 제가 무시하는 것이 아님은 기본적으로 아셨으면 합니다.

 

제가 문제시한 것은 십자가마을,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근호 목사님에 의해 ‘구성’된 ‘십자가 신학’의 프레임(틀)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십자가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십자가 신학’이 오히려 우상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의 임의적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제 저는 ‘십자가마을표 십자가’프레임에 따라 ‘믿음+행함=복음’을 주장하고 있는 위험인물로 분류되었습니다. 십자가마을 입장에서 보면 제 본색이 드러난 게 되겠죠.

그래서 10년, 20년 십자가 피를 이야기해도, 하나님께서는 피만으로는 만족 못하는 ‘행함’주의자들을 기어코 솎아내시고야 만다고 하며 뿌듯(?)해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이젠 앞뒤 볼 것 없이 ‘십자가마을표 십자가’ 담론을 동원해서 이전에 십자가마을에 출몰한 ‘이단’들에게 했던 것처럼 십자가 피 이외의 것도 필요하다는 주장하는 세력들(타칭 마귀들이 되겠죠.)을 철저히 응징하는 일만 남았겠죠. 물론 그 작업이 현재진행형이지만.

 

제가 이근호 목사님을 비판한다고 해서 이 목사님의 존재 전부 그리고 그가 전한 말씀의 전부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는 이런 부분적 비판조차 마치 전부를 거부한 것으로 읽히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반대로 부분적 인정이 마치 전부를 인정한 것으로 읽혀지기도 하죠.  예를 들면, 박영선 목사님이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에도 복음적인 내용이 있고 은혜 되는 ‘부분’이 있지만 십자가마을의 십자가신학 틀에서는 개혁주의나 행함을 주장하는 이들의 단적인 사례로만 여기며 그 ‘전체’를 부정해버리죠.

 

이런 분들에 대해 조금만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바로 ‘사상검증’에 들어가지요.

그렇게 되면 당사자는 ‘자아비판’을 하고 한발 물러서든지 아니면 ‘개혁주의자’라는 딱지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다만 이들의 책이 이근호 목사님의 추천도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이 도대체 어떤 주장(믿음+행함=복음)을 하는 지를 살펴볼 수 있는 유용한 반면교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겠죠.  

그들의 책을 읽는 목적과 그 용도는 단지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왜 그것들이 통째로 거부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데만 한정될 뿐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유사복음(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죠. 한마디로 십자가신학에 비하면 다들 한 수 아래라는 거죠.]

 

논점에만 초점이 맞춰지길 바랍니다.

무리한 ‘넘겨짚기’는 하지 마시구요.

 

복음 전하는 사명에 사로잡힌 이근호 목사님에게서, 성도들 중 누군가가 이목사님의 삶의 모습들(행동들) 가운데 비복음적인 면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 목사님을 지적해. 주님과 목사님 사이에서 해결할 문제를”이라고 하며 그저 못 본 척 넘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목사님! 복음에 관심을 가지세요! 목사님의 그런 행동들(정신들)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권면을 해야 할까요. 저는 후자가 옳다고 보는 데.

 

그런데 저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저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 목사님의 태도를 보면 영 엉뚱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본적인 레파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왜 제 행위에 관심을 가지십니까? 인간은 뭘 해도 죄인 아닙니까? 인간 이근호한테 뭘 기대하신 겁니까? 성도님께서 저의 인간적인 모습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 실망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본인 스스로 정작 바라봐야할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죄 밖에 안 나오는 저에게 관심을 두고 지적할 생각마시고 제가 전한 복음에 하자(논리적 오류)가 있는 지 살펴보고 그것만 지적해주세요. 제 복음(십자가 신학)에서 논리적 오류를 찾아내서 그것에 대해 반박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말을 하지 마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러시면 저로서는 응당 성도님께서 십자가 피가 아닌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님! 십자가 피에만 관심을 가지세요!!”

 

이런 식으로 이 목사님께 권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입장의 역전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이 목사님의 이런 대응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물론 저도 포함되겠지요.) 자기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잽싸게 변명, 변론, 논박 거리를 찾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이라고 예외일 순 없겠죠. 일단 지적을 받으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담론체계로 상대방을 끌고 가려합니다. 많이 못 배운 사람들은 자신의 누적된 경험체계 속으로, 많이 배운 사람들은 다양한 지식을 동원할 수 있고 탄탄한 논리로 무장된 자신의 전공분야체계로 상대를 이끌어가서 상대방의 그 지적을 방어, 논박하려 듭니다.

 

이 목사님의 경우 때론 십자가 복음에 기초해서 합당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다양한 일반 학문과 신학을 두루 섭렵해서 ‘구성’한 자신의 ‘십자가 신학’의 장으로 상대를 유인해서 그의 지적(권면)을 구워삶아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신학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에서 방어와 동시에 공격을 감행합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란 말이 있듯이 그 때부터 오히려 이 목사님은 총공세에 나섭니다.

 

홈그라운드인 십자가신학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상대를 지속적으로 압박해서 결국은 이목사님의 비복음적인 태도, 행동, 삶에 대해 복음적 관점에서 사랑으로 권면했던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가능성과 행함을 가미해야 진정한 복음이 된다고 믿는 비복음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참 신기합니다. 처음에는 이 목사님의 비복음적인 정신(행위)에 대해 권면한 성도를 나중에는 졸지에 ‘믿음+행함=복음’을 주장하는 행위주의자, 성화론자로 바꿔놓으니. 그런 식으로 해서 ‘복음의 훼방꾼’들이 지금도 양산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보는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이 ‘십자가신학’에 포획되고, ‘십자가신학’이 이근호 목사님에게 포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져서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복음=십자가신학=이근호’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 목사님 본인이나 몇몇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외부(예수 밖, 십자가 밖으로 또 오해하실라..)에서 보면 이 목사님의 말씀들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복음을 독점하는 듯 한 인상을 갖게 됩니다.(하지만 이 목사님의 말씀 중 상당부분이 복음적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도 하구요.)

 

여기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게 되면 이목사님은 ‘이목사, 당신만 복음 아냐?’라는 시비조로만 받아들입니다. 복음, 십자가신학, 이근호 이 셋 사이의 뒤섞임이 이목사님 개인에 대한 지적(권면)을 십자가신학이나 더 나아가 복음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런 점 때문에 왜곡된 반응이나 각종 궤변들이 나오게 되는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또 다른 문제는 ‘행위주의자 또는 행함주의자’라는 딱지를 너무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아니라면 ‘믿음+행함=복음’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성도가 미치지 않고서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에 자기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꼽사리 끼우려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 잘못을 지적하기만 하면 상대방을 ‘행위주의자, 행함주의자, 개혁주의자, 바리새인의 아류, 카톨릭의 아류, 불교도 등등’으로 매도합니다.(*물론 저들의 모습이 제 모습이고 저들의 본성이 제 본성인 것은 100% 인정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에 근거한 긍휼과 자비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있느냐겠죠.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인간이 아무 수고한 것 없이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것까지 덧붙이는 이유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책잡고자 애쓰시는 분별력 떨어지시는 분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식으로 몰상식한 낙인찍기를 한다면 이근호 목사님도 ‘행위주의자,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등등’으로 매도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목사님 담배연기 무척 싫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치하고 조금은 극단적인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죠.

 

 

 

####어느 날 인터넷으로만 이 목사님의 설교나 강의를 듣던 한 청년이 우리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설교시간에 예배당 강대상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고 피우려 합니다. 말씀 전하시다 말고 그 즉시로...

 

이목사님 왈: “교회당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됩니다!!”

 

청년 왈: “목사님, 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복음만 전해주세요. 저는 담배 피면서 설교를 들으면 훨씬 설교에 집중이 잘 돼요. 제가 뭐 잘못 됐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제 담배 피는 행위에 왜 관심을 가지는 거죠? 예배당에서 담배를 피우나 안 피우나 저는 제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압니다.

 

어떻게 하든 저에게서는 죄 밖에 나올 것이 없음도 잘 압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 바라보며 그 공로에만 의지하여 날마다 주님 주신 은혜로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이 좋아서 예배까지 참석했는데 담배를 피우지 말라니요.

 

피워도 죄인, 안 피워도 죄인인데요. 제가 예배당에서 담배 좀 핀다고 해서 주님의 피로 산 교회가 교회 안 되게 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목사님. ”교회당에서 담배를 피면 안 된다!“는 것은 ‘법(또 다른 율법)’ 아닙니까?

 

설마 기존 교회법의 비복음적 성격을 비판하신 목사님께서 또 다른 교회법을 주장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교회를 조직화하고 관리하려는. 목사님. 그렇게 되면 ‘믿음+교회법(교회당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복음’이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십자가 신학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목사님 왈: 성도님. 따로 혼자 있을 때 피는 것은 제가 뭐라 안 하겠는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담배를 피게 되면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다른 성도님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까?

 

청년 왈: 목사님 말씀이 좀 요상하게 들리네요. 아까는 ‘법’을 이야기하시는 같더니만, 이번에는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네요. 세상의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윤리, 도덕’ 같기도 하고 카톨릭에서 강조하는 ‘믿음+행함=복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목사님 말씀의 요지는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 아닌지요.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행위’를 하라고 하시는 거고. 그렇다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는 행위보다는 피지 않는 행위가 더 낫다는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인데, 그러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에서 담배 피지 않는 행위는 선’,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복음이 아닌 선악체계에 기반 해서 말씀하신 게 되는 군요. 

 

그런데 그런 것이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담배 안 피워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하신 행위만 기뻐하시기에 우리 인간의 행위는 모두 무가치한 것 아닙니까. 어떤 의미도 둘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기에 목사님의 “여러 사람이 모인 교회당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줌으로 흡연행위를 자제하라.”는 윤리,도덕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저 보고 제 자신의 행위를 관리하라는 말씀처럼도 들리고. 그런 사고방식들은 모두 십자가 피의 공로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요.

 

이 목사님 왈: 무릇 정말 성도라면 주께서 피를 흘려 구원한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를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짐까지 나눠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성도된 자로서 다른 성도에게 담배연기로 고통을 주는 것은 온당치 않은 행위 아닙니까.

 

무엇보다 성도라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어있어요. 성도님.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고 섬겼듯이 그런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형제, 자매를 위해 교회에서는 금연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청년 왈: 목사님. 그 취지는 알겠는데요. 인간이 어디 보통 인간입니까? 제가 주님을 믿지만 육체의 소욕을 어떻게 제 힘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죄인의 몸에서 나올 것은 죄뿐인데. 우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셔야 했던 거잖아요. 예수님께서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의를 홀로 이루셨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중에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주님께 버림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다른 성도들도 담배연기 좀 맡으면 어떻습니까. 제 담배연기가 그들과 주님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순 없잖아요. 오직 십자가 피에만 관심이 있는 성도라면 제 담배연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담배피우는 것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십자가가 아닌 다른 데 관심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이웃사랑을 이야기하셨는데, 어느 인간이 그걸 지켜요? 다른 바울의 권면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 있나요? 없잖아요. 그것을 우리는 못 지키고 예수님만 지킬 수 있기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저에게 교회에서 예배 중에 담배를 피우게도 하시고 안 피우게도 하실 겁니다.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시겠지요. 주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저는 담배를 피울 때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피우고, 안 피우고 있을 때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안 피웁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 복음에만 관심이 있기에, 저 자신의 의가 될 수도 있는 ‘교회에서 예배 중 담배 안 피우기 행위’를 억지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목사님도 담배연기 맡을 땐 맡는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렇지 않을 땐 그대로 감사하며 말씀만 전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께서는 앞으로 제가 담배 피우는 행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마시고 오직 십자가 복음을 깊이 연구하고 증거 하는 데만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잘못하면 목사님도 교회유지를 위해 교회법이 필요하다고 증거 하는 자로,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주장하는 자로, ‘믿음+행위=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자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참 유치하지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괜히 자기 아들 죽이셨겠습니까.. 

 

“그 목사의 잘못은 간단합니다.”

“그 성도의 잘못은 간단합니다.”

“저의 잘못도 간단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복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복음 증거에만 힘썼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인간의 행함에 기대 걸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십자가 피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사명의식을 갖고 열심히 말씀 연구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인간 속에서는 탐심과 각종 악독한 것들만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전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분은 오직 독생자 예수뿐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성령께서 주안에 있는 성도들을 다루신다고 증거 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바로 이게 잘못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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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글입니다.

이근호 목사가 무엇이 문제인지 아주 예리하게 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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