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정낙원 2011. 6. 14. 02:39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44편)

 

(시 44:8) 우리는 언제나 우리 하나님만 자랑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하렵니다. (셀라)

(시 44:9)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버려, 치욕을 당하게 하시며, 우리 군대와 함께 출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시 44:10) 주님께서 우리를 적에게서 밀려나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마음껏 우리를 약탈하였습니다.

(시 44:11) 주님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주시고, 여러 나라에 흩으셨습니다.

(시 44:12)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시니, 그들을 팔아 이익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 44:13) 주님께서 우리를 이웃의 조롱거리로 만드시고, 주위 사람들의 조롱거리와 웃음거리로 만드십니다.

(시 44:14) 주님께서 우리를 여러 나라의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고, 여러 민족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시 44:15) 내가 받은 치욕이 온종일 나를 따라다니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조차 없습니다.

(시 44:16) 이것은 나를 조롱하는 자와 모독하는 자의 독한 욕설과 나의 원수와 복수자의 무서운 눈길 때문입니다.

(시 44:17) 우리는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시 44:18)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배반한 적이 없고, 우리의 발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난 적도 없습니다.

(시 44:19)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승냥이의 소굴에다 밀어 넣으시고, 깊고 깊은 어둠으로 덮으셨습니다.

(시 44: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거나, 우리의 두 손을 다른 신을 향하여 펴 들고서 기도를 드렸다면,

(시 44:21) 마음의 비밀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이런 일을 찾아내지 못하셨겠습니까?

(시 44:22) 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잡아먹힐 양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시 44:23) 주님, 깨어나십시오. 어찌하여 주무시고 계십니까? 깨어나셔서, 영원히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시 44:24)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십니까? 우리가 고난과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어찌하여 잊으십니까?

(시 44:25) 아, 우리는 흙 속에 파묻혀 있고, 우리의 몸은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시 44:26) 일어나십시오. 우리를 어서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어제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시편 44편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가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 몸에 그려내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어제 설교 할 땐 관념이고 추상으로 설교하고 귀로만 들었는데 오늘은 그 말씀이 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감회가 이상합니다.

 

설교내용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주님만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이 아니라 고난이었습니다.

 

“주께서” 적에게 마음껏 약탈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헐값으로 파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조롱거리로 만드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포장마차 안주거리처럼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치욕이 온 종일 따라 다니게 하셔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조롱하고 모독하는 자들의 독한 욕설과 무서운 눈길들이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말씀만 전하였는데!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이러한 고난 속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잡아먹힐 양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은 모두가 주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이여! 깨어나십시오!

 

어찌하여 주무시고 계십니까?

눈이 있으면 이 광경을 좀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좀 보시란 말입니다!

 

깨어나셔서 영원히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십니까?

 

우리가 고난과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어찌하여 잊으십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죽음으로 내동댕이치셨습니까!

일어나십시오!

일어나 우리를 어서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 운명을 그대로 옴팡 뒤집어쓰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밀려들어가 혼비백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응답이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대신 살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면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 속에 그 해답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아! 그래서 시편 44편에서 “주께서” 이 모든 일을 만드셨구나!

 

우리가 주를 사랑 할수록 좋은 환경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죽임 당하고 고난당하는 환경 속으로 밀쳐짐을 당합니다.

복음 전할수록 박수를 쳐 주는 것이 아니고 돌이 날아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가 원치않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가 매를 맞으셨으므로 우리도 매를 맞게 되고!

주께서 쫓겨남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도 쫓겨남을 당하게 되고!

주께서 욕을 받으셨으므로 우리도 욕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원망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왜? 나로 하여금 이처럼 고난 가운데로 밀어 넣으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르짖습니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도바울이 부르짖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하여 우리를 도살할 양처럼 여기심을 받게 하나이까!

 

그런데 오늘은 정낙원이가 부르짖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로 수욕을 당케 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야! 그거 아무나 받는 것 아니다!

너 복권 당첨 되었다!

무슨 복권이 이렇습니까!

 

하늘나라 복권은 원래 그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스데반 집사가 돌을 맞아 가면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니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정낙원이가 돌에 맞으면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리하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난 이것이 그냥 성경에서만 읽혀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실상으로 덮쳐 옵니다.

 

아! 이래서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우리 삶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구나!

그래서 성도는 말씀이 삶으로 그려지게 되는구나!

우리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려내는 도화지가 맞구나!

 

어저께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 버려짐의 설교를 하게 하셨구나!

설교하면서 은혜를 주시더니만 하루가 채 자니기도 전에 그 설교나 나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와 내 몸에 새기게 하시는구나!

 

주여! 시편 기자가 그렇게 “주께서” “주께서” 하시던 그 “주께서” 오늘은 이 몸에 주의 흔적을 그려내시니 감사합니다.

그 동안 나로 죄인의 괴수임을 들추어내시고 용서를 베풀어 주시더니만

이렇게 용서를 토하여 내게 하시는군요.

주께 얻어먹었던 것을 고스란히 토하여 내게 하시는군요!

 

하나님! 참으로 무섭습니다.

어찌 손해를 안 보려고 하십니까!

꼭 이렇게까지 주신 용서를 토하여 내게 하셔야지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원수를 용서한 것이 어떤 것인지 꼭 이렇게 맛을 보여야 합니까!

 

참 쓴잔입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어찌 이리 감사가 나오는지요.

어째서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불쌍한 생각이 듭니까!

 

이건 분명히 제 마음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왠? 조화인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관념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이거 장난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고난도 실제이고 용서도 실제입니다.

 

난 용서가 예수님이나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이나 스데반 집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어째 나도 되네요.

내 스스로도 놀랍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왜? 저들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밉지가 않습니까!

허~ 허~ 하는 쓴 웃음만 나옵니까!

 

이건 분명히 내가 아닙니다.

내 속에 주님이 나를 붙잡고 계심입니다.

그러지 않고선 이처럼 마음이 무덤덤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 겨울에 강원도로 처남 결혼식을 갔습니다.

길이 얼어서 차가 엉금엉금 기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자 차가 한 바퀴 돌아서 혼비백산 했습니다.

 

처가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초등학생인 처 조카 녀석이 믿기지 않는지 고모부 설마!

그럽니다.

그 이튿날 결혼식장으로 간다고 차를 탔습니다.

 

처 조카 녀석이 나도 고모부 차 탈래 그러면서 타는 겁니다.

한 참을 가다가 약간 내리막 길 모랭이를 도는데 얼음이 얼어서 엉겁결에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러자 차가 한 바퀴 빙그레 돌아 버립니다.

 

이 때 처 조카 녀석이 하는 말!

어! 고모부 차 정말 도네!

진짜 도네!

 

오늘 제가 그러합니다.

어! 성경에 나와 있는 용서가 진짜 되네!

 

스데반 집사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한 말이 진짜 되네!

 

지금 제 안에서 그럽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어! 진짜 용서가 되네!

말씀이 진짜네!

 

지금 이 순간은 말씀이 나를 장악하여 나를 주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갑니다.

피 뚝 뚝 흘리는 주님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흘리신 피를 마시게 합니다.

그리곤 나도 너를 용서 했으니 너도 저들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이 일이 일장춘몽이 아니라 쭈욱!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내 잠을 깨우지 마소서!

이 감사가 지속되게 하소서!

 

주여! 낸 잔이 넘치나이다!

 

 

'신앙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담한 생각 (퍼온 글)   (0) 2011.07.02
나는 가수다! 나는 성도다!  (0) 2011.07.01
티끌로 돌아가라  (0) 2011.05.25
코람 데오!  (0) 2011.02.08
어떤 분의 상급론에 대한 질문과 답변  (0) 2011.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