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나는 가수다! 나는 성도다!

정낙원 2011. 7. 1. 01:13

나는 가수다! 나는 성도다!

 

 

주일 저녁이면 TV 앞에 나를 붙잡아 두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입니다.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은 7 명의 가수가 나와서 각자 기량으로 경연을 펼칩니다.

 

이들은 모두가 각 각의 장르별로 내로라 하는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장르별로 각각 음악이 갖는 특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연이기 때문에 부득불 청중 평가단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청중 평가단 또한 10대에서 50대까지 각 세대를 공정한 숫자로 평가를 하기 때문에 누가 더 감동을 주느냐에 따라 순위가 정해집니다.

물론 가창력이냐 감동이냐로 판단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7명의 가수가 각자 자기 식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는 다릅니다.


어떤 가수는 감정으로 노래하고,

어떤 가수는 기술로 노래합니다.

어떤 가수는 가슴으로 노래하고,

어떤 가수는 머리로 노래합니다.

 

감정으로 한다 또는 가슴으로 노래한다는 것은 그 노래 속에 그 사람의 혼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가슴으로 노래하는 것은 자신의 혼(魂)을 그 노래 속에 담아서 부르기 때문에 듣는 이에게 그 감정이 그대로 전이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합니다.

 

반면에 기술이나 머리로 노래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음정 박자 하나 틀리지 않고 교과서 식으로 노래를 하지만 그 속에 혼이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하는 노래는 테크닉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잘 하지만 그 속에 사연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없어요.

 

이런 노래는 그냥 노래로서 귀는 즐겁게 해 주지만 감동을 주지 못해요.

 

노래를 잘 하는 것과 감동을 주는 것은 다릅니다.

노래 잘하는 것은 기교이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가수와 청중 간의 감정 이입을 일으키는 생명의 교류이고 활동입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미어지고 숙연해 지고 눈물이 나는 겁니다. 

 

예전에 저희 교회에 연세가 많이 드신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계셨는데 이 분들이 저녁만 되면 교회에 오셔서 기도도 하시고 찬송도 부르시곤 했습니다.

전 서재에서 설교 준비를 하는데 이 분들이 방안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는데 어찌나 은혜가 되는지 몰라요.

곧 주님 품으로 가셔야 할 분들이 천국에 소망을 두고 부르는 찬송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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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광야에 찬 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선 너머 눈 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 갈 내 고향 하늘나라 

 

날 구원 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 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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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들이 이 찬송을 참 많이 불렀어요.

지금은 이미 주님 품으로 가신 분도 있습니다.

아마도 곧 주님께 가야 할 것을 알고 부르신 것 같아요.

 

그러니 그 찬송 소리가 제 마음을 그렇게 후벼 파는 겁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한 참을 듣다가 나도 따라 부르기도 했어요.

음정이나 박자 하나 맞는 것은 없지만 그 찬송 속에는 하나님과의 부대낌으로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알아진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이 묻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분들의 찬송 속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흠뻑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전 그 찬송을 들으면서 이건 찬송이 아니고 그 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마치 바울과 실라가 피 투성이가 된 채로 감옥에 갇혀서 부른 찬송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부른 찬송은 그냥 우리가 편안한 일상에서 부르는 그런 찬송이 아닙니다.

그 찬송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몸소 겪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토하여 내는 몸에 울림인 것입니다. 

 

알다시피 시편은 모두가 시(詩)이면서 노래입니다.

또한 기도에요.

다윗이 하나님께 토하여 낸 시편은 다윗과 같은 상황에 처하여야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요”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피할 바위시요”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 알아진 여호와입니다. 

 

다윗이 안 여호와는 책 속에서 알아진 그런 여호와가 아니란 말입니다.

삶 속에서 알아진 여호와에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함 가운데서 만난 여호와란 말입니다.

 

죽음 속에서 건져준 여호와이고!

쫓김 속에서 지켜준 여호와이고!

전쟁터에서 보호해주신 여호와이고!

삶에서 부대끼고 씨름하면서 알아진 여호와에요.

 

흔한 말로 편안하게 땅콩 까먹으면서 TV 보면서 안 여호와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윗이 말한 여호와는 내가 다윗과 같은 환경 속에 처하여 보아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다 그러합니다.

죄사함도!

은혜도!

긍휼도!

용서도! 그러합니다. 

 

내가 진정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심연 깊숙이 부터 깨달아지고 마음으로 느껴질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에 의미는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고 생명 그 자체가 됩니다.

내가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해 보아야 예수의 피로 주어진 의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 줄 알게 됩니다.

법을 모르면 은혜를 몰라요. 

 

내가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 돼지 쥐엄 열매를 먹어 보아야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 줄을 알게 됩니다.

맏아들처럼 집안에 있으면 아버지의 사랑을 몰라요.

안다고 하여도 지식으로 관념으로만 알아요.

그러니 아버지가 탕자인 동생을 용서하는 것을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자신이 탕자라는 것을 알아야 아버지의 용서가 어떤 것인 줄 알아요.

내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처럼 정죄 받아 죽어야 하는 자였는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용서는 그냥 글이 아니고 삶입니다. 

 

다윗은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다윗과 같은 다스림을 삶 속에서 요구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윗과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고 다윗이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게 하세요.

그럴 때 시편이 다윗의 시편이 아니고 나의 시편이고 나의 노래이고 나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려 왔는지 회상하면서 그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노래를 지어서 부르게 하였습니다.

실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 조상들로부터 이야기로 들어서 안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의 의미는 천지 차이입니다. 

 

노래는 사연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안에 있는 한을 노래로 감정으로 표현을 해 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당한 부침 속에서 얻어진 사연들을 음률에 담아서 표현을 해 내는 것이 노래에요. 

 

과거 “서편제” 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아직도 나를 감동으로 사로잡습니다.

소리꾼인 아버지 유봉은 신식문물인 양악의 유입으로 사라져 가는 우리의 소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유봉은 자신이 지키지 못한 우리의 소리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송화라는 딸에게 전수를 시키고자 우리의 소리에 모티브가 되는 한을 심어 줍니다.

그리하여 딸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소리는 한으로 뱉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딸인 송화에게 눈을 멀게 하여서 그 한을 심어 주고자 한 것입니다. 

 

아버지 유봉은 세상을 떠나고 동생마저 소리가 싫다고 떠난 마담에 송화는 홀로 장님으로 살아가면서 한이 켜켜이 쌓이고 드디어 득음을 하게 되고 그 한을 소리로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송화가 토해내는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이고 자기 사연입니다.

그러므로 송화의 마음에서 울려나는 소리 한 마디 한 마디가 토해질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 에서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가 노래를 할 땐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립니다.

모두가 눈시울을 붉히고 노래가 끝나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이는 동료 가수들도 동일한 감정에 빠져서 경청했어요. 

 

다른 가수들이 노래를 할 땐 안 그런데 왜? 임재범씨가 노래를 할 땐 그럴까요?

이는 임재범씨는 노래 속에 자기의 사연을 토해 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을 소리에 담아서 뿜어냈기 때문입니다.

 

임재범씨가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은 그 노래 속에서 그 사람의 사연을 읽어냅니다.

듣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는 임재범이라는 가수의 한에 자기의 한을 담아서 듣습니다.

 

그러므로 임재범씨의 한이 아니라 우리의 한이 하나가 되어 운우지정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연과 사연이 노래로서 맞닥뜨려질 때 가슴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걸 공감이라고 합니다. 

 

임재범씨가 부른 노래는 기계적으로 평가하면 불합격이에요.

가사도 빼먹고,

음정도 틀리고,

박자도 놓치고 해요.

 

그런데도 그걸 시비하지 않습니다.

이는 노래로 듣지 않고 사연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온 세월 속엔 수많은 말 못할 한이 있어요.

 

본인 스스로 토설했어요.

외로움이 삶이었고!

그 외로움이 노래로서 사연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 아픈 사연이 노래 속에 절절히 사연이 되어 묻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애절한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나는 가수다” 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과 연계시켜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과의 부대낌 속에서 알아진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십자가를 말하진 못하지만 그 십자가 속에 담겨진 의미로 살아낸 삶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은 내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걸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찬미란? 아름다움을 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삶으로 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삶으로 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삶으로 기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의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구원 얻은 무리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하고 있어요.

 

왜? 구원을 했느냐?

어린 양을 찬미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럼 찬미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죄 사함 받은 은혜가 있어야 하고!

용서 받은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고 실제여야 합니다. 

 

알다시피 은혜란 내가 만들고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겁니다.

마치 다메섹에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가서 용서하시고 긍휼을 입혀서 율법 아래서 빼내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가운데서 빼내주신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받은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입은 성도는 자기 삶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토하여 내게 됩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한다고 합니다.

 

영광이란?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용서를 베풉니다.

긍휼을 입혀 줍니다.

자비를 베풉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용서를 입고 긍휼을 입은 성도는 그것들이 삶 속에서 하나 둘씩 뱉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뱉어지게 하세요.

이건 마치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가지가 받아서 뿜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각양의 은사들을 주어서 토하여 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용서를 받고 긍휼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을 토하여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원수들을 용서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도 찬송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 받은 것도 감사한데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용당하고 있음에 감사하니 아픔 속에서도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찬미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 받은 것을 알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뱉어내는 용서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의 열매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광인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이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합니다.

누가 하느냐 하면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이 해요.

 

계 7:9-17=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보세요.

천국에 찬송이 울려 퍼지지요.

누가 찬송을 합니까?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긴 자들이 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피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벗어 던지면서 찬미하는 것입니다

왜?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벗어 던집니까? 

 

이는 이 면류관은 자기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이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하였기 때문에 내가 쓸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의 피로 용서받고 구원 얻은 자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 세상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자기 안에 천국이 임한 성도는 이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 받은 용서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남을 이해하고 보듬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고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깁니다.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날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아픔 속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비워질 때 이러한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날마다 우리를 간섭하시면 우리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린양에게 찬미하는 천국 백성들을 일컬어 눈물 골짜기로 통행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천국은 눈물 가운데서 맛봅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남이 살아나고!

내가 종이 되어 섬긴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왜? 눈물 골짜기로 통행한다고 합니까?

이는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왜? 고난 입니까?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한 마디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주께서 나를 장악하고 나를 다스릴 때마다 눈물이 뚝 뚝 떨어집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자기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내 의가 부인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채우는 것이고!

내 생명은 부인되고 예수의 생명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기가 죽고 예수로 산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12제자들도 예수로 살다가 천국에 갔습니다.

바울도 예수로 살다가 갔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로 살다가 갔습니다.

구약에 성도들도 예수로 살다가 갔습니다.

지금도 이런 예수로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삶으로 어린 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미는 그냥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버림 당하고 고난당한 사람들이 한단 말입니다.

 

십자가 도를 주술처럼 외우는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도로 사는 성도라야 찬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어린 양의 찬미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당한 성도들이 부르는 것이란 말입니다. 

 

서편제의 송화처럼 소리를 위해서 자기 인생이 차압당한 사람만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찬양을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고난이라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케 하여서 그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한을 심어 놓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이란? 예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어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한을 심어 놓았습니다.

 

이름하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원통한 마음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애끓는 예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토한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는 그 마음입니다.

 

용서라는 한!

은혜라는 한!

긍휼이라는 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심어 놓은 한은 전부가 빚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받지 못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준 것을 회수해 가십니다.

하나 둘 찾아 가십니다.

 

용서 받았으니 용서하라고 합니다.

은혜 받았으니 은혜를 토하여 내라고 합니다.

긍휼을 입었으니 긍휼을 베풀라고 합니다.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라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간섭하십니다. 

 

주께서 간섭하실 때마다 우리 인생은 아파집니다.

이럴 때 마다 성도의 몸에선 주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흔적들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의 흔적들이 한 둘 새겨집니다.

이 흔적이 바로 찬송으로 나타납니다.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은 아무나에게 허락이 된 것이 아니에요.

오직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허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선택을 입은 성도만이 찬미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찬미는 누가 하는가 하면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죽임 당한 사람들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아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죄사함이란 그저 지식이에요.

자신의 무능함과 자기 안에 선이 없고 의가 없음을 알고 나는 진짜 나는 사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는 다는 것은 지식입니다.

 

지식은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생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냄새가 안 납니다. 

 

말하거나 아는 것은 맞아요.

분명히 십자가에요.

복음이에요.

그러나 죽었어요.

전혀 힘을 쓰지 못해요. 

 

그러니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나 도리어 나타나는 모습은 반 십자가 정신이에요. 

이건 마치 “나는 가수다” 라는 경연에 나온 가수들 중에서 기계적으로 노래하는 가수와 같아요.

 

노래를 잘해요.

흠 잡을 때가 없어요.

그런데 그 노래는 귀만 즐겁게 하지 마음을 울리지는 못해요.

이건 그냥 노래에요. 

 

이걸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해요.

그 내용을 들어다 보면 하나 틀리지 않아요.

다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묻어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 나오지 않아요.

예수의 생명이 없어요.

긍휼이 없어요.

용서가 없어요. 

 

천사의 말을 하고!

십자가의 비밀을 말하고!

엄청난 것을 깨달은 것은 맞는데 그 속에 사랑이 없으니 울리는 꽹과리처럼 듣기 싫어요.

답답하고 건조해요.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주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 못해요.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는데 살벌해요.

말은 다 맞는데 듣기 싫어요.

이상하게 들으면 역겨움을 불러 일으켜요.

왠지 가까이 하기 싫어요.

말이나 글에서 살기(殺氣)가 느껴져요. 

 

이는 모두가 그 사람이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사연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부하고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좋은 것으로 생명의 역사를 불러일으키지를 못하고 도리어 죽이는 것입니다.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불쾌함만 주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자람이 있어요.

공장에서 완성품으로 찍어 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자람은 하루 하루 아픔입니다.

 

수 많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시험과 고난이라는 비바람 속에서 자라갑니다.

자란 것만큼 부모님의 희생이 그 속에 알알이 맺혀 있어요. 

 

신앙도 성숙해 갈수록 하나님의 그 은혜에 깊이를 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시달리고 부대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아갑니다.

사귐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용서와 은혜를 많이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산전수전을 겪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몸에 아로새겨져 가는 것입니다.

보석처럼 깎이고 잘라내지는 아픔이 있는 겁니다.

 

옛 사람의 것은 죽임 당하고 새 사람의 것으로 채움을 입어가는 것입니다.

내 것은 빼앗김 당하고 예수님 것으로 채움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장가 가지 않은 사람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투를 틀지 못하게 했어요.

상투를 튼다는 것은 어른이란 말입니다.

어른이란? 자식을 낳고 키워보면서 부모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보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아이는 스스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절대적인 희생으로 자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을 낳고 키워보아야 철이 든다고 하는 겁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알고 생명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자람이란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가가지 않으면 이 아픔을 몰라요.

자식을 키우는 아픔을 모르고서는 부모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안다고 하여도 그건 지식이에요.

지식으로는 부모의 마음을 다 담아 낼 수가 없어요.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는 장성한 분량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시험과 환란과 아픔을 이겨낸 과정 없이 자라온 신앙과 하나님과의 수많은 부대낌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 온 성도는 달라요.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는 것과 한 번도 하나님과 씨름을 해 본 적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 지식으로 배워서 알아진 야곱의 일생을 가지고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달라요. 

 

젊은 사람이 주일 학생을 가르치는 것과 연세가 지긋하신 권사님이 가르치는 것은 달라요.

젊은 사람에겐 인생의 희노애락이 없지만 권사님에겐 있어요.

젊은 사람은 가르침이 지식이고 관념이지만 권사님은 실제이고 삶이에요. 

 

새 파랗게 젊은 사람이 위로하는 것과 나이가 든 권사님이나 장로님이 위로하는 것은 달라요.

새 파랗게 젊은 사람이 위로하는 것은 기계적이에요.

내용을 보면 다 복음적이에요.

하지만 고생을 모르고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의 위로는 수사적이지 위로가 안 되어요. 

 

그러나 산전수전을 겪어 오면서 주님과의 부대끼면서 살아오신 연륜이 있는 집사님이나 권사님이나 장로님이 하는 위로는 사랑이 있어요.

특별한 말을 하지 않고 손만 꼭 잡고!

등을 토닥이면서 집사님 힘내! 라고 하는 것인데도 위로가 되어요.

마음에 쉼을 얻어요.

왜? 그렇습니까? 

 

위로란? 위로를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자기가 용서를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네가 먼저 주님께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 받은 자가 아니면 내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나오지 않아요.

내 것으로 하면 반드시 그 의를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 용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남을 용서하면 안 되어요.

그건 나중에 그 사람에게 빚 갚음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기계적인 용서만 해요.

기계적인 용서 속에는 사랑이 없어요.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요.

은혜가 묻어 나오지 않아요.

긍휼이 없어요. 

 

그러나 자기가 진짜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주께 받은 용서를 토해내게 됩니다.

이는 그 속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고,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뱉어내는 것은 주께 받은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용서 받은 성도에게선 용서가 나오고 용서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교인에게선 정죄와 심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뱉어지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열매에요.

패악이 나오고 강포가 나오고 무례함이 나오면 그 속에 마귀가 있고!

긍휼이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용서가 나오면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뱉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오고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온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죄인의 아픔을 체휼키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죄인의 아픔을 몸소 다 겪으셨기 때문에 죄인의 구원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지 않고 구원자가 되셨으면 기계적인 구원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이 없이 구원주가 되셨으면 죄인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진심으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될 수가 없어요.

 

죄인을 위한 대언자가 되려면 죄인의 아픔을 몸소 겪어 보아야 해요.

주님은 이 아픔을 알기 위해서 육체로 오셨고 죽기까지 복종을 하신 겁니다.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 이야기입니다.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둘 다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아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죽은 자기 아이와 다른 여인이 낳은 아이와 바꿔치기 합니다.

살아 있는 아이의 어미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 아이가 바꿔치기 당한 것을 알고 왕에게 탄원합니다.

 

왕이 재판을 합니다.

 

두 여인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왕이 그 아이를 죽여서 반으로 나누라고 합니다.

이에 그 아이를 바꿔치기 한 여인은 내 아이도 안 될 바엔 그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친 어미는 아이를 죽이면 안 되다고 하면서 내 아이가 아니라도 좋으니 이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에 솔로몬이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고 하는 여인이 가짜 어미란 것을 알고 그 아이를 친 어미에게 주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린 내 것과 남의 것의 차이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이는 친 엄마는 니 것이냐 내 것이냐가 중요치 않고 자식의 생명이 중요해요.

그러니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친 엄마가 아닌 여자는 니 것이냐 내 것이냐가 중요하지 아이의 생명을 중요치 않아요

그러니 아이를 반으로 쪼개라고 하는 겁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진짜 용서 받은 사람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아요.

그 사람의 영혼을 먼저 생각해요.

내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 받은 은혜가 중요해요.

그러니 참아주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용서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당하더라도 용서를 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용서를 아는 사람은 용서가 나오지 않고 정죄가 나옵니다.

아이를 훔친 어미처럼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죽이라고 해요. 

 

진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성도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않아요.

받은 용서가 있기 때문에 나 살고 너 죽으라고 하지 않아요.

차라리 당해주고 빼앗기고 매를 맞아요.

손해를 보아요. 

 

그러나 지식으로 예수의 살과 피를 연구한 사람은 받은 용서가 없기 때문에 나 살고 너 죽으라고 해요.

남을 죽여서라도 내가 살아야 해요.

이는 모두가 지식으로 알아진 십자가이기 때문에 신앙이 관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십자가를 말하는데 삶으로는 반(反) 십자가 정신의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으로 알아진 십자가 도와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십자가 도는 나타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게 나타납니다.

은사로 알아진 복음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만!

지식으로 알이진 복음은 죽음의 역사를 일으켜요. 

 

그만큼 삶 속에서 부대끼면서 알아진 하나님을 말하는 것과 지식으로 알아진 하나님은 달라요.

진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처절하게 깨어지고 넘어지고 버려짐을 당하여서 알아진 십자가는 그 자체가 실제이고 생명이에요. 

 

이런 사람은 십자가 도를 아주 무겁게 받아요.

예수님의 피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가벼이 여길 수가 없어요.

말씀 하나 하나가 무거워요.

그냥 흘러 들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신학과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세상 학문으로 연구해서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짜깁기하여서 알아진 십자가는 달라요.

이렇게 알아진 것은 십자가 도를 아주 가볍게 여겨요.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용서를 가볍게 생각하고!

은혜를 가볍게 생각해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겨요. 

 

죄에 대한 아픔이나 애통함이 없어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몰라요.

은혜에 고마움과 긍휼에 대한 간절함이 없어요.

 

이는 그가 아는 죄니 은혜니 생명은 지식이고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로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음을 안다는 그것이 힘이 되어 사람을 해치는 무기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일으키고 살려야 하는데 도리어 복음으로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있어요. 

 

바울은 복음을 모르는 유대인들을 공격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어요.

차라리 내가 지옥가고 말테니 자기 동족들을 살려달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자신도 그들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빼내 주셨듯이 자기 동족들도 빼내 주시기를 기도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입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얻고자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하였어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어요.

업신여기지도 않았어요.

나 복음 안다고 잘난 척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면 다 잘라내요.

남을 무시하고 깔보고 업신여겨요.

잘난 척해요. 

 

그러니 얼마나 바울과 다릅니까.

바울과 다른 성령을 받은 자들이에요.

이들이 말하는 십자가 도는 바울과 다른 십자가 도에요. 

 

바울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안 십자가 도이지만 이들은 연구하고 알아낸 예수의 살과 피에요.

그러니 아무리 예수의 피를 말해도 그 피가 그들 속에 스며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는 짓들이 악귀들이 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복음으로 나를 치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하나님의 은사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 복음 안다! 라고 나대지 못해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은사로 복음을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반드시 그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합니다.

힘이 되니 남을 무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 복음적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안다는 것만 있지 복음으로 살지 않고 있어요.

복음으로 살아 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달라요.

복음으로 살면 날마다 죽어요. 

 

복음 전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맨 날 복음 전한다고만 하였지 정작 본인은 그 복음 속에 담겨진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용서하심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가난한 겁니다.

가슴이 냉골인 겁니다.

 

혼자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속은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는 방구들처럼 싸늘해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엔 가련하고 곤고하고 발가벗고 눈 멀고 불쌍해요. 

 

복음 안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니 항상 경쟁하듯이 쫓기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측은해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가는 것을 무슨 수학 공식 하나 하나 외우는 것으로 생각해요.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이고 능력인 줄 알아요.

그러나 십자가 도는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론으로 발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그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부대끼면서 날마다 자기가 그 말씀 앞에서 부서지고 깨어지고 부인당하여 가는 삶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이 무가치함을 알고 다 내어 놓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 안다는 것 조차도 자기 의라는 것을 깨닫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내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죄라는 것을 알고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잘 잘못은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쓰레기임을 알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나 복음 안다 라고 하는 것도 버리세요.

나 복음 전한다는 것도 버리세요.

 

그걸 붙잡고 있으니 복음 안다는 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잖아요.

차라리 모르면 가만히 있을 터인데 어쭙잖게 안다고 하니 남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면 반드시 그 반응을 기다립니다.

반응을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한 설교에 가치를 챙기겠다는 심보입니다.

나 이만큼 했잖아요! 라고 자랑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설교를 가지고서 내 의(義)를 쌓고자 하는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성령이 여지없이 이것을 죄라고 고발합니다. 

그럼 전 주여! 또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복음을 내 것으로 챙기고자 하였군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였군요! 라고 회개 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처럼 그 무엇을 하든지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여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하여도 늘 죄가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늘 이 죄를 고발합니다.

그러니 우린 늘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복이라고 합니다. 

 

제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진짜 죄인 중에 괴수임을 뼈저리게 인식하세요.

그리하여 너도 나도 모두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음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참아주고!

서로 감싸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 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예수님 피로 용서 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잘난 척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복음 안다고 하여도 그 은혜를 하나님이 거두어 가면 내일 우린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내가 지금 복음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 모른다고 무시하는 그 사람에게도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복음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린 다만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처럼 조금 일찍 부르심을 입은 것 뿐입니다.

잠시 후에 또 하나님이 우리처럼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장터네 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포도원의 품꾼들로 부르실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포도원에 들어 왔다고 까불면 안 되어요.

먼저 복음 안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나대면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간에 있는 스님에게도 은혜를 입혀서 복음을 듣게 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니 스님이라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되어요.

그 스님도 잠정적으로 우리의 한 형제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정낙원 목사는 스님도 구원 받는다고 하더라고 하지 말고,,,,

자기 머리 나쁜 것을 탓하지 않고 꼭 남의 말을 트집 잡고자 한다니까요. 

 

내가 지금 안다고 하는 그 복음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말이에요.

그래야 모든 사람에게 복음에 빚진 자로서 살아갈 수가 있어집니다.

내가 용서 받았음을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실제 마음으로 인식되어져야 합니다. 

 

좀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름을 얻으세요.

배가 불러야 관대함이 나옵니다.

배고프면 짜증이 나고 괜히 남을 물어뜯고 싶어지고 싸우고 싶어져요.

남의 집에 불을 지르고 싶어져요.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괜히 시기가 나고 배가 아파요.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하나님 나라는 사자와 염소가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들과 논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은혜에 배부름을 얻어 보세요.

여러분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요.

그럼 원수가 사라져요.

미움이 사라져요.

다 이해가 된단 말입니다. 

 

좀 이런 너그러움을 가지세요.

십자가 도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려고만 하지 말고 좀 잡수세요.

잡숩고 배부름을 얻어서 좀 넉넉해지세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왜? 그리 쫓깁니까?

왜? 그리 들개 같이 난폭해지고 사납습니까?

제 눈엔 왜? 그리 불쌍하고 가련해 보입니까.

참 안쓰러워요. 

 

바울 보세요.

얼마나 자유 합니까.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겐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대하고 하잖아요.

얼마나 자신 만만하고 여유롭습니까. 

 

주님 만났습니까?

그럼 뭐가 그리 걱정입니까.

내가 주님 알고 주님이 날 알면 그것으로 땡이에요.

그게 장땡이에요.

 

그럼 누가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마세요.

누가 욕하더라도 그냥 씨익 웃으세요.

 

이단이라고 하든지!

마귀라고 하든지!

성령을 못 받았다고 하든지 개의치 마세요.

 

아! 그러세요 라고 하세요.

어차피 그 사람들이 나를 구원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성령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니들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러세요.

그럼 자기가 미쳐서 나가 떨어져요. 

 

로마의 네로 황제가 왜? 미친 줄 아세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도 이 사람들은 그냥 실실 웃는 겁니다.

때리면 아프다고 살려 달라고 해야 때리는 사람이 재미가 있고 자존심이 사는데

이 예수쟁이들은 죽여도 찬송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돌아버리는 겁니다. 

 

성도들이 왜? 네로 황제에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는 자기들이 만난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네로에게 살려 달라고 할 이유가 없지요.

죽어 가면서 에휴~ 저 바보! 그랬다니까요.

 

그러니 네로가 혼자 미쳐서 입에 개 거품 물고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친 겁니다. 

지금도 네로 황제처럼 미쳐서 날뛰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모두가 배가 고파서 그래요.

불안해서 그래요.

불안함이 남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남을 물어뜯는 겁니다. 

 

자기가 만난 주님이 있나요!

확실한가요!

용서 받았나요!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신가요!

믿어지세요. 

 

그럼 좀 넉넉하게 사세요.

관대하세요!

용서 받았잖아요!

주님 만났잖아요. 

 

뭐가 문제인가요!

뭐가 불안한가요!

주님 만났다면서요. 

 

그럼 주님 만나서 용서 받은 자로서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고!

누가 허물이 있어도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애통해 하는 모습으로 사세요.

이게 예수를 만난 사람은 쉬운데 멀찍이 구경한 사람은 이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만 뜻하지 않는 사건들을 일으켜서 흔들기 때문입니다.

흔들어서 우리 안에 예수가 있는지 없는지 확증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흔들어서 욥처럼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손으로 만진바 되고 눈으로 본 바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흔들 때마다 힘들고 아파요.

하지만 아픈 만큼 단단해져 갑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리 단순치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아는 것만큼 자기의 낮아짐과 버려짐도 커지게 되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그런데 아픈 만큼 내성이 생겨요.

한마디로 맺집이 생긴단 말입니다.

옛날엔 사소한 것에도 아! 가~가~가~ 했는데 이젠 자꾸만 포기하게 되어요.

 

옛날엔 내 주장이 옳다고 침 튀겨가면서 열 내고 싸웠는데 이젠 흥미가 없어요.

싸워서 이겨 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부대끼다 보면 자꾸만 포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과거엔 누가 복음 모르면 그것이 마치 내 책임 인냥 나댔는데 이젠 그건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자꾸만 주님께 맡겨 버리게 되어요.

자식들도 맡기고!

교인들도 맡기고!

맡기게 되어요.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일하던 “나” 라는 자리에서 “나”를 밀어내고 “주님”을 주인으로 앉히게 된단 말입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게 된단 말입니다.

하루 하루 하나님께 용서 받은 사연이 많은 사람으로 변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재범씨가 부르는 노래처럼 사연이 묻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나 이명박 정권을 탄핵하자고 민심이 들풀처럼 일어난 촛불 집회 때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초등학생들을 선동하여 이명박 대통령을 조롱하게 하였지요.

명바기니!

쥐바기니! 하면서 말이에요. 

 

연세가 드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이명바기가 어떻고 하는 것과 초등학생이 말하는 이명바기는 달라요.

말이라는 어휘는 같을지 몰라도 어른들이 말씀하는 것과 초등학생이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어른들의 말 속에는 인생이 묻어있지만 초등학생에겐 인생이 없어요.

초등학생은 아직 인생을 몰라요.

그런 아이들에게 지식으로 이명바기가 어떻고 저떻고 가르치면 그 아이들은 지식으로 알아진 것으로 술 취한 사람 칼 휘두르듯이 해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여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하나님과 부대낌이 없이 알아진 십자가는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되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십자가로 사람을 살려 내지 못하고 다 죽여요.

 

은사로 받아진 복음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잘난 척 나 복음 안다고 나댈 수가 없어요.

남을 정죄하지 못해요.

 

그러나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반드시 그 지식 값을 해요.

나 이만큼 아니 날 알아달라고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말은 맞는데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걸 일컬어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하지만 사랑이 없는 울리는 꽹과리 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는 가수다 에서 열창하는 가수들처럼 노래는 잘 하는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발 복음 안다고 주절거리지 말고 내가 지금 기계적으로 노래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복음을 품고서 소화하여 사연을 토해내고 감동을 주는지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 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 찬미가 어떤 찬미인지 확인해 보세요.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노래인지!

아니면 내 몸에 새겨진 십자가의 은혜로 풀어내는 감동인지! 

 

당신은 어떤 가수인가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요? 

 

여러분 속에 진짜 예수님이 계십니까?

확인해 보세요.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내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그 마음으로 섬기세요.

 

복음 안다 모른다 따지지 말고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세요. 

 

주님께 사랑받고 용서 받은 자로서 말이에요.

예수의 감동을 주는 노래를 몸으로 부르세요.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곧 오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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