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티끌로 돌아가라

정낙원 2011. 5. 25. 01:59

티끌로 돌아가라 (시 90:1-17)

 

시 90:1-17=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 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 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오늘 본문에 보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산이 생기기 전에 주님이 계셨고,

땅이 생기기 전에 주님이 계셨고,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즉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는 계셨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라면 우린 원래 없던 자였습니다.

땅도 없었고!

산도 없었고!

세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손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주는 우리의 거처라고 합니다.

거처(居處)란? 거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럼 주는 우리의 거처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거할 집이란 말이 됩니다.

우린 하나님 안에서 잠시 이 세상으로 나온 자들입니다.

 

마치 돼지 삼형제가 소풍을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돼지 삼형제들처럼 우리도 원래 있던 하나님 안이라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들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러 간다고 하십니다.

처소(處所)란? 거처와 같은 말입니다.

처소가 준비되면 예수님이 다시 와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오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심이 믿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거처라 함은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유지하는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의 뜻이 하나님께서 살으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너 살아! 라고 하면 사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전에 하나님 말씀이 먼저입니다.

나는 말씀 안에 가두어져 있다가 말씀이 뱉어지니 나온 겁니다.

그래서 살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의 창조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씀하시니 만물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습니다.

말씀이 떨어지니 생명이 툭툭 터져 나옵니다.

툭툭 터져 나온 생명마다 말씀이라는 끈에 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도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바다에서 바람을 꾸짖자 바람이 알아듣고 종용해 집니다.

꾸짖는다는 것은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저가 뉘기에 바람도 순종하는고 라고 의아해 하였던 겁니다.

만물이 다 예수님 말씀에 묶여져 있는데 유독 인간만 떨어져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명령에 따라서 만물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물 속에 있는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살으라는 명령을 받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생명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산다는 것은 곧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과 떨어져 있는 자는 죽은 것입니다.

죽음이 뭐냐?

말씀이신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에 모시고 사는 자는 산 자이고 모시고 있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예수가 안에 없는 자는 끈 떨어진 연과 같습니다.

말씀에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는 끈 떨어진 연처럼 자기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이걸 바울은 방탕과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산 자가 누구냐?

말씀에 붙잡혀 사는 자입니다.

이를 두고 성도라고 합니다.

 

2주간 연속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지 지난 주간에는 누님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산에 장례를 치르기까지 바쁘고 고단했습니다.

 

살아 있을 땐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여도 귓등으로 들었어요.

물론 내가 예수를 믿으라고 해서 믿어지는 예수가 아니지만,,,

그래도 동생이 목사인지라 예수 믿고 천국 가야 하지 않느냐고 만나면 이야기 했습니다.

 

때론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누님 예수 안 믿고 죽으면 지옥 갑니다! 라고 하면서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그건 죽어 봐야 알지! 라고 롯에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응수했어요.

그러던 분이 죽었습니다.

이제 죽었으니 알겠지요.

알면 뭣합니까?

이미 버스는 지나갔는데,,,

부자처럼 물 한 모금이 아쉬운 곳에 갔습니다.

 

누님 장례를 치루고 주일을 지나자 이번에 장인어른이 돌아 가셨습니다.

지난 설 전날에 눈을 치우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뇌사 상태로 100일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상에 계실 땐 의식이 없어서 여러 번 가 뵈어도 가쁜 숨만 몰아쉬고 계시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울산에서 강릉으로 오르내리는 길이 만만치 않아서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였지만 갈 때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못네 아쉬워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장인어른은 예수는 안 믿고 교회는 다녔어요.

제 생각에 그런 것 같았어요.

평상시에 대화를 해 보면 예수를 몰라요.

그러니 만나도 복음적인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어요.

복음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또 말하기도 싫었구요.

그래서 찾아뵈면 그냥 인사나 하고 지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의식불명이 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자식 된 도리로서 또한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마치 직무를 유기한 것 같은 죄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겁니다.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그동안 제가 무심한 것 같아 죄송한 겁니다.

알아먹든 모르든 복음을 전할걸! 하는 생각이 들어 영 마음이 찜찜한 겁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행여라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겠는가!

아니면 주께서 저 마음속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의식이 있든 없든 복음을 한번 전하고픈 마음이 강하게 드는 겁니다.

 

아내에게 여보! 갑자기 아버님에게 복음 전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아버님 뵈러 가자고 하니 아내가 하는 말이 때마침 처남이 아버님을 병원에서 자신이 근무하는 요양원으로 옮긴다는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병원엔 6인실로서 복잡했는데 요양원엔 1인실이라서 잘 되었다 싶은 겁니다.

 

그래서 부랴 부랴 요양원으로 옮기는 날에 올라갔습니다.

울산에서 5시간을 차로 달려서 저녁 시간에 요양원에 가서 뵈니 처남이 하는 말이 이상하다는 거에요.

자기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고 하는 겁니다.

눈을 뜨라고 하면 눈을 뜨고 팔을 들라고 하면 팔을 든다는 거에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 정목사입니다.

절 알아보시면 눈을 좀 떠 보세요!

그러니 눈을 뜨는 겁니다.

이상해서 한 번 더 이번에 팔을 한번 들어 보세요!

그러니 팔을 조금 움직이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제 말이 들리면 눈을 끔쩍 해 보세요! 라고 하니 눈을 끔쩍하는 겁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그동안 식물인간으로 계시던 분인데!

너무 감사한 겁니다.

하나님이 복음 듣게 하시려고 그러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하시려고 내 마음에 갑자기 강하게 복음 전하라는 마음을 주어서 찾아뵈라고 하셨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 때다 싶어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눈을 깜빡이라고 하니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시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아~ 믿어지시는가 보다! 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겁니다.

 

약 30분간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지치는지 주무시는 겁니다.

처남이 앰뷸런스로 옮긴다고 피곤하니 주무시나 보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고 사무실에 가서 약 1시간 후에 나는 다시 울산으로 내려 와야 하기 때문에 내려오기 전에 다시 장인어른을 찾아가서 복음을 더 전하여야 하겠다고 찾아가서 흔들어 깨우면서 말을 해도 감감 무소식인 겁니다.

예전처럼 무의식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곤 전 울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쇼크가 와서 난리가 나서 다시 병원으로 후송을 하였다고 합니다.

요양원에서 하루도 계시지 못하고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리곤 원래의 모습으로 뇌사상태로 계시다가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한 주간 전에는 예수를 모르던 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엔 예수를 믿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신 누님의 시신을 염습 할 땐 보기가 싫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장인어른의 시신을 염습을 하는데 지켜보면서 어찌 그리 감사한지 모르겠더라고요.

진짜 고맙더라고요.

누님이나 장인어른이나 죽음이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한 분은 영벌에 한 분은 영생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곳으로 가셨습니다.

누님의 죽음은 안타까웠는데 장인어른의 죽음은 감사한 겁니다.

 

신앙적으로 상이한 두 분의 죽음 앞에 야곱과 에서가 생각이 나는 겁니다.

두 사람 다 언약을 위해서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가신 겁니다.

한 사람은 에서처럼 지음을 받았고 한 사람은 야곱처럼 지음을 받은 겁니다.

한 사람에겐 그토록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하여도 끝내 거절하셨지만 한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누님은 77세로 돌아가셨고 장인은 8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두 분 다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운으로 살다가 하나님이 기운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한 사람은 말씀이신 예수님이라는 끈에 묶여져 있었고 한 사람은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께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두 분다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분 다 각자 주어진 운명으로 사시다 가셨습니다.

이 두 분의 운명은 곧 온 세상에 속한 인간들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우린 다만 주인이 정해준 그 운명으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계셨습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보면 모든 만물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이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주께서 티끌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곤 영원이라는 묵시 앞에서 역사라는 한 찰나의 경점(更點) 같은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묵시라는 영원 앞에서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라는 것은 찰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져 사는 것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하루살이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곤 티끌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의 실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뭐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인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는 돌아가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야! 정낙원이 너 이제 사용 다 했어! 그러니 돌아가라고 한답니다.

 

이를 만물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주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주께로 나왔다가 다시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니 귀향(歸鄕)하는 것입니다.

내가 태초에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니 귀향인 겁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죽음이란 반갑고 기쁜 일입니다.

잠시 세상에 살다가 영원한 안식(安息)의 세계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마치 군인이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인간이 사는 것도 주님의 허락으로 살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단 하나도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께서 홍수에 엄몰 하듯이 인생을 쓸어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주의 분노 중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얼굴에 새겨서 보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인생살이 자체가 죄인에 대한 형벌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분노 중에 살다가 가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주의 분노 중에 살다가 가는 걸까요?

이는 인간의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 자체가 쓰임 당하기 위함입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듯이 우리도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티끌에서 토기로 빚어진 것 자체가 사용되어지는 것이므로 형벌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없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생겨났습니다.

생겨난 원인이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인간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이 뭔가 하면 자기백성들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죄 아래 갇혀서 신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 아래서 죽음에 가두어져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를 흘리고 건져 내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에 의해서 건짐 받은 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입으로 주라고 시인하고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시나리오에 의해서 인간은 죄 아래서 죽은 자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채로 출생을 하는 것이므로 형벌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살아가야하니 인간의 삶 자체가 형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오심을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 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이 되려면 인간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게 인간의 운명이에요.

 

그러므로 너는 티끌이니 돌아가라고 합니다.

모세는 지금 인간이란 애초부터 죽을 인생으로 창조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린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나니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서의 형벌을 받고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의 삶 자체가 수고하고 슬픈 일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아 이걸 제발 알라고 합니다.

그래야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57장에 보면 의인의 죽음은 침상에서 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침상에서 쉰다는 것은 안식한다는 말입니다.

수고와 슬픔을 다 벗고 평안하게 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슬픔 당한 것을 그치게 하려고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큰 위안이고 축복입니까!

 

그래서 모세는 이걸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인생이 칠 팔십년을 산다는 것이 수고하고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죽음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일평생 주님의 오심을 바라고 살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주님의 나심을 보고 이렇게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고 주여!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나이까 라고! 감사했습니다.

주여! 이제 나를 형벌의 삶에서 제대 시켜 주시니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수고하고 슬픈 세상에서 빼내시고 이제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해 주셔서 고맙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은 죽음에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이 사실을 알아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세의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돌아오소서!

종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인자를 쫓아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뭔 줄 아세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사는 겁니다.

마치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간청하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나는 개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게 해 주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 인줄 알고 한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음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개인 줄 알아야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아담이 범죄하자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신 겁니다.

네 근본이 티끌이라는 것을 알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냥 훅~ 하고 불면 날아갈 인생이에요.

개뿔도 아니에요.

그런데 우린 이 사실을 몰라요.

인간이 엄청난 존재인줄 착각하고 살아요.

 

티끌 주제에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면서 산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건방진 일입니까?

이 어리석음을 알라고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넌 티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보고 사도가 뭐라고 하던가요.

너희 인생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라고 하지요.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것이란 것을 잊지 마세요.

인간이란? 잠간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다가 폐기될 것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묵시에서 만물이라는 역사가 나왔습니다.

모든 만물은 언약의 도구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서 시작과 끝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수고하고 슬픔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는 영원이고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입니다.

묵시는 완료된 세계입니다.

완료란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쉼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으므로 늘 변합니다.

변한다는 것은 미완료란 말입니다.

미완료는 수고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완료는 안식이고 미완료는 수고와 슬픔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수고와 슬픔의 나라이고 묵시는 안식과 평강의 나라입니다.

우린 모두가 안식이라는 묵시에서 수고하고 슬픔이라는 역사로 보내심을 입었습니다.

역사로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수고이고 슬픔입니다.

 

역사가 묵시에서 나왔다 함은 뭔가 보여줄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이 마치면 다시 묵시로 돌아갑니다.

역사는 묵시를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묵시에 속한 일들을 다 보여주면 철거가 될 것들입니다.

 

역사라는 창조 자체가 언약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형별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모두가 형벌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에게 연합된 자로서 이 세상에 던져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였을 것이나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을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는 세상에서 미움 받을 팔자로 선택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난인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살아가는 모습을 도살할 양이라고 했습니다.

죽임 당하기로 작정 된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건 죽으라는 겁니다.

 

너희는 이리의 미끼로 보낸다는 말입니다.

이리를 예수 죽인 자로 만들기 위해서 성도를 미끼로 던져주신 겁니다.

가서 마귀에게 죽임 당함으로서 저 놈들의 악을 들추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는 날 만큼 수고와 슬픔이 많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복이고 그 보다도 태어나지 않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였던 겁니다.

 

우린 잠시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서입니다.

하늘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잠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돌아가셨듯이 우리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버릴 목숨이란? 역사에서 사는 목숨이고 얻을 목숨은 묵시에서 살아가야할 목숨입니다.

역사에 사는 날 동안 예수님은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몸을 벗고 묵시 안으로 돌아가신 주님은 안식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동일합니다.

우리도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림당합니다.

이를 바울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 입는다고 했습니다.

역사 속에 보내어진 육신이라는 몸은 죄인의 몸으로서 수고하고 슬픈 고단한 인생을 살다가 그 형벌이 마치면 하나님은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몸으로 입혀 주십니다.

 

마치 두꺼비에게 새 집 줄 테니 헌집을 달라고 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럽니다.

잠시 헌집에 살다가 오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수고와 슬픔을 벗어나 예수님 품에서 안식하는 바울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은 수고하고 슬픈 고단한 인생을 사는 바울이었습니다.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하늘에 장막을 입고 있는 바울입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바울은 육신의 장막을 입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 속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 삼층천에 있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린 그 영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자신의 죽음을 감사하셨듯이 우리도 죽음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몸에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였던 겁니다.

몸에 구속이란? 육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빨리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 몸에 죽음을 사모하는가요?

이는 모든 일을 마치고 수고와 슬픔을 그치고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흙에서 벗어나 하늘에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침상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은 수고한 자들에게 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환란 받는 우리에겐 안식으로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겐 천국이 유업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선 지옥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지극히 큰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고단한 것은 장차 안식이 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땅에 목숨은 빼앗아가고 하늘에 속한 목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땅에 소망은 점점 사라지고 하늘에 소망이 점점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외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에 것을 버리고 하늘에 것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이미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늘에 시민권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시니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합니다.

 

모세의 기도로 마칩니다.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 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한 날 수대로 우리가 화를 당한 년 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한마디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주께서 닦아줄 눈물이 있게 하시려고 눈물 골짜기로 통행케 하십니다.

안식을 위하여 수고하고 슬픈 고단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주여! 참으로 고단 합니다.

언제쯤 저에게 잠을 주시려나이까!

그날이 언제이니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