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월간 목회 2018년 2월 호에 실린 정낙원 목사님 글

정낙원 2018. 1. 27. 12:02


<지난 해 월간 목회로부터 원고 청탁이 있어서 보낸 글입니다.>


나의 목회 철학

 

 

나는 왜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는 일에 올인하게 되었는가

 

나의 목회 철학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지금 나는 창세전 언약을 증거 하는 일에 올인 하고 있다.

왜 내가 창세전 언약을 증거 하는 일에 올인 하게 되었는지,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간증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겁 없는 시작

 

목회 철학은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목사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12사도를 부르심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12사도를 부르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목사로 부름을 받고 한참을 지난 후에서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목회를 시작 할 때 목사의 임무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이게 아닌데” 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다.

열심은 특심한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앎이 부재 된 열심이었던 것이다.

내 안에 의문이 들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하였다.

이건 아닌데?

영적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다메섹 사건

 

그러던 중 책을 읽다가 엄청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의 내용은 모든 성경은 예수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들어오던 말이다.

예전에는 무덤덤하게 들었던 말이 그 날 따라서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율법 신앙이 완전히 깨어진 것과도 같았다.

그 일 후에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설교들을 모니터링을 해 보았다.

놀랍게도 내 설교 속에는 “예수그리스도”가 빠져 있었다.

 

문자 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아래서 알아진 하나님을 설교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들을 인과율로 가르쳤다.

 

소경이 인도자 노릇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니까 설교하는 것이 두려웠다.

양심상 더 이상 목사 노릇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비아 광야

 

목회를 몇 년 하지도 못하고 그만 두겠다는 말을 차마 가족들에게 할 수가 없었다.

합당한 핑계거리를 찾고자 단행한 것이 40일 금식기도이다.

말은 “진리를 찾아서” 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목사를 그만 두고자 하는 핑계거리를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금식 30일째 산 중턱 큰 바위 두 개가 서 있는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바위를 쳐다보고 있는데 이쪽 바위와 저쪽 바위에 개미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개미들에게는 두 바위는 마치 홍해 이쪽과 저쪽처럼 오고 갈 수가 없는 큰 구렁과도 같아 보였다.

 

심심해서 이쪽 개미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저쪽 바위로 옮겨 놓았다.

그 순간에 번개가 치듯이 구원의 비밀이 깨달아진 것이다.

아~! 구원은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이 옮겨 주는 것이구나!

행위가 아니고 은혜이구나!

 

구원은 예수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쪽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개미를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소경이 눈을 뜨다

 

깨달음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이 비밀을 증거 하여야 하는데 간단치가 않다.

내가 깨달은 진리를 성경 속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자면 모든 성경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로 설교가 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골방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였다.

 

언약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내 눈과 귀를 열어서 보여주시고 들려지게 해 주신 것이다.

성경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짝으로 되어 있는 언약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깨달아지고 나니까

성경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보여지는 것이다.

율법과 은혜, 구약과 신약이 짝이 되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음이 보여지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보이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깨달아지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지평을 열어 주셨다.

이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잉태하고 있는 영원한 언약인 창세전 언약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모든 성경이 창세전 언약을 말하고 있음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성경 속의 이야기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속의 구원 이야기가 나의 구원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이다.

 

 

◆ 성경 속에 내가 있다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고 나니까

구약 이스라엘 속에 내가 있음이 보이는 것이다.

예전에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엄청 욕을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틈만 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열을 올리면서 욕을 하였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 내가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한 자이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군중들 속에 내가 있고,

내가 바로 예수를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부인한 베드로인 것이다.

 

성경 속에 죄인이 나 라는 것으로 보이니까 언어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반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법이 작동하여서 죽여라 죽여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와 긍휼이 작동을 하여서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한다.

 

 

창세전 언약 그 찬란한 영원한 언약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그 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이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신 것이다.

 

창세전 언약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미리 정하심은 창세전이고,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장차이다.

 

이 모두 하나님이 혼자서 다 하시는 일이다.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걸 은혜라고 한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그 나라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세세토록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법에서 은혜로,,,

 

성경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먼저 나온 육적 장자들은 버림받고 나중에 나온 영적 장자들이 유업을 차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먼저이고,

신약의 교회가 나중이고,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나중이다.

 

죄 아래 가두는 율법을 먼저 주어지고,

죄에서 건져 주시는 은혜가 나중에 주어진다.

 

구원이 흑암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아지니까

성경의 난제들이 모두가 풀려지는 것이다.  


왜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의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왜 천지가 흑암과 혼돈과 공허한 모습으로 창조가 되었으며,

왜 아담이 뱀의 미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죄와 사망에 가두어지게 되었으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고,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지,

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야만 하는지, 그 의미가 실타래 풀리듯이 풀려지는 것이다.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고 순서였던 것이다.

창세전 언약 속에 율법과 은혜라는 두 언약이 쌍둥이처럼 들어 있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서로 짝이 되어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율법도 복음이었던 것이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이다

 

창세전 언약이 구약에서는 예표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언약을 세우신다.

언약의 내용은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어 고난을 당하다가 4대만에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언약이 버려짐과 되찾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버려짐은 애굽이라는 죄와 사망의 나라에 가두어짐이고,

되찾음은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에 의하여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은혜 아래로 옮겨주신다.

율법 아래서는 쉼이 없다.

율법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율법의 증서를 도말하시고 율법 아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던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는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백성들에게 하나님 의를 주시기 위함이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갈 의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발생이 된다.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한다.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나는 것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이러한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앞세우고 나오는 자들을 의롭다 여겨 주신다.

 

이는 창세전에 세운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맺은 쌍무 언약으로서 행위 언약이지만,

새 언약은 아버지와 그 아들 간에 맺은 은혜 언약이다.

 

옛 언약은 인간들이 지켜야하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이 지키신다.

새 언약 안에서는 하나님은 인간들과 상종하지 않고 예수님하고만 상대하신다.

옛 언약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고발하는 언약이다.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고,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인간의 의는 필요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래서 새 언약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한다.

 

 

목사가 증거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언약이다

 

이 시대 교회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에서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한다.

갖가지 이름의 신학과 각양의 인본주의 신앙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가리고 있다.

 

목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는 자로 세우심을 입은 자이다.

마귀는 어느 시대이고 어그러진 말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였다.

새 언약의 시대에도 옛 언약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미혹하고 있다.

 

죄란?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 옷을 벗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벗고 인간의 의로 치장하라고 미혹한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종말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긍하며 자고하고 있다.

인간의 의로 자족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경이고 가련하고 발가벗고 있다고 한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문 밖으로 쫓아내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 의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말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산을 옮길 만한 큰일을 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뿐이다.

 

성도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새 언약이다.

목사는 인간의 행위를 의로 삼는 것을 악이라고 고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혀 주어야 한다.

 

첫째도 창세전 언약이고,

둘째도 창세전 언약이고,

셋째도 창세전 언약이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오직 창세전 언약과 예수그리스도의 의만을 증거 해야 한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