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칼럼

죄의 종과 의에 종

정낙원 2008. 7. 24. 21:55

죄의 종과 의에 종

 

 

인간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맺어진 언약 안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들어가 있다.

 

고로 어떤 사람은 천국가기로 태어났고, 어떤 이는 지옥가기로 태어났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결정 하신다.

 

피조물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토기장이와 그릇으로 비유하였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정해진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에서는 사랑 받기로 태어났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태어났다.

 

사랑과 미움은 야곱과 에서의 행함과 상관없이 결정되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이렇게 고정된 운명을 종이라 한다.

 

종이란? 어디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란 뜻이다.

 

그럼 죄의 종은 죄에게 종속되어 있고, 의에 종은 의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이다.

 

즉 죄의 종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고, 의에 종은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다.

 

결국 죄의 종은 마귀에게 종속되었으므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행할 수 밖에 없고,

 

의에 종은 예수님에게 속해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게 된다.

 

종의 운명은 인간에 의해서 바꿔지지 않는다.

 

그런데 살아 있는 인간의 육신이라는 놈은 일평생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런 움직임을 행함이라고 한다.

 

죄의 종으로서의 움직이든지, 의에 종으로서 움직이게 된다.

 

종은 주인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은 죄를 이길 수가 없다.

 

죄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죄를 표현해 낸다.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이 마귀가 표현하고자 하는 삶을 그려낸다.

 

죄란? 죽음이다.

 

그렇다면 죄는 하나님의 생명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 관계 속에서는 비 윤리적, 비 도덕적, 파괴적이며, 방탕과 방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게 나타난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의 종이므로 예수님의 의를 드러나도록 사용하신다.

 

성령은 성도에게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과 긍휼을 토해 내도록 하신다.

 

난 이런 사랑을 받았고, 이런 용서를 받았고, 이런 은혜를 받았다고 토해내게 하신다.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려 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것을 자랑하다가 보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세상은 예수님의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의에 종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도망친 베드로를 찾아가서 원치 않는 십자가의 길로 이끄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원치 않는 길로 이끄신다.

 

지금도 성도들을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쓴 잔을 마시도록 끌고 다니신다.

 

멍에 맨 소처럼,,,,,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행하는 두마리의 암소처럼 울면서 끌려가서 결국엔 제물로 바쳐진다.

 

하지만 스스로 예수의 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확정적인 것이 된다.

 

잠시 고생스럽더라도 의에 종이므로 반드시 천국에 가니 안심하고 살라고 한다.

 

거지 나사로와 스데반 집사가 씨익 웃으면서 쪼깨 고생 좀 하다가 오소!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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