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비성경적인 성화주의

정낙원 2008. 10. 10. 23:45

비성경적인 성화주의

 

 

세상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으로 선과 악을 판단합니다.

윤리와 도덕은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합니다.

 

세상은 윤리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에겐 상을 주고 나쁜 사람에겐 벌을 줍니다.

특히 국가에서 고위 공직자들을 국회에서 청문회로 검증하는 것은 공직을 다스리는 힘이 윤리와 도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선 깨끗함과 청렴함이 힘이 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법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인간의 행동을 하나 하나 토막 내서 판단을 합니다.

술 먹고 주정하는 것과, 바람피우는 것은 죄의 경중이 다릅니다.

도적질하는 것하고, 사기 치는 일은 법정에선 형량이 다릅니다.

 

술 먹고 주정하고, 바람피우고, 도적질하고, 사기 치는 놈은 아주 나쁜 놈이고, 술 먹고, 도적질 하는 놈은 덜 나쁜 놈입니다.

이처럼 죄의 경중에 따라서 죄의 질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으로 판단이 되는 선과 악도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경중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죄라 할지라도 어린아이가 도적질 한 것과 어른이 도적질 한 것은 달리 판단합니다.

법 아래선 인간은 자연히 죄의 양과 질에 따라서 덜 나쁜 놈, 나쁜 놈, 아주 나쁜 놈으로 등급이 매겨지게 됩니다.


조금 나쁜 놈은 집행유예,

덜 나쁜 놈은 1년징역,

나쁜 놈은 10년징역,

아주 나쁜 놈은 사형을 시킵니다.

 

세상에선 종교를 떠나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는 사람은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교육은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완벽에 가까울수록 발언권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이 교회 안에서 진리처럼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믿음보다 인간의 행함으로 힘에 균형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성화의 수준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집니다.

 

보다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잣대가 교인들을 재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을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인들에게 세상에서 흠 없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빛과 소금의 삶이란?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인들이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설교를 통하여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 없는 모습으로 살라고 합니다.

성도답게 살라고 합니다.

성도다움을 깨끗한 삶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도 없는 듣도 보도 못한 요상한 성화론이라는 교리가 진리인냥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여서 인본주의 성화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화와 성화주의는 다릅니다.


성도로서 변회 된 삶은 당연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인 것입니다.

마치 산 나무가 끛을 피우듯이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자연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적인 것과 살아가는 삶에 지향성과 가치성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위적으로 훈련으로 강제하여서 만들어내는 성화주의는 비성경적입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성화는 반드시 우열과 서열화 되어서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성화된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마치 의로운 사람인냥 덜 의로운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에서 말하는 성화(聖化)란? 점진적으로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거룩(깨끗)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성화를 부르짖는 근거를 아래의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가 거룩하니 성도도 거룩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성도도 온전해져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으로 자라가라고 했으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들은 부족분을 채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은 덜 거룩하니 앞으로 더 거룩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덜 온전하니 열심히 해서 더 온전해지라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그리스도의 분량이 미달이니 더 노력해서 함량이 차도록 채워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실존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런 말씀들을 죄인들에게 하시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자요,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요,

돌을 던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목이 곧은 자라고 합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뱀 새끼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뱀들에게 너희는 나같이 거룩하고 온전하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이는 거룩하고 온전해 지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너희는 거룩과는 동떨어진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임을 알고도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 다른 의도가 있음을 감지하여야 합니다.

 

죄인에게 거룩하고 온전해 지라는 말은 마치 흑인에게 백인처럼 희어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흑인에게 백인처럼 희어지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말입니다.

이는 희어지라는 말이 아니고 넌 희어질 수 없는 흑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 흑인에게 백인처럼 희어지라고 했으니 희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얼굴, 내일은 목, 모래는 팔, 그 다음은 다리,,,,,,,

 

그래서 사람들은 분칠을 해서 점 점 더 희어지려고 경주하고 있습니다. 

천국엔 백인(의인)만 간다고 하니,

흑인(죄인)들이 백인이 되려고 분칠(성화)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성화라는 교리로 거룩해 지라고 하는 것은 흑인에게 분칠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어찌 하나님 말씀을 바로 지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웃지 못 할 일들이 지금 교회 안에서 교인들에게 가르쳐지고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성화론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가지고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거룩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라고 합니다. 

흑인(죄인)더러 백인(의인)이 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희어지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이스라엘에게 불가능한 것을 주문하는 것은 넌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말은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갈려고 하느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해지고, 온전해지고, 예수님처럼 자라가라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 둔 말씀이 아니라 너희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너희와 아버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행동 한 두가지를 뜯어 고친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흑인더러 백인 되리고 하지 않습니다.

흑인을 백인 앞에 세우는 것은 넌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은 넌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거룩해 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으로 대하십니다. 

옛 언약 하에선 죄인을 상대합니다.

옛 언약 하에선 죄인에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만약 하나님 명령대로 살지 못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온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을 살리고자 함이 아니라 죄로 이미 죽은 놈들에게 넌 죽어야 할 놈이라고 확인 사살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 주제도 모른채 거룩해지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선 예수님을 상대로 하십니다.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은 인간을 상종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 하고만 상대를 하십니다.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은 없습니다.

아예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거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온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겐 앞으로 점점 더 거룩해 지는 것이 없습니다. 

옛 언약에선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시지만,

새 언약에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대하십니다.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성도를 자기 치마폭에 감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눈엔 예수님만 보입니다.

 

예수 안은 무조건 거룩하고,

예수 밖은 무조건 부정합니다.

 

새 언약에선 “나” 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에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이 내 거룩이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선 예수님의 거룩을 단번에 입었으므로 점점 더 거룩해진다는 개념이 성립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거룩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거룩한 자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거룩한 자로 거듭난 자에겐 성화하여야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거룩은 주어지는 것이지 죄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거룩은 부족하여서 인간들이 더 보태어서 만들어낼 거룩이 아닙니다. 

백인으로 태어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백인이지 어느 부분은 검어서 분칠을 해서 하얗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화주의자들은 인간이 거룩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거룩해지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인간의 행실을 바르게 하라는 윤리 도덕을 말합니다.

언행심사를 반듯하게 하라고 합니다.

교회에 열심과 충성이 부족한 사람은 끌어 올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반성하기에 분주합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자기 행동을 달아보게 됩니다.


아! 오늘은 이 부분이 부족했구나!

내일은 더 열심히 보충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50% 거룩을 내일은 60%로 채워야겠습니다.

 

그래서 술을 먹던 사람은 술을 끊고,

사기 치던 사람은 정직하게 하고,

기도 안하던 사람은 기도를 하고,

예배를 빠지던 사람들은 예배에 충실하게 참석하고,

헌금 떼어 먹은 사람들은 이자까지 소급해서 드립니다.

 

자기 치장하기에 바쁘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시간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의인으로 나아가는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의인이라고 하면서도 점점 더 거룩해진다고 생각 합니다.

성화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의인으로서는 아직까지 미 완료입니다.

앞으로 성화로 이루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나쁜 언행심사를 바르게 고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 함은 인간에게선 죄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쉽게 말하면 개가 하는 짓은 모든게 개짓거리입니다.

개가 하는 일을 사람의 짓거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 짓거리와 인간 짓거리는 윤리 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누가 한 짓이냐로 판가름합니다.

죄인에게 성화하라는 것은 개 보고 사람 짓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개가 한 짓거리를 사람이 한 짓거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인간 자체가 죄인임에도 죄인에게서 거룩한 것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행위를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토막내서 판단합니다.

그래서 악한 것은 멀리하고 선한 것을 많이 하여 거룩해져 가라고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안되기 때문에 성령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면 거룩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비 도덕적이고 비 윤리적인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성화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헌 것을 고쳐서 새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성령은 죄 아래서 난 헌 몸을 십자가로 끌고가 폐기시켜 버립니다.

 

헌 것은 폐기처분하고 새 것으로 만듭니다. 

성도는 헌 것이 아니라 새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성화는 옛 언약에서는 가능합니다.

옛 사람에게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안에서 창조가 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새 언약으로 대합니다.

 

예수 안에서 창조가 된 새로운 피조물은 새 언약을 적용받습니다.

새 언약을 적용 받는 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취급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개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취급하십니다.

 

예수 안에서 취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행위가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이미 온전한 자입니다.

50%는 거룩하고, 50%는 비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거룩을 50% 받고 너머지 50%는 내가 채워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100% 거룩한 자들입니다.

당연히 성화라는 것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점차 거룩해 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미 거룩한 자입니다.

 

예수 안은 영이고,

예수 밖은 육입니다.

영은 거룩하고,

육은 속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은 인간의 행실로 성(聖)속(俗)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행실로 성(聖)속(俗)을 구분합니다.

새 언약 하에선 예수그리스도 안과 밖으로 구분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무엇을 해도 거룩이 되지만,

예수님 밖은 무얼 해도 속(俗)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은 무조건 성(聖)이고,

예수 밖은 무조건 속(俗)입니다.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의 행동으로 성(聖)속(俗)을 구별치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율법이 금하는 일을 해도 성(聖)이 되지만,

예수 밖에 서는 율법을 지켜도 속(俗)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만 성(聖)이고,

인간은 속(俗)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영이지 육이 아닙니다.

성화는 육이 하는 일이지, 영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성도는 영에 속한 자이지, 육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영은 거룩이고, 육은 비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영이고, 인간은 육입니다.

 

예수님은 화를 내도 거룩이고,

인간은 자비로워도 비 거룩입니다.

그렇게 착하게 살았던 예수 밖의 바리새인들은 지옥에 갔고,

예수님 안에 있던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에 갔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내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영과 육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경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을 갈고 닦으면 영이 되는 줄 압니다.

육을 가지고 영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호박에 줄을 그으면 수박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박에 멋지게 칼라로 줄을 긋는다고 해서 수박이 되지 않습니다.

호박은 호박이고, 수박은 수박일 뿐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호박에 줄을 긋고 수박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난 것은 영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죽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 안은 살고 예수 밖은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은 영이고,

예수 밖은 육입니다.


성도는 영입니다.

영은 성화가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거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완벽합니다.

 

거룩은 영의 영역입니다.

영 안에선 모든 것이 거룩이기 때문에 새로 거룩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육은 거룩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이 육을 덥치면 죽어 버립니다.

 

육이 거룩을 감당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날마다 수고와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 나면 오늘도 거룩을 향하여 가야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은 성화주의자들에겐 없습니다.

 

거룩은 영만이 감당 할 수가 있습니다.

새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세 다 이룬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은 오직 영만이 감당 할수가 있습니다.

 

성화주의자들이 악함은 성도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놓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로에다 자기의 행함을 섞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보암직하고 매력적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게 하는 것은 다 마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자기 지신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을 갈고 닦으면 영이 된다고 생각하는 성화주의자들은 이단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게 하기 때문에 저주 받을 이단입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단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단 속에는 인간을 자랑하는 것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자기 영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당신을 칭찬하는 그 놈이 지옥의 사자입니다. 

뱀의 말은 너무도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듣기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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