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 사람들

정낙원 2009. 8. 12. 02:38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 사람들

 

죄인은 자존심에 죽고 산다.

한마디로 명분이다.

스스로 왕으로 살고자 하는 죄인에겐 자존심은 삶에 의미이고 존재의 가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존심 상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이런 명분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 자기가 싫어하는 인간이 천국에 가면 난 안 간다는 말을 한다.

“난 저 인간이 천당에 간다면 안 가겠다” 고 큰소리를 친다.

 

그만큼 꼴 보기 싫은 인간과는 같이 있다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존심에 침해를 받으면 진리 자체에 대하여 눈이 어두워진다.

아니 진리보다도 자존심을 우선한다.

 

어떤 교인이 그런다.

심방을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를 옮긴 문제로 화제가 이어졌다.

 

이쪽 교회에 있다가 저쪽 교회로 갔다가 다시 이쪽 교회로 옮겼다고 한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

목사님 말씀이 틀려서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왜? 1년 사이에 왔다 갔다 했냐고 물으니 대답이 가관이다.

 

이쪽 교회에 꼴보기 싫은 인간 때문이란다.

그래서 저쪽 교회로 갔단다.

그러다가 이쪽 교회에 꼴보기 싫은 인간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한단다.

그래서 저쪽 교회에서 다시 이쪽 교회로 옮겼단다.

 

이 사람은 자칭 복음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또 어떤 집사님이 그런다.

큰 교회의 장점이 예배가 1, 2, 3부로 나누어져 드린다는 것이다.

그게 왜? 좋으냐 라고 물으니!

 

첫째로, 자기 시간 편한대로 가서 드리니 좋고!

둘째로, 꼴보기 싫은 인간과 다른 시간에 예배드릴 수 있어 좋단다.

꼴보기 싫은 인간이 1부에 나오면 자기는 2부에 가면 된단다.

 

이 집사님이 하는 말이 압권이다.

 

목사님 개척교회가 왜? 안 되는 줄 아세요.

숨을 데가 없어서 그래요.

교인들끼리 싸우면 숨을 곳이 있어야 하는데 개척교회는 1부 예배만 드리니 꼴보기 싫은 인간을 보아야 하니 다른 교회로 피한다는 겁니다.

 

교인들끼리 싸우면 하나는 나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소한 일로 분쟁이 생기면 저 인간 꼴보기 싫어서 다른 교회로 옮겨 가기 때문이란다.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단다.

혼자 잘난 척 설치고 다니는 인간을 보면 눈꼴이 시려서 못 본단다.

 

난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교회 안 간다! 라고 한단다.

교회는 가고 싶은데 미운 인간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가기 싫단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사람이란? 진리보다 자존심을 더 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반(反) 작용으로 나타내서 그를 복수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운 사람이 하는 일은 본능적으로 “반(反) 작용”으로 거부해 버린다.

미운 사람이 노란 색 옷을 입으면 난 파란 색을 입는다.

미운 놈이 자장면을 먹으면 난 짬뽕을 먹는다.

미운 놈이 정장을 입으면 난 반바지에 티셔츠로 응수한다.

이런 행동은 그와 동질을 거부함으로서 그를 배척하는 일종의 분풀이 행위이다.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

그런데 미운 놈이 그 곳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창가로 비친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그 인간이 있기 때문에 맛난 음식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이걸 성도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보자.

 

찬송이나, 기도하는 것들은 참으로 귀한 신앙의 모습들이다.

또한 반가운 성도들끼리 만날 때 할렐루야! 라고 말하는 것이나,

목사님 설교에 아멘! 이라고 화답하는 것이나,

예배 전에 교회에 일찍 와서 기도하거나 찬송하면서 봉사하는 것들은 참으로 귀한 것들이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다.

왜? 그런가?

이는 무당 같은 목사나 교인들이 하는 행위에 식상해서 반(反)작용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이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기도도 잃어버렸고,

찬송도 잃어버렸고,

봉사하는 것도 잃어버렸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것도 잃어버렸고,

할렐루야! 아멘! 이라는 말도 잃어버린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무당 같은 부흥사들이 말끝마다 할렐루야! 를 외치니 꼴 보기 싫어서 안한다.

복음도 모르는 교인들이 목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멘! 아멘! 이라고 남발하니 그것도 듣기가 역겹고 꼴 보기 싫어서 안한다.

 

박수치며 찬송하는 것도 복음을 모르는 교인들이 자아도취에 빠져서 광란하는 것처럼 보여서 싫다.

주여! 소리치며 기도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난 저런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을 반(反)작용으로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안 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나는 너희들이 하는 것은 안 한다 라면서 다름으로 있고자 한다.

난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남고 싶어서 그들이 하는 행사 머리를 안 함으로 그들과 다름을 드러내고자 한다.

 

마치 난 저런 인간이 천국에 가면 안 갈래! 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안 오고,

봉사도 안 하고,

헌금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온통 안 하고 안 하고 뿐이다.

 

마치 빈대를 잡다가 초가삼간을 태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 좋은 것들을 다 잃어버렸다.

실어증 걸린 사람이 되고 말았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는 좀비가 되고 말았다.

 

이 까잇거 안 해도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 뭐?

어차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래서 이젠 과거에 하던 것들을 모두 삭제시켜 쓰레기통에다 갖다 버렸다.

 

이젠 안 하는 것이 신앙 좋음으로 둔갑을 했다. 

자기는 빈둥거리면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사람들은 믿음 없는 것으로 복음을 모르는 것으로 조롱한다.

 

누기 통성으로 기도라도 하고,

손뼉 치며 찬송이라도 하고,

목사님 말씀에 아멘이라도 하고,

반가운 성도를 만나서 할렐루야! 라고 하고,

교회에 일찍 와서 청소하고 봉사라도 하고,

교회 제정이 어렵다고 헌금이라도 하면 저 사람이 왜? 그러지!

왜? 저런 짓을 하지! 라고 의아해 한다.

 

참으로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다.

 

어째서! 예배 전에 찬송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어째서! 예배 전에 기도하는 것이 낯선 풍경이 되었는가?

어째서!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낯설게 되었는가?

어째서! 예배 전에 일찍 오는 것이 낯설어 졌는가?

어째서! 헌금하는 것이 이상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목사의 설교에 아멘이라고 하는 소리가 거북스럽게 들리는가?

어째서! 할렐루야 라는 말이 낯설게 되었는가?

 

마치 이런 것을 안 하는 것이 믿음 있는 것처럼 회자되고 있으니 복음을 어찌 들었길래 그런가!

무슨 놈에 복음이 이런 복음도 다 있나 싶다.

이상한 복음이 뺀질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분명히 복음은 맞는데!

어째 그럴까?

 

이유는 하나이다.

한마디로 귀신들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유익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복음 속엔 황홀함과 기쁨과 환희와 감사와 감격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낯설게 느껴지느냐이다.

이상하게 안 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고,

행하면 믿음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여야 하는가?

 

과연! 교회에 봉사하고,

예배 전에 기도하고,

교회에 일찍 오고,

헌금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것이 정상인가?

 

목사가 설교하는 것에 아멘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낯설다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예배 전에 찬송하는 것이 쑥스럽고 잡담이나 하고 노닥거리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어찌하자는 말인가?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생경하고 들리고 찬송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런 현상을 어찌이해 하여야 하는가?

 

바울과 실라가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맞고 옥에 갇혀서 찬송하고 기도한 것은 실성해서 그런 것인가?

베드로가 예수의 피를 말하면서 찬송하리로다 라고 감탄한 것이 또라이 짓인가?

 

고린도 교회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이 등신짓인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친 사람들이 바보들인가?

 

왜? 열심히 하는 놈은 이상하고,

안 하는 놈이 정상인 것처럼 되어 버렸는가?

왜? 복음에 기쁨이 안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정상인 것처럼 되어 버렸는가?

 

정녕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복음이

기도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찬송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할렐루야! 아멘! 이라는 말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교회에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오도록 이끌어내지 못하고,

봉사나 충성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이던가?

 

예수님이 대신 피 흘려 주신 십자가 복음이 그렇게 무기력한 복음이던가?

복음은 분명히 중풍병자도 일어나 걷게 하고 앉은뱅이도 뛰게 하는데!

어째서 이 시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은 도리어 앉은뱅이가 되고 중풍병자가 되는가?

 

내가 만난 주님은, 내가 깨달은 복음 속에는 분명히 나를 감동케 하는 것이라서

찬송케 하고,

봉사케 하고,

헌신케 하고,

연보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미치게 하는 것이던데!

 

내가 만난 예수님이 이상한가?

내가 아는 복음이 이상한건가?

 

할렐루야! 아멘! 하며 찬송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내가 미친놈인가?

행여 예배 전에 통성기도라도 하고 박수치며 찬송이라도 하면 아마도 이단이라고 치부하겠지!

 

이상하다?

저들이 믿는 예수와 내기 믿는 예수가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