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새 생명의 삶에 대한 오해

정낙원 2010. 1. 29. 03:34

새 생명의 삶에 대한 오해

 

많은 신자들이 묻는다.

목사님 구원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인가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신자의 삶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정서로는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고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술 담배를 먹던 사람이 예수 믿고 끊으면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한다.

성격이 거친 사람이 온순해 진다거나 겸손해지면 새 사람이 되었다고 신자답다고 한다.

 

사회에서 모범이 되고,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성경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한다.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를 본받자고 하는데서야 그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인데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죄가 뭔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같이 닦달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지켜 낼 수 없는 인간이라면 소 귀에 경(經) 읽기이다.

하나님이 죄인과 농담 따먹기를 할리는 만무하니,,,

그렇다면 말씀을 주신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죄인더러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은 마치 강아지에게 사람 말 좀 알아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바리새인들이었고 지금은 성화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구원 이후의 삶을 주장한다.

이름하여 새 생명의 삶이다.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성령이 살게 해 준다고 한다.

그것도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말이다.

아마도 성령이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모양이다.

마치 베데스다 못 처럼 물이 동하여도 인간의 들어갈 노력을 하지 않으면 소용 없듯이 말이다.

 

암튼 말씀대로 살겠다는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한데 뜻이 좋다고 해서 그 뜻대로 과연 살아낼까?

오른 눈이 범죄하면 빼 버리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주고,

마음속에 미움도 없고

음욕이 일어나지 않고,

탐심도 생기지 않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에 짐을 대신 져주고,,,,,,,

망하든지 흥하든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느냐이다.

한마디로 무흠해 지라는 말이다.

천사가 되라는 말이다.

 

좌우지간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원한다.

원래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죄가 망가뜨렸다.

지금의 인간은 원래 인간이 아니다.

죄인이다.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는 몸을 가진 죄인이다.

죽음에 기운을 품고 있는 죽은 자이다.

 

성경을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성경에 비춰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인간과 지금 현재 자기 꼬라지를 보라는 것이다.

뭐가 잘못 되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라는 것이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온전한 인간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온전하면 말씀대로 살라는말이 맞는데,,,

예수 믿으라는 말은 독자적으로 구원을 따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아니다.

점점 더 나아지라는 것도 아니다.

천사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다.

 

너희는 내가 바라는 인간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려고 성경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들이 오해하기를 이렇게 살라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은 못 살아도 하나님 백성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바리새인들이 사고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따로 규정해 놓았다.

바로 율법지킴이다.

율법을 지키라고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지키며 살았다.

그 누구도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랐다.

모두가 조상들로부터 배워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이 그대로 이 시대 교회 안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성도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이의를제가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맞고 당연하니까?

 

사도 서신이 모두가 명령법들로 되어 있으니 그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은 성도에게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이란다.

성령을 받으면 지킬 수 있으니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봐라!

사도 바울이 심심해서 이런 말을 했겠느냐?

사도들이 농담한 줄 아느냐! 라고 핏대를 세운다.

이러면 교인들은 기가 죽고 주눅이 들게 된다.

성경이 그러하다는데서야 어찌 항변 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봐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상식이 다 버려 놓았다.

상식으로 성경을 대하니 상식적인 해석을 내어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기에 이른다.

 

이게 바로 지옥에 간 유대인들의 사고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지옥간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지옥에 갔는가?

예수님은 왜 인정머리 없이 그토록 거룩한 사람들을 독사새끼라고 했는가?

이는 죄인의 상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이방인과 다른 줄 알았다.

자기들에겐 이방인이 없는 어떤 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

이들이 이런 오해를 한 것은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선 동일하다.

다만 하나님이 대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유대인에겐 이방인에게 베플지 않는 긍휼을 베풀고 있을 뿐이다.

암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받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이름하여 율법이다.

 

이들은 그런다.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었겠느냐?

그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냐이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율법지킴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고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지켜왔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새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똑 같다.

 

그래서 내어 놓은 것이 구원 이후의 삶 곧 새 생명의 삶이다.

새 생명의 삶이란?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 받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 닮기이다.

 

어느 개그 프로의 구호처럼 “신자가 신자다워야 신자지!” 라고 한다.

그래 옳은 말이다.

신자가 신자다워야 신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신자다움이 무엇이냐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다움이 뭐냐이다.

인간들이 바라는 신자다움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다움이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자다움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이 신자다움인가?

과연 어떤 것인가?

 

성화론자들은 구원을 위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성화론을 외치는 목사치고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유대인들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지 않았다.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이 구원받았으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똑 같은 말이다.

 

2천 년 전 유대인이나 이 시대 성화주의자나 똑 같다.

2천 년 전에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도 있다.

반대로 2천 년 전에 너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는 죄인이라고 했다가 맞아 죽은 예수님이 있는가 하면 지금도 인간은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다가 이단이라고 쫓겨난 자들이 있다.

그러니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복사판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게 반복하여서 일어나는가?

이는 영적인 일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기 때문이다.

죄 아래 펼쳐진 세상이라는 좌판이 같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에 역사한 마귀나 지금 역사하는 마귀는 동일하다.

2천 년 전에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동일하다.

 

2천 년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가능성으로 받은 인간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도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가능성으로 받는 인간이 있다.

육(肉)은 시절이 바뀌어도 육(肉)이다.

쥐꼬리 삼년 묻어 두어도 쥐꼬리이지 개 꼬리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도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육이다.

변함이 없다.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육으로 듣는다.

육은 선악의 법아래서 태어난다.

그래서 어떤 명제 앞에 서면 육신은 항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정을 해야 한다.

 

말씀이 떨어지면 육은 지킬 것인가 안 지킬 것인가 판단한다.

몸 속에 내장된 선악의 법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하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악이라고 한다.

그럼 몸이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게 된다.

선을 행하면 착하다고 하고 악을 행하면 나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고 자체를 죄라고 한다.

인간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을 악이라고 규정한다.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본다.

죄인으로 본다함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이다.

내가 선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죄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도 죄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사실을 모른다.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인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착하게 산 것을 선이라고 들고 나아온다.

난 이렇게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복을 주세요! 라고 한다.

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이건 마치 바퀴벌레가 밥그릇을 깨끗이 청소 했으니 난 착하지요! 라고 하는 것과 같다.

바퀴벌레는 주인에겐 바퀴벌레 자체가 악인 줄 모른다.

그러니 밥그릇 청소한 것을 선이라고 들고 나오는 것이다.

죄인이 이와 같다.

주인은 너 꺼져 줄래! 라고 하는데 바퀴벌레는 나 착하게 살게요! 라고 한다.

 

이럴 땐 밟아 죽이는 것이 사랑이다.

넌 인간에게 백해무익한 바퀴벌레 라고 자기 주제를 알려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놈이 밥그릇 청소한 선을 들고 자꾸만 주인 눈앞에 얼씬거리기 때문이다.

손님이 왔는데 이놈이 밥그릇에 들어가 청소한다고 설치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주인은 눈에 보이는 쪽쪽 밟아 죽여서 너희는 죽어야 할 놈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걸 아는 바퀴벌레라고 한다면 자기 모습을 주인에게 안 띄게 할 것이다.

주인 앞에 얼씬 거린다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난다.

죄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모든게 죄이다.

그러니 딱히 뭐가 죄입니까? 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

살인해도 죄이고 살인 안 해도 죄이다.

살인 한 놈도 죽고 살인 안한 놈도 죽는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걸 모른다.

마치 바퀴벌레처럼 자기는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인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벌리셨다.

 

여기에 선택된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을 가지고 넌 죽어야 할 바퀴벌레(죄인)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었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똑 같이 죄인이다.

한 쪽은 하나님께 선택된 죄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죄인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인간의 실존을 밝히는 일을 하신다.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발리는 일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율법이 그들 속에 죄를 끄집어낸다.

하나님의 명령(율법)이 주어지면 인간 속에 있는 죄들이 툭툭 터져 나온다.

 

명령을 해도 꼭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명령들만 한다.

하고 싶은 것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한다.

결국 율법이 죄 아래로 더욱더 가두어 버린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다.

율법지킴과 상관없이 생겨났다.

그러니 율법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언약 안에 있는 자이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다.

이걸 아는 자가 진짜 이스라엘이다.

 

여기서 구원 받은 자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왜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을 주었는가?

죄를 고발하여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진 구원이 은혜에 속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죄인임에도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율법의 끝에는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나 율법 잘 지켰는데요! 라고 나오면 이건 틀린 것이다.

그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어긴 것이 된다.

 

율법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사도서신(모든 성경)과 같다.

사도서신도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사도서신이나 모두가 율법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모두가 구원 받은 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율법이나 사도서신이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죄를 고발하는 이유는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너희가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죄인이 어떻게 용서받고 구원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내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이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한다.

 

내가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이다.

이런 놀라울 때가 있나!

말씀이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서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여야 하듯이 성도는 사도서신(모든 성경)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피를 기억하여야 한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걸 하라고 성령이 사도들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갖가지 명령들을 한 것이다.

사도서신도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발하는 목적에 있다.

사도서신은 지킬 수 있고 율법은 못지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성경이 다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

고발하는 이유는 그 고발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케 함이다.

 

성도라면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나 구원받았다는 것에 눈을 두지 말고 내가 죄에서 구원을 받는데 어떤 댓가가 있었는지 생각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자세이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이어야 한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죄를 고발당하여도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듯이 말이다.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브라함 언약을 더욱더 붙잡게 한다.

그 일을 하라고 율법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율법을 보면 아브라함 언약이 생각나야한다.

그래야 아브라함 언약으로 구원이 된 자이다.

만약 아브라함 언약을 잊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는 율법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 아브라함 언약 밖에 있는 자로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를 퍼 부은 것도 바리새인들이 이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킨 것을 자랑하였지 아브라함 언약을 몰랐다.

율법 지킴을 하나님 백성됨의 근거로 나아온다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모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구원받은 것을 알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율법은 이 사실을 알게 해 주려고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받은 사람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지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 죄를 깨닫기 위함이다.

율법을 통하여서 자기 죄를 심도 있게 깨달을수록 감사의 깊이는 더해진다.

 

신약의 말씀도 이와 같다.

말씀대로 살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어느 아래 있는지 알라는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은혜 아래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어느 영역 아래 있느냐의 문제이지 내가 얼마나 변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아담 아래 있느냐!

예수 아래 있느냐! 이다.

 

아담 안에 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 하여도 지옥에 간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천국에 간다.

그 이유는 천국과 지옥은 예수 안이냐 밖이냐 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괜찮은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의 혜택으로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감싸고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듯이,

성도를 감싸고 있는 것도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다.

 

새 생명의 삶이란?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냐가 아니고 내가 이처럼 악한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앉으나 서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義)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자랑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선 의(義)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됩니다! 라고 하여야 한다.

우리가 잘살고 못살고가 살아가는 본질이 아니다.

우리의 선함과 악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삽니다를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새 생명의 삶이란? 내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외에는 다 죄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라고 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죄라고 고발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지적한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에 눈길을 두지 않고 너의 행함에 눈길을 두느냐 라고 책망을 한다.

 

죄란? 예수님의 대속을 잊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인간의 악함으로 인하여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악한 죄인이 사는 것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 때문이다.

노아 언약 이후에 죄는 그 사람이 착하냐 악하냐로 판단하지 않고 희생 제물에 의미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이 된다.

희생 제물에 의미를 모르는 자는 악한 자로 간주되어 징벌을 당하게 된다.

 

이게 새 언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나타난다.

성령이 이 사실을 알려 주신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발당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 의로움을 챙기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화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악마의 발상임을 알고 회개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게 율법의 내용이다.

율법은 한마디로 경천애인(敬天愛人)하라는 것이다.

 

그럼 율법대로 살면 구원 받습니까? 라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산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바리새인들의 의 보다 더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다.

바리새인의 의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의이다.

 

그런데 천국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한다.

이는 더 완벽하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의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율법에 의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 천국엔 어떤 의로 가는가?

율법 외에 다른 의로 간다.

율법 외에 다른 의는 예수님의 의다.

 

그럼 구원 이후의 삶이란? 예수님의 의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가에 의미를 두지 말고 내가 지금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누구 의로 살고 있는지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새 생명의 삶이란? 자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는 죄인임을 절감하고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날마다 우리의 눈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한다.

내가 맞아야 할 그 매를 예수님이 대신 맞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리하여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한다.

이것이 구원 후의 삶이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이다.

 

난 지금 어느 영역 안에 있는가!

어느 권세아래 있는가! 를 확인해 보라!

 

모든 성경을 어느 영역에서 보느냐에 따라 지켜야 할 주체가 달라진다.

아담 안에서 보면 내가 다 지켜야 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바라보면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으로 보여진다.

 

성령이 오시면 새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데 그 법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는 법이다.

그러니 새 법이 새겨진 성도는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옛 생명의 삶이지 새 생명의 삶이 아니다.

새 생명의 삶이란? 말씀대로 삽시다! 가 아니라 예수 믿읍시다! 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믿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