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설교

교회 안에 귀신들린 자들

정낙원 2014. 10. 2. 01:02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침 (막 1:17-39)

 

막 1:1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신명기 6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치관의 전도를 말합니다.

 

애굽에선 떡에 가치로 살았지만 광야에서는 말씀에 가치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말합니다.

 

그럼 성도의 존재목적도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고자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를 구원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뱀이 미혹하여 살아가는 이유는 바꿔 놓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뒤틀려진 것을 바로 잡는 것이에요.

살아가는 이유를 올바르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도 언약을 위해서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존재의 이유를 바꿔치기 해 놓은 것입니다.

떡을 위하여 살도록 미혹한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을 미혹했듯이 말이에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어요.

예수님도 이 일을 위하여 오셨어요.

이 일을 회당 안에서 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이 교회 안에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하니까 조금은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귀신들린 자들은 미친 사람과 같다는 생각으로 고정관념화 되어 있어요.

그래서 멀쩡하고 점잖은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 할 수 있다고 하였듯이 귀신들린 자들도 얼마든지 점잖은 모습으로 위장할 수가 있어요.

 

귀신들림을 현상론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영적으로 접근하세요.

그럼 성경이 말하는 귀신들림의 진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귀신들림을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세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고 저주를 하셨어요.

그러면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바리새인들은 가장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가장 고상하고 고결하고 인품이 있고 거룩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독사 새끼라고 했어요.

독사 새끼란 뱀의 후손들이란 말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모두가 귀신들린 자들이에요.

 

오늘은 누가 귀신들린 자이고 귀신들린 자들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귀신들린 자들은 어떤 가치관으로 사는지,

귀신의 가르침이 무엇이고,

또한 어떤 것이 귀신을 쫓는 것인지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누가 뱀의 후손이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뱀의 가치로 사는 자들이에요.

뱀의 후손들은 흙의 가치로 살아요.

그러면 귀신들린 자들의 정의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누가 귀신들린 자이냐? 땅에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제부터 이 사실을 추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 라고 저주 하셨습니다.

이는 뱀에게 흙을 먹거리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도 흙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 뱀처럼 흙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흙이란? 영을 반대하는 것으로 육을 말합니다.

또한 하늘나라를 반대하는 말로서 세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가치적 의미로 보면 육적 가치를 말해요.

 

에덴동산을 하늘나라라고 한다면, 에덴동산 바깥은 이 세상이 됩니다.

에덴동산을 생명의 세계라고 한다면, 에덴동산 바깥인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산 자들이 세계라고 한다면, 에덴동산 바깥은 죽은 자들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를 산 자라고 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죽은 자라고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아담과 하와를 산 자들만이 사는 곳인 에덴동산에서 죽은 자들이 사는 세상으로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아담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땅에 소산을 먹고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신 것은 땅에 기운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나서 흙에 것을 먹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에덴동산은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사는 곳이고,

에덴동산 바깥은 흙에 가치로 사는 곳이에요.

아담에게 있어 구원이란? 본질적으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흙의 가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흙을 벗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뱀이 주는 가치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뱀은 아담에게 흙을 주었어요.

땅에 것을 주었어요.

그리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주소지를 흙에 매여 두고 살게 하였어요.

 

원래 하나님은 아담을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가 된 아담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뱀과 함께 흙에 가치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흙에 가치는 떡이에요.

떡이란? 곧 돈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돈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곧 힘이에요.

돈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재물과 하나님을 주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에겐 재물이 곧 신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아도 다 돈 때문이에요.

 

이건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해요.

모두가 땅에 가치로 살았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땅에 속한 자를 하늘에 속한 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땅에 가치로 살던 자들을 하늘에 가치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떡에 가치로 살던 자들을 말씀의 가치로 사는 자로 재 창조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교회란? 하늘에 가치를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교회의 모습은 땅에 가치를 주고 있었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들린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하다고 했습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뱀의 지혜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도 뱀의 지혜를 이기지 못하였지만 범죄 이후에는 더더욱 이기지 못해요.

뱀은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요.

그래서 인간이 원하는 것들을 주어서 흙을 못 떠나게 만듭니다.

 

뱀을 일컬어 사단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마귀를 일컬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한 것은 마귀에게 세상을 넘겨준 것입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확인 시켜주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봅시다.

 

눅 4:1-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리라”

 

마귀가 예수님에게 떡과 권세와 부귀영화라는 세상 것으로 미혹합니다.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떡과 부귀영화와 권세를 다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마귀가 주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었어요.

용과 미가엘이 전쟁을 하였는데 용이 졌어요.

그리곤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 용을 일컬어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해요.

뱀이나 마귀나 사단은 같은 말입니다.

그 수하를 귀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있다는 것은 뱀의 사상에 붙잡혀 있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뱀의 가치인 떡을 위하여 회당에 모여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하시고 있습니다.

 

회당이 어떤 곳입니까?

모세의 율법이 낭독 되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 남자 10명만 있으면 회당 모임을 가졌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회당은 교회와 같아요.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귀신들린 자들이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교회에 귀신들린 자들이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지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가 있는 회당에 가셨어요.

그리곤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버나움이란? “위로의 촌”이란 뜻이에요.

즉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회당이에요.

신약식으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곳에 하나님의 위로와 반대 되는 귀신들린 자들이 있었어요.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평강을 말했어요.

그러나 참 선지자들은 너희가 평강을 말하나 평강이 없다고 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위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위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귀신의 가르침으로 마음에 환란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 교회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로를 빼앗아 갔습니까?

무엇이 신앙생활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게 하였나요?

이는 거짓 종들의 그릇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율법 신앙으로 짐을 지웠고 가치적으로는 떡을 추구하게 하였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열심히 충성해서 복을 받아야 한다는 기복 사상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거짓 종들로부터 거짓 가르침을 받고 고통당하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귀신들린 것을 어떤 현상론적으로 이해를 하여서 괴팍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귀신들림의 현상 중에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귀신들림의 증상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이에요.

예수 안 믿는 자는 모두가 귀신들린 자들이에요.

괴팍하고 이상한 말을 하지 않고 점잖고 고상한척 하고 지식인인척 하여도 그 속에 예수의 영의 없는 사람은 모두가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에요.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이 존재해요.

그 속에 예수의 영을 담고 있는 자와 귀신의 영을 담고 있는 자 둘만 있어요.

예수의 영이 없는 자는 아무리 고상한척 하여도 귀신들린 자에요.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거라사 지역에 어떤 귀신들린 자가 있습니다.

 

그는 옷을 벗고 무덤가에 거하였어요.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을 옷을 벗고 무덤가에 거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의 없는 자들의 영적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죄의 수치를 가리움을 입는 것이에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가르침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그리고 발가벗음이 수치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어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했어요.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치마를 걷어 내고 어린 양을 잡아 그 가죽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죄의 수치를 어린 양의 피로 가려준 것입니다.

옷을 입는 다는 것은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입지 못한 자는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귀신들린 자가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은 곧 어린 양의 피로 가리움을 입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성도들을 일컬어 예수그리스로 옷 입었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옷을 입은 것이에요.

우린 모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벗어준 그 옷을 입고 있어요.

대속의 옷이에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에 옷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런데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옷을 입지 않았어요.

인간의 가치를 챙기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옷을 벗었다!

혹은 발가벗었다 라고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옷을 벗고 무덤가에 거하는 거라사 광인의 모습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에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이 사는 곳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일컬어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25-29=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지요.

그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예수님에 의해서 두 부류로 갈라진다는 말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선에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였다는 말도 악에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악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속한 자는 선한 일을 행한 자가 되고, 예수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으니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합니까?

무덤이지요.

무슨 말인가요?

이 세상이 무덤이란 말이에요.

 

알다시피 이 세상은 모두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무덤인 겁니다.

그럼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은 모두가 거라사 광인(狂人)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자들은 모두가 거리사 광인처럼 옷을 벗고 무덤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어요.

찾아 가서 귀신을 쫓아냈어요.

지금 가버나움 회당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구약 교회가 전부 뱀의 미혹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뱀 사상이 구약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땅에 가치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은 세상 적인 것이었어요.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줄 메시야를 찾았어요.

떡을 줄 자를 찾았어요.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부국강성한 나라가 되어서 세계를 지배하는 패권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로마를 자신들이 지배하고 싶었어요.

세상 열 왕들을 자신들의 발 아래 두고 왕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로마를 무찌를 힘 있는 분이 오셔서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떡을 주고 세상의 힘을 주는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바라는 떡도 주지 않고 힘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인 분개하기 시작합니다.

우린 세상의 힘이 필요하고 세상의 떡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의 복을 구하고 있어요.

목사들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복 받은 증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에 교인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힘을 갖고자 하고 있어요.

 

이름하여 기복 신앙이고 고지론입니다.

성공주의이고 번영신학입니다.

교인들이 유대인들처럼 땅에 가치관으로 교회로 나오고 있어요.

목사들은 땅에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 당시에 회당마다 귀신들린 자들이 가득 했듯이 지금도 교회마다 귀신들린 자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귀신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가 무덤과 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봅시다.

 

계 18:1-4=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보낸 편지에요.

그러므로 교회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교회를 일컬어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이는 교회가 바벨론 사상으로 물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사상이 바로 떡에 가치를 추구하는 뱀 사상이에요.

그래서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가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지금 교회들이 하나님의 가치를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목사들의 가르침이 바로 마귀가 예수를 찾아와서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주고 있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음행의 포도주라고 해요.

그래서 음행의 포도주를 마신 현상들이 땅에 사치를 좇아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음행의 포도주를 마신 증거에요.

우리 역시 교회에 와서 세상을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면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뱀의 독을 마시니까 세상에 부귀영화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신앙의 가치를 물질적인 것으로 가늠하고 있어요.

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복을 받았다고 하고 적게 모이면 복을 받지 못하였다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큰 교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곳이 마치 복을 받는 명당자리라도 되는 냥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고를 깨트리려고 오셨어요.

 

스가랴 9장을 봅시다.

 

슥 9:9-10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에 말하는 것이에요.

 

왕이 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힘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온다고 합니다.

힘 있는 말을 타고 오지 않고 힘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옵니다.

 

오셔서 하는 일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건 힘을 거두겠다는 말입니다.

 

병거니 말이니 활은 모두가 전쟁하는 무기에요.

전쟁을 하려면 이러한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야 해요.

이러한 무기를 많이 소유한 자들이 강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무기들을 없앤다고 합니다.

세상의 힘을 빼앗겠다는 말입니다.

왜? 세상의 힘을 빼앗는가요?

이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뱀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도 되는 냥 자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건 아니라고 하시면서 교회가 의지하는 것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떡의 가치에서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사는 자들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떡에 가치로 살던 자들을 광야로 빼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로 사는 자들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힘을 주시고자 오시지 않았어요.

그 반대로 세상의 힘을 끊고자 오셨어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 세상의 힘을 얻고자 나온 자들음 모두가 귀신들린 자로서 예수님에 의하여 고침을 받아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물량적 개념의 부흥 신앙은 뱀의 말이에요.

성경은 사람의 숫자가 많은 것을 부흥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건 목사들이 지어낸 말이에요.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따르고 있어요.

 

음녀를 뭐라고 하나요?

큰 성이라고 하지요.

이는 큰 세력을 말해요.

 

사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가치에 두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많으면 스스로 자고하고 자랑하고 자긍하고 자만하고 자위하고 자족하고 자신하고 있어요.

 

타락이란? 땅에 가치관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굴혈이라고 합니다.

강도의 가치가 뭔가요?

재물이에요.

 

이 말은 곧 교회 안에 귀신의 가르침이 난무하다는 말입니다.

목사도 재물의 가치를 두고 있고 교인들도 재물의 가치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뱀의 말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겠지요.

 

귀신이란? 더러운 영을 말합니다.

이 놈이 거짓 선지자들 속에 들어가서 미혹을 해요.

아는 하나님께서 거짓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장을 봅시다.

 

왕상 22:19-23절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있었어요.

이 때 남쪽 나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 왕에게 선지자들을 불러서 이 전쟁을 이기는지 지는지를 점을 쳐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합이 선지자 사백 명을 불러서 점을 치게 합니다.

이에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점괘가 이 전쟁에서 아합이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가 있으면 한 번 더 물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합이 자기 나라에 점을 잘 치는 미가야 라는 선지자 한 명이 있기는 한데 그 놈은 늘 바른 소리만 한다고 싫다고 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내시를 보내서 미가야 선지자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내시가 오면서 왕궁의 사정을 말해줍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이번 전쟁은 아합이 이긴다고 하였으니 당신도 아합이 이긴다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미가야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만 말하겠다고 합니다.

아합 왕이 미가야에게 내가 이 전쟁에서 이기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미가야가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이건 이번 전쟁에서 왕이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야가 보니까 하나님이 보좌에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회의인가 하면 아합 왕을 죽이고자 하는 회의에요.

하나님이 둘러 선 천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저 놈을 죽일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한 영(靈)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계책을 말하는 겁니다.

그 계책이 뭔고 하니 내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서 거짓 선지자들 입에 들어가서 거짓 예언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짓말 하는 영이 거짓 선지자 사백 명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귀신이 사백 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자들 속에서 거짓 말을 하게 한 것입니다.

 

미가야가 앞서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들이 말한 것은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합이 그 소리를 듣고 내 그럴 줄 알았다!

저 놈은 항상 나에게 재수 없이 나쁜 말만 하는 놈이 아니더냐! 라고 하면서 자기가 전쟁에서 돌아 올 때까지 물도 주지 말고 옥에 가두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가야의 말대로 아합은 그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거짓 영이 교회 안에서 거짓말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시대 육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복사상을 전하는 목사들을 말해요.

목사들이 거짓 영인 귀신에 사로잡혀서 거짓말을 해요.

그럼 그 안에 성령이 없는 교인들은 그 말을 진리인줄 알고 따라요.

 

거짓 목사의 소속은 땅이에요.

이들은 뱀처럼 흙을 먹고 사는 자들이에요.

존재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해도 모두가 땅 차원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산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럼 땅에 속한 자들은 기뻐하고 따라요.

이걸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회당에 이런 사고가 팽배했어요.

물론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어요.

배금주의(拜金主義) 사상이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의 가치가 물질이에요.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정통이고 진리의 집단으로 회자되어요.

목사나 교인들이 간증하는 것이 흙에 가치에요.

 

바울이 배설물로 버린 것들을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귀신들린 자를 고친 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봅시다.

 

행 3: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지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나면서 된 앉은뱅이를 보았어요.

앉은뱅이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전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합니다.

 

때마침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달라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에게는 은과 금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앉은뱅이는 예수가 필요치 않아요.

떡이 필요해요.

떡을 얻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어떤 곳인가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에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이 더 우선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날 성전 안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고 떡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도 그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가고자 하지 않고 떡을 주었어요.

이게 구약 교회의 모습이에요.

 

구약 교회는 이 세상의 떡을 추구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왕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떡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메시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겐 누구라도 떡을 주는 자가 왕인 겁니다.

이건 인류 역사가 시작 된 이래로 이어져온 사고에요.

인간들에겐 먹고 사는 일 보다 더 우선인 것은 없습니다.

 

옛 말에 인심은 곡간에서 난다고 했어요.

이는 인간들 마음은 떡을 주는 자에게 쏠린다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성들이 떡을 주는 대통령을 원해요.

 

온 세계를 보세요.

떡을 위한 전쟁이에요.

 

에덴동산을 떠나온 죄인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마에 땀 흘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왔어요.

이것이 우상숭배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상 숭배란? 신의 힘을 빌려서 떡을 해결 받고자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틈만 나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쫓아간 것은 우상이 떡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 섬김의 사고가 바로 뱀의 가르침인 겁니다.

귀신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 역시 떡이 그에겐 가치였고 의미였어요.

그러니까 앉은뱅이는 한 번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본 적도 없고 또한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뱀과 같은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떡을 주지 않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자 일어나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친미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건 앉은뱅이가 꿈 꾸던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로 인하여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떡을 위하여 살던 자가 말씀을 위하여 사는 자로 변화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땅을 벗어나지 못하던 자가 이젠 땅에 기운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기운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그동안 뱀처럼 흙을 먹고 살았어요.

 

지금까지 성전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그에게 뱀처럼 땅에 것을 주었어요.

그들에겐 하늘에 것이 없었어요.

하늘에 것은 오직 예수에게만 있어요.

그러므로 구약교회 모두가 앉은뱅이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 속에서 예수가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구약 교회 앉은뱅이들에게 하늘에 것을 주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땅에 가치로 살던 자들이 하늘에 가치로 사는 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이 임하자 성도들이 물질을 내어 놓지요.

이는 물질의 가치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율법 아래서는 물질에 가치로 살았어요.

그래서 움켜잡고 산 것입니다.

흙에 기운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처럼 땅에서 하늘로 솟구친 것입니다.

사는 이유가 떡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바뀐 것입니다.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그동안 움켜쥐었던 물질을 내어 놓음으로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 와서 앉은뱅이처럼 떡을 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상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에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어요.

언약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세상에서 잘되고 잘 되는 것뿐이에요.

네 영혼이 잘 된 것 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삼중 축복이니 오중 축복이니 하면서 성경을 땅에 말로 도적질하고 있어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들에겐 오직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만 있어요.

오로지 떡이에요.

 

목사들이 뱀처럼 땅에 것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마다 귀신들린 자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뱀의 가치로 사는 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회당에만 귀신들린 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온 동네에 가득했어요.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귀신의 가르침에 엄몰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관심사가 땅에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28-39절=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32절을 보세요.

온 동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 앞으로 데리고 오지요.

또한 39절을 보면 여러 회당에서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다고 하지요.

 

이는 교회 바깥이나 교회 안이나 경계가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가치관들이 같다는 말이에요.

모두가 귀신의 가르침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가치관을 보세요.

교회 안에서도 돈이고 교회 밖에서도 돈이에요.

돈만 있으면 하나님도 만드는 세상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시작해서 동네와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서 누워있는 것을 예수님이 고쳐주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 장모의 열병 사건을 앞 뒤로 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이 있고 그 중간에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친 사건을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왜? 이렇게 편집을 해 놓았을까요?

이는 베드로의 장모의 모습도 귀신들린 모습과 같다는 말이에요.

 

잘 보세요.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살았어요.

알다시피 베드로는 동생인 안드레와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았어요.

베드로가 열심히 고기를 잡아서 대 가족이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고기 잡은 일을 그만 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사람들이에요.

베드로 역시 하루 고기 잡아서 하루 하루 근근히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가장의 직무를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의 장모가 속인 상한 것입니다.

열병이란? 홧병이에요.

속이 상해서 생기는 병이에요.

 

베드로의 장모는 딸 집에 얹혀사는 것이 가시 방석이에요.

베드로가 고기라도 많이 잡으면 그것도 얹혀사는데 눈치가 보이지가 않아요.

그런데 사위가 직장을 그만둔 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 장모 입장에선 사위도 밉지만 착실하던 자기 사위를 꼬드낀 예수가 더 미운 겁니다.

그 미움과 분노가 결국엔 홧병이 되어서 몸져눕게 된 것입니다.

 

홧병의 원인이 뭔가요?

떡이에요.

돈이에요.

예수가 돈 다발이라도 주었으면 홧병이 나지 않아요.

결국 베드로의 장모도 회당의 귀신들린 자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아셨어요.

그래서 베드로 집에 심방을 가서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일으켜 세운 것은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뱀처럼 흙에 기운으로 사는 베드로의 장모를 하늘에 기운으로 사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 속에 있는 뱀의 사고인 떡을 추구하는 귀신을 좇아낸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비 본질로 본질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본질이 뭡니까?

즉 살아가는 이유가 뭔가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우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 때문에 구원을 받았어요.

창세전 언약을 땅에 것을 추구하는 것이 없어요.

하늘에 신령한 것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 몸뚱이는 흙에서 나서 흙에 기운으로 살고자 해요.

눈만 뜨면 떡을 찾아요.

모든 인간은 이러한 사고로 살아갑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마귀가 40일을 주리신 예수님을 찾아 가서도 인간의 최고 가치인 떡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동안 그 어떤 인간도 마귀의 이 제의를 거절한 적이 없어요.

모두가 순응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겁니다.

떡 보다 하나님 뜻이 먼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내가 사는 이유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 그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우리 인생은 차압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말씀으로 자기 가치를 챙기라고 하고!

예수님은 말씀을 위하여 자기를 던졌어요.

 

마귀는 세상사는 일로 사람의 마음을 분주케 하여서 인간의 본분(언약)을 잊게 만들어요.

인간의 마음은 무저갱과 같아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요.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어요.

 

전 1장 8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 5장 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인간은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해요.

탐욕이 만족을 모르게 해요.

세상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져요.

 

세상 것을 가지면 만족이 오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결핍이 와요.

쉼이 오지 않고 쫓김이 와요.

이게 세상이 주는 물이에요.

 

이 땅에 것은 소금물과 같아요.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유발시켜서 급기야는 죽게 만들어요.

세상에 것을 많이 소유 하면 할수록 근심과 걱정도 함께 주어져요.

그러므로 세상에 것으로는 우리의 영혼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세상 것을 주어서 마음을 무관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세요.

비교 해 보세요.

 

과거에 우리는 모두가 다 집집마다 먹고 살기 힘들 때는 마음만은 행복했어요.

마음이 이렇게 분주하고 쫓기지 않았어요.

그 때는 집에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근심 걱정하지 않았어요.

이웃 간에 담도 없고 경계도 없었어요.

하나 됨으로 서로 다툼 없이 살았어요.

 

그런데 돈이 손에 모이기 시작하고 통장에 잔고가 쌓이기 시작 하면서 이웃은 사라졌습니다.

집에 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대문에 자물쇠가 잠겨지기 시작했어요.

 

대문에 자물쇠가 잠기면서 이웃 간에 마음도 닫아 버리게 된 것입니다.

돈이 남과의 교제를 단절케 하고 고립케 만든 겁니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고 이웃을 도적으로 보아야 하는 지옥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어서 지옥에 빠뜨렸어요.

이젠 세상 산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에요.

돈이 있어도 지옥이고 돈이 없어도 지옥입니다.

모두가 귀신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교인도 귀신의 가르침인 돈을 좇고 있고 교회 바깥에 세상 사람들도 돈을 좇아가고 있어요.

돈이 결국 온 세상의 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돈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말씀 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떡이 풍요로울 때입니다.

이건 역사가 말해주고 있어요.

인간들이 언제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는가 하면 풍요로울 때에요.

 

신명기 31장을 봅니다.

 

신 31:1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경고로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배부름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서 배부름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기독교가 들어가면 반드시 물질의 풍요를 주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떡을 먹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떡에 가치에 매몰 되어서 하나님을 잊게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 뱀의 가르침을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우리 몸뚱이가 편한 것을 좇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편하면 더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은 좋은 것과 편한 것을 이기지 못해요.

좋은 것과 편한 것을 이길 장사가 없어요.

우리 몸이 그걸 원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과 편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잊게 만들어요.

몸이 편하면 내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 잊게 되어요.

구원해 주신 이유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의 가치로 살지 말고 언약을 위하여 살라고 간섭하세요.

이 간섭하심이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간섭하심 때문에 언약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에게 죄가 뭐냐?

언약을 잊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왜? 애굽에서 건져내어서 가나안 땅에 우거케 하였는지를 잊는 겁니다.

몸 편함이 주객을 전도 시키고 만 것입니다.

이걸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32장을 보세요.

 

신 32:15-18절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神), 근래에 일어난 새 신(神),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여수룬이 살찌매 바로 찼도다 라고 하지요.

살찌고 윤택하니까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다고 하지요.

즉 배가 부르니까 눈에 뵈는게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미혹하는지를 살펴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빼낸 것은 떡을 주고자 함이 아니고 너희가 사는 이유는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자 함입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고자 광야로 빼냈어요.

광야는 교회와 같아요.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났어요.

애굽에 가치로 살았어요.

애굽에 가치는 떡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떡이 없는 광야로 빼냈어요.

그리곤 하늘에 만나를 주십니다.

또한 율법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늘에 만나를 주신 것은 너희들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만나는 먹고 배부르게 하는 육신의 떡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기는 배부를 때입니다.

기독교가 물량적으로 부흥 할 때가 가장 타락할 때에요.

이건 역사가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어렵고 힘들 때가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때였고,

등 따습고 배부르니까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가치는 떡이었어요.

먹고 마시는 것이었어요.

 

노아의 때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한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은 잊고 먹고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구원을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에만 궁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어요.

이건 교회에 대한 경고에요.

성도들에게 대한 경고에요.

노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한 것은 언약을 잊고 자기 좋은 것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자기 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가 이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경고한 것처럼 바울이 신약의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말합니까?

교회에게 말하고 있어요.

 

여러 번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눈물 흘리면서 말하였다고 합니다.

무얼 말했는가요?

떡을 위하여 살지 말라고 말하였어요.

 

떡을 위하여 사는 자는 십자가 원수라고 합니다.

예수를 누가 죽였느냐?

떡을 달라고 하던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지금도 떡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가치관의 전환을 일으켜 주시는 겁니다.

 

떡에 가치로 살던 자들을 언약의 가치로 살게 하세요.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은 떡의 가치로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떡의 가치로 살지 않고 언약의 가치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흙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흙에 가치를 벗어나 하늘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땅에 기운으로 살지 않고 하늘에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흙에 가치로 사는 한 저주 받은 땅에서 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어요.

구약교회 안에 떡에 가치로 사는 자들을 풀어 주려고 오셨어요.

신앙생활이란? 떡에 가치로 살던 자들이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말씀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가치관을 바꿔 주는 일을 하세요.

자족하게 하세요.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들은 가진 바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666에 대하여 말합니다.

받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떡에 가치로 사는 자는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자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베리칩이 666이냐 아니냐 는 중요치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느냐 없느냐 에요.

666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들은 다 받게 되어 있어요.

 

반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은 받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약속이에요.

이 약속이 믿어지는 성도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요.

 

그 안에 가이사가 그려져 있는 사람은 가이사를 왕으로 따를 것이고,

그 속에 하나님이 그려져 있는 성도는 하나님을 왕으로 따르게 되어 있어요.

 

우린 무엇이 귀신의 가르침인지 아는 자들이에요.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가치로 사는 자들이 아니에요.

비록 몸이 그것을 원하지만 우린 그 가치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떡이 가치로 살지 않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떡에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떡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광야 같은 길에도 부족함 없이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을 봅시다.

 

신 6:4-1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 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들어가는 땅은 너희가 잘나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셔서 넣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가면 너희가 건축하지 않은 집에 거할 것이고,

너희가 심지 않은 포도원의 실과를 먹을 것이며,

너희가 파지 아니한 우물 물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고 이 사실을 주지 시켰어요.

 

수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수 24;13-14=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는 가나안에서 살아갈 백성들에게 유언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정착 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언약 하신 것을 이루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우리가 지금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에 거하고 있으며 우리가 심지 않는 것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비록 자기는 늙어서 하나님 품으로 가지만 남아 있는 너희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라고 합니다.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합니다.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 어떤 신인가요?

마귀에요.

뱀이에요.

귀신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떡에 가치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사십년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았어요.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에요.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이에요.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 이스라엘만 그러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일생을 돌아보세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살아온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간섭하심으로 왔어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해 오신 증거들이에요.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하신 수많은 간증거리들이 있어요.

 

잘 살고 못 살고를 따지지 말고 지금 내가 이 만큼이라도 핍절치 않고 살고 있음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믿음으로 받으면 범사가 감사할 일들이에요.

 

성령은 자족하는 마음을 주세요.

성령께서 자족케 하시니 자족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떡의 가치를 추구하는 뱀 사상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에 요만큼이라도 자족하면서 감사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감사 아닌 것이 없어요.

다 감사할 일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을 주시고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과 귀와 마음이 활짝 열려져서 범사 속에서 감사하는 삶이 살아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뒤돌아보면 감사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감사거리들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은혜의 에벤에셀의 돌들을 감사로 우리 안에 하나둘씩 쌓아가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여서 귀신의 가르침에 미혹당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